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판 기록엔 ‘DJ 一家’(이희호·김홍업·김홍걸) 거의 등장
⊙ ‘데이비드슨 공작’의 시작은 한국계 미국인 T씨의 극비 첩보
⊙ “(DJ 추정 비자금) 동부 7억 달러, 서부 6억 달러… 그중 1억 달러 北 유입 정황”
⊙ 최종흡 당시 국정원 차장 ‘1억 달러 첩보, 신뢰도 가장 높았다’, 김승연(국정원 국장)도 ‘1억 달러 北 유입설 근거 있다’고 주장
⊙ DJ 일가와 친분 깊은 J씨, 이희호 여사에게 평양과기대에 ‘기부 건의’ 했다는 기록
⊙ 김홍걸 측 ‘반론 거부’, 평양과기대 관계자 “김홍걸로부터 단돈 10원도 안 받아”
⊙ ‘데이비드슨 공작’의 시작은 한국계 미국인 T씨의 극비 첩보
⊙ “(DJ 추정 비자금) 동부 7억 달러, 서부 6억 달러… 그중 1억 달러 北 유입 정황”
⊙ 최종흡 당시 국정원 차장 ‘1억 달러 첩보, 신뢰도 가장 높았다’, 김승연(국정원 국장)도 ‘1억 달러 北 유입설 근거 있다’고 주장
⊙ DJ 일가와 친분 깊은 J씨, 이희호 여사에게 평양과기대에 ‘기부 건의’ 했다는 기록
⊙ 김홍걸 측 ‘반론 거부’, 평양과기대 관계자 “김홍걸로부터 단돈 10원도 안 받아”
올해는 고(故) 김대중(DJ) 전 대통령 10주기다. 생전 DJ의 발목을 잡은 ‘아킬레스 건(腱)’ 중 하나는 바로 비자금 의혹이었다. 그동안 DJ 비자금은 정치권의 ‘태풍의 눈’이자, 일종의 성역(聖域)으로 간주됐다. 무수한 의혹이 제기되고, 온갖 설(說)이 난무했음에도 정확한 팩트는 확인된 게 없었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이명박(MB) 정부 시절 국세청 차장과 청장을 역임한 이현동씨, 국정원 3차장을 지낸 최종흡씨, 그리고 김승연 전 국정원 대북공작국장이 DJ 해외 비자금 의혹을 뒷조사한 혐의(국고 손실 등)로 구속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은 것이다.
이현동 전 청장은 ‘DJ 뒷조사’에 협조하는 대가로 국정원으로부터 활동비 1억2000만원을 수수한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비슷한 시기에 박윤준 전 국세청 차장도 불구속 기소돼 재판에 넘겨졌다. 이현동 전 청장은 지난해 8월, 1심에서 무죄로 판결받고 석방됐다. 최종흡 전 차장과 김승연 전 국장도 현재 보석으로 석방된 상태이다.
‘데이비드슨 공작’의 실체

DJ 뒷조사는 ‘데이비드슨 공작’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데이비드슨’은 DJ의 영문 이니셜 알파벳 D를 따서 지은 것이다. 최근 《월간조선》은 데이비드슨 공작의 한 축으로 알려진 이현동 전 국세청장과 박윤준 전 국세청 차장의 재판 기록을 입수했다. 이 기록은 재판정에서 오간 신문(訊問) 내용을 타이핑한 것으로, 150여 장(A4 용지 기준)에 달한다. 실시간으로 속기(速記)한 만큼 판독이 어려운 부분이 있지만,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는 큰 무리가 없다. 참고로 이 사건 관련 판결문, 수사 기록 등은 ‘공무상 비밀 등이 포함돼 있고 일부 비공개 재판을 했다’는 이유 등으로 현재 열람이 제한돼 있는 상태다.
데이비드슨 공작은 국정원-국세청 공조(共助)하에 이뤄졌는데, 두 기관이 파악하려 한 DJ 비자금은 크게 두 갈래였다. 기자가 정리한 기본 골격과 흐름은 대강 아래와 같다.
〈■ 국정원, 한 교포로부터 DJ 미국 비자금 중 일부가 중국을 거쳐 북한으로 유입되려 한다는 첩보 입수 → 국정원, 관련 정보 수집
■ 국정원, 미국 내 DJ 비자금의 구체적인 규모 파악하기 위해 국세청에 협조 요청 → 국세청, 미국 국세청(IRS) 직원을 국정원에 소개 → 국정원, IRS 직원을 비자금 정보 입수하는 해외정보원으로 활용〉
재미있는 사실은 이 재판 기록에 이희호 여사를 비롯해 김홍업, 김홍걸씨 등 DJ 일가(一家)가 거의 다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는 DJ 비자금 의혹이 DJ라는 한 개인에게만 국한돼 있지 않고, 가족 간에 얽혀 있음을 보여준다. DJ 측 입장에서 보면 국정원이 DJ 일가를 ‘뒷조사’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이현동-박윤준의 재판 기록은 한 편의 첩보영화를 방불케 한다. ‘공작’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등장 인물도 20여 명이나 된다. 핵심 인물은 이현동, 박윤준, 최종흡, 김승연, 그리고 원세훈(구속) 전 국정원장이다. 간단히 정리하면 ‘국세청팀’(이현동, 박윤준)과 ‘국정원팀’(원세훈, 최종흡, 김승연)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 같은 사전 정보를 토대로 지금부터 데이비드슨 공작이 숨 가쁘게 이뤄진 2010~2012년으로 시곗바늘을 돌려보자.
김홍걸 관련 ‘1억 달러’의 실체
먼저, 데이비드슨 공작이 어떤 과정을 거쳐 시작됐는지 재판 기록을 통해 살펴보자. 기록에 따르면, 데이비드슨 공작은 2009년 중반과 2010년 초, 국정원이 입수한 한 첩보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계 미국인 T씨에게서 입수한 첩보를, 재판 기록을 토대로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민감한 부분은 기자가 임의로 익명 처리했다.
〈2010년 상반기 해외정보국 ○○○ 정보관 ○○○의 보고다. 한국계 미국인 T씨의 보고 내용인데, 미국 내 DJ 비자금이 서부에 6억 달러(또 다른 재판 기록엔 ‘6억5000만 달러’로 적시), 동부에 7억 달러가 있다. 동부는 ㄱ 회장, 서부는 ㄴ씨가 관리한다. ㄷ 기업 전 회장 ㄹ씨가 함께 인출해야 출금이 가능하다. 그중 1억 달러가 DJ의 삼남(三男) 김홍걸이 운영하는 중국 북경 등 3개 회사를 거쳐 북한에 있는 평양과기대로 송금되려 한다.〉
위 첩보 내용을 요약하면 미국에 13억 달러가량의 DJ 비자금이 미국 동·서부에 분산 예치돼 있고, 이를 관리하는 관리자가 있다는 것이다. 비자금 관리자로 지목된 이들은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국내 유수의 기업가들이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건 DJ의 삼남 김홍걸(현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상임의장)씨 관련 대목이다. 1억 달러가 ‘김씨가 운영하는 회사를 통해 북한 평양과기대로 흘러 들어가려 한 정황이 있다’는 요지의 기술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위 기록은 2018년 11월 23일 박윤준 전 차장 2차 공판 당시, 김승연 전 국장에 대한 변호인 반대 신문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박윤준 3차 공판(2018년 12월 12일)에서는 좀 더 구체적인 몇몇 인물이 언급되기도 했다. DJ 비자금의 ‘최초 제보자’라고 할 수 있는 T씨를 비롯해 김홍걸씨, 김씨와 연관 있는 회사로 추정되는 ○○○○회사의 대표 손○○, 비자금 관리책으로 의심되는 재중(在中) 박○○ 및 뒤에 언급할 J씨 등이다.
‘J씨가 이희호 여사에게 기부를 건의했다’는 첩보
국정원 첩보 중 이희호 여사가 언급된 부분을 살펴보자. 2018년 12월 12일 박윤준 3차 공판에는 김승연 국장과 함께 데이비드슨 공작에 관여한 국정원 처장 이○○씨가 출석했다. 이날 변호인 측 반대 신문의 문답 요지다.
〈- 박윤준 측 변호인: 첩보 내용에는 ‘평양과기대의 J씨가 이희호 여사에게 평양과기대에 기부를 건의했다. 재미교포 K(평양과기대 관계자)도 여기에 관여돼 있다’ 이런 내용도 있었나.
- 이○○: 있었던 것 같다.
- 박윤준 측 변호인: K라는 사람은…2중, 3중 ○○으로 의심되는 자였는데.
- 이○○: 네.
- 박윤준 측 변호인: J는 미국 내 비자금 총괄자였나.
- 이○○: 첩보에 따르면 그렇다.
- 박윤준 측 변호인: 평양과기대는 2010년 개교했는데, 자금이 부족해서 개교가 늦어졌다는데.
- 이○○: 잘 모른다.
- 박윤준 측 변호인: 증인은 ‘K는 미주 지역 ○○○재단을 통해 미국 내 자금을 중국으로 빼돌리기 위해 중국 북경·심양·청도에 소재한 3개의 월드트레이드센터(WTC)를 활용했다는 사실이 있다’고 증언했다.
- 이○○: (그렇게) 예측할 수 있었다.〉
재미교포 K씨와 J씨의 정체
평양과학기술대학교(평양과기대)는 앞서 T씨가 국정원에 제보한 첩보에도 등장하는 곳이다. 평양과기대는 2009~2010년경 꽤나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평양과기대는 2009년 중순까지 자금난에 시달려 착공된 지 7년 동안 개교를 못 하는 상황에 처했다. 2009년 9월15일자 자유아시아방송(RFA)은 “남북관계의 경색으로 지난해부터 계속 연기됐던 평양과기대의 준공식이 16일 열리게 됐다”며 “착공된 지 7년 만”이라고 보도했다. 이 매체는 “2002년 6월에 착공된 평양과기대는 지금까지 총 400억원 이상이 투입된 것으로 알려졌다”며 다음과 같이 전했다.
〈평양과기대는 북한의 경제개발과 국제화에 도움이 될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함으로써 남북 화해와 협력의 기반을 다진다는 의미에서 출발했지만, 기획 단계에서부터 순탄치 않았습니다. 예산이 초과 투입되면서 자금 부족으로 몇 차례 공사가 중단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공교롭게도 평양과기대가 재정난에 처한 시기와, 문제의 1억 달러 첩보를 국정원이 입수한 시기는 겹친다. 그런 관점에서 평양과기대의 ‘재정난’과 이희호 여사를 통해 평양과기대에 기부 의사를 권유했다는 첩보에는 어떤 연관성이 존재하는지 궁금증이 인다. 참고로 국정원의 첩보와 상기 문답의 맥락 등을 종합했을 때, J씨가 이희호 여사에게 기부를 건의했다는 돈의 액수는 1억 달러로 짐작된다.
문제의 J씨와 앞의 문답에 등장하는 평양과기대 관계자 K씨는 2009년 12월 모 기업의 사외이사로 영입된 적이 있다. 당시 이 기업이 공시한 자료를 확인한 결과, J씨는 고려대를 졸업하고 중국 칭화대(淸華大) 석좌교수를 지낸 것으로 되어 있다.
그 무렵 이 기업은 대북 사업에 나설 채비를 하고 있었다. 대북 사업을 체계화하고 구체화하기 위해 대북 관련 전문가를 영입했다고 밝혔다. 그 적임자로 두 사람을 택한 것이다. 그보다 두 달 앞선 10월께 이 기업은 K씨가 주도하는 평양과기대와 손잡고 지하자원 개발을 위한 계약을 체결했다. 비슷한 시기에 한 창업투자회사와 1000억원 규모의 자원개발 펀드를 조성한다는 양해각서도 체결했다. 당시 이 기업은 “국내 최초의 북한 자원 전문 펀드가 된다”는 식으로 홍보했다.
김홍걸 관련 1억 달러 “對北 관련성 있다”
평양과기대와 대북 사업에 나선 이 기업의 끝은 그리 좋지 못했다. 2011년 주가조작 사건에 연루돼 회사 대표 등이 구속됐고, 이후 상장(上場) 폐지됐다. 이처럼 국정원 첩보망에 포착된 J씨와 K씨가 모 기업을 매개로 북한과 접점이 닿아 있다는 점도 유심히 지켜볼 단서 중 하나다. 당초 T씨의 첩보에 의하면, ‘비자금 총괄 관리자’는 전직 기업 회장이었다. 하지만 국정원 이○○ 처장이 총괄 관리자를 ‘J씨’라고 지목한 것으로 보아, 국정원은 해외정보국이 입수한 첩보를 기반으로 비자금 관련 인사들의 추가 정보도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첩보는 ‘가치’가 없는 그저 뜬소문에 불과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이현동 전 청장 1심 재판부에서 찾을 수 있다. 1심 재판부는 문제의 1억 달러에 대해 ‘대북 관련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지난해 8월 8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부장판사 조의연)는 이 전 청장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지난해 한 일간지는 이런 사실을 전하며 “2010년 상반기 국정원 해외공작국 정보관이 ‘미국 내 DJ 비자금 중 1억 달러가 DJ 셋째 아들 홍걸씨가 운영하는 중국 회사 등을 통해 평양과기대에 송금되려 한다’는 첩보를 입수했다는 변호인 측 증거가 근거로 작용했다”고 보도했다.
“J씨, DJ 일가와 가족같이 지내”
이제 문제의 1억 달러가 북한으로 흘러 들어갔는지 여부를 확인할 차례다. 기자는 지난해 말 한국에 들어온 평양과기대 관계자 K씨를 만난 적이 있다. 그에게 문제의 1억 달러에 대해 물었을 때, 그는 ‘사실무근’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지난 2월 13일 K씨에게 전화를 걸어 재판 기록을 토대로 취재한 내용을 다시 물었다. K씨는 자신뿐 아니라 J씨도 이희호-김홍걸 모자(母子)와 친분이 있다고 털어놨다. K씨와 나눈 문답의 요지다.
〈- 기자: J씨란 사람에 대해 잘 아나.
- K씨: 잘 아는 정도가 아니라 옛날에 같이 일하기도 했다.
- 기자: 이 사람 직업이 뭔가. 평양과기대 교수인가.
- K씨: 아니다. 평양과기대 소속은 아니고 J씨는 평양과기대 설립 당시 도움을 줬던 이다.
- 기자: K씨가 DJ 일가와 친하다는 건 많은 사람이 안다. J씨도 친한가.
- K씨: 그는 DJ와 가족같이 지내는 사람이다.
- 기자: 이희호 여사와 김홍걸씨하고도 친한가.
- K씨: 아주 가까이 지낸다.
- 기자: J씨가 이희호 여사한테 평양과기대에 기부를 요청한 적이 있었나.
- K씨: DJ하고 가깝긴 하지만… (기부와 관련된) 그런 얘기를 많이 듣긴 했는데… 그 얘기와 관련해 김홍걸씨와 만나서 얘기하려고 했다. 나는 김홍걸로부터 단돈 10원도 받은 게 없다. 그리고 그때 김홍걸씨는 미국에 있었던 걸로 안다.
- 기자: 김홍걸씨는 미국에서 뭘 했나.
- K씨: 그냥 있었지. 자기 아버지 이름이 있으니까… 미국에선 한 게 없는 걸로 안다. 김홍걸씨는 J씨와 같이 일한 적이 있지만, 나와 홍걸씨는 같이 일한 게 없다.
- 기자: J씨하고 모 회사의 사외이사 한 적 있지 않나?
- K씨: 그런 적은 있지만 관련 일을 한 적은 없다.
- 기자: 같이 사외이사에 등재됐던 J씨는 지금 뭐 하고 있나.
- K씨: 미국에 있는데 뭐 하는지 모른다.〉
K씨에 따르면 2009~2010년경 이미 ‘1억 달러 기부설’ 얘기가 나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 김홍걸씨는 K씨에게 매우 미안해했다고 한다. 사실이 아닌데 K씨를 곤란에 처하게 했다는 이유에서다. 그 얘기의 출처에 대해 K씨는 “J씨가…”라고 말을 꺼내려다가 중단했다. ‘사이가 안 좋으냐’고 했더니 “(J씨와는) 최근엔 잘 만나지 않는다”고 했다. J씨의 연락처를 묻자 “모른다”고도 했다. 재판에서 거론된 월드트레이드센터에 대해서도 물었다. 관련 문답이다.
“J씨가 ‘월드트레이드센터 잘되면 평양과기대 도와주겠다’고 말한 적 있어”
〈- 기자: 심양 월드트레이드센터 얘기는 뭔가. (K씨가) 거기에 투자하려 했나?
- K씨: 투자했다가 손해봤다. 다른 말로 하자면 사기를 당한 것이다. 그때 중국에 월드트레이드센터가 베이징에만 있었는데 심양에도 세우려고 투자를 했는데, 결국은 완전히 잘못됐다.
- 기자: 누구한테 사기를 당했다는 얘긴가. 국내 인사인가.
- K씨: 미국하고 국내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다. 누군지는 말할 수 없다. 이미 지난 일 가지고….
- 기자: 소송 제기했나.
- K씨: 난 소송 제기 안 한다.
- 기자: J씨는 월드트레이드센터에 관여한 게 없나.
- K씨: 그 사람은 수동적으로 관여했다. J씨는 김모 목사(모 교회 원로목사)라는 분과 관련이 있었고, J씨가 ‘월드트레이드센터 사업이 잘되면 그 돈으로 평양과기대를 도와주겠다’는 뜻을 보인 적은 있다.
- 기자: 월드트레이드센터 사업에 필요한 돈의 출처는 어디였나.
- K씨: 그건 모른다. 김 목사인 것 같기도 하고….
- 기자: 처음 (K씨에게) 월드트레이드센터 투자를 권유한 사람은 누구인가, J씨인가.
- K씨: 기억이 잘 안 난다. 다만 내가 심양시 관계자들을 비롯해 중국 정부 인사들을 J씨한테 소개해 줬다.
- 기자: 김홍걸씨도 여기에 투자했나.
- K씨: 김홍걸이는 별로 없고….
- 기자: 별로라는 건 뭔가.
- K씨: 안 했다는 거지. 모른다. 심양엔 한 번도 안 나타났다.
- 기자: 이희호 여사는.
- K씨: 없다.〉
《월간조선》은 지난 2월 8일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에 질문지를 발송해, 문제의 13억 달러를 비롯해 ‘1억 달러 평양과기대 유입설’에 대해 물었다. 민화협 측으로부터 “질문에 대해 답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전달받았다. ‘김홍걸 의장의 뜻이냐’는 질문에 민화협 관계자는 “(민화협) 사무처의 의견이다. 이 건으로 전화를 안 했으면 좋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최종흡 ‘1억 달러 첩보는 신뢰도 높다’
13억 달러를 비롯한 1억 달러 평양과기대 유입설은 최종흡 차장에게도 전달됐다. 재판 기록에 의하면, 최 차장은 3차장으로 부임한 지 1년여가 지난 2010년 5~6월경 (DJ 비자금을 조사하라는) 원세훈 원장의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최종흡 전 차장이 2018년 11월 9일 박윤준 1차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밝힌 관련 진술 요지는 이렇다.
〈원장(원세훈)이 불러서 갔더니 (DJ의) 미국 비자금이 있다고 하더라. 이를 추적해 실체를 파악하고, 대북 유입 가능성도 있다고 하니 각별히 보안에도 유의하라고 지시했다. 배경이나 그런 건 설명이 없었다. 해외정보국에 전화해 ‘이런 전문(電文)이 있다고 하는데 가져와 봐’라고 했던 것 같다. 그걸 보고 지시 배경을 짐작했을 뿐이다. 그때 (원장이) 지시할 때에 ‘이현동 국세청 차장을 만나보라’는 말을 했던 것 같다. 원장 지시니까 차일피일 미룰 수 없어 하루 이틀 내에 (이현동 차장을) 만나러 갔다. 이현동 차장하고 구체적으로 이야기한 기억은 없고 차장이 당시 박윤준 국장을 소개해줬던 거 같다.〉
‘전문’에는 문제의 13억 달러, 그리고 그중 1억 달러가 북한으로 유입되려 한다는 정보가 담겨 있는 걸로 추정된다. 1억 달러 북한 유입설을 접한 최종흡 전 차장은 ‘내가 원장이라도 용납할 수 없었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 그만큼 그냥 넘기기 어려운 첩보였다는 얘기다. 최 전 차장은 ‘이 첩보는 신뢰도가 가장 높았기 때문에 ○○○ 정보관에게 물증을 확보하라고 지시했다’는 취지의 말도 했다.
김승연 전 국장도 ‘비자금 추적은 두 가지 방향으로 이뤄졌다’며 ‘하나는 미국 내 비자금 추적이었고, 또 하나는 중국으로 유출돼 북한으로 넘어가는 동향이었다. 첫 번째는 어려운 듯 보였지만 두 번째 유출은 계속 있었다’는 취지의 주장을 했다. 김 전 국장도 1억 달러 북한 유입설이 근거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국정원에서 해외 정보 업무를 담당한 전직 관계자도 “정보관을 통해 들어온 해외 첩보는 그것이 신빙성이 있든 없든 반드시 조사하는 게 관례”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만약 국정원이 손 놓고 있다가 문제가 크게 불거지면 나중에 원(院)이 모든 책임을 뒤집어쓴다”며 “첩보를 입수하고도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그게 정보기관으로서 할 짓이냐”고 반문했다.
이와 관련해 원세훈 전 원장은 최종흡 차장에게 ‘이현동 차장을 만나보라고 한 적은 있지만 DJ 비자금을 조사하라고 지시한 적은 없다’는 취지의 진술을 했다. 재판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원 전 원장은 ‘데이비드슨 사업’에 대해 ‘기억이 없다’ ‘모른다’는 식으로 진술한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원 전 원장의 진술과는 별개로 국정원은, 이 같은 첩보를 바탕으로 국세청과 협조 체제를 구축했다. 최종흡 차장은 ‘이현동 차장을 만났고, 그 자리에서 박윤준 국장을 소개받았나’라는 질문에 ‘같이 본 거 같다. 그때 DJ 비자금 이야기가 있었다’는 요지로 답했다. 그 당시 박윤준씨는 국세청 국제조세관리관(국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美 국세청 직원 섭외한 국정원·국세청
2018년 6월 18일 열린 이현동 6차 공판에서는 최종흡·이현동·박윤준, 이 세 사람이 만났다는 진술이 나왔다. 세 사람이 만난 자리에서는 DJ 비자금 논의뿐 아니라 미국 국세청(IRS) 직원 얘기도 오간 것으로 보인다. 이날 최종흡 증인신문 기록의 요지다.
〈이현동 차장이 당시 구체적으로 나(최종흡)한테 설명해준 건 없었다. 그러곤 박윤준 국장 방으로 옮겼는데, 거기서 (박윤준 국장이) IRS 요원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저한테 개인적인 의견을 일체 물어보지 않았고, 이 일을 하는데 (C씨가) 소위 적임자라는 식으로 얘기를 했다.〉
IRS란 미국 국세청을 말한다. IRS에는 한국계 미국인 C씨가 근무하고 있었다. 국세청은 C씨가 DJ 비자금 의혹을 조사할 수 있는 적임자라고 판단해, 최종흡 전 차장에게 소개한 것으로 짐작된다. C씨가 국정원의 ‘해외정보원’이 된 셈이다. 참고로 C씨는 박윤준씨가 미국에서 주재원으로 근무할 때 서로 알던 사이다.
최 전 차장의 진술에 따르면, 국세청 측에서 DJ 비자금을 조사하기 위해선 C씨에게 활동비를 지급해야 한다는 식의 요구를 했다고 한다. 국세청 측은 ‘저쪽(C씨)에서 얼마를 언제 요구하면 알려줄 테니까 그걸 (C씨의) 처제에게 지급을 하라’는 식의 얘기를 최 전 차장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C씨에게 가야 할 활동비는 처제뿐 아니라 그의 장모에게도 전달됐다. 이렇게 ‘제3자’에게 돈을 건넨 이유는 C씨 본인의 요청 때문이었다고 한다. 김승연 전 국장은 해외 공작 등을 벌일 때 ‘처제가 아니라 기상천외한 사람한테 (돈을) 주는 경우도 많다. 이런 부분은 전혀 이상한 게 아니다’라는 요지의 주장을 하기도 했다.
김홍업 관련 정보는 무엇?
국정원은 국세청의 소개로 알게 된 C씨에게 활동비를 건네며 문제의 비자금 조사에 착수했다. 그럼 C씨는 어떤 정보를 구했을까? T씨가 김홍걸씨에 관한 첩보를 국정원에 제공했다면, C씨는 김홍걸씨의 바로 위 형이자 DJ 차남 김홍업씨 관련 정보를 획득한 것으로 보인다. 김승연 전 국장이 말한 비자금 추적의 ‘두 가지 방향 중 하나’가 바로 김홍업씨 관련 첩보인 셈이다. 2018년 6월 18일 이현동 6차 공판에서 최종흡 전 차장이 자신의 변호인과 나눈 문답 내용 요지의 일부다.
〈- 최종흡 측 변호인: ‘2004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차남 김홍업의 측근 ○○○ 등 3명의 뉴욕 플라자 건물 매수가 김대중 비자금과 관련돼 있고, 그 돈의 일부가 자금 세탁됐다는 혐의로 미 국세청에 고발됐다’라는 게 해외정보원(C씨)의 첩보라는 건데, 이 내용은 이미 2006년부터 인터넷에 유포되고 있는 내용이다. 다만 국정원은 이게 사실인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국세청으로부터 해외정보원을 소개받은 거 아닌가.
- 최종흡: 우리가 그 사건을 확인해 달라는 게 아니었고, 그분(C씨)이 우리가 (미국) 국세청에 비자금을 알아봐 달라 해 시작한 것이 공교롭게도 그 건이었던 거 같다. 상가(商家)를 샀는데, 매도인이 매수인 3명을 고발한 곳이 국세청이었고, 그걸 우리한테 준 거 같다.〉
‘DJ 비자금’ 관리자로 소문난 L씨, 잇따라 被訴
요약하면 미국 내 상가 구입에 김홍업씨 측근이 관련돼 있다는 얘기였다. 김홍업씨 관련 의혹은 2006년 세상에 알려졌다. 요지는 미국 내 김홍업씨 측근들의 부탁을 받은 양모(당시 50세・뉴욕 거주)씨가 ‘007가방’으로 돈을 날랐다는 것이다. 양씨가 나른 돈이 바로 DJ 비자금과 관련 있다는 주장이었다. 양씨의 폭로는 초반엔 언론의 조명을 받았지만, 이후 잠잠해졌다. 이를 뒷받침할 물증이 없기 때문이었다. 결국 사실 확인이 이뤄지지 않은 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김홍걸씨와 DJ 비자금 관련성도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았다. 김승연 전 국장이 이 건에 대해 ‘어렵다’고 말한 것도, 그 정황이 뚜렷이 드러난 게 없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007돈가방설(說)’이 한창 떠들썩할 때 나온 인물 중에 재미교포 L씨가 있었다. 한때 뉴욕 교포 사회에서 김홍업씨와 친분이 두텁다는 소문이 나 있었다. 그 때문인지 L씨가 ‘DJ 비자금 관리자’란 풍설도 돌았다. 2006년 당시, L씨는 미국 내에 거액의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국정원은 그런 L씨에게 주목했다. ‘DJ 비자금 관리자’라는 소문이 난 L씨를 조사할 경우, 비자금의 꼬리를 잡을 수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
최종흡 전 차장 문답에 등장한 ‘뉴욕 플라자 상가’도 2005년 9월, L씨가 구입한 것이다. 당시 그는 미화 2000만 달러(한화 약 200억원)를 주고 이 상가를 구입했는데, 돈의 출처를 둘러싸고 여러 의혹이 나돌았다. 원래 L씨는 그만한 재력(財力)이 없었다는 게 교포 사회의 평가였다.
뉴욕의 ‘부동산 갑부’ 위치에 오른 L씨는 불과 4~5년 만에 궁지에 몰렸다. 잇따른 송사(訟事)에 휘말린 것이다. 한 재미(在美) 한국 언론 보도를 정리하면 소송 경위는 대략 이러하다.
2009년 5월, 미국 뉴욕의 한 교포 사업가는 L씨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이 사업가가 법원에 제출한 소송장에 따르면, 그는 ‘L씨 등에게 600여만 달러를 빌려줬지만 이를 돌려받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근거로는 J씨는 L씨에게 발행한 약속어음 등을 제시했다. 1년여간의 소송 끝에 L씨는 패소했다.
2010년 8월 모 은행도 L씨를 겨냥한 소송전을 벌였다. 뉴욕주 뉴욕카운티지방법원에 해당 은행이 L씨 등을 상대로 제출한 소송 자료에는 ▲모기지(Mortgage・부동산 담보 대출) 원금 및 이자 479만3000여 달러 ▲신용대출 원금 및 이자 21만2000여 달러 등 총 500만6500달러를 L씨 부부가 지급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은행은 2007년 12월 20일 L씨 부부 소유의 법인에 456만 달러를 대출했다. L씨 부부의 법인은 같은 날 뉴저지주의 한 부동산을 매입했다. 이 456만 달러는 부동산 매입가(520만2000달러)의 약 88%에 달하는 액수였다. 이 은행이 모기지로 지급하는 통상적인 수준(70%)보다 높은 금액이라고 한다.
국정원, L씨 소송과 관련한 공소장 요구
이 은행은 건물가의 88%를 대출한 약 9개월 뒤, 다시 20만 달러를 L씨 부부 법인에 신용 대출했다. 결국 L씨 부부의 법인 차원에서 대출받은 전체 금액은 476만 달러로, 뉴저지 건물 매입가의 약 91.5%에 달했다. 이 법인은 2009년 3월 이후, 돌연 ‘디폴트(Default・채무 불이행)’를 선언했다. L씨 부부가 디폴트 선언 전까지 은행에 갚은 원금은 9만 달러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국정원은 L씨가 자신이 휘말린 소송과 관련한 공소장 등을 구해줄 것을 박윤준 국장에게 부탁한 것으로, 재판 기록에 적시돼 있다. 2018년 5월 18일 이현동 전 청장 2차 공판에서 김승연 전 대북공작국장이 검찰 측과 나눈 문답 내용의 요지다.
〈- 검찰: 증인은 박윤준 국장에게 ‘미국에서 ○○○○(L씨)을(를) 사기죄로 고소한 공소장을 구해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죠.
- 김승연: 네.
- 검찰: (박윤준은) ‘비공개 기소로 처리하는 바람에 공소장을 아예 구할 수 없다고 김승연에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승연은 공소장을 구해 달라고 계속했다’는데.
- 김승연: 그게 풀리면 수집해 달라고… 계속 요구한 건 맞다.〉
2018년 11월 23일 박윤준 2차 공판에서는 L씨를 둘러싼 여러 의혹에 대한 얘기도 오갔다. 김승연 전 국장이 자신의 변호인과 나눈 문답의 요지다.
〈- 변호인: ○○○○(L씨)이 기소된 후인 2012년 상반기쯤 (미국에서) 이○○(김홍걸씨 측근이라고 지목된 사람)이라는 사람에 대해 수사가 진행돼 가고 있었는데, 그 수사에서 ○○○○(L씨)이 참고인 또는 증인의 신분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비공개 처리가 됐다는 이야기를 박윤준 국장이 해외정보원(C씨)으로부터 듣고 그 사실을 증인에게 알려줬다는데.
- 김승연: 그런 기억이 있다.
- 변호인: 2012년 상반기 DJ 비자금 문제가 ‘원칙적으로 처리됐다’(‘문제없다’는 식으로 결론 났다는 의미인 듯)는 검찰 주장이 제가 볼 때는 맞지 않는 거 같은데.
- 김승연: 어느 게 맞다 틀리다기보다는, (그 당시) 그 문제가 다 끝났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 변호인: 미국에서 문제가 되는 세 사람(김홍업씨 측근)이 조성한 비자금 액수가 1억 몇 달러씩 다 합하면 3억5000만 달러가 된다는 이야기 들었나.
- 김승연: 내 기억엔 3억5500만 달러이다… 셋이 균등하게 돈을 냈는데 그중 이○○은 제가 기억하기엔 그만한 자금을 동원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었다. (한화로) 1000억원이 넘는 돈이다. (이○○은) 그런 재력가가 아니다.
- 변호인: 국정원에서 박윤준을 만난 후 그 결과를 보고한 내용이다… (이 문건에는) ‘2010년 9월 국세청 박윤준을 만나 진행 상황 확인하고 의견 조율했다’고 기재돼 있다. 여기엔 ‘확인된 비자금 조성 내역’이라고 돼 있고 ○○○○(L씨)가 문제되는 미화 1억1343만 달러…. 그중 담보 없이, 또는 담보가 있더라도 일반적인 담보 비율을 초과하는 대출을 받았다는 첩보가 있던데.
- 김승연: 네.
- 변호인: 이걸 보면 역외탈세 추적이나 비자금 추적 업무가 허황된 것은 아닌 걸로 보이는데.
- 김승연: 네.〉
위 문답을 보면, 국정원・국세청은 L씨가 피소된 상황과 더불어 그가 보유한 자금의 성격까지 일부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다. 또한 국정원이 작성한 문건에 ‘확인된 비자금 조성 내역’이란 항목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국정원이 L씨의 돈을 비자금으로 간주한 게 아닌가 하는 느낌도 준다.
검찰이 C씨에게 제공한 ‘30만 달러’를 국고 손실로 판단한 까닭
검찰은 국정원이 국세청 측의 소개로 C씨를 해외정보원으로 고용한 데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보였다. L씨 관련 내용이 인터넷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정보라는 점을 강조했다. 기자도 L씨와 관련한 소송 보도를 인터넷으로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해외정보원 자격을 얻은 C씨가 입수한 정보치고는 다소 빈약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재판 기록에 따르면, 국정원은 C씨에게 30만 달러(한화 3억4000만원)를 활동비 조로 지급한 것으로 나온다. C씨에게 거액의 돈을 주고, 누구나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정보를 취득하도록 한 건 명백한 국고 손실이라는 게 검찰 측의 입장이다.
이현동 전 청장 측 변호인은 《월간조선》과 가진 전화 통화에서 “국세청은 이 사건과 관련해 해외정보원 등에게 돈을 건넨 적이 없다. 이 전 청장은 국정원의 업무 협조에 적법하게 응했을 뿐”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최종흡 전 차장 측 변호인은 “구체적인 재판 상황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검찰이 항소함에 따라 오는 3월 이현동 전 국세청장에 대한 항소심 재판이 열린다. 최종흡 전 국정원 차장 재판도 비슷한 시기에 속개된다. 《월간조선》은 이 재판을 방청하고 그에 따른 후속 보도를 내놓을 계획이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이명박(MB) 정부 시절 국세청 차장과 청장을 역임한 이현동씨, 국정원 3차장을 지낸 최종흡씨, 그리고 김승연 전 국정원 대북공작국장이 DJ 해외 비자금 의혹을 뒷조사한 혐의(국고 손실 등)로 구속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은 것이다.
이현동 전 청장은 ‘DJ 뒷조사’에 협조하는 대가로 국정원으로부터 활동비 1억2000만원을 수수한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비슷한 시기에 박윤준 전 국세청 차장도 불구속 기소돼 재판에 넘겨졌다. 이현동 전 청장은 지난해 8월, 1심에서 무죄로 판결받고 석방됐다. 최종흡 전 차장과 김승연 전 국장도 현재 보석으로 석방된 상태이다.
‘데이비드슨 공작’의 실체

DJ 뒷조사는 ‘데이비드슨 공작’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데이비드슨’은 DJ의 영문 이니셜 알파벳 D를 따서 지은 것이다. 최근 《월간조선》은 데이비드슨 공작의 한 축으로 알려진 이현동 전 국세청장과 박윤준 전 국세청 차장의 재판 기록을 입수했다. 이 기록은 재판정에서 오간 신문(訊問) 내용을 타이핑한 것으로, 150여 장(A4 용지 기준)에 달한다. 실시간으로 속기(速記)한 만큼 판독이 어려운 부분이 있지만,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는 큰 무리가 없다. 참고로 이 사건 관련 판결문, 수사 기록 등은 ‘공무상 비밀 등이 포함돼 있고 일부 비공개 재판을 했다’는 이유 등으로 현재 열람이 제한돼 있는 상태다.
데이비드슨 공작은 국정원-국세청 공조(共助)하에 이뤄졌는데, 두 기관이 파악하려 한 DJ 비자금은 크게 두 갈래였다. 기자가 정리한 기본 골격과 흐름은 대강 아래와 같다.
〈■ 국정원, 한 교포로부터 DJ 미국 비자금 중 일부가 중국을 거쳐 북한으로 유입되려 한다는 첩보 입수 → 국정원, 관련 정보 수집
■ 국정원, 미국 내 DJ 비자금의 구체적인 규모 파악하기 위해 국세청에 협조 요청 → 국세청, 미국 국세청(IRS) 직원을 국정원에 소개 → 국정원, IRS 직원을 비자금 정보 입수하는 해외정보원으로 활용〉
재미있는 사실은 이 재판 기록에 이희호 여사를 비롯해 김홍업, 김홍걸씨 등 DJ 일가(一家)가 거의 다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는 DJ 비자금 의혹이 DJ라는 한 개인에게만 국한돼 있지 않고, 가족 간에 얽혀 있음을 보여준다. DJ 측 입장에서 보면 국정원이 DJ 일가를 ‘뒷조사’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이현동-박윤준의 재판 기록은 한 편의 첩보영화를 방불케 한다. ‘공작’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등장 인물도 20여 명이나 된다. 핵심 인물은 이현동, 박윤준, 최종흡, 김승연, 그리고 원세훈(구속) 전 국정원장이다. 간단히 정리하면 ‘국세청팀’(이현동, 박윤준)과 ‘국정원팀’(원세훈, 최종흡, 김승연)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 같은 사전 정보를 토대로 지금부터 데이비드슨 공작이 숨 가쁘게 이뤄진 2010~2012년으로 시곗바늘을 돌려보자.
김홍걸 관련 ‘1억 달러’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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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12일 오전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이현동 전 국세청장이 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고 있다. 이 전 청장은 이명박 정부 시절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뒷조사 명목으로 대북공작금을 수수한 혐의를 받았다. 현재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석방된 상태이다. 사진=조선DB |
〈2010년 상반기 해외정보국 ○○○ 정보관 ○○○의 보고다. 한국계 미국인 T씨의 보고 내용인데, 미국 내 DJ 비자금이 서부에 6억 달러(또 다른 재판 기록엔 ‘6억5000만 달러’로 적시), 동부에 7억 달러가 있다. 동부는 ㄱ 회장, 서부는 ㄴ씨가 관리한다. ㄷ 기업 전 회장 ㄹ씨가 함께 인출해야 출금이 가능하다. 그중 1억 달러가 DJ의 삼남(三男) 김홍걸이 운영하는 중국 북경 등 3개 회사를 거쳐 북한에 있는 평양과기대로 송금되려 한다.〉
위 첩보 내용을 요약하면 미국에 13억 달러가량의 DJ 비자금이 미국 동·서부에 분산 예치돼 있고, 이를 관리하는 관리자가 있다는 것이다. 비자금 관리자로 지목된 이들은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국내 유수의 기업가들이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건 DJ의 삼남 김홍걸(현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상임의장)씨 관련 대목이다. 1억 달러가 ‘김씨가 운영하는 회사를 통해 북한 평양과기대로 흘러 들어가려 한 정황이 있다’는 요지의 기술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위 기록은 2018년 11월 23일 박윤준 전 차장 2차 공판 당시, 김승연 전 국장에 대한 변호인 반대 신문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박윤준 3차 공판(2018년 12월 12일)에서는 좀 더 구체적인 몇몇 인물이 언급되기도 했다. DJ 비자금의 ‘최초 제보자’라고 할 수 있는 T씨를 비롯해 김홍걸씨, 김씨와 연관 있는 회사로 추정되는 ○○○○회사의 대표 손○○, 비자금 관리책으로 의심되는 재중(在中) 박○○ 및 뒤에 언급할 J씨 등이다.
‘J씨가 이희호 여사에게 기부를 건의했다’는 첩보
국정원 첩보 중 이희호 여사가 언급된 부분을 살펴보자. 2018년 12월 12일 박윤준 3차 공판에는 김승연 국장과 함께 데이비드슨 공작에 관여한 국정원 처장 이○○씨가 출석했다. 이날 변호인 측 반대 신문의 문답 요지다.
〈- 박윤준 측 변호인: 첩보 내용에는 ‘평양과기대의 J씨가 이희호 여사에게 평양과기대에 기부를 건의했다. 재미교포 K(평양과기대 관계자)도 여기에 관여돼 있다’ 이런 내용도 있었나.
- 이○○: 있었던 것 같다.
- 박윤준 측 변호인: K라는 사람은…2중, 3중 ○○으로 의심되는 자였는데.
- 이○○: 네.
- 박윤준 측 변호인: J는 미국 내 비자금 총괄자였나.
- 이○○: 첩보에 따르면 그렇다.
- 박윤준 측 변호인: 평양과기대는 2010년 개교했는데, 자금이 부족해서 개교가 늦어졌다는데.
- 이○○: 잘 모른다.
- 박윤준 측 변호인: 증인은 ‘K는 미주 지역 ○○○재단을 통해 미국 내 자금을 중국으로 빼돌리기 위해 중국 북경·심양·청도에 소재한 3개의 월드트레이드센터(WTC)를 활용했다는 사실이 있다’고 증언했다.
- 이○○: (그렇게) 예측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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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20일 북한의 평양과학기술대학의 교수진과 학부생들이 교정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있다. 국정원은 ‘DJ 비자금으로 추정되는 1억 달러가 평양과기대로 유입되려 한다’는 정황을 포착했다. 사진=뉴시스 |
〈평양과기대는 북한의 경제개발과 국제화에 도움이 될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함으로써 남북 화해와 협력의 기반을 다진다는 의미에서 출발했지만, 기획 단계에서부터 순탄치 않았습니다. 예산이 초과 투입되면서 자금 부족으로 몇 차례 공사가 중단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공교롭게도 평양과기대가 재정난에 처한 시기와, 문제의 1억 달러 첩보를 국정원이 입수한 시기는 겹친다. 그런 관점에서 평양과기대의 ‘재정난’과 이희호 여사를 통해 평양과기대에 기부 의사를 권유했다는 첩보에는 어떤 연관성이 존재하는지 궁금증이 인다. 참고로 국정원의 첩보와 상기 문답의 맥락 등을 종합했을 때, J씨가 이희호 여사에게 기부를 건의했다는 돈의 액수는 1억 달러로 짐작된다.
문제의 J씨와 앞의 문답에 등장하는 평양과기대 관계자 K씨는 2009년 12월 모 기업의 사외이사로 영입된 적이 있다. 당시 이 기업이 공시한 자료를 확인한 결과, J씨는 고려대를 졸업하고 중국 칭화대(淸華大) 석좌교수를 지낸 것으로 되어 있다.
그 무렵 이 기업은 대북 사업에 나설 채비를 하고 있었다. 대북 사업을 체계화하고 구체화하기 위해 대북 관련 전문가를 영입했다고 밝혔다. 그 적임자로 두 사람을 택한 것이다. 그보다 두 달 앞선 10월께 이 기업은 K씨가 주도하는 평양과기대와 손잡고 지하자원 개발을 위한 계약을 체결했다. 비슷한 시기에 한 창업투자회사와 1000억원 규모의 자원개발 펀드를 조성한다는 양해각서도 체결했다. 당시 이 기업은 “국내 최초의 북한 자원 전문 펀드가 된다”는 식으로 홍보했다.
김홍걸 관련 1억 달러 “對北 관련성 있다”
평양과기대와 대북 사업에 나선 이 기업의 끝은 그리 좋지 못했다. 2011년 주가조작 사건에 연루돼 회사 대표 등이 구속됐고, 이후 상장(上場) 폐지됐다. 이처럼 국정원 첩보망에 포착된 J씨와 K씨가 모 기업을 매개로 북한과 접점이 닿아 있다는 점도 유심히 지켜볼 단서 중 하나다. 당초 T씨의 첩보에 의하면, ‘비자금 총괄 관리자’는 전직 기업 회장이었다. 하지만 국정원 이○○ 처장이 총괄 관리자를 ‘J씨’라고 지목한 것으로 보아, 국정원은 해외정보국이 입수한 첩보를 기반으로 비자금 관련 인사들의 추가 정보도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첩보는 ‘가치’가 없는 그저 뜬소문에 불과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이현동 전 청장 1심 재판부에서 찾을 수 있다. 1심 재판부는 문제의 1억 달러에 대해 ‘대북 관련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지난해 8월 8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부장판사 조의연)는 이 전 청장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지난해 한 일간지는 이런 사실을 전하며 “2010년 상반기 국정원 해외공작국 정보관이 ‘미국 내 DJ 비자금 중 1억 달러가 DJ 셋째 아들 홍걸씨가 운영하는 중국 회사 등을 통해 평양과기대에 송금되려 한다’는 첩보를 입수했다는 변호인 측 증거가 근거로 작용했다”고 보도했다.
이제 문제의 1억 달러가 북한으로 흘러 들어갔는지 여부를 확인할 차례다. 기자는 지난해 말 한국에 들어온 평양과기대 관계자 K씨를 만난 적이 있다. 그에게 문제의 1억 달러에 대해 물었을 때, 그는 ‘사실무근’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지난 2월 13일 K씨에게 전화를 걸어 재판 기록을 토대로 취재한 내용을 다시 물었다. K씨는 자신뿐 아니라 J씨도 이희호-김홍걸 모자(母子)와 친분이 있다고 털어놨다. K씨와 나눈 문답의 요지다.
〈- 기자: J씨란 사람에 대해 잘 아나.
- K씨: 잘 아는 정도가 아니라 옛날에 같이 일하기도 했다.
- 기자: 이 사람 직업이 뭔가. 평양과기대 교수인가.
- K씨: 아니다. 평양과기대 소속은 아니고 J씨는 평양과기대 설립 당시 도움을 줬던 이다.
- 기자: K씨가 DJ 일가와 친하다는 건 많은 사람이 안다. J씨도 친한가.
- K씨: 그는 DJ와 가족같이 지내는 사람이다.
- 기자: 이희호 여사와 김홍걸씨하고도 친한가.
- K씨: 아주 가까이 지낸다.
- 기자: J씨가 이희호 여사한테 평양과기대에 기부를 요청한 적이 있었나.
- K씨: DJ하고 가깝긴 하지만… (기부와 관련된) 그런 얘기를 많이 듣긴 했는데… 그 얘기와 관련해 김홍걸씨와 만나서 얘기하려고 했다. 나는 김홍걸로부터 단돈 10원도 받은 게 없다. 그리고 그때 김홍걸씨는 미국에 있었던 걸로 안다.
- 기자: 김홍걸씨는 미국에서 뭘 했나.
- K씨: 그냥 있었지. 자기 아버지 이름이 있으니까… 미국에선 한 게 없는 걸로 안다. 김홍걸씨는 J씨와 같이 일한 적이 있지만, 나와 홍걸씨는 같이 일한 게 없다.
- 기자: J씨하고 모 회사의 사외이사 한 적 있지 않나?
- K씨: 그런 적은 있지만 관련 일을 한 적은 없다.
- 기자: 같이 사외이사에 등재됐던 J씨는 지금 뭐 하고 있나.
- K씨: 미국에 있는데 뭐 하는지 모른다.〉
K씨에 따르면 2009~2010년경 이미 ‘1억 달러 기부설’ 얘기가 나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 김홍걸씨는 K씨에게 매우 미안해했다고 한다. 사실이 아닌데 K씨를 곤란에 처하게 했다는 이유에서다. 그 얘기의 출처에 대해 K씨는 “J씨가…”라고 말을 꺼내려다가 중단했다. ‘사이가 안 좋으냐’고 했더니 “(J씨와는) 최근엔 잘 만나지 않는다”고 했다. J씨의 연락처를 묻자 “모른다”고도 했다. 재판에서 거론된 월드트레이드센터에 대해서도 물었다. 관련 문답이다.
“J씨가 ‘월드트레이드센터 잘되면 평양과기대 도와주겠다’고 말한 적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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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조선》이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측으로 발송한 질의서. 민화협은 이 질의에 사실상 답변을 거부했다. |
- K씨: 투자했다가 손해봤다. 다른 말로 하자면 사기를 당한 것이다. 그때 중국에 월드트레이드센터가 베이징에만 있었는데 심양에도 세우려고 투자를 했는데, 결국은 완전히 잘못됐다.
- 기자: 누구한테 사기를 당했다는 얘긴가. 국내 인사인가.
- K씨: 미국하고 국내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다. 누군지는 말할 수 없다. 이미 지난 일 가지고….
- 기자: 소송 제기했나.
- K씨: 난 소송 제기 안 한다.
- 기자: J씨는 월드트레이드센터에 관여한 게 없나.
- K씨: 그 사람은 수동적으로 관여했다. J씨는 김모 목사(모 교회 원로목사)라는 분과 관련이 있었고, J씨가 ‘월드트레이드센터 사업이 잘되면 그 돈으로 평양과기대를 도와주겠다’는 뜻을 보인 적은 있다.
- 기자: 월드트레이드센터 사업에 필요한 돈의 출처는 어디였나.
- K씨: 그건 모른다. 김 목사인 것 같기도 하고….
- 기자: 처음 (K씨에게) 월드트레이드센터 투자를 권유한 사람은 누구인가, J씨인가.
- K씨: 기억이 잘 안 난다. 다만 내가 심양시 관계자들을 비롯해 중국 정부 인사들을 J씨한테 소개해 줬다.
- 기자: 김홍걸씨도 여기에 투자했나.
- K씨: 김홍걸이는 별로 없고….
- 기자: 별로라는 건 뭔가.
- K씨: 안 했다는 거지. 모른다. 심양엔 한 번도 안 나타났다.
- 기자: 이희호 여사는.
- K씨: 없다.〉
《월간조선》은 지난 2월 8일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에 질문지를 발송해, 문제의 13억 달러를 비롯해 ‘1억 달러 평양과기대 유입설’에 대해 물었다. 민화협 측으로부터 “질문에 대해 답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전달받았다. ‘김홍걸 의장의 뜻이냐’는 질문에 민화협 관계자는 “(민화협) 사무처의 의견이다. 이 건으로 전화를 안 했으면 좋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최종흡 ‘1억 달러 첩보는 신뢰도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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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비자금을 뒷조사한 혐의로 지난해 1월 31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구속영장 실질심사에 출석한 최종흡 전 국정원 3차장. 사진=뉴시스 |
〈원장(원세훈)이 불러서 갔더니 (DJ의) 미국 비자금이 있다고 하더라. 이를 추적해 실체를 파악하고, 대북 유입 가능성도 있다고 하니 각별히 보안에도 유의하라고 지시했다. 배경이나 그런 건 설명이 없었다. 해외정보국에 전화해 ‘이런 전문(電文)이 있다고 하는데 가져와 봐’라고 했던 것 같다. 그걸 보고 지시 배경을 짐작했을 뿐이다. 그때 (원장이) 지시할 때에 ‘이현동 국세청 차장을 만나보라’는 말을 했던 것 같다. 원장 지시니까 차일피일 미룰 수 없어 하루 이틀 내에 (이현동 차장을) 만나러 갔다. 이현동 차장하고 구체적으로 이야기한 기억은 없고 차장이 당시 박윤준 국장을 소개해줬던 거 같다.〉
‘전문’에는 문제의 13억 달러, 그리고 그중 1억 달러가 북한으로 유입되려 한다는 정보가 담겨 있는 걸로 추정된다. 1억 달러 북한 유입설을 접한 최종흡 전 차장은 ‘내가 원장이라도 용납할 수 없었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 그만큼 그냥 넘기기 어려운 첩보였다는 얘기다. 최 전 차장은 ‘이 첩보는 신뢰도가 가장 높았기 때문에 ○○○ 정보관에게 물증을 확보하라고 지시했다’는 취지의 말도 했다.
김승연 전 국장도 ‘비자금 추적은 두 가지 방향으로 이뤄졌다’며 ‘하나는 미국 내 비자금 추적이었고, 또 하나는 중국으로 유출돼 북한으로 넘어가는 동향이었다. 첫 번째는 어려운 듯 보였지만 두 번째 유출은 계속 있었다’는 취지의 주장을 했다. 김 전 국장도 1억 달러 북한 유입설이 근거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국정원에서 해외 정보 업무를 담당한 전직 관계자도 “정보관을 통해 들어온 해외 첩보는 그것이 신빙성이 있든 없든 반드시 조사하는 게 관례”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만약 국정원이 손 놓고 있다가 문제가 크게 불거지면 나중에 원(院)이 모든 책임을 뒤집어쓴다”며 “첩보를 입수하고도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그게 정보기관으로서 할 짓이냐”고 반문했다.
이와 관련해 원세훈 전 원장은 최종흡 차장에게 ‘이현동 차장을 만나보라고 한 적은 있지만 DJ 비자금을 조사하라고 지시한 적은 없다’는 취지의 진술을 했다. 재판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원 전 원장은 ‘데이비드슨 사업’에 대해 ‘기억이 없다’ ‘모른다’는 식으로 진술한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원 전 원장의 진술과는 별개로 국정원은, 이 같은 첩보를 바탕으로 국세청과 협조 체제를 구축했다. 최종흡 차장은 ‘이현동 차장을 만났고, 그 자리에서 박윤준 국장을 소개받았나’라는 질문에 ‘같이 본 거 같다. 그때 DJ 비자금 이야기가 있었다’는 요지로 답했다. 그 당시 박윤준씨는 국세청 국제조세관리관(국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美 국세청 직원 섭외한 국정원·국세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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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은 국세청으로부터 소개받은 미국 IRS 직원 C씨에게 DJ 비자금 관련 정보를 입수했다. 하지만 C씨의 정보는 사실 확인이 불가능한, 다소 빈약한 정보였던 걸로 추정된다. 사진은 미국 IRS 청사. 사진=위키피디아 |
〈이현동 차장이 당시 구체적으로 나(최종흡)한테 설명해준 건 없었다. 그러곤 박윤준 국장 방으로 옮겼는데, 거기서 (박윤준 국장이) IRS 요원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저한테 개인적인 의견을 일체 물어보지 않았고, 이 일을 하는데 (C씨가) 소위 적임자라는 식으로 얘기를 했다.〉
IRS란 미국 국세청을 말한다. IRS에는 한국계 미국인 C씨가 근무하고 있었다. 국세청은 C씨가 DJ 비자금 의혹을 조사할 수 있는 적임자라고 판단해, 최종흡 전 차장에게 소개한 것으로 짐작된다. C씨가 국정원의 ‘해외정보원’이 된 셈이다. 참고로 C씨는 박윤준씨가 미국에서 주재원으로 근무할 때 서로 알던 사이다.
최 전 차장의 진술에 따르면, 국세청 측에서 DJ 비자금을 조사하기 위해선 C씨에게 활동비를 지급해야 한다는 식의 요구를 했다고 한다. 국세청 측은 ‘저쪽(C씨)에서 얼마를 언제 요구하면 알려줄 테니까 그걸 (C씨의) 처제에게 지급을 하라’는 식의 얘기를 최 전 차장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C씨에게 가야 할 활동비는 처제뿐 아니라 그의 장모에게도 전달됐다. 이렇게 ‘제3자’에게 돈을 건넨 이유는 C씨 본인의 요청 때문이었다고 한다. 김승연 전 국장은 해외 공작 등을 벌일 때 ‘처제가 아니라 기상천외한 사람한테 (돈을) 주는 경우도 많다. 이런 부분은 전혀 이상한 게 아니다’라는 요지의 주장을 하기도 했다.
김홍업 관련 정보는 무엇?
국정원은 국세청의 소개로 알게 된 C씨에게 활동비를 건네며 문제의 비자금 조사에 착수했다. 그럼 C씨는 어떤 정보를 구했을까? T씨가 김홍걸씨에 관한 첩보를 국정원에 제공했다면, C씨는 김홍걸씨의 바로 위 형이자 DJ 차남 김홍업씨 관련 정보를 획득한 것으로 보인다. 김승연 전 국장이 말한 비자금 추적의 ‘두 가지 방향 중 하나’가 바로 김홍업씨 관련 첩보인 셈이다. 2018년 6월 18일 이현동 6차 공판에서 최종흡 전 차장이 자신의 변호인과 나눈 문답 내용 요지의 일부다.
〈- 최종흡 측 변호인: ‘2004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차남 김홍업의 측근 ○○○ 등 3명의 뉴욕 플라자 건물 매수가 김대중 비자금과 관련돼 있고, 그 돈의 일부가 자금 세탁됐다는 혐의로 미 국세청에 고발됐다’라는 게 해외정보원(C씨)의 첩보라는 건데, 이 내용은 이미 2006년부터 인터넷에 유포되고 있는 내용이다. 다만 국정원은 이게 사실인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국세청으로부터 해외정보원을 소개받은 거 아닌가.
- 최종흡: 우리가 그 사건을 확인해 달라는 게 아니었고, 그분(C씨)이 우리가 (미국) 국세청에 비자금을 알아봐 달라 해 시작한 것이 공교롭게도 그 건이었던 거 같다. 상가(商家)를 샀는데, 매도인이 매수인 3명을 고발한 곳이 국세청이었고, 그걸 우리한테 준 거 같다.〉
‘DJ 비자금’ 관리자로 소문난 L씨, 잇따라 被訴
요약하면 미국 내 상가 구입에 김홍업씨 측근이 관련돼 있다는 얘기였다. 김홍업씨 관련 의혹은 2006년 세상에 알려졌다. 요지는 미국 내 김홍업씨 측근들의 부탁을 받은 양모(당시 50세・뉴욕 거주)씨가 ‘007가방’으로 돈을 날랐다는 것이다. 양씨가 나른 돈이 바로 DJ 비자금과 관련 있다는 주장이었다. 양씨의 폭로는 초반엔 언론의 조명을 받았지만, 이후 잠잠해졌다. 이를 뒷받침할 물증이 없기 때문이었다. 결국 사실 확인이 이뤄지지 않은 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김홍걸씨와 DJ 비자금 관련성도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았다. 김승연 전 국장이 이 건에 대해 ‘어렵다’고 말한 것도, 그 정황이 뚜렷이 드러난 게 없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007돈가방설(說)’이 한창 떠들썩할 때 나온 인물 중에 재미교포 L씨가 있었다. 한때 뉴욕 교포 사회에서 김홍업씨와 친분이 두텁다는 소문이 나 있었다. 그 때문인지 L씨가 ‘DJ 비자금 관리자’란 풍설도 돌았다. 2006년 당시, L씨는 미국 내에 거액의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국정원은 그런 L씨에게 주목했다. ‘DJ 비자금 관리자’라는 소문이 난 L씨를 조사할 경우, 비자금의 꼬리를 잡을 수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
최종흡 전 차장 문답에 등장한 ‘뉴욕 플라자 상가’도 2005년 9월, L씨가 구입한 것이다. 당시 그는 미화 2000만 달러(한화 약 200억원)를 주고 이 상가를 구입했는데, 돈의 출처를 둘러싸고 여러 의혹이 나돌았다. 원래 L씨는 그만한 재력(財力)이 없었다는 게 교포 사회의 평가였다.
뉴욕의 ‘부동산 갑부’ 위치에 오른 L씨는 불과 4~5년 만에 궁지에 몰렸다. 잇따른 송사(訟事)에 휘말린 것이다. 한 재미(在美) 한국 언론 보도를 정리하면 소송 경위는 대략 이러하다.
2009년 5월, 미국 뉴욕의 한 교포 사업가는 L씨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이 사업가가 법원에 제출한 소송장에 따르면, 그는 ‘L씨 등에게 600여만 달러를 빌려줬지만 이를 돌려받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근거로는 J씨는 L씨에게 발행한 약속어음 등을 제시했다. 1년여간의 소송 끝에 L씨는 패소했다.
2010년 8월 모 은행도 L씨를 겨냥한 소송전을 벌였다. 뉴욕주 뉴욕카운티지방법원에 해당 은행이 L씨 등을 상대로 제출한 소송 자료에는 ▲모기지(Mortgage・부동산 담보 대출) 원금 및 이자 479만3000여 달러 ▲신용대출 원금 및 이자 21만2000여 달러 등 총 500만6500달러를 L씨 부부가 지급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은행은 2007년 12월 20일 L씨 부부 소유의 법인에 456만 달러를 대출했다. L씨 부부의 법인은 같은 날 뉴저지주의 한 부동산을 매입했다. 이 456만 달러는 부동산 매입가(520만2000달러)의 약 88%에 달하는 액수였다. 이 은행이 모기지로 지급하는 통상적인 수준(70%)보다 높은 금액이라고 한다.
국정원, L씨 소송과 관련한 공소장 요구
이 은행은 건물가의 88%를 대출한 약 9개월 뒤, 다시 20만 달러를 L씨 부부 법인에 신용 대출했다. 결국 L씨 부부의 법인 차원에서 대출받은 전체 금액은 476만 달러로, 뉴저지 건물 매입가의 약 91.5%에 달했다. 이 법인은 2009년 3월 이후, 돌연 ‘디폴트(Default・채무 불이행)’를 선언했다. L씨 부부가 디폴트 선언 전까지 은행에 갚은 원금은 9만 달러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국정원은 L씨가 자신이 휘말린 소송과 관련한 공소장 등을 구해줄 것을 박윤준 국장에게 부탁한 것으로, 재판 기록에 적시돼 있다. 2018년 5월 18일 이현동 전 청장 2차 공판에서 김승연 전 대북공작국장이 검찰 측과 나눈 문답 내용의 요지다.
〈- 검찰: 증인은 박윤준 국장에게 ‘미국에서 ○○○○(L씨)을(를) 사기죄로 고소한 공소장을 구해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죠.
- 김승연: 네.
- 검찰: (박윤준은) ‘비공개 기소로 처리하는 바람에 공소장을 아예 구할 수 없다고 김승연에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승연은 공소장을 구해 달라고 계속했다’는데.
- 김승연: 그게 풀리면 수집해 달라고… 계속 요구한 건 맞다.〉
2018년 11월 23일 박윤준 2차 공판에서는 L씨를 둘러싼 여러 의혹에 대한 얘기도 오갔다. 김승연 전 국장이 자신의 변호인과 나눈 문답의 요지다.
〈- 변호인: ○○○○(L씨)이 기소된 후인 2012년 상반기쯤 (미국에서) 이○○(김홍걸씨 측근이라고 지목된 사람)이라는 사람에 대해 수사가 진행돼 가고 있었는데, 그 수사에서 ○○○○(L씨)이 참고인 또는 증인의 신분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비공개 처리가 됐다는 이야기를 박윤준 국장이 해외정보원(C씨)으로부터 듣고 그 사실을 증인에게 알려줬다는데.
- 김승연: 그런 기억이 있다.
- 변호인: 2012년 상반기 DJ 비자금 문제가 ‘원칙적으로 처리됐다’(‘문제없다’는 식으로 결론 났다는 의미인 듯)는 검찰 주장이 제가 볼 때는 맞지 않는 거 같은데.
- 김승연: 어느 게 맞다 틀리다기보다는, (그 당시) 그 문제가 다 끝났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 변호인: 미국에서 문제가 되는 세 사람(김홍업씨 측근)이 조성한 비자금 액수가 1억 몇 달러씩 다 합하면 3억5000만 달러가 된다는 이야기 들었나.
- 김승연: 내 기억엔 3억5500만 달러이다… 셋이 균등하게 돈을 냈는데 그중 이○○은 제가 기억하기엔 그만한 자금을 동원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었다. (한화로) 1000억원이 넘는 돈이다. (이○○은) 그런 재력가가 아니다.
- 변호인: 국정원에서 박윤준을 만난 후 그 결과를 보고한 내용이다… (이 문건에는) ‘2010년 9월 국세청 박윤준을 만나 진행 상황 확인하고 의견 조율했다’고 기재돼 있다. 여기엔 ‘확인된 비자금 조성 내역’이라고 돼 있고 ○○○○(L씨)가 문제되는 미화 1억1343만 달러…. 그중 담보 없이, 또는 담보가 있더라도 일반적인 담보 비율을 초과하는 대출을 받았다는 첩보가 있던데.
- 김승연: 네.
- 변호인: 이걸 보면 역외탈세 추적이나 비자금 추적 업무가 허황된 것은 아닌 걸로 보이는데.
- 김승연: 네.〉
위 문답을 보면, 국정원・국세청은 L씨가 피소된 상황과 더불어 그가 보유한 자금의 성격까지 일부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다. 또한 국정원이 작성한 문건에 ‘확인된 비자금 조성 내역’이란 항목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국정원이 L씨의 돈을 비자금으로 간주한 게 아닌가 하는 느낌도 준다.
검찰이 C씨에게 제공한 ‘30만 달러’를 국고 손실로 판단한 까닭
검찰은 국정원이 국세청 측의 소개로 C씨를 해외정보원으로 고용한 데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보였다. L씨 관련 내용이 인터넷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정보라는 점을 강조했다. 기자도 L씨와 관련한 소송 보도를 인터넷으로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해외정보원 자격을 얻은 C씨가 입수한 정보치고는 다소 빈약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재판 기록에 따르면, 국정원은 C씨에게 30만 달러(한화 3억4000만원)를 활동비 조로 지급한 것으로 나온다. C씨에게 거액의 돈을 주고, 누구나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정보를 취득하도록 한 건 명백한 국고 손실이라는 게 검찰 측의 입장이다.
이현동 전 청장 측 변호인은 《월간조선》과 가진 전화 통화에서 “국세청은 이 사건과 관련해 해외정보원 등에게 돈을 건넨 적이 없다. 이 전 청장은 국정원의 업무 협조에 적법하게 응했을 뿐”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최종흡 전 차장 측 변호인은 “구체적인 재판 상황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검찰이 항소함에 따라 오는 3월 이현동 전 국세청장에 대한 항소심 재판이 열린다. 최종흡 전 국정원 차장 재판도 비슷한 시기에 속개된다. 《월간조선》은 이 재판을 방청하고 그에 따른 후속 보도를 내놓을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