在位 52년 동안 200년 지속된 붕당정치의 틀 타파
君弱臣强의 조선조 통치틀을 전면 수정
申東埈
1956년 충남 천안 출생. 경기高·서울大 정치학과 졸업. 정치학 박사(管仲 연구). 일본 東京大 객원연구원, 조선일보·한겨레신문 정치부 기자 역임. 現 고려大 강사. 저서 「관중과 제환공」, 「통치학원론」, 「삼국지통치학」, 「조조통치론」, 「중국문명의 기원」, 「논어론」, 「공자의 군자학」 등 20여 권.
君弱臣强의 조선조 통치틀을 전면 수정
申東埈
1956년 충남 천안 출생. 경기高·서울大 정치학과 졸업. 정치학 박사(管仲 연구). 일본 東京大 객원연구원, 조선일보·한겨레신문 정치부 기자 역임. 現 고려大 강사. 저서 「관중과 제환공」, 「통치학원론」, 「삼국지통치학」, 「조조통치론」, 「중국문명의 기원」, 「논어론」, 「공자의 군자학」 등 20여 권.

- 英祖
원래 「반수」는 공자를 모신 중국 山東省(산동성) 曲阜(곡부) 소재의 孔廟(공묘) 앞의 연못을 지칭하는 것으로 後代(후대)에 국립대학인 太學(태학)을 뜻하는 말로 전용되었다. 「入泮(입반)」은 곧 鄕試(향시)에 합격한 秀才(수재)가 태학으로 진학하는 것을 의미했다. 英祖가 굳이 반수의 다리 위에 탕평비를 세운 것은 입반한 성균관 유생들에게 탕평의 취지를 천명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탕평」이라는 말은 「書經(서경)」 洪範(홍범) 편에서 따온 것이다. 홍범 편에는 箕子(기자)가 周(주)나라를 세운 武王(무왕)에게 皇極(황극: 제왕의 통치법칙)을 설명하면서 「無偏無黨(무편무당: 치우치거나 편들지 않음), 王道蕩蕩(왕도탕탕: 통치가 평탄함), 無黨無偏, 王道平平」을 언급한 대목이 나온다. 「탕평」은 바로 「왕도탕탕평평」을 축약한 말이다. 탕평비는 「탕탕평평」의 의미를 이같이 풀이해 놓았다.
周而不比, 乃君子之公心
比而弗周, 寔小人之私意
(두루 사랑하고 무리 짓지 않는 것은 군자의 공정한 마음이고, 무리 짓고 두루 사랑하지 않는 것은 소인의 사사로운 뜻이다)
이는 「禮記(예기)」에 나오는 한 구절로 원래는 「論語(논어)」 위정 편에 나오는 「君子周而不比(군자주이불비), 小人比而不周(소인비이부주)」 구절을 풀이해 놓은 것이다.
英祖의 치세는 朋黨(붕당)정치의 폐해가 극에 달한 때였다. 英祖는 그 해결방안으로 「탕평」을 거론한 것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英祖가 당시의 붕당을 소인들의 집단으로 간주한 데서 나온 것이다. 최초의 붕당인 東人(동인)과 西人(서인)이 출현하면서 모두 君子黨(군자당)을 자임했을 때 宣祖(선조)가 자신 또한 「眞朋(진붕)」에 가입하고 싶다는 취지를 밝힌 것과 비교하면 天壤之差(천양지차)가 있음을 알 수 있다.
老論의 전폭적 지지로 보위에 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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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잉군 시절의 英祖. |
그러나 당시 周易(주역)에 조예가 깊었던 邵雍(소옹)은 오히려 소위 「皇道論(황도론)」을 내세우며 「탕평론」을 전개하고 나섰다. 그는 「皇極經世書(황극경세서)」에서 『군주는 日月(일월)과 같은 존재인 까닭에 無偏無黨을 皇極으로 삼아 천하의 인재를 두루 발탁해 통치에 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英祖도 자신의 「탕평」을 소옹이 말한 「황도론」과 같은 취지로 풀이했다.
英祖 이전에 「탕평」을 언급한 사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를 본격적으로 제기한 사람은 英祖였다. 붕당정치의 폐해가 극에 달한 상황에서 어렵사리 寶位(보위)에 오른 英祖는 「탕평」을 자신의 기본 통치이념으로 삼았다.
그러나 朱熹를 맹종한 조선조의 사대부들은 朱熹의 「붕당론」을 맹종한 나머지 英祖의 「탕평론」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들은 오히려 英祖가 평소 蕩平冠(탕평관)을 쓰고 蕩平扇(탕평선)을 부치며 蕩平菜(탕평채)를 먹는다는 식으로 英祖의 「탕평론」을 비웃었다.
당초 英祖는 출발부터 老論(노론)에 커다란 부채를 안고 있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延?君(연잉군)으로 있을 때 이복형인 張禧嬪(장희빈) 소생의 景宗(경종)이 후사를 두지 못한 까닭에 世弟(세제)가 되어 보위에 오를 수 있었다.
이는 老論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당시 景宗妃(경종비)인 宣懿王后(선의왕후) 魚氏(어씨)는 종친 중 어린아이를 입양해 후사로 정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궁중 일각에서는 소현세자의 후손으로 景宗의 9촌 조카인 密豊君(밀풍군) 李坦(이탄)의 아들 李觀錫(이관석)을 입양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老論이 연잉군의 世弟 문제를 서두른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世弟의 대리청정 밀어붙인 老論
世弟 책봉은 老論의 주도면밀한 계책 아래 하룻밤 사이에 성사되었다. 老論의 전격적인 행보에 경악한 少論(소론)은 즉각 반격에 나섰으나 오히려 수에 밀려 역공을 당하고 말았다. 司直(사직) 柳鳳輝(유봉휘)가 老論 대신에 대한 엄벌을 상소했다가 유배당한 사실이 그 증거이다. 당시 유봉휘를 구하고자 한 우의정 趙泰(조태구)도 탄핵을 당해 집에서 근신해야만 했다. 少論은 집권세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적으로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老論은 여세를 몰아 世弟 문제가 확정된 지 두 달 뒤에 다시 사헌부 執義(집의) 趙聖復(조성복)의 상소를 계기로 世弟의 代理聽政(대리청정)을 강력히 추진하고 나섰다. 원래 세자나 世弟의 대리청정은 군왕이 노쇠하거나 큰병이 났을 때와 같이 부득이한 상황에서 시행하는 게 관례이다. 老論의 대리청정 주장은 사실상 景宗에게 정치일선에서 물러나라고 주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景宗실록」 원년 10월10일조의 다음 기록은 당시 景宗의 고심을 엿보게 해준다.
『내게 이상한 병이 있는데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지금 世弟는 젊고 매우 영명하니 만일 그로 하여금 국사를 청정케 하면 가히 의지할 수 있을 것이다. 대소 국사를 막론하고 모두 世弟가 재단토록 하라』
景宗은 陰?(음위)로 인해 후사를 둘 수 없는 상황에서 다른 종친을 선택하는 것보다는 이복동생인 연잉군을 世弟로 책봉하는 게 낫다고 본 셈이다.
이 소식을 들은 우의정 조태구는 즉시 果川(과천)에서 출발하여 도성 문 밖에 와서 상소를 올렸다. 좌참찬 崔錫恒(최석항)도 눈물을 흘리며 대리청정의 환수를 극간하고 나섰다. 世弟인 연잉군도 다섯 번에 걸쳐 대리청정을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다.
조태구가 승정원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景宗의 허락을 받고 입궐하자 이에 놀란 老論의 대신들도 잇달아 입궐했다. 조태구가 대리청정의 환수를 극간하자 궁지에 몰린 老論 대신들도 말을 바꿔 이에 동조했다. 결국 불과 10여 일 사이에 대리청정의 명이 수차례나 번복되는 일이 빚어졌다.
이때 少論의 급진파인 金一鏡(김일경) 등 7인이 연명으로 상소를 올려 대리청정을 제기한 조성복과 이를 뒷받침한 영의정 金昌集(김창집)과 좌의정 李健命(이건명), 영중추부사 李命(이이명), 판중추부사 趙泰采(조태채) 등 老論 4대신을 역모 혐의로 엄단할 것을 주청했다.
이들은 景宗에 대한 불경과 불충을 최대한 부각시켜 세력의 반전을 꾀한 것이다. 景宗이 이를 받아들여 조성복과 老論 4대신을 圍籬安置(위리안치)하는 등 50~60명의 老論을 처벌했다. 이를 「辛丑獄事(신축옥사)」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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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辛丑獄事로 축출된 老論 4대신. 왼쪽부터 김창집, 이건명, 이이명, 조태채. |
少論의 반격과 목호룡의 고변
景宗은 老論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모두 少論으로 채웠다. 조태구를 영의정, 최석항을 우의정, 김일경을 이조참판 등에 제수하고, 김일경과 연명으로 상소한 朴弼蒙(박필몽) 등을 모두 三司(삼사)에 임명했다. 少論이 조정의 요직을 모두 장악케 되었다. 「辛丑換局(신축환국)」이라고 한다.
당시 少論은 여세를 몰아 차제에 老論을 일망타진코자 했다. 그 결과가 바로 景宗 2년(1722) 3월27일에 터져나온 「睦虎龍(목호룡) 고변 사건」이다.
이는 과거 西人이 肅宗 6년(1680)의 庚申換局(경신환국)을 계기로 南人을 몰아낸 후 이것도 모자라 이들을 역모사건으로 옭아 넣은 「壬戌告變(임술고변) 사건」을 그대로 복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목호룡은 원래 서얼 출신의 堪輿家(감여가)였다. 그는 龍門山(용문산)에서 묘 자리를 구하던 중 우연히 알게 된 이이명의 조카 李喜之(이희지)를 통해 老論의 명문 자제들과 교유하면서 알게 된 사실을 김일경의 사주를 받고 모반으로 몰아갔다. 목호룡의 고변은 비록 부풀려지기는 했으나 전혀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 목호룡은 「김창집의 손자 金省行(김성행)과 이이명의 아들 李器之(이기지) 등 老論의 명문 자제들이 환관 및 궁녀들과 결탁해 소위 三急手(삼급수)의 방법으로 景宗을 죽이려 했다」고 고변했다. 삼급수의 첫째가 大急手(대급수)로, 이는 자객을 궁중에 침투시켜 景宗을 살해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가 小急手(소급수)로 궁녀와 내통해 음식에 독약을 넣어 景宗을 독살하는 것이다. 셋째가 平地手(평지수)로 肅宗의 전교를 위조해 景宗을 폐출시키는 것이다.
景宗 독살說
목호룡의 고변은 애매한 점이 많았으나 景宗의 통치력이 미약한 상태에서 옥사는 모두 少論의 의도대로 처리되었다. 연루자들 모두 심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이를 승복하지 않고 죽어 갔다. 老論 4대신 모두 죽임을 당한 것은 물론 170여 명에 달하는 老論系 인사들이 가혹한 형벌을 받았다. 이를 「壬寅獄事(임인옥사)」라고 한다. 임인옥사는 肅宗 때 老論이 정권을 잡은 이후 처음으로 당한 일대 참변이었다.
당시 여덟 달 동안 계속된 옥사에서 世弟인 연잉군의 이름이 수없이 거론되었다. 景宗이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연잉군을 얼마든지 世弟의 자리에서 내쫓을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연잉군은 景宗의 특별 배려로 무사할 수 있었다.
당시 연잉군은 마음을 졸이며 사태의 추이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사건이 마무리된 뒤에도 그는 신중한 행보로 少論의 예봉을 피해야만 했다. 그는 마침내 景宗 4년(1724) 8월에 景宗의 급서로 보위에 오르게 되었다.
英祖는 즉위 초부터 항간에 유포된 소위 「景宗 독살說」의 당사자로 지목되어 적잖은 심적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당초 景宗은 죽기 직전 갑자기 병세가 심해져 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어의들이 백방으로 약재를 써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景宗은 때로 가슴과 배가 조이듯이 아파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이때 御廚(어주)에서 景宗의 입맛을 돋우기 위해 수라상에 게장과 생감을 올렸다. 景宗은 모처럼 게장으로 수라를 많이 먹었으나 다음날부터 복통과 설사에 시달리다가 의식마저 잃더니 급기야 5일 만에 급서하고 말았다. 요즘의 의학상식으로 볼 때 이는 대략 만성적인 腎臟(신장) 계통의 질환이 급격히 악화된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항간에는 世弟가 게장과 생감을 들여보냈다는 독살說이 나돌았다. 景宗 독살說은 여러 정황에 비춰 英祖의 즉위로 老論이 再집권하게 되자 이에 대한 불만이 유언비어 형태로 나타난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英祖는 즉위 직후부터 景宗 독살說로 인해 적잖은 심적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그가 재위 31년(1755)에 자신의 世弟책봉과 즉위 정당성을 천명한 闡義昭鑑(천의소감)의 纂修(찬수)를 맡은 여러 신하들에게 入侍(입시)를 명한 뒤 下諭(하유) 형식으로 이를 간접 해명하고 나선 것이 그 증거이다. 「英祖실록」 31년 10월9일조에 闡義(천의)에 관한 英祖의 기본입장이 실려 있다.
『그때 皇兄(황형: 죽은 형의 존칭)에게 게장을 進御(진어)한 것은 東朝(동조·동궁)가 아니라 御廚였다. 황형의 禮陟(예척·승하)이 그 후 5일 만에 있자 「무식한 寺人(시인·나인)이 지나치게 진어했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었다. 지금 분명히 말하지 않으면 이것이 어찌 사람의 자식된 도리이고 아우된 도리라고 할 수 있겠는가』
老論의 정치보복을 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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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老論 峻論을 이끌었던 정호. |
여기에는 英祖 나름대로 복잡한 셈법이 있었다. 우선 英祖는 막강한 老論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少論을 지렛대로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항간에 나도는 景宗 독살說을 봉쇄하기 위해서라도 景宗의 급서로 동요하는 少論을 안심시킬 필요가 있었다.
나아가 그는 자신이 老論의 등에 업혀 보위에 올랐다는 얘기가 나도는 것을 원치 않았다. 3정승을 少論 일색으로 구성한 것은 한시적인 조치였다. 英祖의 초기 행보를 보면 그는 이미 어렸을 때 父王인 肅宗의 「換局(환국)정치」를 목도하면서 王權(왕권)강화의 묘리를 체득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탕평」의 논리는 바로 이런 상황에서 나온 것이다. 당시 英祖는 자신의 뜻을 소신껏 펴기 위해서는 명분을 쌓을 시간이 절대 필요하다는 사실을 숙지하고 있었다.
英祖는 즉위 직후 먼저 신임옥사로 유배된 前 판서 閔鎭遠(민진원)을 석방조치했다. 이에 고무된 老論은 신임옥사의 飜案(번안: 재판 번복)에 들어갔다. 이들은 차제에 조태구와 유봉휘 등을 김일경의 黨與(당여)로 지목해 少論을 일망타진코자 했다.
老論의 공세가 거세지자 英祖는 이내 신임옥사의 장본인인 김일경과 목호룡을 처단하는 조치를 내렸다. 이어 즉위 원년(1725) 정월에 少論을 공격하는 승지 尹鳳朝(윤봉조)의 상소가 올라오자 이를 빌미로 정국개편을 단행했다. 이에 趙遠命(조원명)을 비롯한 少論 중진들이 대거 몰려 나가고 老論의 영수 민진원과 鄭澔(정호), 李觀命(이관명) 등이 입각했다.
英祖는 자신의 世弟책봉과 대리청정을 주청하다 목숨을 잃은 老論의 4대신의 죽음을 구제하기 위한 방안으로 신임옥사를 誣獄(무옥)으로 규정해 가면서 老論 4대신을 신원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과천 땅에 이들 老論 4대신을 기리는 四忠書院(사충서원)이 세워진 연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를 통상 「乙巳處分(을사처분)」이라고 한다.
눈물로 「朋黨 해체」를 호소
英祖는 「탕평」을 내세워 더 이상의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는 을사처분에 따른 少論의 반발을 무마하려는 속셈이었다. 그러자 老論은 얼음과 숯은 한 그릇에 담을 수 없다는 「氷炭不相容(빙탄불상용)」의 논리를 내세워 老論과 少論 중 하나를 택할 것을 주문하며 英祖를 압박하고 나섰다. 그러나 英祖의 입장은 단호했다. 「英祖실록」 元年 3월2일조에 나오는 英祖의 언급이 그 증거이다.
『권세를 탐하는 마음에서 상대방을 일망타진하면 長久(장구)한 계책이 될 것으로 여겨 많은 죄목들을 지어내어 큰 옥사를 일으키니 杖刑(장형)을 맞아 죽은 사람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천지 사이에 지극한 원한이 서리고 맺힌 것이 이와 같다. 지금 만약 이것으로 인하여 또 誅戮(주륙)을 가하면 이는 伸雪(신설: 원통함을 풂)이 아니라 보복이다』
英祖는 왕권이 붕당정치의 보복戰에 악용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신임옥사로 깊은 상처를 입은 老論은 少論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과격하기 그지없는 「討逆論(토역론)」을 전개했다. 老論의 거센 압력에 밀린 英祖는 유봉휘를 유배 보내고 이광좌와 조태억의 관직을 삭탈하는 조치로 사태를 무마할 생각으로 신하들 앞에서 오열하며 「탕평」을 내세워 「破朋黨(파붕당)」을 호소했다.
老論 측의 원한은 그 심도가 매우 깊었다. 강경론인 老論 峻論(준론)의 영수인 민진원이 거취를 걸고 少論에 대한 단죄를 요구하자 英祖는 민진원을 좌의정에서 해임시킨 뒤 온건론인 老論 緩論(완론)의 영수 洪致中(홍치중)을 발탁했다. 홍치중은 少論과도 가까워 英祖의 「탕평」 취지에 부합할 만했다.
실제로 홍치중은 정치력을 발휘해 老論 준론의 단죄요구를 적절히 무마하면서 宋眞明(송진명)과 尹淳(윤순) 등 少論의 등용을 청하는 등 「탕평」의 본래의 취지인 「老少竝用(노소병용)」을 구현하는 데 진력했다.
英祖가 홍치중을 극히 총애하면서 그가 주문하는 것을 모두 들어 주자 老論 준론이 다급해졌다. 老論 준론은 「老少병용」 기조가 정착되면 少論을 제거할 기회가 멀어질 것을 우려했다. 이들은 차제에 어떤 일이 있어도 신임옥사의 獄案(옥안)을 뒤집어 명분을 취하고, 자신들의 손으로 정계를 개편함으로써 장기집권의 기반을 다지는 실리를 동시에 얻고자 했다.
마침내 영의정 정호가 홍치중을 겨냥해 「눈치나 살피면서 利祿(이록)을 탐내는 구차한 무리」로 매도하고 병조좌랑 金祖澤(김조택)이 우의정 趙道彬(조도빈)을 공격하고 나서자 홍치중과 조도빈은 사직소를 내고 물러났다. 英祖는 老論 대신들을 문책하면서 정호를 영의정에서 해임한 뒤 홍치중을 좌의정에 再기용했다. 英祖가 老論 완론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에 발벗고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老論 완론은 이미 준론의 위세에 눌려 의욕을 상실한 뒤였다.
이인좌의 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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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인좌의 亂을 진압한 오명항. |
이에 유봉휘와 조태구, 최석항의 관작이 회복되고, 유배된 60명의 少論 인사에 대한 석방이 이뤄졌다. 이를 「丁未換局(정미환국)」이라고 한다. 정미환국은 사실상 을사처분의 폐기를 의미했다. 이로써 老論 4대신은 졸지에 「四忠」이 아닌 「四逆(사역)」이 되고, 임인옥사는 역적에 대한 討罪(토죄)로 규정되었다.
英祖는 자신의 즉위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老論세력과 한동안 타협적인 자세를 취하다가 이내 그들의 요구가 도를 넘어서자 정미환국을 단행한 것이다. 英祖의 老論에 대한 실망과 염증이 바로 정미환국으로 표출된 셈이다.
당시 英祖의 입장에서 볼 때 「탕평」의 최대 걸림돌은 老論세력이었다. 英祖는 막강한 세력을 과시하고 있는 老論을 제압하지 않으면 왕권유지조차 어렵다고 판단했다. 英祖의 입장에서 볼 때 「탕평」은 老論을 제압키 위한 명분일 뿐만 아니라 왕권을 강화하는 유일한 방안이기도 했다.
이때 뜻하지 않은 반란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권력다툼에서 밀려난 南人들의 반감은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들의 불만은 英祖 4년(1728) 3월의 소위 「戊申亂(무신란)」으로 표출되었다. 통상 「李麟佐(이인좌)의 난」으로 알려진 이 반란사건은 英祖와 老論에 대한 南人들의 반감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케 해주는 대사건이 아닐 수 없다.
「景宗 독살설」로 민심선동
당초 을사처분으로 신임옥사가 誣獄으로 판명되자 일부 과격파 少論과 南人이 크게 흥분했다. 이들은 이내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英祖를 제거하고 老論정권을 타도한 뒤 少論과 南人의 연합정권을 구성코자 했다.
이들이 반란을 謀劃(모획)한 것은 기본적으로 英祖의 非정상적인 즉위에 그 원인이 있었다. 당초 肅宗이 장희빈 소생인 景宗을 버리고자 할 때 老論은 공개적으로 英祖를 지지하고 나섰다. 신하가 군주를 선택하는 소위 擇君(택군) 현상이 빚어진 것이다. 명분을 중시하는 성리학의 나라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英祖는 老論의 「택군」에 의해 보위에 오른 것이다.
이런 이유 등으로 반란세력은 애초부터 英祖를 합법적인 군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반란세력은 항간에 유포된 景宗 독살설을 최대한 활용해 「英祖는 肅宗의 아들이 아니고 景宗을 몰래 시해했다」는 유언비어를 만들어 민심을 선동했다. 「정통성이 없는 군주를 몰아내 景宗의 원수를 갚는다」는 논리에 민심이 크게 동요했다. 호서와 호남, 영남 등 3남 지역은 말할 것도 없고 경기와 평안도에 이르기까지 전국 규모의 반란조직이 결성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당시 戊申亂의 주모자는 호서의 이인좌를 비롯해, 호남의 朴弼顯(박필현)과 영남의 鄭希亮(정희량) 3인이었다. 원래 이인좌는 갑술환국 당시 감사를 지낸 李雲徵(이운징)의 손자였다. 그의 조모는 肅宗 연간에 南人정권을 영도한 영의정 權大運(권대운)의 딸이었다. 이인좌 자신은 南人의 대표적 이론가인 尹?(윤휴)의 손자사위이기도 했다.
명실상부한 南人 명가의 자제인 이인좌는 거사를 이루기 위해 즐기던 술을 8년 동안 끊는 단호함을 보였다. 이인좌를 비롯한 반란의 주동자들은 지방 군인과 鄕班(향반)을 비롯해 중인층과 노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을 포섭했다. 이들이 개별접촉을 통해 포섭한 인물 중에는 평안감사인 李思晟(이사성)과 포도대장 南泰徵(남태징) 등도 들어 있었다.
「이인좌의 난」 이후 탕평책 강화
그러나 이들은 英祖 3년의 정미환국으로 인해 일시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정미환국은 반란의 명분을 크게 퇴색시켰다. 마침 박필현이 전라도의 泰仁(태인)현감으로 부임하면서 장차 內應(내응)키로 한 서울의 반란 주도세력이 현저히 약화되었다. 일각에서 관망적인 태도를 보이며 신중한 행보를 주문했으나 이인좌 등은 이내 거사를 일으켰다.
이인좌는 英祖 4년(1728) 3월15일에 충청병사 李鳳祥(이봉상)을 살해한 뒤 청주성을 점령했다. 이인좌는 「독살된 景宗의 원수를 갚고 소현세자의 증손인 密豊君 李坦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한다」는 내용을 담은 격문을 사방에 띄우며 동참을 호소했다. 청주성을 점거한 반군은 軍中(군중)에서 景宗의 위패를 모셔 놓고 각처에서 모여든 가담자를 반군에 편제하면서 영남과 호남지역 반군의 합류를 재촉했다.
영남에서는 정희량이 3월20일에 이인좌에 호응해 安陰(안음)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불과 며칠 만에 거창과 합천을 손쉽게 점령한 영남 반군의 병력은 무려 7만 명에 달했다. 이들은 이인좌의 반군과 합세하기 위해 북진을 서둘렀다. 그러나 호남지역의 거병이 쉽지 않았다. 박필현은 3월19일에 勤王(근왕)을 구실로 군사를 일으켰으나 동조하기로 한 전라감사 鄭思孝(정사효)가 돌연 성문을 잠근 채 호응하지 않자 이내 도주하고 말았다.
당시 반군의 北上 소식을 접한 조정은 도성 수비를 강화하면서 김일경과 목호룡의 가속을 체포한 뒤 少論系의 吳命恒(오명항)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토벌군을 편성했다. 토벌군은 북진을 서두른 이인좌의 반군과 안성 인근에서 조우했다. 이때 오명항은 첩자를 통해 반군의 진격로를 미리 파악한 뒤 신속히 병력을 이동시켜 반군을 대파했다. 이인좌는 패잔병을 이끌고 죽산으로 향했으나 이내 패하여 서울로 압송되었다. 영남의 반군도 이내 토벌돼 정희량 등 주모자 21명이 모두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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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탕평파. 왼쪽부터 조문명·조현명·송인명. |
少論 위주로 정국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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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탕평책에 반대했던 老論의 김재로. |
탕평파는 英祖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일약 정국의 주도세력으로 부상했다. 金興慶(김흥경)과 金在魯(김재로) 등 老論의 대신들이 집단 사직으로 이에 반발했으나 英祖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당시 탕평파가 老論의 온건세력을 대표하는 좌의정 홍치중에게 정국안정의 방안을 자문하자 홍치중은 소위 「分等說(분등설)」을 제시했다.
「분등설」은 신축옥사로 인해 四逆으로 몰린 老論 4대신을 다시 四忠으로 만들어 老論 대신들을 무마하고 이이명의 아들과 김창집의 손자가 연루된 임인옥사는 悖逆(패역)한 자손이라는 논리로 少論의 반발을 무마하는 巧策(교책)이었다. 「분등설」을 따를 경우 老論 4대신 중 이건명과 조태채의 신원만 가능하게 되고 자손이 임인옥사에 연루된 이이명과 김창집의 신원은 불가능하게 된다.
탕평파가 英祖 5년(1729) 5월에 「분등설」을 내세워 老論 대신의 의향을 타진하자 老論 대신들은 탕평파의 소위 「半忠半逆(반충반역)」 논리를 거부하며 이를 제시한 홍치중을 비난했다.
그러나 英祖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내 영의정 이광좌 이하 탕평파의 중진들을 소집해 이를 확정지었다. 이를 「己酉處分(기유처분)」이라고 한다. 기유처분은 老論에게 英祖의 치세는 결코 老論정권의 시작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각인시킨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기유처분은 비록 「탕평」의 이름으로 단행되었으나 을사처분과 마찬가지로 忠逆(충역)시비의 근원을 제거하지 못한 미봉책에 불과했다. 기유처분으로 명분을 얻게 된 少論정권이 언제까지 유지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기유처분 이후 英祖는 少論 위주의 정국을 유지하면서 소위 雙擧互對(쌍거호대)의 인사방식으로 老少병용을 관철시키고자 했다. 이는 만일 영의정이 老論이면 좌의정은 少論, 이조판서가 少論이면 참판참의는 老論 식으로 기용하는 방안을 말한다.
김창집과 이이명의 伸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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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老論 峻論의 영수 유척기. |
김창집과 이이명의 伸寃은 표면상 기유처분의 폐기와 少論 탕평파의 몰락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는 英祖의 입장에서 볼 때 「탕평」을 내세운 왕권이 「忠逆시비」를 내세운 老論의 臣權세력에게 제압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英祖가 소위 半夜下敎(반야하교) 등을 통해 老論의 요구를 일축하고 少論 탕평파의 생명을 연장시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임시처방에 지나지 않았다.
英祖의 입장에서 볼 때 등극과정에서 老論세력에게 커다란 부채를 안고 있는데다가 막강한 세력을 과시하고 있는 老論세력의 요구를 언제까지나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老論 세력에 굴복해 이미 내린 기유처분을 무효로 만들 경우 이는 老論의 등에 업혀 보위에 올랐다는 巷說(항설)을 인정하는 셈이 되어 君威(군위)가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게 된다. 英祖가 구차하기 짝이 없는 「半忠半逆」의 논리에 입각해 老論 4대신 중 두 명의 신원만 허용하는 처분을 내린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英祖 14년(1738)에 들어와 老論 측의 태도변화로 정국에 변화의 조짐이 나타났다. 「忠逆시비」에 대한 분명한 판결을 주장하며 少論과의 공존을 거부하던 老論 준론의 영수 兪拓基(유척기)가 입조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老論세력이 급성장하자 英祖는 이를 배경으로 삼아 종전과 달리 「忠逆시비」 논쟁에 적극 개입하기 시작했다.
英祖는 재위 14년 12월에 徐德修(서덕수)의 조모인 岑城府夫人(잠성부부인)의 사망에 즈음해 기유처분의 명분을 파괴하면서 三急手를 사실로 인정해 임인옥사를 확대시킨 서덕수의 신원을 전격 지시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는 당시 世弟로 있던 英祖가 이 사건에 개입돼 있었다는 항설에 대한 반박의 차원에서 나온 것으로 새로운 세력의 등장을 예고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시의 상황에 비춰볼 때 임인옥사를 逆에서 忠으로 뒤집어 김창집과 이이명을 신원하기 위해서는 少論계열의 탕평파는 거북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 英祖 15년(1739) 9월에 嫡庶(적서)를 거론한 이조판서 趙顯命(조현명)과 우의정 宋寅明(송인명) 등의 탕평파를 생모인 숙빈 崔氏에 대한 불경을 이유로 현직에서 내몬 것은 바로 이런 속셈에서 나온 것이다.
이에 고무된 老論이 김창집과 이이명의 신원을 주청하자 英祖는 이듬해인 재위 16년(1740) 정월에 老論과 少論 대신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문득 김창집과 이이명의 신원을 下命했다. 이로써 10년 가까이 유지된 기유처분의 명분이 일시에 무너지고 말았다.
신임옥사의 번안작업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과정에 英祖는 신임옥사로 禍(화)를 입은 나머지 사람들에 대한 신원에 대해 「중대한 처분」이라는 구실을 내세워 시간을 끌었다. 이는 老論에 대한 불만에서 나온 것이다.
英祖의 고민
英祖는 老論 대신들이 자신의 속마음을 헤아려 자신이 직접 말하는 고민을 풀어줄 것으로 기대했으나, 老論은 자신들의 신원에만 급급한 나머지 英祖의 연루혐의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았다. 老論의 행태에 심기가 극도로 불편해진 英祖는 이내 老論 준론을 일거에 퇴각시키고 조현명과 송인명을 再기용했다. 이는 少論의 입을 통해 자신의 무혐의를 공인받고 싶다는 속셈의 일단을 드러낸 것이다.
당시 英祖는 즉위 이후 내심 두 가지 문제에 골몰했다. 庶子(서자) 출신으로 보위에 오른 자신의 王統(왕통)을 승인받는 문제와 자신의 지론인 탕평을 명실상부한 치세의 통치방략으로 추진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신임옥사에서 비롯된 「忠逆시비」는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데 결정적인 걸림돌로 작용했다. 英祖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王統의 공인은 물론 탕평도 기할 수 없다는 사실을 통찰하고 있었다. 그러나 英祖는 서두르지 않고 모든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될 때까지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며 속셈의 일단을 한 번도 드러내지 않았다. 英祖는 마침내 老論이 머리를 굽히고 정권에 합류하자 이를 계기로 15년 동안 가슴속 깊이 눌러 두었던 문제를 서서히 표면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少論의 조현명과 송인명은 英祖의 속셈을 읽고 곧바로 老論을 대표하는 김재로와 더불어 막후 접촉을 벌이며 절충안을 마련코자 했다. 양측의 줄다리기는 임인옥사의 飜案(번안) 문제를 두고 지리하게 전개되었다.
마침내 이듬해인 英祖 16년 6월에 양측이 타협을 보게 되자 英祖는 이를 받아들여 임인옥사가 무옥임을 천명하면서 禍를 입은 자들의 신원을 하교했다. 이를 「庚申處分(경신처분)」이라고 한다. 이는 기유처분의 폐기와 少論 탕평파의 몰락을 의미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英祖가 「탕평」을 구실로 내세워 취해 온 일련의 조치는 사실 英祖 자신이 줄곧 생각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키 위한 임시조치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을사처분에서 老論의 명분론을 지지했다가 이내 정미환국으로 이를 번복한 데 이어, 기유처분에서 「반충반역」의 논리로 老論을 견제하며 少論계열의 탕평론자를 중용했다가 다시 경신처분을 통해 기유처분을 무효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당시 老論은 임인옥사를 완전히 뒤집지 못한 상황에서 경신처분에도 불구하고 少論에 대한 별다른 조처가 단행되지 않자 적잖은 불만을 품게 되었다. 少論 역시 혹여 임인옥사가 번안될까 촉각을 곤두세웠다. 임인옥사가 번안될 경우 이는 곧 「忠逆시비」의 討逆論으로 이어져 少論은 아예 출사의 명분조차 찾을 수 없게 된다.
英祖는 경신처분 이듬해인 재위 17년(1741) 9월에 형조참판 吳光運이 壬寅獄案(임인옥안)을 모두 불사르고 세상의 모든 의혹을 일거에 해소하기 위해 大訓(대훈)을 반포할 것을 건의하고 나서자 곧바로 재상회의를 소집해 이를 논의케 했다. 임인옥사의 당사자에 해당하는 조현명이 被禍者(피화자)에 대한 전면적인 신원을 건의하자 英祖는 이를 받아들여 大訓을 선포했다. 이를 「辛酉大訓(신유대훈)」이라고 한다.
170여 개 사원 철폐
신유대훈으로 老論과 少論 사이에 전개되었던 「忠逆시비」는 다음과 같이 결론이 났다. 첫째, 신축옥사의 사안인 建儲(건저) 문제는 大妃와 景宗의 下敎에 따른 것이다. 둘째, 임인옥사는 誣獄이므로 鞠案(국안: 심문판결조서)은 모두 소각하고 被禍者는 전원 신원한다. 셋째, 다만 이희지 등의 혐의는 명백히 드러난 만큼 逆으로 단정해 別案(별안)으로 남겨 둔다.
이로써 무려 17년 동안 景宗 독살설을 비롯해 목호룡 고변사건의 연루혐의로 적잖은 심적 고통을 겪어야만 했던 英祖는 일체의 혐의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英祖의 「탕평」에 동조하며 모든 것을 바친 少論系 탕평파의 역할이 끝난 셈이다. 정국의 주도세력이 少論系 탕평에서 老論系 탕평으로 바뀐 것은 바로 신유대훈에 따른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英祖는 「탕평」을 내세워 일련의 왕권강화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銓郞(전랑)의 독점적 권한인 「通淸權(통청권)」을 혁파하고 남설된 書院(서원)을 철폐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당시 붕당정치의 근간이 된 서원은 전역에 걸쳐 모두 700여 개에 달했다. 퇴계와 율곡을 비롯해 송시열 등은 수십 개의 서원에 모셔져 있었다. 英祖는 肅宗 40년에서 당시까지 사사로이 건립된 모든 서원의 철폐를 강력히 지시했다. 주희를 모신 祠宇(사우)는 물론 퇴계와 율곡을 비롯한 西人系 서원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이에 170개에 달하는 서원과 사우가 가차 없이 철폐되었다.
「탕평」을 위한 英祖의 결단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몇 달 뒤 전랑의 통청권을 혁파해 士林(사림)정치의 틀을 흔들기 시작했다. 전랑은 문무관의 인사행정을 담당하던 이조와 병조의 정랑과 좌랑을 말한다.
通淸權 혁파로 200년 붕당정치 골간 무너뜨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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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문수 |
이 와중에 권력에서 밀려난 少論系의 불만은 나날이 커져 갔다. 이는 마침내 英祖 31년(1755) 정월에 나주목의 객사인 望華樓(망화루) 기둥에 거병을 촉구하는 掛書(괘서)가 나붙은 사건으로 표출되었다. 내용은 老論의 탕평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백성이 곤궁한데 가렴주구는 더욱 심하다. 이를 구제키 위해 군사를 움직이려 하니 백성은 놀라 동요하지 말라」
전라감사 趙雲逵(조운규)의 보고를 접한 조정은 곧 주동자를 색출하도록 하령했다. 이에 나주로 유배 가 있던 少論系의 전 지평 尹志(윤지)가 주모자인 사실이 드러났다. 윤지는 김일경의 당인으로 지목되어 처벌받은 尹就商(윤취상)의 아들로 그 역시 목호룡의 심복으로 고변음모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유배를 간 인물이다. 윤지는 조정의 흐름이 점차 자신의 정계 복귀와는 거리가 멀어지자 위기의식을 느낀 나머지 아들 尹光哲(윤광철)을 내세워 비밀리에 결성한 筆墨?(필묵계)를 통해 동조자를 규합해 역모를 일으키고자 한 것이다.
英祖의 친국 결과 윤지가 소유한 문건 중 少論 인사와 주고받은 서찰이 대량 발견되었다. 이들 대부분이 김일경의 옥사사건이나 무신란 등에 연루되어 처벌받은 少論系 인사 내지 그들의 친족이었다. 英祖는 이 사건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이 사건으로 왕실과 가까운 朴文秀(박문수) 등 몇 명을 제외하고 朴師緝(박사집), 朴纘新(박찬신) 등 少論의 명문 출신과 柳壽垣(유수원)과 申致雲(신치운) 등 우수한 학자들이 대거 사형에 처해졌다. 少論의 명문가는 모두 재기불능의 상태로 몰락하고 말았다.
4색 붕당 중 광해군 때의 北人과 肅宗 때의 南人에 이어 少論마저 몰락함으로써 오직 老論세력만이 남게 되었다. 괘서사건은 결과적으로 「忠逆시비」가 완전 해소되고 老論의 정권 독점을 촉발시킨 사건이 된 셈이다.
그러나 老論 獨覇(독패)의 시대가 열리자 老論 내에서 곧바로 정국의 주도권 장악을 위한 자체분열이 시작되었다. 老論은 크게 英祖와 인척관계를 맺고 있는 민진원과 申晩(신만), 洪鳳漢(홍봉한) 등의 戚臣系(척신계)와 이들의 집권을 반대하는 非척신계로 양분되었다. 척신계 중 핵심인물은 세자의 장인인 홍봉한이었다.
외척세력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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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봉한 |
이 와중에 金尙魯(김상로)를 중심으로 한 非척신계는 홍봉한 세력을 견제키 위해 온갖 비행으로 세인들의 지탄 대상이 된 세자의 비행을 거론하고 나섰다. 홍봉한은 사안을 축소키 위해 뇌물을 살포하는 등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이에 조정은 홍봉한의 행태를 비난하는 소위 「攻洪派(공홍파)」와 이를 비호하는 「扶洪派(부홍파)」로 나뉘게 되었다. 김한구가 공홍파에 가담하면서 척신계도 공홍파와 부홍파로 분열되었다.
당시 英祖는 貞聖王后(정성왕후) 서씨는 물론, 계비로 맞아들인 김한구의 딸 貞純王后(정순왕후)로부터 後嗣(후사)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靖嬪(정빈) 이씨와 暎嬪(영빈) 이씨 사이에서 각각 孝章世子(효장세자)와 思悼世子(사도세자)를 얻었다. 사도세자는 英祖가 나이 40세가 넘은 英祖 11년(1735)에 출생했으나 효장세자가 英祖 4년(1728)에 이미 열 살의 나이로 요절한 까닭에 태어난 지 불과 두 해 만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사도세자는 조급하고 민첩한 성격의 英祖와 달리 말수가 적고 행동이 느렸다. 이에 대한 英祖의 불만이 표면화하자 사도세자는 부왕을 늘 두려워했다.
英祖의 질책이 심할수록 사도세자의 반발은 일탈된 행동으로 더욱 거칠게 표출되었다. 사도세자는 주색에 빠져 짐승은 물론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당시 세자의 비행은 도성 안의 일대 화제였다. 그럼에도 오직 英祖만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홍봉한을 중심으로 한 부홍파가 세자의 비행을 감싸고 도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세자의 비행이 극에 달하자 조정의 중론은 세자를 비난하는 쪽으로 굳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英祖 38년(1762) 5월에 시정의 건달인 羅景彦(나경언)이 英祖 주위의 내시들이 세자를 보위에 앉힐 속셈으로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고변서를 형조에 제출한 사건이 빚어졌다. 형조에서 고심하다 좌의정 홍봉한에게 이를 알리자 홍봉한은 곧바로 英祖에게 알리도록 조치했다.
이는 홍봉한이 이미 세자를 포기하는 대신 훗날 正祖(정조)가 된 세손의 보호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음을 의미한다.
英祖가 친국에 임하자 나경언은 옷 속에서 한 통의 글을 꺼내 바쳤다. 이 글에는 세자가 총애하던 王孫(왕손)의 어미를 죽인 일을 비롯해 시전 상인으로부터 유흥비를 빌린 사실 등 10여 조목에 걸쳐 세자의 비행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사도세자의 죽음
이를 전해 들은 세자가 도포 차림으로 뜰에 엎드려 待罪(대죄)하자 英祖는 한참 후에 창문을 밀치고 세자를 크게 질책했다. 「英祖실록」 38년 5월22일조에는 英祖가 세자의 비행을 적나라하게 지적한 대목이 나온다.
『네가 왕손의 어미를 때려죽이고, 여승을 궁 안으로 들이고, 北城(북성)으로 나가 유람했으니 이것이 어찌 세자로서 행할 일이냐. 관원들이 모두 나를 속였다. 나경언이 없었더라면 내가 어찌 이를 알았겠는가. 왕손의 어미는 네가 처음에 매우 사랑하고도 어찌하여 마침내는 죽였느냐. 그 사람이 아주 강직하였으니 반드시 네 행실과 일을 간하다가 이로 인해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세자가 울면서 변명키를, 『이는 과연 臣이 본래 갖고 있었던 火症(화증)입니다』라고 하자 英祖가 더욱 노해 일갈키를, 『차라리 發狂(발광)하는 게 낫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사도세자의 비행은 결코 용납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당시 세자를 사칭해 백주에 부녀자를 강간하는 자들이 날뛴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英祖는 대신들의 청에 따라 나경언을 참형에 처하고 세자의 비행에 가담한 자들을 모두 잡아들여 처형토록 명했다. 이어 英祖는 사도세자의 자결을 명하고 나섰다. 「英祖실록」 38년 윤 5월13일조는 당시의 상황을 이같이 기록해 놓았다.
『주상이 좌우에 명하여 창덕궁 徽寧殿(휘녕전)의 문을 4~5겹으로 굳게 막고 궁의 담 쪽을 향하여 칼을 뽑아 들게 하였다. 이어 세자에게 명하여 땅에 엎드려 관을 벗게 하고, 맨발로 머리를 땅에 조아리게 한 뒤 자결을 명했다. 홍봉한과 도승지 등이 들어왔으나 미처 말하지 못하였다. 주상이 이들의 파직을 명하자 모두 물러갔다. 世孫이 들어와 세자의 뒤에 엎드리자 주상이 안아다가 시강원으로 보내면서 다시는 들어오지 못하도록 엄명했다.
주상이 칼을 뽑아 들고 연이어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동궁의 자결을 재촉하자 동궁의 여러 신하들이 말렸다. 주상이 세자를 폐하여 庶人(서인)을 삼는다는 명을 내렸다. 세자가 울며 개과천선을 다짐했으나 전교는 더욱 엄해지고 暎嬪이 고한 바를 대략 진술했다. 영빈은 세자의 생모로 주상에게 밀고한 자이다』
이 기록을 통해 당시 세자의 생모인 영빈조차 세자를 이미 포기했음을 알 수 있다. 英祖는 세자가 옷소매를 찢어 목을 묶는 시늉만 하자 이내 손수 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고 뒤주의 뚜껑을 닫은 뒤 자물쇠를 채웠다. 英祖는 그것도 모자라 널빤지를 가져와 못을 박고 동아줄로 뒤주를 묶어 버렸다. 사도세자는 뒤주 속에 갇힌 지 8일 만에 餓死(아사)했다.
조정, 벽파와 시파로 再정립
英祖는 사도세자가 죽자 세자의 位號(위호)를 회복시킨 뒤 자신이 직접 思悼(사도)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어 세자의 장례식 날에는 직접 묘에 나가 곡을 하기까지 했다.
英祖는 자신의 처분을 『義로써 恩을 제어하고, 나라를 위해 義로써 결단을 내린 것이다』라고 규정했다. 사도세자의 죽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홍봉한은 사도세자가 아사한 지 7일 뒤에 열린 경연 자리에서 英祖의 결단을 칭송하고 나섰다. 이를 두고 사관은 이같이 비평해 놓았다.
『이 일은 주상이 종사를 위해 부득이하게 한 일이었으나 홍봉한은 사부의 몸으로 인척의 처지에 있으면서 이미 정성을 다하여 輔導(보도)하지 못했다. 마땅히 사과하고 오직 빨리 죽기를 원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하는데도 筵席(연석)에서 면대하는 즈음에 감히 「외간 사람이 결판 짓지 못할까 염려했습니다」라고 했으니 그 무엄함이 심하다』
이후 조정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당연시하는 소위 벽파와 이를 동정하는 時派(시파)로 재정립되었다. 당시 주도권은 홍봉한의 동생인 홍인한이 이끄는 벽파가 장악했다. 이 와중에 英祖는 재위 52년(1776) 3월 세손을 당부하는 유명을 남기고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勢道정치의 빌미 제공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英祖의 치세는 시종 「탕평」으로 일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少論을 지렛대로 삼아 잇단 환국과 처분 등으로 막강한 세력을 형성한 老論세력을 견제하면서 마침내 200년 가까이 유지되어 온 붕당정치의 기본 틀을 무너뜨리고 王權을 강화하는 데 성공했다.
英祖가 肅宗 때의 잇단 환국으로 인해 피로 얼룩진 붕당 간의 무한 경쟁을 辛酉大訓을 통해 종식시킨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英祖의 가장 큰 업적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 계기로 소위 4色으로 구성돼 치열한 유혈전을 전개한 조선조의 붕당구도는 사실상 종언을 고했다.
이 밖에 臣權세력에 눌려 있던 王權을 본래의 모습에 가깝게 회복시켜 놓은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원래 宣祖 이후 역대 君王의 王權은 士林세력이 朱熹가 주장한 「붕당론」을 근거로 각기 붕당을 구성해 치열한 이론투쟁을 벌이는 와중에 추락을 거듭했다.
그러나 英祖는 「탕평」을 기치로 내걸고 상황에 따라 환국과 처분을 적절히 구사하는 임기응변으로 마침내 臣權세력을 제압하고 王權의 본 모습을 회복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는 君弱臣强(군약신강)으로 특징지어진 조선조 통치의 기본 틀을 수정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英祖의 통치는 근원적인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戚臣系(척신계) 인사를 대거 중용해 장차 이들이 발호하는 빌미를 제공한 점이다. 외척세력의 약진이 純祖(순조) 이후에 나타나는 소위 勢道政治(세도정치)의 남상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英祖의 「탕평」이 결코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