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스피스 병동에서 자택으로… 인생의 마지막 시간 보내는 중
⊙ “죽음을 아름답게 맞이하는 것도 스승의 역할”
⊙ 13년간 말라위에서 봉사활동… 우물 42개 파고 음악학교 건립
⊙ “삶은 가치 있는 것들로 반짝이는 세상… 저마다의 소명 찾아야”
金淸子
1944년생.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레오폴트 모차르트 음악원(피아노·성악 전공),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 졸업 / 1970년 한국인 최초 유럽 오페라 무대 데뷔, 독일 카를스루에 오페라단·뒤셀도르프 오페라단 전속 단원으로 활동, 중앙대·연세대·한예종 성악과 교수 역임
⊙ “죽음을 아름답게 맞이하는 것도 스승의 역할”
⊙ 13년간 말라위에서 봉사활동… 우물 42개 파고 음악학교 건립
⊙ “삶은 가치 있는 것들로 반짝이는 세상… 저마다의 소명 찾아야”
金淸子
1944년생.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레오폴트 모차르트 음악원(피아노·성악 전공),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 졸업 / 1970년 한국인 최초 유럽 오페라 무대 데뷔, 독일 카를스루에 오페라단·뒤셀도르프 오페라단 전속 단원으로 활동, 중앙대·연세대·한예종 성악과 교수 역임

- 경기도 남양주시 자택에서 만난 김청자씨가 〈월간조선〉과 생애 마지막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고기정
김청자 교수는 한국인 최초로 유럽 오페라 무대에 오른 프리마 돈나(Prima Donna)다. 25세였던 1970년, 스위스 베른에서 모차르트의 오페라 〈티토 황제의 자비〉에 주역으로 출연한 것이다. 이후 스위스와 이탈리아 등지에서 16년간 활동했고, 귀국 후 대학에서 후진을 양성하다 2009년 은퇴했다. 은퇴 후에는 아프리카 말라위로 건너가 10여 년간 우물을 파고, 음악학교를 세워서 현지 아이들에게 음악과 미술을 가르쳤다.
그러던 중 2022년 10월, 가슴에 멍울이 잡혀 귀국해 받은 검사에서 유방암 2기 진단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아직 마무리하지 못한 일이 남아 있다”며 치료를 거절하고 다시 말라위로 돌아가 약 두 달간 현지 정리를 마쳤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항암 치료는 받지 않기로 결심했다. 결국 말기암 판정을 받은 뒤 경기 용인시의 동백성루카병원 호스피스 병동에서 한 달간 입원 치료를 받았다.
현재 김청자 교수는 남양주 자택에서 지내고 있다. 독일에서 재즈 뮤지션으로 활동 중인 아들 다니엘(Daniel Glatzel)도 한국에 들어와 어머니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하고 있다.
처음엔 간호조무사로 독일 건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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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 김청자 교수(왼쪽에서 두 번째)는 스위스 베른에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오페라 〈티토 황제의 자비〉에 출연해 한국인으로는 처음 유럽 오페라 무대에 데뷔했다. 사진=김청자 |
“호스피스에서 너무 잘 치료해 주셔서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습니다. 말기암 환자들의 컨디션은 그때그때 달라요. 갑자기 컨디션이 급격히 떨어지면 떠나야 할 때가 오는 거죠. 그래서 항상 위험 요소를 안고 살아가는 셈이에요. 그런데 지금은 아들도 한국에 들어와 있고, 몸 상태도 괜찮아서 위로가 돼요. 또 서울과 가까운 곳에 살다 보니 제자들도 자주 찾아와 줘서 정서적으로 많이 안정된 것 같습니다.”
―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제자들과 사이가 돈독하시군요.
“네. 앞으로도 이 좋은 인연을 이어 가고 싶어요. 지난 5월 15일 스승의날에는 제자들이 집에 찾아와 노래도 불러 주고,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하더군요. 저를 정말 행복한 스승으로 만들어 줬습니다.”
― 평소에도 제자들과 교류가 있었나요?
“그럼요. 제가 말라위에 있을 때에는 제자들이 자주 찾아와서 공연도 하고, 현지 아이들에게 음악 교육도 시켰답니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에는 제자들이 틈만 나면 찾아와서 건강을 살펴 주었고, 호스피스에도 전화를 걸곤 했습니다. 참 귀한 인연이지요.”
김청자 교수는 누구보다 교육에 대한 열망이 깊다. 1963년, 외국 신부의 도움을 받아 간호조무사로 독일에 가게 된 그는 늘 “내 꿈은 음악 공부”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녔다고 한다. 독일에 도착한 지 5개월 만에 후원을 받아 레오폴트 모차르트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성악을 공부하게 되면서, 자신이 배운 것을 다른 이들과 넉넉히 나누고 싶다는 꿈을 품게 됐다. 그의 제자들도 김청자 교수의 교육에 대한 애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연고 하나 없던 아프리카 말라위에 음악학교를 세운 것도 바로 그 교육열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국의 마리아 칼라스가 되겠다’
― 유학 비용은 어떻게 마련했습니까?
“제가 정말 열심히 공부했어요. 재능도 있었고요. 그래서 천주교 신자분들이 ‘저 아이의 꿈은 꼭 이뤄 줘야겠다’며 장학금을 모아 주셨어요. 그 장학금으로 3년 동안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꿈을 이룬 후엔 그 은혜를 잊지 않으려고 마음먹었죠. 앞으로 저도 누군가의 꿈을 도와야겠다고요. 그래서 말라위에 음악학교를 지은 겁니다.”
― 당시 여성의 몸으로 홀로 외국 생활을 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텐데요.
“만 25세일 때 봉사활동을 위해 간 곳에서 신인 성악가를 발굴하기 위한 대규모 오디션이 열렸고, 미국을 포함해 전 세계에서 배역을 따고 싶어 하는 이들이 몰려들었어요. 운 좋게 저도 오디션을 볼 수 있었고, 합격해서 스위스 베른에서 데뷔를 하게 됐습니다. 상상도 못 할 기적이 일어난 거죠. 당시 한국인이 유럽에 유학하는 것도 드물었고, 특히나 동양인 여성이 유럽 오페라 무대에 오른다는 건 더욱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내가 초석을 잘 놓아야 후배들이 편하게 활동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고, 남들보다 더 열심히 했습니다. 그 덕분인지 지금은 많은 후배들이 꿈의 무대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더군요. 그 친구들이 참 자랑스럽습니다.”
‘나는 한국의 마리아 칼라스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독일에서 꿈을 키워 가고 있던 어느 날, 한국에서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그가 집안의 장녀인데, 아버님이 편찮으시고 어머님 혼자 네 명의 동생을 키우시느라 많이 힘들다는 내용이었다.
“처음엔 쌓아 온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에 실망하고 좌절했죠. 하지만 일주일쯤 지나니까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사람이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건 굉장히 이기적인 삶이다.’ 누군가를 위해 나를 포기하고 봉사하는 삶이 더 의미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래서 28세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당시 한국인 최초 프리마 돈나였기 때문에 좋은 대학들에서 교수 제의가 들어왔고, 약 5년간 교수로 재직했어요. 제가 경제적으로 열심히 일한 덕분에 동생들도 모두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비행기에서 만난 ‘인생의 보물’
―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오히려 많이 배웠다고 하셨는데.
“그동안은 항상 배우는 입장이었는데, 제가 스승이 되어 학생들을 가르쳐 보니 스스로 너무 부족하다는 걸 알게 됐어요. 더 많은 걸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커졌죠. 사실 저는 동생들의 교육을 위해 제 커리어의 정점을 포기하고 돌아온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유럽으로 돌아가 더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교수직을 내려놓고 사표를 낸 뒤, 모아 둔 돈으로 어머니께 집 한 채 사 드리고 저는 아무것도 없이 다시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그렇게 독일에서 다시 열심히 일했고, 그 과정에서 제 인생의 보물인 다니엘의 아버지도 만나게 됐죠.”
― 연애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흥미롭습니다.
“그렇죠. 저는 두 번 결혼했어요. 다니엘은 두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입니다. 독일에서 여러 극장을 돌며 활동하던 중, 1982년 런던의 로열 앨버트홀(Royal Albert Hall)에서 공연 제의를 받았어요. 그 무대에 서기 위해 비행기를 탔는데, 옆자리에 앉은 남자가 바로 다니엘의 아빠였죠.”
― 운명 같은 사랑이었군요.
“맞아요. 사실 저는 오페라 가수로서 평생 살고 싶다는 꿈이 있었기 때문에 아이를 낳는 건 경력에 방해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첫 남편과 결혼할 때는 ‘당신이 아이를 원한다면 나는 결혼할 수 없다’고 약속하고 결혼했었죠. 그런데 두 번째 남편을 만나고 나서는 여자로서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하더군요. 정말 큰 사랑이었어요. 그리고 1984년에 아들을 낳았는데, 제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고 목소리도 잃지만, 사랑의 결실은 세상에 남아 있는 거잖아요.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은 선택을 할 겁니다.”
‘김청자의 아프리카 사랑’ 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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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청자 교수와 그 아들 다니엘. 사진=고기정 |
다니엘의 어머니 사랑은 남다르다. 김청자 교수가 말라위에 머무는 동안, 다니엘도 자신의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함께 수차례 말라위를 방문해 현지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고 공연을 열었다. 서툰 한국어로 “어머니는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멋진 분”이라며, “어머니의 나라인 한국은 정말 아름다운 나라”라고 말하는 모습에서 진심이 묻어났다.
― 왜 하필 말라위에서 봉사를 한 건가요?
“한예종 교수로 재직 중일 때, 안식년을 맞아 1년 동안 아프리카, 유럽, 미국 등 여러 나라를 여행했습니다. 그때 신부님과 수녀님들이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고, 저도 언젠가는 꼭 봉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그 이후로 교수직을 이어 가면서도 해마다 두 번씩 아프리카를 찾았어요. 그러다 성당에서 만난 분이 ‘말라위라는 나라가 있는데, 굉장히 가난하다’며 저를 초청하셨어요. 처음 말라위를 방문했는데, 사람들이 정말 온유하고, 영어권이라 활동하기도 수월하더군요. 말라위에 도착하자마자 ‘하느님이 나를 이곳으로 부르셨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어요. 그래서 2009년 퇴임하자마자 한국의 재산을 정리해 현금화했고, 말라위로 가져갔습니다. 그리고 ‘김청자의 아프리카 사랑’이라는 후원회도 만들었죠.”
“이 아이들의 꿈이 결국 내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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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청자 교수는 은퇴 후 아프리카 말라위에서 총 42개의 우물을 파는 등 여러 봉사를 진행했다. 사진=김청자 |
“우선 우물을 파는 일이 가장 시급하다고 생각했어요. 말라위는 연중 4개월가량 동안만 비가 오고 나머지 7~8개월은 가뭄이 이어집니다. 농사도 못 짓고 물이 없어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니 마음이 너무 아팠죠. 그래서 우물부터 파주기 시작했습니다. 우물 하나를 파는 데 약 700만원이 들었는데, 제가 말라위에 파준 우물이 총 42개예요. 그 덕에 식수 걱정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습니다.
또한 말라위는 성관계가 매우 문란해서 에이즈 감염률이 높았고, 에이즈로 부모를 잃은 고아도 100만 명이 넘었어요. 그 아이들의 관심을 음악으로 돌리고, 상처받은 마음을 음악으로 치유해 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한국에서 악기를 사오고, 음악학교를 세워 아이들에게 악기를 가르쳤습니다. 그중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세 명의 학생은 제 사비로 한예종 유학까지 보냈습니다.”
― 대단하십니다.
“말라위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아깝지 않았어요. 한예종 유학을 보내기 위해선 정말 많은 준비가 필요했죠. 말라위 아이들은 음악 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음악에 대해 거의 무지한 상태였습니다. 그중에서 재능 있는 세 명을 선발했고, 그 아이들에게 집중적으로 이론을 가르쳤습니다. 저도 재능을 인정받아 유학을 한 사람이기에, 이 아이들도 그럴 수 있다고 확신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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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청자 교수는 말라위에서 음악학교를 건립한 뒤 음악적 재능을 보이는 학생 세 명을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유학보냈다. 해당 학생들은 현재 말라위 음악학교에서 교사로 재직 중이다. 사진=김청자 |
“그렇게 열심히 준비해서 세 명이 한예종에 입학하게 됐고, 입학식에 참석했을 때 정말 눈물이 났어요. 그때 생각했죠. ‘내 꿈이 이루어졌구나. 이 아이들의 꿈이 결국 내 꿈이었고, 나의 꿈이 또 그 아이들의 꿈이었구나….’”
― 그 세 학생은 그후 어떻게 되었나요?
“한예종 졸업 후 말라위로 돌아가 제가 세운 음악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정기진료 받으러 가서도 음악 봉사
김청자 교수는 말기암 환자, 두 달 뒤조차 예측할 수 없는 시한부 인생이다. 그러나 암이 이미 몸 전체를 지배하고 있음에도 그는 외적으로는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아니, 여느 사람보다 더 의연하고 담담하게 현실을 직면하고 있었다. 기자가 지금껏 취재 현장에서 만났던 말기암 환자들과는 분명 다른 모습이었다.
― 교수님에게 ‘음악’은 어떤 의미였나요?
“음악은 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하느님, 자연, 음악, 이 세 가지가 제 삶을 지탱해 주는 기둥이었어요. 열한 살 때 처음 성당에 가서 하느님을 알게 됐고, 그곳에서 음악도 만났습니다. 80 평생을 음악과 함께 살아왔지요. 처음엔 명예 같은 걸 성취하고 싶어서 음악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음악이 제게 주는 진짜 의미를 알게 됐습니다. 그 무렵부터 음악으로 봉사하며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도 하게 됐고요.”
― 호스피스 병동에서도 피아노를 치며 음악 봉사를 했죠.
“그렇습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나온 지금도 음악 봉사는 계속하고 있어요. 외래진료를 화요일마다 받으러 다니고 있는데, 그때마다 음악 봉사도 함께 합니다. 제 건강이 허락하는 한 외래로 다닐 거고, 언젠가 다시 상태가 악화되면 입원하겠지요. 그래도 저는 음악 봉사를 계속할 겁니다. 그게 하느님께서 제게 주신 소명(召命)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웃으면서 바이바이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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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년,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해 있던 김청자 교수를 찾아온 제자들. 사진=김청자 |
“전혀 없습니다. 저는 참 복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해요. 지금도 제자들을 만나면, 제자들이 제 이야기를 듣고 눈물부터 흘립니다. ‘선생님, 오래오래 사셔야죠’ 하면서요. 그럴 때마다 제가 꼭 하는 말이 있어요. 나랑 끝까지 동행해 달라고, 그리고 떠날 순간이 오면 웃으면서 바이바이(bye bye) 하자고요. 누구나 삶의 마지막은 있기 마련입니다. 죽고 난 후에는 천국에서 만나면 되지요. 저는 지금 제자들에게 ‘죽음을 어떻게 아름답게 맞이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또 다른 스승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음악만 가르치는 게 스승은 아니잖아요. 삶 전체를 보여 주는 것이야말로 진짜 가르침 아닐까요? 태어나고, 살고, 병들고, 떠나는 그 모든 과정을 담담히 보여 주는 것 역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 여깁니다.”
―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인생을 살다 보면, 어느 시점엔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이들에게 ‘안녕’ 하고 웃으며 떠날 수 있는 준비를 해야지요. 사람은 누구나 각자의 소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그 소명을 따라서 묵묵히 살아가면 되는 거예요. 삶은 가치 있는 것들로 반짝이는 세상입니다. 그 반짝임을 향해 노력한다면 누구나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믿습니다. 모두가 자기만의 소명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비추어 보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