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취재

김종인 더민주 대표 참여 논란

국보委 人選의 막전막후

  • 글 : 권세진 월간조선 기자  sjkw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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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안사에서 권정달 정보처장 주도하에 리스트 작성… 허화평, 허삼수 등 동참
⊙ 5월 초부터 조순, 손제석 등 교수 섭외 시작… “(참여요청에) 뺑소니친 사람도 있었다”
⊙ SKY(서울·고려·연세대) 교수들 우선 시도했지만 잘 안 돼
⊙ 공무원 중에서는 영남 출신, 40대 전후 신진세력 뽑아 일방적으로 발령
⊙ 국보위 핵심 인선은 5·18 전에 완료… “5·18 등 혼란 수습 위해 비상기구 설립했다”는
    신군부 주장과 달라
지난 1월 31일 광주 5·18묘지를 찾은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대표. 5·18정신실천연합 회원들은 김 대표가 국보위에 참여했다며 참배를 저지했다.
4월 13일 총선을 앞두고 제1야당 더불어민주당의 수장인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재무분과위원 전력’이 논란이 되고 있다. 군사정권에 적극 참여한 인물이 야당을 이끌 자격이 있느냐는 것이다. 국보위 재무분과위원으로 참여했던 김종인 대표는 “부가가치세 등 세제 개선에 관심이 있어 참여했을 뿐”이라고 해명한 바 있다.
 
  이에 대해 김용갑 전 한나라당 의원은 “김종인 대표가 적극적 참여자 명단에 있었다”고 주장했고, 정대철 전 민주당 의원은 “나와 주변 사람들도 국보위 참여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했는데 정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거절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김 대표를 비난했다. 김종인 대표의 해명 내용이 국보위에 스스로 참여했음을 방증하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국보위는 1980년 5월 31일 대통령 자문기관을 명목으로 발족해 사회정화, 언론통제 등 사회 전반에 걸쳐 5개월간 활동, 제5공화국 설립의 기초가 됐던 기관이다. 국보위의 활동 내역 및 성과는 5공화국이 집권기간 내내 각종 선전을 통해 알렸고 발족 과정 역시 12·12, 5·18 검찰조서를 통해 대부분 알려졌다. 그러나 군인을 제외한 민간위원의 인선 과정과 면면은 베일에 싸여 있었다.
 
  국보위는 1980년 5월 31일 설립 선언과 함께 상임위원 및 분과위원장의 명단은 공개했으나 분과위원 84명 및 실무위원의 명단은 공개하지 않았다. 5개월의 활동이 끝나고 두 달 후 《국보위 백서》가 나온 다음에야 정확한 위원 명단이 공개됐다. 국보위 인원은 당연직과 임명직을 포함해 총 140명이며, 상임위원급 이상 52명 중 군 출신이 30명으로 57%를 차지하는 등 군 주도의 기구였다.
 
  국보위 참여 인물들은 대부분 5공의 헌법을 만드는 국가보위입법회의에 참여해 5공화국의 설립을 주도했고, 그들의 권력이 서슬 퍼런 시절에는 국보위 참여자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1983년 9월, 국보위 구성원의 학력과 이력, 고향, 국보위 해체 후 현황 등 단순 신상을 ‘제5공화국의 권력 엘리트’라는 제하에 기사화했던 《동아일보》 기자가 당국에 호출돼 ‘국가 기밀을 공개하는 이적 행위’로 경고를 당하고 청와대 출입 금지를 당했을 정도였다.
 
  그동안 김종인 위원장 외에도 이완구 전 총리, 한승수 전 총리, 이경숙 전 이명박 대통령직 인수위원장 등이 국가 요직을 맡을 당시 국보위 참여 전력 때문에 논란을 빚은 바 있다. 이들은 대부분 “어쩔 수 없이 참여했다”거나 “그저 참석만 하거나 실무를 맡는 정도였다”는 해명을 내놓았다. 그 밖에 참여한 사람들 역시 “이유도 모른 채 제안을 받았고 당시 사회분위기상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각 인물의 상황은 조금씩 다르다. 이완구 전 총리는 당시 만 30세의 공무원으로 실무위원 파견명령을 받고 다녀온 것이 전부이며, 이경숙 전 인수위원장은 국보위에는 참여하지 않았고 국보위 해산 이후 설립된 국가보위입법회의에 여성 정치학자 몫으로 참여했다. 이경숙 전 위원장은 “입법 과정에 여성 정치학자가 필요해서 이대교수 한 명, 숙대교수 한 명이 참여해야 한다고 해 어쩔 수 없이 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승수 전 총리와 김종인 대표는 “어쩔 수 없이 참여했다”는 해명 대신 각각 “당시 외환위기를 살리기 위해 참여했다” “부가가치세 폐지를 막기 위해 참여했다”고 밝혀 스스로 참여했음을 사실상 인정했다.
 
  당시 공직 및 학계에 있었던 인물들 일부는 “국보위에 갔다 오면 화려한 앞날이 펼쳐질 것이라 예상하고 스스로 가겠다는 사람, 가려고 연줄을 찾아다니는 사람도 많았다”고 회고한다. 국보위 위원 인선은 실제로 누가 했으며 어떤 사람들이 갔던 것일까.
 
 
  엇갈리는 진술들
 
12·12와 국보위 설립의 주역인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보안사 핵심참모들. 왼쪽부터 이학봉 수사국장, 허화평 비서실장, 장도영 보안처장, 전두환 사령관, 권정달 정보처장, 허삼수 인사처장.
  국보위원 인선 과정을 캐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민간인 위원들 중 상당수가 사망했고, 당시 인선과 관련된 실권자들의 진술은 다소 엇갈린다. 기억력의 한계도 있겠지만 본인 위주의 기억 왜곡도 있고, 12·12와 5·18 관련 검찰 조사 등 사건을 겪으며 여러 이유로 사실과 다소 다른 증언을 했다는 일각의 주장도 있다.
 
  실제로 전두환·허화평·허삼수·허문도·이학봉·권정달 등 국보위 설립 주역들의 검찰조서와 인터뷰에는 “OOO이 잘못 알고 있다” “OOO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 허삼수 전 사정수석은 “국보위는 5·17 계엄확대 이후 급조된 것”이라고 주장했고, 전두환 전 대통령은 “허삼수가 잘 모르고 그렇게 말한 것”이라고 말했다.
 
  국보위 인선과 관련해서도 권정달 전 처장은 검찰조사에서 “나와 허화평, 허문도, 이학봉 등이 모처 회의실에서 함께 논의해서 했다”고 했지만 허화평 전 정무수석은 《월간조선》 인터뷰를 통해 “그런 회의실은 있지도 않았고, 권정달이 새빨간 거짓말을 했다”고 주장했고, 이학봉 전 민정수석은 사망(2014년 5월)하기 몇 개월 전 기자와 만나 “허화평이 하고 다니는 얘기에 사실과 다른 점들이 많아 추후 자세히 밝히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구체적인 위원 섭외 과정도 마찬가지다. 한용원 당시 보안사 정보1과장은 “허화평이 5월 초부터 비상대책위(국보위)를 만들겠다며 서울대 조순 교수 등을 섭외하라고 했다”고 했고, 허화평 전 수석은 “한용원이 장군 진급을 못 하게 된 이후 사실과 다른 악의적인 주장을 했다”고 주장하는 등 엇갈리는 진술이 많다.
 
  실제로 수많은 5공 관련 사료(史料)들은 화자(話者)에 따라 사실관계가 다르게 서술돼 있는 것이 보통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전기 《황강에서 북악까지》를 집필한 후 5공 창설 주역과 그 주변 인물 200여 명을 1년여에 걸쳐 직접 인터뷰해 《다큐멘터리 12·12, 5·18의 진상》(전 2권)을 출간했던 소설가 천금성씨는 “당시에는 나만큼 많은 관계자를 직접 만난 사람은 없다고 믿고 가장 객관적인 사실을 알고 있다고 자부하며 집필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들의 언변에 말려들어 사고가 정지됐던 것 같다”며 “군에 대해 잘 모르는 나에게 진실을 왜곡하고 허위증언을 했던 사람이 많아 책의 내용이 사실과 다른 점도 꽤 있을 것”이라고 인정했다.
 
  따라서 《월간조선》은 국내 존재하는 5공 설립 관련 거의 모든 사료와 재판기록, 검찰조서, 인터뷰, 회고록, 방송자료 등을 모두 모아 분석, 국보위 인선 과정을 재구성했다.
 
 
  비상기구 설치 논의와 인선은 5월 초부터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1980년 5월 31일 국보위 현판식을 마치고 국보위 사무실을 나서고 있다.
  국보위 인선 시기는 국보위의 실체가 언제부터 나타났는지와 맥을 나란히 한다. 대외적으로 1980년 5월 31일 설립된 국보위를 사실상 누가 언제부터 만들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관련자들의 증언이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5공 정부 입장에서 서술한 사료들을 보자. 국보위가 발간한 《국보위 백서》와 문화공보부가 발간한 《국보위는 왜 설치되었는가》, 경향신문사가 발간한 《실록 제5공화국》, 천금성 작가의 《12·12, 5·18의 진상》 등이 서술한 내용이다.
 
  신군부는 10·26 이후 사회혼란이 점차 커지는 가운데 ▲1980년 5월 4일 신군부 수뇌부가 모여 시국수습방안을 논의했고 ▲5월 16일 주영복 국방장관이 주재한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국회의 기능을 대신하는 비상기구 설치를 제안했고 지휘관들은 과반수로 동의했으며 ▲이에 따라 보안사에서 비상기구 구성 초안을 작성했고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로 5·18 등 사회 혼란이 이어지자 전두환 중장 등이 대통령과 국무총리 등에 긴급조치권을 발동해 비상기구를 설치할 필요성을 설명하고 설득하려 했으며 ▲최규하 대통령이 긴급조치권 발동을 반대하자 국보위 설치조항을 대통령령으로 전환했고 ▲5월 27일 국무회의에서 국보위 설치를 의결했고 ▲이후 3일간 숨가쁜 인선을 걸쳐 31일에 명단을 발표했다.
 
  요약하자면 5월 16일 전군지휘관회의에서 비상기구 설치가 처음으로 제안됐고 5·18이라는 사건으로 군 주도 비상기구의 필요성이 급물살을 탔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5월 초부터, 즉 신군부가 ‘극복해야 할 혼란’이라고 주장한 5·18이라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신군부가 군이 주도하고 민간인이 참여하는 비상기구 구성에 착수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증언에서 나타난다. 또 비상기구 설립 논의와 거의 동시에 인선에 대한 논의도 이뤄졌다.
 
  권정달 전 정보처장은 검찰 진술에서 “내가 비상기구를 생각한 것은 4·19 전후였던 것 같다”며 “5월 초순경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지시에 따라 국가 보위 비상기구 설치를 포함한 ‘시국수습방안’을 수립하고 5월 12일 전 사령관에게 보고했다”고 말했다. 그는 “전 사령관의 지시 이후 허화평·허삼수·이학봉·정도영과 허화평 비서실장실 옆 회의실에서 시국수습방안에 대해 집중논의했다”고 말했다.
 
  또 “시국수습방안 수립단계에서 상임위원장 전두환을 비롯해 상임위 분과위원장은 누구로 할 것인지는 이미 방침이 정해져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 밖에도 여러 정황 및 증언으로 볼 때 신군부가 군이 주도하는 비상기구(국보위) 설립과 인선에 구체적으로 착수한 것은 5월 초인 것으로 드러난다.
 
  이와 관련한 증거로 당시 장교들의 진술이 있다. 한용원 당시 보안사 정보1과장은 “5월 초순경 허화평 비서실장으로부터 ‘시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비상기구(국보위)를 만들 계획인데 일할 사람으로 경제 분야 서울대 조순 교수, 정치 분야 서울대 손제석 교수에게 일할 생각이 있는지 확인해 보라’고 했다”고 말했다. 두 교수를 접촉한 한 과장은 며칠 후 허 실장에게 “조순은 거절했고, 손제석은 승낙했다”고 보고했다.
 
  당시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에서 장군인사장교로 근무했던 홍인호 예비역 중령의 증언도 이와 비슷하다. “국보위 상임위원과 분과위원 중 현역 군인은 육본 인사참모부에서 선정했는데, 5월 초부터 김한홍 인사참모부장이 전두환 사령관으로부터 건네받은 이름을 실무자인 내가 군인사 기록카드를 통해 확인하고 명단을 작성했다”며 “국보위 인선은 5·18 전에 다 끝났다”고 주장했다.
 
  검찰 조사 결과에 따르면 5월 17일 기준으로 국보위 상임위원회 운영위원장 이기백, 운영위 간사 최평욱이 내정돼 있었던 것은 명백한 사실인 것으로 드러났다. 또 상임위원장과 분과위원도 이때 거의 모두 결정돼 있었다.
 

 
  어떤 인물을 어떻게 선정했나
 
12·12 및 5·18 항소심 선고공판에 나온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국보위는 상임위원회가 실질적인 기구였다. 상임위원회 분과위원 총 84명을 직업별로 분류하면 영관급 장교가 29명, 행정부처 국장급 공무원이 29명, 검사 6명, 판사 3명, 교수 12명, 청와대 비서관 2명, 기타 3명이었다. 1990년대 공개된 미 외교부 비밀문서에 따르면 당시 주한미대사였던 윌리엄 글라이스틴은 본국에 “국보위 민간위원은 대부분 능력 있는 기술관료나 행정관료, 학자이며 애국심이 있고 정권보다는 국가에 충성을 하는 사람들. 대체로 서울과 경상도 출신인 것이 특징”이라고 보고했다.
 
  군인 출신 위원들은 육사-영남 출신인 하나회를 중심으로 구성됐지만, 민간위원 인선 기준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국보위 요원 중 전두환 상임위원장을 제외하면 가장 먼저 인선된 이기백 운영위원장과 최평욱 운영위 간사는 국보위 인적 구성을 위해 총무처와 보안사에서 보내온 명단을 검토해 절차적으로 임명하는 역할을 했을 뿐, 본인들이 인사에 직접 관여는 하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다.
 
  5공 관계자들의 증언을 모아보면 “민간인 위원 인선은 보안사에서 담당했고, 결정은 거의 권정달 정보처장이 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최종 결재는 전두환 사령관이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권정달 처장이 했는데, 이는 보안사 내에서도 허삼수 인사처장보다는 권정달 정보처장의 입김이 더 거셌다는 것이다. 12·12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권 전 처장이 인사상 실권을 갖게 된 이유는 그가 정보처장이라는 직책 때문에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지시에 따라 국보위 구성의 초안을 작성했기 때문이다.
 
  권정달 전 처장은 검찰 진술에서 “국보위 임명직(장군) 10명은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김용휴 총무처 장관이 협의해 결정했고, 상임위 산하 민간인은 김용휴 장관이 보안사 측과 협의해 관료와 대학교수를 중심으로 선정했으며, 군인은 보안사 존안자료를 중심으로 보안사에서 선별했다”고 밝히고 있다. 또 다른 인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가장 가까이 있었던 허화평 비서실장이 주요 인물을 먼저 제안하고, 전체적으로는 권정달 처장이 틀을 짰다.
 
  보안사 간부들과 김용휴 장관 모두 육사 출신 군인이었던 만큼 대학교수의 경우 군부와 접점이 있는 교수들이 가장 먼저 물망에 올랐다고 한다. 최초 섭외 대상이 육군사관학교 교수였던 이기백 서강대 교수, 육사에서 강의를 한 바 있는 조순 서울대 교수 등이었다.
 
  이후 보안사는 SKY(서울·고려·연세대) 등 명문대 정치학과 및 경제학과 교수를 중심으로 인선 작업에 나선다. 군부 내에서 학계를 잘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고, 주변인의 추천에 의존했다. 경제 분야는 박봉환 재무부 차관, 언론과 문공 분야는 허문도 중앙정보부장 비서실장이 상당수를 추천했다. 박봉환 전 차관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보안사령관에 막 임명됐을 당시에 지인의 소개를 통해 전 사령관의 사적인 경제교사 역할을 했다. 전 사령관은 박 전 차관이 국보위에서 일하길 바랐다. 그러나 그는 재무부로 돌아가고 싶다며 경제기획원에 있던 김재익, 이계성 두 명을 추천하고 국보위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가 국보위에 불참한 것은 고향이 광주였던 것도 무관치 않다. 허문도 실장은 대구 출신 문공부 공보국장 허만일, 고향은 경북 영천이며 《한국일보》 기자 출신인 염길정 등을 추천했다.
 
  또 허삼수 인사처장과 허화평 비서실장, 이학봉 대공처장 등 12·12주도세력들 역시 몇몇 인사를 추천하고 섭외하는 등 인선에 관여했는데, 대부분 학연(중고등학교)과 지연(영남 지역)으로 연결된 인사들이었다.
 
 
  명성 있는 대학교수들, 대부분 참여 난색
 
  당시 보안사 인사처장이었던 허삼수 전 청와대 사정수석은 섭외의 전방을 담당했다. 이미 고등학교 친구인 허문도 전 《조선일보》 기자를 12·12 전에 전두환 중장에게 소개해 끌어들이는 등 ‘민간인을 우리(군부) 편으로 만들기’에 능했던 인물이다. 그는 군 장성 위주의 조직이 국민의 거부감을 살 것을 우려해 명성 있는 민간인을 다수 섭외하고자 했다.
 
  그는 1980년 9월 모 월간지와 인터뷰에서 “국보위 상임위원장 및 위원이 현역 장성 일색이고 번듯한 식견을 가진 학자 출신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질문에 “국보위 위원 선정 작업 중 국가에 대한 비전이 있고 개혁의지를 갖고 있는 명성 있는 대학교수나 종교인 등 지도적 인사들을 모두 모시려 했지만 모두 손을 휘휘 내저었다”고 말했다.
 
  그의 얘기다. “보안사에서 전방으로 나서 서울대·연세대·고려대 등 유수 대학 교수들에게 참여할 것을 권유했는데, 모두가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명단에 있던 어느 교수는 행선지도 알리지 않은 채 지방으로 뺑소니를 치기도 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대통령 시해 이후 혼란한 정국을 바로잡겠다는 국보위의 역할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도 적지 않았고, 국보위 개혁 작업에 대해 평가도 좋은 편이었다. 또 새로운 정권의 핵심에 접근할 수 있는 계기가 국보위 참여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명문대 교수들이 하나같이 거절한 이유는 군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그는 분석했다. 허 전 수석은 “교수들은 우리가 혁명이라도 하는 줄 알았던 것 같다”며 섭외가 쉽지 않았음을 인정했다.
 
  허화평 실장의 지시로 5월 초부터 조순, 손제석 교수를 접촉했던 한용원 전 정보과장은 “허화평 비서실장이 나를 포함해 보안사 각 처장, 과장 등에게 임무를 분담시켜 여러 교수를 접촉하도록 지시했는데, 승낙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며 “곽태환 경북대 교수(전 통일연구원장, 대구 출신)에게도 제안을 했지만 거절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허문도 전 중정 비서실장은 “당시 37세였던 이화여대 정외과 김행자 교수를 섭외하기 위해 갔는데 말 그대로 펄펄 뛰면서 거절하더라”며 “여러 번 꼭 필요하다고 간곡히 요청해 문공분과위원으로 모셔오긴 했는데 발령만 내면 되는 군인이나 공무원과 달리 민간인 참여 교섭은 무척이나 어려웠다”고 말했다.
 
  추천받은 인물들로 구성원을 채울 수가 없게 되자 추천이나 소개 없이 본인도 모르게 갑자기 섭외하는 일도 종종 벌어졌다. 내무분과위원으로 참여했던 박원탁 전 한국외국어대 교수(대구 출신)는 “강의 도중 전화가 걸려왔다는 얘기에 잠시 받아보니 전두환 사령관의 참여 권유 전화였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김종인 더민주 대표도 “어느 날 갑자기 학교로 찾아온 모씨를 통해 참여 권유를 받았다”고 말했다.
 
 
  공무원은 무조건 파견발령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 부부가 활동을 마친 국보위 위원들의 노고를 격려하고 있다.
  나름대로의 거부권이 있었던 학자와 달리 공무원의 경우 상부 추천에 따른 통보로 참여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주로 영남 출신 40세 전후의 공무원이 ‘부름’을 받았다.
 
  국보위 사회정화분과 위원이었던 정경식 검사(당시 대검 특수부 3과장, 현재 변호사)는 “6월 1일 아침에 출근했더니 상부에서 불러 삼청동 교원연수원에 가보라고 해서 같은 지시를 받은 검사들끼리 어떻게 되는 거냐, 왜 뽑혔느냐 수군대며 삼청동으로 갔다”며 “당시만 해도 대통령 서거에 계엄에 공포 분위기라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그냥 일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경북 고령 출생, 경북고-고려대 출신이다.
 
  사회정화분과 위원 김헌무 판사(현재 변호사)는 6월 1일자로 부장판사로 승진, 청주지방법원 충주지원장으로 발령이 나 첫 출근 후 취임인사를 하고 있었는데 대법원에서 연락이 왔다. “국보위에서 파견발령이 났으니 인사 중지하고 무조건 올라오라”는 것이었다. 김 판사는 바로 상경해 다음날(6월 2일) 대법원에 들어가 “국보위가 뭐하는 데인지도 모르는데 왜 가야 하느냐”고 항의했다. 김 판사는 “신군부 측에서 사람을 뽑았는데 당신이 뽑혔으니 일단 국보위에 가서 일하든지 돌아오든지 하라”는 상사의 말에 당일 삼청동 국보위 사무실로 가 원래 자리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미 일을 시작했던 사회정화위원장 및 위원들은 “정화위원은 국보위의 핵심 부서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를 보고 뽑았고, 빠질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대구에서 태어났으며 경북고-서울대 출신이다.
 
  국보위의 각종 개혁방안 중 비리공직자 숙정이 있었던 만큼 이와 관련한 에피소드도 있다. 원래 보안사 측은 국보위 법사위원장으로 문상익 검찰국장(평북 정주 출신)을 임명할 생각이었으나 그의 부인이 부동산 투기 등으로 재산이 많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당시 공무원의 축재는 중요한 숙정 이유 중 하나였다. 이에 문 국장 내정은 취소되고 육사 11기로 육군 법무감(준장) 출신인 김영균 변호사(경남 고성 출신)로 바뀌었다. 이 밖에도 설립 초기 파견됐던 상공부와 내무부 공무원 2명이 숙정 대상이 되면서 중도하차했다.
 
 
  ‘경제대통령’ 김재익, 삼청동 찾아가 사양했지만…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은 1980년 8월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돼 9월 1일 취임했다.
  5공 당시 ‘경제대통령’으로 불린 김재익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국장(이후 청와대 경제수석, 작고)이 국보위 경제과학분과위원장을 맡게 된 것도 일방적 통보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1980년 5월 말 당시 관료생활에 지쳐 사표를 제출하고 KDI(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으로 자리를 옮기기로 한 상태였는데, 김원기 당시 부총리가 국보위 파견근무를 명령했다. 김 전 수석의 부인 이순자 여사의 회고록에 따르면 “남편은 국보위 제안에 대해 경제기획원에 사표를 낸 상태인데다 건강마저 좋지 않다고 거절했고, 나는 아예 미국으로 이민 가서 살자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허문도 실장 및 박봉환 차관 등으로부터 김재익 국장을 강력하게 추천받은 전두환 상임위원장이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조순 서울대 교수의 경과위원장직 거절 이후 전 상임위원장이 더 이상 거절을 용납하지 않고 강압적으로 밀어붙인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김재익 국장은 통보를 받은 다음날인 토요일 국보위를 찾아가 “나는 사직서를 내서 이미 접수된 사람이니 여기서 일할 사람이 아니다”라고 했으나 그쪽 사람들로부터 “그런 건 아무 상관없고 월요일부터 나오라”라는 말을 듣고 어쩔 수 없이 전두환 장군 앞에서 선서를 했다고 주변인들에게 말했다.
 
  그나마 국보위 명단 중에서 눈에 띄는 학자로 지목됐던 서울대 경제학과 한승수 교수(전 국무총리)는 순수하게 전문가로서 정책입안에 참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전두환 상임위원장으로부터 직접 제안받은 것은 아니지만 참여 제안을 받고 국제경제전문가로서 참여했다”며 “이후 국보위가 해체되고 국가보위입법회의를 만들 때 대부분의 위원이 입법회의로 가 정치권에 몸을 담았지만 나는 학교로 돌아갔고, 정치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고 적극 참여설을 반박했다.
 
  이는 함께 재무분과위원으로 참여했던 김종인 교수(현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입법회의에 참여하고 그 후 민정당 창당에도 참여해 11대 국회에서 전국구 의원으로 활동하는 등 정권에 적극 참여한 것과 비교해 본인의 입장을 해명한 것으로 분석된다.
 
 
  실무위원들은 40세 전후, 개혁 성향
 
  각계에서 영입한 분과위원과 전문위원이 정책을 만들 동안 분과별 3~5명의 실무위원들은 행정 등 실무를 담당했다. 실무위원은 각 부처에서 파견 나온 젊은 공무원들이었다. 이완구 전 총리가 국보위에 참여한 과거 때문에 논란이 된 바 있는데, 당시 경제기획원 사무관이었으며 국보위에 실무위원으로 파견근무했던 이 전 총리의 나이는 만 30세에 불과했다. 각 분과에는 이들 일반직 공무원 외에도 기능직, 고용직 등이 있었다.
 
  사회정화분과위원이었던 김헌무 변호사는 “일반 행정기관에서 온 사람들은 대부분 국장급에서 왔고, 나이는 대부분 나(1940년생)와 비슷한 또래, 40세 전후의 인물들이 많았다”고 회고했다. 분과위원과 전문위원이 40대 젊은 국장급이었고, 실무위원은 30대 과장 또는 사무관으로 실무적으로 한창 일을 할 만한 사람들이었다.
 
  국보위 실무위원 출신 전직 공무원은 “각 정부부처에서 나름 일 잘하는 사람을 뽑아가긴 했지만, 4공 당시 잘나가던 사람들은 제외시켰던 것으로 안다”며 “5공 출범을 목표로 5공에만 충성하는 사람들을 양성하기 위해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잘나가던 공무원은 축재나 비리 등에 연루된 경우가 많아 국보위 주요 목표였던 공무원 숙정의 대상과 겹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그랬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또 “5공의 경제대통령으로 불렸던 김재익 국장도 국보위에 오기 전엔 경제기획원 내에서 본인 의견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등 입지가 좁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국보위 위원들은 5개월 내내 아침 8시 이전부터 출근해 밤늦게까지 일하는 등 한 신문기사에 따르면 ‘하루 일과가 용광로 같을 정도로 분위기가 뜨거웠다’고 전해진다.
 
  ‘제5공화국 권력엘리트’ 기사로 5공하에서 고초를 겪었던 박기정 전 《동아일보》 기자도 “국보위 요원들은 개혁에 대한 집념과 역사적 사명감으로 불타올랐는데, (과거 정권에 대해) 비판력이 왕성했던 것이 이들의 특징”이라고 분석했다.
 
 
  국보위 참여 제안을 거절한 사람들
 
국보위는 5개월의 활동 후 국가보위입법회의로 변신해 민주정의당을 창당했다. 김종인 더민주 대표도 민정당 창당에 참여해 11대 국회의원이 됐다.
  국보위 참여 제안을 거절한 인물 중 가장 유명한 사례는 조순 서울대 교수와 고건 전 총리다.
 
  조순 교수는 서울대 상대 졸업 후 5년간 육사 교관을 지내며 전두환 전 대통령 등 육사 11기생을 가르친 바 있어 국보위 경제과학위원장 물망에 1순위로 올라 있었다. 권정달 정보처장은 조순 교수 영입을 위해 부하 장교를 보냈을 때 거절당한 후 조 교수를 세 차례 찾아가 삼고초려 했지만, ‘서울대 분위기가 좋지 않기도 하고, 학교 일 때문에 참여할 수 없다’는 답을 들었다.
 
  그러나 당시 국보위에 참여한 한 인사의 증언은 이렇다. 그는 “조 교수가 국보위 참여 뜻이 없기도 했지만, ‘제자’인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직접 전화 한 통 하지 않고 부하 대령을 보낸 데 대해 불쾌해한 것으로 안다”며 “조 교수가 국보위 위원은 물론 이후 제안받은 고문직까지 거절하고 나서 전 위원장과 사이가 완전히 벌어졌다”고 말했다.
 
  고건 전 총리는 1980년 초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이었는데, 5·18사태 이후 출근하지 않아 주변의 오해를 사고 있었다. 그는 《월간조선》 인터뷰를 통해 “비상계엄 확대와 군부 정권에 도저히 찬성할 수 없어 사표를 내고 칩거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청와대 경호실에 근무하던 고명승 대령은 고 전 총리의 집을 찾아 “군부 핵심의 전언으로, 국보위 상임위원으로 참여해 달라”고 요청한다. 고 전 총리는 “나는 행정밖에 모른다”고 거절했으나 고 대령은 거듭 권유했고, 결국 “행정밖에 몰라서 지금 상황에서 도와드릴 일이 없다”고 고사했다. 그는 청와대 사표 수리 후 국토개발원 고문으로 자리를 옮겨 신군부와 거리를 두는 듯했으나 그해 9월 교통부 장관으로 취임, 5공에 참여했다.
 
  이웅근 당시 서울대 교수(1930년생, 작고)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국무총리 비서관, 한국공기업학회 회장, 공기업연구소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경제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1980년 5월 국보위 위원직을 제안받은 후 완전히 다른 길을 걷게 된다. 그는 국보위 참여 여부에 대해 본인이 심각하게 고민하다 주변의 만류가 극심해 결국 거절을 했지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이때 교수직을 사퇴하게 된다. 이후 국제그룹 종합조정실장으로 기업인의 길을 가게 됐고, 전자출판업 관련 벤처기업 서울시스템을 설립해 성공을 거둔다. 이후 뿌리출판사 회장, 동방미디어 회장 등을 역임하며 성공한 기업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20대에 박사학위를 받고 만 30세에 서울대 교수로 임용돼 잘나가던 학자가 돌연 기업인으로 변신한 것이다. ‘국보위 제안 거절’이 그의 삶을 완전히 바꿨다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게 주변의 시선이다.
 
  이용득 전 금융감독위원장(1941년생)도 국보위 파견을 거절한 케이스다. 당시 재무부 증권2과장이었던 이용득 과장은 국보위에 참여한 선배의 추천으로 국보위에서 파견근무 연락을 받았다. 그는 “당시 국보위에 가서 몇 개월만 근무하면 승진이 보장될 뿐만 아니라 더러 막강한 파워도 누릴 수 있어 공무원들 중엔 국보위에 가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광주고 출신인 그는 고향 생각에 국보위에 갈 수 없다고 결심, 거절의 뜻을 밝혔으나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자 고등학교 선배인 박봉환 차관을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고 건강을 핑계로 재무부에 남았다.
 
  국보위 참여 제안을 받은 민간인사들 중에는 강력하게 거절한 사람, 처음에 거절하다 결국 받아들인 사람, 군부의 서슬에 어쩔 수 없이 참여한 사람,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 등 각각의 입장이 다양할 것이다. 참여 이유나 참여 후 공과도 다양한 만큼 참여 자체를 문제 삼을 순 없겠지만 그 경력을 계기로 정치에 입문하는 등 적극적으로 참여해 놓고도 경력을 일부러 왜곡하거나 모든 것을 주변의 탓으로 돌리며 변명하는 태도는 국민 앞에서 심판받겠다는 정치인의 자세는 결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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