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제는 眞, 沙, 燕, 劦, 木, 解, 國, 苗, 일본은 마히토(眞人), 아소미(朝臣), 쓰쿠네(宿禰),
이미키(忌村), 미치노시(道師), 오미(臣), 무라치(連), 이나키(稻置)의 8개 성씨가 득세
⊙ 일본 황실은 백제 眞씨의 후예, 萬世一系 강조하려 姓을 사용하지 않아
金丁鉉
⊙ 77세. 한양대 사학과 졸업.
⊙ 저서: 《흥하는 성씨 사라진 성씨》 《우리 겨레 성씨 이야기》 《상상 밖의 한국사》.
이미키(忌村), 미치노시(道師), 오미(臣), 무라치(連), 이나키(稻置)의 8개 성씨가 득세
⊙ 일본 황실은 백제 眞씨의 후예, 萬世一系 강조하려 姓을 사용하지 않아
金丁鉉
⊙ 77세. 한양대 사학과 졸업.
⊙ 저서: 《흥하는 성씨 사라진 성씨》 《우리 겨레 성씨 이야기》 《상상 밖의 한국사》.
- 고대 일본 성씨의 기원을 밝힌 《신찬성씨록》.
한국인의 성(姓)은 대개 단성(單姓)이다. 반대로 일본인의 성에는 복성(複姓)이 많다. 삼국시대 백제와 고구려에는 복성이 적잖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보면 고구려에는 소실(少室), 중실(仲室), 을지(乙支) 등의 성을 가진 인물들이 나온다. 백제에도 사마(司馬), 수미(首彌), 조미(祖彌), 고이(古爾), 목협(木劦) 등의 성을 가진 인물들이 기록되어 있다. 물론 단성도 있었다.
그런데 신라에는 단성의 인물들만 기록되어 있을 뿐 복성의 인물들은 보이지 않는다. 《삼국사기》는 박(朴), 석(昔), 김(金) 세 성의 왕족 성씨 및 육촌(六村)의 성씨 등 신라의 성씨가 어떻게 등장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육촌의 성은 익히 잘 아는 이(李), 최(崔), 정(鄭), 손(孫), 배(裵), 설(薛)로 3대 유리왕(儒理王·24~57년)이 하사(下賜)한 성이라고 한다.
고구려와 백제에도 왕이 내린 성들이 있는데, 앞서 언급한 소실, 중실, 대실이 그것이다. 이 글에서 얘기하려는 백제의 팔족성(八族姓)도 왕이 하사한 대신이나 장수 등 조정 신하들에게 내린 성이다. 이 팔족성은 진(眞), 사(沙), 연(燕), 협(劦), 목(木), 해(解), 국(國), 묘(苗)를 말하는데, 백제 권문세족(權門勢族)을 대표하는 성이었다.
백제 왕족의 성은 부여(扶餘)라는 복성이었다. 백제를 건국한 온조(溫祚)의 조상이 부여 출신임을 나타낸다. 후대의 백제 왕들 중에는 부여를 줄여 여(餘)라는 성을 사용하기도 했다.
또 우(優)란 성을 취한 백제왕도 있었다. 8대 고이왕(古爾王), 9대 책계왕(責稽王), 10대 분서왕(汾西王), 12대 설왕(契王)이 그들이다. 이 ‘우’라는 성은 온조의 형인 비류(沸流)가 가졌던 성이다. 비류는 온조와 함께 고구려를 떠나 와서 미추홀(지금의 인천)에 따로 나라를 세웠지만 곧 동생의 나라로 귀부(歸附)시켰다. 우라는 성을 사용한 왕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초기에는 온조와 비류의 자손들이 백제의 왕통을 함께 이어 갔음을 알 수 있다. 온조와 비류는 고구려 주몽의 서자였다.
《삼국사기》에 백제의 팔족성을 언급한 대목은 없다. 단지 그런 성을 가진 인물들에 대한 기록만 있을 뿐이다. 이 백제의 팔족성을 언급한 자료는 중국의 《북사(北史)》다. 《북사》는 위(魏)나라부터 수(隋)나라까지의 역사를 다룬 사서(史書)다. 《북사》에는 고구려, 백제, 그리고 신라에 관한 기록들도 있다. 백제의 팔족성에 관한 기록이 보이는 역사서로는 《수서(隋書)》와 《신당서(新唐書)》도 있다. 《신당서》는 묘(苗)와 진(眞)의 성 대신에 정(貞), 백(苩)을 넣어 백제의 팔족성이라 하였다.
백제의 팔족성 가운데 오늘날 한국인이 사용하는 성은 진(眞), 연(燕), 국(國) 정도다. 모두 희귀성(稀貴姓)으로 인구가 극소수에 불과하다. 이들은 백제의 후예가 아니라 중국에서 귀화한 성씨들로 알려져 있다.
백제 및 신라系 姓氏들
고대(古代) 일본에는 백제의 팔족성과 유사한 ‘팔색성(八色姓)’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 팔색성은 684년 일본의 천무천황(天武天皇)이 만들어서 사성(賜姓)한 것으로 고대 일본 세족(世族)들 성씨였다. 팔색성은 마히토(眞人), 아소미(朝臣), 쓰쿠네(宿禰), 이미키(忌村), 미치노시(道師), 오미(臣), 무라치(連), 이나키(稻置)였다.
팔색성 중에서 ‘마히토’는 15대 천황이었던 응신천황(應神天皇)에서 비롯한 성이다. 응신천황은 백제 비류계(沸流系) 성인 진(眞)이라는 성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앞에서 본 것처럼 진이라는 성은 백제 팔족성의 하나였다. 응신천황의 후손들은 여기서 유래한 ‘진인(眞人)’라는 성을 사용했다. ‘진인’에는 ‘진씨 성을 가진 사람’이란 뜻이 들어 있을 것이다.
응신천황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그가 비류계 백제인으로 16대 진사왕(辰斯王·385~392)을 제거하려다가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주장한다. 그때 많은 비류계 백제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응신의 망명 연도는 AD 396년으로 보고 있는데 이때는 백제의 17대 아신왕(阿莘王) 재위 후였다. 아신왕은 진사왕의 형이었던 15대 침류왕(枕流王)의 장남이었다. 그런데 뒤늦게 왕통을 승계받은 것이다. 사건은 이 때문이었다고 한다. 백제에서는 비류계 왕이 우(優)의 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왕이 아닌 후손들 사이에서는 바로 팔족성의 하나인 진(眞) 성을 갖고 있었다.
서기 815년에 편찬한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은 일본의 고대 씨족관계 성씨들을 수록한 것인데, 300여 개의 성을 소개하고 있다. 이들 성씨는 대부분 두 글자의 복성들이다. 백제 왕족의 후예가 일본에 건너와서 사용한 성이라고 언급한 성씨들의 기록도 있었다. 즉 구다라(百濟), 이시노(石野), 미야하라(宮原), 마쓰다(沙田), 다카노(高野), 나카노(中野), 사카다(坂田), 구니모토(國本), 니이키(新木), 사쿠라이(櫻井), 야마구치(山口), 히라다(平田), 나가다(長田) 등이 백제인들의 성씨라 한다.
《신찬성씨록》 중에는 신라 출신 도래인(渡來人)의 성씨도 있다. 나가오카(長岡), 야마무라(山村), 시미즈(淸水), 다카오(高尾), 다케하라(竹原), 야마다(山田), 도요하라(豊原) 등이 그것이다.
‘소가’씨의 시조가 된 목협만치
일본의 성씨 문화는 백제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으로 보는 시각들이 있다. 백제의 왕인(王仁)이 《논어(論語)》 열 권과 《천자문(千字文)》 한 권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가 해박한 지식으로 일본 응신천황의 태자를 가르쳤다고 하는데, 이와 함께 성씨 문화를 비롯한 백제의 여러 제도와 문화를 전파(傳播)하였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당시 왕조 국가에서 그러했듯 서민층은 성을 가질 수 없었다. 왕족이나 권신(權臣)들만이 성을 갖는 게 상례(常例)였다. 혈족 표시가 아니라도 신분상의 한 징표로 또는 가문의 한 상징으로 성을 가졌다. 때문에 일본도 마찬가지로 왕족과 세족(勢族)들이 응당 외국의 관습을 본받아 그 같은 성을 취했을 것이다.
백제의 팔족성 중에는 목(木)이라는 성도 있다. 《삼국사기》에서 목협만치(木劦滿致)라는 대신이 등장한다. 그는 21대 개로왕(蓋鹵王) 때 인물이다. 그와 함께 조미걸치(祖彌桀致)란 대신의 기록도 나온다. 《삼국사기》에는 ‘목협과 조미는 다 두 글자의 성인데 중국의 《수서(隋書)》에는 목협을 두 가지 성으로 기록하였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가 없다’고 하였다. 목협만치가 ‘목’이 성이라면 이름은 ‘협만치’가 된다. 그런데 《수서》는 협도 성이라고 기록하였다. 그러면 그는 ‘목협’이라는 복성이 되는 것이다.
일본의 역사에 소아만지(蘇我滿智)라는 영웅이 나온다. 그의 성이 ‘소아(蘇我)’다. ‘소아’는 일본의 발음으로 ‘소가’다. ‘소가’는 일본 나라현(奈良縣)의 한 지역에 있는 지명(地名)에서 비롯한 성이라고 한다.
이 소아만지가 바로 앞에서 말한 백제의 ‘목협만치’라는 주장이 있다. 목협만치는 일명 목만치라고도 하는데, 일본으로 건너가서 성을 바꾸고 무사(武士)로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한 손에는 칼, 다른 한 손에는 불상을 들고 일본을 평정한 영웅이었다고 한다. ‘만지’라는 이름은 ‘만치’라는 본래의 이름에서 와음(訛音)으로 표기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의 손자 대에서는 일본 최초의 사찰인 법륭사(法隆寺)를 창건하였다. 법륭사는 후에 비조사(飛鳥寺)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이 사찰은 바로 ‘소가’씨족의 사찰이라 하였다. 일본 오사카(大阪) 시내에 있는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창건한 성덕태자(聖德太子)도 ‘소가’의 성씨 사람이란 주장이 있다.
이런 말들이 사실이라면 백제의 팔족성 가운데 진씨(眞氏)와 목씨(木氏)는 고대 일본에 끼친 영향이 컸다고 할 것이다.
환무천황 때 八色姓 사라져
백제의 진씨는 온조를 따라와 백제 건국에 기여한 공신의 집안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백제에서 진씨는 대대로 권신(權臣)의 자리를 많이 차지했다. 2대 다루왕 때는 진회(眞會), 5대 초고왕 때는 진과(眞果), 8대 고이왕 때는 진충(眞忠)·진물(眞勿)·진가(眞可), 11대 비류왕 때는 진의(眞義) 등이 그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한결같이 외자 이름들이다. 그래서 과연 ‘진’이 성이었을까 하는 의문도 있다. 고대 중국에서 성씨 등장 이전에 족인(族人)들을 표시하면서 이름에다 글자 한 개씩을 같게 하는 일이 있었다. 신라에서도 그런 이름들이 많았다. 윤흥(允興), 숙흥(叔興), 계흥(季興)이 그 예이다.
현 한국인에게 목(木)씨 성의 사람은 없다. 진씨 성을 가진 사람들은 2000년도 통계청 조사에서 1579명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기원을 백제에다 두고 있지 않았다. 서산 진씨(西山眞氏)라고 본관 표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중국 쪽 지명의 본관 표기로 귀화인계 성씨였다. 백제의 팔족성은 백제의 멸망과 함께 사라진 것이다.
일본의 팔색성도 7세기 후반~8세기 초에 사라졌다. 환무천황(桓武天皇·782~806)이 수도를 교토(京都)로 옮기면서 황족의 성은 물론 팔색성을 없앴기 때문이다. 당시 지배계층이던 팔색성의 귀족들 사이에 싸움이 빈번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체적인 무력(武力)까지 갖추고 천황의 통치를 위협했다.
이를 틈타 다른 한편으로는 신흥세력들이 기존의 팔색성 귀족 제거에 나섰다. 당시 신흥세력들이란 팔색성의 사람들이 아닌 미나모토(源), 다히라(平), 후지하라(藤原) 등의 성씨를 사용하는 사람들이었다. 후지하라 가문이 집권했을 때는 천황의 율령제도(律令制度)마저 무너져 황족의 성씨조차 사라졌다고 한다.
일본 천황가의 성이 사라진 이유에 대해서는 다른 설명도 있다. 팔색성에 일본 열도 밖에서 들어온 이민족(異民族)의 성도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성은 일본의 천황이나 지배계층이 하나의 혈통(血統)이 아닌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때문에 일본이라는 나라의 순수성과 정체성(正體性)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아예 성씨를 없애 버렸다는 것이다. 귀화인 천황도 있고 하여 천황가(天皇家)가 하나의 혈통이 아니라는 것에 부담이 컸던 것이다. 일본에서는 만세일계(萬世一系)라고 해서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핏줄로 천황의 자리가 계속 이어져 왔다고 주장하지만,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다.
고대사(古代史)는 불확실한 데가 많다. 때문에 왜곡(歪曲)도 심한 것이다. 하지만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황제나 왕들의 성씨와 왕조가 바뀐 것을 분명히 기록으로 남겨 놓고 있다. 이 점에서 천황가의 성을 없애서 역성(易姓)의 기록을 없앤 일본과는 다르다.⊙
그런데 신라에는 단성의 인물들만 기록되어 있을 뿐 복성의 인물들은 보이지 않는다. 《삼국사기》는 박(朴), 석(昔), 김(金) 세 성의 왕족 성씨 및 육촌(六村)의 성씨 등 신라의 성씨가 어떻게 등장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육촌의 성은 익히 잘 아는 이(李), 최(崔), 정(鄭), 손(孫), 배(裵), 설(薛)로 3대 유리왕(儒理王·24~57년)이 하사(下賜)한 성이라고 한다.
고구려와 백제에도 왕이 내린 성들이 있는데, 앞서 언급한 소실, 중실, 대실이 그것이다. 이 글에서 얘기하려는 백제의 팔족성(八族姓)도 왕이 하사한 대신이나 장수 등 조정 신하들에게 내린 성이다. 이 팔족성은 진(眞), 사(沙), 연(燕), 협(劦), 목(木), 해(解), 국(國), 묘(苗)를 말하는데, 백제 권문세족(權門勢族)을 대표하는 성이었다.
백제 왕족의 성은 부여(扶餘)라는 복성이었다. 백제를 건국한 온조(溫祚)의 조상이 부여 출신임을 나타낸다. 후대의 백제 왕들 중에는 부여를 줄여 여(餘)라는 성을 사용하기도 했다.
또 우(優)란 성을 취한 백제왕도 있었다. 8대 고이왕(古爾王), 9대 책계왕(責稽王), 10대 분서왕(汾西王), 12대 설왕(契王)이 그들이다. 이 ‘우’라는 성은 온조의 형인 비류(沸流)가 가졌던 성이다. 비류는 온조와 함께 고구려를 떠나 와서 미추홀(지금의 인천)에 따로 나라를 세웠지만 곧 동생의 나라로 귀부(歸附)시켰다. 우라는 성을 사용한 왕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초기에는 온조와 비류의 자손들이 백제의 왕통을 함께 이어 갔음을 알 수 있다. 온조와 비류는 고구려 주몽의 서자였다.
《삼국사기》에 백제의 팔족성을 언급한 대목은 없다. 단지 그런 성을 가진 인물들에 대한 기록만 있을 뿐이다. 이 백제의 팔족성을 언급한 자료는 중국의 《북사(北史)》다. 《북사》는 위(魏)나라부터 수(隋)나라까지의 역사를 다룬 사서(史書)다. 《북사》에는 고구려, 백제, 그리고 신라에 관한 기록들도 있다. 백제의 팔족성에 관한 기록이 보이는 역사서로는 《수서(隋書)》와 《신당서(新唐書)》도 있다. 《신당서》는 묘(苗)와 진(眞)의 성 대신에 정(貞), 백(苩)을 넣어 백제의 팔족성이라 하였다.
백제의 팔족성 가운데 오늘날 한국인이 사용하는 성은 진(眞), 연(燕), 국(國) 정도다. 모두 희귀성(稀貴姓)으로 인구가 극소수에 불과하다. 이들은 백제의 후예가 아니라 중국에서 귀화한 성씨들로 알려져 있다.
백제 및 신라系 姓氏들
고대(古代) 일본에는 백제의 팔족성과 유사한 ‘팔색성(八色姓)’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 팔색성은 684년 일본의 천무천황(天武天皇)이 만들어서 사성(賜姓)한 것으로 고대 일본 세족(世族)들 성씨였다. 팔색성은 마히토(眞人), 아소미(朝臣), 쓰쿠네(宿禰), 이미키(忌村), 미치노시(道師), 오미(臣), 무라치(連), 이나키(稻置)였다.
팔색성 중에서 ‘마히토’는 15대 천황이었던 응신천황(應神天皇)에서 비롯한 성이다. 응신천황은 백제 비류계(沸流系) 성인 진(眞)이라는 성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앞에서 본 것처럼 진이라는 성은 백제 팔족성의 하나였다. 응신천황의 후손들은 여기서 유래한 ‘진인(眞人)’라는 성을 사용했다. ‘진인’에는 ‘진씨 성을 가진 사람’이란 뜻이 들어 있을 것이다.
응신천황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그가 비류계 백제인으로 16대 진사왕(辰斯王·385~392)을 제거하려다가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주장한다. 그때 많은 비류계 백제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응신의 망명 연도는 AD 396년으로 보고 있는데 이때는 백제의 17대 아신왕(阿莘王) 재위 후였다. 아신왕은 진사왕의 형이었던 15대 침류왕(枕流王)의 장남이었다. 그런데 뒤늦게 왕통을 승계받은 것이다. 사건은 이 때문이었다고 한다. 백제에서는 비류계 왕이 우(優)의 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왕이 아닌 후손들 사이에서는 바로 팔족성의 하나인 진(眞) 성을 갖고 있었다.
서기 815년에 편찬한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은 일본의 고대 씨족관계 성씨들을 수록한 것인데, 300여 개의 성을 소개하고 있다. 이들 성씨는 대부분 두 글자의 복성들이다. 백제 왕족의 후예가 일본에 건너와서 사용한 성이라고 언급한 성씨들의 기록도 있었다. 즉 구다라(百濟), 이시노(石野), 미야하라(宮原), 마쓰다(沙田), 다카노(高野), 나카노(中野), 사카다(坂田), 구니모토(國本), 니이키(新木), 사쿠라이(櫻井), 야마구치(山口), 히라다(平田), 나가다(長田) 등이 백제인들의 성씨라 한다.
《신찬성씨록》 중에는 신라 출신 도래인(渡來人)의 성씨도 있다. 나가오카(長岡), 야마무라(山村), 시미즈(淸水), 다카오(高尾), 다케하라(竹原), 야마다(山田), 도요하라(豊原) 등이 그것이다.
‘소가’씨의 시조가 된 목협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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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 초 고대 일본의 정치질서를 수립한 성덕태자. |
당시 왕조 국가에서 그러했듯 서민층은 성을 가질 수 없었다. 왕족이나 권신(權臣)들만이 성을 갖는 게 상례(常例)였다. 혈족 표시가 아니라도 신분상의 한 징표로 또는 가문의 한 상징으로 성을 가졌다. 때문에 일본도 마찬가지로 왕족과 세족(勢族)들이 응당 외국의 관습을 본받아 그 같은 성을 취했을 것이다.
백제의 팔족성 중에는 목(木)이라는 성도 있다. 《삼국사기》에서 목협만치(木劦滿致)라는 대신이 등장한다. 그는 21대 개로왕(蓋鹵王) 때 인물이다. 그와 함께 조미걸치(祖彌桀致)란 대신의 기록도 나온다. 《삼국사기》에는 ‘목협과 조미는 다 두 글자의 성인데 중국의 《수서(隋書)》에는 목협을 두 가지 성으로 기록하였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가 없다’고 하였다. 목협만치가 ‘목’이 성이라면 이름은 ‘협만치’가 된다. 그런데 《수서》는 협도 성이라고 기록하였다. 그러면 그는 ‘목협’이라는 복성이 되는 것이다.
일본의 역사에 소아만지(蘇我滿智)라는 영웅이 나온다. 그의 성이 ‘소아(蘇我)’다. ‘소아’는 일본의 발음으로 ‘소가’다. ‘소가’는 일본 나라현(奈良縣)의 한 지역에 있는 지명(地名)에서 비롯한 성이라고 한다.
이 소아만지가 바로 앞에서 말한 백제의 ‘목협만치’라는 주장이 있다. 목협만치는 일명 목만치라고도 하는데, 일본으로 건너가서 성을 바꾸고 무사(武士)로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한 손에는 칼, 다른 한 손에는 불상을 들고 일본을 평정한 영웅이었다고 한다. ‘만지’라는 이름은 ‘만치’라는 본래의 이름에서 와음(訛音)으로 표기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의 손자 대에서는 일본 최초의 사찰인 법륭사(法隆寺)를 창건하였다. 법륭사는 후에 비조사(飛鳥寺)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이 사찰은 바로 ‘소가’씨족의 사찰이라 하였다. 일본 오사카(大阪) 시내에 있는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창건한 성덕태자(聖德太子)도 ‘소가’의 성씨 사람이란 주장이 있다.
이런 말들이 사실이라면 백제의 팔족성 가운데 진씨(眞氏)와 목씨(木氏)는 고대 일본에 끼친 영향이 컸다고 할 것이다.
환무천황 때 八色姓 사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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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色姓을 없앤 환무천황. |
그런데 그들은 한결같이 외자 이름들이다. 그래서 과연 ‘진’이 성이었을까 하는 의문도 있다. 고대 중국에서 성씨 등장 이전에 족인(族人)들을 표시하면서 이름에다 글자 한 개씩을 같게 하는 일이 있었다. 신라에서도 그런 이름들이 많았다. 윤흥(允興), 숙흥(叔興), 계흥(季興)이 그 예이다.
현 한국인에게 목(木)씨 성의 사람은 없다. 진씨 성을 가진 사람들은 2000년도 통계청 조사에서 1579명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기원을 백제에다 두고 있지 않았다. 서산 진씨(西山眞氏)라고 본관 표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중국 쪽 지명의 본관 표기로 귀화인계 성씨였다. 백제의 팔족성은 백제의 멸망과 함께 사라진 것이다.
일본의 팔색성도 7세기 후반~8세기 초에 사라졌다. 환무천황(桓武天皇·782~806)이 수도를 교토(京都)로 옮기면서 황족의 성은 물론 팔색성을 없앴기 때문이다. 당시 지배계층이던 팔색성의 귀족들 사이에 싸움이 빈번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체적인 무력(武力)까지 갖추고 천황의 통치를 위협했다.
이를 틈타 다른 한편으로는 신흥세력들이 기존의 팔색성 귀족 제거에 나섰다. 당시 신흥세력들이란 팔색성의 사람들이 아닌 미나모토(源), 다히라(平), 후지하라(藤原) 등의 성씨를 사용하는 사람들이었다. 후지하라 가문이 집권했을 때는 천황의 율령제도(律令制度)마저 무너져 황족의 성씨조차 사라졌다고 한다.
일본 천황가의 성이 사라진 이유에 대해서는 다른 설명도 있다. 팔색성에 일본 열도 밖에서 들어온 이민족(異民族)의 성도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성은 일본의 천황이나 지배계층이 하나의 혈통(血統)이 아닌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때문에 일본이라는 나라의 순수성과 정체성(正體性)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아예 성씨를 없애 버렸다는 것이다. 귀화인 천황도 있고 하여 천황가(天皇家)가 하나의 혈통이 아니라는 것에 부담이 컸던 것이다. 일본에서는 만세일계(萬世一系)라고 해서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핏줄로 천황의 자리가 계속 이어져 왔다고 주장하지만,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다.
고대사(古代史)는 불확실한 데가 많다. 때문에 왜곡(歪曲)도 심한 것이다. 하지만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황제나 왕들의 성씨와 왕조가 바뀐 것을 분명히 기록으로 남겨 놓고 있다. 이 점에서 천황가의 성을 없애서 역성(易姓)의 기록을 없앤 일본과는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