吳鉉明
1924년 만주 출생, 서울大 성악과 졸업. 서울藝高 교사·교감, 한양大 音大 학장, 국립오페라단 단장, 독일 쾰른大 교환교수 역임. 現 국립오페라단 종신단원, 한양大 명예교수.
1924년 만주 출생, 서울大 성악과 졸업. 서울藝高 교사·교감, 한양大 音大 학장, 국립오페라단 단장, 독일 쾰른大 교환교수 역임. 現 국립오페라단 종신단원, 한양大 명예교수.
『밤늦게 시를 쓰다가 쐬주를 마실 때~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짜악~짝~ 찢어지어 내 몸은 없어질지라도, 내 이름만은 남아 있으리라~』(양명문 작사, 변훈 작곡 「명태」 중에서)
「명태」를 부른 吳鉉明(오현명·83) 선생은 한국 가곡사의 산 증인이다. 수많은 테너와 소프라노 가수가 화려한 기교로 아리아를 흐느낄 때, 저음의 바리톤 吳鉉明은 끓는 피 두 주먹을 쥐고 「봉선화」(김형준 작사, 홍난파 작곡)와 「그집앞」(이은상 작사, 玄濟明 작곡)을 고집해서 불렀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키는 법이다. 그는 나라 잃은 희망을 불렀고 나그넷길 인생을 되돌아보는 情恨(정한)을 노래했다.
『어야지여 어야지여 어야지여 에헤야지여 어야지여라 배 떠나간다. 달은 밝고 명랑한데 두리두둥 북소리 울려 어야지여 어야지여 어야지여라 에헤라 어그여지여~』(김현승 작사, 김동진 작곡 「뱃노래」 중에서)
오페라 아리아가 대중예술 붐을 타고 무대 위에 올려질 때 그리움과 이별을 담은 우리 가곡은 쓸쓸히 무대 뒤로 사라졌다. 가곡은 새롭게 수입된 음악에 둔감한 이들이 부르는 노래이거나 그저 촌스러운 곡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서양식 7음계와 3화음이 주류를 이루는 이때에, 우리 가곡은 학교 음악수업에서조차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심지어 음악시간이 정규 학교수업에서조차 사라지는 형국이다.
『이제 여학교에 음악시간이 없어요. 음악교사도 한 명밖에 안 되고 음악교육을 정규수업 시간에 가르치는 게 아니라 자율학습 시간에 학교 합창단에게 가르치는 게 전부입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학생들마저 우리 가곡을 부르지 않으니…』
「명태」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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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동부 이촌동 자택에서 젊은 시절 기억을 더듬으며 앨범을 보고 있다. |
吳鉉明 하면 떠오르는 노래가 바로 邊焄(변훈·1923~2000) 作의 「명태」다. 「명태」만큼은 吳鉉明이 불러야 제 맛이다. 그 역시 러시아의 바리톤 살라아핀의 「벼룩의 노래」와 비슷한 邊焄의 「명태」가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吳鉉明 하면 「명태」고, 「명태」 하면 吳鉉明이라고 해요. 현인 하면 「신라의 달밤」, 이미자 하면 「동백아가씨」와 같은 이치죠. 처음엔 대중가수도 아닌데 왜 「명태」와 오버랩시키냐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요즘 생각이 달라졌어요. 노래를 60여년 동안 부르니 어떤 상징적인 것도 좋지 않으냐는 생각이 듭니다』
「명태」의 노랫말은 하나지만 곡은 두 개다. 吳鉉明이 불러 널리 알려진 「명태」는 邊焄 作이다. 남성미가 절절 흐르고 戰後 절망감이나 패배의식을 찾을 수 없다.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金東振(김동진·1913~1993) 作 「명태」는 감미롭고 서정적이다. 만약 吳鉉明 선생이 金東振 作의 「명태」를 불렀으면 어떻게 됐을까.
『1951년 邊焄 선생이 대구 육군본부 연락장교로 계실 때였어요. 1·4 후퇴 때 남쪽으로 넘어온 金東振, 楊明文(양명문·1913~1985) 선생이 육군 정훈감실 文官(문관)으로 계셨는데 늘 같이 몰려다녔어요.
어느 날 낙동강 일대로 시찰을 나갔나 봐요. 안동 부근 여관에서 투숙하셨는데 세 사람이 같은 방에서 잤다고 합니다. 그날 저녁 楊明文 선생이 두 편의 시를 썼는데 그게 「낙동강」과 「명태」였습니다. 楊선생이 「오늘 내가 쓴 시인데 이 자리에서 곡을 붙이면 어때?」하고 金東振, 邊焄 선생에게 건넸죠. 시가 좋았는지 두 분 역시 그 자리에서 곡을 썼어요. 같은 노랫말이지만 「낙동강」, 「명태」라는 두 개의 서로 다른 곡이 탄생하게 된 셈이지요』
「그게 무슨 가곡이냐」
―어떻게 邊焄선생의 「명태」를 부르게 되셨나요.
『한번은 邊焄 선생이 부산으로 출장을 오셨는데 그때 저는 해군 정훈음악대에 있었어요. 음악노트 두루마리를 툭 내던지며 「명태라는 곡이 있는데 네가 불러 줘」라고 하데요. 「명태」의 노래가 하도 재밌어서 「한국 가곡의 밤 」 행사 때 불렀더니 이튿날 신문에 「그게 무슨 가곡이냐」고 혹평하는 기사가 실렸어요』
당시 邊焄이 지은 가곡으로는 「떠나가는 배」, 「금잔디」, 「자장가」, 「무서운 시간」 등이 있다. 홍난파類의 여성적이고 부드러운 서정의 노래가 아니라 남성답고 단단한 배포가 묻어나는 곡들이었다.
―「명태」는 「비목」類의 슬픈단조 선율의 가곡 풍과는 전혀 다른 곡입니다.
『그렇죠, 멜로디가 없으니까. 가곡이라면 으레 아름답고 서정적인데, 「명태」는 가사 위주로 읊는 식이니 달랐겠죠. 邊焄 선생이 그 신문 기사를 보고 「다시는 작곡을 안 한다」고 분개하며 대구를 떠나 제주로 아주 가버렸습니다. 그렇다고 어디 작곡을 안 할 수 있나요? 제주에서도 작곡을 했지요』
邊焄 선생은 제주도에서 잠시 영어교사를 하다 1953년부터 외교관 생활을 시작, 1981년까지 미국·일본·브라질 등지에서 외교관으로 지냈다.
―관객의 반응은 혹평과는 달랐습니다.
『휴전을 하고 「명태」를 또 부르니 재밌다는 평판이 났어요. 누구는 「사람 웃기는 노래」라고 했어요. 자꾸 「명태」를 불러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金東振 선생의 「명태」가 있는지 몰랐어요. 1957년 배제음악당에서 바리톤 서영모씨가 金東振 작의 「명태」를 부르잖아요. 깜짝 놀랐죠. 들어보니 괜찮았어요. 만약 金東振 선생의 「명태」도 같이 알려졌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누구 곡이 낫다고 점수를 더 줄 수 없어요. 하지만 邊焄의 「명태」가 먼저 알려져 「명태」 하면 으레 邊焄 것이지요』
함경남도 함흥 출신인 邊焄 선생은 원래 성악을 했다고 한다. 학창 시절 바리톤으로 이름을 날렸고 젊은 시절, 吳鉉明 선생과 함께 무대에 선 일이 있다. 그러나 부모의 반대로 음악을 포기하고 연세大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해 1회 졸업생이 되었다. 하지만 정종길 선생에게 작곡법을 배워 이후 70여 편의 가곡을 남겼다.
吳鉉明이 겪은 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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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9년 朴正熙 대통령 추도식에서 오현명 선생이 고인의 넋을 기리는 추도가를 부르고 있다. |
육·해·공 3軍과 일본군, 북한군까지 거친 삶의 이력은 그의 노래 인생만큼이나 절절하다. 마치 암흑가를 그린 영화의 남자 주인공처럼 깊게 저음을 깔고 느릿느릿한 바이브레이션을 구사한 뱃심에는 결코 녹록하지 않은 우리의 현대사가 녹아 있다.
『만주에서 태어나 스무 살까지 봉천, 그러니까 지금의 심양에서 자랐어요. 5년제 동광中을 졸업하고 징병 1기로 일본군에 끌려갔어요. 1944년 10월입니다. 蘇滿(소만) 국경에서 주둔하다가 이듬해 2월 오키나와 기지로 배속받았어요. 오키나와로 향하던 중 미군에게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시고쿠라는 남쪽 섬에 주둔했습니다. 미군과 싸움 한번 못 하고 공습만 받다가 해방을 맞았습니다』
광복 후 귀국한 吳鉉明 선생은 38선이 그어진 탓에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다고 한다. 일본군에 끌려갔던 이북 출신들과 함께 서울역전에서 천막을 치고 살았다. 戰後 물지게 진 피란민과 男負女戴(남부여대)하고 내려온 실향민 속에서 희망의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신문에서 玄濟明 선생이 이끄는 「고려합창단」 모집 공고를 보게 된다.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당장 찾아가 원서를 냈다. 노래라면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주에서 보낸 유년 시절, 독실한 크리스천 집안이어서 일찍부터 교회 성가대에 나가 베이스 파트를 맡았지요. 당시 악보를 직접 필사하거나 등사기로 교회 주보를 만들었습니다. 「보리밭」을 작곡한 윤용하라는 친구가 초등학교 동창인데 만주 봉천에서 「조선합창단」을 만들었어요. 그 친구가 제게 베이스를 맡겼습니다. 그때 속으로 「나도 이제부터 평생 음악을 해야겠다」고 다짐했지요』
그 시절 이홍렬 作 「비오는 밤」, 윤용하 作 「독백」과 같은 가곡을 불렀다고 한다. 나라 잃은 설움을 노래에 실은 곡이었다.
1995년 4월13일 서울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古稀(고희) 독창회」 때 吳鉉明 선생은 『만주 봉천시절 친구 윤용하가 조직한 「조선합창단」에서 입장료라는 것을 처음 받고 이홍렬의 「비오는 밤」을 노래한 것이 1944년이니, 노래 인생 50년이 기막히게 머리에 스쳐간다』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고려합창단」에선 소식이 없었다. 직접 玄濟明 선생을 찾아갔다.
『玄濟明 선생을 찾아갔더니 아, 글쎄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합창단을 아예 해체했다지 뭡니까. 그런데 玄선생이 또박또박 눌러쓴 제 이력서를 다시 보시더니 「꼭 음악을 하겠느냐」고 물어요. 「죽어도 하겠다」고 하니 사무원으로 취직시켜 주더군요』
「고려합창단」에 취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심부름을 가다 만주에서 헤어진 부모와 재회한다.
『파고다 공원 쪽으로 자전거를 타고 심부름 가는데, 낯익은 사람이 보따리를 이고 지나가요. 우리 형수가 키가 좀 컸거든요. 그래도 설마 하며 지나치는데 조카가 눈에 보여요. 찬찬히 살피니 아버지, 어머니가 등짐에다 보따리를 이고 걸어가는 게 아니겠어요? 극적이지요. 자전거 팽개치고 얼싸안고 울었습니다』
남성4중창단과 경성음악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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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리톤 오현명씨와 테너 안형일씨가 정진우씨(왼쪽부터)의 피아노 연주에 맞춰 윤용하의 가곡「보리밭」을 부르고 있다. |
1945년 玄濟明 선생은 경성음악학교를 설립한다. 서울大 音大의 전신인 셈이다. 4중창단에서 한창 인기가 높던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음악학교에 들어가기까지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우리 4중창단 멤버들은 「음악은 실력으로 하는데 학벌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 너만큼 하면 성악가나 다름없다」고 했어요. 한참 고민하다가 피아니스트 김원복 선생(서울大 音大 명예교수)에게 여쭈니 「앞으로 질서가 잡히고 사회가 안정되면 간판이 필요하다」고 해요. 그래서 경성음악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音大에 가지 않았다면 지금 이 자리에 섰겠습니까』
22세 때인 1946년 경성음악학교가 서울大에 통합되면서 玄濟明 선생은 서울大 초대 音大 학장이 되었다. 吳鉉明 선생도 그해 입학한다. 「사월의 노래」, 「그대 있음에」 등을 쓴 한국 최초의 여성 작곡가인 김순애의 남편이기도 한 김형로 선생에게 음악과 노래, 인생을 배웠다. 김형로 교수는 한국전쟁 당시 납북됐다.
『김형로 선생은 참 인간적이셨어요. 예술가나 교수 티가 안 났어요. 요즘처럼 제자를 노예처럼 부리지도 않으셨어요. 자기 것을 다 베푸는 분이셨습니다. 발표회가 있으면 당신 집으로 제자들을 불러 두꺼운 스테이크를 주시고, 의상도 빌려 주셨습니다』
吳鉉明 선생은 서울大 音大에서 한 해 후배인 아내 김성남(2001년 작고)을 만난다. 당시로선 드문 캠퍼스 커플이었다. 약혼식을 올리자 당시 학장이던 玄濟明 선생이 「둘 중 한 명은 학교를 그만둬야 한다」고 했다.
『玄濟明 선생님이 보수적이셨어요. 그래서 아내가 학교를 그만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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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제명 선생은 고려합창단 대신 남성4중창단을 만들었다. 오른쪽 끝이 오현명 선생. |
인민군에 끌려가다 탈출
재학 시절인 1948년 玄濟明 선생이 만든 한국 최초의 창작 오페라 「춘향전」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그는 사령, 옥사장 등 한꺼번에 네 가지 배역을 맡았다. 당시 지휘는 작곡자인 玄濟明 선생이 맡았고, 연출엔 유치진, 가수로는 도령에 이인범, 춘향 이금봉, 월매 김혜란, 방자 김학상, 변사또 김형로 등이 출연했다. 대본은 판소리 춘향가가 바탕이었지만 서양 음악의 선율을 따랐다. 상당한 인기를 끌었고 「사랑의 2중창」은 유행가처럼 즐겨 부르기까지 해 그 반향이 대단했다고 한다.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그는 인민군에 끌려간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할 때 오케스트라 협주단과 합창단을 만들었습니다. 서울에 있는 음악가들을 일일이 찾아내 끌고 갔죠. 악단 명칭을 따로 붙이지 않고 「북한 내무성 협주단」이라고 불렀습니다. 오케스트라 단원만 300여 명이 넘었고 경성음악학교 출신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무용단·축구부·연극단도 만들었어요. 성악가 조상현, 피아니스트 백낙호, 테너 이우근, 평론가 최인봉, 저 이렇게 다섯 명이 춘천에서 탈출했지요』
―끌려갔던 단원들 소식은 들었나요.
『압록강까지 갔다고 들었어요. 평양 순천에서 미군 낙하산 부대가 투입됐을 당시 도망친 단원도 있었습니다. 겁이 나 도망 못 간 단원 중 30%는 북한에 남아 나중에 공훈배우, 인민배우가 됐다고 합니다』
―이후 육·해·공 3軍에서 모두 복무했습니다.
『인민군에서 탈주한 뒤 육군에 들어갔고, 이어 공군 정훈부대로 편입됐다가 해군으로 옮겨 갔습니다. 제대는 해군에서 했지요』
피란 시절 첫 독창회(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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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현명 선생은 1949년 3월28일 정동교회에서 경성음악학교 한 해 후배인 김성남 여사와 결혼했다. |
『경남여중 교사를 2년7개월 하고 수도여고로 학교를 옮기게 됐어요. 서울로 떠나기 전 독창회를 연 것입니다. 부산의 어느 여고 강당을 빌렸는데 정전이 될지 몰라 무대 앞에 촛불 10개, 피아노 앞에 촛불 4개를 켜놓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는 슈만의 「시인의 사랑」과 김순애의 「사월의 노래」·「해당화」, 윤이상의 「달무리」·「추천」·「고풍의상」 등을 불렀다.
『그때만 하더라도 젊었으니까 남들이 안 하는 새로운 곡에 도전해야겠다는 생각이었어요. 독일 가곡 슈만의 「시인의 사랑」을 불렀어요. 16곡이나 되는 大曲(대곡)이지요』
그리고 꼭 50년 만인 2003년 5월 부산에서 피아니스트 정진우와 함께 기념 공연을 가졌다.
이후 그는 오페라와 가곡 독창회를 50여 차례 가졌고, 聖歌(성가) 독창회를 30여 차례 열었다. 오페라 출연 56차례, 오페라 연출도 56차례나 된다. 국립오페라 창단 단원과 단장을 1964년부터 18년 동안, 한양大 초대 音大 학장을 1973년부터 18년 동안 역임했다. 전쟁과 해방의 격변 속에서 그는 음악의 외길을 완성했다.
『저는 「1회」와 관계가 많아요. 만주에서 자랄 때 유치원 1회 졸업생이고, 초등학교와 중학교, 경성음악학교 모두 1회 졸업생입니다. 첫 회라고 해서 좋은 게 하나도 없어요.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책걸상 나르고, 운동장 고르다 졸업을 하게 됐습니다. 남의 뒤를 받쳐 주는 역할만 죽도록 할 뿐이었지요』
한국 가곡만으로 첫 독창회(1963)
1963년에는 성악가 중 최초로 우리 가곡만으로 독창회를 열었다. 당시로선 무척 이례적이었던 그의 가곡 연주회는 1967년 재개됐고 1970년, 1974년, 1980년, 1984년 등 3~4년 간격을 두고 계속됐다.작곡가 홍난파에서 백병동까지 그에 의해 初演(초연)되거나 발굴된 곡도 여러 곡이 된다. 백병동 作의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년의 죽음」, 정회갑 作 「그리움」, 邊焄 作 「임진강」, 金東振 作 「낙동강」 등은 吳鉉明이 처음 부른 노래들이다. 그가 가곡 연주회를 고집한 것은 흩어진 우리 가곡을 찾아 시대별로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우리 가곡 16곡을 가지고 처음 독창회를 열었지요. 성과가 좋았어요. 그래서 가곡 독창회 시리즈를 계속한 겁니다. 홍난파부터 시작했고 작곡가 백병동이 그때 20代 후반이었는데, 지금 예순 여덟 살이 됐네요. 작곡가 36명의 곡을 네 곡씩 나눠서 부르겠다고 결심했는데 결국 30년 걸려 다 불렀습니다』
그는 1964년부터 국립오페라 단장으로 재직하며 직접 오페라를 연출했다. 물자가 귀했고 애호가도 적었지만, 하나에서 열까지 연출자가 다 알아서 공연을 준비했다. 그 시절 오페라 역사를 말할 때면 吳鉉明의 미적 감각과 손재주를 반드시 거론한다. 만약 그의 그런 재주가 아니었다면, 그 많은 오페라는 무대 위에 올려질 수 없었을지 모른다.
그가 무대에서 맡은 역은 주로 악역이다. 악역은 바리톤이 맡는다. 대신 주역은 늘 테너의 몫이다. 그러다 보니, 장난기 섞인 불만이 나온다.
『「리골레토」의 스파리프치레 役처럼 주로 악역만 맡았어요. 테너는 아무리 못나도 프리마돈나와 사랑에 빠지고 포옹과 키스를 하지만, 저는 손 한 번 못 잡아 보고 남 싫은 짓만 했어요. 그게 아쉽다면 아쉽지요』
주로 같은 무대에 섰던 테너는 안형일, 이우근, 김금환 등이다. 바리톤은 아무래도 라이벌 의식이 생길 법하다. 윤치호, 양천종, 이인영씨 등이 당대 그와 겨룬 바리톤들이다.
『보통 오페라 공연을 하면 같은 배역을 더블 캐스팅합니다. 그러다 보니 경쟁 의식이 생기지요. 늘 같은 무대에 섰지만 바리톤 윤치호씨와는 별로 부딪히지 않았어요. 배역이 달랐습니다. 양천종씨는 역을 번갈아 많이 출연했는데 솔직히 라이벌 의식이 생겼어요. 「다음엔 내가 더 잘해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인영씨는 라이벌로 생각할 정도는 아니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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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년 우정 콘서트」를 여는 원로 성악가들. 왼쪽부터 이성균(피아노), 오현명(베이스), 안형일(테너), 정진우(피아노)씨. |
한국 가곡만 부르는 사연
성악가의 발표회는 주로 이탈리아 가곡을 기본으로 하고 독일 가곡을 부른 뒤 우리 가곡은 양념으로 한두 곡 정도 부른다. 아예 우리 가곡을 부르지 않는 경우도 많다. 吳鉉明 선생 역시 우리 가곡을 주로 불렀지만 젊은 시절에는 이탈리아나 독일 가곡을 즐겨 불렀다.
그러나 1981년 2년간 독일 쾰른大의 교환교수로 가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이후 외국 가곡을 부르지 않았다.
『1981년부터 독일 교환교수로 갔어요. 독일 音大에서는 독일 노래밖에 안 가르쳐요. 오페라는 할 수 없이 이탈리아 말을 원어로 가르칩니다. 그것 외에는 전부 독일어로 된 가곡뿐이지요. 프랑스에 가면 더 심하고, 이탈리아에 가면 독일 노래조차 부르지 않아요. 모두들 자기 나라 노래만 부르지요. 실은, 저도 젊은 시절 독일 가곡에 미친 적이 있어요. 독일 가곡이 아니면 예술도, 성악도 아니라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한 적이 있어요』
『우리 성악가들 솔직히 독일어, 이탈리아어를 못 합니다』
쾰른大 音大 유학생 중 한국 학생이 30%나 됐다고 한다. 명색이 교환교수지만 동양인 성악교수에게 학생들이 독일 가곡을 배울 리 만무했다.『쾰른大 音大 학장이 「배우고 싶어 하는 학생이 있으면 가르치고, 없으면 마음대로 하라」고 하데요. 주로 음악회를 많이 다녔습니다. 모두 독일 예술 가곡을 불러요. 이탈리아, 프랑스에 갔는데 모두 자기 나라 노래만 불렀습니다. 충격을 받았어요. 돌아가면 절대 외국 노래를 부르지 않겠다, 우리 가곡만 부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귀국 후 그는 우리 가곡만 불렀다. 외국 가곡을 불러 달라는 섭외가 들어오면 정중히 사양했다.
『미안한 얘기지만, 우리나라 성악 교수들은 독일 말을 못 해요. 스토리야 알지만, 우리말처럼 씹어서 이해를 못 합니다. 말도 모르면서 노래 부르며 슬프게 인상 쓰고… 이게 다 뭡니까. 기껏 남의 노래 듣고 흉내 내는 겁니다』
吳鉉明 선생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그럼, 청중은 독일 말을 압니까. 누가 알아요. 1000명 중에 10명이라도 알아들을까요? 전문가가 아니면 몰라요. 제가 독창회할 때 1부는 독일 가곡을 부르고, 2부는 우리 가곡을 불렀습니다. 주로 슈만의 「시인의 사랑」을 혼을 다해 불렀지요. 청중들이 조용히 듣더니 도대체 반응이 없어요. 남이 박수 치면 쫓아서 치고… 「저 사람 목소리 좋구나」 느끼는 것도 한두 곡이지, 네댓 곡을 부르면 아무리 소리가 좋아도 이 노래가 저 노래 같고, 저 노래가 이 노래 같지 않나요?
그런데 2부에 우리 가곡을 부르면 달라요. 예컨대 장일남의 「접동새」를 「접~동, 접~동, 울어라~. 진두강에 살던 누나는~」 하고 부르는데, 청중들 표정이 갑자기 애절해져요. 저절로 가슴에 와 닿는 것이지요』
音大 교수들이 문제
대학의 우리 가곡 교육은 어떨까. 수업은 외국 가곡에 비해 얼마나 강도 높게 이뤄지는 것일까. 그러나 吳鉉明 선생은 『音大 교수들이 문제』라고 했다. 그는 서울藝高 교사와 교감을 지내다 1964년부터 한양大 音大 교수로 부임했고 정년 후에는 명예교수로 재직했다.
『제가 한양大에 있을 때 학기말 시험 때 우리 가곡을 한 곡씩 넣자고 했어요. 당시 서울大와 이화女大도 우리 가곡으로 시험을 안 칠 때였어요. 그런데 교수들이 무성의해요. 이탈리아나 독일 노래는 아주 어려운 곡만 골라서 h나 y발음의 악센트에 온갖 신경을 다 씁니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 가곡은 민숭민숭하게 불러도 그냥 둡니다. 제자들이 「내 고양(고향) 남쪽 나라」라거나 「고양(고향)으로 돌아가자」라고 불러도 그냥 놔둡니다. 소리 내어 노래 부르는 게 아니라 노랫말을 낭독하는 식입니다. 우리말은 다 아니까 음정에 맞춰 부르면 된다는 식이죠』
―대학교육도 그렇고 교수들의 인식도 그렇다면 참 문제네요.
『저도 40년간 대학에서 봉사해 왔지만 한심해요. 교수 자격부터 따져야 합니다. 이 정도의 교수가 남을 가르칠 수 있는 역량이 있는지 의심스러워요.
한 번 교수가 되면 종신입니다. 연구실적이 다 문서로 돼 있는데 어떻게 평가를 합니까. 어떻게 동료 교수에게 낙제를 줄 수 있나요』
그의 몸에는 현재 암 세포가 숨어 있다. 1999년 방광암 선고를 받아 수술을 받고 얼마 뒤 간암 진단까지 받았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벌써 무덤을 팠을 텐데」 아직도 무대에 오른다. 무대가 없었다면 버티지 못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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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년 5월21일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큰스승」,「큰사람」콘서트에 앞서 오현명씨의 지휘에 맞춰 노래연습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안형일, 황병덕, 조상현, 황영금, 채리숙, 이인영씨. |
암을 노래로 이긴 사연
지난 6월에는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한국 가곡의 밤」 행사에 참가했고, 7월에는 「솔리스트 앙상블」 공연에 참가해 미국 5개 도시를 돌았다. 얼마 후면 매년 가을에 열리는 「한국 성가 독창회」에 출연할 예정이다. 엄청난 체력이 아닐 수 없다.
『나쁜 병이라는 것은 다 앓았어요. 암도 2종류를 앓고, 남들 같으면 무덤 팠을 텐데 그냥 살아갑니다. 골치 아픈 것 안 하고 사람의 일이야 다 마찬가지지만, 복잡한 일에는 관계 안 하고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니까 뭐, 걱정이 없어요. 암에다 고혈압과 당뇨도 짊어지고 삽니다, 하하하』
―암세포 활동이 멈춘 건가요.
『결국엔 이겨 낸 것이지요. 저하고 같이 발병한 사람이 있는데 의사가 6년 산다고 했는데 진짜 갔어요. 저는 8년째죠. 아무 일 없으니까, 검사만 하고 약도 안 먹어요. 암세포를 발견할 당시 위험한 상태였어요. 종양 크기가 3cm였지요. 꼭 이기고 만다는 생각도 안 했어요. 팔십이 넘었으니 「누가 부르면 그냥 가는 거지」라고 편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1988년 스스로 「노래 나그네」라는 호를 지었다. 친근하고 따뜻한 가곡을 부르며 평생을 살겠다는 각오에서 나왔다. 딱 붙는 청바지에 제임스 딘 같은 모습도, 하얀 양복에 하얀 구두를 신은 명동 신사도 아닌, 「싸나이」답게 배에 힘주고 저음의 레퍼토리로 오페라와 가곡을 맘껏 불렀다. 아니 탄식과 눈물의 현대사를 절제하며 한 시절을 풍미했다.
―살아오시며 아쉬움이 있습니까.
『하고 싶은 노래가 너무 많은데 욕심을 다 못 채운, 그게 아쉽습니다』●
사진 : 이태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