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교들은 한국에 대한 우월의식을 묻는 말에 말을 아꼈다. 그러나 ‘上國’의 뿌리에 대한 자부심까지 부정하지는 않았다. 반면 한국에서 소수민족으로 당하는 차별과 배제에 대해선 ‘중화의식’의 자존심을 버리고 한국 화교를 ‘세계적인 난민’에 빗대며 처우개선을 요구했다.
⊙ 한국 화교 인구 중 88.7%가 한국에서 태어나… 중국 본토 출신은 9.3%
⊙ 현재 한국 거주 영주권 취득 화교 수는 1만명… 대만에 호적이 없어 대만에 거주 못해
⊙ “한국인의 4대 의무 중 군복무를 제외한 교육·납세·노동의 의무를 모두 이행했다”
⊙ 한국 화교 인구 중 88.7%가 한국에서 태어나… 중국 본토 출신은 9.3%
⊙ 현재 한국 거주 영주권 취득 화교 수는 1만명… 대만에 호적이 없어 대만에 거주 못해
⊙ “한국인의 4대 의무 중 군복무를 제외한 교육·납세·노동의 의무를 모두 이행했다”
- 중국의 날 축제를 맞아 인천 중구 차이나타운 일대에서 열린 한중문화거리 퍼레이드에서 대만 중화무룡무사운동협회원들이 멋진 용춤을 선보이며 축제 분위기를 돋우고 있다(2008년 9월).
짜장면(炸醬麵). 이 친숙한 말과 한국 화교(華僑)를 동시에 떠올리기는 어렵지 않다. 속이 보이지 않는 춘장 속에 ‘짜장면밖에 팔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한국인들은 잘 알지 못한다.
재한(在韓) 화교의 시초는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이후 조선 땅에 입성한 청나라 상인들이다. 이후 130년 동안 세대를 거쳐 4~5세대(世代)가 한국에 뿌리내렸다. 화교 1세들은 주로 호떡장수, 막노동꾼, 목수, 석공, 미장이로 시작해 점차 중화요리, 배갈(고량주)공장, 목욕탕, 이발소, 한약방 주인으로 반경을 넓혀 한때는 한국경제의 근대화(近代化)에 작지 않은 영향력을 가졌다.
이 ‘중국계 한국인’은 그 수가 10만명에 가까웠으나 지금은 2만1381명(2011년 12월 기준)으로 움츠러들었다. 1992년 한중(韓中) 수교와 한·대만(臺灣) 단교 이후 ‘한국계 중국인’인 조선족이 밀려들면서 화교의 정체성도 복잡해졌다(2011년 현재 국내 조선족 수는 47만570명이다).
사실, 화교의 사전적 의미는 ‘외국에 사는 중국인’이다. 범주로 따진다면 조선족도 화교다. 그러나 국적이 중국인 동북 3성 출신 조선족은, 한족(漢族) 출신이자 국적이 대만인 한국 화교들과 다를 수밖에 없다. 또 한국 화교의 말은 산둥성(山東省) 옌타이(煙臺)의 무핑(牟平)과 푸산(福山)지방 방언(무푸어·牟福語)만 쓴다. 공통점이 거의 없다.
《화교의 역사, 생존의 역사》를 쓴 전남대 국제학부 최승현(崔承現) 교수는 “한국 화교들이 중국인이라는 정체성보다는 출신지역에 대한 정체성이 앞서 지역 사투리를 쓰는 출신끼리 뭉치는 것을 선호했다면, 새로운 화교 이민자는 중국 표준어를 구사하고 중국이라는 자부심과 정체성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학자들은 ‘한국계 중국인’(조선족) 이민자를 신(新) 화교(혹은 신교)라 부르고, ‘중국계 한국인’(한국 화교) 이민자를 구(舊) 화교(혹은 구교)라 부른다. 공통점이 없는 두 이민자 화교집단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 구 화교는 신 화교를 자기네 사람이라 인정할 수도 없고, 신 화교 역시 마찬가지다. 수적으로 점점 밀린 한국 화교는 언젠가 한국 땅에서 영원히 사라질지 모른다. 한국인으로 귀화(歸化)하거나 대만과 중국 국적 혹은 제3국으로 떠나는 선택을 강요받을 날이 멀지 않아 보인다.
한국인이 화교들을 ‘짱깨’ ‘되놈’ ‘왕서방’이라 비하해도, ‘대륙인(大陸人)’이란 자존심으로 버티던 구 화교(이하 ‘구 화교’를 화교로 통칭) 사람들은 요즘 들어서 고민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박정희(朴正熙) 정부 시절에 받았던 부당한 대우를 박근혜(朴槿惠) 신 정부가 풀어 주기를 갈망하고 있다.
한성화교협회(漢城華僑協會) 왕문영(王文榮) 수석부회장은 “현재 한국에 거주하는 영주권 취득 화교 수가 1만명에 불과하다. 이들 대부분이 대만에 호적이 없어 대만에 거주할 수 없고, 중국에도 호적이 없어 역시 거주할 수 없다”며 “단지 국적이 한국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인권차별을 하는 것은 시대착오가 아니냐”고 했다. 인권차별이란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기자는 여러 화교의 말을 경청하기로 했다.
농축된 불만들
막상 들어 보니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비슷비슷한 말이지만 저마다 사연이 달랐다. 어디서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막연했다. 이야기를 들으며 화교 사회의 리더들도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꼈다.
화교들의 주장을 실명(實名)으로 할지, 익명(匿名)으로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식자(識者)들은 실컷 얘기하고 ‘오프 더 레코드’를 요구했고, 상인들은 “없던 말로 해 달라”고 했다. 한국화교문제연구소 측 얘기를 들으니 “한국 화교와 관련된 역사 기록물도 거의 없다”고 했다. 한성화교소학교 교장과 이사장에게 인터뷰 요청을 했으나 묵묵부답이었다. 소수자의 목소리는 낮고 가벼워 한곳으로 모으기 어려운 것일까. 그래도 만났던 목소리를 엮으니 어렴풋이 화교의 ‘어제와 오늘’이 보였다.
“얼굴이 비슷하고 한국말을 하기 때문에 피부색으로 인한 차별은 없지만, 제도적 차별을 일상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은행·전기·수도·인터넷 등등 외국인이어서 안되는 것이 너무 많아요. 늘 겪는 일이지만 겪을 때마다 기분이 나빠요. 통장개설을 할 때마다 ‘또 싸우러 가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왕문영씨는 서울 여의도 한 호텔에서 중식당을 경영했다. 많은 정치인과 교분이 있었지만, 지금은 현업에서 은퇴, 빌딩 임대업을 하고 있다. 화교 사회에서 성공한 케이스. 그의 말이다.
“화교의 역사는 1882년 청(淸)과 조선의 통상조약 체결로 시작해 130년이 흘렀어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동서(東西)냉전이 시작되면서 남한 거주 화교가 본국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한국에 발이 묶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한국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어요.”
—현재 어떤 신분인가요.
“한국 국적법은 한국에서 태어나도 아버지의 나라로 국적을 정하잖아요. 그러니 한국 거주 2만여명의 화교는 국적이 중화민국(대만)으로 등재돼 있어요. 만약 국적법이 속지법(屬地法)으로 정해져 있었다면 모든 화교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등재돼 차별대우를 받지 않았을 겁니다.”
그의 계속된 말이다.
“지금 거주지가 분명히 서울시지만 가족관계등록부는 법무부출입국관리사무소에 등재돼 있어요. 주민세 및 모든 세금을 서울에서 납부하고 있는데도 단지 한국 국민이 아니기 때문에 서울시민으로 인정되지 않는 것은 인권침해입니다.”
곁에 있던 한성화교협회 곽원유(郭元有) 총무부장이 말을 보탰다.
“평생을 한국에 살고 있지만, 영주권 신분으론 아무런 복지혜택도 받지 못해요. 65세 이상 화교노인들에게 노인기초생활보조금 지원 및 실버패스 어르신교통카드를 발급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화교들은 대한민국 국민이 이행하는 4대 의무 중 군복무를 제외한 교육·납세·노동의 의무를 모두 이행해 왔어요. 한국인은 의무만 요구했지 화교에게 권리는 주지 않고 있어요.”
그나마 외국인 장애인 복지규정이 지난 연말 국회를 통과해 화교들의 가슴을 쓸어내리게 했다. 화교는 물론 모든 외국인 장애인은 한국인 장애인과 똑같은 대우를 받게 된 것이다. 왕 부회장과 곽 부장은 할 말이 무척 많았다. 그들은 “한국사회는 인터넷 사회인데, 외국인 실명확인이 제대로 되고 있지 않아 자금거래, 온라인구매 등 인터넷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카드발급도 은행에 따라 제한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중국집 아서원의 추억과 응어리
“과거 배갈공장을 경영했던 분 중에 상당수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습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화교들이 경영하는 배갈공장이 자진에서 문을 닫도록 한국 정부가 고의로 배갈의 주세를 불합리하게 책정해 모두 도산케 했다는 것입니다. 또 제3공화국 시절엔 한때 중화요릿집에선 볶음밥 등 쌀로 만든 음식을 팔지 못하게 규제한 적도 있어요. 중국집은 밀가루만 팔아야 한다는 것이죠. 무지(無知)인지, 억지(抑止)인지 생각조차 하기 싫은 추억입니다.”
한국화교문제연구소 국백령(鞠柏嶺) 대표는 화교협회 부회장을 역임했고 KBS 중국어방송작가로 30년을 재직했다. 한때 서울 강남에서 중식당을 경영한 일도 있다.
그는 “내 딸이 미국 회계사다. 한국 화교는 국내 회계사 시험에 응시할 수도 없다. 그러니 한국에서 태어나 공부했지만, 자격증은 미국에서 따야 했다. 이것이 현실”이라고 했다.
“1970년대에 ‘외국인 토지관리법’이 만들어졌어요. 이 법에 따르면 재한 화교들은 1주택 1점포에 한해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어요. 주택용 토지면적은 200평 이하이고, 점포용 토지면적은 50평 이하였죠. 식당이 잘돼도 넓힐 수가 없었지요. 또 3층 건물을 어렵게 매입해 1층에서 영업을 하는데 2층과 3층이 비어 있어 타인에게 빌려 주거나 임대하고 싶어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어요. 지금은 그런 제한이 사라졌지만 1970~80년대의 서슬 퍼런 기억을 갖고 있어요.”
박정희 정부 때 만들어진 ‘외국인 토지 취득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은 외국인이 50평 이상 상점이나 200평 이상 토지를 사려면 건설부장관의 허가를 받도록 해 사실상 한국 화교의 재산증식을 막았다. 이 밖에 이승만(李承晩) 정부의 ‘물건창고 봉쇄’ 조치, 외국인의 외환사용 규제, 이승만과 박정희 정부에서 각각 시행된 통화개혁은 현금 소지량이 많은 화교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고 한다(박경태의 <국내 거주 화교 인권실태 조사> 참조).
하지만 김대중(金大中) 정부 출범 이후인 1998년 6월부터 새로운 ‘외국인 토지법’이 시행되면서 불합리한 제한은 사라지게 됐다.
그래도 많은 화교는 아픈 상처를 떠올린다. 대표적인 예가 서울 아서원 매도사건이다. 서울 을지로1가 롯데호텔의 한 부분이 된 아서원(雅叙園)은 1969년까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하고 규모가 컸던 중국요릿집이었다. 한때는 한국의 정·재계 거물들의 단골이었다. 화교들에게 있어서도 가장 큰 결혼예식장 및 연회장으로 이용되었다. 국백령씨의 말이다.
“그런데 1969년 2월 아서원은 대주주에 의해 시가의 4분의 1도 안 되는 헐값에 당시 롯데제과대표 신춘호(申春浩·現 농심 회장)씨에게 넘어갔다. 다른 주주들은 내용도 전혀 모른 채. 아서원 주주들이 소송을 걸었고 승패가 뒤바뀌길 5년간 반복하다가 결국 롯데에 패소, 60여년의 명물이 사라지게 됐다. 지금도 아서원 주주들은 물론 대다수 화교는 최종 판결에 승복하지 않고 마음속에 큰 응어리로 간직하고 있다.”
“지금 화교들은 2등 국민”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1950년대까지도 서울 영등포와 인천 부평을 중심으로 화교들이 채소농사에 많이 종사하고 있었다. 어떤 이는 한국인 부인 명의 또는 한국인 친지 명의 등으로 땅을 경작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외국인은 전(田)과 임야(林野)를 취득할 수 없게 돼 재산권이 박탈당하거나 배신당해 알거지가 된 사람이 속출했다. 국백령씨의 계속된 말이다.
“한국을 떠난 화교들이나 한국에 남아 있는 화교들이나 모두 한(恨) 같은 것이 있어요. 그러니 화교끼리 똘똘 뭉칠 수밖에 없었죠. 한국 화교들이 너무 보수적이고, 고집이 세서 부득이한 경우 외에는 ‘대국인’이란 심리 때문에 한국인 되기가 쉽지 않아요. 또 귀화하려고 해도 한국 귀화가 쉽지 않습니다. 귀화를 신청하려면 재산증명과 함께 한국의 유력인사들, 예를 들어 국회의원이나 지방의원, 법관, 교수, 5급 이상 공무원, 학교 교장, 상장기업 부장급 이상 간부 임원 2명의 추천이 필요해요. 또 1년 이상의 심사를 거쳐야 하고 필기시험과 면접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필기시험 면제자는 대졸자와 65세 이상 노인에 한정돼요. 그러니 귀화를 위한 ‘모험’을 꺼리게 되지요.”
국씨는 “그냥 현재의 차별대우를 참고 대만 국적을 유지하느냐, 아니면 중국 국적으로 바꾸느냐, 그것도 아니면 한국국적을 선택하느냐 3가지 중 하나를 강요당하고 있다”고 했다.
“중국으로 국적을 바꿔도 중국 여권이 국제적으로 차별받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럴 바에야 대만 여권을 갖는 게 유리해요. 또 중국 당국으로부터 중국 여권을 받아도 자국민과 똑같은 대우를 해 준다는 보장도 없어요. 중국은 아직 못 믿으니까요.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릅니다. 화교들은 대만과는 싸울 수 있고 따질 수도 있지만, 중국에는 끽소리 못합니다. 중국 당국이 그만큼 권위적이니까요.”
—과거보다 위상이 나아졌나요.
“옛날 그대로입니다. 회사에 들어가도 번역이나 통역 일에 종사하는 게 고작입니다. 비전이 없어요. 한국인 입사 친구들은 승진해도 화교들은 그 자리에 눌러앉게 되고, 만년 과장만 하다가 뛰쳐나옵니다. 학계에 진출한 경우도 정식 교수가 몇 안되고 대개가 시간강사입니다. 총선, 대선에 표를 찍을 참정권이 없으니 정계와 접촉도 없고, 정치인 역시 화교들을 만날 필요도 없지요.”
—20년 뒤 한국 화교의 모습은 어떨까요.
“아마 거의 다 귀화해 있을 겁니다. 지금 화교들은 2등 국민입니다. 이주결혼 여성이나 다문화 사람보다 처우가 못해요. 사회적 관심도 얕고요. 대국인이라는 자부심도 나이 많은 사람 빼고는 거의 없어요.”
한국외대에서 화교를 연구한 김일권(金日權)씨는 <재한 중국인의 포섭과 배제를 통해 본 한국 다문화주의> 논문을 통해 한국 화교의 역사를 ‘차별과 배제의 역사’로 규정했다.
그는 “한국 화교가 한국사회에 동화(同化)되지 못하고, 특히 국적 보류를 통해 집단적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차별과 배제의 역사’로 규정된 한국의 화교정책에 기인한 바가 크다”며 “이러한 차별과 배제는 한국사회로의 동화를 억제하고 화교와의 경계선을 명확히 설정하게 하였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왜 한국은 화교에 대해 ‘차별과 배제’의 논리로 대할까. 중국과 화교에 대한 오래된 민족감정 때문은 아닐까.
사실, 한국 화교의 역사는 여타 화교의 역사와 다르다. 동남아 국가의 화교는 하급 노동자의 신분으로 정착했지만 한국 화교는 이민 송출국인 청나라의 정치적 비호 아래 ‘상국(上國) 국민’의 지위로 그 역사를 시작했다. 한국 화교는 한중 양국 간의 전근대적인 종속관계 속에서 청나라 정부의 종주권 강화라는 정치적 목적 아래 진행된 측면도 강하다(김일권, <재한 중국인의 포섭과 배제를 통해 본 한국 다문화주의> 참조).
화교가 싫은 뿌리 깊은 이유
한국 근대소설에서 ‘상국’인 중국과 중국인, 화교의 이미지는 부정적이다. 지주, 호색한, 수탈자 등으로 묘사된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한국(조선)인은 버림받거나 비참하게 죽음을 당하는 인물이다.
월북 작가 엄흥섭(嚴興燮·1906~?)의 소설 《파산선고》(1930)는 화교자본에 몰락하는 평양 소상인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화교 왕정선(王正善)은 거대 자본을 가지고 평양 상공계를 좌우하는 큰손이다. 중국 주단과 포목을 독점하며 전 조선의 소자본을 흔들며 몰락시킨다.
《파산선고》는 대자본가인 화교와의 관계에서 이윤과 노력을 착취당하는 소상공인 계급의 갈등을 그린다. 이를 통해 1920년대 만주배경 소설의 연장에서 중국인 지주 또는 자본가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확대 재생산한다.
1925년 발표한 김동인(金東仁·1900~1951)의 《감자》의 주 배경도 평양이다. 《감자》는 복녀라는 여인이 타락해 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으로, 중국인 지주 왕서방의 감자밭에 몰래 들어가 감자를 훔치다 들켜 몸을 팔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몸을 판 복녀는 피해자, 왕서방은 호색한으로 그려져 있다. 왕서방이 다른 처녀와 결혼하자 복녀는 질투심에 낫을 들고 왕서방을 찾아갔다가 결국 죽게 된다. 왕서방은 복녀의 남편과 한방의(韓方醫)를 매수해 뇌일혈로 죽었다고 가짜 진단서를 만든다.
최서해(崔曙海·1901~1932)의 <홍염> <이역원혼>, 강경애(姜敬愛·1907~1943)의 <소금>, 안수길(安壽吉·1911~1977)의 <새벽>, 한설야(韓雪野·1900~1976)의 <한길> 등 다른 소설에서도 중국인은 ‘악의 대명사’로 묘사된다. 거개가 비정하기 짝이 없거나 극악한 사람으로 그려졌다.
한국인에게 ‘상국’과 지주, 자본가와 수탈자의 이미지가 화교의 이미지에 어른거리는 것과 같이, 한국 화교들은 한국에 대한 우월의식을 갖고 있다. 비록 지금은 대만이라는 정치적인 소국(小國)에 적을 두고 있으나 뿌리는 거대 중국이라는 것이다.
대만국립정치대 대학원에서 국제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한 《대만, 우리가 잠시 잊은 가까운 이웃》의 저자 최창근(崔彰根)씨의 주장이다.
“한국의 경우 중국인의 관점에서 볼 때 변방의 ‘번국(蕃國)’ 내지는 ‘속국’으로 치부돼 온 것이 사실이죠. 제가 대만에서 읽은 한·대만 관계에 관한 어떤 책에서 대만의 대표적인 지한파(知韓派) 인사로 알려진 저자는 한국과 대만의 역사적 관계에 대해 ‘청나라 시절은 종속관계, 장제스(蔣介石) 총통 재임 때는 부자관계, 이후 냉전체제 때는 형제관계(대만=형, 한국=동생)’로 묘사했어요.”
“대만은 형, 한국은 동생”
대만의 대표적인 지한파 인사도 그러하듯 대만인들의 머릿속에는 한국에 대한 우월의식이 내재해 있다는 것이다. 한국 화교들 역시 그런 사고에서 멀지 않다. 그러나 화교(대만)들의 우월성은 ‘분열된’ 정체성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이 최씨의 생각이다.
“대다수 대만 국민은 자신의 혈통이 중국은 맞지만, 중국인과는 다른 ‘대만인’이라는 정체성도 가지고 있어요. 뿌리인 중국보다 훨씬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이뤘다는 우월의식 말이죠. 대만과 중국이 같은 뿌리라는 중화의식 정체성, 그러나 중국보다 대만이 더 발전했다는 우월감이 분열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한국에 대한 우월감도 논리적으로 맞지 않아요. 과거 대한민국 정부가 임시정부 시절부터 인연을 지속해 오고, 어려운 시절 도움을 받았던 대상은 ‘대만 정부’이지 ‘대만’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분열된 중화의식에 기반을 둬 상대적인 우월감을 한국에 내세우는 것은 성립할 수 없어요.”
취재 과정에서 만난 화교들은 한국에 대한 우월의식을 묻는 말에 말을 아꼈다. 그러나 ‘상국’의 뿌리에 대한 자부심까지 부정하지는 않았다. 반면 한국에서 소수민족으로 당하는 차별과 배제에 대해선 ‘중화의식’의 자존심을 버리고 한국 화교를 ‘세계적인 난민’에 빗대며 처우개선을 요구했다.
“그래도 우리는 한국인”
한국중화총상회(韓國中華總商會) 전임 회장인 원국동(袁國棟)씨는 성공한 화교로 꼽힌다. 원광대 한의학과를 나와 중국 베이징 중의학대학에서 의학박사를 취득한 그는 의사 대신 사업가의 길을 택했다. 현재 한국과 대만·중국을 오가며 출판, 부동산, 호텔업에 종사하고 있다. 부모는 산둥성 출신이다. 그는 한국 화교에 대한 한국인의 편견을 조심스레 지적했다.
“화교는 한국의 근대화에 많은 기여를 했다고 봅니다. 개화(開化) 초기에 모든 무역을 한국 화교가 주도했고 근대화를 주도한 세력입니다. 1960년대 들어 한국 화교는 극심한 차별을 받으면서도 동남아 화교 여행객을 유치하거나 인삼(人蔘)을 비롯한 한국 토산품을 팔고, 한국산 의류와 섬유제품을 대만·홍콩 등지로 수출해 외화획득에 기여했어요. 한류(韓流) 열풍에 불씨를 가장 먼저 퍼뜨린 것도, 짜장면이라는 한국형 중화요리를 보급한 것도 화교들이죠. 한국 화교는 지난 130년 동안 한국에 살면서 철저히 한국화한, 말하자면 지한파이자 친한파 중국인 집단입니다.”
그는 “오늘날과 같은 글로벌 시대에 한국 화교가 여전히 과거의 잣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한국 화교의 안일한 현실인식과 한국 정부의 세련되지 못한 법 체계 때문이 아닐까”라고 반문했다. 또 “한국의 법률은 130년 동안 한국과 고락을 함께해 온 화교와 1992년 이후 들어온 화교(조선족)에 대한 최소한의 구분도 없는 것 같다”며 아쉬워했다.
“한국 화교에게 이중국적을 부여하지 않으면 한국 화교의 발전이 없습니다. 한국인들은 ‘그럼, 한국으로 귀화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화교의 문화도 보존해야 합니다. 한국으로 귀화하라는 논리는 냉전시대에는 가능할지 몰라도, 한쪽을 버리고 한쪽을 택하라는 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됩니다. 한국 화교들에게만이라도 이중국적을 허용하면 한국 국적으로 군대도 가겠다는 것이 화교들의 생각입니다.”
—군에 입대하겠다고요.
“그럼요.”
원 전 회장은 “한국 화교는 이제 한국의 자산이자 역사의 유물”이라며 “한국에서 중국 싹을 자르는 것이 아니라 화교 네트워크를 활용해 경제발전의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고 권했다.
“전 세계에 흩어진 한국 화교 출신들이 적지 않습니다. 대만에 2만명, 미국에 2만명, 일본에 8000명, 유럽에 1만명, 호주에 5000명, 캐나다에 3000명, 아프리카에 3000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화교소학교 동문끼리도 자주 연락을 하고 전 세계 동문이 3년마다 한국으로 ‘홈커밍데이’를 합니다. 또 매년 5월 총동창회 체육대회도 엽니다. 비록 한국에 살 수 없어 고향을 떠났지만, 여전히 한국을 고향으로 생각하기 때문이죠. 한국 화교는 과거 중국에서 건너와 지금은 대만 사람이 됐지만, 대만 사람을 만나면 우리를 한국인이라고 하고, 중국 사람을 만나도 한국인이라 합니다. 또 중국 산둥 사람을 만나면 고향 사람이라 불러요. 복잡한 정체성을 갖고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한국인입니다.”
국내 화교학교 학력인정 못 받아
담도경(譚道經) 교수는 서울 한성중고교 교사와 서울교대 평생교육원 교수를 역임했다. 현재는 극동대 중국어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산둥성 출신 부모가 한국으로 이주한 뒤 1955년 서울에서 태어난 서울 토박이다. 담 교수는 “한국으로 귀화하고 싶은 마음도 많았지만, 아버지께 충격을 주고 싶지 않아 귀화하지 않았다. 세상을 뜨시면 고민해 보겠다”며 웃었다.
그는 교육문제에 대한 한국 화교의 걱정을 전했다. “한국 화교학교의 교육만으로는 수능시험을 보기가 어렵고, 검정고시를 봐야 대입수능 자격을 준다. 한국 대학에 진학할 때 특례입학을 생각하는데 그래서 한국으로 귀화하고 싶어도 자녀의 대학진학 때문에 미루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현재 교육과학기술부는 한국인 어머니를 둔 화교 학생에게 외국인 특별전형 지원자격을 부여하지 않고 있다. 화교끼리 결혼한 가정의 자녀에게만 특례를 인정한다. 한성화교협회 측에 따르면 최근 젊은 화교들 배우자의 약 80%가 한국인이라고 한다.
결국, 자녀의 대입을 위해 화교인과 한국인으로 이뤄진 가정이 서류상 이혼을 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한국 국적을 포기하면 된다고 하지만, 생활상의 여러 불편 때문에 쉽지 않다. 국백령 한국화교문제연구소 대표는 “과거엔 한국 여자가 화교와 결혼해 중국 국적을 신청하면 3개월 이내 나왔으나 지금은 법이 바뀌어 불가능하다. 대만에 가서 2년 거주하게 돼 있기 때문이다. 90% 이상은 그냥 한국인으로 산다”고 귀띔했다.
“최근 30년 동안 화교 남성들은 대부분 한국 여성과 결혼해 자식을 낳고 가정을 꾸리고 있습니다. 그들 자녀는 아버지 국적에 따라 화교학교에 다녀요. 화교교육 12년을 마치고 한국 대학에 입학할 때 부득이 특례입학을 할 수밖에 없어요. 특례입학 조건은 필히 부모가 다 외국 국적이어야 하기에 애로가 많아요. 외국 국적 소지와 화교교육 12년 수료로 특례입학을 허용해야 합니다.”
담 교수는 한국의 교육 당국이 화교학교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 데 대해 매우 불만이었다.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 화교학교 학력을 인정하는데 유독 한국에서만 학력인정이 안됩니다. 교과부는 몇 가지 근거를 들어 불가하다는 입장이지만 납득하기 어려워요. 대만과 중국정부는 한국정부가 인정한 한인학교의 학력을 인정하는데, 왜 한국정부는 대만정부가 인정하는 화교학교의 학력을 불인정하나요?”
기자가 교과부에 문의하니, “학력을 인정받기 위해선 국어와 국사를 연간 120시간 가르쳐야 한다”고 했다. 그럴 경우, 교과부가 인정한 교원자격증을 소지한 교사가 가르쳐야 한다.
학력을 인정받을 수 없으면 화교 학생의 한국 학교로의 입·전학이 불가능하다. 또 검정고시를 보고 대입수능을 치는 것도 여의치 않다. 한국과 교육과정, 응시과목이 다르기 때문이다.
“대만 생존을 위해 한국을 타도해야”
담 교수는 최근 대만에 부는 반한(反韓) 정서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작년 3월 대만 택시 뒷문에 ‘한국인 승차거부’라고 적힌 사진이 알려지면서 반한 분위기가 국내 소개된 일도 있다. 또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대만의 태권도 스타 양수쥔(楊淑君)의 반칙패가 한국인 심판 때문이라며 대만 사람들이 분개한 일도 있다.
“솔직히 대만으로 돌아간 한국 화교들이 한국에 대해 좋은 추억을 갖고 있지 않아요. 게다가 1992년 중국과 수교를 하며 대만과 단교를 하지 않았습니까. 장개석(장제스) 총통 시절, 김구(金九) 선생의 둘째아들 김신(金信)이 주대만 한국대사로 재직할 때만 해도 좋았지요. 그러나 노태우(盧泰愚) 정부 시절, 대만 정부가 미리 단교 정보를 입수, 수차례 확인을 요청했으나 ‘그런 일이 없다’고 했어요. 우리는 그 말을 믿고 돌아갔지만 한 달 뒤 단교 통보를 받았고, 대만 사람이 반발할 수밖에 없었어요.
또 무역경쟁에서도 한국과 대만은 라이벌 관계니 경쟁자적 시각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대만에 한류 바람이 불면서 반한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어요. 한류가 한·대만 관계를 변하게 하였다고 봅니다.”
《대만, 우리가 잠시 잊은 가까운 이웃》의 저자 최창근씨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당시 중화민국(지금의 대만) 및 장개석 총통으로부터 지원을 받은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6·25사변이 국공내전에서 패퇴해 대만 섬으로 천도한 대만 정부의 생존에 결정적인 도움이 된 것 또한 사실”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한국이 양적 질적인 면에서 대만 추월
“두 나라는 동서냉전 동안 아시아 반공(反共)전선의 주요 축으로 유대관계를 지속해 왔고, ‘형제국가(兄弟之邦)’라 불리기도 했어요. 하지만 1992년 중국과 수교한 한국이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대만과 단교를 하게 됐고, 그 과정에서 명동 대사관 처리 문제, 단교 통보 과정에서의 ‘절차상 잘못’으로 대만 정부 및 국민의 감정을 상하게 한 일이 발생합니다. 특히 최대 우방국이자 동아시아의 유일한 공식 수교국이었던 한국 정부와의 단교는 대만 정부와 국민에게 한국에 대한 미운 감정이 쌓이게 한 결정적인 원인이 됐어요.”
그는 담 교수와 같이 두 나라 간 무역대전이 갈등을 부추겼다는 점도 지적했다.
한국과 대만은 1970~80년대 고도성장을 구가하던 발전국가의 대표적인 국가다. 두 나라의 성장을 세계는 ‘한강의 기적’과 ‘대만의 경험(기적)’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대만이 줄곧 한국을 조금 앞서 나가는 상황이 지속하다 2005~2006년 들어 1인당 국민소득(GDP 기준) 등의 경제지표에서 한국이 대만을 추월하는 양상을 보이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최씨의 설명이다.
“2008년 경제위기 속에서 한국은 지표상 플러스 성장을 지속하면서 성장세를 이어 나갔고, 삼성·LG·현대차로 대표되는 한국의 대기업들은 세계 시장에서 점유율을 높여 가면서 인상적인 성장을 기록해 오고 있어요. 이에 비해 중소·경공업 중심의 대만은 안정적인 성장을 지속하긴 했으나 산업구조상의 취약점, 중국과 대만 간 양안(兩岸)관계의 긴장 등으로 성장이 정체됐고, 2000년대 중반 들어 양적·질적인 면에서 한국에 뒤지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그는 “한국보다 중공업이 현저히 취약하고 산업 포트폴리오 또한 다양하지 못한 대만이 부가가치를 창출해 내는 주력 분야는 반도체, LCD, 컴퓨터 주변기기 분야인데, 이미 삼성과 LG·하이닉스 등이 대만 및 일본기업들을 따돌리고 세계 시장에서 점유율을 꾸준히 높이며 대만을 압박하는 것이 현실”이라며 “수년 전부터 대만 생존을 위해 한국을 타도해야 한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고 했다.
한국 화교의 문제는 매우 복잡하다. ‘상국’의 뿌리라는 우월감과 이승만·박정희 정권 때 받은 불합리한 탄압과 피해의식, 국적은 대만계지만 대만으로 가기 위해선 대만 비자를 발급받아야 하는 이중현실, 한국 화교의 리더십 부재 등이 서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한국 화교들을 잡아야
그렇다고 2만명 선인 한국 화교의 수가 갑자기 줄어들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대만 국적이지만 중국과의 교역 확대로 한국 화교들은 어느 때보다 한국과 중국, 대만을 자주 오가고 있다. 이주 1세대의 시대가 사라지고 2~3세가 전면에 나서면서 한국 화교는 과거와 다른 역동적인 모습이다. 비록 승진에서 차별받고 있으나 국내 기업 중 화교가 없는 곳은 거의 없다고 한다.
취재 중 만난 이들은 “아직 불편하지만 그렇다고 한국을 떠날 생각은 없다”고 했다. 단수(單數) 재입국 비자 등을 규정하던 출입국관리법, 화교에 대한 복지혜택 불허 등 한국 화교를 떠나게 했던 제도들이 수정됐거나 수정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또 “한국 화교가 외국인이나 한국인과 똑같이 세금을 내는 한국 사회의 일원이라는 점에서 화교에게 복지혜택을 넓혀야 한다”는 국내여론도 많다.
과거 화교 1세대들은 자녀에게 화교끼리의 결혼을 종용했지만 더는 ‘말발’이 통하지 않게 된 것도 현실이다. “1~2세대를 더 거치면 한국 화교는 역사 속으로 사라질지 모른다”는 말도 들을 수 있었다.
한국 화교가 한국 사회로 동화돼 사라져야 하는 존재인지, 화교의 정체성을 살려두고 공존하는 것이 바람직한지는 현재로선 알 수 없고 화교 스스로 택해야 할 문제일지 모른다. 다만 중요한 것은 더는 한국 화교들을 떠나보내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한국 화교로서의 자부심? 글쎄요. 나쁜 짓 안 하고 꿋꿋이 자기 영역에서 뚝심 갖고 살았다는 것이죠. 하지만 지금은 굴욕감밖에 없어요. 이런 나라에서 살았다는 게 굴욕적이죠. 선조님들이 왜 자기 대우를 찾지 못했나 하는 원망뿐입니다.” (왕문영 수석부회장)⊙
재한(在韓) 화교의 시초는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이후 조선 땅에 입성한 청나라 상인들이다. 이후 130년 동안 세대를 거쳐 4~5세대(世代)가 한국에 뿌리내렸다. 화교 1세들은 주로 호떡장수, 막노동꾼, 목수, 석공, 미장이로 시작해 점차 중화요리, 배갈(고량주)공장, 목욕탕, 이발소, 한약방 주인으로 반경을 넓혀 한때는 한국경제의 근대화(近代化)에 작지 않은 영향력을 가졌다.
이 ‘중국계 한국인’은 그 수가 10만명에 가까웠으나 지금은 2만1381명(2011년 12월 기준)으로 움츠러들었다. 1992년 한중(韓中) 수교와 한·대만(臺灣) 단교 이후 ‘한국계 중국인’인 조선족이 밀려들면서 화교의 정체성도 복잡해졌다(2011년 현재 국내 조선족 수는 47만570명이다).
사실, 화교의 사전적 의미는 ‘외국에 사는 중국인’이다. 범주로 따진다면 조선족도 화교다. 그러나 국적이 중국인 동북 3성 출신 조선족은, 한족(漢族) 출신이자 국적이 대만인 한국 화교들과 다를 수밖에 없다. 또 한국 화교의 말은 산둥성(山東省) 옌타이(煙臺)의 무핑(牟平)과 푸산(福山)지방 방언(무푸어·牟福語)만 쓴다. 공통점이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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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명동2가에 위치한 한성화교협회 건물. |
학자들은 ‘한국계 중국인’(조선족) 이민자를 신(新) 화교(혹은 신교)라 부르고, ‘중국계 한국인’(한국 화교) 이민자를 구(舊) 화교(혹은 구교)라 부른다. 공통점이 없는 두 이민자 화교집단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 구 화교는 신 화교를 자기네 사람이라 인정할 수도 없고, 신 화교 역시 마찬가지다. 수적으로 점점 밀린 한국 화교는 언젠가 한국 땅에서 영원히 사라질지 모른다. 한국인으로 귀화(歸化)하거나 대만과 중국 국적 혹은 제3국으로 떠나는 선택을 강요받을 날이 멀지 않아 보인다.
한국인이 화교들을 ‘짱깨’ ‘되놈’ ‘왕서방’이라 비하해도, ‘대륙인(大陸人)’이란 자존심으로 버티던 구 화교(이하 ‘구 화교’를 화교로 통칭) 사람들은 요즘 들어서 고민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박정희(朴正熙) 정부 시절에 받았던 부당한 대우를 박근혜(朴槿惠) 신 정부가 풀어 주기를 갈망하고 있다.
한성화교협회(漢城華僑協會) 왕문영(王文榮) 수석부회장은 “현재 한국에 거주하는 영주권 취득 화교 수가 1만명에 불과하다. 이들 대부분이 대만에 호적이 없어 대만에 거주할 수 없고, 중국에도 호적이 없어 역시 거주할 수 없다”며 “단지 국적이 한국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인권차별을 하는 것은 시대착오가 아니냐”고 했다. 인권차별이란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기자는 여러 화교의 말을 경청하기로 했다.
농축된 불만들
막상 들어 보니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비슷비슷한 말이지만 저마다 사연이 달랐다. 어디서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막연했다. 이야기를 들으며 화교 사회의 리더들도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꼈다.
화교들의 주장을 실명(實名)으로 할지, 익명(匿名)으로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식자(識者)들은 실컷 얘기하고 ‘오프 더 레코드’를 요구했고, 상인들은 “없던 말로 해 달라”고 했다. 한국화교문제연구소 측 얘기를 들으니 “한국 화교와 관련된 역사 기록물도 거의 없다”고 했다. 한성화교소학교 교장과 이사장에게 인터뷰 요청을 했으나 묵묵부답이었다. 소수자의 목소리는 낮고 가벼워 한곳으로 모으기 어려운 것일까. 그래도 만났던 목소리를 엮으니 어렴풋이 화교의 ‘어제와 오늘’이 보였다.
“얼굴이 비슷하고 한국말을 하기 때문에 피부색으로 인한 차별은 없지만, 제도적 차별을 일상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은행·전기·수도·인터넷 등등 외국인이어서 안되는 것이 너무 많아요. 늘 겪는 일이지만 겪을 때마다 기분이 나빠요. 통장개설을 할 때마다 ‘또 싸우러 가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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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화교협회 왕문영 수석부회장. |
“화교의 역사는 1882년 청(淸)과 조선의 통상조약 체결로 시작해 130년이 흘렀어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동서(東西)냉전이 시작되면서 남한 거주 화교가 본국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한국에 발이 묶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한국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어요.”
—현재 어떤 신분인가요.
“한국 국적법은 한국에서 태어나도 아버지의 나라로 국적을 정하잖아요. 그러니 한국 거주 2만여명의 화교는 국적이 중화민국(대만)으로 등재돼 있어요. 만약 국적법이 속지법(屬地法)으로 정해져 있었다면 모든 화교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등재돼 차별대우를 받지 않았을 겁니다.”
그의 계속된 말이다.
“지금 거주지가 분명히 서울시지만 가족관계등록부는 법무부출입국관리사무소에 등재돼 있어요. 주민세 및 모든 세금을 서울에서 납부하고 있는데도 단지 한국 국민이 아니기 때문에 서울시민으로 인정되지 않는 것은 인권침해입니다.”
곁에 있던 한성화교협회 곽원유(郭元有) 총무부장이 말을 보탰다.
“평생을 한국에 살고 있지만, 영주권 신분으론 아무런 복지혜택도 받지 못해요. 65세 이상 화교노인들에게 노인기초생활보조금 지원 및 실버패스 어르신교통카드를 발급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화교들은 대한민국 국민이 이행하는 4대 의무 중 군복무를 제외한 교육·납세·노동의 의무를 모두 이행해 왔어요. 한국인은 의무만 요구했지 화교에게 권리는 주지 않고 있어요.”
그나마 외국인 장애인 복지규정이 지난 연말 국회를 통과해 화교들의 가슴을 쓸어내리게 했다. 화교는 물론 모든 외국인 장애인은 한국인 장애인과 똑같은 대우를 받게 된 것이다. 왕 부회장과 곽 부장은 할 말이 무척 많았다. 그들은 “한국사회는 인터넷 사회인데, 외국인 실명확인이 제대로 되고 있지 않아 자금거래, 온라인구매 등 인터넷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카드발급도 은행에 따라 제한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오늘의 한국 화교] 한국 화교는 1세대를 제외하고 대개가 한국에서 태어났다. 한국 화교 인구 중 88.7%가 한국에서 태어났고 중국 본토 출신은 9.3%, 대만 출신은 1%에도 못 미치는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 화교는 한국사회와 문화에 익숙한, 사실상 한국인과 동일하다는 얘기가 된다. 또 재한 화교는 수도권과 지방 대도시에 주로 거주하는데, 2007년 법무부 통계를 보면 서울과 경기, 인천 거주 화교들이 64.4%에 이르고 부산 거주자들까지 합치면 70%가 넘는다고 한다. 한마디로 한국 화교는 대부분이 도시에서 생계를 잇고 있는 셈이다. ![]() |
중국집 아서원의 추억과 응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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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원 주주와 롯데간 소유권 소송은 결국 대법까지 갔다. 당시 최종 판결을 전한 《매일경제》 1974년 4월 10일자 신문. |
한국화교문제연구소 국백령(鞠柏嶺) 대표는 화교협회 부회장을 역임했고 KBS 중국어방송작가로 30년을 재직했다. 한때 서울 강남에서 중식당을 경영한 일도 있다.
그는 “내 딸이 미국 회계사다. 한국 화교는 국내 회계사 시험에 응시할 수도 없다. 그러니 한국에서 태어나 공부했지만, 자격증은 미국에서 따야 했다. 이것이 현실”이라고 했다.
“1970년대에 ‘외국인 토지관리법’이 만들어졌어요. 이 법에 따르면 재한 화교들은 1주택 1점포에 한해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어요. 주택용 토지면적은 200평 이하이고, 점포용 토지면적은 50평 이하였죠. 식당이 잘돼도 넓힐 수가 없었지요. 또 3층 건물을 어렵게 매입해 1층에서 영업을 하는데 2층과 3층이 비어 있어 타인에게 빌려 주거나 임대하고 싶어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어요. 지금은 그런 제한이 사라졌지만 1970~80년대의 서슬 퍼런 기억을 갖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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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을지로에 위치한 중화요리점 아서원. 지금의 롯데호텔 자리에 있었다(출처: blog.donga.com/oldphoto). |
하지만 김대중(金大中) 정부 출범 이후인 1998년 6월부터 새로운 ‘외국인 토지법’이 시행되면서 불합리한 제한은 사라지게 됐다.
그래도 많은 화교는 아픈 상처를 떠올린다. 대표적인 예가 서울 아서원 매도사건이다. 서울 을지로1가 롯데호텔의 한 부분이 된 아서원(雅叙園)은 1969년까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하고 규모가 컸던 중국요릿집이었다. 한때는 한국의 정·재계 거물들의 단골이었다. 화교들에게 있어서도 가장 큰 결혼예식장 및 연회장으로 이용되었다. 국백령씨의 말이다.
“그런데 1969년 2월 아서원은 대주주에 의해 시가의 4분의 1도 안 되는 헐값에 당시 롯데제과대표 신춘호(申春浩·現 농심 회장)씨에게 넘어갔다. 다른 주주들은 내용도 전혀 모른 채. 아서원 주주들이 소송을 걸었고 승패가 뒤바뀌길 5년간 반복하다가 결국 롯데에 패소, 60여년의 명물이 사라지게 됐다. 지금도 아서원 주주들은 물론 대다수 화교는 최종 판결에 승복하지 않고 마음속에 큰 응어리로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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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0월 10일 오전 10시 서울 명동 중국대사관 옆 한성화교소학교 교정에서 한-대만 단교(8월 24일) 이후 처음으로 열린 대만의 최대 국경일인 쌍십절 81주년 기념식 모습. 이날 화교들의 오열속에 대사관 건물에서 내려졌던 청천백일기가 교정에 나부꼈다. |
“한국을 떠난 화교들이나 한국에 남아 있는 화교들이나 모두 한(恨) 같은 것이 있어요. 그러니 화교끼리 똘똘 뭉칠 수밖에 없었죠. 한국 화교들이 너무 보수적이고, 고집이 세서 부득이한 경우 외에는 ‘대국인’이란 심리 때문에 한국인 되기가 쉽지 않아요. 또 귀화하려고 해도 한국 귀화가 쉽지 않습니다. 귀화를 신청하려면 재산증명과 함께 한국의 유력인사들, 예를 들어 국회의원이나 지방의원, 법관, 교수, 5급 이상 공무원, 학교 교장, 상장기업 부장급 이상 간부 임원 2명의 추천이 필요해요. 또 1년 이상의 심사를 거쳐야 하고 필기시험과 면접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필기시험 면제자는 대졸자와 65세 이상 노인에 한정돼요. 그러니 귀화를 위한 ‘모험’을 꺼리게 되지요.”
국씨는 “그냥 현재의 차별대우를 참고 대만 국적을 유지하느냐, 아니면 중국 국적으로 바꾸느냐, 그것도 아니면 한국국적을 선택하느냐 3가지 중 하나를 강요당하고 있다”고 했다.
“중국으로 국적을 바꿔도 중국 여권이 국제적으로 차별받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럴 바에야 대만 여권을 갖는 게 유리해요. 또 중국 당국으로부터 중국 여권을 받아도 자국민과 똑같은 대우를 해 준다는 보장도 없어요. 중국은 아직 못 믿으니까요.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릅니다. 화교들은 대만과는 싸울 수 있고 따질 수도 있지만, 중국에는 끽소리 못합니다. 중국 당국이 그만큼 권위적이니까요.”
—과거보다 위상이 나아졌나요.
“옛날 그대로입니다. 회사에 들어가도 번역이나 통역 일에 종사하는 게 고작입니다. 비전이 없어요. 한국인 입사 친구들은 승진해도 화교들은 그 자리에 눌러앉게 되고, 만년 과장만 하다가 뛰쳐나옵니다. 학계에 진출한 경우도 정식 교수가 몇 안되고 대개가 시간강사입니다. 총선, 대선에 표를 찍을 참정권이 없으니 정계와 접촉도 없고, 정치인 역시 화교들을 만날 필요도 없지요.”
—20년 뒤 한국 화교의 모습은 어떨까요.
“아마 거의 다 귀화해 있을 겁니다. 지금 화교들은 2등 국민입니다. 이주결혼 여성이나 다문화 사람보다 처우가 못해요. 사회적 관심도 얕고요. 대국인이라는 자부심도 나이 많은 사람 빼고는 거의 없어요.”
한국외대에서 화교를 연구한 김일권(金日權)씨는 <재한 중국인의 포섭과 배제를 통해 본 한국 다문화주의> 논문을 통해 한국 화교의 역사를 ‘차별과 배제의 역사’로 규정했다.
그는 “한국 화교가 한국사회에 동화(同化)되지 못하고, 특히 국적 보류를 통해 집단적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차별과 배제의 역사’로 규정된 한국의 화교정책에 기인한 바가 크다”며 “이러한 차별과 배제는 한국사회로의 동화를 억제하고 화교와의 경계선을 명확히 설정하게 하였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왜 한국은 화교에 대해 ‘차별과 배제’의 논리로 대할까. 중국과 화교에 대한 오래된 민족감정 때문은 아닐까.
사실, 한국 화교의 역사는 여타 화교의 역사와 다르다. 동남아 국가의 화교는 하급 노동자의 신분으로 정착했지만 한국 화교는 이민 송출국인 청나라의 정치적 비호 아래 ‘상국(上國) 국민’의 지위로 그 역사를 시작했다. 한국 화교는 한중 양국 간의 전근대적인 종속관계 속에서 청나라 정부의 종주권 강화라는 정치적 목적 아래 진행된 측면도 강하다(김일권, <재한 중국인의 포섭과 배제를 통해 본 한국 다문화주의> 참조).
[익명으로 담은 한국 화교의 외침들] “시쳇말로 ‘화교 돈은 떼먹어도 안 체한다’는 말이 있다. 한국인처럼 인맥과 빽(배경)이 없기 때문이다. 화교들은 세무조사도 엄청나게 자주 받는다. 연속 4년, 7년 동안 7차례 받은 이도 있다. 한국인으로 귀화하고 나서 5년이 지났는데 한 번도 받지 않았다.”(모 단체장 王씨) “우리는 국회의원 선거와 대통령 선거에 투표권이 없다. 그러니 화교들이 정치적으로 소외될 수밖에 없다. 그나마 지방선거 투표권은 있다. 행정고시나 사법시험에 응시해 고급 공무원이나 판·검사의 길로 갈 수 있게 해달라. 현재로선 경찰도, 장교도, 교사도 될 수 없다. 이 말을 듣는 한국인이 ‘그러면 대만에나 돌아가라’고 말할지 모르겠다.”(대학생 李씨) “사업허가 신청을 할 때마다 무지 어렵다. 혹시 이 말을 한국 공무원이 듣는다면 피해를 볼지 모르겠다. 내 돈으로 사업하겠다는데 금치산자 또는 한정치산자인지 증명을 하라고 하더라. 또 대만의 무범죄 기록도 가져오라고 한다. 모든 게 아직 불편하다. 한국인으로 귀화하려고 해도 대기자가 많아 1년 이상 기다려야 하고 대졸자가 아니면 필기시험을 쳐야 한다. 귀화도 쉽지 않다.” (기업인 袁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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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국립정치대 대학원을 나온 최창근씨. |
월북 작가 엄흥섭(嚴興燮·1906~?)의 소설 《파산선고》(1930)는 화교자본에 몰락하는 평양 소상인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화교 왕정선(王正善)은 거대 자본을 가지고 평양 상공계를 좌우하는 큰손이다. 중국 주단과 포목을 독점하며 전 조선의 소자본을 흔들며 몰락시킨다.
《파산선고》는 대자본가인 화교와의 관계에서 이윤과 노력을 착취당하는 소상공인 계급의 갈등을 그린다. 이를 통해 1920년대 만주배경 소설의 연장에서 중국인 지주 또는 자본가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확대 재생산한다.
1925년 발표한 김동인(金東仁·1900~1951)의 《감자》의 주 배경도 평양이다. 《감자》는 복녀라는 여인이 타락해 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으로, 중국인 지주 왕서방의 감자밭에 몰래 들어가 감자를 훔치다 들켜 몸을 팔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몸을 판 복녀는 피해자, 왕서방은 호색한으로 그려져 있다. 왕서방이 다른 처녀와 결혼하자 복녀는 질투심에 낫을 들고 왕서방을 찾아갔다가 결국 죽게 된다. 왕서방은 복녀의 남편과 한방의(韓方醫)를 매수해 뇌일혈로 죽었다고 가짜 진단서를 만든다.
최서해(崔曙海·1901~1932)의 <홍염> <이역원혼>, 강경애(姜敬愛·1907~1943)의 <소금>, 안수길(安壽吉·1911~1977)의 <새벽>, 한설야(韓雪野·1900~1976)의 <한길> 등 다른 소설에서도 중국인은 ‘악의 대명사’로 묘사된다. 거개가 비정하기 짝이 없거나 극악한 사람으로 그려졌다.
한국인에게 ‘상국’과 지주, 자본가와 수탈자의 이미지가 화교의 이미지에 어른거리는 것과 같이, 한국 화교들은 한국에 대한 우월의식을 갖고 있다. 비록 지금은 대만이라는 정치적인 소국(小國)에 적을 두고 있으나 뿌리는 거대 중국이라는 것이다.
대만국립정치대 대학원에서 국제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한 《대만, 우리가 잠시 잊은 가까운 이웃》의 저자 최창근(崔彰根)씨의 주장이다.
“한국의 경우 중국인의 관점에서 볼 때 변방의 ‘번국(蕃國)’ 내지는 ‘속국’으로 치부돼 온 것이 사실이죠. 제가 대만에서 읽은 한·대만 관계에 관한 어떤 책에서 대만의 대표적인 지한파(知韓派) 인사로 알려진 저자는 한국과 대만의 역사적 관계에 대해 ‘청나라 시절은 종속관계, 장제스(蔣介石) 총통 재임 때는 부자관계, 이후 냉전체제 때는 형제관계(대만=형, 한국=동생)’로 묘사했어요.”
“대만은 형, 한국은 동생”
대만의 대표적인 지한파 인사도 그러하듯 대만인들의 머릿속에는 한국에 대한 우월의식이 내재해 있다는 것이다. 한국 화교들 역시 그런 사고에서 멀지 않다. 그러나 화교(대만)들의 우월성은 ‘분열된’ 정체성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이 최씨의 생각이다.
“대다수 대만 국민은 자신의 혈통이 중국은 맞지만, 중국인과는 다른 ‘대만인’이라는 정체성도 가지고 있어요. 뿌리인 중국보다 훨씬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이뤘다는 우월의식 말이죠. 대만과 중국이 같은 뿌리라는 중화의식 정체성, 그러나 중국보다 대만이 더 발전했다는 우월감이 분열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한국에 대한 우월감도 논리적으로 맞지 않아요. 과거 대한민국 정부가 임시정부 시절부터 인연을 지속해 오고, 어려운 시절 도움을 받았던 대상은 ‘대만 정부’이지 ‘대만’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분열된 중화의식에 기반을 둬 상대적인 우월감을 한국에 내세우는 것은 성립할 수 없어요.”
취재 과정에서 만난 화교들은 한국에 대한 우월의식을 묻는 말에 말을 아꼈다. 그러나 ‘상국’의 뿌리에 대한 자부심까지 부정하지는 않았다. 반면 한국에서 소수민족으로 당하는 차별과 배제에 대해선 ‘중화의식’의 자존심을 버리고 한국 화교를 ‘세계적인 난민’에 빗대며 처우개선을 요구했다.
“그래도 우리는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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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중화총상회 원국동 전 회장. |
“화교는 한국의 근대화에 많은 기여를 했다고 봅니다. 개화(開化) 초기에 모든 무역을 한국 화교가 주도했고 근대화를 주도한 세력입니다. 1960년대 들어 한국 화교는 극심한 차별을 받으면서도 동남아 화교 여행객을 유치하거나 인삼(人蔘)을 비롯한 한국 토산품을 팔고, 한국산 의류와 섬유제품을 대만·홍콩 등지로 수출해 외화획득에 기여했어요. 한류(韓流) 열풍에 불씨를 가장 먼저 퍼뜨린 것도, 짜장면이라는 한국형 중화요리를 보급한 것도 화교들이죠. 한국 화교는 지난 130년 동안 한국에 살면서 철저히 한국화한, 말하자면 지한파이자 친한파 중국인 집단입니다.”
그는 “오늘날과 같은 글로벌 시대에 한국 화교가 여전히 과거의 잣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한국 화교의 안일한 현실인식과 한국 정부의 세련되지 못한 법 체계 때문이 아닐까”라고 반문했다. 또 “한국의 법률은 130년 동안 한국과 고락을 함께해 온 화교와 1992년 이후 들어온 화교(조선족)에 대한 최소한의 구분도 없는 것 같다”며 아쉬워했다.
“한국 화교에게 이중국적을 부여하지 않으면 한국 화교의 발전이 없습니다. 한국인들은 ‘그럼, 한국으로 귀화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화교의 문화도 보존해야 합니다. 한국으로 귀화하라는 논리는 냉전시대에는 가능할지 몰라도, 한쪽을 버리고 한쪽을 택하라는 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됩니다. 한국 화교들에게만이라도 이중국적을 허용하면 한국 국적으로 군대도 가겠다는 것이 화교들의 생각입니다.”
—군에 입대하겠다고요.
“그럼요.”
원 전 회장은 “한국 화교는 이제 한국의 자산이자 역사의 유물”이라며 “한국에서 중국 싹을 자르는 것이 아니라 화교 네트워크를 활용해 경제발전의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고 권했다.
“전 세계에 흩어진 한국 화교 출신들이 적지 않습니다. 대만에 2만명, 미국에 2만명, 일본에 8000명, 유럽에 1만명, 호주에 5000명, 캐나다에 3000명, 아프리카에 3000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화교소학교 동문끼리도 자주 연락을 하고 전 세계 동문이 3년마다 한국으로 ‘홈커밍데이’를 합니다. 또 매년 5월 총동창회 체육대회도 엽니다. 비록 한국에 살 수 없어 고향을 떠났지만, 여전히 한국을 고향으로 생각하기 때문이죠. 한국 화교는 과거 중국에서 건너와 지금은 대만 사람이 됐지만, 대만 사람을 만나면 우리를 한국인이라고 하고, 중국 사람을 만나도 한국인이라 합니다. 또 중국 산둥 사람을 만나면 고향 사람이라 불러요. 복잡한 정체성을 갖고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한국인입니다.”
국내 화교학교 학력인정 못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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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도경 극동대 교수. |
그는 교육문제에 대한 한국 화교의 걱정을 전했다. “한국 화교학교의 교육만으로는 수능시험을 보기가 어렵고, 검정고시를 봐야 대입수능 자격을 준다. 한국 대학에 진학할 때 특례입학을 생각하는데 그래서 한국으로 귀화하고 싶어도 자녀의 대학진학 때문에 미루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현재 교육과학기술부는 한국인 어머니를 둔 화교 학생에게 외국인 특별전형 지원자격을 부여하지 않고 있다. 화교끼리 결혼한 가정의 자녀에게만 특례를 인정한다. 한성화교협회 측에 따르면 최근 젊은 화교들 배우자의 약 80%가 한국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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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교문제연구소 국백령 대표. |
“최근 30년 동안 화교 남성들은 대부분 한국 여성과 결혼해 자식을 낳고 가정을 꾸리고 있습니다. 그들 자녀는 아버지 국적에 따라 화교학교에 다녀요. 화교교육 12년을 마치고 한국 대학에 입학할 때 부득이 특례입학을 할 수밖에 없어요. 특례입학 조건은 필히 부모가 다 외국 국적이어야 하기에 애로가 많아요. 외국 국적 소지와 화교교육 12년 수료로 특례입학을 허용해야 합니다.”
담 교수는 한국의 교육 당국이 화교학교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 데 대해 매우 불만이었다.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 화교학교 학력을 인정하는데 유독 한국에서만 학력인정이 안됩니다. 교과부는 몇 가지 근거를 들어 불가하다는 입장이지만 납득하기 어려워요. 대만과 중국정부는 한국정부가 인정한 한인학교의 학력을 인정하는데, 왜 한국정부는 대만정부가 인정하는 화교학교의 학력을 불인정하나요?”
기자가 교과부에 문의하니, “학력을 인정받기 위해선 국어와 국사를 연간 120시간 가르쳐야 한다”고 했다. 그럴 경우, 교과부가 인정한 교원자격증을 소지한 교사가 가르쳐야 한다.
학력을 인정받을 수 없으면 화교 학생의 한국 학교로의 입·전학이 불가능하다. 또 검정고시를 보고 대입수능을 치는 것도 여의치 않다. 한국과 교육과정, 응시과목이 다르기 때문이다.
“대만 생존을 위해 한국을 타도해야”
담 교수는 최근 대만에 부는 반한(反韓) 정서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작년 3월 대만 택시 뒷문에 ‘한국인 승차거부’라고 적힌 사진이 알려지면서 반한 분위기가 국내 소개된 일도 있다. 또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대만의 태권도 스타 양수쥔(楊淑君)의 반칙패가 한국인 심판 때문이라며 대만 사람들이 분개한 일도 있다.
“솔직히 대만으로 돌아간 한국 화교들이 한국에 대해 좋은 추억을 갖고 있지 않아요. 게다가 1992년 중국과 수교를 하며 대만과 단교를 하지 않았습니까. 장개석(장제스) 총통 시절, 김구(金九) 선생의 둘째아들 김신(金信)이 주대만 한국대사로 재직할 때만 해도 좋았지요. 그러나 노태우(盧泰愚) 정부 시절, 대만 정부가 미리 단교 정보를 입수, 수차례 확인을 요청했으나 ‘그런 일이 없다’고 했어요. 우리는 그 말을 믿고 돌아갔지만 한 달 뒤 단교 통보를 받았고, 대만 사람이 반발할 수밖에 없었어요.
또 무역경쟁에서도 한국과 대만은 라이벌 관계니 경쟁자적 시각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대만에 한류 바람이 불면서 반한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어요. 한류가 한·대만 관계를 변하게 하였다고 봅니다.”
《대만, 우리가 잠시 잊은 가까운 이웃》의 저자 최창근씨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당시 중화민국(지금의 대만) 및 장개석 총통으로부터 지원을 받은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6·25사변이 국공내전에서 패퇴해 대만 섬으로 천도한 대만 정부의 생존에 결정적인 도움이 된 것 또한 사실”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한국이 양적 질적인 면에서 대만 추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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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3월 인터넷을 달궜던 ‛한국인 승차거부’라고 적힌 대만 택시 사진. |
그는 담 교수와 같이 두 나라 간 무역대전이 갈등을 부추겼다는 점도 지적했다.
한국과 대만은 1970~80년대 고도성장을 구가하던 발전국가의 대표적인 국가다. 두 나라의 성장을 세계는 ‘한강의 기적’과 ‘대만의 경험(기적)’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대만이 줄곧 한국을 조금 앞서 나가는 상황이 지속하다 2005~2006년 들어 1인당 국민소득(GDP 기준) 등의 경제지표에서 한국이 대만을 추월하는 양상을 보이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최씨의 설명이다.
“2008년 경제위기 속에서 한국은 지표상 플러스 성장을 지속하면서 성장세를 이어 나갔고, 삼성·LG·현대차로 대표되는 한국의 대기업들은 세계 시장에서 점유율을 높여 가면서 인상적인 성장을 기록해 오고 있어요. 이에 비해 중소·경공업 중심의 대만은 안정적인 성장을 지속하긴 했으나 산업구조상의 취약점, 중국과 대만 간 양안(兩岸)관계의 긴장 등으로 성장이 정체됐고, 2000년대 중반 들어 양적·질적인 면에서 한국에 뒤지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그는 “한국보다 중공업이 현저히 취약하고 산업 포트폴리오 또한 다양하지 못한 대만이 부가가치를 창출해 내는 주력 분야는 반도체, LCD, 컴퓨터 주변기기 분야인데, 이미 삼성과 LG·하이닉스 등이 대만 및 일본기업들을 따돌리고 세계 시장에서 점유율을 꾸준히 높이며 대만을 압박하는 것이 현실”이라며 “수년 전부터 대만 생존을 위해 한국을 타도해야 한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고 했다.
한국 화교의 문제는 매우 복잡하다. ‘상국’의 뿌리라는 우월감과 이승만·박정희 정권 때 받은 불합리한 탄압과 피해의식, 국적은 대만계지만 대만으로 가기 위해선 대만 비자를 발급받아야 하는 이중현실, 한국 화교의 리더십 부재 등이 서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화교와 두 폭 병풍 빌딩]![]() 《다시, 서울을 걷다》의 저자 권기봉씨는 “박정희 정권은 ‘화교회관’을 지어 입주시킨다며 회유, 주변 일대를 정비했다. 철거는 1971년 10월 18일부터 닷새간 진행됐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화교회관을 짓지 않았고 결국 한화그룹이 그 땅을 사 오늘에 이른다”고 했다. 그곳에 높다란 두 폭 병풍 모양의 플라자호텔과 한화빌딩을 지은 것은 그 이후다. 서울광장을 지나는 서울시민은 빌딩 병풍에 가려 뒤쪽에 있던 화교 자취를 볼 수 없다. |
한국 화교들을 잡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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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교 100주년을 맞은 서울 명동 한성화교소학교 학생들이 2009년 10월 1일 ‘100돌 기념행사’ 예행연습을 하고 있다. |
취재 중 만난 이들은 “아직 불편하지만 그렇다고 한국을 떠날 생각은 없다”고 했다. 단수(單數) 재입국 비자 등을 규정하던 출입국관리법, 화교에 대한 복지혜택 불허 등 한국 화교를 떠나게 했던 제도들이 수정됐거나 수정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또 “한국 화교가 외국인이나 한국인과 똑같이 세금을 내는 한국 사회의 일원이라는 점에서 화교에게 복지혜택을 넓혀야 한다”는 국내여론도 많다.
과거 화교 1세대들은 자녀에게 화교끼리의 결혼을 종용했지만 더는 ‘말발’이 통하지 않게 된 것도 현실이다. “1~2세대를 더 거치면 한국 화교는 역사 속으로 사라질지 모른다”는 말도 들을 수 있었다.
한국 화교가 한국 사회로 동화돼 사라져야 하는 존재인지, 화교의 정체성을 살려두고 공존하는 것이 바람직한지는 현재로선 알 수 없고 화교 스스로 택해야 할 문제일지 모른다. 다만 중요한 것은 더는 한국 화교들을 떠나보내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한국 화교로서의 자부심? 글쎄요. 나쁜 짓 안 하고 꿋꿋이 자기 영역에서 뚝심 갖고 살았다는 것이죠. 하지만 지금은 굴욕감밖에 없어요. 이런 나라에서 살았다는 게 굴욕적이죠. 선조님들이 왜 자기 대우를 찾지 못했나 하는 원망뿐입니다.” (왕문영 수석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