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취임준비위원으로 일했지만, 따로 정식 발령장이나 임명장을 받은 기억이 없어요. 언론에서 ‘취임준비 7인방’이라 떠들었으나 누구처럼 행세하거나 세도를 부릴 그런 게 아니었어요. 공무원들이 우리한테 쩔쩔맨다는 것도 상상할 수 없고요. 기간도 20일 정도로 짧았어요”
김중위
74세. 고려대 정외과, 同 대학원 졸업(정치학 석사), 대구대 명예행정학 박사. 《사상계》 편집장,
12~15대 국회의원, 국회 예결위원장, 국회 제도개선특위원장, 환경부 장관 역임.
김중위
74세. 고려대 정외과, 同 대학원 졸업(정치학 석사), 대구대 명예행정학 박사. 《사상계》 편집장,
12~15대 국회의원, 국회 예결위원장, 국회 제도개선특위원장, 환경부 장관 역임.
“그동안 정책조정실에서 수집해 놓은 자료를 취합해 ‘대통령의 집권 100대 공약’을 만들어내기로 작심하고 하루도 빠짐없이 밤샘 작업을 했어요. 전문위원을 매일같이 들들 볶아 결국 그 일을 다 해냈어요. 선거전이 시작되자 그동안 준비해 놓은 선거공약을 하나씩 풀어갔지요.”
그 인연으로 ‘대통령 취임준비위원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당선자 집무실이 삼청동 금융연수원으로 결정이 되자, 자연스레 취임준비위가 그곳에 꾸려졌다.
처음 노태우 당선자 측이 구상한 인수기구는 ‘정권 이양·인수단’이란 명칭이었다. ‘이양(移讓)’과 ‘인수(引受)’는 신(新) 대통령이 구(舊) 대통령의 바통을 넘겨받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전두환(全斗煥) 대통령 측의 생각은 크게 달랐다. 그가 전한 당시 상황이다.
“노태우 대통령의 권력은 전두환 전임 대통령 권력의 그늘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전임 대통령의 위상이 바래는 이·취임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죠. 그래서 정권 ‘인수위’라는 표현을 못 쓰고 ‘취임준비위’라는 이름을 쓸 수밖에 없었어요. 취임준비위원장은 민정당 대통령선거대책본부장을 했던 이춘구(李春九) 의원이 맡았습니다.”
6공이 5공 정부의 연장에 있다는 점에서 ‘이양’ 내지 ‘인수’라는 표현이 전두환 측의 심기를 건드렸던 것이다.
“대통령 취임준비위원으로 일했지만, 따로 정식 발령장이나 임명장을 받은 기억이 없어요. 언론에서 ‘취임준비 7인방’이라 떠들었으나 누구처럼 행세하거나 세도를 부릴 그런 게 아니었어요. 공무원들이 우리한테 쩔쩔맨다는 것도 상상할 수 없고요. 기간도 20일 정도로 짧았어요.”
당시 민정당에서는 “민정당에는 노태우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전두환 사람이 바로 노태우 사람일 뿐”이라고 수군댔다.
전두환 측, ‘이양’ 내지 ‘인수’ 표현에 민감

사실 노태우 당선자의 ‘대통령 취임준비위’는 자문기구 성격에 가까웠다. 각 부처로부터 현황을 듣고 당선자에게 브리핑하는 것이 주 업무였다.
“현황 보고를 받고 미해결된 분야가 뭔지, 앞으로 관심을 두고 지켜봐야 할 과제는 뭔지를 뽑아서 보고했습니다.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주택 100만 호 건설’이었어요. 천정부지로 집값이 뛰어 ‘혁명이 나느니, 안 나느니’ 할 때였지요. 100만 호를 건설하면 건축자재, 인건비는 어떻게 할 것인지가 논의의 초점이 되었어요.”
—다른 현안은요.
“노태우 정권 초창기는 민주주의가 과잉상태였어요. 치안이 상당히 염려스러웠고 복수 노조 인정 여부를 두고 머리를 맞댔어요. 우리는 ‘(복수 노조를)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않으냐. 노조끼리 서로 경쟁해서 권력분립 형태로 견제할 것’으로 봤는데 나중 보니 그게 아니더라고요. 시간이 지나면서 기존 노조가 변질돼 민주노총 쪽으로 빨려가 버렸어요.”
노태우 당선자는 후보 시절, ‘위대한 보통 사람의 시대’를 제창했다. ‘보통 사람’은 노태우 대통령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고 노 대통령은 “믿어주세요”라는 말을 자주 했다.
“‘보통 사람의 시대’에 맞게 취임 준비를 하자는 분위기였어요. 직접 당선자가 가방을 들고 다니는 ‘쇼’도 했어요. 당시는 권위주의 정치에 국민이 매우 싫증나 있었어요. 그래서 가급적 검소하게 보이고 권위주의적인 모습은 다 빼자고 했어요.”
—당시 5공 청산에 대한 논의는 없었나요.
“제 기억으로 취임준비위 때는 그런 얘기가 없었어요. 13대 국회 이후 야당에서 5공 청산 얘기가 나와서 대두한 겁니다. 취임준비위 시절에는 (5공 청산을) 준비할 겨를도 없었어요. 5공 청산은 민정당 국책연구소에서 최병렬(崔秉烈)·김종인(金鍾仁)씨 등이 비밀리에 연구한 것으로 압니다. 연구과정에서 (전두환 대통령을) 감옥에 보내느냐 안 보내느냐, 안 보내는 대신 어디에 보내느냐 등도 연구했을 겁니다.”
노태우 정권의 가치는 무엇보다 ‘역사상 최초로 평화적 정권이양’이 이뤄졌다는 점이다.
“우리는 평화적으로 정권을 넘겨받은 최초의 대통령이라는 점에 ‘방점(傍點)’을 찍고 취임 준비를 했어요. 또 최초의 ‘문민(文民)정부’라는 점도 내세웠죠. 노태우 당선자가 비록 군 출신이나 오래전 전역(轉役)해 정부 각료와 국회의원, 정당 대표를 거쳐 국민 심판을 받고 당선된 ‘문민정부’라는 것이죠. 그러나 ‘문민정부’의 강조점은 ‘최초의 평화적 정권이양’에 파묻혀 버렸어요.”
노 당선자는 5공과의 차별화를 위해 애를 썼다. 인사권에 있어 대통령의 행사범위를 조정해 장관을 임명할 때는 사전에 국무총리 의견을 듣는 것을 관행화한 것이다.
“내각의 기능을 대폭 강화해 청장과 시도 지사 등 독립 관서의 장을 제외한 차관급 공무원의 임명은 해당 부처 장관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해 인사권을 행사해 나가기로 했어요.”
어리석은 대통령 밑에 현명한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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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2월 25일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노태우 13대 대통령 취임식. 오른쪽으로 전두환 전 대통령 내외가 보인다. |
노태우 당선자는 사실 과반에 훨씬 못 미치는 36% 남짓한 지지를 얻어 선출됐다. 민심수습 차원의 탕평인사가 불가피했다.
“민주정치는 책임정치이며 정당정치 아닙니까. 권위주의를 청산하기 위해 지연·학연·혈연 등 연고와 정실에 의한 편파인사를 배격하려 했고 총리실의 기능과 역할강화를 비롯해 국무총리와 행정부처 장관들에게 권한을 대폭 위임하고 책임도 엄격히 지도록 할 생각이었어요.”
—조각인선은 어떻게 했나요.
“어느 날, 이춘구 취임준비위원장이 준비위원들을 한 사람씩 따로 불러 총리와 각료로 누가 적절한가를 물었어요. 솔직히 눈에 띄는 사람이 없어 상당히 고심한 기억이 납니다. 그러다 총리 후보로 서울대 총장을 지낸 이현재(李賢宰)씨가 결정이 나더군요. 저는 그 얘기를 듣고 대뜸 이렇게 말했어요. ‘절묘하네요. 태우(泰愚) 밑에 현재이니 말이죠! 크게 어리석은 사람 밑에 아주 현명한 재상(宰相)이 들어선 셈이니 얼마나 기묘합니까.’”
—다른 인사는요.
“(취임준비위는) 청와대의 기능과 역할을 축소·개편하자고 했어요. 청와대 비서진을 축소할 수밖에 없었어요. 제가 그런 의견을 냈고 당선자도 오케이 했습니다. 우리가 ‘대통령 비서실 직제 표’를 만들어 당선자에게 보고드리니, 당선자는 ‘내가 편리하게 다시 짤게’라고 하더군요. 나중 당선자가 만들어 온 걸 보니 ‘정책보좌관’인가, ‘정책특보’인가하는 자리가 생겼더군요. 기구축소를 한다면서 없던 걸 새로 만들었어요. 제가 시비를 걸었죠.
‘아니, 보좌역이면 보좌역이지 특별한 보좌역이 왜 필요하냐’고요. 또 ‘그렇게 옥상옥(屋上屋)의 자리를 만들면 권력이 이 자리에 집중된다’고 항의했어요. 당선자께서 성을 내시며 ‘내가 필요해서 만든 거야’라고 하셨어요. ‘그렇게 되면 기구축소 취지와 다르지 않으냐’고 했더니 ‘이것만은 내 마음대로 하게 해줘’ 그래요. 저는 속으로 ‘마음속에 누구를 품고 있구나!’ 생각했어요. 당선자가 여느 때와 달리 양보 없이 강경해서 아주 의아하게 생각했어요. 나중에 보니 그 자리에 박철언(朴哲彦)씨가 가더군요. 그 뒤 ‘6공 황태자’라는 소리가 나오고, ‘대통령 당선시키는 데 당이 뭘 했나. 박철언의 사조직인 월계수회가 했지’라는 말도 흘러나오고….”
—그 말 듣고 좀 불쾌했겠네요.
“불쾌한 정도가 아니죠. 죽을 똥을 싸며 대선을 치렀고, 선대위 대변인을 하며 테러위협까지 받았어요. 우리 집 외곽에 경찰경비를 세워둘 정도였으니까요.”
김중위 전 의원은 이 대목에서 대선 당시 얘기를 꺼냈다.
“선거전이 뜨거워지자 노태우 후보를 수행하던 이민섭(李敏燮) 대변인이 힘들었나 봐요. 어느 날 이춘구 선거대책본부장이 저를 선거대책본부 대변인으로 발령냈어요. 한번은 노 후보 유세일정에 맞춰 광주에 내려갔어요. 광주 어느 호텔에 내려가 점심을 먹으려는데, 도무지 밥 차려줄 생각이 없는 눈치여서 그날 온종일 굶으면서 유세현장에 참여했어요. 후보가 연단에 올라서서 마이크를 잡는 순간 청중 속에서 돌덩이
같은 것이 날아오기 시작했어요. 이미 각오하고 있던 것이어서 보좌진은 널빤지 같은 걸로 후보의 앞을 가렸고 후보는 마이크를 잡고 ‘광주시민 여러분!’을 수도 없이 외쳤어요. 그러나 끝내 연설을 할 수는 없었어요. 여러 의미에서 너무나 눈물겨운 장면이었어요.”
“대통령 취임식이 무슨 사단장 이·취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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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국당 정책위의장 시절 김중위 전 의원. 1997년 4월 23일 국회에서 열린 ‘경제대책회의’ 당시 모습. 그 옆으로 이해찬 국민회의 정책위의장, 강경식 경제부총리가 앉아 있다. |
1988년 2월 25일 13대 대통령 취임식이 열렸다. 《중앙일보》 논설위원을 역임한 오병상씨의 《청와대 비서실4》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당시 총무처에서 마련한 안은 동시 이·취임식이었다. 평화적 정권교체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는 이·취임식을 동시에 해야 한다는 것이다. 청와대에서는 “군대에서는 떠나는 사람이 먼저 인사말을 하고 취임식을 하는 게 관행인데 왜 대통령이 이·취임식을 그렇게 못 하느냐”고 주장했다. …(생략)… 노 당선자 측에선 조소에 가까운 반응이 터져나왔다. “대통령 취임식이 무슨 사단장 이·취임식인 줄 아느냐”, “물러나는 분은 조용히 혼자 물러나는 게 낫다.”>
이날 취임식은 신・구 대통령 내외가 승용차 편으로 국회의사당 현관 앞에 도착, 취임식 단상에 자리 잡은 오전 10시께부터 시작했다. 전두환 대통령을 위한 별도의 퇴임사는 없었다.
김 전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취임식은 ‘보통 사람들의 시대’에 맞게 ‘각하’라는 호칭을 일절 사용하지 않고 ‘대통령께서’라는 표현으로 대신했고 대통령 휘장인 봉황 문양도 연단 한군데를 제외하고는 사용을 자제했어요.”
—권위주의 청산의 콘셉트에 맞췄네요.
“대통령 이·취임 단상 좌석은 신구 대통령과 다른 귀빈이 모두 똑같은 목제 의자에 앉도록 마련했고 노태우·전두환 두 대통령의 좌석이 맨 앞줄의 삼부 요인 등과 동렬 선상에 배치된 것이나 대통령 찬가를 연주하지 않은 점, 식단의 장식이 검소하게 꾸며진 점 등은 전에 없던 광경이었어요. 신임 대통령이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의 취임선서를 한 뒤 뒤로 돌아 전두환 대통령과 축하·답례의 간단한 인사말을 주고받으며 헌정사상 최초의 평화적 정부이양이 실현됐음을 국내외에 알렸어요.”
—대통령 취임준비위의 성과와 한계는 뭔가요.
“준비위원 각자는 전문성이 나름 있지만 국정 전반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도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고, 새로운 당선자가 집권과 동시에 시행할 정책을 간추리는 데도 역부족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명칭이 ‘정권인수위’가 아니라 ‘취임준비위’여서 그런지 몰라도, 대통령 이미지를 비권위적인 이미지로 ‘분식’하려는 작업에 상당히 신경 썼기 때문에 정책문제는 그렇게 돋보이는 아이디어를 내지 못했어요. 그래도 정부가 권위주의 시대에서 민주정부로 이행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다. 노태우 대통령을 ‘물태우’, ‘물태우’라고 하지만 그런 성격 때문에 (민주화 이행 과정에) 큰 갈등이 없었던 것 아닌가요?
당선자는 여소야대의 정치현실, 이에 따른 5공 청산의 정치적 과제가 있었어요. 이 두 가지를 ‘물태우식’으로 시간을 질질 끌면서 해결해 가지 않았나요? 아마 군대식으로 처리하려 했다면 민주화가 지금보다 더디게 진행됐을지 모릅니다. 신도시 건설이나 경제문제 등을 큰 무리 없이 추진한 것도 성과 아닌가요. 그리고 아무나 3당 합당이 됩니까. ‘물태우’니까 합당을 하는 거지.”
당 정조실장 시절, 대통령 공약 이행 체크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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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2월 19일 노태우 대통령 당선자가 취임준비위원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김중위 전 의원. |
—취임준비위는 대선공약을 이후 어떻게 실천해 나가려 했나요.
“후보의 선거공약을 지키기 위해 실천 도표를 만들었고 이후 민정당에서 하나하나 체크하려 했어요. 일종의 체크리스트라고 할까요. 제가 다시 당으로 돌아가 정책조정실장을 했는데 제 방에 공약 이행 도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통령이 임기를 마칠 때쯤 공약을 다 실천하도록 할 계획이었어요. 예를 들어 주택정책의 경우 연차계획을 세워 진행했어요. 그러나 1990년 3당 합당 이후 당이 없어져 버리고, 정책조정실도 3개로 쪼개지면서 유야무야됐지요.”
끝으로 김중위 전 의원은 노태우 정권 출범 초기 비화 하나를 들려줬다.
당시 부동산 가격은 천정부지로 뛰고 물가고로 민심은 흉흉했다. 그 해결책으로 당시 경제수석인 문희갑(文熹甲)씨가 토지 공(公)개념을 들고 나왔다. 토지 공개념은 지가(地價) 상승과 주거부족 등이 심각해지자 부동산 투기를 근절하기 위해 개인의 토지 소유·개발·이용·처분 등을 법으로 제한하는 개념을 말한다.
집권 초 청와대에서 노태우 대통령이 주재하는 회의가 열렸다고 한다. 김 전 의원 곁에 박철언씨가 앉고 건너편에는 문희갑 수석이 앉아있었다. 문 수석이 토지 공개념을 보고하면서 느닷없이 “각하! 토지 공개념을 실시하지 않으면 혁명이 일어납니다”라고 했다. 이 소리를 듣자마자 박철언씨가 발끈했다.
“각하! 토지 공개념을 실시하면 혁명이 일어납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 식의 혁명 얘기로 분위기는 일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러자 노 대통령이 탁자를 탁 치면서 벌떡 일어나 큰소리로 야단을 치는 것이었다.
“무슨 소리들 하는 거야! 이거나 읽어 봐! 호주에 있는 친구가 보내온 거야! 정책은 두부 모 자르듯이 하는 게 아니야!”
노 대통령은 저고리 안주머니에서 편지봉투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놓고 화가 잔뜩 난 얼굴로 휑하니 방을 나섰다. 김 전 의원의 말이다.
“잠깐 우리는 아무도 일어설 생각을 못한 채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우리 보고 어쩌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래서 사람들은 그를 보고 ‘물태우’라고 한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토지공개념의 3대 법안인 ‘택지소유상한에 관한 법률’, ‘개발이익 환수에 관한 법률’, ‘토지초과이득세법’은 정권 초기인 1989년 정기국회를 통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