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가수다> 회당 제작비 1억5000만원… 참신한 아이디어로 대박
⊙ <아빠 어디가> <진짜 사나이>의 성공… 변하지 않으면 언제든 시청자로부터 외면당한다는
철저한 반성의 결과물
⊙ 勞組가 MBC 주인이라는 自意識 → 그들의 결정만이 회사의 정통적 견해라는 논리 →
관철되지 않으면 노조 통해 조직적 대응 → 공영방송 해치고 시청자만 피해 입어
金在哲
⊙ 61세. 고려대 사학과, 영국 웨일스대학교 대학원 졸업.
⊙ MBC 도쿄특파원, 보도제작국장, 울산MBC 사장, 청주MBC 사장,
MBC 사장(2010년 2월~2013년 3월) 역임.
⊙ <아빠 어디가> <진짜 사나이>의 성공… 변하지 않으면 언제든 시청자로부터 외면당한다는
철저한 반성의 결과물
⊙ 勞組가 MBC 주인이라는 自意識 → 그들의 결정만이 회사의 정통적 견해라는 논리 →
관철되지 않으면 노조 통해 조직적 대응 → 공영방송 해치고 시청자만 피해 입어
金在哲
⊙ 61세. 고려대 사학과, 영국 웨일스대학교 대학원 졸업.
⊙ MBC 도쿄특파원, 보도제작국장, 울산MBC 사장, 청주MBC 사장,
MBC 사장(2010년 2월~2013년 3월) 역임.
노조와 극한 대립상황까지 갔던 그는 2012년 노조가 171일간 파업을 벌이자 노조 핵심 간부를 해고했다. 이에 대해 지난 1월 법원은 ‘해고는 무효’라고 판결했다. MBC는 즉각 항소 의사를 밝혀, 향후 노사(勞使) 양측의 법정다툼은 상당기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김 전 사장은 노조와 마찰을 빚는 과정에서 노조로부터 고발당해 검찰조사를 받기도 했다. 그는 노조가 고발한 법인카드 불법사용과 관련해 “정식 재판을 통해 명예를 회복하겠다”고 했다. 또 노조가 제기한 재일(在日) 국악인 여성 J씨와의 관계에 대해 “일본인 변호사 남편을 둔 그분은 일본 정관계 인사와 폭넓은 교분을 가지고 있어 특파원 시절 많은 도움을 받았다”며 “그분의 다재다능(多才多能)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내가 사장이 된 후 회사가 추진하는 행사에 그분의 도움이 필요할 때 실무자들이 판단해 출연 여부를 결정하라고 했을 뿐 노조의 기대대로 ‘여자문제’의 시빗거리가 아니다”고 주장했다.
그는 “파업 당시 일부 노조원은 나의 고향 삼천포에 내려가 거리를 돌아다니며 전단을 뿌렸는데 전단에는 수갑 찬 나의 모습이 인쇄돼 있었고 나의 얼굴에는 시뻘건 선이 그어져 있기까지 했다. 나의 아내와 딸아이는 노조원들이 무서워 숨어다녀야 했다. 자신들의 행동으로 상대방이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는지 그들은 모른다. 그들의 행위는 한 가족이 견디기에는 너무나 큰 상처였다”고 했다.
김 전 사장은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다’는 말처럼 나는 다른 사람에게 집착하지는 않는다”며 “나를 반대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나와는 인연이 없는 사람’이라 생각할 뿐 머리에 담아두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화가 쌓이게 되고 일도 못 하게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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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3월 26일 오전 여의도 방문진 사무실에서 MBC 사장 해임 건을 놓고 이사회가 열리자 김재철 당시 사장이 본인의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 들어서고 있다. |
김 전 사장은 회사에 사표를 낸 후 곧바로 고향으로 내려갔다. 앞으로도 계속 고향에 머물 계획이라고 한다. 그는 “내가 태어난 고향을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것처럼 내 영혼을 바친 MBC를 잊을 수 없다. MBC는 순혈주의를 극복해야 노영(勞營)방송의 오명(汚名)을 벗는다. 순혈주의자는 귀족적 배타성으로 인해 퇴행하며 주변의 약한 것들을 파괴시키고 도태시킨다”고 했다.
김 전 사장은 남해안의 작은 포구인 삼천포 팔포(경남 사천시)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부산으로 전학(轉學)한 후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이후 서울로 올라와 대학을 졸업하고 1979년 방송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김 전 사장은 평소 지인(知人)들에게 “기자보다 PD가 적성에 맞는 것 같다”는 말을 자주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MBC 사장이 된 후 각종 이벤트와 공연, 행사 등에 큰 관심을 나타냈다. 그는 <나는 가수다> <위대한 탄생> <댄싱 위드 더 스타> 등 새로운 형식의 프로그램을 동료·후배들과 함께 만들었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2011년의 경우, MBC 사상 최고의 매출과 연간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다음은 그가 밝힌 입장을 정리한 것이다.
2013년 3월 22일 저녁, 계열사와 자회사 사장을 비롯한 임원진 내정자를 결정하고 사내 전산망을 통해 공지했다. 물론 MBC 대주주이면서 본사 임원 선임권을 가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과 사전에 협의했다. 일부 계열사의 경우 임기를 다한 사장이 있었기 때문에 법적 요건을 충족하기 위해서라도 더는 미룰 수 없었다. 인사를 순연(順延)시킨 사유가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 유고(有故)였기 때문에 신임 이사장이 호선(互選)되고 나서 서둘러 진행한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날 밤, 23일자로 임시 이사회가 소집됐다는 보고를 받았다. 토요일에 이사회를 소집하는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인 데다 소집 사유가 계열사와 자회사 임원 인사 문제로 예상됐기 때문에 의아했다. 그런데 일부 이사들이 본사(本社) 사장 해임을 건의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상황임을 직감했다. 하지만 본사 사장의 정당한 인사권을 문제시해 해임안을 가결할 것으로 보지 않았다.
상정된 해임안을 논의하기 위한 임시 이사회는 3월 26일 열렸다. 오전 9시30분경, 이사 전원이 출석해 이사회가 개회됐다. 11시30분경 해임안에 대한 표결이 시작돼 5분 만에 표결이 끝났다. 결과는 5대 4로 해임안 가결이었다.
나는 다음날 사임서를 냈다. 적어도 해임은 받아들일 수 없었으므로 스스로 사임한 것이다. 1979년 시작된 청년 김재철과 MBC와의 34년 인연은 그렇게 5분 만에 끊어졌다.
그 후 나는 고향 삼천포로 내려갔다. 떠났지만 떠날 수 없었던 고향으로, 떠났지만 떠날 수 없는 MBC를 생각하며 내려갔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떠난 고향을 영원히 떠날 수 없었던 것처럼 회갑에 떠난 MBC를 나는 영원히 떠날 수 없다. 내 태를 묻은 고향을 잊을 수 없는 것처럼 내 영혼을 바친 MBC를 잊을 수는 없는 일이다.
강촌에서 탄생한 <나가수>와 <신입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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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가수다>는 회당 제작비 1억5000만원을 투입했다. |
<일밤>의 경쟁력을 높여야 하는 현실적 고민과 더불어 아나운서라는 직업적 특성을 고려한 새로운 선발제도 실험이라는 이중(二重) 과제를 안고 강촌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120명이 넘는 보직 부장 이상 간부 전원이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었다.
본격적인 논의는 밤에 이뤄졌다. 조촐한 뒤풀이 자리였다. 방송인들은 대개 공식 회의 때보다 사적인 자리에서 이른바 ‘말발’이 통한다. 그날도 그랬다. <나는 가수다>와 <신입사원>이 동시에 제기됐다.
당시 예능국 원만식 부장이 2차 자리를 끝낸 뒤 “다시 방으로 가서 한잔 더 하자”며 나를 잡았을 때 시간은 바야흐로 자정을 넘겼다. 안우정 예능국장도, 김영희 PD도, 사화경 PD도 동석했다. 예능 PD 모이면 예능 얘기하는 게 인지상정(人之常情)이었다. 좌우간 트렌드를 새로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견이 대종을 이루었다.
<느낌표!>의 ‘쌀집 아저씨’ 김영희 PD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아주 쌈박한 아이디어가 있기는 한데, 어째 안 될 것 같다”며 허두(虛頭)를 뺐다. 이미 대성한 쟁쟁한 가수들을 한번 무대에 올려 경쟁시켜 보자는 거였다. ‘누가 누가 잘하나’ 식의 치기 어린 경쟁이 아니라 이미 최고의 반열에 올라선 가수들을 경쟁시킨다면 그 자체가 하나의 이슈가 될 것이며 시청자들은 수준 높은 라이브 음악을 방송으로 볼 수 있을 것이란 게 요지였다. ‘쌀집 아저씨’는 이런 프로그램이 쉽게 시도될 수 있을까 회의하는 눈치였다.
나와 안우정 예능국장은 그 자리에서 맞장구를 쳤다. 일순간 프로그램의 포맷이 거의 확정되다시피 했다.
“야, 그거 되겠다” “그 사람들이 손해 볼 게 뭐 있어?”
최근 활동이 뜸했던 분들이니 재조명을 받는 길이 아니겠느냐는 거였다. “남극 갔다 와서 훈장 받은 것도 다 내가 처음 갔기 때문 아니겠느냐”며 시도해 보는 게 바로 이기는 길이라고 나는 강조했다.
설사 탈락하는 가수가 나와도 가수들 본인에게는 해로울 게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빛나는 현역’으로 만드는 데 일요일 저녁 시간대를 주름잡던 <우리들의 일밤>은 결코 불리한 조건이 아니라 생각했다. 안우정 국장도 찬성표를 던졌다. 그래서 탄생한 게 바로 <나는 가수다>였다. 김영희 발(發), 안우정·원만식 경유, 김재철 도착의 선로(線路)는 그렇게 강촌의 새벽에 완성됐다.
<나는 가수다>는 첫 방송부터 시청자들의 일요일 오후를 아주 들뜨게 만들었다. 가히 폭발적인 반응이었다. 시청률만의 호조를 넘어 일종의 사회 현상으로까지 볼 수 있는 변화가 나타났다. 이른바 ‘폐인’으로 불리는 시청자 집단이 형성되고 각 매체마다 연일 기사를 쏟아냈다.
<나가수>는 아이디어 하나만으로 그런 놀라운 반응을 얻은 것이 아니었다. 예능 프로그램으로는 유례를 찾기 힘든 회당 1억5000만원의 제작비를 투입했다. 최고의 무대, 최고의 조명, 최고의 음향을 만들어내기 위해 경영진부터 일선 현업자들까지 뛰었다. 카메라만 해도 30여 대 가까이 투입했다. 수없이 많은 앵글이 가수와 관객들의 표정 하나하나를 모두 잡아냈다. 가수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열창하고 관객들은 최고의 무대에 감동을 받았다. 모두가 영혼을 바쳐 공연했고 그것은 마땅히 성공의 길이 될 수 있었다.
시청자가 뽑은 新入 아나운서
<신입사원> 얘기는 내가 꺼냈다. 아나운서야말로 MBC의 얼굴이며 가장 중요한 직종이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일밤>이 필요로 했던 변화의 아이템이 될 수 있다고 봤다. 사실 나는 역대 사장 가운데 아나운서를 가장 아끼는 사람이었다고 자부한다.
평소 아나운서의 재능과 능력이 기자나 PD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低)평가됐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나운서는 국민의 꽃이고 방송의 꽃이다. 실제로 비중 있는 프로그램의 MC를 맡고 뉴스를 진행하는 사람들이 바로 아나운서다. 아나운서들은 인적 네트워크도 좋고 친절하고 유능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명랑운동회>의 변웅전 선배, <장학퀴즈>의 차인태 선배, 지금은 중진 국회의원이 된 한선교 의원 얘기를 굳이 꺼내지 않더라도 아나운서의 역량을 익히 알 수 있다. 현직에 있는 최재혁 국장만 해도 한글날 특집 다큐멘터리로 여러 차례 상(賞)을 받았다. 방송의 최종 전달자로서나 프로그램 제작 능력에서나 아나운서들의 잠재력은 무궁무진했다.
그런 점에서 신입 아나운서를 공개적으로 뽑아보자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헌법적 가치도 있다고 생각했다. 온 국민에게 기회를 주자는 것이기도 하니까.
공고를 낸 후 무려 5500명이 넘는 지원자가 신입 아나운서가 되겠다고 응모했다. 한마디로 열광적인 호응이었다. 지원자들의 수도 놀랍지만 실로 여러 분야를 전공한 사람들이 두루 지원해서 마음껏 끼를 발산했다. 예를 들어 오승훈 아나운서는 카이스트에서 항공우주공학 박사과정을 수료한 경력자였다. 나로호 발사팀에 들어가야 할 사람이 아나운서가 되겠다고 지원한 셈이었다. 25세 때까지는 아나운서에 전혀 관심이 없었으나 2005년 황우석 박사 사건을 통해 언론이 국민과 함께 생각해 볼 만한 이슈를 이끌어내는 것이란 생각을 했고 마침내 아나운서에 도전하게 됐다고 했다.
이 밖에 경영학도, 법학도, 사회학도, 문학도 등 다양한 전공자가 ‘신입사원’이 되겠다고 지원해 담당 PD를 비롯해 아나운서 선배들까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전국의 다양한 인재들이 한바탕 경합을 벌이는 예비 아나운서들의 경연은 2011년 3월 6일부터 6월 26일까지 방송됐다. 시청률도 어느 정도 호조를 이어갔다. MBC 신입 아나운서를 뽑는 최종 결정권을 시청자에게 건넸으니 그 정도의 흐름은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 짐작하기도 했다. 그때 국민들이 뽑아준 김대호, 오승훈, 김초롱 아나운서는 현재 MBC의 각종 프로그램을 통해 유능한 아나운서로서의 길을 열심히 걸어가고 있다.
DMZ 60주년 이벤트 기획 중 나온 <진짜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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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빠 어디가> <진짜 사나이> 등 예능프로그램의 성공은 변하지 않으면 언제든 시청자로부터 외면당한다는 철저한 반성의 결과물이었다. |
<아빠, 어디가?>는 원만식 예능본부장을 비롯한 예능국 사원들의 창의적 노력 끝에 탄생한 프로그램인데 아빠와 아이들의 오지 체험 여행기를 담은 ‘힐링 예능’ ‘착한 예능’이라는 수식어로 통한다. 현대 사회는 아빠와 아이들이 만나는 시간이 극히 적다. 대개 아빠는 평일에 생활현장에서 바삐 일한다. 그리고 주말이 되면 피곤한 몸을 쉬기 위해 밤에도 낮에도 잠을 잔다. 도시의 아빠들과 아이들은 구조적으로 만나고 놀 수 있는 시간을 박탈당한 채 살고 있는 셈이다.
<아빠, 어디가?>는 성동일, 김성주, 이종혁, 송종국, 윤민수 등 다섯 아빠가 스타가 아닌 평범한 아버지로서 아이들과 함께 여행을 떠난다는 콘셉트로, 아이들의 꾸밈없는 순수함과 아빠들의 진솔한 모습이 시청자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 도시 생활에 지친 아빠와 그 아빠를 보고 싶어도 마음껏 보지 못하는 아이들의 조촐한 여행은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의 가정에 큰 위로가 되는 프로그램이다. 일상적 삶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게 경쟁력이 되었고, 거기에 시청자가 반응한 것이다.
<진짜 사나이>가 첫 방송이 되던 날 <아빠, 어디가?>의 시청률은 15.3%(TNms·수도권 기준)로 동 시간대 1위를 달리고 있었는데 <진짜 사나이>들의 병영 분투기가 인기를 끌면서 <일밤>은 모처럼 일요일 동 시간대 전편이 1위를 달리는 기록을 달성했다.
<진짜 사나이>의 제안자는 어쩌면 나였다. 2013년 DMZ 60주년을 맞아 대형 이벤트를 구상하고 취재하며 협의하던 중에 자연스레 태동한 아이디어였다. 사상 최장기 파업 중인 터라 갑자기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 모르니 멀리까지는 가지 못하고, 그저 전방 부대를 돌며 회사 현안에 대한 생각도 정리하고, 사업 아이디어도 개발하곤 했다.
전방 부대 여기저기를 찾아다닌 끝에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입영(入營)장병 환송회를 하면 어떨까 생각했다. 환송회를 마치고 용산역에서 입영열차가 출발하는 장면도 상상해 봤다. 신세대 장병들의 병영생활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많이 나올 것이라 생각했다. 큰 인기를 끌었던 <우정의 무대>처럼 한 분의 어머니가 한 명의 장병을 만나는 게 아니라 한 20명, 100명의 어머니가 동시에 만나는 방식도 생각했다. 만나는 장소가 최전방 부대가 아니라 교통편이나 여러 여건이 좋은 서울이라면 가능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또한 전방 야전 부대의 모범 사병을 불러 인기 아이돌 가수들이랑 1일 데이트를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건 어떨까 생각도 했다. 김관진 장관을 만났을 때 얘기를 해서 도움을 주겠다는 확답도 받았다.
임원회의 때 나의 생각을 제안했다. 예능 쪽에서는 너무 우려먹어서 재미없을 것 같다는 반응이었다. 처음부터 너무 큰 스케일로 추진하다 보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제작비 부담도 따를 수 있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 사이 원만식 본부장은 제작진을 대상으로 설득해 나갔다. 다각적인 논의와 검토 끝에 규모는 처음보다 대폭 축소됐지만 마침내 지금의 <진짜 사나이>가 나왔다.
두 프로그램의 성공은 MBC가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일요일 저녁 시간대를 되찾아왔다는 의미만 있는 게 아니다. 한 주일의 고된 생활에 지친 국민들에게 유쾌한 시간을 만들어줌으로써 새로운 한 주를 활기차게 시작할 수 있게 도와주고, 건강한 가정을 만드는 데 큰 보탬이 된다는 의미도 있다.
2011년 3월 12일, 먼저 태국 방콕에서 공연을 열었다(4월 17일 방송). 창사 50주년 기념으로 ‘2011 코리안 뮤직 웨이브 인 방콕’ 공연을 개최한 것이다. 동방신기, 소녀시대, 원더걸스, 2PM, SG워너비, 애프터스쿨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정상급 아이돌 그룹 17개 팀이 대거 출연했다. 방콕 라차만갈라 국립 경기장에서 3만8000여 명의 관객들은 안 그래도 더운 나라에서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를 만들었다. 화려한 무대와 조명이 설치되고 출연진의 리허설이 시작되자 수많은 팬은 좋아하는 그룹을 연호하며 열렬한 ‘팬심’으로 콘서트 장을 달궜다. 축포와 함께 시작된 공연은 방콕의 한밤을 더욱더 뜨겁게 만들었다.
韓流, 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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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호주에서 최초로 열린 K-POP 공연은 현지 관객의 열렬한 호응 속에 대성황을 이뤘다. |
프랑스 파리에서도 K-POP의 위력은 대단했다. ‘SM타운 라이브 월드 투어 인 파리’ 공연과 대한민국 가수들에 대한 현지의 뜨거운 반응을 담은 <한류, 아시아를 넘어 세계로>란 특집 프로그램을 통해 파리의 K-POP 열기를 전했다(7월 2일 방송). 공연은 6월 10일과 11일 이틀간 파리 ‘Le Zenith de Paris’에서 열렸다. 우리의 대표적인 인기 가수들이 유럽에서 처음 시도하는 상업적 합동 공연으로, 드라마에서 시작된 한류가 아시아를 넘어 유럽까지 저변을 넓힐 수 있을지 시험하는 무대기도 했다.
이 공연은 인터넷으로 예매를 시작한 지 10분 만에 1400석 전(全) 좌석이 매진되고, 추가 공연을 요구하는 루브르박물관 플래시몹 시위가 열렸을 뿐 아니라, 출연진의 입국을 보기 위해 샤를 드골 공항에만 1500여 명의 팬들이 운집하는 대(大)이변을 연출했다. 국내 언론이 연일 기사를 쏟아낸 것은 당연했고, 프랑스의 유력 일간지인 《르 몽드》와 《르 피가로》는 “유럽을 덮친 한류” “한류가 프랑스의 르 제니스를 강타”란 제목으로 대서특필했다.
2011년 한 해 동안 MBC가 추진했던 대형 해외 K-POP 공연은 <대장금>을 비롯한 드라마에서 시작된 한류를 한 단계 확장시키는 계기가 됐다. 2012년에도 LA, 샌프란시스코, 고베 등지에서 대형 공연을 계속 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구글에서 연락이 왔다. MBC의 한류 콘텐츠를 유튜브에 올리고 싶다고 했다. LA에서 구글 수석부사장을 만났다. 이후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구글코리아와 ‘콘텐츠 유통 파트너십’ 계약을 체결했다. K-POP만이 아니라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까지 탑재되는 기초 작업이 성사된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구글 유튜브에 MBC World(홍보 채널), MBC Drama, MBC Entertainment, MBC K-POP, MBC Classic(과거 드라마) 등 5개 채널이 가동되면서 MBC의 글로벌 온라인 플랫폼이 문을 열었다. 5~6분 분량의 동영상 클립 9만 개, 9000여 시간에 달하는 콘텐츠가 유튜브를 통해 세계인에게 공급되기 시작했다.
<뉴스데스크>, 50년 만의 변신
2012년 11월 5일, 메인 뉴스 프로그램인 <뉴스데스크>의 평일 방송 시간대를 8시대로 옮겼다. 실로 50년 만에 변신을 시도한 것은 역설적으로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이미 2010년 11월 1일부터 주말 <뉴스데스크> 방송 시간대를 8시로 옮겨 준비를 했을 뿐 아니라 회사 매출과 시청률 면에서 최고의 실적을 올린 저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2011년 MBC는 영업수익과 영업외수익이 전년 대비 32% 증가하여 영업이익은 740억원, 당기순이익은 1174억원으로 크게 증가했다. 방송통신위원회의 <방송산업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KBS는 같은 해 영업비용 증가로 651억원의 영업손실이 발생한 상태였지만 영업외수익으로 48억원의 당기순이익을 냈다. SBS도 580억원의 당기순이익을 내는 데 그쳐 지상파 방송 3사 가운데 MBC는 압도적인 매출 증대를 기록했다.
연간 시청률도 8.2%를 기록하며 방송사 전체 1위를 차지했다. 1월부터 10월까지 10개월 연속 월간 시청률 1위를 달리기도 했다. 2010년 3위를 기록하던 시청률이 급격히 반전되면서 채널 전체 경쟁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핵심 시간대인 평일 저녁 7시부터 자정까지, 주말 오후 5시부터 자정까지의 시청률을 따로 분석한 바에 따르면 11.9%로 연간 1위를 기록했다.
언론 본연의 기능 충실해야
국민 생활 패턴이 바뀌고 있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케이블 방송, 위성 방송 등 방송을 볼 수 있는 수단이 많이 생긴 데다 DMB 방송을 통해 이동하면서도 실시간으로 TV와 라디오를 시청취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IPTV를 비롯해 각종 인터넷 기반의 매체를 통해 시청자가 원하면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프로그램을 볼 수 있게 되었고, 무엇보다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시청자 개인이 원하는 방송 정보는 그야말로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가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방송 시간대를 변경할 수 있는 여건은 그만큼 성숙되었다고 보았다.
물론 시간대 변경만으로 핵심 뉴스 프로그램이 50년간의 관행을 뒤로하고 손쉽게 자리 잡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보도국을 중심으로 회사 내부의 강한 반발도 있었다.
그러나 <뉴스데스크>를 8시 시간대로 옮기는 것은 시청 행태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근본적 변신일 뿐 아니라, 뉴스를 공급자 중심에서 수용자 중심으로 변환시키는 겸허함이기도 했다. 국민과 시청자는 더 이상 일방적인 구제의 대상이 아니며, 계몽의 대상은 더더욱 아니었다. 오히려 기자들의 취재물이 국민과 시청자들에게 제시되었을 때 그들이 판단하고 결정하는 주체로 변화되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기자는 더 이상 사회의 그늘진 곳을 앞장서 계도하는 사람이 아니며, 잘못된 현실을 개선하는 첨병도 아니다. 기자는 사실을 전달해 그 현장의 주체들이 현실을 바꿔가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전달자일 뿐이다. 정확한 정보를 전달해야 한다는 제1 명제에 충실할수록 언론 본연의 기능이 충일해지는 것이지, 이러저러한 논평과 비유에 의탁한 몇 마디 촌철살인으로 참 언론을 기대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반대로 국가적 이슈에 대해 외부에서 보도 태도를 문제시하는 분들도 있었다. 그분들의 의견에 대해서는 MBC의 합리적 가치관을 믿어달라는 주문 이외에 다른 대응을 한 적이 없다. 오히려 보도야말로 우리가 전문가들인데 우리의 상식을 믿어달라는 말만 보탰을 뿐이다.
막강 勞組와 상처받은 시청자
어느 조직이든 순혈주의는 퇴행의 잠재적 원인이 된다. 방송사는 대개 신입사원을 정기 공채로 뽑는데, 공채 방식이 도입된 후 세월이 쌓이면서 조직 내에는 이들이 하나의 수직적 기수 문화를 형성해 내부적으로 위계질서를 만들고, 외부적으로는 배타성을 띤 순혈주의 집단으로 변모해 간다.
MBC의 경우에도 공채가 신입사원 선발 수단으로 정착된 이래 오랫동안 이들 대졸신입 정기공채 사원들이 회사의 대다수를 차지하면서 점차 순혈주의 집단으로 변모되어 갔다. 순혈주의는 귀족주의와 쉽게 연결된다. 대졸신입 비정기공채, 대졸경력 비정기공채, 전문계약직, 계약직, 업무직, 연봉직, 파견직, 도급직 등 근래 들어 다양한 방법으로 입사한 사람들에 비해 자신들이 우수하다고 믿고 있으며, 회사의 주인은 바로 자신들이라는 자의식을 갖고 있다. 그들의 논의와 이합집산에 의해 결정된 의견은 곧 회사의 정통적 견해가 되며, 그들의 입장이 관철되지 않을 때는 노조를 통해 조직적으로 대응한다.
대졸신입 정기공채를 통해 입사한 이들은 직종별로 배속되어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노조의 직제로도 편제되어 있다. 노조는 위원장 아래 보도, 교양, 영미, 경영, 기술 부문 식으로 직종별 부위원장을 두고 있다. 각 조합원들은 이들 부위원장단 아래 속해 그 체계를 따른다. 역으로 조합원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경로도 이와 같으니 노조의 조직력은 실로 막강하지 않을 수 없다. 신입사원 선발제도와 노조의 지배력 사이에는 이와 같은 연결 고리가 있다.
2012년 노조의 장기간 파업으로 인력 부족이 심각해지자 나와 경영진은 계약직 기자를 채용한 바 있다. 매일 방송되는 분량에 비춰 타 부문보다 결손이 심각했던 기자직에 대해서는 긴급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최악의 경우 보직 간부를 포함해 겨우 20여 명이 뉴스 분량을 채워야 하는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파업이 장기화되자 경력직 직원을 채용해 수습 기간 없이 바로 현장에 투입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런데 노조는 ‘시용 기자, 영혼 없는 기자’를 외치며 강력 반발했다. 기자들이 떠난 자리에 계약직 기자와 경력 기자를 채워 정상적인 방송을 도모한 것이 얼마나 못마땅했으면 멀쩡한 사람더러 ‘영혼이 없다’고 악담을 했을까. ‘능력 있고 뛰어난 기자들’이 장기간 취재 현장을 떠나 파업하는 동안 그들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그들은 결코 무능한 사람들이 아니며 ‘영혼이 없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그들은 사실 노조와 선배·동료 기자들의 집단 따돌림의 공포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취재했고, 그들이 있어 그나마 뉴스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갈 수 있었다.
MBC를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진정한 공영방송으로 만드는 데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필요하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분명 순혈주의 극복이다. 순혈주의자는 그 귀족적 배타성으로 인해 퇴행하며, 그 악화의 고리는 무섭게 빠른 속도로 주변의 약한 것들을 파괴시키고 도태시킨다. MBC가 순혈주의의 그늘을 쉽게 못 벗어나는 이유는 강력한 노조의 반발 때문이다. 순혈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면 노사 문제는 결코 건강한 긴장 관계로 정립될 수 없을 것이다.
2012년 1월 27일, 노조는 <총파업 특보> 제1호를 발간했다. 조합원 찬반 투표 결과, 총원 939명 중 783명이 투표해 83.4%의 투표율을 기록, 찬성 533명, 반대 235명, 무효 15명으로 찬성률 69.4%로 총파업에 돌입한다는 기사였다. 아울러 2010년 39일간의 파업 때 기록한 찬성률 72.7%에 비해 다소 낮아졌지만, ‘김재철 사장 퇴진을 위한 종결투쟁인 점을 고려할 때 70%에 이르는 찬성률을 기록한 것은 기대 이상의 높은 결과로 보인다’고 했다.
“김재철 부역자들과 업무상 관계만 유지하라”
노조가 실토한 대로 명분도 빈약하고 목적 달성도 불분명한 파업은 이와 같은 ‘기대 이상의 결과’를 바탕으로 2012년 1월 30일 06시부터 시작됐다. 이름하여 ‘김재철 사장 퇴진과 공영방송 MBC의 정상화를 위한 총파업’은 그로부터 171일이 지난 7월 18일 오전 9시까지 이어졌다. 사상 최장 기간의 파업은 그러나 노조에는 너무 큰 상처만을 남긴 채 아무런 소득도 없이 끝나고 말았다. 회사도 프로그램 경쟁력이 추락하는 큰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MBC 노조의 파업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바로 시청자였다.
반성과 성찰을 잃어버린 공룡 노조,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사실상 MBC를 쥐락펴락했던 노조는 파업을 ‘잠정 중단’한다며 조합원들에게 다음과 같은 ‘복귀투쟁 지침’이란 걸 내렸다.
<▲전 조합원은 방송의 공정성을 사수하고 무너진 공영성을 재건하겠다는 각오로 성실히 업무에 임한다. ▲전 조합원은 회사의 부당한 업무 지시를 일절 거부한다. ▲전 조합원은 김재철 체제의 부역자들과 업무상 관계만 유지한다. ▲전 조합원은 부당한 업무 지시가 있을 경우 조합의 부당지시 신고센터에 신고하도록 한다. ▲전 조합원은 공정방송을 저해하는 일체의 지시 및 훼방 행위들을 조합 민실위에 즉각 알린다.>
최고의 시청률과 매출로 승승장구하던 회사를 장기간의 파업으로 최악의 위기 상황으로 내몰았을 뿐 아니라, 시청자들에게 큰 피해를 준 노조가 얼마나 심각하게 상황을 오판하고 있었던 것인지 여실히 보여주는 ‘지침’이다. 무엇보다 ‘부역자들과 업무상 관계만 유지한다’는 항목은 유치하기까지 하다. 파업에 참여하지 않고 업무에 임한 사람들을 ‘부역자’로 호칭한 것부터 잘못된 것인데, 그렇다고 동료들과의 인간적 친분까지 차단하려는 몰지각한 발상에 허탈감마저 느끼게 된다.
‘회사의 부당한 업무 지시를 일절 거부한다’는 것도 자가당착이다. 회사란 본래 부당한 업무 지시를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설사 오해를 살 만한 지시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 ‘부당성’을 판단하는 주체가 노조라는 발상은 그간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진 집단이었는지를 방증하는 말이기도 하다. 원칙적으로 회사는 부당한 업무 지시를 하지 않는다. 할 수도 없다. 회사는 회사가 필요로 하는 일을 수행하도록 회사원에게 명할 수 있을 뿐이지 ‘부당한 지시’를 내릴 수 없다. 어떤 회사가 ‘부당성’을 전제한 업무 지시를 한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회사의 정상적인 업무 지시도 노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부당한 지시가 되는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노영방송’에 딱 부합하는 오만이 아닐 수 없다.
파업이 한창 진행 중이던 2012년 5월 J 위원장의 요청으로 그를 만났을 때 이런 조건을 제시했다. 시시비비를 가리는 업무를 담당하는 보도국장, 보도제작국장, 시사교양국장, 라디오제작국장, 편성국장 등 5개 국장의 ‘2배수 추천제’를 받아들이면 그간 파업 중에 제기한 각종 문제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고 남은 임기 동안 사장을 잘 모시겠다는 거였다.
나는 드라마 <무신>을 빗대어 이렇게 대답했다. 핵심 보직이라고 할 수 있는 “5개 국장 2배수 추천제를 받아들이라는 것은 무신 집권기의 허울뿐인 임금 ‘고종’을 하라는 것이냐? 그렇다면 단 하루를 사장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제안 자체가 사장의 인사권을 결정적으로 침해하는 것인 데다 거기서 물러나 타협하면 사실상 내가 식물인간으로 전락하는 것이었다. 비록 사장인 내가 소수파이고 약자이긴 했지만, 그런 속내를 받아들이는 타협은 할 수 없었다.
“돈 문제 여자 문제, 이겨낸 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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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선을 앞둔 2012년 4월 울산, 포항, 대구에서 지원유세를 펼친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중앙선대위원장의 유세현장마다 파업 중인 MBC 노조원들이 나와 김재철 사장 퇴임을 요구하는 피켓시위를 벌였다. |
먼저 법인카드 사용 건과 관련해 몇 가지 밝혀두고 싶다. 노조가 주장한 법인카드 사용액 6억9000만원은 비서실과 특보단 및 본부장 사용액 가운데 일부가 합산된 것이다. 무엇보다 업무 외 용도로 사용한 적도 없었다. J씨에게 공연을 몰아줬다는 것도 공연의 성격과 내용에 따라 실무자들이 판단하고 결정한 것이지 사장이 이래라저래라 한 게 아니었다. 또 아파트를 구입한 것도 대출을 받아 실명으로 구입한 것이지 타인 명의로 산 게 아니었다. 노조는 결국 개인적인 흠결을 찾아내 공격하면 물러날 것이라 생각했다는 점에서 최악의 카드를 빼낸 셈이었다.
사장으로 선임된 뒤부터는 골프도 일절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기자로서 평생 동안 지탄받을 만한 일은 한 적이 없다. 심지어 재임한 3년 동안 조부모와 부모 제사에도 참례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바빴기 때문이다. 또한 공영방송 사장이 갖춰야 할 도덕적 기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노조는 과거 파업 때 사용했던 승리의 공식을 그대로 복사해 스스로 실패의 길을 걸어가고 말았다고 본다.
10개월에 걸친 경찰의 세밀한 수사에도 불구하고 혐의가 없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2013년 1월 15일 서울 영등포경찰서는 법인카드 관련 고발 사건과 관련해 무혐의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노조가 주장한 ‘배임’ 등의 고발 사건을 조사한 결과 ‘배임’으로 볼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2013년 12월 31일, 서울남부지검은 노조가 제기한 여러 사건에 대해 무혐의 처분했으며, 수억원대의 법인카드 사용 고발 사건에 대해서는 1100만원만 소명이 부족하다고 판단, 약식기소한다고 발표했다. 나는 이에 대해 정식 재판을 청구할 예정이며, 재판을 통해 노조의 부당한 음해와 왜곡을 바로잡고 명예회복의 계기로 삼으려 한다.
무용가 J씨와 관련한 내용은 한마디로 음해다. J 선생은 1995년 도쿄특파원 시절 기자와 취재원으로 처음 알게 됐다. 그는 무용가로서 세계적인 기량과 능력을 겸비했던 최승희 선생의 사진첩을 내게 제공했는데, 당시로서는 대단한 특종이었다. J 선생은 일본인 변호사와 결혼해 일본 정관계의 인사와 폭넓은 교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 덕에 특파원으로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J 선생은 한국 무용가로서 춤뿐만 아니라 노래와 연기까지 겸비해 《요미우리신문》을 비롯한 일본의 많은 언론으로부터 주목을 받고 있었다. 나는 그분의 다재다능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회사가 추진하는 행사에 그분의 도움이 필요할 때는 실무자들이 판단해 출연 여부를 결정하라고 했을 뿐이다. 말하자면 취재원이자 업무 파트너로 만나 도움을 받은 것이지, 노조의 기대대로 ‘여자문제’의 시빗거리가 아니었다.
집사람과 딸아이가 입은 씻을 수 없는 상처
노조의 비인간적이고 몰상식한 행동은 계속 이어졌다. 공정방송이나 공영방송 사수가 아니라 오로지 사장 퇴출만을 목적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들은 온갖 잔인한 행각을 서슴지 않았다. 노조 집행부는 연조가 낮은 기자와 PD들에게 사장의 뒤를 미행토록 하고 집 주변을 감시하도록 했다고 한다. 지방은 물론 해외에까지 노조원을 파견해 내 동선을 감시했다. 반포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던 아내는 MBC 사장 부인인 게 알려진 데다 노조원들의 악의적인 선전으로 이미지가 나빠지자 폐업 신고를 하고 말았다. 집사람과 딸아이는 노조원들을 피해다니기 바빴다. 고향 삼천포에 내려간 일단의 조합원들은 피켓을 들고 거리를 활보하며 전단까지 돌렸다. 그 전단은 내게 수갑을 채웠고 얼굴에 빨갛게 선을 긋기까지 했다. 나를 잘 모르는 고향 사람들은 노조원들의 주장이 맞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 노조는 4·11 총선(總選) 즈음에 그런 전단을 들고 서울 시내 곳곳을 활보하며 마치 MBC가 정권의 하수인이 되어 불공정 방송을 하고 있다는 이미지를 심어줬다. 그것은 일종의 선거운동이었다. 정치 노조의 정치 감각은 2012년 4월 총선과 12월 대선(大選)을 겨냥하고 있었다. 집권 여당과 당시 정권을 불리하게 만드는 것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노조는 파업을 접고 업무에 복귀할 때에도 진지한 성찰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지만, 지금까지도 그들이 자행한 행동이 상대에게는 얼마나 큰 상처를 낸 것인가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있다. 그들이 저지른 행위는 분명 한 개인이 견디기에는 너무나 큰 상처였다.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다’는 말처럼 나는 다른 사람에게 집착하지는 않는다. 내가 바람처럼 떠났다 돌아오는 사람이니 다른 사람이 그러는 걸 어떻게 막겠는가. 나를 반대하는 사람도 있고,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그런 사람을 ‘나와는 인연이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만다. 계속해서 머리에 담아두면 화가 쌓이게 되고, 일도 못 하게 된다. 화를 쌓아두지 않고 곧장 풀어버리니 아무리 힘든 상황이 있다 하더라도 언제나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노조는 파업을 접은 직후부터 그해 11월까지도 끊임없이 ‘사장 곧 물러난다’는 환상을 조합원에게 심어주면서 대열을 유지하고자 했다. 스스로 실패를 인정하기에 노조의 용기는 부족했고, 철저한 자기반성을 하기에 노조는 미성숙한 집단이었다. 오랜 시간 절대 권력을 행사하며 그것에 적응한 나머지 오직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라는 목표 달성을 위해 자기 조절 능력까지 상실한 채 정치적 집단으로 변모해 갔다.
33년4개월,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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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적 경남 사천(삼천포 팔포) 바닷가에서 마음껏 뛰고 달리던 소년 김재철을 두고 어머니는 ‘바람아’라고 불렀다. |
며칠 사이지만 가만히 있고는 살 수 없는 체질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후배가 대표로 있는 ‘뮤지컬 컴퍼니 유’라는 회사로 갔다. 직함은 회장이지만, 실은 ‘왕PD’로 일하고 있다. 기획서 검토도 하고, 협찬처도 찾아다니고, 연출자나 출연자도 만나고, 심지어 보도자료까지 챙기는 분주한 생활이 다시 시작됐다. 직원 대여섯 명의 작은 회사지만, 쉬지 않고 기획하고 만나고 찾아다니는 생활은 내게 큰 생동감을 주었다.
반가운 소식도 들었다. 내가 오랫동안 후원회장을 맡고 있는 가산오광대 공연팀이 2013년 11월 인천에서 열린 ‘대한민국 탈춤 경연대회’에서 영예의 대통령상을 수상한 것이다. 전국의 초중고 학생 공연단이 모두 참가한 대회에서 최고상을 받았으니 실로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인간문화재 제73호 한우성 선생의 지도로 전교생이 38명에 불과한 사천 축동초등학교 학생들이 이룬 성과다. 이런 것만 봐도 사는 곳이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열정을 갖고 노력하느냐가 성공의 요건이란 걸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뮤지컬을 만들어 공연도 하고, 어린 학생과 학부모를 대상으로 강연도 하고, 가산오광대 공연팀과 함께 무대를 구상하는 생활, 이것이 MBC를 떠난 지금의 내 일이다. 비록 시골의 작은 도시지만, 문화와 예술을 바탕으로 살기 좋은 고장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바로 내 일이다. 말하자면 ‘고향 디자이너’로서 인생 후반기를 활력적으로 살아가는 오랜 꿈이 실현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