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0여 명 모집에 4만6000여 명이 몰려 90 대 1의 경쟁률
⊙ 새벽 4시 기상, 탄 가루 마시며 고된 노동
⊙ 코담배로 석탄가루 빼내기도
⊙ 1963년부터 1977년까지 派獨된 한국 광부는 총 7936명, 그 중 65명 사망
權彛種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 1940년 전북 장수 출생.
⊙ 전주 신흥고 졸업. 독일 아헨교원대 졸업. 同 대학원 교육학 석·박사.
⊙ 전북대, 한국교원대 교수, 문교부 상임자문위원, 체육청소년부 정책자문위원, 한국청소년학회장,
교육부 중앙교육 심의위원 역임.
⊙ 現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청소년분과위원장, 문경 해보라대안학교 이사장.
⊙ 저서: <청소년 지도의 실제> <청소년 문화와 정책> <동유럽의 교육제도>
<맴도는 아이 방황하는 부모> <내일에 사는 아이 어제에 사는 어른> <교수가 된 광부> 등 다수.
⊙ 새벽 4시 기상, 탄 가루 마시며 고된 노동
⊙ 코담배로 석탄가루 빼내기도
⊙ 1963년부터 1977년까지 派獨된 한국 광부는 총 7936명, 그 중 65명 사망
權彛種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 1940년 전북 장수 출생.
⊙ 전주 신흥고 졸업. 독일 아헨교원대 졸업. 同 대학원 교육학 석·박사.
⊙ 전북대, 한국교원대 교수, 문교부 상임자문위원, 체육청소년부 정책자문위원, 한국청소년학회장,
교육부 중앙교육 심의위원 역임.
⊙ 現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청소년분과위원장, 문경 해보라대안학교 이사장.
⊙ 저서: <청소년 지도의 실제> <청소년 문화와 정책> <동유럽의 교육제도>
<맴도는 아이 방황하는 부모> <내일에 사는 아이 어제에 사는 어른> <교수가 된 광부> 등 다수.

- 지하 막장에서 석탄을 캐고 있는 필자(사진은 두개의 사진을 합성한 것임). 섭씨 35~40℃의 막장은 가만히 있어도 숨이 콱콱 막힌다. 이런 곳에서 파독 광부들은 하루 종일 노동을 했다.
1963년부터 1965년 사이에 한국의 젊은이들이 줄줄이 西獨(서독) 광부와 간호사로 떠났다. 이들은 요즘 젊은이들처럼 어학연수나 유학이 아닌, 달러를 벌기 위해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전북 장수의 두메산골 출신으로 고등학교를 苦學(고학)으로 마친 나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내가 派獨(파독) 광부의 길을 택한 것은, 첫째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였고, 둘째 기회가 된다면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꿈꿔 온 교사가 되고 싶어서였다.
그 무렵 나는 군에서 제대해 서울의 여러 공사장을 전전하며 막노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사 일을 같이 하던 한양대 공대생이 난데없이 이런 제안을 했다.
“권형, 나하고 독일 광부로 갈 생각 없소?”
“난 대학도 안 나오고 광부 경력도 없는데, 어떻게 갈 수 있겠소. 그리고 광산 근무 경력서가 있어야 한다던데….”
한국 정부는 1963년 12월부터 1진, 2진, 3진으로 나누어 派獨(파독) 광부를 모집했다. 자격 조건은 ‘35세 미만의 신체 건강한 대한민국 남성으로서 병역을 필한 광부 경력자’였다. 나 같은 경우 광부 경력이 全無(전무)했지만 한양대생의 도움으로 서독 광부 모집에 지원하게 됐다.
당시 지원자들의 직업과 연령은 다양했다. 순수 광부 출신부터 주먹깨나 쓰던 건달, 대학 졸업자(나와 같은 진에도 서울대를 포함한 명문대 출신들이 많았다), 학교 교사, 사업에 실패한 사업가, 예비역 장교, 국회의원 비서관 등이었다.
지원자들의 경쟁률도 대학입시를 방불케 할 정도로 치열했다. 내가 지원한 2진의 경우 500여 명 모집에 4만6000여 명이 몰려 90 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경쟁률이 치열한 만큼 선발과정도 까다로웠다. 우선 신체검사와 더불어 달리기, 역도, 철봉 턱걸이, 모래주머니 나르기 등의 체력검사를 받았다. 지원자들 중에는 커트라인 체중인 60kg에 맞추기 위해 내의 속에 쇳덩어리를 지니고 가는 일이 있었고, 자장면이나 수돗물로 배를 채우는 일도 있었다. 체력 테스트 다음으로 적성검사, 상식시험, 간단한 영어 테스트가 이어졌다.
살아서 고향에 올 수 있을까
우여곡절 끝에 나는 제2진으로 떠날 438명 속에 포함됐다. 1964년 9월 22일 노동청장 이름으로 발송된 소집공문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귀하는 독일 파견 탄광 근무자로 선발되어 소정의 훈련과정을 마치고 서독 루르 광업회사에 취업코자 출국준비에 분망하실 줄로 思料(사료)되나, 귀하의 출국일이 확정되었으므로 다음에 의거 소집하니 각별 유의하시어 낙오됨이 없기를 바랍니다. 출국일자는 1964년 10월 5일, 집합일시는 1964년 9월 30일 10시입니다. 집합장소는 재건국민운동훈련원(서울 성북구 수유리 소재)입니다. 기타사항으로는 소집 이후에 외출을 불허하고, 소집에 응하지 않은 자는 기권으로 처리하며, 독일에서는 구입하기 곤란한 약품을 지참하고, 한국문화 소개를 위한 오락물 준비와, 고춧가루 등 기호품 지참, 기생충 검사결과 기생충이 발견되는 자는 출국을 취소, 출발까지의 합숙비는 본인 부담, 지참 준비금은 50달러 미만, 그리고 독일에 도착 후 사진이 필요한 것인바 증명사진 4매 정도는 휴대하는 것이 좋을 것임.>
소집장소인 서울 수유리로 가기 위해 고향 집을 떠나오던 날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밤 열차를 타기로 한 그날 밤 식구들은 만리타향으로 떠나는 나를 배웅하기 위해 호롱불 아래 모였다. 부모님은 이제 떠나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기약도 없이 떠나는 아들을 묵묵히 지켜볼 뿐이었다. 어머니는 아들이 머나먼 이국 땅에서 음식 때문에 고생하지 않을까 염려스러웠는지 멸치조림과 고추장 등 갖가지 밑반찬을 챙겨 주셨다. 가난 때문에 생면부지의 나라로 아들을 떠나보내야 하는 설움을 어머니는 내가 가져갈 짐을 챙기며 억누르고 있었다.
기차역까지 배웅 나온 어머니께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나 역시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서늘한 가을바람이 겨드랑이 밑을 스쳐 갔다. 기적 소리가 서글펐다.
열차에 오르자 갖가지 생각이 밀려들었다. ‘광산은 어떤 곳일까. 독일은 어디에 있을까. 風聞(풍문)으로 가스사고가 잦고 갱도와 천장이 무너지는 사고로 죽는 사람이 많다던데, 그런 험한 일터에서 내가 살아나 다시 고향에 돌아올 수 있을까. 사랑하는 부모형제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래, 모든 것은 운에 맡기자’ 처절하고 절박한 상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1964년 9월 30일 오전 10시. 서울 성북구 수유리에 있는 ‘재건국민운동훈련원’에는 독일로 출발하는 광부 438명이 전원 소집됐다. 이곳에서 우리는 10월 5일 출국 전까지 독일 생활에 필요한 교양수업을 받는 한편, 갖가지 검사를 받았다. 우선 기생충 검사가 실시됐다. 몸에서 기생충이 발견되는 사람은 그 이유 하나만으로 출국이 취소됐다.
교육장은 이번 기회에 가난의 터널을 탈출하겠다는 젊은이들의 흥분과 열정으로 뜨거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살아서 무사히 고국 땅에 돌아올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다. 이 불안한 바이러스는 근무 계약 기간인 3년이 될 때까지 우리 모두를 괴롭혔다.
1964년 10월 5일. 우리 2진은 마침내 독일행 비행기 루프트한자에 몸을 실었다. 난생 처음 보는 대형 여객기가 신기해 우리는 비행기 내 앞뒤를 오고가며 창밖을 구경하기에 바빴다. 사랑하는 가족과의 이별 직후였지만 3년 후의 삶을 생각하며 우리는 꿈에 부풀어 조국을 떠났다.
서울 김포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미국 알래스카를 경유하여 독일 뒤셀도르프 공항에 도착했다. 도착 즉시 우리는 독일 각지에 있는 탄광으로 흩어졌다. 내가 도착한 지역은 독일 아헨에 있는 메르크슈타인 아돌프 광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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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4년 제2진으로 떠날 파독 광부들이 서울 수유리 훈련원에서 찍은 기념사진. 두번째줄 오른쪽에서 여섯 번째가 필자다. |
새벽 4시에 기상, 고된 하루 일과
아돌프 광산의 주된 업무는 지하에서 석탄을 캐는 일이었다. 굴을 뚫으면서 갱목으로 보갱하고, 탄맥이 발견되면 채취하여 지상으로 운반하고 석탄의 광물을 골라냈다. 광부의 갱내 작업은 석탄 생산과 운반이 중심이고 이를 위해 동발 나르기, 착암기 천공, 화약 발파, 갱도 보수, 수갱 굴착 등이 이루어졌다.
독일인을 포함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광부들은 단층건물에 마련된 기숙사에서 살았다. 3평 남짓한 방에는 침대, 책상, 의자, 옷장이 하나씩 있고, 취사장과 목욕탕, 세면장 등은 공동으로 사용했다. 광부들의 일과는 새벽 4시부터 시작됐다. 노동 경험이 없는 동료들은 전날 쌓인 피로 때문에 새벽에 일어나는 것을 고역스러워했지만 나는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고학 시절 신문배달을 하고,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며 단련된 체력 덕분이었다.
아침 식사는 대부분 끓이기 쉬운 국수를 먹었고, 점심은 각자 알아서 준비해야 했다. 기숙사에는 각국에서 온 외국인들이 모여 살았기 때문에 한국 요리부터 터키 요리, 이탈리아 요리, 그리스 요리 등 다양한 나라의 음식을 접할 수 있었다. 각 방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도 각양각색이었다.
기숙사에서 작업장까지는 걸어서 30분 거리. 독일 사람들은 자동차나 자전거를 타고 출근했지만, 우리는 걸어서 갔다. 새벽 5시쯤 광산에 도착하면 탈의장에서 작업복으로 갈아입었다.
작업복 외에 특수 제작된 안전신발, 안전모, 충전된 전등, 가죽으로 특수 제작된 장갑, 낮은 탄층을 기어다닐 때 필요한 무릎대기와 앞정강이 보호대, 내리막길의 엉덩이 보호대 등의 장비를 착용한 후 4L 정도의 물과 점심으로 먹을 빵을 챙기면 지하 500~1000m 깊이의 막장으로 들어갈 준비가 완료된다. 이런 차림으로 36℃ 이상의 막장에서 하루 8시간씩 노동을 하면 온몸이 땀과 먼지, 석탄가루로 뒤범벅이 됐다.
우리가 주로 하는 일은 막장의 천장이 무너지지 않도록 버팀쇠 기둥을 설치하는 작업이었다. 여느 탄광과 마찬가지로 獨業制(독업제)를 적용하고 있어 일을 많이 한 광부와 적게 한 광부의 임금 차이는 상당히 컸다. 보통 평균임금 400마르크를 받는 동료가 있는가 하면 1600마르크를 받는 동료도 있었다. 한국인 광부들은 돈을 더 벌기 위해 연장근무도 마다하지 않았다.
8시간을 땀에 절어 일을 하면 누구나 지친다. 일을 마치고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오는 광부들은 눈과 입만 빼고 아프리카 토인처럼 검게 변해 누가 누구인지 식별하기 어려웠다. 우리는 지친 몸을 이끌고 기숙사로 돌아와 저녁밥을 먹은 후 시장을 보거나, 다음날 갈아입을 옷을 세탁하곤 했다. 한국에서 가지고 온 흘러간 노래 테이프를 듣거나 편지를 쓰다 보면 밤 10시, 내일의 노동을 위해 이 시간에는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이 생활이 계약 기간인 3년 동안 반복됐다.
죽음의 공포와 싸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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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산에 들어가기 전 필자의 모습. 카메라 앞이라 웃고 있지만 작업하러 갈 때는 늘 죽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과 싸워야 했다. |
광부들 사이에 습관적으로 오가는 인사말이다. 막장은 삶과 죽음의 기로였다. 수시로 사고가 났고, 들것에 실려 나가는 광부가 한둘이 아니었다. ‘막장 인생’이라는 말이 왜 생겨났는지 알 것 같았다. 사고가 있을 때마다 우리는 쇠기둥을 부둥켜안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곤 했다.
우리가 일하는 막장의 길이는 수십 m지만 폭은 겨우 3~4m밖에 되지 않았다. 그나마 폭의 절반은 거대한 기계가 차지하고 있어 운신의 폭이 좁았다. 톱니바퀴가 사납게 돌아가는 採炭機(채탄기)가 내는 굉음과 자욱한 먼지 속에서 쉴 새 없이 동발을 걸고, 버팀쇠 기둥을 세웠다. 한순간의 실수로 막장이 무너지면 사망하거나 중상으로 이어질 만큼 위험한 작업이어서 8시간 내내 긴장감을 늦출 수 없었다.
일을 시작한 지 몇 주 지나지 않아 한국인 광부 하나가 사망하는 매몰사고가 발생했다. 거미줄 같은 독일 광산 시설 안에서 작업 미숙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당한 변이었다. 엊그제 함께 온 동료가 싸늘한 주검이 되어 운구차에 실려가는 것을 보고 우리는 넋을 잃었다. 앞으로 3년을 어떻게 버틸지 몰라 여러 날을 눈물로 지새웠다.
동료의 죽음도 아랑곳없이 매일 한치 앞이 안 보이는 굴속을 전등 하나에 의지해 드나들어야 했다. 나 역시 언젠가는 저렇게 죽어 관 속에 눕게 될지 몰라 두려웠지만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축 늘어진 어깨에 우리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희망을 품어 보려 노력했다.
이후로도 한국 광부의 사망사고는 여러 건 있었다. 사고원인은 대부분의 광부 지망생들이 광산에서 일해 본 경험이 없었다는 점, 작업환경이 곡괭이나 삽을 이용하는 한국과 달리 독일은 기계화되어 있어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는 점, 천장이 무너지지 않도록 받쳐 주는 쇠기둥과 동발이 독일 사람들의 체격에 맞게 제작돼 한국인이 감당하기에는 힘이 부쳤다는 점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사고유형은 다양했다. 기계에 몸이 끼여 죽기도 하고, 천장을 받치는 쇠기둥이 넘어지거나 지압에 못 이겨 튕겨 나오기도 했으며, 바윗돌이 무너지기도 했다. 失明(실명)이 되고, 손가락이나 발가락 등 신체의 일부가 잘려 나가는 것 외에도 크고 작은 사고로 불구자가 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그 시절 가장 힘들었던 건 지하 수천 m 깜깜한 막장 안에서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의 공포와 싸우는 것이었다. 당시 쓴 일기 몇 편을 소개하면 이렇다.
지하생활자의 수기
1964년 11월 27일 금요일.
아침에 일어나 보니 여기저기서 동료들이 수군거리고 있었다. 내용인즉, 두 달 전 우리와 함께 온 2진 광부와 1진 광부가 우리 광산과 다른 광산에서 일을 하다가 사망했다는 이야기였다. 독일에 온 지 며칠 되지 않은 후진 광부들은 불안한 눈동자로 이곳저곳에서 부둥켜안고 하루 종일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었다. 이런 장면을 본 우리 모든 광부들은 마치 사지가 풀린 듯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1964년 11월 30일 월요일.
오후에 동료의 장례식이 있었다. 추도식 순서는 기독교 예식에 따라서 진행되었으나 특별히 먼저 애국가가 연주되고 묵념이 있은 다음 동료들을 대표한 광부의 추도사가 이어졌다. 시체가 관 속에 옮겨질 때 우리 광부 200여 명은 서로 부둥켜안은 채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부푼 꿈을 안고 이곳에 온 지 한 달여 만에 싸늘한 주검이 되어 부모님 품으로 돌아가다니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1965년 11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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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헨 광산 근무 시절 쓴 일기장과 막장에서 석탄가루에 막힌 코를 뚫기 위해 피우곤 했던 코담배. |
일을 많이 하면 할수록 수명이 줄어드는 직업이 광부일 것이다. 연장근무도 좋고 할당된 작업량의 성취도 좋지만 몸속에 썩지 않는 돌가루와 석탄가루가 쌓여 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끔찍했다. 돌가루와 석탄가루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는 작업장에서도 우리는 살기 위해 숨을 쉬었고, 탄가루 범벅인 빵을 먹었다.
먼지를 조금이라도 덜 들이켜려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도 있었지만 금세 더러워져 안 쓰느니만 못했다. 마스크를 쓰느니 차라리 코담배를 피우는 게 나았다.
광산 경험이 없는 사람은 막장 안에서 웬 담배냐고 수선을 떨지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갱내는 팽창된 공기 흐름과 가스 누출 때문에 말 그대로 火藥庫(화약고)나 다름없었다. ‘화기 엄금’ 지역인 막장에서 담배를 피운다는 것은 그야말로 폭탄 지고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코담배는 일반 담배와 다르다. 코담배는 한쪽을 콧구멍에 삽입할 수 있도록 작은 용기 안에 담아 제조된 가루담배를 말한다. 코담배를 코 안에 넣어 비강 내 점막을 자극하면 이미 들이마신 석탄가루가 콧물과 함께 다시 빠져나온다. 갱내에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적극적인 구명책이었던 셈이다. 분비물이 나올 땐 좀 지저분하기는 하지만 그나마 코담배로 돌가루와 석탄가루를 뽑아낼 때가 가장 시원하고 행복했다.
우리는 막장 안에서 코담배를 피우며 이런 대화를 나누곤 했다.
“그래, 이러고 있으면 며칠 더 살 것 같아.”
“계속 코담배를 피우면 저 밑바닥에 가라앉은 것까지 쫙 올라오려나.”
부상 사고 당하다
목숨을 담보로 한 작업이어서 3년 동안 아무 탈 없이 근무를 마친다는 것은 天運(천운)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 역시 사고를 피해 가진 못했다. 예기치 못한 낙반 사고로 손을 크게 다친 일이 있다. 다행히 바위가 머리가 아닌 손으로 떨어져 죽음은 면했지만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게 된다.
사고가 났을 때 나는 비명을 질렀고, 이에 놀란 동료들이 황급히 달려와 비상벨을 눌러 모든 작업이 중단됐다. 충격과 출혈이 심해 막장에 누워 있을 때 “권형 정신차려! 정신차려! 바로 의료진이 올 거야”라며 의식을 잃어 가던 나를 깨우려 애쓰던 동료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지하에서 들것에 실려 지상으로 올라오는 동안 별의 별 생각을 다 했다. ‘손을 잘라야 하나’ ‘이대로 평생 불구자로 지내야 하는가’ ‘이 일을 더 할 수 있을까’ ‘독일로 돈 벌러 간다고 빚내고 소까지 팔았는데…’ ‘어머니 이제 돈은 어떻게 벌죠?’
그 후 병상에 누워 있던 30여 일간 흘린 눈물은 지금까지 내가 60평생 흘린 눈물보다 더 많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더불어 고국에 대한 향수도 우리를 괴롭혔다. 한국을 떠날 때, 김포공항에서 배웅하던 가족들의 얼굴을 떠올리면 눈물이 나왔다. 그리움을 달래려고 ‘동백아가씨’ ‘비내리는 고모령’ ‘꿈에 본 내 고향’ 등을 부르며 힘겹게 일할 즈음, 朴正熙(박정희) 대통령 부부가 독일을 방문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박정희 대통령의 독일 방문은 1964년 12월, 독일 연방공화국 뤼프케 대통령의 초청으로 성립됐다. 박 대통령의 공식방문 일정 중에는 루르 공업도시의 함보른 탄광과 뒤스부르크의 광부 숙소 시찰이 포함됐다.
300여 명의 광부와 간호사들이 함보른市(시) 강당에 모여 울음바다를 이뤘던 그날의 행사에 대해서는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지만, 당시 독일에서 힘겨운 노동을 하던 광부들에게는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현장에 있었던 나는 당시 정황과 감회를 적어 <전북신문>에 투고하기도 했다.
한국 광부들은 우리의 대통령이 서독을 방문한다는 소식에 흥분돼 있었다. 독일의 광산회사들은 한국 대통령 訪獨(방독) 환영식에 참석할 한국인 광부를 버스 한 대 인원인 45명씩 차출했다. 나는 아헨의 한국 광부 200명을 대표할 45명 중 한 사람으로 뽑혔다.
우리는 그날 새벽 7시에 함보른으로 출발했다. 아헨에서 함보른까지는 400여 km, 버스로 두 시간이 넘는 거리였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행사장인 함보른 체육관에는 이미 독일 각지에서 온 광산회사 버스와 한국 광부들, 수많은 독일 내외 신문기자들이 박 대통령 내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朴正熙 대통령 내외의 뜨거운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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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4년 12월 18일 독일 루르 지방의 함보른 광산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 부부가 한국인 광부 및 간호사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
그날 광산회사들 대표로 함보른 광산청 사장의 환영사가 있었고, 박 대통령의 답사가 있었는데 그 요지는 이랬다.
“이곳은 외국인들이 많이 모인 곳이니, 그 속에서 우리 한국의 위신을 손상치 말고 한국인의 긍지를 살려 모범된 일꾼이 되십시오. 독일의 근면한 국민성과 그 정신을 배워 오십시오. 우리나라의 가난을 한탄하지 마십시오. 우리도 잘살 수 있고 또한 부흥의 소재를 많이 마련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게 무슨 꼴입니까. 나라가 못사니까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이 지하 수천 m에서 생명을 담보로 일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내 가슴에서 피눈물이 납니다. 여러분,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이렇게 못살지만 후손들에게는 잘사는 나라를 물려줍시다. 열심히 합시다. 나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 같은 박 대통령의 격려사는 우리 광부들에게 보다 큰 용기와 삶의 희망을 주었다. 그날 우리는 각자의 가슴 속에 ‘국가의 위신을 추락치 말고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라’는 박 대통령의 당부를 깊이 새겨 넣었다.
환영식은 간호사와 학생들의 꽃다발 증정으로 끝이 났다. 뤼프케 독일 대통령과 함께 승용차를 타고 행사장을 떠나는 대통령을 배웅하며 우리는 한 됫박의 눈물을 쏟아냈다. 대통령은 차 안에서도 연방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고, 곁에 있던 육 여사와 독일 수행원들의 눈에도 쉼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박 대통령은 승용차로 이동하는 내내 눈물을 흘렸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뤼프케 대통령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각하, 울지 마십시오. 잘사는 나라를 만드십시오. 우리가 돕겠습니다. 독일이 ‘라인강의 기적’을 이룬 것처럼, 한국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루십시오.”
광부로 떠났다 교수로 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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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헨 지역신문에 실린 약혼 사진. 당시 언론은 한국에서 온 광부와 간호사가 인연을 맺은 것은 매우 특별한 일이라고 보도했다. |
독일에 더 체류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독일 여인이나 한국 간호사와 결혼한 사람은 연장 근무가 가능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많은 광부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여성을 유혹하는 데 혈안이 됐다. 일부는 불법체류자로 숨어서 전전긍긍하며 생활하기도 했다.
이들은 그 후 독일에서 공부하여 교수, 의사, 전문기술자, 사업가, 태권도 사범, 원예가, 농업 전문 경영자, 여행사 사장, 자영업자, 독일 광산의 최고경영자, 예술인, 영화제작자 등의 전문가로 거듭났다. 또한 이들의 2세들은 미국, 독일, 캐나다 등지에서 판사, 변호사, 정치인, 회계사, 엔지니어, 자동차 디자이너, 파일럿, 예술인이 되어 폭넓은 활동을 하고 있다.
나 역시 불법체류자로 독일에 남아 갖은 고생 끝에 독일 국립사범대학인 아헨교원대학교에 진학했다. 나는 이 학교의 유일한 외국인 학생이었다. 일주일의 절반은 벨기에 군대 PX에서 고된 노동을 했고, 나머지 절반은 대학 강의에 열중한 끝에 독일 학생들이 4년 만에 졸업하는 학교를 6년 만에 겨우 마칠 수 있었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71년에는 캠퍼스에서 운명처럼 만난 지금의 아내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명문 전주여고 출신의 아내는 간호사로 파독, 몇 년 동안 병원에서 근무한 후 대학에 진학해 사회복지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장미꽃이 만발한 봄날 우리는 대학 식당에서 교수와 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지역신문은 한국에서 온 광부와 간호사가 유학생이 되어 결혼하게 된 것은 매우 특별한 인연이라고 보도했다.
결혼 후에는 생활에 여유가 생겨 교육학 석사와 박사 코스까지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또한 초등교사 국가시험에도 합격, 꿈에 그리던 교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한동안 독일에서 한글학교를 운영하며 청소년 교육에 힘쓰던 나는 1979년 전북대 조교수로 부임, 한국을 떠난 지 16년 만에 귀국했다. 가난을 이겨 보겠다고 광부로 떠난 청년이 교수가 되어 돌아왔으니 금의환향한 셈이다.
한국에 온 외국인 노동자들의 처지
요즘 길거리를 거닐다 보면 동남아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들을 어렵지 않게 만나게 된다. 그들을 접할 때마다 독일에서의 광부생활 시절이 자주 떠오른다. 한국이 나를 낳아준 곳이라면 독일은 나를 성공하게 해주고 삶의 정신을 새겨준 나라다. 처음 독일에 도착해 광산 일을 시작할 때부터 공부를 마치고 귀국할 때까지 독일인들은 나를 인격적으로 대해 주었다. 광산의 지하 막장에서 일할 때나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를 할 때 나는 차별대우를 받아본 적이 없다.
최저임금 보장에도 못 미치는 임금착취와 임금체불, 폭행, 인격모독 등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한국 사회의 처사에 부끄러울 따름이다. 독일 광산에서 일할 때 받은 고용계약서에는 이런 조항이 있었다.
‘국적으로 인해서 같은 작업을 하는 독일 광부와 비교해 보수를 적게 받거나 나쁜 노동조건에 처하거나 작업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아니한다. 노동 시간은 휴식시간을 포함하여 일주일에 5일, 매일 8시간이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우리 국민들이 하기 싫어하는 소위 3D업종, 노동시장의 최하층 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내가 독일에 나갔던 시기인 1960년대 우리나라의 국민소득은 현재 한국에 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국민소득보다 더 낮았다. IMF 위기 이후 노동력 부족으로 외국인 노동자를 무분별하게 불러들여 오더니 최근에는 이들을 불법체류자라 하여 체포, 강제 출국시키고 있다.
내가 독일에서 광부생활을 할 때나 다른 업체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도 강제로 연장근무나 휴일근무를 한 적은 없다. 특히 임금착취라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본 일이 없다. 여권 압류, 공장출입 통제 등의 기본적인 인권유린도 당한 일이 없다.
우리 광부들이 개인적인 사정으로 저임금에 시달리거나 사고를 당해도 보험이 적용되어 기본적인 삶을 꾸려가는 데는 아무런 장애가 없었다. “때리지 마세요” “월급 주세요” “우리도 인간입니다” “우리는 노예가 아닙니다”라는 울부짖음에 가까운 호소를 한 적도 없다.
파독 광부 출신인 나는 한국에 온 외국인 노동자들의 비참한 실상을 접할 때마다 화가 나고 기분이 착잡해진다.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처우 개선이야말로 國益(국익)을 위한 투자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구체적인 정책을 수립하고 차별 없는 근로조건과 인권을 보장, 내가 독일을 생각하는 것처럼 이들 또한 먼 미래에 한국을 ‘은혜의 나라’로 기억하도록 했으면 한다.⊙
▣ 광부 派獨(파독)의 경제적 의의
1960년대 들어 수립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정부는 과잉 인구의 해외 진출을 모색했다. 1962년 3월 해외이주법을 제정하고, 12월 내각수반 지지각서에 따른 보사부의 인력진출 종합계획이 작성되어 정부 주관으로 서독 광부 송출교섭이 성사됐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한국과 독일의 본격적인 교류는 주로 경제교류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독일은 6·25 전쟁 이후 한국의 경제개발 사업에 처음부터 참여한 국가 중 하나이며, 1962년 경제지원을 시작으로 13억 마르크를 제공했다. 광부와 간호요원의 독일 송출은 이와 긴밀한 연관을 가진다.
광복 이후 해외 취업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셈인데, 1963년 12월 21일 제1진 1기 123명의 광부가 첫 파견됐다. 한국 광부들의 독일 광산 취업은 1961년 12월 13일 독일 본에서 영문으로 작성된 두 통의 ‘한국 정부와 독일 연방공화국 간의 경제 및 기술 협조에 관한 의정서’가 계기가 됐다. 이 시기에 간호사도 독일에 파견되는 길이 열렸다. 그 전인 1961년 4월 14일 대한석탄공사와 독일 지멘스社(사) 사이에 한국 광부의 고용에 관한 각서를 교환한 바 있다.
1963년과 1965년 사이에 독일에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 수는 1198명이었다. 1965년 2000명을 더 파견하기로 하여 선발하기로 했으나 독일 에너지 정책이 바뀌어 중단됐다. 1965년 6월 30일까지 독일 광산에 취업한 한국인은 총 2072명이었는데, 이들 중 7명이 죽고, 18명이 강제 귀국했다.
1965년 11월 6일 독일 함보른 클래크너 광산에서 한국인 근로자 5명이 무단결근, 해고로 귀국 조치됐다. 1967년 7월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으로 양국관계가 악화되면서 1967년과 1969년 사이에는 광부 파견이 중단됐다.
1970년 2월 18일 또 다시 약 2만명의 광부 파견이 재개됐다. 1974년 5월 24일 파독 광부 17명이 위조한 서류로 귀국하는 광부들이 보상금을 더 받기 위해 본국의 아내가 죽었다느니, 독신으로 간 광부가 가족수당을 받을 목적으로 본국에 처자식이 있는 것처럼 서류를 위조한 사실이 밝혀져 양국 신문에 크게 보도된 바 있다.
1963년부터 1977년까지 독일에 파견된 한국 광부는 총 7936명이었다. 1964년에서 1979년 사이에 광부 65명이 사망했다. 사망원인은 광산사고 27명, 교통사고 18명, 病死(병사) 12명, 자살 4명, 溺死(익사) 2명, 기타 2명으로 되어 있다. 이 기간에 파견된 간호요원은 1만32명이며, 간호요원 사망자 수는 44명이다.
광부와 간호사는 외화 획득에 많은 기여를 했다. 1965년 이들을 포함한 해외 취업자들이 한국에 송금한 외화는 상품수출액의 10.5%, 무역외수입의 14.6%를 차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