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취재

‘거룩한 노화’를 즐기는 長壽 이야기

“‘無病長壽(무병장수)’가 아닌 ‘治病長壽(치병장수)’ 시대”

  •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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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93세에 임플란트 15개 한 강골 어머니”
⊙ “감정적으로 늙지 않고, 무탈한 하루에 감사하며, 일과 봉사로 살아야”
⊙ 105세 철학자 김형석 “정년이 되어 대학을 떠난 후 거의 매일같이 수영해”
⊙ 103세 변호사 김인덕 “한 10년은 더 살았으면 좋겠다”
⊙ 92세 류목기 전 풍산 부회장 “일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 90세 심재훈 의사 “노년의 시기에도 성장과 배움의 기회는 아주 많아”
박상철 교수와 어머니 강영례 여사.
60대 은퇴 100세 수명의 시대다. 가지런한 치열과 또렷한 발음, 경쾌한 발걸음을 가진 장수인을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기자는 100세 시대를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듣기 위해 몇몇 장수인과 만났다. 공교롭게도 이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부지런하고 정력적이며 소식(小食)을 오래전부터 실천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담배와 술을 오래전에 끊었다는 점도 특징. 몸이 아파도 긍정적인 태도를 잃지 않는 점도 꼽을 수 있다.
 
  기자는 우리나라 최고의 장수과학자인 박상철(朴相哲·76)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최근 박 교수는 《백세 엄마, 여든 아들》과 《장수박사 박상철의 거룩하게 늙는 법》이란 책을 펴냈다. 그는 “생명이란 거룩한 것이고 따라서 늙음도 거룩한 노정이 아닐 수 없다”는 ‘거룩한 노화(Holy Aging)’란 개념을 새롭게 제안한다.
 
  박 교수는 평생을 생명과학과 의학, 특히 노화 관련 연구에 매진해 온 학자다. 서울대 의대 교수, 가천대 이길여 암·당뇨연구원 원장, 삼성종합기술원 부사장을 역임하고, 현재 전남대 연구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기자는 박상철 교수 어머니의 장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96세 강영례(姜永禮·1929~)씨는 91세부터 93세에 걸쳐 임플란트 15개를 하고, 93세에 대동맥판막 대체 시술을 받은 강골인이다. 박 교수는 어머니에 대해 “종래 의술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최고령 환자임에도 성공적으로 수술을 마쳤다”며 자부심 넘치는 어조로 덧붙였다.
 
  “아흔이 넘은 환자에게는 여러 가지 신체적·생리적 여건 때문에 큰 외과적 수술을 금기시해 왔지만, 의료진의 정성과 최고의 의술로 어머니는 건강을 회복한 의료 시혜의 특별한 사례가 되었습니다.”
 
 
  治病長壽의 새로운 가능성
 
  특별한 사례답게 대규모 임플란트는 어머니 강씨의 식생활을 개선하고 식욕을 돋워서 결국 건강한 삶으로 가는 문을 열어주었다는 게 박 교수의 설명. 또한 대동맥판막을 대체하는 수술은, 그대로 두면 1년 이상 생존하기 어렵다고 했던 어머니에게 새로운 생명을 선사해 주었다.
 
  “어머니가 그토록 사랑하는 텃밭 일을 이제는 딸들의 등쌀에 떠밀려 나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신이 자발적으로 딸들을 채근해 찾고 있어요. 어머니의 일상이 훨씬 더 활발해지고 자기 주도적으로 바뀌었지요. 어머니의 삶의 질이 크게 개선된 것입니다.”
 
  박 교수는 이른바 ‘구곡순담’ 지역과 광주 화순 지역의 100세인을 연구한 일이 있다. 전라북도 구례군, 곡성군, 순창군, 담양군에 이르는 지리산 장수 벨트를 연구해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제 인류는 신체 구조 같은 하드웨어와 다양한 생리적, 지적 기능 같은 소프트웨어를 더는 자연 진화에 기대지 않고 인위적 설계를 통해 개조해 버리는 트랜스휴먼(transhuman)의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아흔 살이 넘어 임플란트와 대동맥판막 대체술을 받은 어머니의 사례보다 더 드라마틱한 사례를 화순군에서 찾았습니다. 김서균 님은 77세에 퇴행성관절염부터 시작하여 93세에 흉추압박골절, 94세에 백내장, 98세에 황반변성, 99세에 요추압박골절, 100세에 심근경색을 겪었으나 모두 의료적 시술과 수술로 해결하여 100세 축하차 남도 여행을 하셨죠. 현재 106세의 나이임에도 건강하게 살아가는 그분의 모습은 미래 초고령 사회에 치병장수(治病長壽)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00세 축하차 남도 여행
 
  박 교수에게 들은 어머니 강씨의 임플란트 시술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강씨의 평생 걱정 중 하나가 치아 문제였다고 한다. 젊었을 때부터 치아가 좋지 않아 일찍 틀니를 하였고 여러 번 교체하면서 거의 30년 이상 사용해 왔다. 그런데 치과대학병원 담당교수가 정년퇴직하자, 어머니 강씨를 새로 인계받은 젊은 교수는 “연세가 너무 많아 더는 치료가 의미 없다”고 진단했다. “그냥 그대로 사시라”는 젊은 의사의 무심한 말에 어머니는 마음이 크게 상했다고 한다.
 
  한데 새로 찾아간 전남대병원의 치과 임현필 교수는 어머니 치아의 엑스선 사진을 검토한 뒤 “치조골이 비교적 건강하니 임플란트도 가능하다”고 결론 내렸다. 박 교수의 설명이다.
 
  “당시 어머니 연세가 아흔하나였는데 치조골이 비교적 건강해 임플란트도 가능하다는 말에 내심 기쁨이 밀려왔어요. 그래서 최소 몇 개를 해야 하는지 물었는데 ‘12개는 해야겠네요’라더군요.”
 
  박 교수는 임플란트 12개라는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식사 때마다 고통스러워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설득해 보자고 결심했죠.”
 

  어머니 강씨도 너무 오랜 세월 치통으로 고생하셨던지라 처음부터 임플란트를 하지 않겠다고는 안 했지만 12개를 해야 한다는 말에 충격을 받고 임플란트 수술을 강하게 거부했다. 강력하게 권하는 아들과 계속해서 거부하는 어머니 사이에 씨름이 시작됐다.
 
  “한 끼라도 편히 드시게 의사 선생님이 하자는 대로 합시다.”
 
  “정 그렇다면 나 4개만 할란다. 그래도 천천히 하자.”
 
  “어머니, 이왕 할 거 하루라도 빨리 해버립시다.”
 
 
  ‘아니 올게쌀을?’
 
  박 교수는 형제들과도 한참 논쟁하였다. 근 1년을 고생해야 하고, 더욱이 100세 노인인데 많은 수의 임플란트를 심으면 후유증이 만만찮을 것이었다. 한데 막상 위아래 합쳐 7개를 수술하고 나니 담당 의사가 “우선 이 정도면 전보다 어느 정도 편한 식사가 가능할 것이다”고 했다.
 
  일단 7개까지 임플란트를 하고 1년 뒤 1개 더 추가해 총 8개를 했다. 그랬더니 병원 측에서 특별한 케이스라며 좋아했다. 다름 아닌 최고령 임플란트 기록을 세웠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1년쯤 지나고 임플란트의 진정한 위력을 알게 됐다. 한번은 어머니 댁을 찾았더니 표정이 무척 밝았다.
 
  “어머니, 무슨 좋은 일 있었어요?”
 
  “내가 오늘 깍두기를 씹어 먹었어야.”
 
  얼마 후 누룽지, 쥐포까지 씹을 수 있게 되니 생활에서도 활력이 생기고 생활 패턴도 크게 개선되었다.
 
  그동안 먹고 싶었으나 차마 먹지 못했던 음식들을 실컷 즐기게 됐고, 특히 고기를 좋아했는데 그동안 치아 문제로 제대로 씹지 못하던 소고기·돼지고기를 이제는 마음대로 구워서 삶아서 쪄서 심지어 생으로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게 다가 아니다. 경악을 금치 못한 일도 있었다. 어느 날 집에 갔다 식탁을 보니 한 귀퉁이에 올게쌀(찐쌀)이 있었다. 박 교수의 말이다.
 
  “동생에게 웬 거냐고 물으니 어머니가 드시고 싶다 해서 구해 왔다고 해요. 순간 이 딱딱한 올게쌀을 씹으시다 잘못되면 어쩌나 싶은 생각에 아찔했어요. 햅쌀을 찌고 말려서 만든 올게쌀은 저에게도 어렸을 적 간식거리였지만 이제는 딱딱해서 엄두도 못 내는데 어머니께서 올게쌀을 드신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박 교수는 어머니의 사례를 들며 ‘무병장수(無病長壽)’가 아닌, 노인의 삶의 질 개선을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치병장수’를 설명하며 “치병장수야말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강조했다.
 
 
  인생은 70부터
 
105세 철학자 김형석.
  기자는 몇 달 전 《월간조선》 신년호를 준비하며 105세 철학자 김형석(金亨錫·1920~) 교수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당시 이렇게 말했었다.
 
  “만약 누가 나보고, 평생을 사는 동안에 제일 소중한 나이가 몇 살이었느냐 그러면 60에서 80 사이인 것 같아요. 그걸 빼버리면 내 인생이 없거든. (중략) 좀 미안한 얘기인데 내가 90 이전까지는 상을 한 번도 받아본 일이 없거든요.
 
  심부름만 했으니까…. 90이 넘으니까 그렇게 상을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인생은 70부터다.”
 
  김 교수는 이런 말도 했었다.
 
  “나는 늙지 말자! 공부 계속하고 감정적으로 늙지 않고, 정서적으로 늙지 않고, 하던 일을 하는 사람은 늙었어도 그런 척을 할 필요 없다!”
 
  기자는 장수 취재를 하며 다시 김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린 시절 김형석은 부모님이 매년 “올해는 넘길 수 있을까” 하고 걱정할 정도로 몸이 약했다. “어머니는 내가 20세까지 사는 것만 봐도 좋겠다”고 하셨을 정도였단다.
 
  젊은 시절에는 바빠서 정기 건강검진도 하지 않았다. 50대 중반까지는 건강에 자신도 없었고 운동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무슨 운동을 할까 고민하다가 혼자서도 즐길 수 있는 수영을 선택했다. 정년이 되어 대학을 떠난 후 거의 매일같이 수영을 한 것이 건강관리에 도움이 되었다. 외국으로 여행을 떠날 때에는 수영장이 있는 호텔을 예약했을 정도로 수영에 진심이었다.
 
  50세가 넘어 시작한 수영을 평생의 운동으로 즐기다가 100세가 되고부터는 체력에 부담을 느껴 주 3회에서 1회로 줄였고 코로나19가 닥친 후로는 전혀 못 하고 있다.
 
  “늙은 사람에겐 생활 자체가 운동을 동반하는 습관이어야 해요. 내 방은 2층인데, 하루에도 몇 번씩 층층대를 오르내립니다. 그것이 곧 운동이죠. 또 하루 한 시간쯤 산책을 하는 시간을 가져요. 원고 내용을 사색하기도 하고 강연 내용을 정리하기도 합니다.”
 
 
  노는 사람은 건강하지 못해
 
  과거엔 주로 아침 시간에 산책했으나 80세 이후부터는 오후에 걷는다. 여름이 아니면 기온이 쌀쌀해 체온 문제도 있고 해서다.
 
  “나는 100세 전까지는 대중교통을 이용했어요. 버스나 지하철을 타기 위해서라도 상당히 긴 거리를 걸어야 하죠. 생활 자체가 운동인 셈이에요.”
 
  나이가 들면서 저절로 적게 먹게 됐고 잠은 밤 10시30분에서 11시쯤 든다. 낮잠을 잘 자고 차로 이동할 때면 무조건 잔다. 강의 때문에 비행기에 올라 자리를 잡으면 바로 잠에 든다.
 
  김 교수는 나이 들면 가장 골칫거리 질병인 혈압과 당뇨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혈압과 당뇨는 주로 60세 이후로 찾아오는데 나이 들어 관리하려니까 힘이 드는 거예요. 50대부터 관리하면 80대까지 건강하게 가는 것 같더라고요.
 
  그러기 위해서는 의료 혜택을 지혜롭게 이용해야 할 것 같아요. 경험 많은 가정의학과 전문의의 도움을 수시로 받으면 좋겠죠. 내 경우는 며느리가 소아과 의사라 도움을 받고 있어요. 나는 혈압이나 당뇨는 없어요.”
 
  그는 “일이 건강 비결”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잘 아는 철학자 칸트는 80년을 살았어요. 300년 전에 80세까지 살았다면 장수한 셈이죠. 그런데 그는 왜소하고 건강에 있어서 열등생이었다고 해요. 산책 외에는 운동을 했다는 기록도 없어요. 어떤 이들은 칸트를 두고 나귀와 같이 많은 짐을 지고 살았다고 평가해요. 무거운 학문의 짐을 지고 80 평생을 건강하게 보냈습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도 마찬가지예요. 그는 하루에 몇 시간밖에 자지 않았는데, 정신적 일뿐 아니라 육체적인 일도 마다하지 않았어요. 90세를 넘길 때까지 손에서 일을 놓은 적이 없었습니다. 100년을 살아보니 알겠더군요. 일하는 사람은 건강하고, 노는 사람은 건강하지 못합니다.”
 
  김 교수는 요즘도 왕성하게 다양한 매체와 인터뷰하며 일을 즐기고 있다. 김 교수의 일정을 관리하는 이종옥 전 생명의전화 이사는 “어제도 인터뷰하고 오늘도 인터뷰하셨다. 꼭 필요한 인터뷰는 거절하지 않으신다”고 했다.
 
 
  선배 동료들의 실패한 삶을 거울로
 
97세 원로 배우 신영균.
  기자는 한국 영화 ‘남성 매력’의 아이콘인 97세 신영균(申榮均·1928~) 선생을 몇 해 전 만났었다. 배우로서 1960~70년대 상남자 스타일의 왕 중 왕이다. 그가 들려준 100세 건강 비결과 노하우는 이랬다.
 
  “특별히 건강을 위한 프로그램은 없습니다. 젊은 시절 당뇨 진단을 받아 그에 대한 식생활에 신경을 쓰고 헬스클럽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때는 밤샘 촬영이 다반사였잖아요. 출출할 때마다 초콜릿을 먹었는데 너무 많이 먹어 당뇨에 걸렸죠. 이후 건강관리에 신경을 썼지요.
 
  만보기를 차고 걷는 운동도 꾸준히 하는데, 어느 글을 보니 4000보를 걸으면 우울증이 사라지고, 5000보를 걸으면 치매와 심장질환이 예방된다고 해요. 7000보를 걸으면 골다공증과 암, 8000보를 걸으면 고혈압과 당뇨, 1만 보를 걸으면 각종 대상증후군을 막을 수 있다고 합니다. 많이 걸을수록 좋아요.”
 
  “많이 걷는 것 이상의 보약이 없다. 나에게 마음의 양식이 신앙이라면 몸의 양식은 걷기다. 걷기가 건강 유지 비결”이라고 했다. 영화 때문에 바쁠 때는 헬스장을 이용했고 헬스장에 못 갈 때는 실내 자전거를 탔다. 취미는 골프. 가끔 필드에 나가는 것도 건강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보기(bogey) 플레이로 80대 후반을 치는 수준급 실력이다.
 
  “무엇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데 긍정과 감사, 이 두 가지가 불로초”라고 말했다.
 
  인기 스타라 스캔들에 휩싸일 법도 한데 흔한 루머조차 없었다. 그저 죽기 살기로 연기에 임했으니 어쩌면 영화가 그의 신앙일지 모른다.
 
  ‘인간 신영균’을 가장 가까이에서 오래 취재해 온 대한언론인회 김두호 이사(‘인터뷰365’ 발행인)를 만났더니 기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김지미(金芝美) 배우가 제게 배우 신영균의 장점이 뭐냐고 물은 적이 있었어요. 서슴없이 ‘남 욕한 적이 없는 사람’이라 답하자, 그녀는 ‘맞아, 맞아요. 그 양반 입에서 남의 험담 들어본 사람이 없다’면서 손바닥으로 식탁을 치며 정답임을 인정했어요.”
 
  배우 엄앵란(嚴鶯蘭)씨의 회고에 따르면 “(신영균은) 다른 사람들이 잡담할 때 혼자 대본을 읽고, 촬영장 밖에선 목사님”이었다. 신 선생은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일·가족·운동 이 3박자에 맞추어 살려고 노력해 왔던 것 같아요. 술과 담배, 갖가지 즐길 수 있는 잡기를 즐기면 이 3박자가 엇박자가 되어 심신이 고달파지고 마음먹은 대로 굴러가지 못합니다. 그럼 사는 게 힘들어집니다. 나의 교훈은 힘들게 살아가는 선배 동료들의 실패한 삶입니다. 그렇게 살지 않아야 한다는 노력이 지금까지 길을 이끌어준 것 같습니다.”
 
 
  “내려올 때는 아내가 빠르고…”
 
92세 류목기 전 풍산그룹 부회장. 사진=매일신문
  “아직도 일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일찌감치 상장사 대표이사 중 오너가 아닌 전문경영인으로 최고령이었던 92세 류목기(柳穆基·1934~) 풍산그룹 전 부회장은 작년까지 풍산홀딩스 고문으로 ‘월급’을 따박따박 받았다. 지금은 풍산의 만류에도 학교법인 병산교육재단과 재단법인 대경육영재단 이사장직은 유지한 채 현업에서 물러났다.
 
  전경련 회장인 풍산그룹 류진(柳津) 회장과 성이 같아 친인척으로 오해를 받지만 류목기 이사장은 전주 류씨, 류진 회장은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1542~1607년)의 후손으로 문중이 다르다.
 
  이런 그와 달리 류 전 부회장의 친구나 동료 중 현재 그처럼 현직에서 활동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의 롱런 건강 비결이 궁금했다.
 
  “한창때는 등산을 좋아했었죠. 365일 중 300일 이상은 새벽 5시쯤 연세대 뒷산에 올랐지요. 영하로 기온이 떨어져도 올랐습니다. 20대부터 하던 일을 50년 넘게 했지요.
 
  요새는 그걸 못 하는데 그래도 일요일이면 아내랑 매주 산에 오릅니다.
 
  올라갈 때는 내가 빠르고 내려올 때는 아내가 빠르고….”
 
  류목기 전 부회장의 가훈은 근약독륜(謹約篤倫)이다. 그의 5대조가 내려준 이 경구는 ‘매사에 삼가고, 검소하며 인륜을 돈독히 하라’는 뜻이다.
 
  “노년기란 상실의 시대라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 나이 때문에 많은 것을 상실해 가고 있지만 정도를 가고 원칙을 지키는 일만은 양보할 수 없는, 변함없는 소중한 자산으로 간직하려고 합니다.”
 
 
  ‘좀 더 즐겁게 일할 걸’
 
  류목기 전 부회장은 경북 안동 임동면 박실에서 태어나 안동사범을 나온 후 서울대 사범대, 동 대학 보건대학원을 졸업했다.
 
  내무부 공무원으로 출발해 서울시청, 교사, 고려병원, 서울대 부설 병원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을 거쳐 여행사 사장, 저축은행장, 풍산그룹 대표이사 부회장 등을 지냈다. 풍산의 류찬우(柳纘佑·1923~1999년) 창업주가 타계하기 2개월여 앞서 간곡히 권유해 풍산의 총괄 부회장직을 맡게 되었다.
 
  ― 장수 비결은 무엇입니까.
 
  “비결이야 간단하죠. ‘좀 더 즐겁게 일할 걸’이라는 후회가 들지 않도록 즐기면 됩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후회하는 3가지가 ‘~걸’이라더군요. ‘좀 더 참을 걸’ ‘좀 더 베풀 걸’ 그리고 ‘좀 더 즐겁게 살 걸’이죠. 한국 사람이 가장 후회하는 건 세 번째입니다.”
 
  ― 좀 더 구체적으로는요?
 
  “술과 담배는 일절 하지 않고 음식은 소식합니다. 특히 담배는 백해무익하죠. 아침은 곰국을 한 컵 정도 마시고 계란 삶아서 하나, 그다음에 두부 한 모, 야채도 먹지요. 점심은 충분히 먹고 저녁은 먹는 둥 마는 둥 합니다.”
 
  ― 오랫동안 현역이신 CEO론을 듣고 싶습니다.
 
  류 전 부회장이 한솔상호신용금고 대표를 맡고 있을 때 노조의 힘이 거셌다고 한다. 그러나 경영을 투명하게 하면서 직원들의 보너스를 300%에서 1100%로 높이고, 남녀 임금 격차도 30%에서 5%로 낮췄다. 그랬더니 노조가 자연 해산했다고 한다.
 
  “CEO는 3가지 일만 잘 하면 됩니다. 인재를 알아보고 채용하면 됩니다. 또 직원이 일을 잘할 수 있도록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그다음에 제대로 평가해서 보상을 주는 겁니다. 이 외에는 불필요합니다. 나는 전문경영인으로서 사주의 사람이 아니라 회사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그는 “회사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임원이지 사주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임원이냐”고 반문했다.
 
  “한번은 청와대에서 인사 청탁을 해왔어요. 그 사람은 가만히 있으면 승진을 할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청와대 압력을 받고 나서 그룹 회장에게 청탁을 거절해야 한다고 했지요. 그렇게 되면 앞으로 사주가 인사하는 게 아니고 청와대에서 인사하는 게 되니까요.
 
  우리 회장이 밖에 나가면 날 어떻게 소개하느냐? 재벌 총수들하고 식사하는 자리에서 ‘우리 부회장은 노맨(No-man)’이라고 합니다. ‘노’를 받아주는 회장이 더 훌륭한 사람이죠.”
 
 
  15일간의 단식 체험
 
  ― 보름 단식으로 위병이 나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느 날 위산과다, 위확장, 신경성 소화불량, 위산결핍 등 수많은 진단을 동시에 받았습니다. 몸은 점차 초췌해지고 일에 매진하는 기쁨을 점점 찾을 수 없게 됐죠. 죽을 것이냐 살 것이냐 하는 절박한 의문의 기로에서 단식의 문을 두드렸죠.”
 
  류 전 부회장에 따르면 단식은 보통 3단계로 예비단식, 본단식, 회식(回食)으로 나뉜다. 예비단계 때는 평소 섭취하던 음식량을 반감하여 나흘간, 흰죽을 같은 양으로 2일간, 미음을 하루 동안 먹었다. 이후 본단식에 들어가면 억눌렸던 통증들이 마구 발산되는데 전신을 휩쓰는 통증을 참는다는 게 진통하는 산부 못지않았다.
 
  “보름 동안 몸에는 살 한 점 찾아볼 수 없고 입술은 마르다 못해 몇 번이나 터져 새살이 나오고 앙상한 뼈는 방바닥을 뾰족한 침처럼 느껴 늘 두꺼운 이불에 몸을 맡겨야 했어요.”
 
  이렇게 단식을 끝낸 후 회식으로 넘어가는데, 단식 생활에 있어 가장 신경 써야 하는 중요한 단계다. 이때는 냉수도 젓가락으로 먹어야 한단다. 첫날은 죽물 한 컵씩 3번, 다음 날은 농도를 높게 하여 같은 양으로 3번, 이렇게 점진적으로 단계를 거쳐 열흘을 보낸 후에야 비로소 죽 한 그릇을 먹게 된다.
 
  “이것마저 마음대로 먹을 수 없어 25~30분씩 씹곤 했지요. 밥은 25일이 지난 후에야, 묽은 밥을 먹고 차차 굳게 하여 먹었지요.”
 
  이후 그렇게 괴롭히던 위병이 사라졌고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
 
 
  ‘삶을 살라’는 ‘신의 명령’
 
88세 이창복 한국외대 명예교수.
  100세 장수인에 비해 아직 한창인 88세 한국외대 이창복(李昌馥·1937~) 명예교수에게 장수 비결에 대해 물었다. 기자는 2020년 7월에 〈죽음의 미학을 완성 중인 노스승〉이란 제목으로 이 교수와 긴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이 교수는 외대 학생처장, 서양어대학장, 부총장을 역임했고 쾰른대와 함부르크대에서 연구 및 교환교수로 재직했었다.
 
  이 교수는 최근 《노년예찬-늙음이 아름다운 삶을 위하여》란 책을 펴냈다. 오랜만에 안부를 묻고 몇 가지 질문을 드렸다.
 
  “올해 나이가 미수(米壽)입니다. ‘참 오래 살았다’는 생각과 함께 스스로가 대견스럽기도 하고 내 삶과 함께한 모든 것에 감사하다는 마음이 듭니다.”
 
  이 교수는 규칙적인 생활습관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오전 7시 반에서 8시 사이에 기상하고 8~9시30분에 아침 식사를 하며 신문과 TV 뉴스를 본다. 그러곤 12시30분까지 주로 서재에서 시간을 보낸다. 오후 2시까지 점심과 오후 뉴스로 시간을 보낸 후 4시30분부터 7시까지 피트니스센터에서 운동을 한다. 그러곤 저녁 7시30분에 저녁을 먹고 이후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다가 11시30분에서 자정 사이에 잠자리에 든다. 잡다한 집안일, 외부 약속 등은 사정에 맞게 조정해 실행하고, 가급적 이 생활리듬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일상에서 규칙적인 것은 습관을 만들고, 습관은 실천의 힘으로 작용합니다. 건강은 보너스로 따라오죠.”
 
  이 교수는 무리(over)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나이 들어가며 몸은 휘청거리고 종종걸음을 쳐도 할 수 있는 만큼 땀 흘리며 운동한다. 원기 왕성한 젊은이들이 부럽다고 혹시라도 무리하면 오히려 무력증이나 근육통으로 고생하게 마련이다. 식사도 마찬가지다. 과식과 급식을 하지 않으려 한다.
 
  이 교수는 일상을 기록하는 일에 열심이다. 거창하게 일기 쓰는 것이 아니다.
 
  “늙어서 별로 할 일이 없다고 쉽게 치부해 버리기 일쑤입니다. 설거지 도와주고, 쓰레기 버리고, 아내의 심부름으로 가게에서 물건 사 오고, 읽은 책이나 간단한 느낌 같은 것 등, 소소한 것들을 기록해 보면 제법 많은 일들을 했고, 또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자세히 알게 되죠. 순간순간의 단상은 귀한 보너스로 절로 얻어져요.”
 
  무엇보다 아침 눈뜸에 감사하고 저녁 침상에서 무탈한 하루에 감사하며 잠을 청한다.
 
  “‘생명(生命)’은 ‘삶을 살라’는 ‘신의 명령’이 아닐까요? 자연은 헤아릴 수 없는 예를 인간에게 보여주고 있어요. 노화는 추하게 보입니다. ‘품위 있게 늙어가는 법’, 말하자면 ‘어떻게 사람은 늙어서도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가’를 늘 생각해요. 나잇값을 해야 한다는 것이죠.”
 
 
  “한 번도 남을 헐뜯거나 비난하는 소리를 해본 기억이 없어”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이창복 교수의 건강은 그리 평탄히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한 후배 교수의 정년퇴임 축하연에서 갑자기 얼굴이 상기되고 불안해지며 심장이 빨리 뛰는 것을 느꼈으나 잠시 후에 사라져서 큰 관심을 갖지 않았었다. 그런데 어느 화창한 봄날, 벚꽃 길을 산책하다가 현기증으로 쓰러질 뻔한 일이 있었다. 그 후 동창회 모임에 나갔다가 쓰러져 손바닥과 이마에 가벼운 찰과상을 입었다. 검진 결과 부정맥에서 오는 빈맥과 서맥이 원인으로 밝혀졌다.
 
  “이후 왼쪽 가슴에 작은 배터리가 투입됐고, 두 개의 가는 철선이 심방과 심실에 자리하고 있어요. 2012년에 시술을 받았고, 2023년에 재수술을 받았어요.”
 
  이미 두 번이나 백내장 수술을 받았다. 수술실은 그에게 낯선 공간이 아니다. 국소 마취로 30~40분 걸리는 심장박동기 투입 시술이 일상을 정상적으로 유지하게 하고, 그냥 잊고 살 수 있으니 감사한 마음뿐이다.
 
  “노화가 인간의 삶에 내려진 자연의 섭리라 할지라도 노력을 통해 이겨내고 있는데, 솔직히 어느 날 불쑥 암 같은 불치의 병이 찾아와 급격히 살이 빠지진 않을지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나는 매일 운동이 끝나면 몸무게를 재요. 아직은 몸무게가 늘어나는 것을 걱정하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혈압, 혈당, 심박동, 체중, 키, 운동량, 섭취 칼로리 등, 숫자화된 자료로 건강 상태를 체크하며 때론 마음이 가벼워지기도 하고 때론 걱정에 빠져들기도 한다.
 
  ― 성격은 어떠신가요.
 
  “결혼 후 첫 말다툼에서 한 아내의 말이 잊히지 않아요. ‘늘 미소를 띠며 궂은일도 마다한 적이 없고,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어서 당신은 화도 줏대도 없는 무골충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겉에 양가죽을 쓰고 있었네!’
 
  부정하고 싶지 않아요. 아내는 내가 남을 헐뜯거나 비난하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말해요. 사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예 하지 못합니다.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할 때마다 여러 사람을 원망하고 비난했죠. 그때마다 돌아오는 것은 더 큰 수모와 고통뿐이었음을 그때 알게 됐어요.”
 
  이 교수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경험하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경험한 것을 어떻게 느끼느냐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버지를 통해 ‘실패’를 보았고, 일찍이 나는 그 실패의 원인이 ‘자기 탓’이라는 교훈을 얻었어요. 자연스레 인내가 습관처럼 몸에 배고, 비난은 침묵 속에 묻어두고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주장을 존중하고 도움에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한 번도 남을 헐뜯거나 비난하는 소리를 해본 기억이 없어요. 대신에 가벼운 미소를 던지죠. 나이 들어가면서 이것이 나잇값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갑상선에 혹이 80cm나 자라
 
92세 강인숙 영인문학관 관장.
  문학평론가이자 국문학자인 영인문학관 92세 강인숙(姜仁淑·1933~) 관장은 남편인 고(故) 이어령(李御寧·1933~2022년) 선생의 뒷바라지를 하며 살았다. 남편이 일 욕심이 많아서 항상 바빴기 때문에 똑같이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가정 생활까지 짊어져야 했다. 이어령 선생은 이미 결혼할 무렵부터 문단의 주목을 받는 신진 평론가여서 글을 쓸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래서 돕고 싶었다.
 
  강인숙 관장은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숙명여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8년 대학 동기동창인 이어령과 결혼해 1남 2녀를 두었다.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평론가로 데뷔했으며 중·고교 교사, 건국대 교수로 재직했다. 남편과 똑같이 교직을 맡고 있으면서, 남편이 글을 쓰는 시간에 아이가 울면 업고 나가 밖에서 재워 오는 식으로 과잉 충성을 했다. 이게 그 무렵 강인숙의 사랑법이었다.
 
  “그렇다고 내 직장에서 봐주는 건 아니니까 학교에서는 학교대로 새벽과 저녁에 하는 공동과외(보충수업)를 내게 맡겼죠. 고3 국어교사였기에 그것은 내 의무였으니 할 말이 없었어요.”
 
  그렇게 과로를 했으니 탈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날이 체중이 줄어가더니 결혼하고 2년이 지날 때쯤 40kg 이하가 되어버렸다. 갑상선에 혹이 생겨 80cm나 자라 있었던 것이다.
 
  “도우미가 있어도 저녁을 준비해야 하니까 집에 들어서자마자 바쁘게 베이티시팅을 시작했어요. 종일 엄마 없이 보낸 아기는 엄마가 그리워서 허겁지겁 가슴부터 파고들었어요. 이건 가슴을 가득 채우는 행복한 일이었지만 약한 몸이 감당하기엔 버거운 일과였어요.”
 
 
  참 많은 병이 차례차례로…
 
  종일 서서 강의를 하고 와서, 아이가 잠들 때까지 씻기고 먹이고 같이 놀아야 하는 것은 중노동이었기 때문이다. 친척은 남보다 몇 배나 많은데, 내게 도움을 줄 친척은 한 명도 없었다. 친정어머니는 학교에 나가는 작은언니가 먼저 점령해 버렸고 시어머니는 애초부터 없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정년퇴임을 할 무렵이 되니 거짓말처럼 일상의 일들이 너무나 쉬워졌고 퇴직 후의 한가함을 마음껏 누렸다.
 
  1년에 책 한 권씩을 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2001년에는 영인문학관을 시작했다. ‘영’은 이어령에서, ‘인’은 강인숙에서 가져왔다.
 
  직원이 적어 강 관장은 우표 붙이기부터 서고 정리, 스크랩북 만들기, 자료 손질하기 등 무슨 일이든지 닥치는 대로 다했다. 하지만 이건 그가 하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어서, 아무리 많은 일을 해도 화가 나지 않았다.
 
  세상을 떠나기 전 이어령 선생은 말기 암 환자인데도 식사가 끝나기 무섭게 서재로 올라가 혼자 일하는 것에 몰두하니, 강 관장도 하루를 자유롭게 자신을 위해 쓸 수 있게 되었다. 늙으니까 몸의 생태도 헤아리게 되어서 어지간한 병은 자가 치료를 하면서 사니, 정신적인 면에서는 대학 시절보다 더 자유로워졌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질병들이 몰려왔다. 고혈압, 허리 디스크, 갑상선 기능항진, 골다공증, 난소종양, 인후암 등 참 많은 병이 차례차례 문을 두드렸다. 수시로 주사를 맞아야 했지만 해야 할 일을 미룬 적이 없어 사람들은 강 관장이 환자인 것을 몰랐다. 그에게 병은 동반자일 뿐이었다. 맞서 싸울 필요 없는 흘러가는 구름과 같다. 해야 할 일을 처리하며, 쓰고 싶은 글을 쓰고 책을 펴내며 병과 함께 세월을 보내고 있다. 강 관장은 최근 노년의 게으른 감관(感官)에 와닿는 이야기를 모아 《나는 글과 오래 논다》를 펴냈다.
 
 
  노년과 봉사
 
90세 심재훈 미국 내과 의사 겸 한의사.
  올해 90세인 미국의 의사 심재훈(沈載勳·1935~) 선생을 만났다. 경북대 의대를 마친 뒤 1968년 미국으로 건너가 내과 의사, 올랜도 연방교도소 의무과장을 지냈다. (심 선생의 사연은 《월간조선》 2023년 9월호를 통해 소개한 바 있다.)
 
  늘 꿈꾸던 의료봉사를 하기 위해 수소문했고 쪽방촌 노숙자들이 모여 사는 서울 영등포 ‘요셉의원’을 알게 되었다. 2003년부터 2015년까지 해마다 3개월간 긴 휴가를 얻어 모국에서 땀을 흘리며 일생에서 가장 뜨거운 여름을 보냈다. 오후 1시에 시작된 진료가 끝나는 시각은 오후 5시. 밤 진료는 두 시간 후인 7시에 시작되었다.
 
  “매년 여름 한국에서 지내며 요셉의원에서 의료봉사를 했죠. 11년이나 의무과장으로 지냈던 올랜도시의 연방교도소에 사직서를 내고 뉴욕의 가톨릭 의료선교본부를 찾아가지 않았다면 아마도 평생 몰랐을 것입니다.”
 
  더 늦기 전에 의료봉사를 할 만한 곳을 찾았고 그렇게 추천받은 곳이 요셉의원이었다. 멀어도 고국인데 이왕 봉사할 거면 고국에서 하는 게 안 낫나 생각했단다. 행색이 남루한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선 채로 문이 열리기만 기다리던 요셉의원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최근 고국을 찾은 그는 지난 4월 8일에도 요셉의원을 찾아가 옛 의료진과 상봉했고 준비해 간 ‘봉투’를 건네기도 했다.
 
  물론 도미니카공화국, 아이티 등 가난한 카리브해 연안 국가로 의료봉사를 떠난 일도 있다. 의료 환경이 열악해 제대로 된 진료나 의약품 공급이 쉽지 않았다. 자연스레 한의(韓醫)와 침술을 접하게 됐고 3년제 미국 한의대(학부 졸업생만 진학할 수 있어 대학원 과정이다)에 늦깎이 입학해 72세 무렵 정식 한의사가 되었다. 지금도 그는 아흔의 나이에도 일주일에 사흘을 한의사로 환자를 돌본다. 초진은 150달러, 재진부터는 80달러를 받는다. 재미동포들에겐 진료비를 받지 않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기자는 서울 종로구 한 호텔에서 심 선생을 만났다.
 
  “의료 시설이 없는 카리브해 연안 국가에선 침술이 낫겠다고 판단했어요. 그래서 양의임에도 한의사 자격증을 취득했지요. 지금은 주로 한의술, 그중에서도 침술로 환자를 돌보고 있죠. 선교지에 가면 서양의학이나 약도 중요하지만 침술도 참 좋아하죠.”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그에게 ‘내내 건강하게 오래 사십시오’라고 인사말을 한다. 외려 늙음을 환기시키는 버튼이 된다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늙음과 죽음을 한 꾸러미로 보고 있는 게다.
 
  “살아 있음에 감사하며 더 열심히 살려 합니다. 아흔이지만 지금도 환자를 본다는 사실이 저에게 활력을 줍니다. 규칙적으로 일하며 환자를 돌보고 받은 수입으로 친구나 친지와 함께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할 수 있으니 이만큼 감사한 일도 없지요.”
 
  심 선생은 지금도 일주일에 3번은 골프를 친다. 9홀에서 2번, 18홀에서 1번을 친단다.
 
  “비거리가 110m 정도입니다. 공이 곧게 뻗어가지요. 벙커에 빠지는 일은 없어요.”
 
 
  인생의 빛이 약해졌을지는 몰라도…
 
  ― 하루 일과는 어떻게 되나요.
 
  “아침 일찍 일어나요. 5시쯤 일어납니다.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집 안을 돌아보며 간밤에 떨어진 야자수 잎을 처리하죠. 그러곤 오전 7시쯤 식사를 합니다. 사위도 의사인데 사위를 병원으로 출근시키는 일도 제 몫이죠.
 
  정해진 시각에 출근했다가 퇴근하는 일상이 저를 건강하게 합니다. 잠은 밤 9시쯤 드는데 중간에 소변을 보기 위해 깰 때는 일부러 자려고 애를 쓰지 않아요. 밀린 업무를 보거나 이메일을 보내곤 하죠. 이렇게 하다 보면 졸리는데 그럼 1~2시간 잠을 자죠. 평균 7시간 정도는 잠을 잡니다.”
 
  작년에 아내와 사별하며 심리적 슬픔을 감내했다. 아내가 4년여 동안 요양병원에 의식 없이 누워 있었기에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존재적 부재(不在)를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꼈을 터다.
 
  ― 가리는 음식은 있나요.
 
  “특별히 없지만 소시지, 베이컨, 햄류는 피해요. 또 설탕도 먹지 않아요. 담배는 애초에 배우지 않았고 술은 마시되 과음하진 않습니다.”
 
  그는 일하는 노년의 시간이 더 절실하다. 그만큼 지금 이 순간 더 집중하고 이 순간을 값지게 보내려 노력한다.
 
  “노년의 시기에도 성장과 배움의 기회는 아주 많습니다. 저는 은퇴를 잊었습니다. 그러나 하루하루를 여유 있게 지내고 서두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은퇴 후에도 매우 바쁘게 지내죠. 인생의 빛이 다소 약해졌을지는 몰라도 여전히 활기차게 하루를 시작합니다.”
 
  90세 김경희(金京喜·1935~) 안중근의사숭모회 상임이사는 경남중고동창회의 살아 있는 전설로 통한다. 1965년 이래 17년간 동창회 총무직을 맡아 헌신했고 13년간 부회장, 2년간 회장으로 봉사하며 척박했던 초창기 동창회의 기반을 닦았다. 누가 뭐래도 경남중고동창회의 기록 문화를 개척하고 평생을 헌신한 경남중고 지킴이다. 동창회보 창간을 처음으로 건의하고 직접 창간에 참여해 204호까지 기사를 도맡아 썼다. 경남고 출신 중에 마당발 김경희를 모르면 간첩과 다름없다.
 
 
  백혈병 이겨내
 
90세 김경희 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
  이런 그가 작년 4월 안양 SAM병원에서 ‘만성 골수성 백혈병’이라는 골수암 판정을 받았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다행히 글리벡(Glivec)이라는 명약(?)이 발견돼 현재 80%가 치유됐다고 한다. 그는 누구보다 긍정적이고 자신감에 넘치며 따스한 어르신이다. 그를 만난 사람이면 누구나 긍정 에너지가 솟는다고 말한다. 그를 만나 건강 이야기를 들었다.
 
  “우선 아침 식사를 포함해 하루 세 끼는 철저히 지킵니다. 기름기 많은 음식은 되도록 피하고요. 삼겹살보다 생선을 즐기고 채소를 많이 먹으려고 애를 씁니다. 술은 거의 마시지 않지만 막걸리에다 사이다를 섞어 조금 마시죠. 부모님이 주신 건강 덕분에 큰 탈없이 90고개에 다다랐어요.”
 
  ― 운동은 어떻게 하십니까.
 
  “60여 년 전부터 학교 후배인 안양 SAM병원 설립자인 이상택 박사가 리드하는 등산팀에 합류해 주 1회 인근 산을 꾸준히 오르내리는 등산꾼이 되었어요. 뛰기보다 빠른 걷기를 강조하는 이 박사 덕분에 열심히 걸었고 해외 출장을 가서도 계속 걷기를 했었죠.”
 
  지금도 김 이사는 왕복 1시간 거리 새벽 기도회에 오가면서 걷기를 계속 실천 중이다.
 
  “어린 시절 집이 넉넉지 않아 주 5일은 지게를 짊어지고 산에 나무하러 다녔어요. 집과 학교 거리 10km를 고2 때까지 걸어 다녔죠. 덕분에 작은 병치레조차 없었어요. 여름방학 때면 무전여행으로 많이 걸어 다녔고요. 나이 들어서도 관악산을 비롯해 서울 근교 산을 꾸준히 오르내렸어요.”
 
  김경희 이사의 집안 내력도 장수 유전자다. 아버지는 미수에 고통 없이 운명했고 어머니는 100세까지 지팡이 없이 꼿꼿이 살다가 신의 부름을 받았단다.
 
  “나의 성공학 조건은 편안한 마음입니다. ‘문이 닫혀 있으니까 문이 열린다’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았어요. 동창회 일을 하며 보통 사람들이 평생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나 대화했죠. 누구하고도 원수 맺는 일은 일절 없었고요. 용서하는 것이 용서해야 하는 사람을 위해 필요하다는 신념으로 살았어요. 날마다 작은 노력들이 열매 맺어 작은 인연이 큰 인연이 되게 했죠.”
 
  그는 경남중고 동창회 외에 부산의 170여 개교 동창회 연합체인 ‘부산시 중고 재경동창회 협의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에 취임한 일도 있다.
 
  “나는 철저히 대화합니다. 외국인은 물론이요 누구하고도 대화하려 해요. 제 신조가 ‘오픈 업(Open up·말문을 열자)’입니다. 건강한 사람들은 자신감이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와의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죠.”
 
 
  ‘만약 내가 당신이라면…’
 
  ― 스트레스는 어떻게 푸십니까.
 
  “기도하고 또 기도하죠. 성경을 1년에 1독을 원칙으로 매일 읽고 있어요. 역참의 말처럼 쫓기는 생활 속에서도 스트레스 따위는 별로 느끼지 못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 가장 보람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2008년 11월 21일, (주)부영이 100번째 기숙사인 우정학사를 경남고에 지어주기로 결정한 일이죠. 반드시 있어야 할 기숙사를 내가 주선했으니 영광이죠. 당시 부영 대표이사(金昇基)와 멋진 만남을 가졌는데 그때 맺은 귀한 열매입니다. 보잘것없는 선배가 후배들에게 남긴 선물이라 부연합니다.”
 

  103세 현역 김인덕(金寅德·1923~) 변호사는 여든 살 무렵 실버타운에 입주해 20년 넘게 노년을 보내고 있다. 고향은 평북 정주. 평남 안주공립중을 졸업한 뒤 서울대 법대를 나왔다. 1970년 육군 법무관 대령으로 예편한 뒤 변호사로 활동해 왔고 미국으로 건너가 20년 가까이 지냈다고 한다.
 
  기자는 분당서울대병원 옆에 위치한 서울시니어스 분당타워에서 김 변호사를 만나 건강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슬하에 2남 3녀를 뒀고 장녀가 70세, 장남이 68세다. 손자, 증손자를 더하면 30명에 이른다고 한다. 아내는 지난해 별세했다.
 
  ― 건강 유지 비결은 무엇입니까.
 
  “건강한 사람들이 대개 비슷할 텐데 열심히 신체활동을 하고 평소 마음가짐을 좋게 해서 다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합니다. ‘만약 내가 당신이라면(if I were you)’ 하고 되묻지요. 마음이 괴로우면 장수하기 어렵습니다.
 
  하루 일과는 오전 5시에 일어나 맨손체조를 하죠. 헬스기구로 1시간가량 운동을 한 후 7시20분쯤 아침을 먹어요. 학창 시절 텀블링이나 체조 같은 운동을 많이 했어요. 제가 장수하고 있는 비결도 단련된 운동 덕분이 아닐까 해요.”
 
  실제 그의 손을 만져보니 크고 단단했다. 키는 크지 않았지만 100세가 넘었음에도 몸이 탄탄했다. 육군 법무관으로 평생을 보낸 것도 건강 유지의 비결이 아닐까. 계속된 김 변호사의 말이다.
 
  “평소엔 실버타운에서 마련한 스케줄에 따라 운동도 하고 여행도 다녀오지요. 점심 시간은 낮 12시에서 1시 사이입니다. 저녁은 5~6시 사이에 먹고 잠은 9시쯤 자지요.”
 
 
  매일 당구 치고 골프는 평균 비거리 200m
 
103세 김인덕 변호사.
  ―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가요.
 
  “가리는 음식은 없고요, 젊은 시절 평양에서 살았기에 불고기, 냉면을 좋아합니다.”
 
  ― 운동은 하시나요.
 
  “저녁마다 당구를 매일 치는데 150에서 200 정도 합니다. 300~500 치는 분도 더러 있으니까 잘한다고 보기는 어려워요.
 
  골프는 보기 플레이를 합니다. 보기 플레이를 하려면 전체 홀에서 3번 정도는 파(par) 플레이를 해야 합니다. 드라이버 비거리 평균은 180~200m 정도 됩니다.”
 
  기자는 골프에 문외한이나 103세 노인의 평균 비거리가 200m에 이른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스트레스요? 난 스트레스를 몰라요. 매사에 다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하고, 다른 사람이 나한테 해롭게 하거나 불평하는 것도 내게 잘못이 있으니까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 하고 생각합니다.
 
  상대 입장에서 날 생각하니 스트레스받을 일이 없지요. 천주교 신자인데 미사 참례도 합니다. 내 몸은 내 몸이 아니고, 내가 바친 그분의 품 안에서 내가 살고, 죽어도 그분 품 안으로 간다는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 술·담배는 하시나요.
 
  “담배는 안 피우고, 피우는 사람이 있으면 끊는 게 좋다고 권하고 있어요. 젊었을 때는 술을 많이 마셨는데 소주보다 정종을 즐겨 마셨습니다. 오(五) 홉들이 정종을 마셨으니까….”
 
  ― 원래 성격은 어떠세요.
 
  “성격은 부드러운 편이에요. 남한테 져도 억울해하지 않고….
 
  마음속에 스트레스가 쌓이는 게 별로 없어요. 희망이 있다면 한 10년은 더 살았으면 좋겠다! 하하하. 이건 내 희망이고, 지금도 아침에 1시간 정도는 운동하고 저녁엔 1시간 정도 당구를 치니까, 죽음에 대한 생각은 아직 안 들어요.”
 
  김 변호사의 건강 비결은 의외로 명확했다. 남의 잘못에 대해, 자신에 대해서도 관대한 편이었다. 화나는 일도 비교적 쉽게 놓아버리고 잊어버렸다.
 
 
  당뇨 극복기
 
92세 이용태 전 삼보컴퓨터 명예회장.
  삼보컴퓨터를 창업해 한국 컴퓨터 시대의 막을 올리며 PC를 상용화한 92세 이용태(李龍兌·1933~) 삼보컴퓨터 전 명예회장은 평생 ‘사장’ ‘회장’ ‘이사장’이란 직함을 달고 살아왔다. 재계 외로는 숙명여중고 및 숙명여자대학교 재단 이사장, 퇴계학연구원 이사장을 맡았고 현재도 전국 유림들의 모임인 사단법인 박약회(博約會) 회장을 맡고 있다. 또 한국정보산업연합회 명예회장, 한국정신문화재단 명예이사장으로 원로로서 존경을 받고 있다.
 
  그는 당뇨가 매우 심했지만 식사요법으로 스스로 병을 이겨냈다. 서울 중구 한 일식당에서 만나 점심을 들며 대화를 나누었다.
 
  “지금 내가 죽을 먹잖아요. 근데 위장으로 안 내려보냅니다. 맛만 보고 삼키지 않고 뱉습니다. 밥도 마찬가지죠. 밥을 씹어 맛만 보고 삼키진 않아요. 어딜 가나 식사할 때는 종이컵을 가지고 다녀요.”
 
  ― 삼가는 음식이 있나요.
 
  “밥, 떡, 국수, 빵, 과자 같은 탄수화물과 사이다, 콜라, 그다음에 과일은 일절 안 먹습니다. 맛보고는 뱉지요. 대신 채소는 한 끼니마다 100g은 먹어요. 탄수화물은 나물만 먹는 셈입니다. 밥을 안 먹으니까 올리브유를 하루에 한 10숟갈 정도 먹어요. 올리브의 열량이 높으니까 그걸로 보충이 돼요.”
 
  ― 고기류는요.
 
  “생선이나 고기는, 그러니까 단백질은 보통 사람하고 똑같이 먹어요. 몸으로 봤을 때는 탄수화물이 안 들어오니까 피 속에 혈당이 안 생깁니다. 대신 지방으로 영양소를 태우니까 괜찮습니다.”
 
  ― 당뇨를 완전히 극복하셨나요.
 
  “지난 2~3개월 동안의 혈당의 평균치를 평가하는 당화혈색소 검사에서 수치가 6 이상이면 당뇨병인데 나는 5.3밖에 안 나옵니다. 공복혈당도 130 정도 되면 약 먹으라고 그럽니다. 나는 70밖에 안 됩니다. 70은 저혈당입니다. 쓰러집니다.”
 
  ― 그런데도 안 쓰러지는 비결이 궁금합니다.
 
  “엔진이 달라서입니다. 혈당이 70밖에 안 되지만 나는 지방을 태워서 움직이는 엔진을 갖고 있고 보통 사람은 탄수화물을 태우는 엔진을 갖고 있는 것이죠.”
 
 
  명상 전도사
 
  이용태 회장의 이런 식이요법을 저탄고지 식사법이라고 부른다. 저탄수화물 고지방 다이어트(Low carb-high fat diet·LCHF)란 열량의 총 섭취량은 유지하면서 섭취 비중 가운데 탄수화물(당질)이 들어간 음식을 줄이고 지방이 들어간 음식을 늘려, 체내 인슐린 저항성을 낮추는 것을 목표로 한다.
 
  “키토제닉 다이어트(Ketogenic diet)라고 불리는데 미국에선 꽤 유행했죠. 대개 6개월에서 1년 정도 하는데 나는 한 4~5년 됐어요. 서양 사람들 논문을 보면 이런 식이요법이 효과적이라고 설명하지만 정작 나처럼 오랫동안 이런 식이법을 유지했을 때에 관한 연구 결과는 없어요. 내 경험에 비추어 본다면 오래 해도 문제가 없어요.”
 
  ― 당뇨 완치 판정을 받은 겁니까.
 
  “근본적으로 없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아직도 세 끼 밥을 먹고 피 검사를 하면 혈당이 올라가거든요.”
 
  평소 식습관으로 돌아가면 다시 혈당이 올라간다는 얘기였다.
 
  “근본적으로 나은 것은 아니지만 결국 나아지긴 한 건데…, 그러니까 당뇨가 오래가면 나쁘잖아요.”
 
  ― 당뇨 판정을 받은 것은 언제인가요.
 
  “1980년대쯤이니까 한 40~50년 전이죠. 그 전에는 보통 환자들처럼 약 먹고 인슐린 주사를 맞았지요.”
 
  ― 당뇨약을 완전히 끊었나요.
 
  “한 알 정도는 먹어요. 메트포민(metformin)이라는 약인데 흔히 장수약으로 알려져 있어요. 이걸 먹으면 수명이 연장된다고 해요. 장수도 하고 당뇨도 예방되고.”
 
  이용태 회장은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유타대학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6개 국내외 대학의 명예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는 그는 1982년 국내 최초의 데이터 통신 기업인 데이콤 초대 사장을 맡았고, 1996년엔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 업체 ‘두루넷’을 직접 설립하는 등 IT 산업의 선구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경험 많은 교육자이기도 하다. 중고교 교사, 대학교수를 역임했고 대통령교육개혁자문위원을 세 차례나 맡았다. 지금은 명상 전도사로 활동하고 있다.
 
  “요새 만나는 사람마다 명상하라고 설파하고 있어요. 달라이라마가 뇌 세포 과학자들을 불러 놓고 10~20년 명상한 승려들의 뇌 사진을 찍었는데 아주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어요.
 
  오래 명상한 사람의 뇌 조직이 변한다는 사실입니다. 해마라는 기억을 관장하는 부분의 세포는 늘어나고, 대신 스트레스를 느끼는 편도체는 줄어들어요.”
 
 
  “내 목표는 24시간 명상”
 
  ― 노화와도 관련이 있습니까.
 
  “우리 몸을 이루는 기본 단위인 세포는 끊임없이 분열하고 성장합니다. 염색체 끝부분에 있는 DNA-단백질 복합체를 ‘텔로미어’라고 해요. 세포가 분열할 때마다 점점 짧아지는데 이 텔로미어가 일정 수준 이하로 짧아지면 세포가 노화해 죽어요. 이 뇌신경에다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주는 습관이 바로 명상입니다.”
 
  ― 명상은 어떻게 하나요.
 
  “무작정 30분 명상을 하려 하면 제대로 되지도 않고 힘만 들어요. 10분 하는 것도 지겹죠. 그런데 계속 5분 하다가 5분 하는 걸 두 번으로 늘리고, 3번으로 늘리고 그러다가 10분을 하루 3번 하다 4번으로 늘리는 식으로 하면 됩니다.”
 
  이 회장은 “내 목표는 뭐냐. 24시간 명상”이라고 했다.
 
  “멍하니 있으면 잡념이 제멋대로 돌아다니니까 한 가지에 집중해야 합니다. 밥 먹으면서도 머릿속에 딴생각이 왔다 갔다 하지 않게 먹는 데만 집중하면 그것도 명상입니다.
 
  길을 걸을 때도 걸어가는 발걸음에만 신경을 집중하면 명상입니다. 자동차를 운전할 때도 이 생각 저 생각 하지 않고 운전만 하면 명상입니다. 결국 하루 24시간을 명상으로 보낼 수가 있는 것이죠. 이렇게 하면 머리가 복잡하지 않고 항상 맑아요. 깨끗하고.”
 
  ― 두통도 없겠네요.
 
  “물론 두통도 없고, 옛날에 기업 하며 일어났던 아쉬웠던 일, 분하거나 화났던 일도 싹 가라앉아요.”
 
  ― 명상은 어떻게 하는 건가요.
 
  “천천히 하나 둘 셋 넷은 들이쉬고, 하나 둘… 일곱 여덟은 내쉬고…. 숨을 내쉴 때 행복하다, 행복하다 주문을 외요. 그러면 몸이 행복을 느껴요. 긍정적으로, 낙관적으로,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평소에 막연히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자연히 밝은 사람으로 변합니다. 사람의 바탕이 변하는 것이죠. 한번 해보세요.”
 
  이용태 회장은 “유튜브에 내 이름과 ‘실천유학’을 넣고 검색하면 동영상이 나온다”고 귀띔했다. 지금도 정년퇴임한 이들을 상대로 한 달에 한 번씩 명상 강의를 하고 있단다.
 
  [편집자 주] 이용태 회장은 취재 당시 매우 건강하게 보이셨습니다. 인터뷰한 날짜는 3월 5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4월 14일 별세하셨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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