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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뒤흔든 21세기 시민혁명과 언론 ④ 이탈리아

“세계 최강의 로마제국 후예들도 한낱 ‘장사꾼’이 언론을 장악하면 얼마나 國格을 타락시킬 수 있는지 경험했다”

글 : 문갑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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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년간 파시즘으로 이탈리아를 세뇌시킨 무솔리니가 언론 탄압의 원조
⊙ 49년 뒤 등장한 베를루스코니는 아파트 사업하며 ‘홍보’ 수단으로서의 언론에 주목… 방송사 줄줄이 사들여
⊙ ‘언론 私有化’ 뒤 정계 진출… 자기 방송 이용해 자기 선전하며 총리직에만 3번 올라
⊙ 정권 잡은 뒤에는 비판 언론 입막음하거나 금전 제공하며 자기 신문에 유리한 칼럼 쓰게 해 기자들 길들이기
⊙ 보도지침 내용은 ‘샌드위치’, 야당 입장은 중간에 살짝 걸친 뒤 앞뒤로 자기 입장만 주장
⊙ 선정성 높은 프로그램으로 국민들 愚民化… 젊은 여성들은 정계 진출의 디딤돌로 삼기도
지난 2월 총선을 앞두고 밀라노에서 열린 집회에서 연설하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이탈리아 총리. 언론을 사유화하고 그 힘을 바탕으로 정권을 잡았다. 사진=뉴시스/AP
  이탈리아는 역사상 최강의 국가였던 ‘로마제국’의 후예지만 1400년 넘게 분열을 거듭해 왔다. 395년 테오도시우스 황제 때 동서(東西) 로마제국으로 분열됐고 서로마제국은 476년 게르만 출신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했다. 지금의 터키 땅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에서 천 년 가까이 버텼던 동로마제국(비잔티움)은 1453년 이슬람에 정복됐다.
 
  이후 이탈리아 땅은 동고트족, 롬바르드족, 프랑크왕국, 신성로마제국이 번갈아 통치하다 지방 영주들이 통치하는 도시국가로 나뉘었다. 그 대표적인 도시국가가 베네치아, 제노바, 파비아, 밀라노, 피렌체 등이다. 이들 도시국가는 르네상스 시기, 수준 높은 학문과 예술을 뽐냈으나 도시국가라는 한계 때문에 인근 신흥 열강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서로마제국을 기준으로 이탈리아 반도가 통일된 것은 1870년이다. 워낙 저력이 있었기에 이탈리아는 금세 G7에 포함될 만큼 성장했지만 통일 후 118년 동안 언론에는 두 차례의 암흑기가 있었다. 첫 번째는 파시즘을 탄생시킨 베니토 아밀카레 안드레아 무솔리니(1883~1945)가 이탈리아를 통치할 때였다. 파시즘은 정의(定義)가 쉽지 않은 용어다.
 
  쉽게 말하자면 엘리트에 의한 국가 지배, 민주주의에 대한 반대, 계급 질서의 보호와 계급 간 협동의 강조, 평등에 대한 반대 등이 골자인데 무솔리니는 이 이념을 플라톤의 저서 《국가》에서 가져왔다고 했지만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이념임을 알 수 있다. 파시즘에 이탈리아인들이 열광한 것은 옛 로마제국의 부흥(復興)이라는 간절한 소망 때문이었다.
 
  무솔리니가 통치했던 21년 동안, 가정과 거리에 무솔리니의 교시(敎示)가 범람했다. 파시즘을 막아야 할 언론이 오히려 “파시즘이야말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대신하는 20세기의 절대 이념”이라고 선전했고 이를 바탕으로 학교, 영화계가 파시즘을 국민들의 머릿속에 심는 데 열중했다. ‘제2의 무솔리니’가 등장하는 데는 채 50년이 걸리지 않았다.
 
 
  부동산사업 하다 방송사 설립
 
베를루스코니가 소유하고 있는 카날레5, 이탈리아1, 레테4는 베를루스코니가 정치에 입문한 후 그의 나팔수가 됐다.
  1994년 전후(戰後) 첫 우파 정권을 수립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1936년생)가 그 주인공으로, 그는 평소 “무솔리니를 존경한다”고 공개적으로 말했던 인물이다. 베를루스코니는 밀라노 중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은행원이었던 아버지 루이지 베를루스코니와 어머니 로사 보씨 사이에서 세 자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베를루스코니는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학교를 거쳐 밀라노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후 첫 사업으로 3500개의 아파트로 구성된 가든 시티 ‘밀라노2’를 건설했다. 베를루스코니가 언론을 주목하게 된 것은 이 ‘밀라노2’를 선전하는 데 방송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한 직후였다. 베를루스코니는 1973년에 텔레밀라노라는 케이블 TV 회사를 세웠다.
 
  1974년 9월 텔레밀라노의 첫 송출이 시작된 뒤 베를루스코니는 두 개의 채널을 더 구입했으며 1997년 방송국을 밀라노로 옮겨 지상파 방송을 시작했다. 베를루스코니는 1978년 그의 첫 미디어 그룹 핀인베스트(Fininvest)를 설립했다. 이 회사를 통해 베를루스코니는 1130억 리라를 벌었는데 이는 1997년 기준 2억6000만 유로에 해당하는 막대한 금액이었다.
 
  한때 이탈리아 검찰이 이 회사의 자금 조달 구조를 수사했다. 워낙 형태가 복잡해 실체를 잡지 못했고 핀인베스트는 오히려 TV망을 이탈리아 전역으로 넓혔다. 베를루스코니는 이후에도 1980년 이탈리아의 첫 민영 전국 방송 ‘카날레 5’를 세웠고 1982년 ‘이탈리아 1’, 1984년 ‘레테 4’ 등의 방송국을 사들이면서 막강한 ‘언론 로마제국’을 구축하기에 이른다.
 
  현재 베를루스코니가 가진 주요 회사 ‘미디어셋’은 전국 시청률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3개의 TV 채널과 이탈리아 최고의 광고 홍보 에이전시인 ‘퍼블리탈리아’로 구성돼 있으며 ‘아르놀도 몬다도리 에디토레’라는 이탈리아 최대의 출판사와 영화 및 홈비디오 배급 회사(메두사와 펜타), 보험 및 은행(메디오라넘과 메디오방카) 등의 기업도 보유하고 있다.
 
  사업가가 언론을 장악했을 때의 폐단이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993년 9월 25일 핀인베스트 총수 베를루스코니는 편집 고위 간부들을 불러 모아놓고 정계 진출 의사를 공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절대 다른 목소리가 나와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단합된 목소리를 내야 한다. 제작 책임자 모두 자율성을 갖되 하나의 곡을 연주해야 한다. 절대 다른 목소리가 나와서는 안 된다. 기자 한 사람 한 사람, 언론사 하나하나가 우리한테 이득이 되는 일이 무엇인지 확고한 신념을 갖고 일해 주기 바란다. 우리를 근거 없이 공격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우리 미디어 그룹 모두가 나서서 반격해야 한다.”
 
  언론을 사유화(私有化)한 것이다. 그 회의가 있은 지 7개월 뒤 그는 이탈리아 제73대 총리로 선출됐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이 같은 정계 진출 의사가 담긴 화면이 자기가 소유한 언론기관을 통해 동시에 지속적으로 보도됐다. 집권한 뒤 베를루스코니는 자신의 정치활동에 있어서 최대 걸림돌이자 강력한 비판 세력이었던 국영방송 라이(Rai)를 장악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를 비판했던 방송인들은 해고됐고 그를 풍자한 만평가들은 화면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 빈자리들은 그에게 충성을 바친 인사들에게 돌아갔다. 이렇게 되자 이탈리아에서는 베를루스코니 소유의 방송을 비롯해 3개의 국영방송 채널에서 똑같은 논조의 방송이 나오기에 이르렀다. 요즘 우리나라 방송계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가 강요한 보도지침은 ‘샌드위치’라고 불린다. 이 지침에 따라 모든 뉴스는 베를루스코니 개인의 입장→정부의 입장→야당의 입장→정부의 반박이라는 구성이다. 야당 입장이 마치 샌드위치처럼 파묻히고 베를루스코니의 입장만 강조하는 형태다. 실제로 한 조사에 따르면 국영방송에서 베를루스코니 개인에 대한 뉴스가 50% 이상이었는데 야당 뉴스는 20%대였다.
 
  베를루스코니가 유엔총회 연설을 할 때 이탈리아 국영 TV는 화면 조작까지 감행했다. 베를루스코니가 연설을 할 때 텅 빈 청중석 대신 코피 아난 사무총장의 연설 때 꽉 찬 청중석 장면을 끼워 넣어 그가 박수갈채를 받는 듯 보도한 것이다. 이런 조작으로 베를루스코니는 78대 총리(2001~2006년), 80대 총리(2008~2011년)를 재임했다.
 
  그 결과는 언론 조작을 통해 정치 권력뿐 아니라 막대한 부(富)도 축적한 것이었다. 정계 진출을 결심하기 전 그는 1993년 여름부터 여론조사를 실시했는데 한 조사는 유권자들 사이에서 베를루스코니의 지명도가 97%인 데 반해 현직 총리 카를로 아첼리오 참피의 지명도는 50%로 나타났다.
 
  학생을 대상으로 한 인물 선호도 조사에서는 베를루스코니가 1위, 영화배우 아널드 슈워제네거와 예수가 2, 3위를 차지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벌어졌다. 이를 두고 밀라노대 레나토 만하이머 교수는 “베를루스코니는 계급 이익과 이념(공산주의, 가톨릭, 노동, 자본)에 바탕을 둔 구정치 시대가 끝났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보다도 더 잘 알아챈 것”이라고 말했다.
 
 
  표의 향방은 어떤 TV 오래 보느냐에 달려
 
이탈리아의 명문 축구구단 AC밀란도 베를루스코니 소유다.
  이탈리아 유권자들은 계급이나 사회적 그룹을 투표 기준으로 삼았는데 노동자는 공산당에 투표하고, 농부는 기독교민주당에 투표하는 식이었다. 이 전통적인 지지 기준이 무너지면서 갑자기 수천만 명의 유권자가 임자 없는 부동층으로 부상하게 된 것을 맨 먼저 눈치챈 베를루스코니는 미국식 선거 모델에 주목했다.
 
  그는 미국의 첫 번째 배우 출신 대통령이 된 로널드 레이건의 매력과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돌풍을 일으켰던 로스 페로의 선거전략을 면밀히 분석한 뒤 새로운 모습을 선보였다. 즉 선거유세 기간 중 가수나 토크쇼 진행자처럼 마이크를 손에 들고 무대 위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이었다. 그는 포르차 이탈리아(Forza Italia)당을 창당했는데 의미심장하다.
 
  이는 축구 팬들이 국가대표팀을 응원할 때 쓰는 구호로 “가자, 이탈리아(Go, Italy!)”라는 뜻이다. 당원은 ‘글리 아추리(gli azzurri)’라고 불렸는데 이는 이탈리아 축구 대표팀을 가리킨다. 그가 명문 프로축구팀 AC밀란을 사들인 것도 축구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정치에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1994년 총선 때 그가 AC밀란을 왜 사들였는지 의도가 드러났다.
 
  경쟁한 경제전문가 루이기 스파벤타와의 토론에서 베를루스코니는 그의 질문을 외면한 채 갑자기 “당신은 대륙간컵 대회에서 몇 번이나 승리한 적이 있나? 나와 싸우려면 최소한 국내 챔피언전 우승이라도 몇 번 하고 나오라!”고 외쳤다. 지도자 자질 검증과는 무관한 말로, 자신은 ‘행동하는 사람’ ‘승리자’로, 다른 후보자는 ‘나약한 학자’로 내몰았다.
 
  베를루스코니가 1994년과 2001년 선거에서 승리한 뒤 이탈리아 유권자들의 투표 성향이 크게 변화한 것으로 확인됐다. 베를루스코니가 전통적인 좌파 지지층인 노동자와 젊은이들에게서 괄목할 지지를 얻어낸 것이다. 베를루스코니는 유권자들의 표의 향방은 더 이상 계급이나 교회단체가 아니라 어떤 TV 채널을 얼마나 오래 보느냐 하는 문제라는 것을 알아챘다.
 
  실제로 베를루스코니의 미디어셋 채널을 보는 사람들은 베를루스코니를 지지했고 국영방송 라이 시청자들은 다른 당 지지 경향을 보였다. TV 시청시간이 길수록 베를루스코니 지지 성향이 강했다. 베를루스코니가 소유하고 있는 미디어셋은 2008년 총선에서 두 가지 사회적 이슈를 집중 보도했다.
 
  첫 번째가 집시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보도로 ‘불안감’을 조성해 보수의 표심을 흡수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좌파의 텃밭인 남부 농업 지역의 표를 분산시키기 위해 세계 3대 미항인 나폴리의 ‘쓰레기 대란’과 ‘다이옥신 치즈’ 문제 등을 집중보도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유권자들은 이탈리아를 쓰레기처럼 망친 좌파 정권에 등을 돌렸다.
 
 
  정부·여당이 공영방송 이사 2/3 차지
 
《일 조르날레》는 베를루스코니의 정적들을 공격하는 데 앞장섰다.
  2004년 이전까지 이탈리아의 방송시장은 공영방송 라이가 45%, 베를루스코니 소유 3개 민영채널이 44%를 점유하고 있었다. 공영방송 장악을 위해 베를루스코니는 라이 이사의 3분의 2를 정부 여당이 선임하도록 규정한 2004년 ‘가스피리법’을 추진해 방송을 독점 통제했다.
 
  베를루스코니와 그의 측근들은 판사 매수혐의부터 마피아와의 공모혐의 등으로 기소됐는데 아예 언론들을 동원해 수사 당국 무력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베를루스코니 소유의 대표적인 채널인 카날레 5는 비토리오 스가르비가 진행하는 20분짜리 프로그램을 매일 내보냈는데 그는 프로그램 시간의 거의 전부를 베를루스코니를 수사한 검사를 공격하는 데 할애했다.
 
  스가르비는 밀라노의 반부패 캠페인에 가담한 치안판사들을 공격하면서 한번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깨끗한 손 캠페인에 가담한 검사들을 모두 체포해야 한다. 이들은 우리의 민주적 질서를 뒤집는 것을 목표로 삼는 살인면허를 가진 범죄자들이다.” 여기에는 베를루스코니가 소유한 신문 《일 조르날레(Il Giornale)》도 가세했다.
 
  《일 조르날레》는 베를루스코니의 친구이자 선거 매니저인 인사를 마피아와 공모혐의로 재판에 회부한 팔레르모 검찰총장을 ‘암살단 두목’이라고 불렀다. 베를루스코니는 자기 소유가 아닌 다른 매체의 언론인들도 매수했다. 라이에서 가장 비중 있는 저녁 토크쇼 진행자인 브루노 베스파가 베를루스코니 소유의 주간지 《파노라마(Panorama)》에 칼럼을 쓰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주요 국영 채널에서 베를루스코니 취재를 담당한 프란체스코 피오나티나 중도 계열 신문인 《라 스탐파(La Stampa)》와 《코리에레 델라 세라(Corriere della Sera)》의 언론인들도 베를루스코니 소유 언론의 칼럼니스트나 컨설턴트로 일하면서 따로 돈을 받아 왔다. 이는 영향력 있는 언론인이 자신들이 가장 자주 취재하는 정치인으로부터 따로 월급을 받는 것을 뜻한다.
 
 
  “이탈리아 언론은 거세당했다”
 
  그런가 하면 베를루스코니는 자신이 장악한 언론을 통해 가짜 스캔들을 자유자재로 만들어내 의회 내 수백 명의 국회의원과 국가 핵심 요직에 있는 수천 명에 달하는 관료들을 마음대로 조종했다. 예를 들어 사법부의 비리가 터져 나오면 의회 내 베를루스코니 지지자들이 해당 판사들을 청문회에 불러내자고 요구하며 나오는 식이었다.
 
  베를루스코니의 영향력 아래 있는 언론들은 의회와 정부 내 인사들의 말을 인용해 이 사건들을 대서특필하고, 그러면 정치권에서 이를 다시 확대 재생산하는 식으로 계속 끌고 나가는 것이었다. 이런 스캔들은 거의 예외 없이 몇 주나 몇 달, 몇 년 뒤면 아무 근거 없는 날조임이 드러났다. 하지만 이런 뒷소식은 베를루스코니의 언론에서는 다루지 않았다.
 
  밀라노의 반부패 수사 영웅이었던 안토니오 디 피에트로 검사도 무자비한 언론 플레이의 과녁이 됐다. 그에게 씌워진 혐의는 사실무근이었고 뇌물을 받았다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으며 재판에 회부되지도 않았다. 그 결과 피에트로 검사를 비판했던 베를루스코니의 신문인 《일 조르날레》는 결국 자신들의 보도 내용의 일부분을 취소하고 명예훼손 피해를 보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소동의 결과, 디 피에트로 검사는 거의 잊힌 인물이 되고 말았다. 이에 대해 1997년부터 2003년까지 《코리에레 델라 세라》의 주필을 지낸 페루치오 데 보르톨리는 “이탈리아 언론은 거세당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데 보르톨리는 자신이 《코리에레》 주필이던 시절 끊임없이 정치적 압력에 시달렸다고 털어놓았다.
 
  《코리에레》와 《라 스탐파》 같은 언론사의 주주들은 기업인들로, 이탈리아 정부를 상대로 사업을 한다. 《라 스탐파》의 소유주이며 《코리에레》의 주요 주주인 자동차회사 피아트는 2002~2003년 사이 파산 위기를 겪었다. 움베르토 아넬리 피아트 회장이 베를루스코니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잡지 《프리마 파기나(Prima Pagina)》는 그때 베를루스코니가 한 말을 보도했다.
 
  이 잡지에 따르면 베를루스코니는 아넬리 피아트 회장에게 “우리가 도와줄 수는 있지만 그럴 경우 《코리에레》가 총리를 묵사발 낼 것이다. 그 신문은 우리보다 당신한테 더 문제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 말은 “데 보르톨리를 쫓아내라. 그러지 않으면 어떤 도움도 주지 않겠다”는 분명한 메시지였다. 결국 데 보르톨리는 사임 압력을 받고 물러났다.
 
  이런 사례는 데 보르톨리가 처음이 아니다. 집권 중 베를루스코니는 이탈리아에서 언론의 객관성뿐 아니라 언론의 자율성까지 파괴했다. 그에게 언론기관은 친구 아니면 적(敵), 둘 중 하나였다. 어떤 언론사가 그에 관한 기소내용이나 재판에서 나온 그와 관련된 증언 등 그에게 해가 되는 기사를 보도하면, 그 언론사는 확실한 적이 됐다.
 
  적이 되면 그때부터 그 언론기관에서 보도하는 자신에 관한 적대적인 기사는 단순한 적의 공격으로 치부됐다. 따라서 베를루스코니는 자신은 물론 자신의 지지자들은 자신에게 비판적인 언론이 보도하는 자신의 비리나 검사의 기소내용까지 해명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실비오의 소녀들’
 
베를루스코니와 염문을 뿌렸던 여성들. 왼쪽부터 쇼걸 출신인 마라 카르파냐 전 양성평등기회부 장관, 스테파니아 프레스티지아코모 전 환경부 장관, 베네수엘라 출신 모델 아이다 예스피카, 전 부인 베로니카 라리오. 사진=뉴시스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실비오의 소녀들(Silvio’s Girls)’이라는 기사에서 베를루스코니가 어리고 예쁜 여자들을 이용해 자국의 정치 문화를 ‘연예 문화’로 변모시킨 과정을 다루기도 했다. 그가 정치적 기반을 확보한 것은 이탈리아의 거대 상업 TV방송사인 미디어셋을 통해 자국의 방송시장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그 보도 내용이다.
 
  “미디어셋이 방송하는 ‘켈리 체… 일칼치오(Quelli Che… IlCalcio)’라는 TV 프로그램에서는 젊고 매력적인 여자들이 미니스커트에 뾰족구두를 신고 출연해 남자 상의를 다림질하는 경연을 벌인다. 출연한 여자들은 별로 말도 하지 않고 춤도 추지 않고 옷도 거의 입지 않은 채 경연을 벌인다. 그다음 한 축구선수가 나타나 누가 다림질을 잘했는지 평가해 상을 준다. 이들 여성은 별로 특별한 것도 없는데 가슴과 허벅지를 드러내고 공허한 웃음을 짓는다….”
 
  이 프로그램은 미디어셋 소속 TV에 의해 20여 년 전부터 방송되고 있다. 흔히 시청률을 의식해서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베를루스코니의 정치를 돕기 위한 수단이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그는 이탈리아의 TV 문화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검약과 절제를 중요시했던 가톨릭 전통을 권력 놀음과 성, 사치 등을 주로 하는 문화로 타락시켰다고 《타임》은 평가했다.
 
  베를루스코니식 TV 문화의 중심에 ‘벨리나(velina)’가 있다. 벨리나는 이탈리아어로 ‘쇼걸’을 의미한다. 어떤 벨리나는 프로그램 중 가만히 웃기만 하고, 다른 벨리나는 랩댄스를 추면서 다른 출연 인물들과 수다를 떨고, 또 다른 부류는 시시한 게임을 하거나 몸에 달라붙는 옷을 입고 찬물로 샤워를 한다.
 
  그런데도 이탈리아의 젊은 여성들은 이 프로그램에 나오려고 몰려들고 있다. 그 이유를 묻는 설문조사에서 젊은 여성들 다수는 “벨리나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답했다. 벨리나 희망자인 안나 데폴리는 “내가 벨리나가 되면 프로그램에 출연한 유명 축구선수를 알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들과 결혼해 부자도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심지어 여성들이 정계로 향하는 수단으로 이 프로그램을 이용한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베를루스코니와 염문을 뿌린 노에미 레티치아라는 여성은 한 인터뷰에서 “나는 벨리나가 되고 싶었다. 정치를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레티치아는 “내가 정치를 하면 ‘파피 실비오(아빠 실비오)’가 뒤를 봐줄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베를루스코니가 한 벨리나를 실제 정치에 입문시켰다는 사실이다. 토플리스 댄서이며 벨리나였던 마라 카르파냐가 양성평등기회부 장관으로 임명된 것이다. 그런가 하면 다른 4명의 벨리나는 유럽연합 의회 의원 후보로 지명되기도 했다. 언론이 사업가에 장악되면 비록 선진국이라도 어떻게 타락하는가를 이탈리아만큼 잘 보여주는 사례는 없을 것이다.⊙
 
  〈후원: 한국언론진흥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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