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제는 실질적으로 포로 신세… 을사조약은 황제의 裁可 받지 않았다”
⊙ 보어전쟁·러일전쟁 등 취재… 말년에는 인도 식민지 정부 관리로 근무
⊙ 고종, 스토리에게 자신이 암살당하지 않게 도와달라고 호소
⊙ “주한 일본공사였던 하야시가 私的으로는 이 편지가 궁중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주한 영국총영사 헨리 코번)
⊙ 보어전쟁·러일전쟁 등 취재… 말년에는 인도 식민지 정부 관리로 근무
⊙ 고종, 스토리에게 자신이 암살당하지 않게 도와달라고 호소
⊙ “주한 일본공사였던 하야시가 私的으로는 이 편지가 궁중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주한 영국총영사 헨리 코번)
고종의 노력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극적인 사건은 1907년 6월 헤이그 밀사(密使) 파견이다. 이준(李儁)을 비롯한 밀사 3명이 만국평화회의 개최지까지 갔으나 일본의 방해와 열강의 냉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준은 현지에서 분사(憤死)하고 말았다. 이준의 죽음은 국내에서 ‘자결’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는데,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고종의 밀사 파견 책임을 물어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도록 강요했을 뿐 아니라, 대한제국의 군대까지 해산시켰다.
그런데 헤이그 밀사 파견보다 한 해 먼저 고종의 또 다른 밀서 사건이 있었다. 영국 기자 더글러스 스토리(Douglas Story)에게 전달한 밀서를 런던의 일간지 《트리뷴(The Tribune)》이 보도하면서 논란이 길게 이어졌던 사건이다. 고종은 이 밀서에서 자신은 을사조약에 도장을 찍지 않았으므로 일본이 그 조약을 근거로 벌이는 모든 행위는 인정할 수 없으며, 앞으로 5년간 열강국의 보호통치를 바란다고 했다. 일본이 배타적으로 한반도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열강의 도움을 요청하고 일본의 침략이 부당하다는 사실을 널리 알려 국제 여론을 환기시키려는 시도였다.
영국 신문은 고종의 밀서 원본을 사진까지 제시하는 기사로 보도했다. 국내에서도 《대한매일신보》가 밀서 사진을 전재(轉載)했다. 이 밀서는 1년여에 걸쳐 고종의 뜻과 한국민의 입장을 국내외에 설득력 있게 홍보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물이었다. 하지만 통감부는 밀서라는 문건이 가짜라고 주장했다.
1985년 《월간조선》에 발표
필자는 스토리의 밀서 사건을 을사늑약(乙巳勒約) 80주년이던 1985년 《월간조선》 11월호에 발표했다. 한국홍보협회가 발행한 일어(日語) 잡지 《アジア公論》(1986년 4월)은 필자의 《월간조선》 논문을 〈高宗ノ密書トイギリス人密使〉라는 제목으로 번역 게재했다. 1년 뒤에 출간한 필자의 저서 《대한매일신보와 배설》(나남출판, 1987, pp.226~239)에는 학술적인 형태로 각주까지 달아서 사건의 경위를 밝혀두었다. 영국 국립문서보관소의 외교문서도 찾아보고 스토리 기자가 소속된 《트리뷴》의 지면을 조사하고 그의 기사를 찾아내어 사건의 상세한 경위를 추적한 것이다.
국가보훈처는 2015년 스토리 기자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追敍)했다. 필자가 스토리의 밀서 사건을 추적 소개한 지 30년 만이었는데, 필자 책의 내용을 토대로 그의 공적을 평가한 것이다. 영국인 기자로 훈장을 받은 또 다른 언론인은 《대한매일신보》 발행인 배설(裵說, Ernest Thomas Bethell, 1968년, 건국훈장 대통령장)과 《데일리 메일(The Daily Mail)》 기자 매킨지(F.A.McKenze, 2014년, 건국훈장 독립장) 두 사람이다.
배설에 관해서는 필자가 오랜 노력 끝에 저술한 《대한매일신보와 배설》에 그의 항일(抗日) 행적과 재판, 복잡한 외교 사건을 상세히 밝히고 종래의 오류도 바로잡아 널리 소개가 되었다. 하지만 스토리라는 인물에 관심을 기울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재미교포 권민주는 스토리의 원저 《동양의 미래(Tomorrow in the East)》 가운데 한국 관련 부분만 번역하여 《고종황제의 밀서》(글내음, 2004)라는 책을 낸 적이 있었다.
스토리 기자가 보도한 밀서는 1년이 넘는 기간에 걸쳐서 영국·한국·일본·중국의 신문이 보도하였을 정도로 오랜 파장을 남기면서 공개적인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국내에서 영국인이 발행한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Korea Daily News)》도 밀서를 보도하여 일본의 침략에 반대하는 고종의 진의(眞意)를 널리 알렸다. 《대한매일신보》는 물론 항일 독립운동에 영국 언론이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 필자의 흥미를 유발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앞서 말한 대로 필자는 1985년 《월간조선》 11월호에 스토리 밀서 사건의 경과를 밝히는 글을 발표했지만 마음속에는 미진하다는 생각이 남아 있었다. 밀서를 전파한 스토리 기자가 어떤 인물인지 늘 궁금했던 것이다. 하지만 어떤 확실한 근거를 찾지는 못한 상태로 34년의 세월이 흘렀다. 기회 있을 때마다 시도해보았지만 어떤 실마리가 잡히지는 않았는데, 이번에 드디어 그에 관한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는 영국의 자료들을 확보하여 소개해보고자 한다.
스토리는 어떤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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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종군기자 더글러스 스토리. 러시아군을 따라 만주 지역에서 러일전쟁을 취재하던 모습. |
영국에는 한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국가에 신고하는 세 가지 기본 사항이 있다. 출생·결혼·사망 등록이다. 우리나라에도 같은 제도가 있지만 영국은 그런 기록이 잘 보존되어 있다. 또 10년 단위로 인구조사를 실시하기 때문에 출생 이후의 가족관계도 살펴볼 수 있는 기본 자료가 축적되어 있다. 35년 전 1980년대에 필자가 배설을 연구하던 때에는 손으로 쓴 인덱스에서 기록을 찾아내어 복사하는 번거로움을 거쳐야 했는데 지금은 많은 자료가 데이터베이스화되어 있어서 인터넷으로 검색할 수 있는 경우도 많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방법을 터득하고 나면 조사와 연구에 큰 도움이 된다.
더글러스 스토리는 전쟁과 국제문제 전문 종군기자로 영국에서도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었다. 남아프리카에서 영국과 트란스발공화국이 벌인 보어전쟁(Boer War·1899~1902) 때부터 종군기자로 활동했고, 러일전쟁 때에는 러시아군을 종군하여 《쿠로파트킨의 군사작전(The Campaign with Kuropatkin)》이라는 책을 쓴 기자였다. 우리와 관련된 저서는 《동양의 미래(Tomorrow in the East)》인데 고종의 밀서 사건과 일본의 한국 침략을 비판적으로 기록한 저서다.
하버드대학 동아시아연구소가 발행한 《중국의 서양인 발행 신문 관련 안내서》(Frank H.H. King & Prescott Clarke, A Research Guide to China-Cast Newspaper, 1822~1911, East Asian Research Center, 1965)에는 스토리가 1903년 홍콩에서 창간된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South China Morning Post, 1903~1911)》 부편집장이었다는 아주 간략한 정보가 기록되어 있다. 이듬해 편집진이 바뀔 때 스토리의 이름이 없는 것으로 보아 스토리는 창간 당시에 참여하고 오래 근무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자신을 ‘늘 세계 각지를 여행하는 사람(globe-trotter)’으로 표현한 스토리는, 10여 년에 걸쳐서 종군기자·특파원 자격으로 동양 여러 나라를 지켜보았다. 홍콩 일간지 편집자였으며, 베이징에 머물기도 하였다.
더글러스 스토리로 알고 있던 그의 정식 이름은 로버트 더글러스 스토리(Robert Douglas Story)였다. 흔히 맨 앞의 로버트는 생략하고 불렀고, 더러는 로버트 D. 스토리로 기록된 경우도 있었다.
출생일: 1872년 12월 31일
아버지: 대니얼 프레이저 스토리(Daniel Fraser Story)
어머니: 제인 스커빙 데이브(Jane Skirving Dave)
출생지: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 근처 미들로디언(Midlothian)
영국은 10년마다 전국 인구조사를 실시하였는데, 1881년 자료를 보면 스토리는 이때 9세로 잉글랜드 북동부 소재 노섬벌랜드(Northumberland)에 사는 아저씨 윌리엄 덴턴(William Denton)의 집에 거주하고 있었다. 노섬벌랜드는 북쪽으로 스토리의 본가가 있는 스코틀랜드에 접하고, 동쪽은 북해에 면한다.
아저씨의 직업은 ‘학자(scholar)’로 되어 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직업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떤 학교에 재직 중이거나 학문적인 직업에 종사한 것 같다. 스토리는 아저씨 집에서 학교에 다녔던 것으로 추측된다. 10년 뒤인 1891년 인구조사 때의 스토리는 19세로, 출생지인 미들로디언 본가로 돌아와서 의학을 공부하는 학생(medical student)이었다. 아버지 대니엘은 47세, 어머니 제인은 43세였다.
보어전쟁 취재한 종군기자
25세던 1897년 무렵에 스토리는 남아프리카와 관련된 경험을 쌓은 기자로 런던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스토리는 남아프리카 유명 정치인이자 기업가인 제임스 시브라이트(James Sivewright) 경이 아프리카에서 벌이는 사업과 정치인으로서의 활동을 소개하는 글을 《스코츠 폴리티컬(Scots Political)》이라는 주간지에 실었다. 이때 스토리는 남아프리카 신문 《요하네스버그 스탠더드 앤드 디거스 뉴스(The Johannesburg Standard & Diggers News)》 편집장으로 재직 중이었고, 거주지는 런던의 이즐링턴(Islington)이었다.
2년 뒤 1899년 남아프리카에서 영국과 트란스발공화국의 보어전쟁이 일어나자 영국에서는 전쟁 관련 뉴스에 관심이 높아졌다. 스토리는 더 주목받는 언론인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스토리는 《중재냐, 전쟁이냐?(Arbitration or War)》라는 팸플릿의 주(主) 저자였다. 이때는 《요하네스버그 스탠더드 앤드 디거스 뉴스》 편집장을 그만둔 상태였지만, ‘전쟁종군기자(war correspondent)’로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1899년에서 1901년 초 사이에는 《데일리 메일(The Daily Mail)》 소속 전쟁 종군기자로 영국 국방부의 허가를 받고 보어 정부의 통행증을 발급받아 남아프리카 현지에서 보어전쟁을 취재했다.
스토리는 런던으로 돌아온 직후인 1901년 4월에는 아내가 제기한 이혼 소송 법정에 서야 했다. 아내 제인 매퀸(Jane McEwen)의 주장에 따르면 스토리는 남아프리카 취재를 마치고 귀국할 때 프레다 포드(Freda Ford)라는 여자와 동행이었고, 두 사람이 시골에도 다녀왔으며 런던 자택에서도 함께 머물렀다는 것이다. 또한 스토리는 옷 입은 상태의 아내를 차가운 욕조에 빠뜨리는 폭행을 가했다고 주장했다. 재판에서 스토리는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고, 부인이 제기한 이혼은 받아들여졌다. 이혼 기사는 여러 신문에 실렸다.
일본군의 勝因은 ‘강렬한 야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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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瀋陽에서 러일전쟁을 취재하던 여러 나라 종군기자들. 왼쪽에서 두 번째가 스토리 기자. |
이듬해인 1904년 2월에 러일전쟁이 터지자 유럽과 미국의 여러 신문이 도쿄와 러시아 쪽에 특파원을 파견했다. 이때 런던의 《데일리 크로니클(The Daily Chronicle)》 특파원으로 한국에 온 배설은 서울에 남아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다. 전쟁이 터지기 전까지 홍콩에 머물고 있던 스토리는 《데일리 익스프레스(The Daily Express)》 특파원에 임명되어 영국 군함(Empress of India호)에 승선하여 러일전쟁 취재를 시작했다.
전쟁이 터진 이틀 뒤인 2월 10일 중국 산둥(山東)반도의 즈푸(芝罘)에서 전쟁 발발 기사 한 건을 보냈다. 이어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서울이 점령되다(Seoul Occupied, Korean Fears)’라는 또 다른 기사를 보냈다. 두 건의 기사는 《노던 휘그(The Northern Whig)》지에 실렸다.
스토리가 시모노세키를 거쳐 나가사키에 닿은 날은 2월 15일이었다. 거기서 도쿄로 갔다가 다시 상하이로 돌아와서 중국의 항구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취재를 계속했다.
스토리는 원래 일본에서 한국으로 건너와서 일본군을 종군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허락이 오래 떨어지지 않자 계획을 바꾸어 러시아군을 종군하게 되었다. 그는 중국 해안을 거쳐 만주 지역에서 여러 달 러시아 야전군과 생활하면서 10월까지 러시아군을 취재했다.
그는 전쟁이 끝나기 전인 1904년에 종군기(從軍記) 《쿠로파트킨의 군사작전》을 출간했다(쿠로파트킨은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 극동군 총사령관-편집자 註). 이 책에는 자신이 찍은 여러 장의 사진을 삽입했고, 전쟁 초기 두 나라의 전함 보유량을 비교하고 러시아군 지휘관들의 프로필을 소개하는 등, 러시아군 쪽에서 본 전쟁의 경과를 종합적으로 기술(記述)했다. 스토리는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한 요인은 일본군 지휘관들의 과학적이고 지성적인 능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전투에 임하는 일본군의 ‘강렬한 야만성(barbarism)’ 덕분이라고 기술했다. 일본군의 전투력이 서양 군대보다 우월했던 요인은 병사들의 ‘광신적인 애국심(fanatical patriotism)’인데 세계 어느 나라 군대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평가한다.
스토리, 서울에 오다
스토리는 마침내 1906년 1월에 《트리뷴》의 특파원 자격으로 한국에 첫발을 디뎠다. 《트리뷴》은 스토리가 한국에 오던 바로 그때인 1906년 1월 15일 런던에서 창간된 젊은 신문이었다. 소유주는 볼턴(Bolton) 지방 방직업자의 상속자던 자유당 소속 젊은 국회의원 프랭클린 토마손(Franklin Thomasson)이었다. 고급지(高級紙)를 지향하여 젊은 지식인들 사이에 큰 주목을 끌었지만 경영은 어려워서 창간 2년 뒤인 1908년 2월 8일 폐간했다. 이 신문이 실패한 원인은 신문기업의 현실을 무시한 것이 이유였다. 논설에 주력한 반면, 신문이 다루어야 할 뉴스에 소홀했기 때문에 독자들에게는 지나치게 고급지인 것이 흠이었다.
스토리는 베이징에서 출발하여 상하이를 거쳐 일본 요코하마와 고베에 들러서 한국으로 왔다. 베이징에서 상하이로 오는 동안은 한국 정부의 재정고문이던 영국인 브라운(McLervy Brown)과 동행했다. 상하이에서는 한국 궁중의 측근들을 만날 수 있었다. 여기서 스토리는 한국 정세에 관한 입장을 들었고, 서울에서 고종과도 바로 통할 수 있는 통로를 트게 되었다.
일본 요코하마에서는 주한 미국공사관 서기관이던 모건(Edwin V. Morgan)을 만나 을사조약 체결 당시의 상황을 들었다. 고베에서는 통감부 총무장관으로 임명되어 한국으로 오는 쓰루하라(鶴原定吉) 일행과 동행이었다. 쓰루하라는 경찰 및 정보관계 고위관리들을 대동하고 있었다. 스토리는 부산에 내려 서울로 오는 동안 기차가 멈추는 역마다 일본인 고관들이 연설하는 모습도 지켜보았다.
서울에서는 일본 정탐꾼들이 들끓는 궁중에 유폐되어 공포에 떨고 있는 고종을 만날 수 있었다. 고종은 자신이 암살당하지 않도록 도와달라고 스토리에게 부탁했다. 스토리는 고종을 감시하는 일본 정보기관은 세계에서도 가장 민완(敏腕)하다고 평가하였다.
高宗의 密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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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매일신보》 발행인 배설. |
밀서는 여섯 항목으로 되어 있었다. 고종은 ‘을사조약에 조인하거나 동의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일본의 한국 내정 통제는 부당하며, 한국 황제는 세계 열강이 한국을 집단보호 통치[신탁통치]하되 기한은 5년이 넘지 않도록 하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스토리는 이 밀서야말로 겁에 질린 대신들이 고종의 승인 없이 조인한 보호조약보다 훨씬 더 유효한 것으로 판단했다. 스토리는 우선 이 밀서를 믿을 수 있는 ‘유럽인’에게 보여주고 두 명의 증인을 세워 편지의 사본(寫本)을 만들어 안전한 곳에 밀봉해두었다.
그가 보여주었다는 ‘유럽인’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아마 《대한매일신보》 발행인 배설로 추측된다. 영국인 배설은 국한문판 《대한매일신보》와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The Korea Daily News)》를 발행하고 있었다. 이 신문은 치외법권(治外法權)을 누리는 영국인 소유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통감부도 검열을 하거나 기사로 인한 어떤 처벌도 가할 수 없었다. 이 점을 이용해서 실제 제작은 양기탁(梁起鐸)·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 등 당대 최고의 항일(抗日) 논객들이 맡아 민족진영의 중심기관과 같은 위치에 있었다. 안전장치를 마련해둔 뒤에 스토리는 삼엄한 일본군의 경계망을 뚫고 가까스로 제물포(인천)를 거쳐 노르웨이 선적의 배를 타고 중국 산둥반도 즈푸로 탈출에 성공했다.
駐즈푸 영국영사, 밀서 복사
스토리가 즈푸에 도착한 날은 2월 8일이었다. 스토리는 우선 ‘을사조약이 일본의 강압에 의해 체결되었으며 고종의 승인을 받은 바 없다’는 요지의 기사를 런던의 《트리뷴》에 송고했다. 그러고는 즈푸 주재 영국영사 오브라이언 버틀러(Pierce Essex O’Brien-Butler)를 찾아갔다.
오브라이언 버틀러는 1880년 3월 중국어 통역사로 외무부에 발을 들여놓은 이래 25년 넘게 중국 각지에서 근무한 중국통 외교관이었다. 스토리는 오브라이언 버틀러에게 사실을 알리고, 만일의 경우에 대비한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오브라이언 버틀러는 자신이 데리고 있는 중국인들의 접근을 차단한 가운데 고종의 밀서를 스스로 복사하여 사본을 만들어두었다. 스토리가 원본(原本)을 잃어버릴 경우 버틀러가 가지고 있던 사본을 베이징 주재 영국대사 사토(Sir Ernest Satow)에게 보낼 계획이었다.
스토리와 오브라이언 버틀러가 이처럼 신경을 쓴 이유는 장차 이 문서가 목적한 바를 위해 사용되기 전에 일본 측에 빼앗기거나 스토리 자신의 생명을 잃을지도 모르는 사태를 염려했기 때문이다. 스토리가 서울을 빠져나와 중국 땅에 발을 딛기까지도 큰 난관이었지만 중국이라 하여 생명이 안전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오브라이언 버틀러는 사토에게 더글러스 스토리를 만났으며, 스토리가 고종의 ‘옥새’로 생각되는 인장이 날인된 문서를 보여주었다는 사실을 보고하는 편지를 썼다. 또한 그 문서는 ‘1905년 11월의 을사조약이 무효이며, 조선을 5년간 열강의 보호하에 두고 싶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 후에 스토리가 즈푸에서 밀서를 가지고 베이징 주재 대사 사토에게까지 갔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스토리는 사토에게 가서 이를 알리겠다고 오브라이언 버틀러에게 말했고, 오브라이언 버틀러는 사토에게 분명히 밀서 내용을 보고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다(1906년 2월 10일).
親日派 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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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駐日·駐中 영국대사를 지낸 어니스트 사토. |
직업 외교관이면서 사학자(史學者)인 사토는 경력을 보더라도 친일적(親日的) 성향의 인물이었음이 확실하다. 1861년 일본어 통역으로 외무부에 발을 들여놓은 후 첫 부임지가 일본이었다. 가고시마·시모노세키·도쿄 등지에서 오래 근무한 일본통이었다. 중간에 잠시 방콕과 모로코에서 근무한 적도 있지만, 1895년 6월부터는 주일(駐日) 영국전권대사 겸 총영사로 도쿄에 머물렀다. 1900년 10월부터 베이징 주재 대사로 부임했다가 스토리가 그를 찾아간 지 얼마 후인 1906년 10월 퇴직했다.
사토는 한국과 관련된 극동의 국제정세를 일본 시각에서 바라보았다. 그는 한국에서 아관파천(俄館播遷) 후 친러파가 득세하던 때인 1896년 5월 8일에 쓴 글에서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기 위해 그처럼 깊은 관심을 지니는 것은 한국이 고대(古代)로부터 일본 역사의 한 부분이었기 때문”이라는 그릇된 견해를 펴고 있다. 그는 또한 한국을 일본의 알자스로렌(Alsace-Lorraine)에 비유했고, 일본 입장에서 한국은 생사(生死)가 달린 문제(for Korea was to Japan a matter of life and death)라고 지적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스토리가 고종의 밀서를 사토에게 전달했더라도 본국에 보고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을사조약은 황제의 재가 받지 않았다”
이와 같이 고종의 밀서는 영국의 도움을 받거나 정치적인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하지만 한국의 처지를 국제적으로 알려준 간접적인 영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더구나 한국 안에서 일본에 반대하는 국민 여론을 환기시킨 효과는 매우 컸다.
스토리가 즈푸에서 타전(打電)한 기사는 《트리뷴》 1906년 2월8일자 3면 머리에 실렸다. 〈한국의 호소, 《트리뷴》지에 보낸 황제의 성명서, 일본의 강요, 열강국의 간섭요(Korea’s Appeal/Emperor’s Statement to the Tribune/Coerced by Japan/Powers Asked to Intervene)〉라는 제목이었다.
기사는 “한국의 지위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이며, 황제는 실질적으로 포로의 신세다. 일본군은 궁중을 둘러싸고 있으며, 궁중에는 일본 스파이들이 가득 차 있다. 을사조약은 황제의 재가(裁可)를 받지 않았다”는 리드로 시작하여 을사조약 체결의 경위와 한국의 정치 실정을 소개한 다음에 고종이 스토리에게 준 밀서 6개항과 이를 영문(英文)으로 번역하여 게재했다.
〈고종의 밀서 6개항 전문은 다음과 같다.
一. 一千九百五年十一月十七日 日使與朴齊純締約五條 皇帝게셔 初無認許又不親押
二. 皇帝게셔 此條約을 日本이 擅自頒布믈 反對
三. 皇帝게셔 獨立帝權을 一毫도 他國에 讓與 미無
四. 日本之勒約於外交權도 無據 온 况內治上에 一件事라도 何可認准
五. 皇帝게셔 統監에 來駐믈 無許고 皇室權을 一毫도 外人에 擅行을 許 미無
六. 皇帝게셔 世界各大國이 韓國外交을 同爲保護믈 願시고 限은 以五年確定
光武十年一月二十九日
THE EMPEROR’S LETTER
The letter consists of six definite amortions, and establishes Korea’s position before the world:-
Ⅰ. His Majesty the Emperor of Korea did not sign or agree to the Treaty signed by Mr. Hayashi and Pak Che Soon on Nov. 17th, 1905.
Ⅱ. His Majesty the Emperor of Korea objects to the details of the Treaty as published through the tongues of Japan.
Ⅲ. His Majesty the Emperor of Korea proclaimed the sovereignty of Korea, and denies that he has by any act made that sovereignty over to any foreign Power.
Ⅳ. Under the Treaty, as published by Japan, the only terms referred to concern the external affairs with foreign Powers. Japan’s assumption of the control of Korean Internal Affairs never has been authorized by his Majesty the Emperor of Korea.
Ⅴ. His Majesty the Emperor of Korea never consented to the appointment of a Resident-General from Japan, neither has he conceived the possibility of the appointment of a japanese who should exercise Imperial powers in Korea.
Ⅵ. His Majesty the Emperor of Korea invites the Great Powers to exercise a Joint Protectorate over Korea for a period not exceeding five years with respect to the control of Korean Foreign Affairs.
Done under the hand and seal of his Majesty the Emperor of Korea, this 29th day of January, 1906.〉
일본의 반박
스토리가 보낸 《트리뷴》 기사에 대해 영국 주재 일본대사관은 즉각적으로 반론(反論)을 제기했다. 고종이 조약에 날인하지 않은 것은 일반적인 외교 관례라는 주장이었다. 영일동맹 조약에 영국 에드워드 왕이나 일본 천황이 직접 날인하지 않고 대표자를 시켜 서명케 한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는 것이다. 주영 일본대사관은 한국 황제와 그 정부가 외국에 주재하고 있던 영사와 공사를 모두 철수시킨 것만 보더라도 황제가 조약에 동의했음을 뜻하는 증거라고 반박했다.
이에 대해 스토리는 2월10일자에 일본의 주장에 반박하는 기사를 썼다. ‘일본이 한국 황제와 대신들을 협박하여 보호조약을 체결하게 된 상세한 전말을 한국 황제의 총애를 받는 측근으로부터 받았다’고 밝혔다.
그런데 스토리가 베이징에서 보낸 을사조약 강제 체결에 관한 기사 내용은 대부분 《코리아 데일리 뉴스》가 11월 27일에 발행한 호외(號外) 기사를 전재(轉載)한 것으로 보인다.
앞서 장지연(張志淵)은 을사늑약 직후인 1905년 11월20일자 《황성신문》에 을사조약에 반대하는 명논설 ‘시일야방성대곡’과 함께 ‘오건조약청체전말(五件條約請締顚末)’을 실었다. 일본군의 검열을 받지 않고 배포한 이 논설은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 대신들을 협박하여 을사조약이 부당하게 체결되었다’는 요지였다. 영국인 배설은 《코리아 데일리 뉴스》에 《황성신문》 기사를 영문으로 번역하여 호외를 발행하였다. 스토리는 출전(出典)을 밝히지 않았지만 대부분 《코리아 데일리 뉴스》의 호외 기사를 인용한 것이다.
스토리의 《트리뷴》 기사는 《로이터 통신》이 타전하여 거꾸로 동양으로 되돌아와서 한국·일본·중국의 신문들이 받아서 게재하였다. 서울에서는 《대한매일신보》 및 《코리아 데일리 뉴스》가 2월28일자 논설란에 소개했다. 미국인 호머 헐버트의 《코리아 리뷰》도 일본에서 발행된 신문을 인용하여 ‘한국 황제가 을사조약의 신빙성을 공개적으로 부인했다’고 보도했다.
고종의 밀서가 이와 같이 여러 나라의 신문에 실리게 되자 오브라이언 버틀러는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다. 이들 기사 가운데는 즈푸 주재 영국영사 오브라이언 버틀러가 밀서가 진짜임을 확인했다는 내용도 있었기 때문이다. 또 즈푸에서도 《즈푸 데일리 뉴스(Chefoo Daily News)》가 같은 내용의 기사를 싣자 입장이 난처해진 오브라이언 버틀러는 자신이 이 밀서가 진짜라고 확인한 적은 없고, 스토리가 베이징에 이 밀서를 전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두려움을 표시했기 때문에 그의 요청에 따라 단순히 복사만 해둔 것이라고 해명하는 편지를 사토에게 보냈다. 고종의 밀서는 이처럼 여러 신문에 보도되면서 논란을 일으켰고, 한국에서는 1년이 지난 뒤인 1907년 1월 또다시 크게 문제가 되었다.
스토리는 중국을 거쳐 1906년 8월 영국으로 돌아갔다. 그 직후인 9월4일자 《트리뷴》에 다시 한 번 고종의 밀서 내용을 인용하면서 이는 틀림없이 고종으로부터 받은 것임을 ‘진실되고 독립적인 특파원으로서의 명성’을 걸고 강조했다. 이 글은 영국 《더 타임스(The Times)》의 일본특파원 브링클리가 8월8일자에 게재한 기사에 대한 반박이었다.
스토리, 《트리뷴》에 밀서 사진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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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일간지 《트리뷴》에 실린 고종의 밀서 사진. 1906년 12월1일자. |
시리즈 기사는 1회부터 7회까지는 일본에 관한 내용이고, 8회(11월 14일)부터는 ‘한국의 내일(The Future in Korea)’이라는 부제(副題)로 한국 문제를 다루었다. 한국 관계 다섯 번째 기사인 12월1일자에 문제의 ‘밀서’를 사진으로 실었다. 여기서 스토리는 밀서가 궁중으로부터 나오게 된 경위와 이것을 가지고 한국을 떠나기까지 얼마나 위험한 고비를 넘겼는지를 생생히 기술하였다. 이 시리즈는 그때까지 영국에서 보도된 한국 관련 기사 가운데 한국의 처지를 이해하는 쪽에서 쓴 가장 긴 기사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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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매일신보》는 《트리뷴》에 실린 밀서 사진을 轉載했다. 1907년 1월16일자. |
이렇게 되자 처음부터 밀서가 근거 없는 것이라고 주장해온 통감부와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을사조약 체결을 강요한 장본인 이토 히로부미는 “밀서에 대해 고종에게 자신이 직접 물어보았는데, 황제는 즉석에서 부인하더라”고 말하면서 “이 문서가 아마 궁중 근처에서 나오기는 했겠지만, 고종이 수교(手交)한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토는 자신이 이러한 변명을 해야 하는 사실 자체가 못마땅했을 것이다. 을사조약은 결코 일본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고, 한일 양국이 자발적으로 합의한 것이라고 주장해온 근거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일본의 반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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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감부는 밀서가 가짜라고 주장하면서 대응책을 논의했다. 1907년 2월 2일. |
첫 번째 조치로서 통감부는 대한제국 정부의 《관보》에 게재할 ‘고시문안(告示文案)’을 만들었다.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밀서는 고종이 수교한 일이 없으며, 이는 한일 양국의 친교를 저해하려는 불량배들이 날조한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통감부가 만든 이 ‘고시’는 1월21일자 《관보》에 실렸다. 통감부는 또한 한국 정부 외사국장(外事局長) 이건춘(李建春)으로 하여금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밀서 기사는 사실무근이니 정정(訂正)하라’는 공문을 배설에게 보내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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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감부는 고종이 밀서를 스토리 기자에게 준 적이 없다고 해명하도록 강요했다. 하는 수 없이 대한제국 《관보》는 밀서가 날조된 허위문서라고 고시하는 기사를 실었다. |
배설과 헐버트는 이 밀서가 진짜라는 주장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대한매일신보》는 “밀서가 거짓이 아님을 믿을 수 있는 증거까지 가지고 있으나 그 증거를 제시하면 관련된 한국인에게 일인의 보복이 떨어질 것이므로 이를 내놓을 수는 없다”면서 외사국장 이건춘의 기사정정 요구를 거부했다.(〈스토리氏 受書〉, 《대한매일신보》, 1907. 1. 23.)
영국, 밀서가 진짜라는 사실 인식
스토리는 《트리뷴》에 게재했던 시리즈 기사를 엮어 1907년 《동양의 내일(Tomorrow in the East)》을 출간했다. 이 책에는 고종의 밀서를 선명한 컬러사진으로 삽입했다. 그는 밀서가 진짜이며, 그 내용은 고종의 참된 뜻이라는 사실을 되풀이해서 주장한 것이다.
이때 한국의 독립을 위해 힘쓰던 헐버트는 자신이 발행하는 개인 잡지 《코리아 리뷰(Korea Review)》의 발행을 중단한 직후였다. 그는 이 잡지를 1906년 12월호까지만 발행했다. 밀서의 사진은 《대한매일신보》 1907년 1월16일자에 실렸다.
헐버트는 밀서의 진위 여부에 대한 논란을 그냥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는 《저팬 크로니클》에 글을 보냈다. 그는 이 밀서가 진짜라는 확실한 증거로서 밀서 작성의 경위를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주장했다. 또 스토리가 한국에 있는 동안 자신은 워싱턴에 머물고 있었지만, 자기도 한국 황제로부터 똑같은 내용의 전보를 받았으므로 스토리에게 준 밀서는 진짜가 틀림없다고 단정했다. 자신이 워싱턴에서 받은 전보는 미국 국무부에 제출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일본이 밀서를 가짜라고 우기는 이유는 이 문서가 일본의 한국 점령이 명백한 찬탈 행위임을 증명하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밀서가 가짜라고 계속 주장해온 일본은 물론이고, 이에 대해 아무런 태도 표명도 하지 않던 영국 측도 속으로는 이를 고종이 내보낸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주한 영국총영사 헨리 코번은 “주한 일본공사였던 하야시가 사적(私的)으로는 이 편지가 궁중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코번은 이 문서가 진짜인 것은 틀림없다면서도 이러한 밀서가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는가에 대해서는 부정적 견해를 나타내었다. 고종은 밀서가 대외적으로 공포되면 열강이 을사조약에 대한 승인을 재고할 것으로 오판(誤判)했겠지만, 밀서가 영국 신문에 실리고 그것이 다시 한국의 신문에 전재되었다고 해서 사태가 달라진 것은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고종 자신도 이것을 스토리에게 주지 않는 편이 좋았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라고 본국에 보고했다.(영국 국립문서보관소 자료, FO 262/979, Cockburn이 Grey에게, Feb 12. 1907. No.7.)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영국 외교관 코번이 정치외교상 관점에서만 이 사건을 바라보고 내린 결과론적인 평가였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이 사건이 대한정책(對韓政策) 수행에 적지 않은 장애요소가 되었다고 판단했을 것은 당연하다. 대외적으로는 일본의 한반도 침략 정책에 이미지 손상도 있었고, 한국 안에서도 반일 저항운동을 부채질한 것으로 보았다. 일본은 이와 같은 체면 손상을 막을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게 되었다. 그것은 통감부의 기관지 발행으로 구체화되었다.
말년에는 英領 인도 식민지 정부에서 근무
스토리는 종군기자 겸 저술가로 명성이 널리 알려진 후인 1909년에는 종군 특파원 생활을 접고 인도의 콜커타와 벵갈 영국 식민정부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었다. 1909년 1월에는 런던의 센트 제임스 홀에서 인도의 당시 상황에 관한 강연을 했다. 1911년의 인구조사 기록에서 39세던 스토리는 런던 근교 서리(Surry) 지역에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독신이었고, 두 명의 가정부 동거인이 있었다.
1919년 6월 7일 스토리는 인도 뭄바이에서 마리 제소프(Mary Jessop)라는 여성과 재혼했다. 1901년 29세에 이혼 후 18년 동안 독신으로 지내다가 47세에 재혼한 것이다. 1916년부터 2년간은 인도 주둔 영국군 소령으로, 1918년부터 1920년까지는 선적 통제사(shipping controler)로 근무했다. 1920년에는 선적통제사 시절의 공로로 대영제국 훈장(CBE)을 받았다.(‘A War Correspondent’s Death’, The Times, July 11. 1921.)
49세인 1921년 7월, 스토리는 인도의 기차 안에서 사망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로이터 통신》은 “유명한 언론인(well-known journalist)이자 최근까지 벵갈 정부의 공보장관(Derector of Information)이었던 스토리 소령이 라자스탄(Rajasthan)주 남동부 코타(Kotah)에서 사망한 상태로 발견되었다”는 기사를 타전했다.(A Noted Journalist Major Douglas Story Found Dead in Train, Aberdeen Daily Journal, July 11. 1921.)
《더 타임스》도 《로이터통신》을 인용하여 스토리의 사망 소식을 보도했다. 스토리의 고향과 가까운 지역에서 발행되던 《에버딘 데일리 저널》은 사망 기사와 함께 그의 생전 언론 활동을 상세히 소개했다. 이집트·태국·중국·일본·러시아·남아프리카에서 특파원으로 활동했으며, 러시아·시베리아·중국·일본 신문의 신디케이트를 대표하였고, 런던·뉴욕·요하네스버그·홍콩에서 여러 신문의 편집자로 활동하였다고 보도했다. 정확한 사망 날짜는 7월 7일이었다.
저서로 다음 네 권의 책이 있다. 《Ten Miles From Anywhere》 《The Draft of the Day》 《The Campaign with Kuropatkin》 《Tomorrow in the East》.
우리 정부는 스토리의 공로를 인정하여 201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