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준표를 향한 3가지 시선 혹은 오해… ‘막말’ ‘독고다이’ ‘여성 비하’
⊙ “비대위원장이 왜 이명박·박근혜 시대에 대한 對국민 사과를 하나?”
⊙ “중도층은 없다, 자기편 튼튼해야 외연 확장도 가능”
⊙ “태극기 세력이 극우? 극우는 전체주의자, 한국에 전체주의자는 없다”
⊙ “윤석열 총장, 임기 마치고 온다면 판 만들겠다”
⊙ “빅텐트 아래 反文 세력 모이면 재집권 가능”
洪準杓
1954년생. 영남고, 고려대 법대 행정학과 졸업 / 사시 24회 / 서울지검 강력부 검사, 15대·16대·17대·18대·21대 국회의원, 한나라당·자유한국당 당대표, 35대·36대 경남도지사 역임. 19대 대선 자유한국당 후보
⊙ “비대위원장이 왜 이명박·박근혜 시대에 대한 對국민 사과를 하나?”
⊙ “중도층은 없다, 자기편 튼튼해야 외연 확장도 가능”
⊙ “태극기 세력이 극우? 극우는 전체주의자, 한국에 전체주의자는 없다”
⊙ “윤석열 총장, 임기 마치고 온다면 판 만들겠다”
⊙ “빅텐트 아래 反文 세력 모이면 재집권 가능”
洪準杓
1954년생. 영남고, 고려대 법대 행정학과 졸업 / 사시 24회 / 서울지검 강력부 검사, 15대·16대·17대·18대·21대 국회의원, 한나라당·자유한국당 당대표, 35대·36대 경남도지사 역임. 19대 대선 자유한국당 후보
- 사진=조준우
《지리산》 때문이었다. 홍준표 의원을 만나기로 한 이유가 말이다. 그는 소설 《지리산》을 최근에 다시 읽었다고 한다. 이병주 작가의 대표작으로 지리산 빨치산(파르티잔)이 주인공이다. 주요 등장인물 거개가 실존 인물이다. 해방 직후 좌우파의 갈등 현장을 살아낸 이들의 내면 풍경을 묘사했다. 호기심이 일었다. 같은 배경을 다룬 대하소설이 몇 종 있다. 이를테면 《태백산맥》 《혼불》이다. 이런 책이 아니라 《지리산》이라.
이병주 작가는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특유의 문체가 재료였다. 침착하고, 현대적이고 담백하다. ‘이병주라는 세계에 발을 디딘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문학 독서가들을 나눠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가끔 했다. 그의 책을 새삼 다시 꺼내 봤다니. 누군가를 오래 봤다고 잘 안다 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봐온 정치인 홍준표의 다른 면이 언뜻 비친 것 같았다. 지난 11월 11일 국회 의원회관으로 갔다. 마주 앉자마자 물었다.
― 왜 《지리산》이죠?
“40여 년 전에 처음 읽었습니다. 소설을 읽으며 해방 직후 좌익과 우익의 대립을 리얼하게 경험했죠. 이번에 다시 읽었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좌파와 우파 간의 극렬한 대립상황이 해방 직후의 좌익과 우익 사이의 대립 상항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다시 읽어보니 눈길이 가는 대목이 있던가요.
“박태영이 마지막에 한 말이 참 재미있습디다. ‘선택에 실패한 책임을 마지막까지 진다.’ 박태영은 공산주의를 선택했어요. 잘못 선택했단 걸 깨달았지만 자신이 선택한 실패에 마지막까지 책임을 지겠다, 이건 상당히 의미가 있어요.”
― 선택한 결과를 감수하자는 말씀이군요.
“심사숙고 끝에 선택을 했으면 그 선택에 책임을 지는 자세가 현대에서도 중요한 화두입니다. 지금은 세상이 그렇지 않죠. 선거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부를 잘못 선택하면 그 책임을 누가 집니까. 국민이 집니다. ‘선택의 실패에 책임 지는 자세가 국민 모두에게 요구되는 세상이다’, 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홍준표를 보는 시선
그를 만나기 전 지인 몇에게 정치인 홍준표에 대한 인상을 물었다. 정치에 관심이 없지도 많지도 않은 30~40대 직장인들이었다. 몇 개의 공통적인 단어가 나왔다. ‘홍카콜라’ ‘막말’ ‘독고다이’ ‘여성 비하’…. 탄산음료처럼 시원하다는 뜻의 ‘홍카콜라’ 빼고는 부정적인 표현이다. 홍준표란 이름에 강고하게 덧씌워져 있는 프레임이기도 하다. 진실일까, 오해일까.
첫째, 막말. ‘되는 대로 함부로 하거나 속되게 말함’이란 뜻이다. 홍 의원은 자신에게 씌인 막말 프레임의 기원을 ‘노무현 자살’이란 표현으로 봤다.
“자기들이 신처럼 모시는 노무현이 자살했다고 말했을 때부터 막말이라 하더라. 그 뒤부터 폐부를 찌르는 말을 하면 전부 막말이라 공격한다.”
언젠가 그가 페이스북에 쓴 말이다.
― 몇몇 지인에게 물으니 ‘홍준표’ 하면, 여전히 ‘막말’을 떠올리더군요.
“그게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막말’ ‘발정’, 전부 허위 프레임입니다. 그걸 드루킹이 증폭시킨 거 아닙니까. DJ(김대중)도 빨갱이 프레임으로 40년을 보냈어요. 그 프레임에서 1997년에 벗어났잖아요.”
― 막말이 홍 의원에게 유권자들이 접근하는 진입장벽이 되기도 합니다.
“전 그들의 표를 받을 생각이 없어요.”
― 그 표를 받아야 선거에 이기는데요?
“선택의 책임에 대한 실패는 국민이 지는 거예요. 국민은 본인의 판단에 따라서 투표하는 것이고, 거기에 대한 책임은 자신이 지는 거예요. 그게 민주주의 아닙니까.”
드루킹 댓글과 ‘홍준표 막말’
얼마쯤은 억울할 수도 있겠다 싶다. 대표적인 막말 발언으로 “개가 짖어도 기차는 간다”가 꼽힌다. 실은 소설에 등장하는 말이다. 마거릿 미첼의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6)에 나온다. 레트 버틀러가 스칼렛 오하라에게 한 말이다. ‘개가 짖어도 마차는 달린다(The dogs bark, but the caravan moves on)’는 타인의 눈치를 보지 말고 소신을 가지라는 뜻이다. 1993년엔 YS(김영삼)도 이 표현을 사용했다. 대통령 취임 후 ‘하나회’ 척결 의지를 밝힐 때였다.
홍 의원에게 물었다.
“지금까지 정치 역정 중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 언제입니까?”
그는 ‘성완종 회장 불법 정치자금 재판’을 꼽았다. 이때도 막말 논란이 함께였다.
“이미 지나간 사건이기 때문에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난 성완종 회장 몰라요. 1심 판결에서 1년6개월 실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재판장을 나오는데 기자들이 전부 달려들어 물었어요. ‘노상강도 당한 기분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판사를 노상강도에 비유했다’고 하루 종일 비난받았죠. 그때가 제일 힘들었습니다.”
가만히 뜯어보면, 논란이 된 그의 말들은 막말이라기보단 상황과 감정을 적시에, 예리하게 표현한 경우가 많다. 검사 생활에서 쌓인 ‘습(習)’이겠다. 검사 본능이라고 할까. 상대의 허점이나 모순을 남들보다 빨리 알아챈다.
여기에 언어가 더해졌다. 내용에 대한 동의 여부는 뒤로하고, 그의 문체는 여느 정치인의 언어와는 좀 다르다. 어휘는 풍부하고 표현은 정확하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독서는 인간의 정신을 풍요하게 하고, 토론은 인간을 유연하게 해주며, 글쓰기는 정밀한 인간을 만든다’고 했다. 홍 의원은 거의 매일 페이스북에 글을 올린다. 그날의 현안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는 일종의 공개 일기다. 모두 직접 쓴다. 이런 시간이 쌓여 그의 언어가 더욱 예리해진 듯하다.
당하는 사람은 힘들 수밖에 없다. 논리로 대적이 안 되니 ‘막말’로 몰아붙이기라도 해야 할 정도다.
― 정치인은 검사와 다르지 않습니까. 정치에 입문하고도 검사처럼 사신 거 아닙니까.
“검사는 선악(善惡)만 보면 됩니다. 정치판은 선악이 공존하는 판이었습니다. ‘선악만 추구하는 검사정치를 해선 안 되겠다’ 이 생각을 3선 때부터 하게 됐죠. 화이부동(和而不同)을 깨달은 거죠.”
― 그 후로 좀 달라지셨나요?
“그렇죠.”
그와 대화를 나눠보니, 생각이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화두에 대해서는 대체로 짧게 답하곤 했다.
탄핵 대선의 기억
2017년 탄핵 대선에선 ‘막말 논란’이 극에 달했다. 그가 유세 중 돌아가신 장인을 ‘영감탱이’로 칭했다며 ‘패륜’ 논란도 나왔다. 연설 전체를 들어보면 억지 비난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장인과의 일화를 구수히 풀어놓으며 그야말로 진짜 ‘양념’처럼 쓴 단어였다. 물론 그에게 덧입혀진 이미지를 고려하면 쓰지 않는 편이 좋았겠다. 대선 얘기를 꺼냈다.
― 대선 유세에서 노래도 부르셨지요.
“그때 제가 경남지사를 하고 있었죠. 인명진 비대위원장이 창원으로 내려왔습니다. ‘대선에 출마해달라’고.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에 당 지지율은 4%로 떨어져 있었습니다. 궤멸된 당이었습니다. 당에서는 아예 대선 준비를 안 했습니다. 당 차원의 대선 공약도 없었어요. 심지어 언론에 교육 공약이 빈 칸으로 나간 적도 있어요.”
그의 말이 이어졌다.
“제가 이 당에 20년 이상 있었습니다. 탄핵당한 당이지만 여당이었어요. 여당에 대선주자가 없다는 것도 말이 안될뿐더러, 당이 궤멸되는 걸 보기 안타까웠어요. 당이라도 재건해야겠다, 그런 생각으로 대선에 나간 겁니다. 문재인 후보를 이겨보겠단 생각은 없었어요.”
그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경기도 어느 지역에 유세를 와달라 해서 갔습니다. 개천변에 한 20~30명 모아놓고 유세를 하라고 해요. 동네 기초의원 선거도 아니고. 유세장에 가보면 자유한국당 출신 자치단체장이나 국회의원을 본 적이 별로 없을 정도였어요. 그때 대선자금을 국민은행에서 빌렸어요. 국민은행에서 매일 여의도연구원에 와서 후보 지지율을 체크했어요. 득표율 15%를 못 넘기면 돈을 못 받으니까요. 문재인·안철수 후보는 TV 광고를 44회 했습니다. 우리는 11회 했어요. 당을 장악하고 있던 세력들이 돈을 못 쓰게 했어요. 문재인·안철수 후보보다 대선자금을 150억가량 덜 썼습니다. 참 기가 막힌 대선을 치렀습니다.”
노래하며 대선 유세
― 유세에 많은 지지자가 모인 적도 있었잖아요.
“제가 왜 지역마다 다니면서 마이크 쥐고 노래부터 했겠습니까. 세상에 대선 후보가 유세장 다니면서 마이크 들고 노래하는 사람이 어딨습니까. 오죽 답답하면 그런 퍼포먼스까지 하면서 선거를 치렀겠습니까. 탄핵당한 정당의 말을 국민들이 들으려 하지 않았어요. 노래라도 해서 현장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고 연설하는 것이 옳겠다 싶었어요. 이런 대선이면 앞으론 절대 출마 안 합니다.”
당시 몇 번인가 그의 유세를 지켜봤다. 말이 유세지 ‘홍준표 원맨쇼’였다. 박근혜 대통령이 그리 되고 마음 둘 데 없던 보수 지지자들이 그의 유세장을 찾았다. 가난했던 시절 얘기를 들으며 눈시울을 붉히고, 노래를 따라 부르며 박수를 쳤다. 어느 순간엔 ‘한풀이 굿’으로 보였다.
― 유세장이 보수 우파들의 상실감을 달래주는 한풀이 굿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대구 동성로에 10만명이 모였죠. ‘홍도야 울지 마라’ 부를 때는 박근혜 대통령을 생각하면서 부를 수밖에 없었죠. 대구 사람들이 다 울고 있었어요. 그걸 10만명이 따라 불렀어요. 부산에선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불렀죠.”
그러나 그에게 대선은 좋지 않은 기억이었다.
“다른 후보들은 TV토론 전날부터 공부를 하고 토론 당일엔 유세를 안 했어요. 나는 오후 5시까지 거리 돌아다니다가 7시에 라면 한 그릇 먹고 토론장에 갔습니다. 저로서는 힘들고 슬픈 선거였어요. 결과가 나오고 참으로 다행이다 생각했어요. 당의 재정파탄은 막았으니까요.”
득표율 24.1%라는 선전을 했지만 그의 한(恨)은 풀리지 않았다.
“친박들이 용도 폐기용으로 저를 선거에 내보낸 거죠. 저를 불쏘시개 삼아 당을 좀 맡겼다가, 기본적으로 자기들과 생각이 다르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제가 나가고 황교안 전 총리를 불러서 수렴청정을 한 거죠. 총선에서 망하고 나선 그다음에 외부에서 총독이 들어온 거죠.”
드루킹 上線특검 했어야
― ‘총독’은 누가 모셔왔나요.
“제가 언론에 ‘김종인 비대위원장 체제’를 제일 먼저 띄웠어요. 사실 모 인사한테 부탁을 받았습니다. 언론에 띄워달라고요. 김종인 쪽으로 급속도로 분위기가 돌아갔어요. ‘대안이 없지 않으냐.’ 그런데 분위기가 그렇게 되자 김 위원장이 이래요. ‘당헌·당규를 넘어서는 권한을 달라, 임기 없는 무기한 권한을 달라.’
그걸 들으면서 ‘큰일 날 분이다. 한국 보수 우파 정당의 뿌리가 이 당인데 당을 얼마나 얕보고 깔보면 이런 얘기를 하겠느냐, 당의 헌법을 넘어서는 비상대권을 쥐겠다? 쿠데타 상황인가.’”
― 그래서 후엔 김종인 비대위에 반대하셨군요. 어쨌든 비대위 출범에 일조하셨네요.
“나도 깜박했지.(웃음) 처음엔 그분밖에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리 나오는 거 보고, ‘아이고, 이분 들어오면 큰일나겠다. 독재하겠다’ 싶었어요.”
― 김경수 경남도지사가 2심에서 징역 2년 실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지난 대선에 드루킹 댓글이 실제로 영향을 미쳤다는 방증 아닙니까.
“나경원 대표 시절에 김경수 1심 판결이 났죠. 판결문을 보면 윗선이 있다는 게 나와 있어요. 당이 제대로 하려면 그때 상선(上線)특검을 추진했어야 해요. 상선특검을 추진하면 수혜자가 홍준표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무시한 게 아닌가 싶어요.”
생년월일은 비밀
홍 의원을 따라다니는 두 번째 단어는 ‘독고다이’다. ‘권위적일 것 같다’는 인상 평가도 있다. 사실일까. 권위적이라는 건 지위나 권력을 내세워 상대를 억압한다는 뜻이다. 기자가 느낀 건 좀 달랐다. 그는 권위적이기보단 방어적으로 보였다. 마주한 상대의 체급과 속내를 파악하고 나서야 방어 태세가 풀린다. 검사생활의 습관과 정치생활 내내 계파 없이 살아온 세월 탓이 아닐까 싶다.
인터뷰 전 그의 보좌진에게 홍 의원의 정확한 생년월일을 물었다. 사주풀이를 맹신하진 않지만, 가끔은 의외의 실마리가 되기도 해서다. ‘모른다’는 즉답이 돌아왔다. 생년월일은 공개하지 않는다고 했다. 더 궁금해졌다.
― 생년월일시를 왜 공개 안 합니까.
“제 정확한 생년월일은 아내와 저밖에 몰라요. 절대 안 가르쳐줘요.”
― 운명을 믿으세요.
“그렇습니다.”
―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세요.
“고정되지 않았습니다. 내 선택에 따라 언제든지 바뀔 수 있어요. 자기 노력하기 나름이지. 자기가 가야 할 방향을 보고 거기에 대해서 철저히 준비하는 과정이 노력입니다.”
묘한 대답이었다. ‘운명은 있지만 바꿀 수 있다’, 귀를 더 가까이 대보면, 선천적 운명에 대한 분노로도 들린다. 그러고 보니 인생의 중요한 몇몇 순간마다 그는 노력으로 운명의 방향을 틀었다.
― 고등학교 선생님이 ‘네가 고려대 법대에 합격하면 장을 지지겠다’고 했다지요.
“저는 이과였으니까요. 이과에서 문과를 갈 수 없었어요. 그때 이미 육군사관학교는 합격해놓은 상황이었으니 육사 가라고 종용한 거죠.”
그는 원래 의사가 되려고 했다. 경북대 의대 진학을 꿈꿨지만 학비가 문제였다. 학비 걱정이 없는 육사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다 어느 날 곤욕을 치르는 부친을 봤다. 비료를 훔쳤다는 누명을 썼다. 아무 말도 못 하는 아버지를 보며 수험생 홍준표는 다시 인생의 운전대를 틀었다. ‘검사가 돼야겠다.’ 부친의 무죄는 2년 후 밝혀졌다. 그가 검사로 가는 길로 이미 들어선 후였다.
― 육사에 갔으면 하나회라도 들어갔을까요.
“그랬겠죠? 전두환 대통령이 그때 합천 출신 인사를 엄청 찾았답니다. 제가 합천에 산 적이 있으니까요. 인생이라는 게 그렇습디다. 경북대학교에 갔으면 의사가 됐을 거고, 육사 갔으면 전 대통령 졸개 됐을 거고, 검사 됐으니까 내 인생을 산 거지.”
대선 철이 되면 단골로 등장하는 키워드가 있다. ‘태몽(胎夢)’이다. 그의 태몽은 ‘달’이다. 모친이 달을 치마폭으로 안았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태몽을 믿는 이들은 해, 달, 별을 최상급으로 친다. 용이나 호랑이보다 높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태몽도 달이다. 모친이 꿈에서 광채를 뿜는 달 덩어리를 웅덩이에서 건져 연신 치마폭에 담았다고 한다. 이명박 대통령도 마찬가지로 달이 태몽이다. 뒷동산에 보름달이 떠올라 동네가 환해지는 꿈이었다고 한다. 형제 중 혼자 정해진 돌림자를 안 쓰고 ‘명박(明博)’으로 이름 지어진 이유다.
지역 세 번 옮겨 출마
지난 총선을 그는 당 없이 혼자 치렀다. 선후를 살펴보면 김형오 공관위의 찝찝한 공천이 그의 탈당보다 먼저였다. 처음엔 경남 밀양·의령·함안·창녕에서 출마하겠다고 했지만, 김형오 공관위의 설득으로 양산 경선에 참여하기로 했다. 경선 참여 이틀 후 김형오 공관위원장은 그에게 ‘총선에 불출마 하라’고 했다. 경선 참여 기회도 없다고 통보했다. 결국 무소속으로 대구에 출마했다.
― 결과적으론 이번 총선이 전화위복이 된 게 아닙니까.
“총선을 두 달 앞두고 지역구를 세 번 옮긴 사람은 선거사상 제가 처음일 겁니다. 선거 29일 전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지요. 그러니 무슨 조직이 있겠습니까. 나 혼자 선거했죠. 당대표를 두 번이나 하고 대통령 후보까지 한 사람을 이렇게까지 할 수도 있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 무소속 생활은 어떠했습니까.
“좋은 점이 있어요. 당 내부 문제에 얽매이지 않으니까 마음은 편하죠. 당 안에만 머물지 않으니 당 밖의 더 큰 세상이 보입니다.”
― 김종인 비대위 체제는 앞으로 어떻게 되나요.
“국민이 국민의힘을 야당으로 보지 않아요. 민주당 2중대로 보고 있습니다. 제1야당인데 뚜렷한 대선 주자도 없죠. 생각해보세요. 김종인 체제 들어오고 난 뒤에 야당다운 행동을 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습니까.”
戰士는 없고 패셔니스트만
― 조국, 추미애 장관, 공무원 피살 사건, 옵티머스, 라임 등 이슈가 이어지는데요.
“그렇죠. 국민이 왜 야당을 대안정당으로 인식하지 않을까. 야당은 싸워야 됩니다. 싸움을 안 하고 있잖아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끌려다니고 있잖아요. 그러면서 반사적 이익으로 선거에 이길 수 있나. 그건 어렵죠. 제가 25년간 이 정당에 있었는데, 이 당의 사람들은 무기력해요.”
― 이유가 뭔가요.
“이미 본인들은 4년 임기가 보장돼 있으니 현실에 안주하는 거죠. ‘2중대라도 좋다. 싸우면 피곤하니 안 싸우는 게 좋다’ 이렇게 야당 노릇을 어떻게 해요? 그건 야당이 아니죠. 국민이 국민의힘을 ‘국민의 짐’이라 놀려도 화내는 사람이 없어요.”
― 당사 구입도 좀 의아했습니다. 당사야 있으면 좋지만 하필 이 시국에요. 천막 당사 같은 결기가 아쉽습니다.
“지금 텐트 치고 투쟁할 사람이 그 당에 없어요. 라임 사건, 옵티머스 사건을 제대로만 특검 수사 추진하면 이 정권 무너진다고 나는 봅니다. 권력비리 중에서도 한참 깊숙한 권력비리로 나는 봅니다. 특검 추진하겠다 해놓고 무기력하게 딱 쇼 한 번 하고 끝났어요. 민주당이 왜 겁을 내겠어요?”
― 왜 그렇게 됐나요.
“당에 전사(戰士)가 필요한데 패셔니스트들(fashionist)이 너무 많습니다.”
― 어쩌다 그런 분들만 당에 모이게 됐나요.
“황교안 전 대표가 남긴 족적(足跡)이죠. 대여 투쟁한 사람을 다 쳐냈잖아요. 한국 보수 우파들은 박근혜 탄핵 때 궤멸당했습니다. 과연 박근혜가 대통령직에서 쫓겨나고 구속될 만한 일이었느냐, 그건 다시 반성해봐야 합니다.”
中道는 없다
― 김종인 위원장은 이명박·박근혜 두 대통령의 재판 결과가 나오면 대국민 사과를 하겠다는데요.
“민주당이 노무현·김대중 실정에 사과한 적 있습니까. 그리고 왜 본인이 사과를 합니까. 그분은 당의 비상상황 극복이란 임무만 하면 되는 거예요. 두 대통령의 역사적 공과에 대해서는 그분이 사과할 문제가 아니에요. 국민한테 다시 평가를 받으면 되는 거예요.”
― 그래야 중도(中道)층을 끌어안을 수 있다는 뜻이겠죠.
“중도라는 건 없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스윙보터(swing voter)’예요. 이쪽으로 저쪽으로 갔다가 흔들리는 계층이에요. 미국에도 ‘스윙보터주(州)’가 있잖아요. 지난번엔 트럼프, 이번엔 바이든. 이쪽 세력이 강해지면 스윙보터 층은 따라오게 되어 있어요. 중도를 위한 정책이라는 건 없습니다. 보수 우파냐, 진보 좌파냐, 보수 진보를 넘어선 국익을 위한 정책이냐. 3가지 기준만 있을 뿐이에요.”
― 집토끼나 잘 챙기라는 말씀인가요.
“선거라는 건 자기편 강화입니다. 자기편이 튼튼하면 외연(外延) 확장을 할 수 있어요. 본인은 허술한데 외연 확장하다 보면 자기편도 놓치고 외연 확장도 안 됩니다.”
―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중도를 표방했는데요.
“지난 대선 때 제가 안 대표를 두고 그런 표현을 했어요.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윤선도의 ‘오우가(五友歌)’에 나오는 말입니다. 나무면 나무, 풀이면 풀이라 하고, 나머지 사람들을 끌어들여야지, 좌파도 우파도 아니고 상식파다? 겪어보니 사람은 참 착해요.”
― 야당을 답답해하는 국민들이 많습니다.
“일모도원(日暮途遠)입니다. 탄핵을 기점으로 서로를 손가락질하기 바쁘고, 대여투쟁보다는 당에서 서로 비방하고 음해하고 폄하하는 데만 혈안이었던 4년입니다. 그러니 이 당이 무슨 결집된 힘으로 문재인 정권과 투쟁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당에 새롭게 들어온 분들이 절박감이 있을 리 있겠습니까. 임기가 4년이나 남았는데. 다음 대선에 목숨 걸 사람들이 과연 몇 명이나 되냐 말이에요.”
빅텐트 아래 反文 모여야
― 그럼 어떻게 하나요.
“전부 모아야죠.”
― 빅텐트(Big Tent)요?
“그렇죠. ‘태극기 세력은 극우라 손절한다’는 지난번 김종인, 주호영 두 분의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극우라는 것은 전체주의입니다. 우리나라에 전체주의자가 어딨습니까. 태극기 세력은 아스팔트 우파나 강성우파라고 봐야죠. 민주당이 강성좌파인 민주노총과 절연을 합니까.”
― 절연한 적 없죠.
“안 하죠. 그들의 행동 패턴을 우리가 따라갈 필요는 없지만, 태극기 세력과 왜 손절을 합니까. 남아 있는 세력을 전부 모아도 부족할 판인데요. ‘저들은 강성우파라서 싫고, 저 사람은 나와 개인적인 악감정이 있으니 싫고, 저 사람은 내가 앞으로 당권을 장악하는 데 장애물이 될 거 같으니 싫고’ 쪼개고 분열시켜 조그마한 성(城)을 만들어, 거기서 소영주(小領主)라도 계속 하겠다는 생각으로 무슨 보궐선거가 되고 대선이 되겠습니까.”
― 재집권을 위해 보수 대연합을 해야 한다는 말씀인가요.
“보수 대연합이란 표현도 안 써요. ‘문재인과 좌파정권에 반대하는 사람은 다 모여라’, 일단 힘을 모아 정권부터 가져와야지요.”
― 그만큼 비상한 시국이란 뜻이군요.
“오늘(11월 11일) 윤석열 검찰총장이 한길리서치 여론조사에서 대선주자 지지율 1등을 했습니다. 그게 윤석열 개인에 대한 지지였겠습니까. 반문(反文) 정서가 집결된 거죠. 반문 정서가 그만큼 강한 겁니다. 지금은 윤 총장이 혼자 유일하게 야당 역할을 하고 있잖아요. 국민의힘이라는 당은 2중대 정당이 된 지 오래고요. 그러니 윤 총장에게 여론이 모이죠.”
― ‘윤 총장이 임기 마치고 정치하겠다고 야권에 오면, 우리가 모시고 판을 잘 만들어보겠다’고 인터뷰에서 말씀하셨는데요, 킹메이커도 하실 수 있다는 뜻인가요.
“킹메이커가 아니고, 경선에서 뽑힌 사람이 다음 대선에 나가는 거죠. 당원과 국민이 선택한 결과는 그 누구라도 존중해야 합니다. 특정인이 앉아서 ‘이 사람은 우리 당 대선 후보 안 된다’고요? 미국의 정치인 버니 샌더스는 지난 대선에서 무소속이면서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들어갔잖아요. 반문재인 전선을 하나로 만들어서 자유 경선을 거쳐 후보가 되는 사람이 1대 1로 여당과 맞서면 선거에 이길 수 있다고 봅니다.”
문득 궁금했다. 일생 뚜렷한 계파 없는 그의 정치 인생은 어땠을까.
― 외롭지 않으셨어요.
“외롭다기보다, 힘들게 산 거죠. 무리에 끼어들면 편해요. 나홀로 헤쳐나가려면 모든 것이 힘들어요. 15대 때 지금 국민의힘으로 정계 입문한 이들 중 현역은 나밖에 없어요. 내가 무리에 끼어 있었다면 진작 끝났죠. 혼자 헤쳐나갔기 때문에 지금도 건재하고 있는 겁니다. 힘들지만 잘 헤쳐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만약 그가 계파 비슷한 데에 속한 적이 있다고 한다면 친이계일 것이다. 그 자신은 부인하지만 말이다.
MB의 사과
― MB(이명박) 접견 가셨다면서요. 무슨 얘기 나누셨어요.
“1999년 제가 워싱턴에 머무를 때 MB와 형님 동생 하며 지냈습니다. 전 친이계는 아니지만 정치적 입장을 떠나 참 안됐죠. 제가 MB 시절에 만약 장관이나 총리 했으면 벌써 은퇴했겠죠. MB 재임기간 동안 저를 잘 봐주거나 한 건 하나도 없어요.”
― 법무부 장관 하고 싶었는데 못 하셨죠.
“그건 날 앉히면 이상득 의원 조사할까 봐 안 시킨 거고.(웃음) 지난번 지방선거 끝나고 미국 가기 전에 MB에게 면회를 갔어요. 미안하다고 하더군요. 재임 시절 저를 홀대했다고요.”
― 사과를 받겠다고 하셨나요.
“이리 답했죠. ‘그 시대는 이명박 대통령의 시대입니다. 대통령 통치철학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내가 서운해할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니 거기에 대해서 부담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라고.”
총선이 끝나고 그는 페이스북에 글을 썼다. 자신의 무소속 출마를 비(非)우호적으로 보도한 일부 언론과 유튜버들에 대한 항의였다.
― 그런 걸 왜 쓰셨어요.
“그때 얼마나 절박했어요. 언론에서도 나를 비난했어요. 무소속 출마라고요. 나를 도와준 사람들은 일부 극소수 유튜버였어요. 그 사람들이 굉장히 고마웠어요.”
― 고마움을 표시하는 건 좋지만 비난할 건 없잖아요. 그리고 그런 건 직접 말씀 안 하셔도 되고요.
“만약 대신 싸워주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나서서 싸울 필요가 없죠. 그런 걸 속에 넣고 살면 병이 생긴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할 말은 해버리고 털어버려야지요. 할 말을 안 하고 가슴속에 꽁하게 두면 속병 생겨요.”
― 대신 싸워줄 전투부대가 지금은 있나요.
“내가 누구라고 말은 안 합니다만, 대신 싸워주는 화력 좋은 사람들이 당에 많이 생겼어요.”
― 누구요?
“누구라고 얘기하면 안 되지.”
40년 엄처시하
홍준표를 따라다니는 세 번째 키워드는 ‘여성 비하’다. ‘돼지발정제’며 ‘설거지는 여자가’ 등 장르도 다채롭다. ‘돼지발정제’의 경우 홍 의원이 상당히 억울할 수 있다. 마치 그가 여성에게 돼지발정제를 먹이기라도 한 듯이 알려져 있지만 사실과 다르다. 수필집 《나 돌아가고 싶다》에 그가 직접 쓴 일화가 출처다. 그는 하숙집 친구들 중 한 명이 다른 이에게 돼지발정제를 구해준 일을 기술한 후 이렇게 썼다.
“그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 검사가 된 후 비로소 알았다.”
다른 이의 자기 고백을 볼까. 탁현민 청와대 의전비서관은 대담집 《말할수록 자유로워지다》(2007)라는 책에서 “고등학교 1학년 때 친구들과 여자 중학생을 공유했다”고 밝혔다. “임신한 교사가 섹시해 보였다”고도 썼다. 더한 대목도 있지만 이만 줄이겠다. 탁 비서관은 현재 청와대에 근무 중이다. 성(性) 감수성 얘길 하려면 최소한 진영에 상관없이 같은 잣대는 들이대야 하지 않을까 싶다.
설거지는 안 했을지 몰라도 홍 의원 본인 표현으론 40년간 엄처시하(嚴妻侍下)에서 살았다고 한다.
“집사람이 좀 엄합니다. 밖에서 여성을 대할 때 어떻게 조심해야 하는지 젊을 때부터 교육을 해줬어요. 60세가 넘고 난 후에는 말 안 해도 알아서 잘 하니까, 교육을 안 시킵니다.”
가수 데뷔를 막은 것도 엄처(?) 이순삼씨다.
― ‘검사가수 홍준표’로 음반 제의를 받았다는 게 사실인가요.
“지금은 목소리가 갔는데(나빠졌는데) 검사 할 때까지도 노래 잘했어요. 이미자 노래 부르면 가장 높은 고음까지 올라갔다니까요. 가수 주현미가 ‘약사가수’로 이름을 날렸잖아요. 음반사에서 약사가수가 성공했으니까 검사가수 메들리 취입하자고 했어요. 나는 하고 싶었는데 집사람이 절대 안 된다고 해서 안 했어요.”
홍 의원은 아내를 대학생 때 만났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대구 동성로에서 정치버스킹(길거리 정치토크)을 하는데 남자 대학생이 말해요. ‘취업도 안 되고 일자리도 없고 힘들다. 여자를 만날 생각이 없다’고. 제가 답했습니다.
‘내가 대학교 3학년 때 힘들고 어렵고 앞날이 안 보였다. 그 시절에 국민은행 안암동 지점에서 근무하던 행원을 만났다. 아내다. 둘이서 힘을 합하니 어려운 시절을 극복할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해볼 수는 없겠나.’
힘든 시절이 있어도 혼자가 아니라 집사람과 힘을 합쳐서 극복했다고 생각합니다.”
홍 의원 주변인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부부는 사이가 상당히 좋다고 한다. 두 사람이 결혼할 때를 떠올리며 그는 이런 표현을 썼다. ‘유랑민에서 정착민이 된 것 같았다.’
까막눈 엄마
그리고 홍준표의 인생에 또 한 명의 잊을 수 없는 여성이 있다.
― 젊은 시절 힘들 때 누구에게 기대셨어요.
“엄마입니다. 내 인생의 멘토는 까막눈 엄마입니다. 자식을 위해 헌신만 했어요. 경남지사 할 때는 창녕 산소에 한 달에 한 번씩 갔습니다. 서울 올라오고 난 뒤에는 갈 기회가 없어서 좀 그랬죠. 이제 대구가 지역구니까 가끔 갑니다.”
그는 정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로 경남도지사 시절을 꼽았다. 고향이자 모친의 산소 부근에서 아내와 함께 머무르는 데서 오는 안정감도 한몫했을 듯하다.
“젊을 때는 어머니한테서, 나이 든 후엔 집사람한테서 정신적인 안정을 찾았죠.”
― 지난 대선의 후폭풍이 있었다고요.
“뒷조사를 1년6개월 정도 받았죠. 제가 경남지사 4년4개월 동안 했던 사업을 전부 재조사했어요. 제 아들, 집사람 계좌 다 열어보고, 통신조회했다고 통지서는 계속 오고… 털어도 나오는 게 없으니 그만했지.”
― 검증을 받은 셈이네요.
“저는 기본적으로 먹고살 것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부정하게 돈 벌 기회도 있었어요. 1993년 슬롯머신 수사할 때였어요. 정덕진 형제가 ‘수사를 안 하면 100억원을 준다’고 했어요. 어이가 없어서 물었어요. ‘100억이면 도대체 부피가 얼마만큼인가?’ 그때는 1만원짜리니까. 사과상자로 50상자예요. 둘 데가 어딨어요. 그 사람들 재밌는 얘기를 하대. 양도성예금증서(CD)로 주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편지봉투 하나에 100억원이 들어간다고요.”
― CD는 현금화할 때 신상이 노출되는데요.
“그 얘기도 물어봤어요. ‘남대문시장 어디에 가면 10%만 떼고 바꿔준다. 90억원은 당신 돈이다’라고 방법까지 가르쳐주더라고.”
― 지역구던 동대문에서 재개발이 활발했는데 새 아파트 욕심이 안 나셨어요.
“분수에 넘치는 돈을 추구하면 그게 재앙의 근원이 됩니다.”
손자뻘 홍남기

― 국정감사 때 홍남기 부총리한테 전셋집 구했냐고 물으셨잖아요. 홍 부총리가 ‘나중에 답하겠다’ 하던데, 답 들으셨어요.
“말 안 해주더라고요. 홍남기 부총리가 남양 홍씨 항렬로 하면 제 손주뻘입니다. 좌파정권에 부역해서 나중에 얼마나 비난받을지 참 딱해요. 사표 내버리지 뭐한다고 붙어 있나, 그게 딱해서 물어본 거예요.”
― 청와대에서 사표 반려했잖아요.
“후임을 구하기 어려울 겁니다. 아무도 안 들어가려 할 거예요. 정권 말기인데 잘못 들어가게 되면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니까요.”
― 이제 이 정권의 임기가 1년 반 남았습니다.
“남의 눈에 눈물 나게 하면 자기 눈에선 피눈물 나는 게 사람 사는 이치입니다. 난 문 대통령 퇴임 후가 걱정이에요. 원래 권력 비리는 재임 중엔 안 터져요. 겁이 나니까. 퇴임 후에 나옵니다. 국민이 몰아붙이면 어느 정권이 들어서든 수사 안 할 수 있습니까?”
그의 별명 목록 중엔 ‘홍스트라다무스’도 있다. 판문점에서 열린 4·27 남북정상회담을 두고 ‘위장평화쇼’라 했다. 당시엔 ‘막말’ 비난을 받았고, 후에 사실로 증명됐다. ‘총선 선거날이 되면 황교안과 홍준표 둘 중 하나는 집에 간다’고도 했다. 황 전 대표는 개표가 끝나기도 전에 귀가했다. 궁금했던 질문을 꺼냈다.
― 좌파성 정책 기조가 언제까지 이어질까요.
“대선까지 계속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효과적으로 징벌할 수 있는 집단이 없잖아요. 경제는 IMF 버금가는 어려움이 올 겁니다. 민생은 도탄에 빠질 겁니다. 안보환경도, 외교환경도 점점 더 어려워질 겁니다. 결국 다음 대선은 문재인 정권이 만들어낸 대혼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 그게 주요 쟁점이 될 겁니다. 그때도 역시 선택에 대한 책임은 국민이 지는 겁니다.”
코카콜라는 자양강장제
코카콜라는 원래 탄산음료가 아니었다. 미국 남북전쟁 직후 남부 곳곳은 내전으로 황폐해져 있었다. 재건사업에 참여한 사람들이 피로 때문에 픽픽 쓰러졌다. 이들을 위해 애틀랜타 출신의 약사 존 페퍼튼이 ‘자양강장제’를 제조했다. 바로 최초의 코카콜라다. 코카나무 추출물과 콜라나무 열매를 이용했다. 둘 다 이전부터 약재로 쓰여왔다. 여기에 탄산과 감미료를 더한 게 지금의 코카콜라다. 그렇다면 코카콜라에서 톡 쏘는 탄산과 감미료를 줄이면 본래 모습인 자양강장제가 된다는 얘기다. 감미료는 마실 땐 달지만 역시 세포에 상처를 준다.
대선까지 1년4개월. 그때까지 홍카콜라는 자양강장제가 될 수 있을까. 홍준표 뒤에 붙는 꼬리표들을 스스로 끊어내고 달처럼 떠오를 수 있을까. 정치인 홍준표에겐 홍준표라는 우군(友軍)과 홍준표라는 적(敵)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홍준표는 홍준표를 극복할까. 연대가 계파를 이길 수 있을까. 2021년 한국 정치의 관전 포인트들이다.⊙
이병주 작가는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특유의 문체가 재료였다. 침착하고, 현대적이고 담백하다. ‘이병주라는 세계에 발을 디딘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문학 독서가들을 나눠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가끔 했다. 그의 책을 새삼 다시 꺼내 봤다니. 누군가를 오래 봤다고 잘 안다 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봐온 정치인 홍준표의 다른 면이 언뜻 비친 것 같았다. 지난 11월 11일 국회 의원회관으로 갔다. 마주 앉자마자 물었다.
― 왜 《지리산》이죠?
“40여 년 전에 처음 읽었습니다. 소설을 읽으며 해방 직후 좌익과 우익의 대립을 리얼하게 경험했죠. 이번에 다시 읽었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좌파와 우파 간의 극렬한 대립상황이 해방 직후의 좌익과 우익 사이의 대립 상항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다시 읽어보니 눈길이 가는 대목이 있던가요.
“박태영이 마지막에 한 말이 참 재미있습디다. ‘선택에 실패한 책임을 마지막까지 진다.’ 박태영은 공산주의를 선택했어요. 잘못 선택했단 걸 깨달았지만 자신이 선택한 실패에 마지막까지 책임을 지겠다, 이건 상당히 의미가 있어요.”
― 선택한 결과를 감수하자는 말씀이군요.
“심사숙고 끝에 선택을 했으면 그 선택에 책임을 지는 자세가 현대에서도 중요한 화두입니다. 지금은 세상이 그렇지 않죠. 선거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부를 잘못 선택하면 그 책임을 누가 집니까. 국민이 집니다. ‘선택의 실패에 책임 지는 자세가 국민 모두에게 요구되는 세상이다’, 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홍준표를 보는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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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채널 ‘홍카콜라’의 영상 중 한 장면. 사진=유튜브 캡처 |
첫째, 막말. ‘되는 대로 함부로 하거나 속되게 말함’이란 뜻이다. 홍 의원은 자신에게 씌인 막말 프레임의 기원을 ‘노무현 자살’이란 표현으로 봤다.
“자기들이 신처럼 모시는 노무현이 자살했다고 말했을 때부터 막말이라 하더라. 그 뒤부터 폐부를 찌르는 말을 하면 전부 막말이라 공격한다.”
언젠가 그가 페이스북에 쓴 말이다.
― 몇몇 지인에게 물으니 ‘홍준표’ 하면, 여전히 ‘막말’을 떠올리더군요.
“그게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막말’ ‘발정’, 전부 허위 프레임입니다. 그걸 드루킹이 증폭시킨 거 아닙니까. DJ(김대중)도 빨갱이 프레임으로 40년을 보냈어요. 그 프레임에서 1997년에 벗어났잖아요.”
― 막말이 홍 의원에게 유권자들이 접근하는 진입장벽이 되기도 합니다.
“전 그들의 표를 받을 생각이 없어요.”
― 그 표를 받아야 선거에 이기는데요?
“선택의 책임에 대한 실패는 국민이 지는 거예요. 국민은 본인의 판단에 따라서 투표하는 것이고, 거기에 대한 책임은 자신이 지는 거예요. 그게 민주주의 아닙니까.”
드루킹 댓글과 ‘홍준표 막말’
얼마쯤은 억울할 수도 있겠다 싶다. 대표적인 막말 발언으로 “개가 짖어도 기차는 간다”가 꼽힌다. 실은 소설에 등장하는 말이다. 마거릿 미첼의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6)에 나온다. 레트 버틀러가 스칼렛 오하라에게 한 말이다. ‘개가 짖어도 마차는 달린다(The dogs bark, but the caravan moves on)’는 타인의 눈치를 보지 말고 소신을 가지라는 뜻이다. 1993년엔 YS(김영삼)도 이 표현을 사용했다. 대통령 취임 후 ‘하나회’ 척결 의지를 밝힐 때였다.
홍 의원에게 물었다.
“지금까지 정치 역정 중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 언제입니까?”
그는 ‘성완종 회장 불법 정치자금 재판’을 꼽았다. 이때도 막말 논란이 함께였다.
“이미 지나간 사건이기 때문에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난 성완종 회장 몰라요. 1심 판결에서 1년6개월 실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재판장을 나오는데 기자들이 전부 달려들어 물었어요. ‘노상강도 당한 기분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판사를 노상강도에 비유했다’고 하루 종일 비난받았죠. 그때가 제일 힘들었습니다.”
가만히 뜯어보면, 논란이 된 그의 말들은 막말이라기보단 상황과 감정을 적시에, 예리하게 표현한 경우가 많다. 검사 생활에서 쌓인 ‘습(習)’이겠다. 검사 본능이라고 할까. 상대의 허점이나 모순을 남들보다 빨리 알아챈다.
여기에 언어가 더해졌다. 내용에 대한 동의 여부는 뒤로하고, 그의 문체는 여느 정치인의 언어와는 좀 다르다. 어휘는 풍부하고 표현은 정확하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독서는 인간의 정신을 풍요하게 하고, 토론은 인간을 유연하게 해주며, 글쓰기는 정밀한 인간을 만든다’고 했다. 홍 의원은 거의 매일 페이스북에 글을 올린다. 그날의 현안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는 일종의 공개 일기다. 모두 직접 쓴다. 이런 시간이 쌓여 그의 언어가 더욱 예리해진 듯하다.
당하는 사람은 힘들 수밖에 없다. 논리로 대적이 안 되니 ‘막말’로 몰아붙이기라도 해야 할 정도다.
― 정치인은 검사와 다르지 않습니까. 정치에 입문하고도 검사처럼 사신 거 아닙니까.
“검사는 선악(善惡)만 보면 됩니다. 정치판은 선악이 공존하는 판이었습니다. ‘선악만 추구하는 검사정치를 해선 안 되겠다’ 이 생각을 3선 때부터 하게 됐죠. 화이부동(和而不同)을 깨달은 거죠.”
― 그 후로 좀 달라지셨나요?
“그렇죠.”
그와 대화를 나눠보니, 생각이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화두에 대해서는 대체로 짧게 답하곤 했다.
탄핵 대선의 기억
2017년 탄핵 대선에선 ‘막말 논란’이 극에 달했다. 그가 유세 중 돌아가신 장인을 ‘영감탱이’로 칭했다며 ‘패륜’ 논란도 나왔다. 연설 전체를 들어보면 억지 비난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장인과의 일화를 구수히 풀어놓으며 그야말로 진짜 ‘양념’처럼 쓴 단어였다. 물론 그에게 덧입혀진 이미지를 고려하면 쓰지 않는 편이 좋았겠다. 대선 얘기를 꺼냈다.
― 대선 유세에서 노래도 부르셨지요.
“그때 제가 경남지사를 하고 있었죠. 인명진 비대위원장이 창원으로 내려왔습니다. ‘대선에 출마해달라’고.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에 당 지지율은 4%로 떨어져 있었습니다. 궤멸된 당이었습니다. 당에서는 아예 대선 준비를 안 했습니다. 당 차원의 대선 공약도 없었어요. 심지어 언론에 교육 공약이 빈 칸으로 나간 적도 있어요.”
그의 말이 이어졌다.
“제가 이 당에 20년 이상 있었습니다. 탄핵당한 당이지만 여당이었어요. 여당에 대선주자가 없다는 것도 말이 안될뿐더러, 당이 궤멸되는 걸 보기 안타까웠어요. 당이라도 재건해야겠다, 그런 생각으로 대선에 나간 겁니다. 문재인 후보를 이겨보겠단 생각은 없었어요.”
그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경기도 어느 지역에 유세를 와달라 해서 갔습니다. 개천변에 한 20~30명 모아놓고 유세를 하라고 해요. 동네 기초의원 선거도 아니고. 유세장에 가보면 자유한국당 출신 자치단체장이나 국회의원을 본 적이 별로 없을 정도였어요. 그때 대선자금을 국민은행에서 빌렸어요. 국민은행에서 매일 여의도연구원에 와서 후보 지지율을 체크했어요. 득표율 15%를 못 넘기면 돈을 못 받으니까요. 문재인·안철수 후보는 TV 광고를 44회 했습니다. 우리는 11회 했어요. 당을 장악하고 있던 세력들이 돈을 못 쓰게 했어요. 문재인·안철수 후보보다 대선자금을 150억가량 덜 썼습니다. 참 기가 막힌 대선을 치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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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3일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선 후보가 대구 동성로 대구백화점 앞에서 유세를 펼치고 있다. 사진=조선DB |
“제가 왜 지역마다 다니면서 마이크 쥐고 노래부터 했겠습니까. 세상에 대선 후보가 유세장 다니면서 마이크 들고 노래하는 사람이 어딨습니까. 오죽 답답하면 그런 퍼포먼스까지 하면서 선거를 치렀겠습니까. 탄핵당한 정당의 말을 국민들이 들으려 하지 않았어요. 노래라도 해서 현장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고 연설하는 것이 옳겠다 싶었어요. 이런 대선이면 앞으론 절대 출마 안 합니다.”
당시 몇 번인가 그의 유세를 지켜봤다. 말이 유세지 ‘홍준표 원맨쇼’였다. 박근혜 대통령이 그리 되고 마음 둘 데 없던 보수 지지자들이 그의 유세장을 찾았다. 가난했던 시절 얘기를 들으며 눈시울을 붉히고, 노래를 따라 부르며 박수를 쳤다. 어느 순간엔 ‘한풀이 굿’으로 보였다.
― 유세장이 보수 우파들의 상실감을 달래주는 한풀이 굿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대구 동성로에 10만명이 모였죠. ‘홍도야 울지 마라’ 부를 때는 박근혜 대통령을 생각하면서 부를 수밖에 없었죠. 대구 사람들이 다 울고 있었어요. 그걸 10만명이 따라 불렀어요. 부산에선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불렀죠.”
그러나 그에게 대선은 좋지 않은 기억이었다.
“다른 후보들은 TV토론 전날부터 공부를 하고 토론 당일엔 유세를 안 했어요. 나는 오후 5시까지 거리 돌아다니다가 7시에 라면 한 그릇 먹고 토론장에 갔습니다. 저로서는 힘들고 슬픈 선거였어요. 결과가 나오고 참으로 다행이다 생각했어요. 당의 재정파탄은 막았으니까요.”
득표율 24.1%라는 선전을 했지만 그의 한(恨)은 풀리지 않았다.
“친박들이 용도 폐기용으로 저를 선거에 내보낸 거죠. 저를 불쏘시개 삼아 당을 좀 맡겼다가, 기본적으로 자기들과 생각이 다르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제가 나가고 황교안 전 총리를 불러서 수렴청정을 한 거죠. 총선에서 망하고 나선 그다음에 외부에서 총독이 들어온 거죠.”
드루킹 上線특검 했어야
― ‘총독’은 누가 모셔왔나요.
“제가 언론에 ‘김종인 비대위원장 체제’를 제일 먼저 띄웠어요. 사실 모 인사한테 부탁을 받았습니다. 언론에 띄워달라고요. 김종인 쪽으로 급속도로 분위기가 돌아갔어요. ‘대안이 없지 않으냐.’ 그런데 분위기가 그렇게 되자 김 위원장이 이래요. ‘당헌·당규를 넘어서는 권한을 달라, 임기 없는 무기한 권한을 달라.’
그걸 들으면서 ‘큰일 날 분이다. 한국 보수 우파 정당의 뿌리가 이 당인데 당을 얼마나 얕보고 깔보면 이런 얘기를 하겠느냐, 당의 헌법을 넘어서는 비상대권을 쥐겠다? 쿠데타 상황인가.’”
― 그래서 후엔 김종인 비대위에 반대하셨군요. 어쨌든 비대위 출범에 일조하셨네요.
“나도 깜박했지.(웃음) 처음엔 그분밖에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리 나오는 거 보고, ‘아이고, 이분 들어오면 큰일나겠다. 독재하겠다’ 싶었어요.”
― 김경수 경남도지사가 2심에서 징역 2년 실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지난 대선에 드루킹 댓글이 실제로 영향을 미쳤다는 방증 아닙니까.
“나경원 대표 시절에 김경수 1심 판결이 났죠. 판결문을 보면 윗선이 있다는 게 나와 있어요. 당이 제대로 하려면 그때 상선(上線)특검을 추진했어야 해요. 상선특검을 추진하면 수혜자가 홍준표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무시한 게 아닌가 싶어요.”
홍 의원을 따라다니는 두 번째 단어는 ‘독고다이’다. ‘권위적일 것 같다’는 인상 평가도 있다. 사실일까. 권위적이라는 건 지위나 권력을 내세워 상대를 억압한다는 뜻이다. 기자가 느낀 건 좀 달랐다. 그는 권위적이기보단 방어적으로 보였다. 마주한 상대의 체급과 속내를 파악하고 나서야 방어 태세가 풀린다. 검사생활의 습관과 정치생활 내내 계파 없이 살아온 세월 탓이 아닐까 싶다.
인터뷰 전 그의 보좌진에게 홍 의원의 정확한 생년월일을 물었다. 사주풀이를 맹신하진 않지만, 가끔은 의외의 실마리가 되기도 해서다. ‘모른다’는 즉답이 돌아왔다. 생년월일은 공개하지 않는다고 했다. 더 궁금해졌다.
― 생년월일시를 왜 공개 안 합니까.
“제 정확한 생년월일은 아내와 저밖에 몰라요. 절대 안 가르쳐줘요.”
― 운명을 믿으세요.
“그렇습니다.”
―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세요.
“고정되지 않았습니다. 내 선택에 따라 언제든지 바뀔 수 있어요. 자기 노력하기 나름이지. 자기가 가야 할 방향을 보고 거기에 대해서 철저히 준비하는 과정이 노력입니다.”
묘한 대답이었다. ‘운명은 있지만 바꿀 수 있다’, 귀를 더 가까이 대보면, 선천적 운명에 대한 분노로도 들린다. 그러고 보니 인생의 중요한 몇몇 순간마다 그는 노력으로 운명의 방향을 틀었다.
― 고등학교 선생님이 ‘네가 고려대 법대에 합격하면 장을 지지겠다’고 했다지요.
“저는 이과였으니까요. 이과에서 문과를 갈 수 없었어요. 그때 이미 육군사관학교는 합격해놓은 상황이었으니 육사 가라고 종용한 거죠.”
그는 원래 의사가 되려고 했다. 경북대 의대 진학을 꿈꿨지만 학비가 문제였다. 학비 걱정이 없는 육사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다 어느 날 곤욕을 치르는 부친을 봤다. 비료를 훔쳤다는 누명을 썼다. 아무 말도 못 하는 아버지를 보며 수험생 홍준표는 다시 인생의 운전대를 틀었다. ‘검사가 돼야겠다.’ 부친의 무죄는 2년 후 밝혀졌다. 그가 검사로 가는 길로 이미 들어선 후였다.
― 육사에 갔으면 하나회라도 들어갔을까요.
“그랬겠죠? 전두환 대통령이 그때 합천 출신 인사를 엄청 찾았답니다. 제가 합천에 산 적이 있으니까요. 인생이라는 게 그렇습디다. 경북대학교에 갔으면 의사가 됐을 거고, 육사 갔으면 전 대통령 졸개 됐을 거고, 검사 됐으니까 내 인생을 산 거지.”
대선 철이 되면 단골로 등장하는 키워드가 있다. ‘태몽(胎夢)’이다. 그의 태몽은 ‘달’이다. 모친이 달을 치마폭으로 안았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태몽을 믿는 이들은 해, 달, 별을 최상급으로 친다. 용이나 호랑이보다 높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태몽도 달이다. 모친이 꿈에서 광채를 뿜는 달 덩어리를 웅덩이에서 건져 연신 치마폭에 담았다고 한다. 이명박 대통령도 마찬가지로 달이 태몽이다. 뒷동산에 보름달이 떠올라 동네가 환해지는 꿈이었다고 한다. 형제 중 혼자 정해진 돌림자를 안 쓰고 ‘명박(明博)’으로 이름 지어진 이유다.
지역 세 번 옮겨 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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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대구 수성구 수성못에서 유세 중인 홍준표 당시 무소속 후보. 사진=조선DB |
― 결과적으론 이번 총선이 전화위복이 된 게 아닙니까.
“총선을 두 달 앞두고 지역구를 세 번 옮긴 사람은 선거사상 제가 처음일 겁니다. 선거 29일 전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지요. 그러니 무슨 조직이 있겠습니까. 나 혼자 선거했죠. 당대표를 두 번이나 하고 대통령 후보까지 한 사람을 이렇게까지 할 수도 있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 무소속 생활은 어떠했습니까.
“좋은 점이 있어요. 당 내부 문제에 얽매이지 않으니까 마음은 편하죠. 당 안에만 머물지 않으니 당 밖의 더 큰 세상이 보입니다.”
― 김종인 비대위 체제는 앞으로 어떻게 되나요.
“국민이 국민의힘을 야당으로 보지 않아요. 민주당 2중대로 보고 있습니다. 제1야당인데 뚜렷한 대선 주자도 없죠. 생각해보세요. 김종인 체제 들어오고 난 뒤에 야당다운 행동을 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습니까.”
戰士는 없고 패셔니스트만
― 조국, 추미애 장관, 공무원 피살 사건, 옵티머스, 라임 등 이슈가 이어지는데요.
“그렇죠. 국민이 왜 야당을 대안정당으로 인식하지 않을까. 야당은 싸워야 됩니다. 싸움을 안 하고 있잖아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끌려다니고 있잖아요. 그러면서 반사적 이익으로 선거에 이길 수 있나. 그건 어렵죠. 제가 25년간 이 정당에 있었는데, 이 당의 사람들은 무기력해요.”
― 이유가 뭔가요.
“이미 본인들은 4년 임기가 보장돼 있으니 현실에 안주하는 거죠. ‘2중대라도 좋다. 싸우면 피곤하니 안 싸우는 게 좋다’ 이렇게 야당 노릇을 어떻게 해요? 그건 야당이 아니죠. 국민이 국민의힘을 ‘국민의 짐’이라 놀려도 화내는 사람이 없어요.”
― 당사 구입도 좀 의아했습니다. 당사야 있으면 좋지만 하필 이 시국에요. 천막 당사 같은 결기가 아쉽습니다.
“지금 텐트 치고 투쟁할 사람이 그 당에 없어요. 라임 사건, 옵티머스 사건을 제대로만 특검 수사 추진하면 이 정권 무너진다고 나는 봅니다. 권력비리 중에서도 한참 깊숙한 권력비리로 나는 봅니다. 특검 추진하겠다 해놓고 무기력하게 딱 쇼 한 번 하고 끝났어요. 민주당이 왜 겁을 내겠어요?”
― 왜 그렇게 됐나요.
“당에 전사(戰士)가 필요한데 패셔니스트들(fashionist)이 너무 많습니다.”
― 어쩌다 그런 분들만 당에 모이게 됐나요.
“황교안 전 대표가 남긴 족적(足跡)이죠. 대여 투쟁한 사람을 다 쳐냈잖아요. 한국 보수 우파들은 박근혜 탄핵 때 궤멸당했습니다. 과연 박근혜가 대통령직에서 쫓겨나고 구속될 만한 일이었느냐, 그건 다시 반성해봐야 합니다.”
中道는 없다
― 김종인 위원장은 이명박·박근혜 두 대통령의 재판 결과가 나오면 대국민 사과를 하겠다는데요.
“민주당이 노무현·김대중 실정에 사과한 적 있습니까. 그리고 왜 본인이 사과를 합니까. 그분은 당의 비상상황 극복이란 임무만 하면 되는 거예요. 두 대통령의 역사적 공과에 대해서는 그분이 사과할 문제가 아니에요. 국민한테 다시 평가를 받으면 되는 거예요.”
― 그래야 중도(中道)층을 끌어안을 수 있다는 뜻이겠죠.
“중도라는 건 없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스윙보터(swing voter)’예요. 이쪽으로 저쪽으로 갔다가 흔들리는 계층이에요. 미국에도 ‘스윙보터주(州)’가 있잖아요. 지난번엔 트럼프, 이번엔 바이든. 이쪽 세력이 강해지면 스윙보터 층은 따라오게 되어 있어요. 중도를 위한 정책이라는 건 없습니다. 보수 우파냐, 진보 좌파냐, 보수 진보를 넘어선 국익을 위한 정책이냐. 3가지 기준만 있을 뿐이에요.”
― 집토끼나 잘 챙기라는 말씀인가요.
“선거라는 건 자기편 강화입니다. 자기편이 튼튼하면 외연(外延) 확장을 할 수 있어요. 본인은 허술한데 외연 확장하다 보면 자기편도 놓치고 외연 확장도 안 됩니다.”
―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중도를 표방했는데요.
“지난 대선 때 제가 안 대표를 두고 그런 표현을 했어요.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윤선도의 ‘오우가(五友歌)’에 나오는 말입니다. 나무면 나무, 풀이면 풀이라 하고, 나머지 사람들을 끌어들여야지, 좌파도 우파도 아니고 상식파다? 겪어보니 사람은 참 착해요.”
― 야당을 답답해하는 국민들이 많습니다.
“일모도원(日暮途遠)입니다. 탄핵을 기점으로 서로를 손가락질하기 바쁘고, 대여투쟁보다는 당에서 서로 비방하고 음해하고 폄하하는 데만 혈안이었던 4년입니다. 그러니 이 당이 무슨 결집된 힘으로 문재인 정권과 투쟁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당에 새롭게 들어온 분들이 절박감이 있을 리 있겠습니까. 임기가 4년이나 남았는데. 다음 대선에 목숨 걸 사람들이 과연 몇 명이나 되냐 말이에요.”
빅텐트 아래 反文 모여야
― 그럼 어떻게 하나요.
“전부 모아야죠.”
― 빅텐트(Big Tent)요?
“그렇죠. ‘태극기 세력은 극우라 손절한다’는 지난번 김종인, 주호영 두 분의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극우라는 것은 전체주의입니다. 우리나라에 전체주의자가 어딨습니까. 태극기 세력은 아스팔트 우파나 강성우파라고 봐야죠. 민주당이 강성좌파인 민주노총과 절연을 합니까.”
― 절연한 적 없죠.
“안 하죠. 그들의 행동 패턴을 우리가 따라갈 필요는 없지만, 태극기 세력과 왜 손절을 합니까. 남아 있는 세력을 전부 모아도 부족할 판인데요. ‘저들은 강성우파라서 싫고, 저 사람은 나와 개인적인 악감정이 있으니 싫고, 저 사람은 내가 앞으로 당권을 장악하는 데 장애물이 될 거 같으니 싫고’ 쪼개고 분열시켜 조그마한 성(城)을 만들어, 거기서 소영주(小領主)라도 계속 하겠다는 생각으로 무슨 보궐선거가 되고 대선이 되겠습니까.”
― 재집권을 위해 보수 대연합을 해야 한다는 말씀인가요.
“보수 대연합이란 표현도 안 써요. ‘문재인과 좌파정권에 반대하는 사람은 다 모여라’, 일단 힘을 모아 정권부터 가져와야지요.”
― 그만큼 비상한 시국이란 뜻이군요.
“오늘(11월 11일) 윤석열 검찰총장이 한길리서치 여론조사에서 대선주자 지지율 1등을 했습니다. 그게 윤석열 개인에 대한 지지였겠습니까. 반문(反文) 정서가 집결된 거죠. 반문 정서가 그만큼 강한 겁니다. 지금은 윤 총장이 혼자 유일하게 야당 역할을 하고 있잖아요. 국민의힘이라는 당은 2중대 정당이 된 지 오래고요. 그러니 윤 총장에게 여론이 모이죠.”
― ‘윤 총장이 임기 마치고 정치하겠다고 야권에 오면, 우리가 모시고 판을 잘 만들어보겠다’고 인터뷰에서 말씀하셨는데요, 킹메이커도 하실 수 있다는 뜻인가요.
“킹메이커가 아니고, 경선에서 뽑힌 사람이 다음 대선에 나가는 거죠. 당원과 국민이 선택한 결과는 그 누구라도 존중해야 합니다. 특정인이 앉아서 ‘이 사람은 우리 당 대선 후보 안 된다’고요? 미국의 정치인 버니 샌더스는 지난 대선에서 무소속이면서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들어갔잖아요. 반문재인 전선을 하나로 만들어서 자유 경선을 거쳐 후보가 되는 사람이 1대 1로 여당과 맞서면 선거에 이길 수 있다고 봅니다.”
문득 궁금했다. 일생 뚜렷한 계파 없는 그의 정치 인생은 어땠을까.
― 외롭지 않으셨어요.
“외롭다기보다, 힘들게 산 거죠. 무리에 끼어들면 편해요. 나홀로 헤쳐나가려면 모든 것이 힘들어요. 15대 때 지금 국민의힘으로 정계 입문한 이들 중 현역은 나밖에 없어요. 내가 무리에 끼어 있었다면 진작 끝났죠. 혼자 헤쳐나갔기 때문에 지금도 건재하고 있는 겁니다. 힘들지만 잘 헤쳐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만약 그가 계파 비슷한 데에 속한 적이 있다고 한다면 친이계일 것이다. 그 자신은 부인하지만 말이다.
MB의 사과
― MB(이명박) 접견 가셨다면서요. 무슨 얘기 나누셨어요.
“1999년 제가 워싱턴에 머무를 때 MB와 형님 동생 하며 지냈습니다. 전 친이계는 아니지만 정치적 입장을 떠나 참 안됐죠. 제가 MB 시절에 만약 장관이나 총리 했으면 벌써 은퇴했겠죠. MB 재임기간 동안 저를 잘 봐주거나 한 건 하나도 없어요.”
― 법무부 장관 하고 싶었는데 못 하셨죠.
“그건 날 앉히면 이상득 의원 조사할까 봐 안 시킨 거고.(웃음) 지난번 지방선거 끝나고 미국 가기 전에 MB에게 면회를 갔어요. 미안하다고 하더군요. 재임 시절 저를 홀대했다고요.”
― 사과를 받겠다고 하셨나요.
“이리 답했죠. ‘그 시대는 이명박 대통령의 시대입니다. 대통령 통치철학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내가 서운해할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니 거기에 대해서 부담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라고.”
총선이 끝나고 그는 페이스북에 글을 썼다. 자신의 무소속 출마를 비(非)우호적으로 보도한 일부 언론과 유튜버들에 대한 항의였다.
― 그런 걸 왜 쓰셨어요.
“그때 얼마나 절박했어요. 언론에서도 나를 비난했어요. 무소속 출마라고요. 나를 도와준 사람들은 일부 극소수 유튜버였어요. 그 사람들이 굉장히 고마웠어요.”
― 고마움을 표시하는 건 좋지만 비난할 건 없잖아요. 그리고 그런 건 직접 말씀 안 하셔도 되고요.
“만약 대신 싸워주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나서서 싸울 필요가 없죠. 그런 걸 속에 넣고 살면 병이 생긴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할 말은 해버리고 털어버려야지요. 할 말을 안 하고 가슴속에 꽁하게 두면 속병 생겨요.”
― 대신 싸워줄 전투부대가 지금은 있나요.
“내가 누구라고 말은 안 합니다만, 대신 싸워주는 화력 좋은 사람들이 당에 많이 생겼어요.”
― 누구요?
“누구라고 얘기하면 안 되지.”
40년 엄처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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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자유한국당 대선주자인 홍준표 후보 부인 이순삼씨가 서울 잠실의 자택에서 홍 후보의 트레이드 마크인 ‘빨간 넥타이’를 보여주고 있다. 사진=조선DB |
“그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 검사가 된 후 비로소 알았다.”
다른 이의 자기 고백을 볼까. 탁현민 청와대 의전비서관은 대담집 《말할수록 자유로워지다》(2007)라는 책에서 “고등학교 1학년 때 친구들과 여자 중학생을 공유했다”고 밝혔다. “임신한 교사가 섹시해 보였다”고도 썼다. 더한 대목도 있지만 이만 줄이겠다. 탁 비서관은 현재 청와대에 근무 중이다. 성(性) 감수성 얘길 하려면 최소한 진영에 상관없이 같은 잣대는 들이대야 하지 않을까 싶다.
설거지는 안 했을지 몰라도 홍 의원 본인 표현으론 40년간 엄처시하(嚴妻侍下)에서 살았다고 한다.
“집사람이 좀 엄합니다. 밖에서 여성을 대할 때 어떻게 조심해야 하는지 젊을 때부터 교육을 해줬어요. 60세가 넘고 난 후에는 말 안 해도 알아서 잘 하니까, 교육을 안 시킵니다.”
가수 데뷔를 막은 것도 엄처(?) 이순삼씨다.
― ‘검사가수 홍준표’로 음반 제의를 받았다는 게 사실인가요.
“지금은 목소리가 갔는데(나빠졌는데) 검사 할 때까지도 노래 잘했어요. 이미자 노래 부르면 가장 높은 고음까지 올라갔다니까요. 가수 주현미가 ‘약사가수’로 이름을 날렸잖아요. 음반사에서 약사가수가 성공했으니까 검사가수 메들리 취입하자고 했어요. 나는 하고 싶었는데 집사람이 절대 안 된다고 해서 안 했어요.”
홍 의원은 아내를 대학생 때 만났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대구 동성로에서 정치버스킹(길거리 정치토크)을 하는데 남자 대학생이 말해요. ‘취업도 안 되고 일자리도 없고 힘들다. 여자를 만날 생각이 없다’고. 제가 답했습니다.
‘내가 대학교 3학년 때 힘들고 어렵고 앞날이 안 보였다. 그 시절에 국민은행 안암동 지점에서 근무하던 행원을 만났다. 아내다. 둘이서 힘을 합하니 어려운 시절을 극복할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해볼 수는 없겠나.’
힘든 시절이 있어도 혼자가 아니라 집사람과 힘을 합쳐서 극복했다고 생각합니다.”
홍 의원 주변인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부부는 사이가 상당히 좋다고 한다. 두 사람이 결혼할 때를 떠올리며 그는 이런 표현을 썼다. ‘유랑민에서 정착민이 된 것 같았다.’
까막눈 엄마
그리고 홍준표의 인생에 또 한 명의 잊을 수 없는 여성이 있다.
― 젊은 시절 힘들 때 누구에게 기대셨어요.
“엄마입니다. 내 인생의 멘토는 까막눈 엄마입니다. 자식을 위해 헌신만 했어요. 경남지사 할 때는 창녕 산소에 한 달에 한 번씩 갔습니다. 서울 올라오고 난 뒤에는 갈 기회가 없어서 좀 그랬죠. 이제 대구가 지역구니까 가끔 갑니다.”
그는 정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로 경남도지사 시절을 꼽았다. 고향이자 모친의 산소 부근에서 아내와 함께 머무르는 데서 오는 안정감도 한몫했을 듯하다.
“젊을 때는 어머니한테서, 나이 든 후엔 집사람한테서 정신적인 안정을 찾았죠.”
― 지난 대선의 후폭풍이 있었다고요.
“뒷조사를 1년6개월 정도 받았죠. 제가 경남지사 4년4개월 동안 했던 사업을 전부 재조사했어요. 제 아들, 집사람 계좌 다 열어보고, 통신조회했다고 통지서는 계속 오고… 털어도 나오는 게 없으니 그만했지.”
― 검증을 받은 셈이네요.
“저는 기본적으로 먹고살 것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부정하게 돈 벌 기회도 있었어요. 1993년 슬롯머신 수사할 때였어요. 정덕진 형제가 ‘수사를 안 하면 100억원을 준다’고 했어요. 어이가 없어서 물었어요. ‘100억이면 도대체 부피가 얼마만큼인가?’ 그때는 1만원짜리니까. 사과상자로 50상자예요. 둘 데가 어딨어요. 그 사람들 재밌는 얘기를 하대. 양도성예금증서(CD)로 주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편지봉투 하나에 100억원이 들어간다고요.”
― CD는 현금화할 때 신상이 노출되는데요.
“그 얘기도 물어봤어요. ‘남대문시장 어디에 가면 10%만 떼고 바꿔준다. 90억원은 당신 돈이다’라고 방법까지 가르쳐주더라고.”
― 지역구던 동대문에서 재개발이 활발했는데 새 아파트 욕심이 안 나셨어요.
“분수에 넘치는 돈을 추구하면 그게 재앙의 근원이 됩니다.”
손자뻘 홍남기

― 국정감사 때 홍남기 부총리한테 전셋집 구했냐고 물으셨잖아요. 홍 부총리가 ‘나중에 답하겠다’ 하던데, 답 들으셨어요.
“말 안 해주더라고요. 홍남기 부총리가 남양 홍씨 항렬로 하면 제 손주뻘입니다. 좌파정권에 부역해서 나중에 얼마나 비난받을지 참 딱해요. 사표 내버리지 뭐한다고 붙어 있나, 그게 딱해서 물어본 거예요.”
― 청와대에서 사표 반려했잖아요.
“후임을 구하기 어려울 겁니다. 아무도 안 들어가려 할 거예요. 정권 말기인데 잘못 들어가게 되면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니까요.”
― 이제 이 정권의 임기가 1년 반 남았습니다.
“남의 눈에 눈물 나게 하면 자기 눈에선 피눈물 나는 게 사람 사는 이치입니다. 난 문 대통령 퇴임 후가 걱정이에요. 원래 권력 비리는 재임 중엔 안 터져요. 겁이 나니까. 퇴임 후에 나옵니다. 국민이 몰아붙이면 어느 정권이 들어서든 수사 안 할 수 있습니까?”
그의 별명 목록 중엔 ‘홍스트라다무스’도 있다. 판문점에서 열린 4·27 남북정상회담을 두고 ‘위장평화쇼’라 했다. 당시엔 ‘막말’ 비난을 받았고, 후에 사실로 증명됐다. ‘총선 선거날이 되면 황교안과 홍준표 둘 중 하나는 집에 간다’고도 했다. 황 전 대표는 개표가 끝나기도 전에 귀가했다. 궁금했던 질문을 꺼냈다.
― 좌파성 정책 기조가 언제까지 이어질까요.
“대선까지 계속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효과적으로 징벌할 수 있는 집단이 없잖아요. 경제는 IMF 버금가는 어려움이 올 겁니다. 민생은 도탄에 빠질 겁니다. 안보환경도, 외교환경도 점점 더 어려워질 겁니다. 결국 다음 대선은 문재인 정권이 만들어낸 대혼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 그게 주요 쟁점이 될 겁니다. 그때도 역시 선택에 대한 책임은 국민이 지는 겁니다.”
코카콜라는 자양강장제
코카콜라는 원래 탄산음료가 아니었다. 미국 남북전쟁 직후 남부 곳곳은 내전으로 황폐해져 있었다. 재건사업에 참여한 사람들이 피로 때문에 픽픽 쓰러졌다. 이들을 위해 애틀랜타 출신의 약사 존 페퍼튼이 ‘자양강장제’를 제조했다. 바로 최초의 코카콜라다. 코카나무 추출물과 콜라나무 열매를 이용했다. 둘 다 이전부터 약재로 쓰여왔다. 여기에 탄산과 감미료를 더한 게 지금의 코카콜라다. 그렇다면 코카콜라에서 톡 쏘는 탄산과 감미료를 줄이면 본래 모습인 자양강장제가 된다는 얘기다. 감미료는 마실 땐 달지만 역시 세포에 상처를 준다.
대선까지 1년4개월. 그때까지 홍카콜라는 자양강장제가 될 수 있을까. 홍준표 뒤에 붙는 꼬리표들을 스스로 끊어내고 달처럼 떠오를 수 있을까. 정치인 홍준표에겐 홍준표라는 우군(友軍)과 홍준표라는 적(敵)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홍준표는 홍준표를 극복할까. 연대가 계파를 이길 수 있을까. 2021년 한국 정치의 관전 포인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