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日 반도체 ‘최후의 도박’, 구마모토와 홋카이도에 들어선 거대 공장… 부활의 기념비인가 ‘세금 먹는 하마’인가
⊙ “일본 반도체가 뜨는 게 아니라, 대만·한국·미국의 GPU·AI 붐에 소부장이 편승하는 것”
⊙ 독보적 소재·부품·장비 능력에도 제조 생산은 ‘잃어버린 30년’
⊙ “7나노 공정조차 해 보지 못한 일본이 곧장 2나노로 가겠다는 것은 정치적 희망사항”
⊙ 일본이 강점 가진 ‘자동차 및 산업용 반도체’ 공급망부터 선점 추구
⊙ 반도체를 ‘공산품’으로 생각하는 ‘공장형 사고’에 갇힌 일본의 한계
⊙ SK하이닉스 등의 투자 원하지만, 한국은 기술만 공유하고 실익 없을 수도
⊙ “일본 반도체가 뜨는 게 아니라, 대만·한국·미국의 GPU·AI 붐에 소부장이 편승하는 것”
⊙ 독보적 소재·부품·장비 능력에도 제조 생산은 ‘잃어버린 30년’
⊙ “7나노 공정조차 해 보지 못한 일본이 곧장 2나노로 가겠다는 것은 정치적 희망사항”
⊙ 일본이 강점 가진 ‘자동차 및 산업용 반도체’ 공급망부터 선점 추구
⊙ 반도체를 ‘공산품’으로 생각하는 ‘공장형 사고’에 갇힌 일본의 한계
⊙ SK하이닉스 등의 투자 원하지만, 한국은 기술만 공유하고 실익 없을 수도

- 일본 남서부 구마모토현 교외 기쿠요마치에 대만 반도체 기업 TSMC가 건설한 공장. 사진=AP/뉴시스
하지만 현지 기대와 달리, 일본 반도체 부활을 둘러싼 전문가 시선은 냉정하다. 배윤 게이오대 선임연구원은 “일본이 소재·부품·장비(소부장) 분야에서 여전히 독보적인 경쟁력을 보유한 것은 사실이나, 한국처럼 초미세(超微細) 공정을 통해 메모리 반도체를 양산(量産)하는 제조 기술력은 이미 격차가 벌어졌다”고 꼬집었다.
그의 분석대로라면 현재 구마모토에서 목격되는 변화는 일본 자체 제조 역량의 ‘귀환’이라기보다, 해외 선도(先導) 기업을 수혈(輸血)해 고사(枯死) 직전의 생태계에 심폐소생술을 시도하는 단계에 가깝다. ‘메이드 인 재팬(Made in Japan)’의 영광 재현을 위해서는 외부 의존을 넘어선 독자적인 제조 혁신이 필수적이라는 지적이다.
‘보조금 굴기’ 속 인력 절벽
2026년 봄, 일본 구마모토와 홋카이도에서는 이례적일 정도의 ‘반도체 굴기(崛起)’가 전개되고 있다. 막대한 국가 보조금이 투입되고, TSMC 같은 글로벌 거인이 일본 땅에 공장을 세웠다. 언론은 이를 두고 ‘일본 반도체의 화려한 부활’이라 치켜세운다. 그러나 현장의 목소리와 전문가들의 시선은 그만큼 들떠 있지 않다. 일본 반도체산업은 과연 자생적 경쟁력을 되찾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거대한 ‘보조금 중독’ 속에서 가까스로 연명하고 있는 것인가?
구마모토와 홋카이도에 들어서는 초대형 파운드리 공장들은 일본 경제 재도약의 상징처럼 우뚝 서 있다. 하지만 두꺼운 콘크리트 외벽 안에서 새어 나오는 현장의 목소리는 기대보다 절박에 가깝다.
“공장은 지었지만, 돌릴 사람이 없다.”
수조 엔에 이르는 보조금으로 최첨단 설비는 갖췄지만, 그 설비를 실제로 운용할 ‘혈액’인 엔지니어가 메말라 가고 있는 것이다. 일본정책투자은행(DBJ)이 최근 발표한 ‘반도체 인재 확보의 현황과 전망’ 보고서도 일본 반도체 부활의 성패가 보조금 규모가 아니라 결국 ‘사람’에 달려 있다고 경고한다.
배윤 연구원 역시 일본 반도체 전략의 가장 큰 병목으로 기술력 못지않게 인재 부족을 지목했다. 그는 “일본은 늘 인재 육성을 말하지만, 정작 반도체공학·전자공학 박사과정 자체가 줄어들었고, 그 전공을 택하는 학생도 많지 않다”고 지적했다.
1980년대의 영광, 그리고 ‘인재 파괴’의 역사
2026년 2월 5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일본 도쿄 총리 관저에서 기하라 미노루(오른쪽) 관방장관, 웨이저자(왼쪽 두 번째) 대만 TSMC CEO, 조나단 리 TSMC 부사장과 기념 촬영하고 있다. 사진=뉴시스한때 세계 반도체산업을 호령했던 일본이 다시 반도체 메카로 부상하려 한다. 일본 정부는 반도체를 경제 안보의 핵심으로 삼아 수조 엔 보조금을 쏟아붓고 있으며, 이는 산업정책사(史)에서도 이례적인 규모다.
1980년대 일본은 세계 반도체 시장의 50% 이상을 장악했다. NEC·도시바·히타치가 메모리 반도체를 지배하며 최고 기술력을 과시했지만, 1990년대 미일(美日) 협정, 버블 붕괴, 구조조정 실패로 급쇠퇴했다. 그 자리를 삼성, SK하이닉스(메모리), TSMC(파운드리)가 메웠다.
일본 반도체 몰락은 점유율 하락을 넘어 ‘인재 기반 붕괴’로 이어졌다. 1986년 미일 협정 후 경쟁력 약화로 기술자들이 떠났고, 30년 구조조정은 ‘반도체는 사양(斜陽)산업’이라는 인식을 심었다. 대학 연구실 축소로 젊은 인재가 고갈됐으며, 이제 이 부메랑이 부활의 ‘초크포인트(chokepoint·병목 지점)’가 됐다.
배윤 연구원은 일본 반도체산업의 몰락을 기술 단절의 문제이자 산업 구조 전환 실패의 결과로 봤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일본은 한때 설계부터 생산까지 모든 과정을 국내에서 해결하려는 수직통합 모델에 집착했고, 세계 반도체산업이 팹리스와 파운드리 중심으로 분업화하는 흐름에 민첩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그는 “결국 일본은 국내에서 완결적으로 생산하려다 갈라파고스화됐다”며 “세계 산업의 흐름과 단절된 우물 안 개구리가 됐다”고 지적했다.
반도체 생태계의 ‘보이지 않는 지배자’ 일본. 하지만 화려한 명성 뒤편에는 뼈아픈 제조 공백이 자리 잡고 있다.
일본이 글로벌 반도체 무대에서 완전히 퇴장한 것은 아니다. 실리콘 웨이퍼, 포토레지스트, 첨단 세정 장비 등 반도체 제조의 ‘혈액’과 ‘세포’에 해당하는 핵심 소부장 분야에서 일본의 영향력은 여전히 독보적이다. 일본 기업의 협조 없이는 단 하나의 최첨단 칩도 완성될 수 없다는 점에서 일본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강자’로 통한다.
소부장만 ‘거인’, 제조는 ‘난쟁이’
하지만 일본 반도체 재건 전략의 ‘겉’과 ‘속’은 사뭇 다르다. 현재 일본이 사활을 걸고 추진 중인 TSMC 유치와 ‘라피더스(Rapidus) 프로젝트’는 역설적으로 일본 제조 역량의 처참한 현주소를 방증한다. 배윤 연구원은 이를 두고 “일본 반도체가 뜨는 게 아니라, 대만·한국·미국의 GPU·AI 붐에 소부장이 편승하는 것”이라며 “직접 생산 기술이 부족하다”고 꼬집었다. 그는 특히 “일본 자체 기술로 반도체산업이 뜨는 것이 아니라, AI 반도체 시장이 커지면서 그 공급망에 속한 일본 소부장이 낙수(落水)효과를 누리는 것일 뿐”이라며, “결국 직접 만들 수 있는 제조 기술의 부재가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제조 절벽’의 근본 원인은 과거의 성공에 안주했던 폐쇄적 구조에 있다. 과거 일본은 설계부터 생산까지 모든 과정을 독자적으로 해결하려는 ‘수직통합형(IDM) 모델’을 고수했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10나노(nm) 이하 최첨단 공정의 대량 생산 경험은 완전히 끊겼고, 수만 장의 웨이퍼를 오차 없이 찍어 내는 공장 운영(O&M) 노하우는 사실상 소멸했다. 결국 지금 일본이 벌이는 ‘반도체 굴기’는 단절된 제조 혈맥을 잇기 위한 필사적인 심폐소생술이다. 소부장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쥐고도 이를 완제품 제조 경쟁력으로 연결하지 못한다면, 일본 반도체의 부활은 외국 기업을 위한 ‘부품 창고’ 역할을 수행하는 데 그칠 것이라는 일본 내부의 우려가 깊어지고 있다.
“‘트럼프식 논리’와 일맥상통”
배윤 게이오대 선임연구원. 사진=배윤일본의 노림수는 명확하다. 초미세 공정에서 한국과 대만을 단기간에 추월하기 어렵다는 냉정한 현실 인식 아래, 자국이 강점을 가진 ‘자동차 및 산업용 반도체’ 공급망부터 선점(先占)하겠다는 실리주의 노선이다. 특히 구마모토는 토요타 등 일본 자동차산업의 핵심 거점과 맞닿아 있어, 생산과 수요를 직결하는 ‘공급망 내재화’에 최적의 요충지로 꼽힌다.
하지만 천문학적인 보조금 투입은 역설적으로 일본 반도체의 ‘자생적 복구 불능’을 선언한 것과 다름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배윤 연구원은 일본의 행보를 두고 “미국이 자국 내 공장 유치를 압박하는 ‘트럼프식 논리’와 일맥상통한다”고 진단했다. 스스로 첨단 생산 능력을 복원하기 힘든 상황에서, 외부 강자인 TSMC를 빌려와 고사 직전의 생태계에 심폐소생술을 시도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는 “일본의 TSMC 유치는 대만 기업의 힘을 빌려 침체된 지역 경제를 돌리고 자국 소부장 산업의 명맥을 유지하려는 ‘낙수효과’ 전략에 가깝다”며 “자국 기업이 전면에 나서는 근본적인 청사진이 보이지 않는 단기적 처방”이라고 꼬집었다.
결국 현재 일본이 벌이는 ‘반도체 굴기’는 자체적인 제조 역량의 부활이라기보다, 외부 기업을 매개로 생태계의 불씨를 겨우 이어 가는 ‘관리형 생태계’ 구축에 집중되어 있다. 이 거대한 ‘외생적 호황’이 보조금 중단 이후에도 지속 가능한 경쟁력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가 일본 반도체 재건의 진정한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일본 반도체 재건의 마지막 퍼즐’로 불리는 라피더스 프로젝트를 바라보는 안팎의 시선도 갈수록 싸늘해지고 있다. 2022년 일본 정부와 주요 대기업들이 합작해 설립한 이 신생 기업은 현재 홋카이도 지토세(千歲)에 거대 공장을 세우며 ‘2027년 2나노 양산’이라는 초강수를 던졌다. 40나노 공정에서 멈춰 있던 일본이 중간 단계 없이 세계 최첨단 공정으로 단숨에 수직 점프하겠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시장과 전문가들은 이를 ‘기술적 도약’이 아닌 ‘위험한 요행’으로 규정한다. 2나노 공정은 현재 반도체 패권을 쥔 TSMC와 삼성전자조차 사활을 거는 초(超)고난도 영역이다. 배윤 연구원은 이에 대해 “무엇을 만들겠다는 선언과 실제 양산 성과 사이에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며 “7나노 공정조차 경험해 보지 못한 일본이 곧장 2나노로 가겠다는 것은 기술적 논리보다 정치적 희망사항에 가깝다”고 지적했다.
가장 큰 문제는 ‘보조금 중독’과 그로 인한 재정 리스크다. 일본 정부는 이미 조(兆) 단위에 육박하는 국민 세금을 투입했으나, 구체적인 수율 확보나 고객사(社) 유치 등 실질적인 성적표는 여전히 공란이다. 배 연구원은 “성과물이 없는 상태에서 계속 막대한 예산을 쏟아붓는 구조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다르지 않다”며 “지금 중요한 것은 장밋빛 로드맵이 아니라 무엇을 증명했느냐는 실적”이라고 지적했다.
현재 일본 내에서도 자생력 없는 프로젝트에 국가 재정을 올인하는 방식에 대한 비판이 거세다. 한 일본 연구자는 “만들겠다는 계획만 무성할 뿐, 시장을 설득할 결과물은 없다”며 “희망고문도 적당히 해야 한다”고 일갈했다. 결국 라피더스는 일본 반도체의 자존심을 건 ‘국책(國策) 도박’의 시험대에 올라 있다.
앞으로 10년간 4만3000명 이상 더 필요
첨단 반도체산업은 단순히 기술이나 설비 투자만으로 성과를 내기 어려운 분야다. 수십 년에 걸쳐 축적된 생산 경험과 숙련 인력, 그리고 산업 전반을 지탱하는 협력 생태계가 함께 작동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일본이 다시 첨단 반도체 경쟁에 뛰어드는 과정엔 기대와 우려가 동시에 제기되는 상황이다. 일본 반도체 전략을 바라보는 시선이 엇갈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회의적인 시각에서는 기술 격차와 함께 심각한 인력 부족 문제를 지적한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로 지적되는 것은 ‘사람’이다. 일본정책투자은행의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 반도체산업이 직면한 가장 큰 병목은 인력 부족이다. 실제 통계도 이를 보여 준다. 일본의 반도체 관련 산업 종사자 수는 정점이었던 1998년 약 23만3000명에서 2018년에는 약 15만7000명으로 줄었다. 20년 사이 30% 이상 감소한 것이다. 특히 핵심 분야인 집적회로(IC) 제조 부문에서는 같은 기간 전체의 60%에 달하는 약 9만4000명의 인력이 감소했다.
인력 부족은 현재 진행형이다. 일본 기업의 약 65%가 기술 인력 부족을 겪고 있다는 조사도 있다. 앞으로 10년 동안 일본 반도체산업에 추가로 필요한 인력은 최소 4만3000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문제는 단순히 인력의 숫자가 아니라 전문성이다. 반도체 공정은 단순한 생산 작업이 아니라 회로 설계, 공정 엔지니어링, 장비 유지·보수 등 고도의 전문 지식과 경험이 요구되는 산업이다. 일본에서는 1980년대 반도체 전성기를 지탱했던 숙련 기술자들이 대거 은퇴 시기에 접어들고 있으며, 여기에 인구 감소와 공학 인재 감소까지 겹치면서 인력 확보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배윤 연구원은 특히 일본이 첨단 반도체 인력을 국내에서 충분히 길러 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문제로 지적했다. 그는 “일본은 IT 기술자나 반도체 관련 인력을 인도나 동남아시아에서 데려오는 방식으로 인력 부족을 보완하려 하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임시적인 대응에 가깝다”며 “핵심은 자국 내에서 고급 설계 인력과 공정 엔지니어를 안정적으로 길러 낼 수 있는 교육과 산업 구조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1980년대 ‘공장식 사고’에 갇힌 일본
일본 반도체 재건의 가장 큰 걸림돌은 자본도 기술도 아닌, 시대를 읽지 못하는 ‘낡은 인식’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반도체는 이제 단순한 하드웨어 제조를 넘어 AI, 클라우드, 초연결 플랫폼을 지탱하는 4차산업의 심장이다. 그러나 일본의 정책 기저에는 여전히 반도체를 ‘공장에서 찍어 내는 2차산업 공산품’으로 취급하는 1980년대식 제조 패러다임이 뿌리 깊게 박혀 있다.
무엇보다 뼈아픈 지점은 인적(人的) 인프라의 처참한 붕괴다. 현재 일본 대학 내 반도체 및 전자공학 박사과정은 사실상 씨가 말랐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황폐화되었다. 인재 풀이 풍부하고 역동적인 스타트업 생태계를 보유한 한국·미국과 대조되는 대목이다. 일본 정부는 부족한 인력을 인도나 동남아시아에서 수혈하겠다는 계획이지만, 이는 현장 가동을 위한 임시방편일 뿐 핵심 설계 역량을 내재화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전문가들은 일본 정부와 현장의 인력 양성 대책이 ‘책상머리 행정의 전형’이라고 비판한다. 배윤 연구원은 규슈 등 지방 거점의 전문학교 인력을 급히 투입해 GPU와 같은 첨단 반도체 생태계를 구축하겠다는 일본의 구상에 대해 “현실과 동떨어진 접근”이라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는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에는 인력뿐 아니라 전력(電力) 공급, 환경영향평가, 까다로운 인허가 규제 등 한국보다 훨씬 높은 진입 장벽이 존재한다”고 꼬집었다.
대만 ‘사이언스 파크’ 모델 벤치마킹
물론 일본도 뒤늦게 ‘인재 가교(架橋)’를 잇기 위해 사활을 걸고 있다. 규슈 지역을 중심으로 산·학·관(産學官) 컨소시엄을 설립하고, 후쿠오카 반도체 리스킬링 센터를 통해 1만 명 이상의 타 업종 인력을 반도체로 전환하는 등 전방위적 교육 프로그램에 시동을 걸었다. 하지만 이러한 단기 처방이 실질적인 제조 경쟁력으로 이어지기까지는 대만이 수십 년간 쌓아 온 수준의 정교한 ‘그랜드 디자인’이 필수적이다.
결국 일본정책투자은행 등이 제시하는 해법은 대만의 ‘사이언스 파크’ 모델이다. 대만은 1980년대부터 신주(新竹) 사이언스 파크를 중심으로 대학을 산업 단지 내부에 배치, 학생들이 최첨단 설비를 체험하며 채용으로 연결되는 강력한 ‘인재 에코시스템’을 구축했다. 일본 역시 규슈 등지에서 이 모델을 벤치마킹하고 있으나, 아직은 걸음마 단계에 불과하다. 낡은 제조업 마인드를 버리고 인재가 스스로 모여드는 생태계를 복원하지 못한다면, 일본의 반도체 부활은 거대한 공장 껍데기만 남은 사상누각(沙上樓閣)에 그칠 수 있다는 우려가 깊어지고 있다.
사람 없는 공장? 자동화의 한계
인력 부족이 심화되면서 일본 반도체업계에서는 다른 해법도 거론되고 있다. 핵심은 ‘생인화(省人化)’, 즉 노동력을 최소화하는 생산 시스템이다. 반도체 제조 공정 가운데 전(前)공정은 이미 자동화 수준이 상당히 높지만, 패키징과 검사 등 후(後)공정 단계는 여전히 사람의 손이 많이 필요한 분야로 남아 있다. 인력 확보가 갈수록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일본 산업계는 이 후공정 자동화를 새로운 돌파구로 보고 있다.
이런 배경에서 일본 반도체 기업들과 장비 업체들은 2024년 ‘SATAS(반도체 후공정 자동화·표준화 기술연구조합)’를 출범시켰다. 이 조직에는 반도체 제조사와 장비 업체, 관련 표준화 단체 등 약 15개 기업과 기관이 참여하고 있다. 목표는 2028년까지 후공정의 자동화 수준을 획기적으로 높이고 생산 공정을 표준화해 인력 의존도를 줄이는 것이다. 일본 산업계는 여기에 로봇 기술과 피지컬 AI 같은 자율 작업 기술을 결합해, 인구 감소 시대에도 유지 가능한 반도체 생산 체계를 구축하겠다는 구상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자동화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반도체산업은 단순한 생산 공정이 아니라 정밀 장비와 복잡한 공정을 지속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기술 집약적 산업이다. 자동화 설비를 설계하고 운영하며 공정 데이터를 분석하는 고급 엔지니어가 반드시 필요하다. 결국 자동화 역시 인재 기반 위에서만 작동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일본 반도체 전략의 가장 근본적인 과제는 여전히 ‘사람’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공정을 자동화해도 이를 설계하고 관리할 기술 인력이 부족하다면 생산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인력 부족을 기술로 보완하려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지만, 인재 기반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일본 반도체산업이 직면한 구조적 한계 역시 쉽게 해소되기 어렵다는 분석이 이어지고 있다.
일본의 절박한 러브콜
2024년 4월 6일 기시다 후미오 총리(당시·가운데)가 구마모토현 TSMC 공장을 방문해 웨이저자(왼쪽에서 세 번째) 대만 TSMC CEO 등과 기념 촬영하고 있다. JASM이 TSMC 자회사로 일본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사진=AP·뉴시스자생적 제조 동력이 고갈된 일본은 이제 시선을 한국으로 돌리고 있다. TSMC 유치로 급한 불은 껐지만, 지속 가능한 생태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세계 최고 수준의 메모리 및 양산 능력을 검증받은 한국 기업들의 참여가 절실하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 내에서는 SK하이닉스 같은 ‘제조 거인’들이 일본 땅에 둥지를 틀고 무너진 생태계의 복원력을 높여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눈치다.
하지만 한국 기업들에 일본 투자는 실익과 위험이 공존하는 양날의 검이다. 우선 형평성 문제가 대두된다. 배윤 연구원은 “일본은 TSMC에 파격적인 보조금과 전폭적인 지원을 쏟아부었지만, 후발주자로 진입할 한국 기업에도 그만큼의 진정성을 보일지는 미지수”라고 지적했다. 자칫 기술만 공유하고 실익은 챙기지 못하는 ‘들러리’가 될 수 있다는 우려다.
여기에 일본 특유의 ‘까다로운 규제’와 ‘환경 이슈’가 발목을 잡는다. 반도체 공장은 막대한 공업용수가 필요하고 폐수 처리 과정에서 엄격한 환경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실제로 구마모토 TSMC 공장 인근에서는 농업용수 오염과 지하수 고갈을 우려하는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가 높다. 배 연구원은 “대규모 클러스터 조성은 정부의 의지만으로 불가능하다”며 “지역사회의 수용성과 한국보다 훨씬 복잡한 환경 인허가 절차를 넘어야 하는 것이 한국 기업들에는 큰 부담”이라고 분석했다.
결국 한국 기업들은 ‘신중한 관망’을 이어 가며 주판알을 튕기고 있다. SK하이닉스 등 국내 기업들은 일본의 유치 제안이 가진 정치적 의도를 명확히 읽고 있으며, 기술 유출 리스크와 투자 효율성을 놓고 치열한 수싸움을 벌이는 모양새다. 일본이 내미는 손길이 진정한 파트너십의 시작일지, 아니면 자국 소부장 산업의 명맥을 잇기 위한 소모품 유치에 그칠지는 일본 정부가 제시할 구체적인 ‘보호 장치’와 ‘인센티브’의 깊이에 달려 있다.
최종 승부처는 공장이 아닌 ‘사람’
일본 반도체가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려면 소부장의 압도적 강점을 양산 경쟁력으로 발전시키는 것은 물론, 4차산업 패러다임에 맞춘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창출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일본의 행보를 두고 일각에서는 1985년 플라자 합의 이전의 향수에 젖어 국가 보조금이라는 ‘인공호흡기’에만 의지하고 있다는 냉소적 반응도 나온다.
일본이 반도체 레이스에 다시 뛰어든 이유는 자명하다. 미중(美中) 기술 패권 전쟁 속에서 반도체는 이제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국가의 존망을 결정짓는 전략 자산이자 안보의 보루가 되었기 때문이다. 지정학적 리스크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자국 내 생산 기반을 확보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일본 정부를 거대한 도박판으로 이끌었다.
결국 일본 반도체 전략의 승부처는 콘크리트 공장이 아닌 ‘사람’이 될 것이다. 수조 엔의 세금을 투입해 외형을 갖추는 것은 오히려 쉬운 일일지 모른다. 진짜 과제는 멈춰 버린 인재 양성의 시계를 다시 돌려, 숙련된 엔지니어들이 일본에서 미래를 꿈꾸게 만드는 일이다. 일본정책투자은행의 경고처럼, 인재 육성과 공정 자동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지 못한다면 일본 반도체의 지속 가능한 발전은 신기루에 불과하다.
현재 일본의 전략은 ‘부활’이라기보다 고사 직전의 생태계를 지키기 위한 ‘처절한 유지’에 가깝다. 외국 기업 유치로 지역경제를 부양하고 소부장 산업의 명맥을 잇는 데 성공할지언정, 반도체를 여전히 ‘찍어 내는 공산품’이라는 2차산업적 시각에 가두어 둔다면 한계는 명확하다. 첨단 설계와 플랫폼을 아우르는 4차산업적 통찰 없이 과거의 방식만 고집한다면, 구마모토와 홋카이도의 거대 공장들은 일본 경제의 구원투수가 아닌, 국가 재정을 갉아먹는 ‘세금 먹는 하마’라는 비극적 유산으로 남을 위험이 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