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 인터뷰

말레이시아의 ‘國父’ 마하티르 전 총리

“지지율만 신경쓰면 포퓰리스트로 기록될 것”

  • 글 : 오동룡 월간조선 기자  goms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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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계획이 출중하고 예산이 많다고 해도 지도자의 철학이 없다면, 그 정책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朴正熙 대통령의 지도자 철학을 한국으로부터 배우려고 했던 것입니다. 한국의 자멸하는 과격노조는 배우고 싶지 않습니다.”

⊙ “한반도 대운하, 타당성 평가만 제대로 했다면 반대파 설득해 밀어붙여야”
⊙ “국가경영 능력이 있는 리더는 ‘아이디어’가 많다”
⊙ “朴正熙 대통령 만난 적 없지만 책 부지런히 읽고 고속성장 비결 배워”
⊙ “자식 7남매, 학창시절 정부장학금 못 받게 해… 나는 가족의 총리가 아니라 말레이시아 국민의 총리”
마하티르 빈 모하마드(Mahathir bin Mohamad) 전 말레이시아 총리를 말레이시아 국민들은 “파파(아버지)”라고 부른다. 마하티르(이하 존칭 생략)는 말레이시아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이고, 여전히 말레이시아 정계와 경제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이다.
 
  미수(米壽)를 바라보는 86세의 나이임에도 그는 말레이시아 최대 국영석유가스 기업인 ‘페트로나스’와 자동차업체인 ‘프로톤’의 고문을 맡는 등 왕성한 사회활동을 이어 가고 있다. 기자는 지난 4월 29일 그를 만나기 위해 쿠알라룸푸르(Kuala Lumpur)에서 약 25km 거리에 있는 푸트라자야(Putrajaya)를 거쳐 그의 집무실로 향했다. ‘푸트라자야’는 말레이시아 초대 총리를 지냈던 ‘툰쿠 압둘 라만 푸트라’의 이름을 딴 행정수도다. 한국의 과천시에 해당한다.
 
  마하티르 시절인 1995년 10월, 셀랑고르주(州)로부터 구입해 푸트라자야시(市)를 만들었고, 2001년 2월 포화상태에 달한 쿠알라룸푸르를 대신해 연방정부의 행정수도로 정했다. 마하티르 재임시절 구축한 시원한 도로망을 따라가다 보니 2002년 개통한 쿠알라룸푸르행(行) 초고속열차, 모노레일이 푸트라자야 시내를 달리고 있었다.
 
  푸트라자야 호수를 가로지르는 아름다운 사장교(斜張橋) ‘세리 사우자나 브리지’를 건너면, 말레이시아 총리부 청사인 페르다나 푸트라, 이슬람사원인 푸트라 모스크, 푸트라자야 독립광장, 연방 사법부 청사 등이 나타난다. 이곳을 지나면 쿠알라룸푸르의 마하티르 집무실이 있는 ‘야야산 알부카리(Yayasan Al-Bukhari)’ 재단빌딩이 있다.
 
  말레이시아인들의 실용복장인 감색(紺色) 근무복을 입은 마하티르가 소년처럼 미소를 지으며 기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브리티시 잉글리시’는 나지막했지만 발음은 또렷했다. 측근들은 기자에게 그를 “툰(tun)”이라고 불러 달라고 했다. ‘툰’은 말레이족(族)들이 ‘최고 귀족’을 부를 때 쓰는 말이다.
 
  마하티르 사무실은 재임시절인 1992년 착공해 1999년 8월 완공한 쿠알라룸푸르의 랜드마크, ‘페트로나스 트윈타워(Petronas Twin Tower)’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있었다. 이 88층(높이 452m)의 쌍둥이 빌딩은 말레이시아가 2020년에 선진국에 합류한다는 ‘비전2020 계획’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마하티르는 한국의 삼성건설과 극동건설에 1번 타워를, 일본의 하자마건설에 2번 타워를 맡겼다. 한국과 일본을 대표하는 건설사들은 본의 아니게 ‘한일 건설 대결’을 펼쳤다. 마하티르는 일주일에 한 번꼴로 공사현장을 찾았고, 한국 컨소시엄은 일본보다 35일 늦게 착공했지만, 뚝심을 발휘해 완공을 6일 먼저 끝내 말레이시아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거침없는 독설가’
 
말레이시아 국제공항 서점 입구를 장식하고 있는 마하티르 전 총리의 회고록들.
  마하티르는 기자에게 “페트로나스 국영 석유회사는 완공 직후 내게 라운지와 회의실을 갖춘 최상층 공간을 제공하겠다고 했지만, 나는 사용하지 않았다”면서 “별도로 마련한 지금 이곳 사무실 창(窓)을 통해 쿠알라룸푸르 전경을 즐기고 있고, 맑은 날이면 동쪽으로는 ‘겐팅 하일랜즈’(Genting Highlands·쿠알라룸푸르 인근 해발 2000m 고산에 만든 말레이시아 유일의 공식 카지노), 서쪽으로는 해안선을 본다”고 했다.
 
  마하티르는 2003년 자신이 정한 후계자 압둘라 바다위에게 정권을 물려주고 물러날 때까지 1981년부터 22년 간 총리로 재임했다. 싱가포르의 국부(國父) 리콴유(李光耀·87) 전 총리와 함께 동남아시아의 발전을 이끈 ‘두 거목(巨木)’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지난 2월 24일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가 주최한 ‘글로벌 코리아 2011’ 국제학술회의에 참석하는 등 전세계 지도자들 가운데 대표적인 친한(親韓)인사로 알려졌다.
 
  특히 1981년 총리 취임 직후부터 한국과 일본, 대만을 본받자는 ‘동방정책’(Look East Policy)을 도입해 고무와 주석 등 천연자원 수출국에 불과했던 말레이시아의 경제규모를 4배로 키우면서 세계 17위의 무역대국으로 변모시켰다.
 
  말레이시아는 그의 재임기간 중인 1988년부터 10년 간 연간 8% 이상이라는 기적적인 경제성장을 달성했다.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때는 외국자본의 이동을 막는 등 적극적인 개입정책을 폈고, 국제통화기금(IMF) 긴축정책 등 권고사항을 정면으로 반박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마하티르는 세계 금융위기의 촉발원인을 미국과 유대인 자본에 돌리는 등 서방에 대해 거침없는 ‘독설가’로 유명하다.
 
  2003년 유엔총회 연설에서 “미국과 유럽이 세계를 다시 식민지화하려 한다”며 이라크 전쟁을 격렬하게 비난했다. 또 “월가를 장악하고 있는 유대인들이 미국을 통해 세계를 대리통치하고 있다”고 말해 유대인들로부터 강한 반발을 불러왔고, 이슬람 국가들은 그에게 환호했다.
 
 
  30년 동안 진료하지 않아 의사면허 ‘박탈’
 
1953년 마하티르 전 총리가 싱가포르 킹에드워드7세 의과대학을 졸업할 때. 오른쪽이 1955년 말레이시아 최초의 여성 의학박사가 된 그의 아내 시티 하스마.
  ―최근 회고록 《A doctor in the house》를 출간했습니다. 책 제목이 신선한 느낌이 듭니다.
 
  “책 제목을 여러 개 만들어 놓고 무엇으로 할까 출판사와 상의하다, 제가 ‘A doctor in the house’로 하자고 했습니다. 책 제목이 괜찮습니까?”
 
  마하티르가 펴낸 회고록 제목을 우리말로 옮기면 ‘말레이시아를 구한 의사’쯤 될 것이다. 저개발 상태의 말레이시아를 정치적·경제적으로 업그레이드시킨 ‘말레이시아 근대화의 아버지’에게 그럴싸한 제목이다.
 
  ―회고록을 그대로 옮기면 ‘집에 있는 의사’입니다. 다시 환자를 돌보고 싶진 않은가요.
 
  “지금은 의사 면허가 없습니다.(웃음) 말레이시아에서는 30년 이상 진료를 하지 않으면 라이선스가 사라집니다.”
 
  마하티르는 교육부장관으로 입각하던 1974년까지 20여 년간 ‘의사’와 ‘국회의원’을 병행하고 있었다. 그는 “아내 시티 하스마(Siti Hasmah)가 그때까지 공중보건의로 근무하고 있었고, 점심 때면 오붓하게 식사를 함께 하곤 했었다”면서 “내각의 장관이 되면 이해관계가 상충될 수 있는 직위에서 사퇴해야 하는 말레이시아의 규칙 때문에 의사직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는 “‘대외과의사(Great Surgery)를 꿈꿨던 나로서는 ‘손맛’을 잃는 게 무척이나 안타까웠다”면서 “고통 받는 환자들을 더 이상 돌봐줄 수 없다는 아쉬움은 있었지만, 국민들을 위해 더 큰 도움을 줄 기회를 얻었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로했다”고 했다.
 
  ―86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도 건강해 보입니다. 건강관리를 위해 특별히 하는 운동은 없습니까.
 
  “60살부터 승마를 시작해 지금 25년째입니다. 지금도 일년에 한두 번 아르헨티나에 가서 승마를 즐기곤 합니다.”
 
  ―승마를 하다 낙마(落馬)하면 큰 부상을 입는다는데 위험하지 않습니까.
 
  “세 차례 낙마했습니다. 운이 좋게도 그때마다 가벼운 찰과상만 입었습니다.”
 
  마하티르는 1989년 의과대학 동창생 모임에서 처음으로 심장발작을 느꼈고, 2007년에도 발작을 일으켜 정기적으로 정밀검진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식습관은 소식(小食)을 하고, 단 음식은 먹지 않는다”면서 “잠은 6시간 정도 자고, 점심식사 후에 15분간 ‘토끼잠’으로 눈을 붙인다”고 했다.
 
  ―승마 이외에 다른 운동은 안 하나요.
 
  “안 합니다. 평소 집에서 간단한 기본체조를 하고, 덤벨(아령)도 합니다. 자동차로 이동할 때도 특별한 호흡운동(단전호흡과 유사)을 하고 있습니다.”
 
  마하티르는 수영을 하지 않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그의 회고록에서도 밝히고 있지만, 의과대학 재학시절의 ‘악몽 같은 기억’에 수영을 멀리하게 됐다고 한다. 킹에드워드7세 의과대학 기숙사는 시설이 매우 낡았다. 특히 기숙사는 한 방을 세 명이 공동으로 사용했다. 의과대학 기숙사에는 ‘짓궂은 의식’이 있었다. 처음 기숙사에 들어오는 신입생이 낡은 침대에서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면, ‘고참’들은 신입생을 욕조에 거꾸로 처박아 골려 주는 것이었다.
 
  마하티르도 이 의식의 ‘희생양’이었다. 1년 선배 둘은 마하티르가 침대에서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자 다짜고짜 욕조로 끌고가 물속에 거꾸고 처넣었다. 마하티르는 “정말 그때 숨이 끊어지고 익사하는 줄 알았다”면서 “지금도 그때의 악몽으로 물속에 들어가기만 하면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밖으로 튀어나오려고 한다”고 했다. 마하티르는 “그 때문에 지금도 수영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연애시절 요철도로 달린 경험으로 훗날 고속도로 건설?
 
  ―부인을 돌보려면, 늦었지만 의사면허를 다시 살려야 하지 않을까요.
 
  “제 스스로도 의사로서의 능력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아내는 아마 다른 의사를 구하는 편이 나을 겁니다.(웃음)”
 
  1947년, 마하티르는 싱가포르에 있는 킹에드워드7세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의과대학 시절, 그는 정부에서 매월 200링깃(약 7만원)의 지원을 받아 칫솔과 비누를 사고 생활을 꾸려 나갔다. 그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전당포에서 일해 월 60달러를 벌기도 하고, 의과대학 잡지 《The Medio》의 편집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때 그는 ‘프로파놀 크림(propanol cream)’을 ‘선전크림(propaganda cream)’으로 오기(誤記)하는 바람에 새로 잡지를 찍어 내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정치에 관심이 많아 1946년 ‘통일말레이인 국민조직(UNMO)’이 결성되면서부터 당원(黨員)으로 일했고, 《The Straits Times》에 ‘C.H.E. Det’란 익명으로 ‘말레이어를 공용어(公用語)로 써야 한다’는 학생칼럼을 쓰기도 했다.
 
  의과대학 재학 시절, 그는 훗날 말레이시아 최초의 여성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그의 아내, 시티 하스마를 만난다. 마하티르가 하스마를 만난 과정은 드라마틱하다. 의대 6년 과정을 마치고 졸업시험을 앞둔 마하티르는 마지막 관문에서 탈락하고 만다. 미국 의대에서 공부한 벤자민 시어스(Benjamin Shears·싱가포르 2대 대통령 역임) 교수가 마하티르 동료들에게 미국식으로 ‘산부인과학’과 ‘부인병학’을 가르치는 바람에, 영국식 교수의 구두시험(viva voce)을 망치고 말았던 것이다. 마하티르는 구두시험의 질문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6개월간 유급당한 그는 남녀공학이 된 클래스에서 공부하다 운명적으로 하스마를 만났다. ‘숙맥’ 마하티르는 남자들이 줄줄 따르는 하스마를 차지하기 위해 그녀의 무거운 책을 들어 주고, 의과대학 과목들을 밤새워 공부해 그녀에게 가르쳐 주면서 환심을 샀다고 한다. 마하티르는 “해변으로 그녀를 데리고 가 오징어 등 먹을 것을 잔뜩 사 주고, 돌아올 때는 차비가 없어 그녀에게 다시 5달러를 달라고 하기도 했다”면서 “1949년 4월 29일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했고, 지금도 그날을 기념하고 있다”고 했다.
 
  마하티르는 《Sunday Times》에 기고해 받은 돈으로 250cc 중고 오토바이를 구입하기도 했고, 중고 스탠더드 쿠페를 사서 공휴일날 쿠알라룸푸르 시내를 질주했다. 마하티르는 “도로가 요철(凹凸)이 심해 하스마가 천장이 떨어져 나갈까봐 두 손으로 천장을 잡고 있어야 했다”면서 “훗날 총리가 돼 고속도로 건설에 주력한 것도 아마 이때 울퉁불퉁한 도로를 달리느라 고생한 기억 때문인 것 같다”며 웃었다.
 
 
  수술사고로 산모·태아 잃고 슬픔에 잠기기도
 
부인 하스마(가운데), 손자들과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 마하티르 전 총리.
  마하티르는 회고록에서 의사로 일하면서의 애환(哀歡)도 적고 있다. 1954년 그는 졸업 후 페낭종합병원으로 가기 전 내·외과 인턴수련을 받기 위해 잠시 고향 알로르 세타르(Alor Setar)에서 근무했다. 케다주 랑카위병원에 근무할 때 그는 의사로서 처음으로 보람을 느꼈다고 한다. 탈장(脫腸) 환자를 성공적으로 수술해 냈던 것이다. 환자는 ‘하이 후아트’ 낚시회사 사장이었다. 아침 일찍 랑카위 지역의 섬들 가운데 하나인 ‘파울라 투바섬’에서 이송돼 왔다. 병원에 수술 시설이 전혀 없자 마하티르는 환자를 자신의 고향 알로르 세타르 종합병원으로 보트를 태워 보내려 했다. 그러나 이송시간이 10시간이 더 걸려 환자를 살릴 수 없을 것 같았다.
 
  마하티르는 외래진료실에서 봉합실도 변변히 없는 상황에서 수술을 강행했다. 전문적인 장비가 없었지만 마하티르는 환자를 살려야겠다는 일념뿐이었다고 한다. 환자의 가족들은 실낱같은 희망으로 마하티르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마하티르는 식은땀이 났지만,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마하티르는 “그 환자는 살아났고 몇 년을 더 살았다”면서 “내가 랑카위를 갈 때마다 그의 부인은 지금도 소금에 절인 바다생선을 선물로 보내 오곤 한다”고 했다.
 
  마하티르가 알로르 세타르종합병원에 근무할 때, 그는 의사생활의 중대 기로(岐路)에 서게 된다. 그는 금요일 당직근무를 맡게 됐다. 모든 의사들은 페낭으로 가고 병원에는 그뿐이었다. 그는 ‘설마 응급환자가 발생하지는 않겠지’ 하는 마음으로 당직근무를 하고 있었다. 그때 산부인과 병동에서 한 만삭부인이 진통을 하기 시작했다. 마하티르는 ‘제왕절개’를 해야 할지를 결정해야만 했다. 아내 하스마도 그의 곁에 있었다.
 
  마하티르는 그의 아내와 함께 마취제 대체용으로 에틸 클로라이드와 에테르를 수건에 적셔 환자의 얼굴을 덮었다. 잠시후 그녀는 마취가 됐고 마하티르는 절개를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태아는 자궁외임신 상태였다. 그당시 말레이시아에서 자궁외임신을 수술한 경험이 있는 의사는 극소수였다고 한다.
 
  마하티르는 출혈을 멈추게 하려고 애를 썼으나, 산모의 출혈은 멈추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태아와 산모 모두 숨을 거두고 말았다. 마하티르는 20년 의사생활 가운데 가장 슬픈 순간이었다고 한다. 마하티르와 부인 하스마는 슬픔을 가눌 길 없었다고 한다. 마하티르는 “알로르 세타르에서 복사집을 운영하는 남편은 개인적으로 잘 아는 사람이었다”면서 “그에게 깊은 유감을 표했고, 그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고 했다.
 
  마하티르는 이후 자신과 아내 이름을 합친 ‘Maha Klinik(마하클리닉)’을 열었고, 그의 부인은 정부 소속 의사로 일했다. 마하티르의 클리닉은 1974년 교육부장관으로 입각하기 위해 모하마드 야콥 박사에게 클리닉을 넘기기까지 환자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그의 클리닉은 아직도 그의 고향 알로르 세타르에 있다고 한다.
 
  그당시 그는 돈도 꽤 벌었다. 공휴일도 쉬지 않고 일했다. 그는 “내 성격상 환자들이 병원 밖에서 기다리는 것은 죄를 짓는 것 같아 견딜 수 없었다”면서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손님은 줄지 않았고, 나중에는 점심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던 중 마하티르에게 예기치 않은 슬픔이 찾아왔다. 그의 부모가 비슷한 시기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특히 그의 모친은 1962년 그의 부친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3년 동안 치료를 거부하고 식사까지 거부하다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마하티르는 ‘휴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960년, 마하티르는 병원문을 닫고 일주일간 그의 아내와 함께 홍콩으로 여행을 떠난다.
 
  이듬해 그는 일본을 여행했다. 그당시 일본은 마하티르에게 이국적인 곳이었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에 패한 직후라 영국처럼 민주적인 입헌군주제를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그는 판단했다. 그는 도쿄 거리에서 닛산 자동차를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고, 도쿄역과 긴자거리의 활기, 신칸센의 질주, 도쿄올림픽 유치로 전쟁의 상처를 잊고 국운(國運)을 융성시키는 일본 국민들을 목격했다.
 
  일본 여행에서 돌아온 이듬해, 마하티르 부부는 3개월의 여정으로 유럽 ‘그랜드 투어’에 나섰다. 마하티르는 “유럽과 일본을 돌아보고 경제발전과 기술력, 그리고 기본적 인권 문제에 눈뜨게 됐다”면서 “훗날 총리가 됐을 때, 그때의 스릴을 기억하고 정책에 반영하게 됐다”고 털어놨다.
 
 
  “한국은 매우 역동적인 나라”
 
마하티르 전 총리는 25년 전부터 승마를 즐기고 있다. 행정수도 푸트라자야 인근에 있는 푸트라자야승마공원에서 승마를 하고 있다.
  ―1965년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총리께서는 50년간 이어진 한국과 말레이시아 관계의 ‘산증인’입니다. 총리가 그동안 접한 한국이란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한국은 매우 역동적인 나라(a dynamic country)입니다. 한국은 전자, 전기 등 각종 산업 부문에서 크게 성장했고, 많은 부분에서 서양의 성장과정을 뛰어넘어 빠르게 부흥한 나라입니다. 최근 새로운 기술혁신으로 재도약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상당히 인상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1970년대 말, 이명박(李明博) 당시 현대건설 사장은 말레이시아에서 케냐르댐을 건설할 때 당시 부총리이던 마하티르와 첫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마하티르는 ‘새마을운동’의 나라 한국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고, 이명박 사장은 세계에서 세 번째 긴 다리로, 총 공사비 3억 달러의 페낭대교(총연장 14.5km) 건설수주에 몸이 달아 있었다. 싱가포르가 독립할 때, 화교들은 싱가포르보다 페낭섬을 더 경제적 가치가 있는 섬으로 여겼을 정도다.
 
  1981년 최종 입찰 경쟁은 프랑스 캄페농 베르나르, 한국 현대건설, 일본 마루베니의 3파전이었다. 일본 측은 총리인 후세인에게, 현대건설은 실권이 없던 부총리 마하티르에게 선을 대고 있었다. 승패(勝敗)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해 갑자기 숨진 후세인 총리의 자리를 마하티르가 승계하면서 그동안 신뢰를 쌓았던 이 대통령이 기회를 거머쥘 수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과는 1980년대 페낭대교 건설 때 인연을 맺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총리께서는 그런 인연으로 이 대통령 취임식 때도 참석했고, 올 2월에도 만났습니다. ‘친구’로서 이명박 대통령의 리더십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그동안 이명박 대통령은 훌륭한 리더십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5년이라는 대통령 재임기간은 정치인으로서 너무나 짧습니다. 임기 동안 대통령이 취임 전 생각했던 비전을 구체화하고 완성하기에는 너무 부족합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훌륭한 리더십을 보여주었다고 했습니다만, 최근 이명박 대통령이 속한 한국의 여당은 재·보궐 선거에서 야당에 참패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인기는 한국 국민들에게 달려 있는 것이라, 제가 뭐라고 왈가왈부할 성질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대통령으로서 실천하고자 하는 계획을 달성하기에는 너무 짧은 기간이라 쉽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 헌법은 대통령의 임기를 5년 단임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과거 장기집권에 대한 반작용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대통령 임기가 5년인 것에 대한 문제점을 보완하는 차원에서 개헌 이야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5년 단임제로 선출된 대통령은 첫해에 배우느라 시간을 보내고, 2년차는 계획을 수립하고, 3년차는 계획을 실행하려다가 4년차를 맞게 됩니다. 그럼 ‘레임덕’에 걸리고, 아랫사람을 비롯한 공무원 조직은 움직이질 않습니다. 때문에 5년이란 짧은 기간에는 아무리 훌륭한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라 하더라도 성취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만약 헌법을 개정해 연임을 하게 해 놓고, 대통령직을 잘 수행하지 못하면 국회에서 탄핵해서 합법적으로 사퇴시킬 수도 있는 겁니다.”
 
 
  “임기 말 인기에만 영합하지 말아야”
 
말레이시아 최대 정당이자 여당인 ‘UNMO(통일말레이인국민조직)’ 전당대회에서 전임총리인 툰 후세인(왼쪽)과 담소하고 있는 마하티르 전 총리.
  이명박 대통령은 그의 저서 《신화는 없다》에서 마하티르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1994년 2월,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총리가 한국을 방문했다. 사흘 동안의 그의 방한은 매우 조용하고 이례적이었다. 김해공항을 통해 소리 없이 들어와 울산의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 등 현대그룹 계열사를 둘러보고 회사 관계자들과 사업을 논의한 뒤 올 때와 마찬가지로 소리 없이 돌아갔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이런 식으로 한국을 다녀가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말레이시아 경제발전의 견인차 마하티르 총리의 실질외교다. 겉치레와 요란한 수사를 그는 멀리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대통령 후보시절부터 한반도 대운하를 계획하는 등 종합적인 국토개발계획을 수립해 추진하려고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현재 대운하 건설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40년 동안 권좌(權座)에 있다가 내려온 총리께서 볼 때, 내년 후반이면 사실상 권좌에서 내려오는 이명박 대통령에게 어떤 점을 유의하라고 충고하고 싶습니까.
 
  “현직 대통령이 임기를 얼마 남겨 놓지 않은 상황에서 추진하던 플랜들을 성취하지 못했다고 초조해하면 안 됩니다. 국민에게 인기 있는 지도자로 기억되기 위해 ‘업적주의’, ‘지지율’에만 신경 써 국정운영을 한다면, 포퓰리스트 지도자로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만일 대통령이 자신의 정책을 계속 추진해야 한다고 믿는다면, 다음 임기에 그 정책이 채택되도록 노력해야만 하고, 그것이 어렵다면 자신이 속한 정당을 통해 정책화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서구식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나라들은 대중적 인기에 따라 지도자가 선출됩니다. 그러다 보니 가끔 국정운영 능력보다 이미지를 앞세운 포퓰리스트 지도자들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한국도 얼마전 겪었고, 일본도 막후조정으로 총리를 결정하다 보니 민주당도 그런 현실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총리께서는 이러한 리더십의 위기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보고 있습니까.
 
  “제 경험에 의하면, 어떤 프로젝트는 국민에게 인기가 없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기만 바라고 정치를 하면 리더가 추진하려는 정책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습니다. 예컨대 페낭섬을 연결하는 ‘페낭대교’는 예산낭비라며 반대가 극심했습니다. 그러나 수십 년이 지난 지금, 국민들은 페낭대교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고, 또 하나의 페낭대교를 건설해 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인기만을 위한 정치를 할 수는 없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한반도 대운하(大運河)를 추진하려 할 때, 엄청난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총리 말씀대로라면, 반대자들을 설득해서라도 정책을 밀고 나갔어야겠군요.
 
  “물론입니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반대자들은 있게 마련입니다. 다만, 프로젝트 자체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 타당성 평가(evaluation)를 해야 할 것입니다.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결과가 나왔다면 반대파들을 설득해 정책을 드라이브했어야 합니다. 만약, 한반도 대운하가 성공적으로 건설돼 수많은 한국민이 그 운하를 이용하고, 또 여행을 한다면 모두가 대운하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운하를 건설한 리더에게 감사할 것입니다.”
 
▣ 마하티르는 누구인가
 
   마하티르(86세)는 1925년 7월 말레이시아 케다주의 주도(州都) 알로르 세타르(Alor Setar)에서 초등학교 교장 출신인 아버지 ‘모하마드’와 케다주 왕족인 어머니 ‘완 템파완’의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태평양전쟁 시기, 일본의 점령으로 잠시 고학했던 그는 1947년, 싱가포르에 있는 킹에드워드7세 의과대학에 들어갔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정치에 관심이 많아 1946년 ‘통일말레이인 국민조직(UNMO)’이 결성되면서부터 당원(黨員)으로 일했다. 산부인과 의사 출신인 그는 주의회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 상원 의원과 교육·통상·국방장관과 부총리를 거친 뒤 1981년 후세인 온(Hussein Onn) 당시 총리가 건강상 사유로 사임하면서 당 총재가 됐고, 그해 7월 총리직을 승계했다.
 
  1982년 총선에서 압승을 거둔 이후 2003년 10월 물러날 때까지 5차례나 연임했다. 그는 22년 간 역대 아시아 지도자 가운데 최장수 리더로 말레이시아를 이끌었다. 재임 기간 동안 ‘동방정책’을 추진하며 사회 인프라를 구축하는 등 말레이시아를 세계 17위의 경제대국으로 끌어올렸다.
 
  1997∼1998년 아시아 금융위기 때는 국제통화기금(IMF) 권고안을 거부하고 금리인하, 고정환율제 도입, 외화 국외유출 금지 등 ‘극약처방’을 통해 위기극복에 나서, 결과적으로는 IMF도 인정하는 경제성장을 이뤄냈다. 다인종·다종교 국가인 말레이시아의 국력을 결집시켜 국가발전을 주도해 ‘말레이시아 근대화의 아버지’ ‘마키아벨리식 독재자’ ‘아시아의 대변자’ ‘국제사회의 이단아’ 등 엇갈린 평가를 받고 있다.
 
  “능력 검증된 독재자라면 민주적 지도자보다 효과적”
 
마하티르 전 총리가 “일생 가장 슬펐던 순간”이라고 말하는 장면. 2002년 UNMO(통일말레이인국민조직) 전당대회에서 사임발표를 하다 감정이 북받쳐 흐느끼고 있는 마하티르 총리를 측근들이 달려가 위로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서울시장 시절, ‘청계천’을 복원해 서울 시내 한복판에 다시 시냇물이 흐르게 했습니다. 청계천을 들른 사람들마다 “이명박 서울시장이 참 잘했다”며 높게 평가한 적도 있습니다.
 
  “말레이시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쿠알라룸푸르 시내를 연결하는 경전철(LRT·Light Railway Train)도 처음에는 손님이 없어 ‘빈 차’로 운행하다시피 했습니다. 지금은 승객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늘어나 객차를 더 연결해야 할 지경입니다.”
 
  ―중국은 공산당 1당독재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민주적 절차에 따라 능력이 검증된 지도자들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글쎄요, 민주주의는 좋지만 여러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민주주의는 어떤 때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만약 독재국가라면 의사결정이 쉬울 뿐만 아니라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의사결정이 지연되고 많은 문제가 나타납니다. 만약 능력이 검증된 독재자가 나라를 운영한다면, 한 나라가 발전하는 데 있어서 민주주의 국가보다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2003년 총리께서 정한 압둘라 바다위 후계자에게 정권을 물려주었습니다. 지금 말레이시아는 민주적 절차에 따라 후임자인 나지브 라자크 총리가 권력을 승계했습니다. 총리께서는 국가경영 능력을 갖춘 사람을 선택하는 쉽지 않은 일을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총리께서 후계자를 택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국가경영 능력이 있는 리더는 ‘아이디어’가 많습니다. 그 아이디어는 굳건하고(solid), 좋은(good) 아이디어야 하고, 그것을 성취할 능력과 시간이 주어져야 합니다. 저는 22년간 재임했기 때문에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말레이시아는 민주국가이기 때문에 제가 실정(失政)을 했다면, 언제든지 물러날 수 있게 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가 닥쳤을 때, 총리께서는 IMF 구제금융을 거부하고 ‘마이웨이’ 방식으로 말레이시아만의 해결책을 제시해 금융위기를 벗어났습니다. 한국은 IMF 외환위기 사태로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닥쳐왔습니다만, 금융위기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1997년 아시아 경제위기 때 미국은 ‘금리를 올려라’, ‘하지 말라’는 등 규제가 정말 많았습니다. 금융시스템 자체가 말레이시아와 맞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이웨이’를 선택했던 것입니다. 2008년 금융위기는 은행시스템의 남용에서 비롯된 겁니다. 차입자 상환능력을 감안하지 않은 과도한 대출, 서브프라임 모기지 등이 원인이 됐습니다. 시장이 스스로 규율하고 작동한다는 생각은 허구로 드러났습니다. 아시아인들은 정부 역할을 믿고 있으며, 제3자가 시장을 감독할 필요성이 있다고 봅니다. 미국은 로널드 레이건 시대에 비롯된 경제운용 체계인 신자유주의와 금융시스템이 잘못됐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정치가 시장에 개입하지 말고 시장 자체에 맡겨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朴正熙 대통령과 관련한 책 읽고 ‘급성장’ 비결 배워”
 
2002년, 바티칸 시티를 방문한 마하티르 총리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오른쪽)의 관저를 예방했다.
  ―한국과 말레이시아가 주도적으로 나서 EU(유럽연합),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처럼 아시아의 정치·경제적 공동체를 만들어야 하는 시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 방법으로 AMF(아시아통화기금)의 설립을 제창했습니다만.
 
  “제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하나의 아시아(ons Asia)입니다. 아시아 국가들이 서로 기술을 교환하고 투자하며 서로 만나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아시아는 세계경제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AMF가 만들어지면, 환율 급변과 이로 인한 교역 위축을 막을 수 있습니다. 통화는 무엇보다 안정성이 중요하고 그래야 교역이 증대될 수 있습니다. 아시아가 역내(域內) 무역거래를 위한 ‘기준통화’를 만드는 것에서 시작해 장기적으로는 국제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단일통화를 만드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EU는 하나의 경제공동체이고, AMF는 무역을 할 때 아시아 국가 단일화폐로 사용하자는 것입니다.”
 
  ―AMF 논의는 어느 정도 구체화되고 있습니까.
 
  “현재는 아시아 각국들과 합의된 것이 전혀 없습니다.”
 
  ―총리께서는 한국과 일본의 발전을 벤치마킹하자는 이른바 ‘동방정책’을 추진했습니다. 어떤 계기로 그 정책을 생각하게 됐나요.
 
  “일본과 한국, 두 나라는 엄청난 전쟁 참화로 잿더미가 됐던 나라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두 나라는 가장 빠른 시일에 전쟁의 피해로부터 회복하고 발전했습니다. 1964년 국회의원이 된 후 전후(戰後) 재건과정에 있던 한국을 방문하면서 ‘가난했던 나라’ 한국이 박정희(朴正熙) 정권 아래서 20년 간 급성장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것을 배우자는 의미에서 동방정책을 펼친 겁니다.”
 
  ―총리께서 추진한 ‘동방정책’이 성공함으로써 말레이시아는 세계 17대 무역대국으로 성장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그분을 개인적으로 뵌 적이 없습니다. 1981년 총리가 됐을 때, 박정희 대통령은 이미 돌아가셨고요. 박정희 대통령과 관련한 책자를 부지런히 읽었고, 박 대통령의 업적, 특히 고속성장의 비결들이 궁금했습니다. 우리도 한국처럼 해 보자고 했던 겁니다. 그래서 연수생들을 한국에 보내, 자원이 없는 한국이 어떻게 선박을 건조하고 고속도로와 철도를 건설했는지 배우고 오라고 했습니다.”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시내로 진입하는 도로가 잘 닦여 있었습니다. 인프라가 잘 정비돼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만. 총리께서 재임중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다 했다고 할 수 있나요. 저는 총리에 취임하면서 첫 번째로 인프라를 구축하는 일에 주력했습니다. 그래야 그다음 단계로 개발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쿠알라룸푸르 도시개발은 인프라를 구축하고 나니 수월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도 집권 후 남북을 관통하는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했습니다. 당시 야당 지도자들이 극렬하게 반대했습니다만, 그분들도 지금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허허, 그건 말레이시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자가 “한국에서는 과거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독재자 이미지가 시간이 지나면서 역사 재평가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고 하자, 마하티르는 “박정희 대통령이 한국 발전의 토대(foundation)를 만들었고, 그 위에 개발이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이라고 했다. 기자가 “내년도 대선에서 박 대통령의 딸이 유력한 대선후보”라고 하자, “아버지의 길을 잘 따라갈 수만 있다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치우치지 말아야”
 
1990년 말레이시아를 방문한 인권운동가 남아공 넬슨 만델라 대통령(왼쪽)과 함께 군중들의 환호에 답하는 마하티르 총리.
  ―총리께서는 1980년대 ‘동방정책’을 추진하는 등 한국을 벤치마킹하자고 했다가, 한국에 비판적으로 돌아선 것으로 한국 국민들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어떤 문제 때문에 비판적이었습니까.
 
  “저는 국가의 발전상 못지않게 그 나라 지도층의 철학(ruling ethics) 또한 무척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도자의 철학은 개발정책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합니다. 아무리 계획이 출중하고 예산이 많다고 해도 지도자에게 철학이 없다면, 그 정책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의 지도자 철학을 한국에서 배우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한국의 자멸하는 과격노조는 배우고 싶지 않습니다.”
 
  기자가 “한국 국민들도 수출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을 것”이라고 하자, 마하티르는 “껄껄” 하며 웃었다.
 
  ―한국은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산업부문을 특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한국의 성장동력은 제조업인지, 서비스업인지 애매한 상황입니다. 싱가포르는 서비스 금융을 특화해 발전하고 있습니다. 한국이 글로벌 리더로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어떤 산업을 특화해야 할까요.
 
  “일단 한국은 ‘자산관리’가 중요합니다. 보유하고 있는 자산보다 넘치게 국제금융기관에 손을 대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북한은 6자회담을 추진하면서 핵을 개발하고 두 차례의 핵실험을 했습니다. 북한의 핵보유가 동북아 안정과 평화에 어떤 영향을 준다고 봅니까. 북한의 핵보유가 기정사실화되면서 최근 한국에서도 자위권(自衛權) 차원의 핵보유를 하자는 의견, 미국의 전술핵을 도입하자는 논의도 진지하게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저는 북한과 이란을 포함해 어느 나라도 핵무기를 사용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인류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핵무기를 어떤 나라에 공격용으로 사용한다면 공멸하자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핵무기는 ‘절대무기’로 창고에서만 존재할 뿐 실제로 사용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결국 써먹을 기회도 없는(useless) 것을 개발하고 유지하기 위해 많은 돈을 들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마하티르 전 총리(오른쪽)에게 기자가 《월간조선》 최신호를 전달했다.
  ―이슬람 세계는 독재와 테러리즘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이슬람은 정교분리(政敎分離)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근본적 장벽이 있다고 봅니다. 최근 이집트, 리비아 등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재스민 혁명’을 통해 이슬람 세계가 정말로 민주화될 수 있다고 예상합니까.
 
  “이슬람 세계가 진정한 민주화를 이루려면 시간이 걸릴 겁니다. 현재는 적절한 혁명리더가 없지만, 여러차례 혁명리더들이 바뀌면서 민주주의를 향해 발전해 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최근 중국이 국제사회에서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G2로 부상했습니다. 아시아 국가들은 솔직히 중국의 패권주의를 우려하고 있습니다. 총리께서는 아시아 국가들이 친중(親中)정책, 친미(親美)정책 가운데 어떤 정책을 추진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보십니까.
 
  “한쪽에만 치우치지 말고 미국과 중국, 모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한쪽에만 치우치면 다른 한쪽은 좋아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니까요.”
 
  마하티르 회고록을 보면, 22년 총리 재임 동안 그가 국민들로부터 “파파”라고 추앙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나온다. 그는 “나는 7남매의 자식들이 공직선거에 절대로 나가지 못하도록 했고, 심지어 학창시절 정부장학금을 신청하지도 못하게 했다”면서 “아버지로서 내가 자녀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뿐”이라고 했다. 그는 회고록 말미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 가족의 총리가 아니라 말레이시아 국민의 총리였기 때문입니다.(I was the Prime Minister of the people, not of my fam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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