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보 환경 급변하고 북한 무력 도발 빈발하던 ‘실존적 위기’의 시대
⊙ 유신체제, 개인의 삶을 국가가 철저히 통제하는 전체주의와는 다른 연성 권위주의 체제
⊙ 토플러, “민주화란 산업화가 끝나야만 비로소 가능… 자유화란 그 나라의 수준에 맞게 제한”
⊙ “1인당 소득이 6000달러(1985년 구매력 기준) 넘어서면, 민주주의 체제가 붕괴할 확률은 사실상 0이 된다”(쉐보르스키)
崔洸
1947년생. 서울대 경영학과 졸업, 미국 위스콘신대 공공정책학 석사, 메릴랜드대 경제학 박사 / 미국 와이오밍대 교수,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 한국조세학회 회장, 한국조세연구원장, 한국공공경제학회장, 보건복지부 장관, 국회예산처 처장, 한국외국어대 교수, 국민연금공단 이사장, 성균관대 석좌교수 역임 / 저서 《누가 위대한 지도자인가》 《지배 권력과 경제번영》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정부》 《국가의 흥망성쇠》 《기적의 한국경제 70년사》 등
⊙ 유신체제, 개인의 삶을 국가가 철저히 통제하는 전체주의와는 다른 연성 권위주의 체제
⊙ 토플러, “민주화란 산업화가 끝나야만 비로소 가능… 자유화란 그 나라의 수준에 맞게 제한”
⊙ “1인당 소득이 6000달러(1985년 구매력 기준) 넘어서면, 민주주의 체제가 붕괴할 확률은 사실상 0이 된다”(쉐보르스키)
崔洸
1947년생. 서울대 경영학과 졸업, 미국 위스콘신대 공공정책학 석사, 메릴랜드대 경제학 박사 / 미국 와이오밍대 교수,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 한국조세학회 회장, 한국조세연구원장, 한국공공경제학회장, 보건복지부 장관, 국회예산처 처장, 한국외국어대 교수, 국민연금공단 이사장, 성균관대 석좌교수 역임 / 저서 《누가 위대한 지도자인가》 《지배 권력과 경제번영》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정부》 《국가의 흥망성쇠》 《기적의 한국경제 70년사》 등

- 1976년 5월 31일 포철 제2고로 화입식에서 직접 불을 댕기는 박정희 대통령. 박 대통령은 경제 발전을 통해 민주화의 기반을 닦았다. 사진=조선DB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군사혁명 후 집권 기간(1961~1979년)은 한국 현대사에서 평가가 격렬하게 엇갈리는 시기다. 고도성장과 근대화(近代化)라는 장대한 그림자와 민주주의 후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교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을 ‘독재자’라고만 규정짓고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기술(記述)하여 교실에서 이렇게 가르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는 무엇보다 사실을 크게 왜곡하는 것이고,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외국을 다니는데 외국의 지도자들이 온통 박 대통령 얘기뿐이더라”는 노무현(盧武鉉) 전 대통령의 언급을 곱씹어 보아야 하지 않을까? 박정희 시대의 한 가지 부정적인 유산이 민주주의의 후퇴와 인권의 탄압인 것은 틀림없다. 1972년 유신(維新)이 선포되어 체육관 선거가 실시되고 삼권분립(三權分立)이 훼손되었기에, 외형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독재자로 부를 근거가 있음은 분명하다. 박 대통령 자신도 이를 부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 그 언필칭(言必稱) ‘독재자 박정희’는 과연 어떤 독재자였고 무엇을 어떻게 하였는가?
유신체제의 비민주성
1974년 1월 7일 《조선일보》 게시판을 통해 긴급조치 1호 뉴스를 접한 시민들. 긴급조치 시대의 시작이었다. 사진=조선DB박정희 대통령을 독재자로 지목하는 핵심은 그의 유신 선언에 있다. 유신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가 내세운 명분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엄중한 국가 안보 위기의 해소와 조국의 평화 통일 준비라는 시대적 과제였다. 둘째는 서구식의 절차적 민주주의가 한국의 특수성과 시대 상황에 맞지 않기에, 강력한 행정적 리더십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형태의 ‘한국적 민주주의’의 추구였다.
유신헌법은 대통령의 임기를 6년으로 연장하고 연임(連任) 제한을 철폐하여 사실상 종신(終身) 집권을 가능하게 했으며, 대통령 직선제(直選制)를 폐지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선제(間選制)로 바꾸었다. 그리고 대통령에게 국회 해산권, 긴급조치권, 국회의원 1/3 추천권, 모든 법관 임명권 등을 부여하여 입법·사법·행정 삼권 위에 군림할 수 있는 권한을 집중시켰다. 이 결과 유신체제는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인 국민주권·권력분립·기본권 존중 등을 크게 훼손했다.
유신체제하에서 발동된 긴급조치는, 국민의 기본권을 억압하고 정권을 향한 비판을 원천 봉쇄하는 정치적 도구였다. 특히 1975년 5월 13일 발동된 ‘긴급조치 9호’는 정부를 비판하거나 불만을 표출하는 일상적인 행위까지도 반국가 범죄로 간주하여 모두 구속시킬 수 있도록 했다. 당시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처벌받은 국민은 총 1140명에 달했다.
‘한강의 기적’이 ‘한강의 눈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세계는 자유주의와 전체주의,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사회주의 지시경제라는 오래된 이념 대립 구도 속에서 자유세계와 공산세계가 격렬하게 대립하는 힘의 대결 구도 속에 있었다. 냉전(冷戰) 시작의 와중에 대한민국은 분단국으로 탄생하였고, 건국 후에 한국은 자유세계를 대표하여 냉전의 최전선을 지켜야 하는 운명이었다. 이 엄중한 운명 속에서 건국한 지 채 2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6·25 사변이라는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이 초래되어 국민은 큰 고통을 겪었고 나라는 황폐화되었다.
6·25 사변의 원인이 되었던 좌우 간의 투쟁은 휴전 이후에도 그대로 지속되어, 오늘날에도 대한민국 정체성(正體性) 수호 세력과 파괴 세력으로 다시 반으로 갈라져 두 명의 대통령이 탄핵되는 등 대한민국은 사실상 내전(內戰) 상태다. 건국 이후 오늘날까지의 한국 역사를 관조(觀照)해 보면, 이념 전쟁에서의 승리자는 안타깝게도 좌파다. 대한민국 80년 역사에서 김대중(金大中)·노무현·문재인(文在寅)·이재명(李在明)으로 대표되는 좌파 정권은, 20년이라는 짧은 집권 기간에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거의 다 파괴하였다. 이 결과 ‘한강의 기적’은 빛이 바래 ‘한강의 눈물’이 되었고, 이제 한국 사회는 반(反)자유 반(反)시장 정치 논리에 지배당하여 국민은 질곡(桎梏)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모르긴 하여도 박정희 대통령은 당신이 타계한 후 46년 만에 대한민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가 오늘과 같은 지경에 이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독재자들
종종 성군(聖君)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전제(專制) 군주국에서 왕(군주)은 기본적으로 독재자였다. 20세기에는 전체주의적 독재(totalitarian dictatorship)가 출현하여 전 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20세기의 독재자들은 미디어와 기술을 이용해 개인 숭배를 강화하고 대규모 숙청 및 학살을 자행했다는 특징이 있다. AI가 선정한 20세기 주요 독재자 10명은 아돌프 히틀러(독일), 이오시프 스탈린(소련), 베니토 무솔리니(이탈리아), 마오쩌둥(중국), 김일성(북한), 폴 포트(캄보디아), 프란시스코 프랑코(스페인), 이디 아민(우간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칠레), 사담 후세인(이라크) 등이다. 이들 독재자들의 집권 기간은 15년 이하로 짧은 경우가 폴 포트 5년, 이디 아민 9년, 히틀러 13년 등이고, 25년이 넘는 장기 집권의 경우는 마오쩌둥 28년, 스탈린 30년, 프랑코 35년, 김일성 36년 등이다.
이들 중 다수의 지도자는 반정부·반체제 인사라는 이유로 인민을 처형하거나, 잘못된 정책 추진에 따라 기아(飢餓)·기근(飢饉)을 초래하여 수많은 인민을 죽음으로 내몰았었다. 마오쩌둥은 약 3000만 명 이상의 아사자(餓死者)를 포함 4000만~8000만 명을 희생시켰다. 스탈린은 1000만~2000만 명을 처형했거나 아사시켰다. 히틀러는 1100만~1700만 명을 인종적 이유로 대량 학살했다. 폴 포트는 150만~300만 명을 처형했거나 기아로 사망하게 했다. 김일성은 100만~300만 명을 기근으로 아사시켰거나 처형했다. 참으로 극악한 독재자들이었다. 말로는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겠다고 약속한 독재자들이 실제로는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끔찍한 살인마가 되었다.
위의 사실들을 고려할 때,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을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몇백 명, 몇천 명을 살해한 악(惡)의 지도자들과 같은 식, 같은 급으로 인식·평가되고 있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재임했던 1963~1979년 기간에 대법원 판결로 사형수로 확정된 사람 수는 강력범 포함 414명이었다. 이 중 사형이 집행된 것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8명(이들은 2007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음)이 전부였다.
‘실존적 위기의 시대’
1·21 사태 당시 체포된 공비 김신조.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중반까지 한국은 실존적 위기를 겪어야 했다. 사진=조선DB비록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 안보와 질서 유지를 위해 부당한 수단을 동원했으나, 이는 당시 남북 대치 상황에서 불가피한 점도 있었다. 서구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체제 전복 세력과 법질서 파괴 세력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응하지 않는가?
대한민국의 현대사에서 1960년대와 1970년대는 국가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던 실존적(實存的) 위기의 시대였다. 1961년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은 군인 출신으로서 한반도의 지정학적 숙명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가 규정한 지도자의 가장 핵심적인 책무는, 5·16 혁명 당시 내세운 ‘빈곤으로부터의 해방’과 유신 선언 당시 강조한 ‘공산주의 위협으로부터의 국가 수호’라는 두 축으로 요약된다.
이 당시 유신체제를 반대했던 지식인들과 일반 국민들은 유신 선언이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 연장을 위한 핑계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당시 나라 자체가 처한 위기의 심각성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각기 다른 이유로 안보 위기의 심각성을 부인하려 했다. 당시 대한민국은 6·25 전쟁의 참화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북한의 끊임없는 무력(武力) 도발에 노출되어 있었다. 국제적으로는 미·소 데탕트와 닉슨 독트린이라는 거대한 정세 변화가 한반도의 안보 지형을 근본적으로 뒤흔들고 있었다. 특히 1970년대 초 미국의 주한미군 철수 정책과 월남의 패망은 박 대통령에게 “미국이 더 이상 우리의 안보를 전적으로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뼈아픈 교훈을 안겨주었다.
안보 위기의 실상을 북한의 대남(對南) 도발 양상과 인명 피해의 내용을 자료로 살펴보자. 박정희 대통령 재임 기간 북한의 김일성은 남한의 정국 혼란을 틈타 무력 통일을 달성하려는 야욕을 버리지 않았으며, 이를 위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의 도발을 감행하였다. 특히 1960년대 후반은 ‘무장공비의 시대’라 불릴 만큼 게릴라 침투가 빈번했다. 1968년 1월에 북한 124군부대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한 대통령 암살 시도가 있었고, 미 해군 정보함 푸에블로호를 공해상에서 강제 나포하기도 했다. 그리고 10월에는 무장공비 120명이 울진·삼척에 침투하여 게릴라 기지화를 시도하였고, 1969년 4월 미군 정찰기 EC-121을 공해상에서 격추하여 승무원 31명이 전원 사망하였다.
국방부의 공식 자료와 국방백서 등에 따르면 1961~1979년 기간 북한의 도발 양상은 휴전선 인근 교전 및 습격의 지상 도발 502건, 서해 및 동해 NLL 침범, 어선 납북 등 해상 도발 559건, 영공 침범 및 정찰 활동 등 공중 도발 51건, 무장공비 및 간첩의 직접 월경 등 직접 침투 1749건, 해외 우회 침투 및 포섭 활동 등 간접 침투 214건, 주요 인사 및 정보원 활용 목적의 납북 및 간첩 남파 등 간접 침투 39건 등이었다. 19년 동안 도합 2686건, 매년 141건의 도발이 있었다. 정전(停戰)협정 위반 건수는, 1950년대 연평균 1.43건에서 1960년대 7.8건으로 폭증하는 양상을 보였다. 특히 1970년대에도 무장공비와 간첩 침투는 연평균 190회 이상 지속적으로 감행되어 남한의 안보를 끊임없이 위협했다.
전시(戰時)가 아닌 휴전 상태에서 북한의 도발로 인해 대한민국 국군 약 300여 명, 미군 약 40여 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였다. 무장공비에 의한 학살, 납북, 폭발 사고 등으로 수십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당했다. 1·21 사태와 울진·삼척 사건에서만 20명이 넘는 민간인이 사망하였다. 납북된 어부들은 3700여 명에 달하며,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어부는 520여 명에 달한다.
‘비상통치 체제’
1972년 10월 선포된 유신체제는 박정희 대통령이 장기 집권을 위해 안보를 도구화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당시 박 대통령의 인식 속에서 유신은 ‘국가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자, 자주국방을 완성하기 위한 ‘비상 수단’이 아니었을까?
그는 서구식 자유민주주의의 분열과 비효율로는 북한의 일사불란한 전체주의 체제를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다. 특히 닉슨 독트린으로 인한 주한미군 철수의 가시화는, 박 대통령에게 커다란 실존적 공포를 안겨주었다. 그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국가의 모든 자원을 한곳으로 집중시킬 수 있는 강력한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확신했던 것 같다.
유신체제는 “냉전적 대치 상황에서 국가를 보위해야만 했던 절박한 상황과 자신의 집권 후 막 도약하기 시작하는 경제의 모멘텀(momentum)을 극대화하고자 했던 비상 통치 체제”로 규정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은가? 즉 민주주의를 ‘유보(留保)’ 혹은 ‘희생’하더라도 국가를 보위하고 경제를 도약시켜야 한다는 것이 혁명가 박정희의 신념이었고 확신이었다.
역사에 가정이 없지만, 만약 박정희 대통령이 민주주의 자체를 지고지선(至高之善)의 가치로 삼고, 북한의 도발에 적극 대응하지 않으면서, 민주화를 빌미로 국내외의 불순 세력들이 야기한 혼란을 방치하였더라면, 오늘날 자유민주주의의 대한민국이 과연 존재하기나 할까? 오늘의 경제적 풍요를 우리가 과연 향유(享有)하고 있을까?
헌정질서 훼손, 장기 집권, 유신선포, 권위주의적 통치, 인권 탄압 등 독재자 프레임(frame)에 덧붙여 우리의 식자(識者)들은 재벌 중심 경제, 정경유착(政經癒着), 과도한 경쟁, 빈부격차, 물질 만능주의, 공동체 해체에 대한 책임 등의 이유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책임을 추궁하여 왔다. 심지어 박 대통령의 사망 이후에 한국 사회가 겪는 양극화(兩極化)나 사회갈등까지도 모두 박 대통령에게 책임을 전가(轉嫁)하여 왔다. 독재자 프레임에 덧붙여 박 대통령에게 책임을 추궁한 각종 문제는, 오늘날 전 세계 선·후진국을 막론하고 다수의 지도자가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문제들이 아닌가?
전체주의와 권위주의
김일성은 36년간 인민을 통치했고 300만 명에 가까운 인민을 아사시켰거나 처형한 독재자였지만, 우리나라의 주류 언론 어느 곳에서 김일성을 ‘독재자’라고 규정한 적이 있는가? 종북(從北) 주사파(主思派) 세력들은 김일성을 “위수동(위대한 수령 동지)”이라 했지 “독재자 김일성”으로 불러본 적이 있는가?
북한 헌법 ‘서문’을 보면 ‘수령’이란 호칭으로 김일성 이름이 24번 나오고, ‘령도자’란 호칭으로 김정일 이름이 18번 나온다. 지구상에 헌법 서문에 지도자 이름이 등장하는 경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말고는 없다. ‘백두혈통’과 주체사상을 내세우는 북한의 ‘수령’과 ‘령도자’는 독재자를 넘어 사이비 종교의 ‘교주(敎主)’와 다름없다고 하면 과언(過言)일까? 이러한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를 독재자라고 부르지 않거나 않으려는 자칭 지식인들이, 스스럼없이 박정희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부르는 것은 모순 중의 모순, 희극 중의 희극이 아닌가?
박정희 대통령의 통치 방식은 히틀러,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과 같은 전체주의 독재자들과 비교했을 때 그 내용이 확연히 다르다.
전체주의 독재자(히틀러, 스탈린, 마오쩌둥)들은 사회 전체를 특정 급진 이념에 따라 완전히 재조직하려 하거나, 개인의 삶과 사상을 국가가 철저히 통제하는 전체주의(totalitarianism) 체제를 구축하려 했다. 이에 반해 박정희 대통령은 다민족 국가 싱가포르의 리콴유(李光耀) 전 총리가 그러했듯이, 대한민국 전복 세력의 준동(蠢動)을 엄중히 경계하며 튼튼한 안보와 엄격한 공공질서를 확립하려 했다. 그리고 그 바탕 위에 경제 발전과 근대화라는 실용주의적 목표를 설정하여 조국과 민족을 위해 헌신한 것이 전부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 선포를 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를 훼손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앞서 살펴본 20세기의 전통적 의미에서 전체주의 독재자는 분명히 아니었다. 박 대통령은 ‘권위주의적(authoritarian leader) 지도자’, 근대화 ‘혁명가’였지 ‘전체주의적 독재자’는 결코 아니었다. 박 대통령은 ‘파괴적 폭군들(despot)’과는 궤를 크게 달리하는 국가 건설을 위한 ‘개발 독재자(Developmental Dictator)’였다. 박정희의 일부 강압성은 빈곤 탈출이라는 ‘목적성’에 기반했고, 경제 도약기라는 ‘한시성’을 염두에 둔 세계 역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연성형(軟性型)이었다.
“산업화 선행되어야 민주화 가능”
산업화와 민주화의 관계를 놓고 역사적 경험이나 학자들의 이론적·실증적(實證的) 연구에서 나온 거의 만장일치의 결론은, 산업화가 선행(先行)되어야만 민주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민주화는 산업화를 가져오지 못하지만, 산업화는 민주화를 가져온다.
서구 선진국 근대사를 살펴보면, 18세기 초중반에 산업화가 진행되었기에 18세기 후반 시민혁명이 전개되었다. 2000년대 초 우크라이나의 ‘오렌지 혁명’과 2010년대 (제1차와 제2차) ‘아랍의 봄’이라는 민주화 운동이 성공하지 못했던 이유는, 두 경우 모두 소득 수준이 민주화를 외칠 단계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토플러(Alvin Toffler)를 포함한 서구 미래학자들은 “민주화란 산업화가 끝나야만 비로소 가능하다. 자유화란 그 나라의 수준에 맞게 제한된다. 자유의 억제를 독재라고 매도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라고 주장했다.
헌팅턴(Samuel Huntington), 달(Robert Dahl), 립셋(Seymour Martin Lipset) 등의 국제 정치학자들은 경제 발전과 민주주의의 상관관계(相關關係)를 심층 분석하였다.
헌팅턴은 《변화하는 사회의 정치질서》(1968)에서 “경제 발전 초기 단계에는 정치적 참여 욕구가 폭발하여 사회가 불안정해지므로, 강력한 정치 제도가 질서를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립셋은 “국가가 부유할수록 민주주의를 유지할 확률이 높다”는 상관관계를 실증적으로 증명했다. ‘민주주의 생존 이론’을 주창했던 세계적 원로 정치학자 쉐보르스키(Adam Przeworski)는 통계 분석을 통해 “1인당 소득이 6000달러(1985년 구매력 기준)를 넘어서면, 민주주의 체제가 붕괴할 확률이 사실상 0이 된다”는 ‘민주주의 생존 임계점’을 제시했다.
인도와 한국
외형적으로는 민주주의가 오래전부터 시행되었으나, 산업화에 성공하지 못해 그 오래된 민주주의가 아직도 정착되지 못하고 비틀거리기까지 하는 사례가 인도다. 인도는 보편적 선거와 의회민주주의가 작동하는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 국가’로 불린다. 동양 최초고 아직도 인도를 대표하는 정당인 인도국민회의(India National Congress)는 영국 식민지 시절인 1885년에 창당되었다. 영국 식민지 시절에도 간디와 네루라는 두 거두가 인도국민회의를 이끌었으며, 이들은 1947년 독립 이후 줄곧 집권당으로 인도를 이끌었다. 네루 가문(부인과 아들)의 독재에 가까운 통치 등으로 인도는 2024년 민주주의 지수(指數) 151위로, 오늘날 ‘결함 있는 민주주의’ 국가로 평가되고 있다.
인도는 한국보다 10년이나 앞서 소련의 계획경제를 흉내 내어, 1951년에 네루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였다. 1979년까지 5차에 걸쳐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산업화에 실패하였다. 인도가 산업화에 실패한 결정적 이유는, 좌파 지도자들이 사회주의 계획경제와 수입대체 정책을 추진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박정희 대통령이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수출 주도 정책으로 ‘한강의 기적’을 성취한 것과는 극명히 대비된다. 이 결과 2024년 인도의 1인당 GDP는 2400달러에 불과하다. 산업화에 실패했기 때문에, 인도는 오랜 의회민주주의 전통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민주주의를 논할 상태가 아닌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인도와는 대조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성취한 산업화 덕분에 대한민국은 민주화에도 성공하였다. 박정희 서거 당시인 1979년의 우리나라 1인당 소득은 1693달러에 불과했다. 하지만 민주화의 중심 세력인 중산층이 소득 증대에 따라 양성되었기에, 대한민국의 민주화는 박 대통령이 영도한 경제 발전에 의해 가능해질 수 있는 기반이 점차 성숙되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박 대통령이야말로 명실상부하게 한국 민주화의 실질적 최대 공로자다.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체제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성이 없었더라도, 자신이 성취한 ‘한강의 기적’에 의해 붕괴되는 태생적 한계를 잉태한 체제였다. 직선제 개헌에 의해 대한민국의 87체제가 확립된 1987년의 1인당 GDP는 3555달러로 그다지 높지 않았으나, 그해 한국의 1인당 GDP가 처음으로 세계 평균을 추월했다.
이승만과 박정희
건국 이래 이재명 현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모두 14명이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들 중 위대한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필자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 두 분이 확실히 위대한 지도자라 확신한다. 오늘날 우리를 자유민주주의 체제 아래 자유롭게 살 수 있게 한 이가 이승만 대통령이고, 경제 번영으로 우리를 잘살 수 있게 한 이가 박정희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에게 정치적 자유를 줬고,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에게 경제적 자유를 주었다. 두 위대한 지도자를 자신들이 믿는 신(神)과 배치된다고 하며 일부 좌파가 의도적으로 폄하(貶下)한 것이 사실인 양 인식되는 현실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된 것이다. 이승만과 박정희를 올바로 이해하고 복권(復權)하는 차원을 넘어 두 분의 정신과 업적을 제대로 계승하고 선양하는 일이 시급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