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인산 김일훈 선생 전기 펴낸 김윤세 ㈜인산가 회장

“인산, 죽을 사람 무조건 살려주는 게 사명이라고 생각”

  •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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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했지만, 해방 후 ‘국민 된 도리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라며 서훈 신청 안 해”
⊙ “이승만 대통령에게 ‘한방의학과 서양의학의 장점 상호 수용’ 건의”
⊙ “누구한테도 약값, 치료비 내라는 소리 하신 적 없어”
사진=(주)인산가
남원역에서 KTX 열차에서 내려 함양으로 가는 길. 첩첩산중(疊疊山中)이라는 말이 실감이 났다. ‘이러니 그 옛날 빨치산들이 이곳에 스며들어 준동(蠢動)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택시 기사에게 “옛날에는 함양 들어가기가 정말 쉽지 않았겠다”고 말을 건넸다. 칠십은 넘어 보이는 택시 기사는 “옛날에는 서울에서 함양으로 가려면 남원에 와서 차를 갈아타고 들어갔는데, 이제는 서울 동서울터미널에 바로 함양으로 가는 버스가 있어서, 택시 기사들 수입이 예전만 못하다”고 했다.
 
  지금보다 함양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어렵던 40여년 전,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이 한 노인을 찾아 이곳으로 왔다. 혹자는 그를 기인(奇人)이라고 했고, 혹자는 도인(道人)이라고 했다. 신의(神醫), 의황(醫皇)이라고 하는 이도 있었다. 당시 한 언론이 전한 풍경이다.
 
 
  ‘전국에서 모여든 환자들’
 
  대여섯 평짜리 사랑방에는 벌써 방문객 7~8명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목례를 한 뒤 먼저 온 손님들의 뒤켠에 앉아 슬그머니 김 옹을 관찰했다. 키는 160cm가 조금 넘는 듯하고 체구는 그리 크지 않지만 불그스레한 빛을 띤 얼굴은 78세의 노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동안(童顔)이다. 크지 않으나 가늘고 긴 눈, 적당히 융기한 코에 길쭉하고도 두툼한 입술, 태극무늬 모양으로 양쪽 가장자리가 쑥 벗겨져 올라간 넓은 이마가 속인(俗人)으로서 범접하기 어려운 위풍당당한 느낌을 준다. (중략)
 
  전국 각지에서 용하다는 소문을 듣고 모여든 환자, 혹은 가족들의 기구한 사연들을 담은 호소는 계속 이어진다. 40대 초반의 곱게 차려입은 한 여인은 한동안 주저 끝에 6~7세쯤의 여아(女兒)의 등을 어루만지며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이 아이는 제 딸인데, 올해 열세 살이랍니다.… 그런데 아직도 이렇게….”
 
  여인은 말을 잇지 못하고 훌쩍훌쩍 울기 시작한다. 한참 뒤 그 여인은 아이가 6~7세 되던 해 한 번 되게 앓고 난 후 키도 크지 않고 얼굴도 변하지 않은 채 계속 세월만 흘러 아이의 병(원인불명 성장 정지)을 고치기 위해 전국 용하다는 사람, 유명한 병원·한의원·요양원 등 안 가본 곳이 없다고 호소한다.
 
  “그래. 고칠 수는 있어. 그 증세의 근저에는 공해독이 어려 있는 거여. 그걸 풀고 정상적으로 자라려면 반드시 쑥뜸을 떠야 해. 그러나 매우 힘겨운 치료야….”
 
  김 옹은 힘이 들긴 하지만 그 방법대로 하면 아이의 잃어버린 6~7년의 세월을 되찾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보통 아이들보다 훨씬 튼튼하게 자랄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를 덧붙였다. 여인은 물론 그 말을 듣고 있던 아이의 얼굴에도 감동과 희망의 빛이 뚜렷했다.(《월간 경향》 1987년 7월호)

 
 
  ‘인류 절멸의 위기가 곧 닥친다’
 
인산 김일훈 선생

  노인의 이름은 인산 김일훈(仁山 金一勳·1909~1992년). 당시 그가 쓴 《신약(神藥)》은 발간 1년 만에 1만 부가 팔린 베스트셀러였다고 한다. 그가 내놓았던 수많은 ‘신비의 처방’들은 대부분 그때나 지금이나 의사들이 들으면 질색할 만한 것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대중화된 것이 있다. 바로 죽염(竹鹽)이다. 김일훈 옹의 아들 김윤세(金侖世) ㈜인산가 회장은 1987년 부친으로부터 전수받은 비법으로 죽염을 제조하기 시작, ‘죽염 산업화’에 성공했다. 김 회장은 최근 선친 김일훈 옹의 생애를 담은 《인도(仁道)-상의(上醫) 인산 행적기》를 펴냈다. 김윤세 회장을 만나, 그의 선친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인산 선생은 한마디로 어떤 분이었습니까.
 
  “하늘이 낸, 인류를 구원할 성자(聖者)였습니다. 자식이 아버지를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일방적인 예찬이고 신격화(神格化)라는 비난을 많이 들어요. 하지만 인산 선생(김 회장은 선친을 ‘인산 선생’이라고 했다)은 돈을 좀 벌어서 가족과 등 따습고 배부르게 사는 걸 생각하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늘 그분의 화두(話頭)는 ‘인류 전멸의 위기가 곧 닥칠 것인데, 내가 가르쳐준 대로 하지 않으면 절대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 ‘인류를 구원할 성자’라니…. 어마어마한 말씀이네요.
 
  “한국 사람들은 물론이고, 이곳 함양 사람들, 심지어 가족조차도 인산 선생이 어떤 분인지를 전혀 몰라요. ‘인류 전멸 위기 내가 구한다’는 말씀을 하면, 다들 촌로(村老)가 허풍 떤다고 생각했지요.”
 

  - 인류 절멸이라는 게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과거에는 원자폭탄이 인류를 전멸로 몰고 갈 것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무서운 게 바이러스 질환입니다. 약사 출신인 이상희(李祥羲) 전 과학기술처 장관도 ‘제3차 세계대전은 강대국의 군사적 충돌이 아니고 바이러스의 인류에 대한 침공이 될 것’이라면서 이에 대비해야 한다고 했어요. 코로나19는 인산 선생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조짐입니다. 바이러스 질환은 인류가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습니다.”
 
  - 이에 대해 인산 선생은 어떤 처방을 했습니까.
 
  “죽염입니다. 소금은 인류가 무궁무진하게 활용할 수 있는 자원입니다. 60여 종의 필수 미네랄을 비롯해 약 90종의 원소를 함유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약의 밑바탕에 있는 원소가 그 안에 다 들어 있는, 인산 선생께서 표현한 대로 ‘만병통치약’입니다.”
 
 
  “인산 선생, 정신세계가 워낙 달라”
 
 
인산의 전기 《인도-상의 인산 행적기》.
- 이번에 인산 선생의 전기를 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동안 인산 선생의 실체를 알리려 계속 노력해 왔지만,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아직도 그분에 대해 잘 모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분 행적을 널리 알리기 위해 《인도》를 내게 된 것입니다.”
 
  - 예수나 석가 같은 경우는 자기의 가르침을 공개적으로 퍼뜨리고 다녔고, 제자들이 그분들의 말씀을 정리해서 경전으로 펴냈잖습니까. 인산 선생은 그런 일은 하지 않았습니까.
 
  “생전에 32번의 대중강연을 하셨는데, 청중이 적게 올 때는 이삼백 명, 많을 때는 1000명, 2000명이 왔었습니다. 그때 강연 내용을 모은 책이 《신약본초 전편》입니다.”
 
  - 어떤 내용입니까.
 
  “전부 인류에 대한 걱정이었죠. 다음이 병 고치는 얘기고. 우주 자연의 법칙에 관한 얘기도 좀 하셨는데, 그건 보통 사람은 백날 얘기해 봐야 못 알아들어요.”
 
  - 예수님 같은 경우는 보통 사람들도 알아듣기 쉽게 말씀하셨는데, 우매한 대중을 깨우치려면 쉽게 말씀하셔야지 당신만 알게 말씀하시면 좀 곤란하지 않습니까.
 
  “인산 선생은 경험에 근거해서 자세하고 확실하고 알기 쉽게 말씀하셨어요. 다만 특성상 우주 자연의 진리를 얘기하는 것이다 보니, 그 깊은 뜻이 선뜻 이해되지 않는 거예요. 《성경》에도 난해한 대목이 많고, 《불경》도 처음 접하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은 게 많잖아요. 곰곰이 되씹어 보면 알게 됩니다.”
 
  - 예수님에게는 12사도가 있었고, 부처님에게도 가섭존자, 아난존자 같은 제자가 있었는데, 인산 선생에게도 제자들이 있었습니까.
 
  “제자를 기르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인산 선생의 말씀을 녹음하거나 기록하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공부하고 따르는 이들은 많았습니다. 여전히 많고요. 얼마 전에도 어떤 분이 인산 선생의 《주역(周易)》 강의를 책으로 만들어서 갖고 왔습니다.”
 
  - 인산 선생의 가르침과 관련해서 ‘경전’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나요.
 
  “제일 중요한 책은 인산 선생께서 72세 되던 1980년에 처음으로 직접 펴낸 《우주와 신약》입니다. 이듬해에 그 책을 제가 쉽게 풀어서 낸 것이 《구세신방》입니다. 그리고 제가 인산 선생의 구술(口述)을 받아 기록한 것이 1986년 나온 《신약》입니다.”
 
  - 회장님은 인산 선생의 가르침을 다 이해하고 있습니까.
 
  “인산 선생은 정신세계가 워낙 다르기 때문에, 그 말씀은 따로 가르쳐준다고 알아들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저도 어려서부터 인산 선생의 말씀을 듣고 자랐지만, 그 핵심을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된 것은 31세 때입니다. 그 이듬해에 《신약》을 낸 것이죠.”
 
 
  독립운동
 
  - 인산 선생이 독립운동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인산 선생은 16세 때이던 1924년 의주에서 친구 네 명과 당시 한국인 아이들을 괴롭히고 횡포를 일삼던 같은 또래의 일본인 아이 열댓 명을 때려눕힌 뒤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가서 모화산 부대(대장 변창호) 대원으로 들어갔습니다. 1934년 금강산에 숨어 있던 철원경찰서 습격 사건의 주동자 변창호 대장의 부탁으로 철원으로 가던 도중 조선인 형사 이희룡에게 붙잡혔습니다.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춘천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년 반 후에 탈옥, 묘향산으로 들어갔습니다. 김두운(金斗運)·문창수(文昌洙) 선생 등이 추진하던 총독부 습격 사건 계획에 참여했지만, 이듬해 주동 인물들이 모두 체포되자 다시 묘향산으로 들어가 은거하다가 해방을 맞았습니다.”
 
  - 인산 선생 장례식 때 광복회장을 지낸 독립운동가 유석현(劉錫鉉) 선생이 조사(弔辭)를 하셨다면서요.
 
  “의열단 활동을 하셨던 유석현 선생은 일제(日帝) 때 펜치로 손톱과 발톱을 뽑는 고문을 당해 골병이 들었습니다. 인산 선생이 가르쳐준 방법대로 뜸을 뜬 후 건강을 되찾으셨어요. 유석현 선생은 인산 선생을 참 좋아하셨어요.”
 
  - 말씀을 들어보니 인산 선생의 독립운동은 정말 대단한 것인데, 서훈(敍勳)은 받았습니까.
 
  “서훈 신청을 안 하셨습니다. 해방 후 좌우로 갈라져서 독립운동가끼리도 죽고 죽이는 데다가, 일본 앞잡이였던 사람들까지 독립운동가 행세를 하는 걸 보시고, 동지들에게 ‘우리가 독립운동을 했던 것은 국민 된 도리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고, 이제는 깨끗이 초야(草野)로 물러가자’고 하셨어요. 독립운동가들에게 적산(敵産) 가옥을 줄 때도 받지 않으셨습니다.”
 
 
  ‘쇠꼬챙이로 사람을 찌르는 게 의술이냐’
 
  김윤세 회장에 의하면, 인산 선생은 건국 직후 민족 대표 33인 중 한 분인 독립운동가 이명룡(李明龍) 선생의 손에 이끌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을 만났다고 한다.
 
  “인산 선생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한방의학과 서양의학의 장점을 상호 수용하여 국민 보건 향상에 이바지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면서 한·양방 종합병원의 설립과 동서의과대학 설립, 방역의 한방 이용 등을 건의했습니다.”
 
  - 건의가 받아들여졌습니까.
 
  “안 받아들여졌죠. 한의학을 미신(迷信)이나 잡술(雜術) 정도로 여기는 미국인 고문과 한방의학을 무시하는 보건 관료들이 실권(實權)을 쥐고 있었으니까요. ‘쇠꼬챙이로 사람을 찌르고 불로 살을 지지며 나무껍질·풀뿌리를 삶아 먹이는 것도 의술이냐?’는 미국인 고문과 언쟁을 벌인 후, 그길로 계룡산으로 낙향(落鄕)하셨습니다.”
 
  - 사실 한방에 대해서는 미신·잡술로 여기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습니다.
 
  “서울대 병원 의사의 70~80%는 지금도 한의학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서구 과학은 눈에 보이는 것만 과학이라고 생각”
 
경남 함양군에 있는 인산죽염 항노화 농공단지.

  - 한의학에 대해 ‘과학적 입증이 안 된다’라는 비판이 많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도 죽염에 좋은 미네랄이 많다고 하더라도, 죽염이 바이러스를 비롯해 오만가지 질병을 다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은 믿기지 않습니다.
 
  “그걸 과학만능주의라고 해야 하나…. ‘한의학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는 주장은 과학을 내세워서 다른 학문 체계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서구 분석 과학은 눈에 보이는 증상 위주로 판단하고, 눈에 보이는 것만 과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이 우주 자연에서 0.001%도 안 될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과학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장님 코끼리 만지듯 종합적 통찰을 결여한 것이죠.
 
  감기를 예로 들면 열이 나니까 해열(解熱)을 위해 항생제를 씁니다. 당장은 열이 내리죠. 하지만 항생제를 많이 쓰면 면역력을 약화시키고, 나중에는 치명적인 위험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도 이미 1980년대 중반에 항생제 사용에 신중을 기해달라는 메시지를 냈어요. 감기약 먹고 죽는 사람도 있잖아요? 감기 치료하려다가 나중에 폐렴으로 죽을 일을 만들고 있는 것이 지금의 의학입니다.”
 
  - 그래도 의사(양의) 중에는 ‘한의학은 사기(詐欺)’라고까지 극언하는 이들도 있더군요.
 
  “독일에서는 자연의학·대체의학을 하는 데가 꽤 많고, 자연 치유 중심의 치료를 많이 합니다. 일본에도 니시의학(일본 의사 니시 가쓰오가 창시한 대체의학-기자 주)이 있습니다. 미국의 큰 병원에도 한국 한의사들보다 침을 잘 놓는 의사들이 많습니다.”
 
  - 침술에서 말하는 경락이나 혈이니 하는 것들이 과학적으로 입증이 되나요.
 
  “북한의 김봉한은 경락의 실체를 과학적으로 구명했는데, 미국에서도 ‘봉한학설’을 많이 공부합니다. 미국 의사들은 우리나라 의사들처럼 편견이 강하지 않습니다. 우리처럼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면서 밀어내지 않고, 효과가 있다고 하면 한번 해봅니다. 나도 미국 의사들 앞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자기가 가진 지식의 잣대로 재단(裁斷)하고 자기와 다른 주장을 부정하는 것은 과학자로서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약값 내라는 소리 한 번도 한 적 없는 분”
 
  김윤세 회장은 침술에서 말하는 경락과 혈, 인산의학의 주요 개념 등에 대해 열심히 설명해 주었지만, 솔직히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기자가 서구적 사고에 찌든 속인이어서인지는 몰라도, 김 회장이 인산 선생에 관해 쓴 글이나 기자에게 해준 얘기 중에서도 선뜻 믿기지 않는 것들이 많았다. 인산 선생이 ‘귀신 들린 아이’라는 말을 들을까 봐 가족들이 걱정할 정도로 어려서부터 예지력이 있었다든지, 일곱 살 때 비 갠 하늘의 오색 무지개를 보고 우주의 비밀과 약리(藥理)를 활연대오(豁然大悟)했다든지, 쑥뜸이나 마른 명태로 간질·곱사·뇌염·폐암·폐결핵 등 온갖 질병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을 고치거나 다 죽어가는 이들의 목숨을 수없이 건졌다든지, “한반도는 신약(神藥)의 보고(寶庫)”라든지 하는 얘기들이 그랬다. 반면에 인산 선생이 남겼다는 몇몇 말씀에는 마음이 끌렸다.
 

  - 옛날에 인산 선생이 인터뷰에서 ‘남한테 훈풍(薰風)이 돼야지 추상(秋霜)이 돼서는 안 된다’고 한 게 인상적이더군요. 인산 선생의 성품은 어땠습니까.
 
  “굉장히 자비(慈悲)롭고, 휴머니즘이 참으로 놀라운 분이었습니다. 인산 선생이 병중(病中)일 때, 중병을 앓는 환자의 가족이 찾아왔어요. 사정을 설명하고 돌려보내려 하자, 그들은 ‘천하에 둘도 없다는 신의도 앓습니까’라고 하더군요. 화가 나서 ‘당신이 아버지의 건강이 소중하듯, 나도 내 아버지의 건강이 소중한 것이니, 더 이상 긴 얘기 하지 말고 돌아가라’고 소리를 버럭 질렀습니다. 인산 선생께서 방 안에서 그 소리를 들으셨는지 ‘누가 왔으면 들여야지 밖에서 손을 돌려보내면 되겠느냐?’면서 그들을 맞아들이셨습니다. ‘내가 편치 않으니 네 마음이 아프듯이 멀리서 아버지의 병환을 고쳐드리겠다고 찾아온 저 사람의 마음도 오죽 답답하겠느냐’며 그들에게 처방을 일러주셨습니다.
 
  누구한테도 약값, 치료비 내라는 소리를 하신 적이 한 번도 없어요. 형편이 되는 대로 ‘고기라도 사 드시라’면서 돈을 놓고 가는 사람도 있었지만, 안 되는 사람은 그냥 가기도 했어요. 인산 선생은 병든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 고쳐주고 죽을 사람은 무조건 살려주는 게 자기 사명이라고 생각하셨어요.”
 
 
  “평생 누구를 나쁜 놈이라고 하지 않았다”
 
  - 인산 선생이 1989년 어느 강연에서 ‘나만 후세에 욕될 일을 약간이라도 늙어 죽을 때 했다’고 했던데, 이건 무슨 의미입니까.
 
  “평생 가난하게 살아왔는데, 그때 책이 많이 팔려서 그 책값으로 제 누이동생 등이 집 한 칸 마련하는 걸 좀 도와준 것이 마음에 걸리셨다는 얘기입니다. ‘노자나 공자 같은 세상의 성인들은 처자를 위해서 한 게 없는데, 나는 애들이 집도 절도 없이 고생한 것이 마음에 걸려서 도와줬는데, 그게 마음에 걸린다’는 말씀이었습니다.”
 
  - 옛날 인산 선생 인터뷰 중에서 ‘뿌럭지는 우리 단군 할아버지가 되고 그것에 접붙여 열매가 열려도 좋아. 단군 할아버지 뿌럭지에다 전 세계를 접붙여 꽃도 각색이고 열매도 다양하면 해롭지 않아’라고 말씀하신 것을 봤습니다. 정체성(正體性)은 지키되, 폐쇄적 민족주의가 아니라 ‘열린 민족주의’를 지향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인산 선생은 늘 개화되고, 향상·발전·성장하는 것을 추구하셨습니다. 항시 열린 마음이셨습니다. ‘저놈들은 저래서 안 돼’라고 하지 않으셨고, ‘쟤들이 이렇게만 조금 해주면 좋아질 텐데…’라고 하셨습니다. 평생 누구를 나쁜 놈이라고 하지 않았고, 나쁘게 말할 때에도 ‘좋지는 않은 사람’이라고 하는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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