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의 書架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언론학부 명예교수

“북한 신문 연구하며 느꼈다, 우리가 얼마나 자유로운 국가에서 살았는지”

  • 글 : 하주희 월간조선 기자  everhop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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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언론사 연구의 산실, 1만여 권 書架 정리하는 정진석 교수
⊙ 조선 독립에 목숨 바친 영국 언론인 배설 조명, 배설 유언은 ‘나는 죽을지라도 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동포를 구하라’
⊙ “춘원 이광수, 육당 최남선에 친일 낙인? 역사는 넓게 봐야”
⊙ 전쟁 시기 남북한 신문 비교해 북한 언론사로 연구영역 넓혀

鄭晋錫
1939년생. 중앙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석사(신문학), 영국 런던대학 정치경제대학 박사(언론학) / 한국기자협회 편집실장, 관훈클럽 사무국장, 언론중재위원회 위원, 방송위원회 위원 역임 / 現 한국외국어대 언론정보학부 명예교수, 서재필기념회 이사 / 저서 《대한매일신보와 배설》 《전쟁기의 언론과 문학》 《한국언론사》 외 다수
연구실에서 만난 정진석 교수, 사진=조준우
덩달아 마음이 급해졌다. 전화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에 초조함이 묻어 있었다.
 
  “조만간 책이 모두 옮겨갑니다. 이번 주라도 와보는 게 좋겠습니다.”
 
  내친김에 다다음 날인 2월 28일에 바로 찾아가기로 했다. 시간도 아침 일찍으로 정했다. 그럴 필요까지 없었는 데 말이다.
 
  주소를 들고 찾아가 보니 서울 반포동의 어느 상가건물 한편이었다. 현판이라고 해야 할까, 하얀 출입문엔 이름표마냥 손바닥만 한 종이가 붙어 있었다. 이런 곳이 있다 알리기보단, 방문객에게 이곳이 맞는지 겨우 확인해줄 정도의 작은 글씨가 쓰여 있었다. ‘정진석 연구실’,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의 이제 곧 없어질 서재였다.
 
 
  서가 자체가 작은 ‘言論史 박물관’
 
  연구실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건 역시 책장이다. 창문이 있는 쪽 빼고는 3면이 온통 책장이었다. 언론 관련 단행본부터 각종 영인본, 영어와 일본어 원서, 제본해서 정리한 자료 등이 책장마다 가득했다.
 
  자세히 보니 15평(49.5m2) 공간은 대략 둘로 나뉘어 있었다. 한쪽엔 책상과 의자, 소파를 놓았다. 물론 여기에도 모든 벽엔 책장이 도열하고 있다. 다른 쪽엔 책장을 열을 세워놨다. 효율적으로 많은 책을 꽂기 위해 마치 도서관처럼 복도식으로 책장을 배치했다. 손에 닿지 않는 책이 한 권도 없도록 꼼꼼히 책장 위치를 조정했다.
 
  언뜻 봐도 간단한 서재가 아니었다. 책을 분류해 꽂아놓은 방식과 책 제목에서 서재 주인이 들인 세월과 수고가 느껴졌다. 작은 ‘언론사(言論史) 박물관’이었다. 소파에 앉아 제대로 안부도 나눌 틈 없이, 정 교수는 기자를 채근하며 책과 인사를 나누게 했다.
 
  “이쪽은 주로 만화에 대한 역사, 여기는 신문 소설에 대한 역사예요. 신문이 워낙 종합적인 매체라, 통사도 있지만 분야사도 있어요. 이 칸은 광고발달사, 여긴 주로 언론사이고, 이쪽은 제 개인 저서입니다. 지금까지 27권쯤 썼어요. 서재의 책장은 주문한 겁니다. 맨 아래 칸은 타블로이드판이 들어갈 수 있게 높게 제작했어요. 위로 올라올 때마다 높이를 조금씩 줄였어요.”
 
  ― 책이 몇 권이나 있는 겁니까.
 
  “소책자들을 하나로 묶어놓은 책들이 많아요. 그런 책을 한 권으로 치면 8000권, 소책자들을 각각 세면 1만 권가량 됩니다.”
 
 
  1만여 권 책이 자아내는 書相
 
  반려동물도 함께 오래 살면 주인을 닮는다고 한다. 공간도 그런 것 같다. 서재마다 독특한 인상이 있다. 《조선일보》에 〈조용헌 살롱〉을 연재하는 동양학자 조용헌씨는 그것을 ‘서상(書相)’이라 표현했다.
 
  “서상을 보면 그 사람의 정신적 깊이와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다년간의 경험에 의하면 관상(觀相)이 불여(不如) 서상(書相)이다.”(〈조용헌 살롱〉, ‘DJ 장서 3만 권’ 中)
 
  정 교수의 서재는 전체적으로 평온해 보였다. 큰 창문이 있어서일까. 작은 공간에 1만 권 가까운 책이 밀집해 있는데 답답하거나 위압감이 느껴지지 않는 게 의아했다. 서재 주인이 얼마나 책들을 다독거렸는지 느껴졌다.
 
  “이 건물을 지을 때쯤 IMF 시기를 맞은 거예요. 그 바람에 상가들이 미분양 됐어요. 마침 집도 바로 옆이라 상가를 분양받았지요. 지금 생각하면 여기서 행복하게 잘 지냈어요. 문간에 사다리가 놓여 있잖아요? 방울을 달아놨어요. 평소엔 문을 열어놓고 입구에 사다리를 놓아요. 그러면 사람이 오면 방울이 울려 금방 알 수 있잖아요. 여기서 책도 읽고 글도 썼어요.”
 
 
  황영조 석사 논문까지 서가에
 
정진석 교수의 서가. 사진=조준우
  그러고 보니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정 교수의 글은 문장이 담백하고, 편안하다. 최근에 증보판을 낸 《전쟁기의 언론과 문학》 같은 책은 논문 수준의 내용인데도 술술 읽힌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아 편안하고, 어딘가 따뜻하다. 그런 문장은 쉽게 읽혀도 따라 하기 힘들다. 활자의 투입과 산출이 일정량 이상 되어야 구사할 수 있다. 이런 서재에서 쓰여서일까. 서재 소개가 이어졌다.
 
  “저기는 신문사 사사(社史) 모음입니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것도 있고, 지방 신문사 사사도 있죠. 아래쪽에 쭉 꽂혀 있는 건 《매일신보》 영인본(影印本)이에요. 일제 총독부 조선어 기관지였죠. 85권짜리예요. 만드는 데 조언해줬어요. 이건 《대한매일신보》 영인본입니다. 지금은 데이터베이스화가 됐어요. 사람들이 몰라서 그러는데 연구하는 사람들은 종이책으로 자료를 봐야 해요.”
 
  영인본은 원본을 촬영해 복제해 만든 책을 말한다. 책장 맨 아래 칸의 상당 부분은 《경성일보》 영인본이 채우고 있었다. 총 216권.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경성일보》는 일제 총독부가 낸 일어판 기관지다.
 
  서재엔 ‘언론인’에 관한 자료들도 있었다.
 
  “이건 내가 만든 전 세계에서 유일한 자료예요. 논문을 쓰면서 잡지와 책에 실린 함석헌에 관련된 글들을 찾아 복사해서 묶어놨어요. 여기서부턴 장준하 관련, 이쪽엔 월북한 장기수 이인모의 회고 글들이에요. 월북·납북 관련 연구를 하면서 수집했어요.”
 
  서가엔 심지어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황영조의 석사 논문집도 있었다.
 
  “이쪽은 손기정 자료예요. 일장기 말소와 관련해 세미나하면서 자료를 모았어요. 황영조의 석사 논문 주제가 ‘손기정’입니다.”
 
  ― 자료 모으시는 데 돈은 얼마나 쓰셨나요.
 
  “얼마라고 계산할 수 없지요. 다만, 영인본은 해제를 써주거나 자문해주고 한 질씩 받은 경우가 많아요.”
 
 
  컴퓨터 내부도 작은 서재
 
  정 교수는 이 연구실을 아예 정리하는 참이었다. 서가도 통째로 어딘가로 옮겨가야 했다. 이사 마감 시한은 다가오는데 갈 곳은 확실치 않았다.
 
  “착잡합니다. 몇 군데서 인수 의사를 밝히다가 잘 안 됐어요. 조건은 딱 두 가지예요. 첫째, 무상이다. 둘째, 골라서 가져가지 말고 통으로 가져가라. 이런 조건인데 주는 쪽이 을이에요. 받는 쪽이 갑이고요. 갈 데가 없어요. 보시다시피 제대로 진열하려면 방 크기가 두 배쯤 되어야 하잖아요.”
 
  기증이 이뤄진대도 걱정이 되긴 마찬가지다.
 
  “제가 설명하지 않으면 무슨 자료인지 알아보기 어려워요. 저기 《조선생활 50년》이라는 일본 책이 보이지요? 나카무라 겐타로(中村健太郞)의 책인데, 일본 고서점에서 애써서 구했어요. 우리나라에서 오래 살아 조선말을 잘하는 일본 사람이었어요. 《매일신보》의 감독, 지금 말하면 편집국 고문 같은 걸 지낸 사람이에요. 그의 배경을 잘 모르고 책만 보면 ‘아 조선에 와서 산 일본인이구나’ 단지 그런단 말이지요.”
 
  정 교수는 책상으로 가서 컴퓨터를 켰다. 책상 위엔 컴퓨터 3대가 있었다. 여기에 큰 화면의 모니터가 추가로 한 대 더 놓여 있었다.
 
  컴퓨터 안도 서재였다. 정 교수가 지금까지 언론에 실은 원고, 집필한 논문 등이 데이터베이스화되어 있었다. 여러 단계 찾아볼 필요도 없이 지면 자체를 스캔해 색인화해 정리해놨다. 원고 개수가 결코 적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몇십 년 전 잡지에 실린 글도 한 번에 찾을 수 있었다. 감탄이 나왔다. 전업 글쟁이든 교수든, 이 정도로 원고를 잘 정리해놓은 경우는 한 번도 못 봤다.
 
 
  문학, 언론학, 역사학 공부
 
  서가를 한 바퀴 둘러본 후에야 소파에 앉을 수 있었다.
 
  ― 애초에 어떤 계기로 언론사 연구에 관심을 갖게 되셨습니까.
 
  “저는 중앙대 영문과를 나왔는데, 영어공부는 별로 안 했어요. 1학년 때부터 《중대신문》 기자였어요. 문학소년이었어요. 고등학생 때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문에서 입선하기도 했으니까요. 대학원은 국문과로 갔지요. 다 마치고 논문 쓸 시기에 가만히 생각하다 언론학으로 방향을 틀어서 서울대 신문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쳤어요. 언론학을 공부하게 된 건, 《기자협회보》에서 일하게 된 게 계기였어요.”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어떤 목표를 정해 매진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사람과의 인연을 따라 걷다 어딘가에 다다르는 이도 있다. 정 교수는 후자인 것 같았다.
 
  ― 어떻게 기자협회에서 일하게 되셨나요.
 
  “1968년 3월 KBS 공채로 입사했어요. 당시 KBS는 정부 공보부 기관이었습니다. 그때 함께 들어간 친구들은 방송계에서 대성했어요. 저는 KBS 내 방송조사연구실에서 방송전문지인 《방송》을 만들었어요. 그러다 기자협회로 옮겨 《기자협회보》를 만들었어요.”
 
  ― 대학원을 두 번 다니며 문학과 언론을 모두 공부하셨네요.
 
  “나중엔 영국으로 유학 가서 국제역사를 전공했어요. 지도교수가 이안 니시 교수라고 영일(英日) 외교사의 권위자였습니다. 어떻게 하다 보니 언론학·국문학·역사를 공부하게 된 거죠. 그래서 《전쟁기의 언론과 문학》 같은 책을 쓸 수 있었던 거예요. 수박 겉핥기라도 문학을 공부했으니 월북 문인들에 대해서도 아는 거죠.”
 
 
  언론인 이광수 연구
 
  ― 일제 강점기를 특히 전문적으로 연구하셨지요.
 
  “《기자협회보》 만들면서 일제 강점기를 사신 언론인 1세대들을 많이 만났어요. 직접 뵙고 얘기를 들었지요. 자료수집가들도 많이 만났어요. 그러면서 자연히 언론 역사에 발을 디디게 됐죠. 쭉 그렇게 지내다 보니, 우선 자료 접근성에서 제가 유리한 입장이었어요. 또 흥미가 느껴졌어요. 옛날 신문을 직접 찾아보기 시작했어요. 그때는 국립도서관이 지금의 롯데백화점 명동 본점 자리에 있었어요.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바로 걸어갈 수 있었어요. 시간만 나면 거기 가서 신문을 열어봤지요.”
 
  ― 요새는 근대 신문은 거의 마이크로필름으로만 볼 수 있습니다.
 
  “그때만 해도 벌써 50~60년 전이니까 한말에서 일제 강점기의 신문을 다 볼 수 있었어요. 특히 저는 《기자협회보》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니까요. 일제 강점기 시절까지의 문학과 언론은 거의 구분이 안 됐어요. 대부분의 언론인이 문인이자 기자였어요. 춘원 이광수부터도 그래요.”
 
  ― 춘원이 언론인이었나요.
 
  “2018년 《춘원 이광수》라는 책을 썼어요. 문인 중에 연구 논문이 가장 많은 사람이 춘원입니다. 그런데 언론인 춘원 이광수는 아무도 안 써요. 이분이 《동아일보》에서 편집국장을 두 번 지내고 《조선일보》로 와서 부사장 겸 편집국장, 문화부장을 했어요. 그전엔 상하이 《독립신문》의 사장을 했고. 그런 언론인인데 언론인으로 보는 시각이 없었어요.”
 
  ― 언론인으로는 조명이 안 됐네요.
 
  “이승만 대통령도 마찬가지예요. 이승만도 미국 가기 전 청년 시절엔 《제국신문》 기자, 《매일신문》 사장을 지낸 언론인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보는 사람이 별로 없잖아요. 최남선도 문인이자 사학가 정도로만 알지요. 《소년》이란 잡지를 창간한 언론인이란 건 잘 몰라요.”
 
  ― 육당 최남선은 친일 지식인으로만 조명이 되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춘원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 소설가이자 친일파로 굳게 인식되어 있잖아요. 그런데 춘원은 일생 다양한 활동을 하고, 애국적인 글도 많이 썼어요. 천재였어요. ‘민족개조론’ 같은 글은 아주 좋은 논문이에요. 읽어보지도 않고 ‘친일 논문’이라고 말해요. 아니에요. ‘우리 민족이 일본에 대항하려면 역량을 길러야 된다’ 초등학생이나 유치원생이 대학생과 싸우려면 실력이 올라가야지 그냥 싸우면 백발백중 지는 거밖에 더 있습니까? 그 얘기예요.”
 
  ― 육당이나 춘원이 조금 과한 오해를 받고 있네요.
 
  “민족을 개조하려면 독립협회같이 와와 떠드는 식으로만 되는 게 아니에요. 단계적인 전략으로 시간을 갖고 해야 했어요. 반면 단재 신채호를 보면, ‘그까짓 문화통치에 아부해서 검열에 안 걸릴 정도의 기사나 싣고, 뭐냔 말이야. 오로지 파괴만 있다’고 과격하게 말했어요. 이런 게 이 시대의 구미에 딱 맞는 거예요.”
 
  ― 현 정부 들어 인촌 김성수는 서훈도 박탈됐지요.
 
  “같은 경우예요. 일제 전 기간에 《동아일보》와 고려대 전신인 보성전문을 키우고 인재를 양산한 큰 업적은 안 보고, 말기에 학도병 운운 그런 것만 딱 집어서 보는 거예요. 집어서 ‘이거 친일 아니야?’ 맞죠. 틀린 건 아닌데, 피부에 작은 반점이 있으면 이것도 피부과 의사가 보면 병입니다. 그 사람은 근데 전반적으로 건강하거든요. 그런 식으로 일부분만 집어서 얘기하면 전체 역사를 이해하기 어려워져요. 그러면 여운형 같은 분은 어떻습니까. 친일 흔적이 있어도 괜찮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좌파운동을 했으니까요.”
 
 
  어린이의 작문 삭제한 총독부
 
《경성일보》 영인본. 《경성일보》는 일제 강점기에 통감부와 총독부가 발행했던 기관지다.
  반세기 동안 연구를 계속하다 보니 정 교수가 새로 개척하다시피 한 분야가 꽤 있다. 그중 하나가 ‘한국언론탄압사(史)’다.
 
  ― 일제 강점기 언론 통제는 어떤 수준이었습니까.
 
  “일본 근현대사를 봅시다. 1931년에 만주사변이 일어나고, 1937년에 중일전쟁이 일어나요. 1942년엔 태평양전쟁이 일어납니다. 계속 전쟁한 나라예요. 더 거슬러 올라가면 1894년에는 청일전쟁, 1904년에는 러일전쟁. 우리는 6·25전쟁 한 번만 치러도 죽겠는데 끔찍한 거예요. 그러니까 일본엔 식민지 조선뿐 아니라 본토에도 언론 자유가 꽃필 수 없었어요.”
 
  ― 전시 상태의 특수성이 작용했겠네요.
 
  “일본 내에서 언론 통제 하던 걸 조선에선 좀 더 심하게 한 거예요. 식민지니까. 일본 내에선 전쟁에 방해가 되는 논조를 규제했어요. 조선에선 전쟁 반대에 독립운동까지 규제한 겁니다. 당시 일본 언론의 상황을 알아야 조선의 상황도 이해할 수 있는 거예요. ‘일본 놈들이 자기들은 언론 자유를 누리면서 식민지 조선만 억압했다’ 이건 안 맞는 거예요.”
 
  ― 그럼 당시 총독부는 어떤 식으로 조선 언론을 대했나요.
 
  “1940년에 《조선일보》 어린이 신문의 작은 지면으로 ‘쌀’이라는 작문을 실었어요. 인천의 어느 초등학생이 지은 글이었어요. 근데 그게 삭제됐어요. 왜? 배급표를 받아 동사무소에 가서 쌀 현물을 받아야 되는데, 당시 쌀이 부족했어요. 줄을 서서 기다리면 끝에 선 사람은 쌀이 모자라서 잘리는 거예요. 그러니 빨리 받으려고 막 서로 엉켜 있는 장면을 아이가 글로 쓴 거예요. 원고지로 한 7~8매 될 둥 말 둥 한 원고예요. 근데 총독부가 보니까 안 되겠는 거예요. ‘이건 현실을 너무 어둡게 그렸다. 어린이가 이런 작문 쓴 걸 왜 입선을 시켰냐 삭제해라’ 그래서 삭제했어요.”
 
 
  총독부 검열 삭제기사 발굴
 
  ― 검열에 걸려 삭제된 글을 어떻게 보셨어요.
 
  “검열 삭제기사 모은 자료를 총독부에서 발간한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총독부의 비밀자료를 모은 《조선총독부 언론탄압자료총서》(전 26권)는 제가 만들었어요. 그중 마지막 발행된 자료는 한국에 와 있던 일본 기자가 일본 의회 도서관에 그런 게 있다고 알려줬어요. 복사 좀 해달라고 해서 어렵게 얻었어요. 거기에 그때의 작문이 일본말로 번역되어 실려 있는 걸 본 거예요. 작문을 쓴 이의 이름은 있는데 어느 학교인지는 없어요. 인천이라고만 나와 있어요. ‘어쩌면 필자가 살아 있을 수도 있겠다’ 하고 인천학 연구소에 연락해서 졸업생 명부를 조사해달라고 했는데 못 찾았어요.”
 
  정 교수는 1940년 필화사건을 하나 더 예로 들었다.
 
  “1940년 1월5일자 《매일신보》에 김진섭이라는 납북된 수필가가 짧은 글을 썼어요. ‘유럽에는 벌써 2차대전이 일어났는데 우리는 아직 염려없다’ 이게 걸려서 반성문을 쓰고, 관련된 조용만 선생 같은 분이 당시 문화부장이었는데 파면됐어요.”
 
  ― 당시 일본 언론도 정부 통제를 받았겠네요.
 
  “우리나라만 국한해서 보면 총독부가 물론 조선 언론을 많이 탄압했죠. 일본 내에서도 그랬어요.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은 전쟁기에 자신이 잘못한 걸 반성하는 책도 냈어요. 왜냐하면 그런 시기였으니까. 일본 신문도 전쟁 기간엔 어쩔 수 없었던 거예요. 일본과 조선이 태평양전쟁으로 휘말려 들어가던 당시 상황을 감안해 시야를 좀 넓게 봐야 해요.”
 
  ― 일제 강점기 말기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폐간이 됐지요.
 
  “그렇지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강제 폐간됐다, 나도 그렇게 쓰긴 씁니다. 그런데 일본 쪽 상황도 같이 살펴보면, 일본 본토도 ‘1현(縣)1지(紙)’였어요. 종이도 귀하니 아껴야 되고, 전쟁을 두고 여러 말이 자꾸 나오지 않게 하려고 1현에 1개의 신문만 나오게 한 거예요. 일본은 도(道) 대신 현(縣)을 쓰지요. 1현1지 정책의 일환으로 식민지 조선의 신문도 정리한 거예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없애고 《매일신보》 하나만 남겨놓은 거예요.”
 
  ― 한반도 전체를 1현으로 친 건가요.
 
  “조선 각 도에 일본어 신문 1개씩을 뒀어요. 조선어 신문은 《매일신보》 하나만 둔 거예요. 《매일신보》는 총독부 기관지였지요. 그게 지금의 《서울신문》이 된 거예요. 언론 역사를 냉정하게 거시적으로 보면 이래요. 그걸 맥락 없이 딱 집어서 ‘일본 총독부가 민족지를 폐간시켰다’ 그러면 명쾌하지요. 읽는 사람도 시원하고. 그런데 역사를 계속 공부하면 이런 것도 알게 돼요.”
 
 
  신문으로 남한 공격한 북한
 
일제 강점기에 발간된 잡지들의 영인본. 《청춘》과 《소년》은 최남선이 창간한 잡지이고, 《조선농민》은 천도교청년당에서 창간했다.
  ‘언론탄압사’ 해설은 이승만 집권 시기로 이어졌다.
 
  “이승만 정권이 언론을 탄압했다고 다들 말하지요, 탄압했어요. 《대구매일》 테러사건이며, 정권 말기엔 《경향신문》도 폐간시켰어요. 탄압이 맞고 비판적으로 쓰기는 씁니다. 그런데 남북이 대치하는 마당에 북한은 신문을 어떻게 내는지도 함께 봐야지요. 북한은 해방 직후부터 언론 자유라는 게 없었어요. 오로지 당의 목소리를 대신하는 게 북한 언론이에요.”
 
  정 교수는 6·25전쟁 발발 직후 남북한의 언론을 실증적으로 비교하는 연구도 했다. 한국 언론사의 지평을 북한 언론까지 넓혔다.
 
  “북한 신문이 어땠는가, 우리와 비교해봅시다. 우리는 전쟁 기간에도 언론 자유가 극단적으로 억압되지는 않았어요. 북한 신문은 완전히 획일적인 지면이에요. 북한은 남한 공격에 신문도 이용했어요. 남침 후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됐고, 그로부터 4일 후인 7월 2일부터 《조선인민보》 《해방일보》를 창간·발간했어요. 언제나 1면에 스탈린 사진이 먼저 나오고 그다음이 김일성 사진이에요. 그런 식으로 신문을 만들었어요.”
 
  남한의 신문은 달랐다.
 
  “우리는 당시에도 정부를 살짝살짝 비판해가면서 신문을 냈어요. 요즘 같지 않지만. 6·25전쟁 직후엔 우리가 북한보다 더 못살았어요. 그런데 민주주의 체제라 야당도 있고 정부 비판하는 야당지(紙)도 있는데, 이승만 입장에서는 가만히 놔둘 수 없잖아요. 언론 탄압 맞습니다. 그렇지만 시대가 그런 시대였다는 말이에요. 요새처럼 경제가 북한보다 월등할 때는 어느 정도 친북적인 기사도 언론 자유 차원에서 소화가 되지요. 그때는 그런 시대가 아니잖아요.”
 
  ― 북으로 간 문인들의 운명도 비참했지요.
 
  “임화는 네 가지 죄목으로 재판을 받았어요. 한 가지 죄목을 면죄받아도 사형을 피할 도리가 없었어요. 설정식 시인도 이때 함께 사형당했어요. 비참한 말로를 맞았죠. 이승만 독재, 박정희 군사독재라고 하는데, 그 시절의 북한을 보세요. 우리는 정말 자유로운 나라에서 살고 있어요.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걸 자랑스럽게 여겨야 해요.”
 
 
  4·19 직후 통신사만 200곳
 
  ― 해방 직후에 신문이 참 많았지요.
 
  “지금까지 발행되는 건 그중 4개밖에 없지요. 《조선일보》 《동아일보》 《서울신문》 《경향신문》. 당시 쏟아져나온 신문 중엔 언론 창달이라기보다는 어떤 정파의 기관지 역할을 하는 신문이 많았어요.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신문이라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알고 너도나도 신문사를 차렸어요. 미(美) 군정이 신문을 자유롭게 풀어줬고요.”
 
  ― 한국인들이 신문을 좋아하는 걸까요.
 
  “좋아하죠. 우리나라는 놔두면 언론이 막 생겨요. 사회가 도저히 수용을 못 할 정도로 많았던 시절이 있어요. 첫 번째는 해방 직후였고, 두 번째는 4·19 직후였어요. 《4·19신문》이니 뭐니 엄청 많았어요. 자정운동이 일어나려는 차에 5·16군사정변이 일어나서 군부가 집권했어요. 두 가지 기준으로 언론을 정리했어요. ‘일간지의 경우, 자체 인쇄 시설이 없는 곳은 싹 문을 닫아라’, 통폐합도 아니에요. ‘통신사는 외신 계약 없는 곳은 문 닫아라’ 했고. 당시 통신사만 200여 곳이 있었어요.”
 
  ― 200여 곳이요?
 
  “통신은 신문 기사를 긁어 복사해서 막 뿌리면 되니까요. 요만한 방에 통신사를 차리는 거예요. 전 세계에 그런 예가 없어요. 지금처럼 경제 규모가 커지고 복잡해졌는데도, 통신사 한두 곳으로 잘 돌아가잖아요. 그래서 싹 없애버렸어요. 1980년도의 언론 통폐합은 언론사를 합쳐서 종업원들의 실업을 최소화했는데, 5·16 때는 그냥 싹 다 잘라버렸어요.”
 
  ― 그야말로 ‘정리’한 거네요.
 
  “이후에도 시설 기준을 둬서 자체 인쇄, 주조 시설이 없으면 신문 허가도 안 내줬어요. 이제 와서는 그걸 잘못했다고 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 비판하려고 그것만 집어내는 사람이나 비판할까. 1980년에 전두환 정권이 언론 통폐합한 걸 두고 욕을 많이 하는데, 공무원들이나 사업하는 사람들이 볼 때는 없어지니까 너무 시원한 거예요. 와서 괴롭히지 않으니까. 조그마한 거 가지고 환경오염이다 뭐다 공장에 와서 괴롭히고 그랬으니까요. 원칙적으로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극약처방이 필요한 시기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조선 독립을 외치다 죽은 영국인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마음에 깊이 와닿는 인물을 한 명쯤 만나게 된다. 정 교수에겐 그가 배설(裵說·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이었던 것 같다.
 
  1904~1909년 대한제국에서 활동한 영국 출신 언론인으로 배설은 한국에서 사용한 이름이다. 영국 브리스틀에서 태어나 16~32세까지 16년간 일본에서 살면서 사업을 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런던 《데일리 크로니클(The Daily Chronicle)》 특파원으로 대한제국에 건너왔다. 양기탁과 함께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를 창간했다.
 
  대표인 배설이 영국인이었기에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는 일제 치하에서 치외법권으로 보호받았다. 자연히 독립운동의 활동무대가 됐다. 신문의 인기는 날로 올라갔다. 1907년 《대한매일신보》 발행부수가 1만 부를 넘겼다. 1910년까지 을사조약이 무효라는 것과 조선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국제사회에 알렸다. 생각해보면 꿈같고 동화 같은 이야기다. 먼 이국에서 온 청년이 바람 앞의 촛불 같은 한 나라의 운명에 뛰어들게 된 게 말이다.
 
  배설은 일본과 법정에서 맞선 끝에 건강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37세, 병명은 심장비대증이었다. 유언으로 남긴 말은 ‘나는 죽을지라도 《대한매일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동포를 구하라’였다. 정 교수는 가장 애착이 가는 저서로 《대한매일신보와 배설》을 꼽았다.
 
  “《대한매일신보와 배설》은 우리나라 외교사, 언론사, 국채보상운동, 독립운동사 전부 관련되어 있어요. 역사학계에선 이 책을 더러 인용하는데, 언론계에선 이 책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직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일본·영국·한국, 이 세 나라의 자료를 찾아서 쓴 책이에요. 도서관을 돌아다니며 《대한매일신보》를 직접 찾아 영인도 했어요.”
 
 
  런던에서 찾은 배설의 흔적
 
영국 런던정경대 유학 시절 지도교수였던 이안 니시 교수와 함께. 사진=정진석 교수 제공
  ― 영국에 유학 가서 배설의 흔적을 추적하셨습니까.
 
  “유학 기간에 런던의 공공기록보관소, 신문도서관에 드나들며 대한제국 관련 외교문서를 다 열람했어요. 배설이 관련된 네 번의 재판기록도 찾았지요. 하루 종일 우편번호책을 들여다보며 배설이 살던 곳을 따라가기도 했어요. 일본 외교문서는 일본에서 복사해서 썼어요.”
 
  ― 배설이 고종에게 비밀 자금을 받아 신문사를 차렸다는 게 사실인가요.
 
  “아닙니다. 고종이 뒤에서 돈을 대 신문을 발간했다고 말하면 입에는 딱 맞죠. 일부 역사학자들이 그런 말을 하는데 사실이 아니에요. 고종은 그렇게 똑똑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 정도로 똑똑했으면 나라를 빼앗겼겠습니까. 내탕금으로 일종의 금일봉을 준 거예요. 그런 돈은 《황성신문》에도 주고 심지어 일본인이 발행하는 신문에도 다 줬어요.”
 
  ― 배설은 왜 조선의 독립운동에 목숨을 걸게 된 걸까요.
 
  “우연입니다. 사실 많은 일이 그렇습니다.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라는 영화가 있잖아요. 오스카 쉰들러는 처음부터 위대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사업으로 돈벌이하던 속물 같은 사람이었어요. 어떻게 해서 유대인을 한두 사람 구하다 보니 위험을 무릅쓰고 마침내 재산을 다 날리게 된 거예요. 배설도 마찬가지예요. 처음엔 그저 일본 공사관의 하기와라 서기관과 사이가 안 좋았어요. 황무지 개간권을 두고 갈등이 있었어요. 힘으로 찍어누르면 눌리는 사람이 있고, 도리어 반발하는 사람이 있지요. 배설은 후자였던 것 같아요. 이러면 그만두겠지, 일본이 압박하자 오히려 조선 독립운동에 뛰어드는 쪽으로 간 거예요.”
 
 
  편지도 공문서, 영국의 기록 문화
 
  ― 영국의 기록문화가 배설 연구에 도움이 됐겠습니다.
 
  “런던 공공기록보관소에 가보면 온갖 외교문서가 다 보관돼 있어요. 총영사가 손으로 쓴 메모도 있습니다. 외교문서에 부속으로 딸려 보낸 메모, 신문, 지면 다 있어요. 영국은 유명한 사람이 죽으면 서한집이 많이 나와요. 그건 진솔한 기록입니다. 회고록 같은 건 남이 써줘서 말만 번드르르하고 내용도 틀리잖아요. 물론 제일 정직한 기록은 일기예요. 그건 자기한테 남기는 기록이거든요. 두 번째가 편지예요.”
 
  ― 서한집도 나오는군요.
 
  “영국에서는 편지가 공문서 역할도 해요. 우리는 도장을 찍어야 되는데 영국에선 편지 써서 보내면 그게 공문서로 남는 거예요. 문학의 한 장르이기도 합니다. 편지작가라는 게 있어요. 편지가 훌륭하면 하나의 문학 작품으로 인정받는 거예요. 뭐든지 편지로 써요. 모레 구술시험이 있다, 그런데 그 전날 지도교수와 같이 학교식당에서 점심 먹어도 암말도 안 해요. 집에 가면 편지가 딱 와 있어요. 애들이 학교에 가서 학부모로서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면 편지를 보내라고 해요. 거기서 접수를 안 해요.”
 
 
  종이가 귀해 먹 씻어내기도
 
정 교수의 저서가 모여 있는 책장.
  한국은 그에 비하면 기록 문화가 빈약한 편이다. 이유가 뭘까. 정 교수는 크게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 번째는 ‘종이 부족’이다.
 
  “종이가 귀했어요.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일본이 〈팔만대장경〉을 인쇄해서 달라고 청원하는 대목이 나와요. 그런데 종이가 없는 거예요. 8만 장이 필요하니까요. 달라는 데 줄 수가 없으니 어떤 대신은 ‘〈팔만대장경〉을 그냥 없애버리자’고 건의한 기록도 남아 있어요.”
 
  ― 〈팔만대장경〉을 버리자고 할 정도로 종이가 귀했네요.
 
  “닥나무 껍질을 벗겨서 만들었으니까요. ‘세책’ 하기도 했어요. 먹을 씻어내고 종이를 재활용하는 거예요. 《한성순보》를 발간할 때 종이 한 면씩 인쇄해서 두 장을 붙였어요. 한지는 번져 양면 인쇄를 못 하니까요. 나중에 그걸 떼어내서 뒷면 백지에 글을 쓴 것이 발견됐어요. 종이가 아까우니까요. 병풍 만들 때 배접용으로 《한성주보》를 사용한 경우도 있었어요. 병풍 앞면의 작품을 살살 벗겨보니까 신문이 나와요.”
 
  두 번째 이유는 ‘한글’이다.
 
  “한글은 과학적인 문자임에는 틀림없어요. 그런데 기계화에는 한자와 똑같은 거예요. 무슨 말인가 하면 서양은 납활자로 인쇄할 때 알파벳 개수만큼만 있으면 돼요. 그런데 우리는 가갸거겨 무한대로 필요해요. 납활자 시대를 생각해보면, 엄청 큰 상자가 있고, 채자하는 사람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찾는 거예요. 가나다라마바사 순으로 놓을 순 없으니 빈도 순으로 가장 많이 쓰는 활자를 가까이 두는 식으로요. 인쇄에 비용이 많이 들었죠. 그런 시대였어요.”
 
  ― 디지털 시대가 되어서야 한글이 비로소 제대로 활약하기 시작했네요.
 
  “오죽하면 이광수·최남선 같은 사람은 머리가 좋으니까 풀어쓰기를 주장했어요. 영어식으로요. ‘학교’를 ‘ㅎㅏㄱㄱㅛ’라고 쓰는 식이에요. 이광수는 직접 시도도 했어요. 이제는 됐어요. 한글의 과학성이 발휘되고 있지요.”
 
  세 번째 이유는 ‘기록하면 처벌받는 문화’다.
 
  “옛날부터 사화(史禍)니 뭐니 기록을 남겼다가 가문이 몰살되기도 했잖아요. 기록을 안 남기거나 남겼다가도 없애는 거예요. 요새도 수사기관이 메모를 뒤져서 잡아넣잖아요.”
 
  문득 송민순 전 외교부 장관이 떠올랐다. 노무현 정권 시기 외교부 장관을 했던 그는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 협상에 참여하며 9·19공동성명을 이끌어내는 등 북핵을 둘러싼 다자협상의 주역이었다. 북한 외교관들 사이에 협상하기 가장 어려웠던 남한 외교관으로 뽑히기도 했다. 태영호 전 주영(駐英) 북한공사에게 들은 얘기다.
 
  그랬던 그가 2016년 회고록을 냈다. 《빙하는 움직인다》. 자화자찬식의 추억 나열이 아니라, 당시 메모와 언론 보도, 공식 기록을 교차 검증해 치밀하게 정리했다. 고위 공직자가 쓴 회고록 중 최고 수준이라 할 정밀한 기록이다.
 
  송 전 장관 책에는 ‘2007년 유엔 북한 인권결의안 표결에서 기권 결정을 하기 전에 먼저 북한의 의견을 물었고,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던 문재인 대통령이 그 과정에 관여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걸 문제 삼아 당시 문재인 캠프는 송 전 장관을 검찰에 고발했다. 한국의 기록문화가 척박한 세 번째 이유가 납득이 되는 이유다.
 
 
  열린 마음으로 역사 해석해야
 
1987년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배설 전시회에서. (오른쪽부터) 정진석 교수의 부인 황흠임씨, 정진석 교수,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 홍종인 전 《조선일보》 편집국장. 홍 전 국장의 뒤에 보이는 사진 속 남성이 배설이다. 사진=정진석 교수 제공
  ― 한국에선 특히 근현대사에 대한 해석을 두고 둘로 나뉘어 있습니다. 제대로 기록하지 못했기 때문일까요.
 
  “제가 보기엔 기록의 문제는 아니에요. 기록을 해석하며 이데올로기를 앞세우는 거예요. 열린 마음으로 역사를 보며 해석해야 되는데, 해석을 먼저 해놓고 갖다 붙이니까 문제가 되는 게 아닌가 해요.”
 
  ― 기존 통념에 반박하며 《반일 종족주의》를 쓴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 같은 경우도 욕을 많이 먹었지요.
 
  “그런 시각도 필요해요. 용기가 있는 겁니다. 책을 읽어보니 표현이 너무 거칠어요. 그렇게 쓰면 본질과 관계없이 말꼬리가 자꾸 잡히거든요. 조금 정제된 표현으로 쓰면 좋을 텐데, 그래도 물고 늘어지는 사람한텐 당할 도리가 없죠.”
 
  ― 한국 언론은 발전하고 있습니까.
 
  “역사라는 건 퇴보는 안 합니다. 지금은 언론을 옛날식으로 규정할 순 없죠. 전엔 대중을 가르치고 끌고 가는 위치였다면, 지금은 뉴스를 제공하는 위치지요. 언론의 기능이 많이 달라진 거예요.”
 
 
  종이로 신문을 읽어야
 
  ― 인터넷을 통해 미디어가 홍수처럼 쏟아지는 시대인데요, 여전히 종이 신문을 읽어야 할까요.
 
  “종이로 읽어야 해요.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화면으로 쉽게 볼 수 있지만, 여기 보다가 저기 보다가 이동이 번거롭잖아요. 종이로 읽으면 천천히 천착하면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머리가 좋아지고 이해가 잘 됩니다. 연구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료도 종이로 봐야 합니다. 그런데 정작 저는 눈이 안 좋아져서 모니터로 기사를 봐요. 종이 신문을 보려면 활자가 작아 눈이 아파서요.”
 
  인터뷰를 마치고 얼마 후, 서가를 옮길 곳이 정해졌다는 소식을 접했다. 서울 압구정동 현대고등학교다. 이러저러한 인연이 그곳으로 이끌었다. 반세기 동안 언론인들도 잘 모르던 한국 언론사에 빛을 쪼여준 책, 잡지, 신문, 자료 등에 최종 안식처가 될지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한국 언론은 정 교수 같은 최장기 독자이자, 가장 충실한 벗, 관찰자를 아마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란 사실이다.⊙
 
정진석 교수가 권하는 책
 
  1. 《교수와 광인》, 사이먼 윈체스터
  2.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3. 《민족개조론》, 이광수
  4. 《낭만적인 고고학 산책》, C. W. 체람
  5. 《전쟁과 평화》, 레프 톨스토이
  6. ‌《일본을 이끌어 온 12인물》, (사카이야 다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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