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최초의 행위예술가, “20대의 나는 작품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두렵지 않았다”
⊙ 상반신 누드 해프닝으로 ‘미니스커트와 장발족 단속을 불러온 여인’으로 낙인찍혀
⊙ 오빠는 ‘빨간구두 아가씨’의 가수 남일해, 남편은 영화 <제5의 사나이>의 남상진 감독
⊙ 칠순의 나이에도 하루 10시간 이상 작업, “심심할 틈도, 늙을 새도 없다”
정강자
⊙ 70세. 홍익대 회화과 졸업. 홍익대 미술교육과 대학원 졸업.
⊙ ‘신전’ 동인으로 ‘한국청년작가연립전’ 참가. ‘그림이 없는 그림전(무체전)’ 등 개인전 32회
(1970~2008), 음악감상실 ‘세시봉’에서 정찬승 강국진과 함께한 ‘투명풍선과 누드’ 등 해프닝 3회
(1967~1969), 한국일보 <그림이 있는 기행문> 연재(1988~1992), 독일 함부르크 초대전(2008) 등.
⊙ 저서: 《불꽃 같은 환상세계》 《꿈이여 환상이여 도전이여》 《일에 미치면 세상이 아름답다》 등
다수.
⊙ 상반신 누드 해프닝으로 ‘미니스커트와 장발족 단속을 불러온 여인’으로 낙인찍혀
⊙ 오빠는 ‘빨간구두 아가씨’의 가수 남일해, 남편은 영화 <제5의 사나이>의 남상진 감독
⊙ 칠순의 나이에도 하루 10시간 이상 작업, “심심할 틈도, 늙을 새도 없다”
정강자
⊙ 70세. 홍익대 회화과 졸업. 홍익대 미술교육과 대학원 졸업.
⊙ ‘신전’ 동인으로 ‘한국청년작가연립전’ 참가. ‘그림이 없는 그림전(무체전)’ 등 개인전 32회
(1970~2008), 음악감상실 ‘세시봉’에서 정찬승 강국진과 함께한 ‘투명풍선과 누드’ 등 해프닝 3회
(1967~1969), 한국일보 <그림이 있는 기행문> 연재(1988~1992), 독일 함부르크 초대전(2008) 등.
⊙ 저서: 《불꽃 같은 환상세계》 《꿈이여 환상이여 도전이여》 《일에 미치면 세상이 아름답다》 등
다수.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봄나들이 가는 소녀처럼 들떠 있었다. 70대 나이가 믿기지 않았다.
서양화가 정강자(鄭江子). 그를 아는 이들은 대개 1968년 우리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누드 퍼포먼스를 떠올린다. 군사독재와 엄숙주의가 사회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그 시절, 서울 서린동 음악감상실 ‘세시봉’에서 펼쳐진 해프닝 ‘투명풍선과 누드’는 도발이고 충격 그 자체였다.
20대 촉망받는 여류 화가가 상의를 벗은 채 스스로 오브제가 된 이 작품은 한국 행위예술의 효시로 기록돼 있다. 하지만 그는 이후 행위예술가가 아닌 화가의 길을 걸었다. 아프리카, 남미, 남태평양, 동남아시아 등 세계의 오지를 찾아다니며 원시의 자연과 인간을 캔버스에 담았다. 지난 4월 초, 서른두 번째 개인전 《춤》(4월 4일~9일)을 준비하고 있던 정강자 화백을 만나기 위해 서울 인사동 아트센터를 찾았다.
‘세시봉’에서 옷을 벗다
서울 인사동 쌈지길 맞은편에 위치한 전시실에 막 도착했을 때 “저 여기 있습니다” 하면서 노란색 터번을 쓴 여인이 반갑게 기자를 맞았다. 그는 방금 거대한 사막에서 걸어 나온 것처럼 이국적인 차림새였다.
그의 뒤로 파도처럼 너울대는 황갈색 사막이 펼쳐져 있었다. 사하라 사막과 그 사막을 내려다보고 있는 여인의 초상을 담은 600호짜리 작품이 100평 규모의 전시장을 압도했다. 그는 “아프리카 니제르에서 본 사막을 그린 것”이라며 “니제르 공항에 내리면 저런 사막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데, 바람에 따라 수시로 모습을 바꾸는 모래 파도가 예술”이라고 말했다. 그림 속 모래 파도가 춤을 추는 듯 역동적이었다.
<사하라>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작품은 눈 쌓인 킬리만자로 아래서 봉산탈춤을 추는 여인 그림이었다. 장삼자락 휘날리는 여인의 몸에도 파도가 일렁였고, 그 아래로 질주하는 얼룩말 역시 춤을 추고 있는 것처럼 리드미컬했다. 그는 “이번 전시회 주제가 ‘춤’”이라고 말했다.
정 화백과 그렇게 짧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오픈도 하지 않은 전시실에 한 무리의 여고생이 참새떼처럼 우르르 몰려들어 왔다. 그들이 “와!” 하고 탄성을 지르며 달려간 쪽을 보니 <가가와 투명 풍선>이라는 그림이 걸려 있었다. 미국의 팝 가수이자 행위예술가인 레이디 가가(Lady Gaga)의 누드 퍼포먼스를 형상화한 작품이었다. 그 옆에 비교 감상하라는 듯 40여 년 전 그가 선보인 <해프닝, 투명풍선과 누드>의 사진 작품이 걸려 있었다. 그는 “2000년대 가가가 하고 있는 퍼포먼스를 나는 1960년대에 했다”며 웃었다.
레이디 가가는 다양한 무대 퍼포먼스로 마돈나 이후 세계 최고의 디바로 각광받고 있는 팝 스타다. 4월 27일 가가의 내한(來韓) 공연은 영상물등급위원회로부터 선정성을 이유로 연소자(18세)관람 불가 판정을 받았다. 올해 가가의 콘서트가 예정된 세계 11개 국가 중 ‘18금(禁)’ 판정을 내린 곳은 한국이 유일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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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을 졸업하던 해인 1967년 ‘청년작가 연립전’에 출품한 작품 <키스해 주세요(Kiss me)>. |
“그 당시 시집도 안 간 20대 처녀가 사람들 앞에서 옷을 벗는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저는 결혼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타인의 시선에 연연하지 않고 도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의도한 대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무대에 섰다면 외설죄로 경찰에 체포되었을 겁니다. 실제로 공연장인 세시봉에는 적지 않은 경찰이 포진해 있었어요.”
1969년, 서울 서린동에 위치한 음악감상실 세시봉은 젊은 지성들의 아지트였고, 존 케이지(John Cage)의 음악이 흐를 정도로 앞서 가던 공간이었다. 존 케이지는 소음을 음악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전위음악가다.
모던하면서도 실험적인 이 공간에서 그는 대학 선배인 정찬승(鄭燦勝), 강국진(姜國鎭)과 함께 ‘투명풍선과 누드’라는 이름의 해프닝을 발표했다. ‘작품을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다’고 믿고 있던 그는 옷을 모두 벗을 참이었지만 현장에 나와 있던 한 기자의 만류로 상의만 벗었다. 그것만으로도 200석 공연장을 가득 채운 젊은 관객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최근 ‘세시봉 친구들’로 화제가 된 송창식 윤형주 조영남 이장희 김세환 등의 통기타 가수들이 출연하기 훨씬 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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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9년에 선보인 보디페인팅 작품. 모델은 작가 자신이다. |
장례 해프닝으로 경찰에 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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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8년 우리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은 누드 퍼포먼스 ‘투명풍선과 누드’. |
반면 당시 문화계를 주도하고 있던 식자층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동국대 모 교수는 “일종의 예술깡패들”이라며 “그들을 그냥두면 정신병자가 되어 자살하고 말 것”이라고 비판했고,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온 한 원로화가는 “외국에서는 벌써 쇠퇴해 가고 있는 극단의 극치”라고 혹평했다.
“예상은 했지만 문화계 원로들의 혹평이 쏟아지니까 좀 힘들더군요. 그런 저희들을 일으켜 세워준 분은 당시 이화여대 교수로 계시던 이어령(李御寧) 박사님이셨습니다. 박사님께서는 저희를 불러 ‘잘하고 있다’고 격려했을 뿐 아니라 ‘힘이 돼 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위로까지 해 주셨어요.”
이어령 박사의 애정 어린 격려에 힘입어 세 사람은 ‘한강의 타살’ ‘한국문화인의 장례식’ 등 해프닝을 연달아 벌였다. 두 해프닝은 구태의연한 문화에 대한 고발이자 테러였고, 변화와 혁신을 외치는 굿판이었다. 이들은 사직공원에서 광화문을 거쳐 한강까지 관을 메고 행진하는 ‘한국문화인의 장례식’ 도중 경찰에 연행돼 하룻밤 유치장 신세를 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젊고 순수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들이었어요. 당시 우리에게는 작품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다는 열정이 있었죠. 그런 에너지가 충전돼 있었기 때문에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삶이 고달프다는 생각을 못하고 살았습니다.”
일련의 해프닝으로 그는 일약 스타가 되었지만 한동안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생계를 위해 신촌에 있는 화실에서 아이들 30~40명을 지도하고 있었는데, 신문과 방송에 그의 이름이 오르내리면서 아이들 발길이 뚝 끊겼다. 학부모들이 “미친년한테 더 이상 아이를 맡길 수 없다”며 과외를 끊은 것이다.
이듬해인 1970년 8월 그는 유일한 재산이었던 화실 전세금을 뽑아 서울 소공동에 있던 중앙공보관에서 자신의 첫 개인전 ‘무체전(無?展)’을 열었다. 드라이아이스, 조명, 소리, 관객이 작품의 전부인 독특하고 기발한 콘셉트의 전시였다. 상의를 벗은 그가 앉아서 드라이아이스를 불고 있는 전시 포스터도 파격적이었다.
하지만 이 전시는 오픈 하루 만에 막을 내려야 했다. 미술계 일각에서 ‘엉터리 쇼’라는 비판이 일자 중앙공보관 측에서 철거 명령을 내린 것이다. 때마침 시작된 미니스커트와 장발족 단속의 사회악이 마녀사냥을 하듯 그에게 덧씌워졌다. 그의 전시 소식을 다룬 기사가 ‘미니스커트와 장발족 단속을 몰고 온 여인’이라는 제목으로 다양한 매체에 실렸다. 그해 그는 모 여성지가 주관한 ‘올해의 최고 시끄러운 여인상(일명 발광상)’ 수상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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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8년 구태의연한 한국 문화계에 던진 문제작 <한강변의 타살>과 언론 보도. |
미지의 세계 동경, 미대 진학
이후 그는 부친과 오빠의 도움으로 마포에 화실을 열었고, 캔버스 작업으로 복귀했다. 그가 참가한 해프닝은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기성세대의 비판에 지친 것일까.
“남의 시선이 두려워 그만둔 건 아닙니다. 다만 해프닝은 제 표현의 한 방법이었지 전부가 아니었다는 것만 말씀드리고 싶군요. 저는 화가로 살고 싶었지 행위예술가가 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습니다.”
그는 부친과 오빠가 새 화실을 장만해 주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의 성장기를 짧게 들려줬다.
대구 출신인 그는 유복한 집안의 5남매 중 외동딸로 자랐다. 건축가였던 아버지와 현모양처였던 어머니는 외동딸인 그를 다른 형제와 차별 없이 키웠다고 한다.
“저희 아버지와 어머니가 배운 건 없지만 상당히 열려 있는 분들이었어요. 저는 자라면서 ‘딸이고 여자니까 안 된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만 해도 그는 시와 소설에 푹 빠져 있던 문학소녀였다. 중학교 때 쓴 글이 《대구매일신문》에 소개될 정도로 문재(文才)였다. 그런 그가 시인이나 소설가가 아닌 화가가 되고자 했던 것은 큰 이유가 없었다고 한다.
“제가 중·고등학교 때부터 남들 다 하는 일은 그닥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러다 보니 시나 소설도 남들이 찾지 않는 작가의 작품을 찾아 읽었고, 백일장에 나가도 쓰기만 하면 입상권에 드는 글 대신 색다른 그림을 그려서 내곤 했지요. 원고지 한칸 한칸을 채우는 것보다 넓은 도화지에 마음 가는 대로 그리고 색칠하는 작업이 훨씬 쉽고 재미있어 보였거든요.”
하지만 백일장에서 그림으로 입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늘을 보라색이나 노란색으로 칠하고, 강물을 붉게 그리는 등 상식을 뛰어넘는 표현 때문이었다. 그는 “학교 미술 선생님에게도 칭찬은커녕 꿀밤 맞은 기억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런 그가 미술대학에 지원한 것은 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미지의 세계에 대한 그의 동경이 결합되면서였다. 아버지가 건축이 아닌 다른 사업에 손을 대면서 가세가 기울자 그는 서울에서 가수 활동을 하던 오빠에게 도움을 청해 상경했고, 뒤늦게 결원이 많은 홍익대 미술대에 원서를 내고 입학했다.
“제 바로 위 오빠가 ‘빨간 구두 아가씨’ ‘갈매기 우는 항구’ 등을 부른 가수 남일해(본명 정태호)입니다. 중학교 때부터 공부보다 노래에 소질이 있던 오빠는 고등학교 때 중앙무대에 데뷔해 당시 꽤 잘나가고 있었지요. 오빠는 제가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고 싶다고 했더니 돈 걱정은 하지 말고 올라오라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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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전시회에 선보인 <보헤미안>. |
“자네는 옷 꼬라지가 그게 뭔가”
화가를 ‘환쟁이’로 폄하하던 시절, 아들도 아닌 딸의 미술대학 진학을 그의 부모는 흔쾌히 허락했다. 덕분에 그는 부모의 지지와 오빠의 지원 속에 미술대학을 다녔다. 대학 생활 역시 여느 대학생과는 달랐다.
“제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 한국 화단은 일제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해 후기 인상주의 미술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어요. 학원 미술은 대부분 모네의 풍경화나 세잔의 정물화가 중심이었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보고 베끼는 그림을 싫어했습니다. 풍경화는 물론 정물화나 누드화를 거부했지요. 그러다 보니 학점이 늘 C에서 맴돌았습니다.”
그렇게 3년을 보내고 4학년이 되었을 때 프랑스에서 귀국한 젊은 교수가 부임했다. 국내에서 앵포르멜((informel·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현대 추상회화의 한 경향) 운동을 주도하던 박서보(朴栖甫) 교수였다. 그는 누드모델 대신 소 두개골을 관찰하게 했고, 정물로 나온 과일을 학생들과 술안주로 나누어 먹은 후 고물상에서 가져온 찌그러진 자전거 바퀴를 그리게 했다. 다른 여학생들이 꽃과 누드를 그리는 동안 소 두개골과 자전거 바퀴를 그리며 박서보 교수의 수제자가 되었다. 당시 천경자(千鏡子) 교수의 수제자는 그의 동급생이며 ‘보리밭’으로 유명한 이숙자(李淑子) 화백이었다.
“그 시절 홍익대에서 박서보 선생님 수업을 듣는 여학생은 제가 유일했어요. 선생님 영향으로 저는 당시 국내에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팝아트 작업을 했지요. 그랬더니 어느 날 미술대 학장으로 계시던 이마동(李馬銅) 선생님이 저를 부르더군요. 무슨 일인가 하고 갔더니 선생님께서는 대뜸 제게 ‘자네는 옷 꼬라지가 그게 뭔가’라며 호통을 치셨습니다.”
다른 여학생들이 예쁜 양장을 입고 다니던 시절 그는 작업하기 편하게 찢어진 청바지에 남자 와이셔츠를 걸치고 다녔다. 그 모습이 평소에도 볼썽사나웠던지 이마동 선생이 한마디 하고는 작품을 한 점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외국에서 귀한 손님들이 오는데 그의 작품을 재학생 대표로 보여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늘 C학점만 받는 그의 작품을 선택한 것에 뜨악해하면서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는 “당시 내 작품은 다른 많은 홍대 재학생 작품과 확연히 구분되는 그림이었다”며 “아마도 저희 대학 미술의 다양성을 보여주고자 톤이 비슷한 다른 재학생들의 작품을 제쳐두고 내 작품을 고른 것 같다”고 회고했다.
졸업전에 출품한 그의 작품은 확실히 다른 졸업생들 작품과 구분되었다. 그는 몽상적 이미지의 소녀와 전구, 안경, 자물쇠 등의 이질적인 도구들을 한 화면에 입체적으로 구축했다. 졸업 전시회에서 단연 돋보였던 이 작품 덕에 그는 정찬승 화백과 강국진 화백을 알게 됐고, 그들과 여러 가지 작업을 함께 했다고 한다.
“그 두 분이 졸업전에서 제 작품을 보고 감동을 받았던 모양이에요. 학교 졸업 후 특별히 하는 일 없이 그림만 그리고 있는데, 하루는 정찬승씨가 제 작업실로 찾아왔더라고요. 그러곤 ‘청년작가 연립전’을 기획하고 있는데 동참할 생각이 없느냐고 하더군요. 기획이 신선해서 함께하겠다고 했죠. 이 전시에 출품한 작품이 데뷔작이나 다름없는 <키스해 주세요>입니다. 이 그림은 크고 붉은 입술 안에 피아노 건반을 치아처럼 그리고, 남자의 얼굴과 고무장갑을 표현한 매우 입체적인 작품이었다. 그는“‘청년작가 연립전’을 통해 가장 성공적으로 데뷔한 사람은 나였다”며 “모든 언론과 방송이 내 작품만 조명해 다른 참가자들에게 미안했다”고 말했다.
<키스해 주세요>에 대한 대중의 반응과 언론의 평가는 그가 해프닝을 벌이게 된 힘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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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장을 압도하는 600호 크기의 <사하라>. |
세계 오지 40여 개국 여행
‘무체전’을 끝으로 그는 캔버스로 복귀했는데, 이 무렵 영화판에 있던 남상진 감독과 결혼도 했다. 남 감독은 영화 <밀실> <순정> <제5의 사나이> <남 몰래 흘리는 눈물> 등을 연출한 감독으로 1960년대에 활발하게 활동했던 인물이다. ‘평생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는 그가 마음을 바꿔 남 감독과 결혼하게 된 계기가 궁금했다.
“사랑보다는 보호막이 필요해 결혼했어요. 몇 번의 해프닝 작업을 하고 나니까 한국 남자들이 저를 술집 여자인 양 쉽게 보는 경향이 있었어요. 저를 인터뷰하러 온 기자들까지도 인터뷰 후 술 마시고 같이 자는 건 당연한 것 아니냐는 투로 ‘술 한잔 하러 가자’고 하곤 했습니다. 이건 아니다 싶어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야겠다고 생각했지요. 남 감독과는 우리가 몰려다니던 술집 ‘원성’에서 만나 친해졌습니다.”
명동에 있던 ‘원성’은 탤런트 최불암씨 어머니가 하던 술집으로 문학, 음악, 미술, 영화 등을 논하던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다. 그는 정찬승, 강국진 화백과 함께 이곳에 자주 드나들었고, 그림으로 표현할 수 없는 영상의 세계에 매료돼 있던 차에 남상진 감독을 만나 교제하게 됐다. 그 무렵 남상진 감독은 <여자에게 옷을 입혀라>를 촬영하고 있었다고 한다.
“저희는 아이를 먼저 낳고 결혼했어요. 그때 낳은 아들이 1974년생이니까 아마도 그해에 한 것 같네요. 결혼 후 남편이 영화 사업을 한다고 진출한 싱가포르에서 5년여 동안 살았는데, 생활고 때문에 정말 힘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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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춤추는 아프리카>. |
결국 1980년대 초 그는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두 아이를 데리고 귀국했다. 동시에 남편과 이혼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이혼 후 서울 반포에 입시미술학원을 차렸어요. 경제적으로 자유로워야 두 아이도 공부시키고, 나도 미술 작업을 계속할 수 있겠다 싶었지요. 예전부터 가르치는 데는 소질이 있었던지 학원이 아이들로 넘쳐났습니다. 원생만 100명이 넘었어요.”
돈이 쌓이자 그는 좀 더 넓은 전셋집을 구할 것인지, 아니면 넓은 세상을 보고 올 것인지 고민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아이를 앉혀 놓고 “엄마가 넓은 세상을 보고 오면 작품이 잘 팔려서 집을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돈으로 전셋집을 구하는 게 좋겠니 아니면 여행을 가는 게 좋겠니”라고 물었다. 아이들은 당연히 ‘여행’을 선택했다. 그는 이혼한 남편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원시 문화가 살아 숨쉬는 세계의 오지들을 여행했다.
그가 없는 사이 학원은 젊은 강사들이 운영했다. 그들은 원장인 자신이 학원에만 붙어 있는 것보다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고 돌아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 그렇게 다닌 오지 국가만 40여 개국이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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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고>. |
작업한 작품 1000여 점 소장
그는 중앙 일간지에 오랫동안 오지 여행기를 연재했다. 그 인기에 힘입어 방송에도 출연했고, TV 여행 관련 프로그램의 자문위원으로도 활동했다. 그 와중에도 꾸준히 그림을 그려 전시회를 열었는데, 유명세 덕에 그림이 잘 팔렸다. 그의 작품은 전시회를 오픈하기도 전에 절반 이상이 팔려 나갈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그는 “여행 후 작업한 작품이 잘 팔려 두 아이와 약속한 대로 집을 사게 됐다”고 말했다.
남편과 이혼할 때 초등학생이었던 두 아이는 어느덧 30대 후반의 성인이 되었다. 그는 아이들이 결혼 적령기에 들어설 무렵 남편과 재결합했다. 그리고 지금은 서울 광진구에 있는 한 아파트에 살고 있다. 그는 “아파트 상가 건물에 작업실을 꾸며 작업하고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강남에서 강북으로 이사온 지 7~8년 됐는데, 살기 너무 좋아요. 제가 오랫동안 오지 여행을 해서 어디든 적응력이 뛰어난 편인데, 노하우는 하나입니다. 잘난 척하지 않고 철저히 그 지역 사람들 눈높이에 나를 맞추는 것이지요. 이곳에 오니 저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덕분에 나는 상가 사람들과 똑같이 수다 떨며 편하게 작업하고 있지요. 특히 앞집 세탁소 아줌마와 친하게 지내고 있는데, 이번 전시 도록의 뒤표지 사진도 그 아줌마 작품이랍니다.”
무릎 관절이 나빠 더 이상 오지 여행은 못 다니고 있다고 한다. 대신 그는 “책과 영화를 통해 세계는 물론 우주를 여행하고 있노라”고 했다. 또한 “끊임없이 영감이 떠올라 심심할 틈도, 늙을 새도 없다”며 웃었다.
그는 십수 년째 하루 10시간 이상씩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 출품한 30여 점의 작품은 모두 최근 1~2년 사이에 작업한 것들이며, 그동안 쌓인 작품이 1000여 점이나 된다고 한다. 그는 또 다른 원시세계를 찾은 듯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