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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健實이 만난 스포츠 인물 - 그라운드의 승부사 朴鍾煥(「대구FC」감독)의 작심 토로

『월급을 안 주면 全權이라도 주든지…국내 지도자들은 땜질용이었다』

이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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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아끼고 성적이 나쁘면 쉽게 자르려고 해… 여섯 번 국가대표팀 이끌면서 월급 한 푼 못 받았다』

朴鍾煥
1938년 황해 옹진 출생. 춘천高·경희大 체육학과 졸업. 中1 때 축구 시작. 1962년 국가대표. 단국工高·성남高·유신高 축구부 감독, 국가대표팀 감독, 北京아시안게임 감독 역임. 現 코리안컵 감독, 대한축구협회 이사, 여자축구연맹 초대 회장, 대구FC 감독.
元祖「붉은 악마」,「세계 4强」
  이번 독일월드컵 사령탑을 네덜란드에서 온 딕 아드보카트 감독이 맡았다. 2002년 히딩크에 이어 2회 연속 傭兵(용병)감독이다. 이 대목에서 국내 축구 팬들은 자존심이 상한다. 「한국에는 그만한 지도자가 없느냐」는 거다.
 
  그럴 때마다 떠오르는 이름이 朴鍾煥(박종환·68) 감독이다.
 
  그는 「축구 세계 4强」의 원조다.
 
  1983년 멕시코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 「붉은 악마」들을 진두지휘해 4강 도장을 찍었다. 한국 축구를 상징하는 「붉은 악마」는 朴鍾煥이 이끌었던 청소년 대표팀에 외국 언론이 붙여 준 별명이다. 그럼에도 그는 월드컵이나 올림픽에 한 번도 인연을 맺지 못했다.
 
  한국에서 열렸던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2002 월드컵과 부산아시안게임을 모두 관중석에서 지켜봐야 했다. 특유의 스파르타式 훈련과 카리스마가 너무 강했던 탓일까.
 
  그를 만나러 대구로 갔다.
 
  지난 4월1일 낮 12시. 대구 월드컵경기장內 대구FC 사무국. 동대구역에서 택시를 타고 운동장으로 갈 때만 해도 필자는 그가 많이 늙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올해 예순여덟이니까.
 
  사무실에서 만난 朴감독은 「靑春(청춘)」이었다. 악수하는 손아귀에 단단한 힘이 느껴졌다. 몸도 다부지고 얼굴에는 주름도 없다.
 
  『아니, 세상을 거꾸로 사십니까?』
 
  『젊은 선수들하고 부대끼며 살다 보니 늙을 새가 없네요』
 
  1983년 朴감독이 멕시코 4강을 달성하고 귀국했을 때 당시 조선일보 체육부기자였던 필자는 「이 사람 朴鍾煥」이란 제하에 그의 축구 인생을 일곱 차례 시리즈로 연재했었다.
 
  대구FC 축구단의 남해복 사무국장도 자리를 같이했다.
 
  『오시느라 수고했는데 배부터 채웁시다. 여긴 동네와는 먼 곳이라 중국집 외에는 배달이 안 돼요. 뭘 드실래요?』
 
  선수들이 다음날 시합에 대비해 훈련 중이어서 朴감독은 운동장을 뜨지 못했다. 자장면을 먹어 가면서 인터뷰를 했다.
 
 
 
 늙은 「기러기」
 
  ―국내 최고령 감독이시지요? 선수들이 아들 뻘입니까? 손자 뻘입니까.
 
  『허, 참, 운동장에선 감독과 선수 사이일 뿐입니다』
 
  ― 공을 차면 숨이 가쁘지 않습니까.
 
  『아직은 할 만합니다. 선수들하고 팔씨름을 해도 지지 않습니다』
 
  ― 사모님이 보약을 많이 해주시는 모양이죠.
 
  『아니, 난 혼자 사는데요. 식구들은 모두 얼바인에 살아요. 미국 LA에서 고속도로로 50분 정도 떨어진 곳인데 아들(재호·39)은 신경외과 병원을 운영하고 있고, 딸(성숙·41)은 무역을 합니다. 마누라(안흥석·68)는 손자들 봐준다고 6년 전에 그리 갔는데 도대체 돌아올 생각을 안 해요. 그 바람에 난 완전히 「늙은 기러기」가 돼버렸지요』
 
  ― 자녀들은 언제 미국에 갔습니까.
 
  『아들은 경복高 2학년 때 가서 의학을 전공하더니 신경외과 박사가 됐고, 딸은 경기女高를 마치고 바로 갔습니다. 22년 전인가…』
 
  ― 나이 들어 혼자 사시는 게 쉽지 않을 텐데.
 
  『잘 먹고 잘 자면 됩니다. 오전 6시에 일어나 간단한 체조를 하고 오전 8시에 아침밥을 먹어요. 항상 小食(소식)을 합니다. 낮 12시에 점심을 먹고 오후 훈련에 들어갑니다. 오후 6시에 저녁을 먹고 뉴스를 본 뒤 9시30분이면 자리에 듭니다』
 
  ― 술은 안 합니까.
 
  『친구가 오면 하지요. 그러나 꼭 1차로 끝냅니다. 2차는 말이 많아져 실수할 수도 있으니까』
 
  이쯤에서 情談(정담)은 끝내고 본격적인 질문에 들어갔다.
 
  ― 독일월드컵에서 한국이 어느 정도 성적을 낼 것 같습니까.
 
  『16강은 분명히 올라가고 8강 가능성도 충분합니다』
 
  ― 무슨 근거로 장담합니까.
 
  『선수들이 2002년 월드컵 때보다 훨씬 좋아졌으니까요. 개인 기량은 물론이고 국제경기 경험도 그때보다 풍부해졌습니다. 당시 어린 선수들이 4년간 더 노련해진 거지요. 나이든 선수들은 영 파워들로 물갈이됐고. 특히 공격진이 남아도는 게 맘에 듭니다』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잘 먹는다』
 
   ―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면.
 
  『공격진의 이천수·이동국·박주영·박지성은 이제 믿어도 돼요. 2002년의 안정환이나 설기현보다 낫습니다. 미드필드 김남일은 한층 노련해졌고, 김두현도 몸값은 합니다. 여기에 고참 스토퍼 최진철과 신예 이호가 뒤를 받칠 테고, 이영표·송종국이 좌우에서 攻守(공수)를 조율하면 최고의 팀워크이지요.
 
  골문은 이운재와 김병지가 맡으면 됩니다. 한국에서 이들보다 더 잘하는 골키퍼가 있습니까. 송종국과 김병지가 현재 대표팀에서 빠져 있으나 곧 들어갈 거로 봅니다』
 
  ― 승부는 상대적인데 우리만 좋아졌다고 됩니까.
 
  『요즘 세계 축구는 평준화 추세입니다. 브라질·독일·이탈리아 등 몇몇 나라가 앞서 있긴 하지만 해외 傭兵(용병)들을 빼고 나면 별 차이가 없습니다. 여기에다 한국 선수들은 「한 번 한다면 끝장을 보는」 승부 근성이 있습니다. 유럽이나 南美 선수들은 그렇지 않아요. 그들은 프로무대서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최대한 몸을 사립니다. 아주 개인적이지요. 월드컵은 국가대항戰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답이 나오지요』
 
  그는 한국 축구가 2002년에 80점이었다면 4년이 지난 지금은 90점이라고 점수를 매겼다.
 
  『선수들의 평균 신장도 4∼5cm 커졌습니다. 또 하나, 한국은 세계 4강에 올라 봤다는 사실입니다.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잘 먹는다고 월드컵도 4강을 해본 나라가 하는 법입니다. 문제는 심판들의 장난인데 정몽준 축구협회장이 FIFA 부회장이니 알아서 처리하겠지요』
 
  ― 프랑스·스위스와 함께 G조에 속한 한국은 토고를 祭物(제물)로 삼아야 한다고 하던데요.
 
  『잡으면 물론 좋지요. 그런데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한국 축구는 큰 대회 때마다 제물에게 이긴 적이 없다는 징크스입니다. 월드컵만 보더라도 1986년 멕시코대회에선 불가리아를 잡으려다 1대 1로 비겼고, 1994년 미국월드컵에선 볼리비아에게 0대 0,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선 멕시코에게 거꾸로 1대 3으로 잡혔어요』
 
  朴감독은 토고를 제물보다는 복병으로 간주했다. 선수들이 유럽 프로무대에서 뛰는 실력파라 개인기는 한국보다 한 수 위라는 것이다. 따라서 對人(대인)방어에 주력하면서 초반부터 바짝 조여야지 자칫 풀어 줬다간 큰코다친다고 경고했다.
 
  『프랑스는 다소 버거울 것이나 스위스는 충분히 해볼 만합니다. FIFA 랭킹에서도 우리가 몇 발 앞서니까요』
 
  3월 말 현재 FIFA 랭킹은 프랑스가 8위, 한국이 31위, 스위스 35위, 토고 58위이다.
 
 
 
 『공격축구에 필요한 건 체력』
 
   ― 목표달성을 위한 처방전을 내리신다면.
 
  『축구는 골을 넣지 못하면 못 이깁니다. 제가 아까 공격수가 많아져서 좋다는 말도 이 때문입니다. 공격축구에 필요한 건 체력입니다. 90분간을 쉴 새 없이 뛸 수 있는 힘이 절대적입니다. 수비축구는 아무리 잘해도 비김 이상은 없습니다』
 
  ― 아드보카트 감독은 어떻게 봅니까.
 
  『그 친구, 잘하고 있습디다. 히딩크에게 전혀 밀리지 않아요. 오히려 더 강단이 있고 더 엄격합디다. 선수들에게 보여 주는 리더십도 강하고. 뭔가 기대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朴감독의 대답이 너무 부드럽다. 필자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2회 연속 월드컵 사령탑을 외국인에게 내주면서 토종감독으로서의 자존심도 없나 싶었다.
 
  ― 국내에는 그만한 지도자가 없습니까.
 
  『지금까지의 성적표가 시원찮으니 有口無言(유구무언)이지요. 1994년 미국월드컵에서 김호 감독이 거둔 2무1패가 최고성적입니다. 국내 감독이 제 능력을 100% 발휘하지 못하는 데는 협회의 「조급증」도 문제입니다. 성적이 조금만 시원찮으면 댕강 잘라 버려요』
 
  그는 잠깐 뜸을 들인 뒤 말을 이었다.
 
  『차범근 감독이 프랑스월드컵에서 멕시코에 1대 3, 네덜란드에 0대 5로 패한 뒤 그 자리에서 쫓겨난 것 보셨지요. 나도 그렇게 당했습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과 1998년 프랑스월드컵 모두 직전에 물러났습니다. 외국 감독은 최소 6개월에서 1년간은 기다려 주면서』
 
  그는 히딩크 감독의 예를 든다.
 
  『히딩크도 취임 직후 몇 차례 경기에서 거푸 참패해 「5대 0 아저씨」란 별명까지 얻었잖습니까. 그래도 느긋하게 기다려 주니 1년 반 뒤 「세계 4강」을 만들어 내잖아요. 축구협회가 한국 감독들에게도 그런 아량을 베풀었으면 싶네요』
 
 
 
 한국전쟁 때 越南, 10남매 中 6명 病死
 
  대화가 너무 월드컵에 치우친 듯했다. 분위기도 식힐 겸 이쯤에서 朴鍾煥 감독의 축구 인생을 되짚어 보기로 했다. 필자가 준비해 간 관련자료들을 차근차근 그와 확인해 보았다.
 
  1938년 2월9일 황해도 옹진에서 태어난 그는 1945년 광복과 동시에 가족들과 함께 강원도 춘천으로 내려왔다. 집은 가난했다. 10남매 가운데 6명이 病死(병사)했다. 그는 미군부대 주변에서 구두를 닦았다. GI들은 그를 「쇼리 朴」이라 불렀다. 춘천高 2학년까지 농구를 하다가 축구부로 옮겼다. 춘천高 졸업 때 오라는 곳이 없었다.
 
  『스피드나 발 재간은 인정해 주면서도 전국대회 성적이 시원찮다며 외면합디다』
 
  축구 3修 만에 경희大에 스카우트된다. 경희大 1년 때 청소년대표(20세 이하)로 뽑혀 제2회 말레이시아 청소년대회에 나간다. 포지션은 오른쪽 풀백(RB). 4전 전승으로 우승했다.
 
  이듬해 5월, 방콕에서 열린 제3회 아시아청소년대회에는 나이가 넘어 여권의 생년월일을 2월9일에서 12월9일로 바꿔 출전했다. 1년 뒤 국가대표로 뽑혀 메르데카대회와 방글라데시 골든벨에 나갔다.
 
  1963년 가을, 도쿄올림픽(1964년) 최종선발전에서 태클에 걸려 오른쪽 무릎이 빠지는 바람에 대표팀에서 밀려난 그는, 이후 대한석공 창단멤버로 들어간다. 金昌基(김창기)·許允禎(허윤정) 등이 동료다. 그러나 키(171m)가 작은 게 문제였다. 그는 유니폼을 벗었다.
 
  1965년 3월1일 교사로 발령받아 단국工高 체육교사로 간다. 그곳에서 학교 축구부를 맡아 5년8개월 동안 지도했다.
 
  『그때 제자가 지금 60대가 됐습니다. 요전에 인사를 왔는데 말을 놓기도 뭣하고…』
 
  그의 지도력이 소문나면서 스카우트 손길이 왔다. 성남高에서 2년, 유신高에서 2년을 보낸 뒤 전남기공으로 갔다.
 
  『이러다간 체육선생이고 뭐고 아무것도 안 되겠다 싶어 광주로 내려가면서 교직에 사표를 냈습니다. 전남기공에선 축구감독으로 전념, 2년 만에 전국을 제패하고 나니 서울시청에서 부릅디다. 1975년 12월이었습니다』
 
1983년 멕시코에서 열린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 세계 4강 성적을 올리고 귀국한 박종환 감독이 인파를 향해 답하고 있다.
 
 
 교사직 던지고 축구에 전념
 
  그는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심판자격도 땄다. 1969년 가을 연세大 구장에서 선심 깃발을 쥐고 데뷔했다. 1971년 국제심판이 됐다.
 
  『지도자가 되려면 심판과정을 거치는 게 여러 모로 유리합니다. 벤치에서는 자기 팀 플레이밖에 볼 수 없지만 심판은 양 팀의 전술을 다 읽을 수 있습니다. 「知彼知己(지피지기)면 百勝(백승)」이지 않습니까』
 
  朴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서울시청 팀은 얼마 안 가 전국 실업 무대를 평정한다. 고졸 출신들을 모아 낮에는 훈련으로 담금질하고 밤에는 야학으로 대학(서울시립大) 졸업장을 따게 했다. 선수들이 잘 따라 주었다. 이태엽·권오손·최인영·이문영 등이 당시 주역들이다. 전국체전 5연패를 차지했다.
 
  한때는 서울시청 팀에 국가대표팀 엔트리의 절반인 12명이 포진한 적도 있었다.
 
  1983년 초, FIFA에서 대한축구협회로 한 장의 통지문이 날아든다. 「제4회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에 한국이 출전하라」는 것. 원래 멕시코 세계대회에는 아시아 예선전에서 1, 2위를 한 중국과 북한이 나가게 돼 있었다. 당시 한국은 3위로 탈락했었다.
 
  그런데 북한이 1982년 12월 뉴델리아시안게임 준결승에서 쿠웨이트와 경기 중 판정에 불만을 품고 태국인 주심을 집단폭행하는 바람에 FIFA로부터 향후 2년간 국제대회 출전금지 처분을 받으면서 출전 티켓이 한국으로 넘어왔다.
 
  협회는 청소년대표팀 사령탑인 朴감독을 불렀다.
 
  『웬만하면 우리도 나가지 말지. 첫판 탈락이 뻔한데 뭐 하러 비싼 달러 써 가며 멕시코까지 가는가』
 
  朴감독은 지지 않았다. 직전 대회인 1981년 호주대회에서 축구 강호 이탈리아를 4대 1로 꺾은 전력을 내세워 맞받아 쳤다.
 
  『나중에라도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봐 둬야 할 게 아닙니까』
 
  그는 팀을 급조해 태릉선수촌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朴감독 특유의 스파르타式 훈련이 시작됐다.
 
  『우리가 스코틀랜드와 첫판을 붙는 멕시코의 토루카는 해발 2665m의 고지대다. 산소가 부족해서 뛰면 뛸수록 숨쉬기 힘들어진다. 有備無患(유비무환)이니 모두 마스크를 쓰고 트랙을 돌도록!』
 
  이를 본 다른 종목 선수들이 「화생방 훈련하느냐」면서 다 웃었다.
 
  처음에는 5분, 다음에는 10분, 15분하는 식으로 시간을 늘렸다. 마스크 구보 15분간은 90분 풀타임을 뛰는 거와 같다. 선수들이 모두 잘 참아 주었다.
 
  훈련 틈틈이 국내 대학팀과 실업팀을 태릉으로 불러 평가전도 가졌고, 진 적은 없다. 그러나 朴감독은 시도때도 없이 기합을 줬다.
 
  다섯 골을 넣었더라도 한 골을 먹으면 태릉운동장의 400m 트랙을 10바퀴씩 돌게 했다. 2실점은 20바퀴. 그는 선수들에게 실점의 두려움을 피부로 느끼게 했다. 밤에는 노트를 펴 놓고 작전을 구상했다.
 
  2년 전 호주대회에서 어깨너머로 구경한 유럽과 南美 선수들의 경기 장면을 반추해 가며 자신만의 비장의 무기를 만들었다.
 
  「쟤들이 공을 잡으면 우리는 그놈을 좌우나 전후로 샌드위치 커버를 한다. 반대로 우리가 공을 잡으면 옆으로 벌어지면서 2대 1 패스로 돌파한다」
 
  「골 킥은 사양하고 스루 패스를 한다. 롱 킥은 장신인 쟤들에게 상납하는 거나 같다」
 
 
 
 경기 시작 8시간 前 경기장 변경
 
  나이 어린 선수들이라 비행기 멀미약까지 준비했다.
 
  1983년 6월3일, 멕시코 고원에서의 첫 상대는 스코틀랜드. 선수들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죽을 둥 살 둥 뛰었다. 0대 2패. 스코어는 2점 차였지만 경기내용은 백중지세였다.
 
  2차戰은 멕시코. 홈팀의 텃세는 대단했다. 경기 시작 8시간을 앞두고 대회 조직위원회에서 연락이 왔다. 경기장이 토루카가 아닌 멕시코시티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멕시코시티까지는 버스로 2시간 거리였다. 재촉해서 가보니 땡볕에 운동장은 가마솥이었다.
 
  관중 15만 명. 얼마나 시끄러웠던지 벤치에서 아무리 고함을 쳐도 선수들에게 안 들렸다.
 
  『내 손가락만 봐라. 하나면 중앙공격이고 둘이면 윙 플레이다』
 
  먼저 실점하고 노인우가 1골 만회한 뒤 종료 3분을 남겨 놓고 신연호가 승부를 갈랐다. 신연호는 슈팅한 볼이 골포스트를 맞고 나오자 헤딩으로 확인 사살했다. 2대 1 역전승. 그 한 방으로 멕시코는 초상집이 됐다.
 
  6월8일 토루카로 돌아가 맞붙은 호주와의 3차戰에서는 선수들이 날았다. 김종건·김종부가 잇달아 골을 터뜨려 2대 1로 이겼다.
 
  나흘 뒤 우루과이와 8강戰은 몬테레이 스타디움에서 열렸다. 그런데 멕시코 관중들이 이상하게도 한국을 응원했다. 자기들은 이왕 탈락했으니 대신 너희들이나 잘 싸우라는 뜻 같았다.
 
  전반 43분 김종부가 터닝슛을 날리자 다급해진 우루과이 수비수가 손으로 공을 쳐냈다. 페널티킥을 노인우가 찬 공은 골포스트를 맞고 튀어나왔다.
 
  후반 9분, 노인우의 패스를 받은 신연호가 선취골을 뽑았다. 1대 0. 후반 25분 우루과이가 한 골을 따라잡아 1대 1. 승부는 연장전으로 넘어갔다.
 
  여기서 「붉은 악마」들은 태릉선수촌의 「화생방 훈련」 덕을 톡톡히 봤다. 연장 14분, 오른쪽을 돌파하던 김종부가 문전으로 대시하는 신연호를 발견하고 땅볼로 깔아 주자 신연호가 회심의 오른발 터닝슛을 꽂아 2대 1 승리였다.
 
  한국 축구의 새로운 신화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4강 진출.
 
  ― 왜 4강에 주저앉았습니까? 내친걸음인데 결승까지 가지 않고서.
 
  『심판들이 가로막았지요. 우승까지 넘볼 수 있었는데 정말 아쉬웠습니다』
 
  6월15일 브라질과의 준결승.
 
  아벨랑제 FIFA 회장이 심판석으로 내려가더니 주·부심 3명과 악수를 하며 등을 두드리고 올라갔다.
 
  『악수 약발이 대단합디다. 이후 완전히 11대 14의 승부가 됐어요. 우리가 공격만 하면 휘슬이 울렸으니까요』
 
  전반 14분 김종부의 선취골이 터졌고 8분 뒤 올리베리아가 동점골로 1대 1이 됐다. 그리고 후반 36분 교체선수로 들어온 산토스가 결승골을 터뜨려 1대 2.
 
 
 
 국위선양
 
  브라질은 결승서 아르헨티나를 꺾고 우승했다. 한국은 4위.
 
  『처음 멕시코에 갔을 때 현지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어디서 왔냐며 「자판?」 「차이나?」 했어요. 둘 다 아니라니까 「그러면 어디냐?」고 묻습디다. 그런데 우리가 멕시코를 이기고 나니 일본이나 중국 선수보고도 「코리아」라고 합디다.
 
  대회가 끝난 뒤 현지 교포들이 불고기 파티를 열어 주었는데 申東元(신동원)대사께서 「여러분들이 이룬 4강의 업적은 외교관 1000명이 뛰어도 못 이룰 엄청난 국위선양이었다」고 하더군요』
 
  이후 한국 축구는 지금까지 23년이 지나도록 세계청소년 4강에 명함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 1991년 포르투갈대회에서 8강, 2003년 UAE대회에서 16강이 최고의 성적이다.
 
  귀국한 朴감독은 일약 축구영웅이 됐다. 전국에서 환영 퍼레이드가 벌어졌고 청와대에서도 불렀다.
 
 
 
 全斗煥·李朱一과의 인연
 
  ― 그때 청와대에 자주 갔었지요.
 
  『예, 한 달에 한두 번…』
 
  ― 全斗煥(전두환) 前 대통령과는 「멕시코 4강」 이전에도 알고 계셨습니까.
 
  『예, 1976년 서울시청 축구팀을 창단 했을 때 선수들의 정신교육을 위해 제1공수여단에 입교시킨 적이 있습니다. 그때 여단장이 全斗煥 장군이었습니다. 장군께서는 「나도 육사 시절 골키퍼했다」며 저희들을 잘 챙겨 주셨습니다』
 
  ― 청와대에선 주로 무슨 이야기를 합니까.
 
  『스포츠에 관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한번은 이런 얘기도 했습니다. 「프로축구를 만들고 싶은데 대통령이 축구선수 출신이라 축구만 챙긴다고 할까 봐 일부러 프로야구를 1년 앞당겨 출범시켰다」고요』
 
  全대통령의 축구 사랑은 유별했다. 全대통령은 수시로 태릉선수촌에 들러 코칭스태프나 선수들과 어울려 식사를 했다.
 
  ― 故 이주일씨와 고교동기라면서요.
 
  『학창 시절에는 몰랐는데 사회에 나와서 알았습니다. 나는 「4강 감독」으로, 그는 「코미디 황제」로 기세를 날릴 때 서로 만나 「윈-윈」 했지요』
 
  ― 효창구장의 인조잔디를 그분이 깔았다면서요.
 
  『그건 침소봉대 됐습니다. 내가 멕시코에 갔다온 뒤 그 친구를 만났는데 술자리에서 맨 땅 축구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운동장만 좋으면 우리 축구도 세계 頂上에 올라갈 수 있냐」고 묻데요. 그래서 「물론」이라고 답했지요. 「그럼 효창구장에 인조잔디를 깔면 될 것 아닌가」 하기에 「말이 난 김에 자네가 한턱 쓰라」고 했더니 「좋아, 1000만원 낼게」 합디다. 그 1000만원이 종자돈이 돼 효창구장에 인조잔디가 깔린 거지요. 대부분의 경비는 축구협회가 부담했습니다』
 
  이제는 그 인조잔디가 선수들의 발목을 삐게 하고 화상을 입히는 애물단지가 돼 버렸다.
 
  ― 이주일씨와 함께 청와대도 들어갔다면서요.
 
  『한번은 全斗煥 대통령께서 「朴감독, 이주일과 친하다면서? 한번 데리고 와」하시기에 동행한 적이 있습니다. 李朱一은 진짜 청와대에 다녀온 뒤 二週日(이주일)도 안 돼 TV 화면을 완전히 점령하데요.
 
  1991년 1월, 全대통령이 백담사에 계실 때 둘이 찾아가서 뵌 적도 있습니다. 영하 20℃에 무릎까지 빠지는 눈 속을 200m쯤 올라가니 움막에 내외분이 계시더군요. 큰절을 올리고 뒤돌아 나오다가 둘이 한참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朴감독은 『누가 뭐래도 그분을 존경한다』고 했다.
 
  화제를 축구로 바꿨다.
 
  ― 예전에 88팀을 맡은 적이 있지요.
 
  『멕시코에서 돌아온 뒤, 멀게는 88올림픽, 가깝게는 84 LA올림픽을 겨냥해 만든 팀이지요. 감독은 내가 맡았습니다』
 
  ― 자가용 번호도 「1988」로 기억하는데.
 
  『맞습니다. 당시 이상연 내무장관이 달아 줬습니다』
 
  LA올림픽 아시아 지역예선은 11월부터 시작됐다. 88팀은 홍콩·중국·태국을 상대로 3승 2무 1패를 거두며 組(조) 1위로 쾌주했다. 최종 예선전은 이듬해 4월23일 싱가포르에서 열렸다.
 
  1차戰은 쿠웨이트. 0대 0으로 비겼다. 뉴질랜드와 바레인도 연파했다. 2승1무. 남은 건 사우디아라비아. 여기서 이기는 팀은 바로 LA行이고 지는 팀은 3, 4위 플레이오프戰에서 마지막 티켓을 따야 한다.
 
  사우디와의 전반은 한국이 2대 1로 앞섰다. 후반 들어 사우디가 추격을 시작하더니 금세 4대 3으로 추월해 버렸다. 한국은 이길용의 동점골로 4대 4를 이뤘으나 곧이어 사우디 샤레에게 결승골을 얻어맞고 침몰한다. 4대 5 역전패.
 
  맥이 빠진 한국은 이라크와의 플레이오프에서도 0대 1로 패함으로써 LA行이 좌절됐다. 1964년 도쿄올림픽 후 20년간 별러 왔던 올림픽 본선 진출의 꿈이 깨진 것이다. 귀국하니 잘렸다.
 
  1986년 멕시코월드컵과 서울아시안게임은 김정남-김호곤 스태프가 맡아 치렀다.
 
평양에서 열린 남북통일축구경기 1차전에 참가한 한국 축구대표 선수들이 1990년 10월13일 박종환 감독(오른쪽에서 세 번째)을 앞세우고 판문점 북측 경비초소를 거쳐 입국하고 있다.
 
 
 88올림픽 팀 사령탑 시절의 에피소드
 
  그해 겨울, 축구협회는 88올림픽 사령탑에 朴鍾煥 감독을 임명했다. 한국은 개최국이라 예선전 장벽도 없다. 그냥 닦고 조이면 됐다. 올림픽 개막을 2개월 앞두고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가 열렸다.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국민들에게 보여 줄 기회였다.
 
  南美와 유럽의 클럽과 대표팀을 섞어 초청한 이 대회에서 예선전은 그럭저럭 넘어갔다. 이윽고 준결승 상대는 체코. 그런데 게임이 안 풀렸다. 연장전까지 0 대 0 무승부로 승부차기에 들어갔다. 웬일인가. 잇단 실축으로 3대 4. 결승 문턱에서 주저앉았다.
 
  다음날 한 신문에 「朴감독이 선수들에게 승부차기 순서를 안 정해 주었다」는 기사가 났다.
 
  『세상에, 어느 감독이 결승 진출이 걸린 승부차기에서 키커 오더를 안 낸다는 말입니까.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옵디다. 분명히 내부 모함인데, 누군가 악의를 품고 기자에게 이런 제보를 한 게 틀림없었어요』
 
  사건은 일파만파 번지기 시작했다.
 
  도하신문들은 앞다투어 「감독의 직무유기」를 질타했다. 「감독방출」 이야기도 나왔다. 이틀 뒤 나이지리아와의 3, 4위戰 경기 전반이 끝났을 때 기자들이 몰려와서 『사퇴 이야기가 나도는데 사실입니까』, 『진짜 사표를 낼 겁니까』 라는 질문을 쏟아 냈다.
 
  『그땐 나도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기자들이 경기 중인 감독에게 「사퇴」 소리를 할 수 있습니까. 나도 홧김에 「성적을 못 내면 관두면 될 거 아니오」 하고 치받았지요. 후반에 나이지리아를 꺾고 3위를 했는데, 다음날 신문에 「朴감독 사의표명」이라는 기사가 실렸습디다』
 
  朴감독은 다음날 자진사퇴해 버렸다. 서울올림픽 2개월 전이었다.
 
  ― 누구의 짓인지 알아냈습니까.
 
  『훗날 그 선수가 용서를 구합디다』
 
  1988년 「일화」가 창단하면서 朴감독을 사령탑에 영입한다. 올림픽의 짐을 벗은 朴감독은 일화의 팀 만들기에 몰두했다. 이때 협회가 다시 朴감독을 부른다. 1990년 8월9일, 北京아시안게임을 두 달 앞둔 때였다. 朴감독은 지휘봉을 넘겨받고 北京으로 갔다.
 
  준결승전에서 이란에게 잡혀 동메달에 그쳤다. 그런데 대회 폐막을 앞두고 느닷없이 「평양에 갈 준비를 하라」는 것이다. 통일축구대회가 성사된 것이다. 평양과 서울을 오가는 「홈 앤드 어웨이」 방식이었다.
 
  축구단은 北京공항에서 조선민항을 타고 평양으로 들어갔다.
 
  『1차戰이 열리는 오륜경기장은 정말 큽디다. 수용인원이 15만 명입디다. 근데 이상한 게 스탠드를 가득 메운 관중들이 축구는 안 보고 모두 경기장 꼭대기만 바라보고 있어요. 자세히 보니 그곳에 카드섹션 지휘자가 서 있습디다』
 
  1차전은 북한의 2대 1 勝(승), 서울로 돌아와 잠실에서 벌인 2차전은 우리가 1대 0으로 이겼다.
 
  『북쪽 임원들과 수원 갈비집에 갔을 땝니다. 식당이 커 보였던지 대뜸 하는 말이 「이거 정부에서 합네까?」 하고 묻습디다. 순간 슬퍼지데요』
 
  朴감독은 일화로 복귀했다. 그곳에서 한풀이가 시작된다. 일화는 1990년 FA컵 3위를 시작으로 1992년 아디다스컵 우승과 리그 준우승을 했다. 경기 내용도 화끈했다. 일화 경기가 있는 날은 5000명 이상의 朴감독 팬들이 몰려다녔다. 대통령 선거가 있던 1992년 3월 동대문운동장에는 「박종환을 청와대로―」라고 쓰인 플래카드가 나붙기도 했다.
 
  일화는 1993년과 1994년, 1995년을 내리 우승하면서 한국 프로축구를 완전히 장악했다. 1996년에는 아시아 그랜드슬램을 달성해 AFC 선정 최우수 클럽 상까지 싹쓸이했다.
 
  축구협회가 이러한 朴감독을 그냥 둘 리 만무했다.
 
  정몽준 회장의 새 집행부가 들어서면서 2002년 월드컵 유치 작전이 시작됐고, 그 선봉에 朴감독을 세웠다. FIFA 회원국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코리아컵 대회(1995년 4월)가 열렸고, 이듬해 3월 UAE 4개국 대회의 참가도 같은 맥락이었다. 朴감독은 두 대회 모두 사령탑을 맡아 열심히 뛰었다.
 
  덕분인지, 1996년 5월30일 FIFA는 월드컵 韓·日 공동개최를 발표한다. 협회는 7월8일 朴감독을 다시 대표팀에 앉히고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 대비한다. 朴감독으로선 최초의 월드컵 도전이었다.
 
 
 
 출국 3일 전에야 엔트리 구성
 
  그해 12월 UAE에서 아시안컵이 열렸다. 대표팀의 첫 시험무대였다. 선수들을 소집했다. 그런데 반응이 없었다. 프로축구는 이미 시즌이 종료돼 선수들이 휴가를 떠나 버렸고, 일부 구단은 해외 클럽대항戰에 출전 중이었다. 1∼2차 소집에 성원이 안 돼 3∼4차 소집까지 기다려 출국 3일 전에야 겨우 엔트리가 구성됐다.
 
  떠날 채비가 한창인데 협회 강화위원회에서 콜롬비아 대표팀과 수원에서 친선게임을 한번 갖고 떠나라고 했다. 4대 1로 이겼지만 선수들의 몸은 천근만근이었다.
 
  다음날 비행기는 UAE가 아닌 중국 광저우(廣州)에 착륙했다.
 
  그곳에서 중국대표팀과 평가전이 예약돼 있었다. 지친 선수들을 독려해 3대2로 이기긴 했으나 팀 분위기는 엉망이 돼갔다. 더 갑갑한 건 UAE行 비행기가 없어 나흘간 더 중국에 머물러야 했다.
 
  12월4일, 대회는 개막됐고 한국은 첫판에서 홈그라운드의 UAE에 비기는 등 苦戰(고전)을 하면서 1승 1무 1패로 예선을 통과했다.
 
  선수들은 지칠 대로 지쳤다. 피로가 누적되면 골병 드는 법. 이란과의 준준결승에서 전반은 2대 1로 이겼으나 후반에 내리 5골을 내줬다. 이란의 다에이에게 연속 4골을 빼앗겼다. 2대 6.
 
  선수들은 그냥 서서 구경만 했다.
 
  『경기장에서 정몽준 회장이 이럽디다. 「이런 승부에 신경 쓰지 마십시오. 우리의 목표는 프랑스월드컵입니다」』
 
  同行(동행)한 김상진 부회장과 김정남 전무도 끄덕했다. 그러나 귀국하자마자 잘렸다. 朴감독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선수들이 아무리 지쳤다고 해도 이란에게 6골을 준 게 이해가 안 됐다. 그가 유추해 낸 답은 일부 선수들의 「태업」이었다.
 
 
 
 전임 감독도 없었던 한국 축구
 
  『당시 대표선수들 사이에 「열 하나회」란 조직이 있었습니다. 5共 때 「하나회」를 연상케 하는 이 모임은 처음에는 스타 플레이어들의 친목단체였지만 나중에는 선수들의 단체행동에 앞장서기도 했지요. 이들 가운데 일부가 고의 태업을 한 게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朴감독의 주장일 뿐 확인된 바는 없다. 조선일보는 이란戰의 대패에 대해 이렇게 썼다.
 
  <한국축구 치욕의 날이었다. 2002년 월드컵 개최국의 체면은 완전히 땅에 떨어졌다. 역대 최강의 호화진용을 갖춘 국가대표팀, 붉은 전사의 신화를 만들며 대스타로 대접받아 온 감독이 합쳐진 한국축구는 최고의 전력으로 평가됐지만 막상 아시안컵에서 뚜껑을 열어본 결과 우물 안 개구리로 판명 났다>
 
  신문은 대표팀의 전임감독 부재와 선수관리 부재도 아울러 지적했다.
 
  <朴鍾煥 감독이 다른 팀을 맡지 않는 사실상의 전임감독이라고 하지만 그에겐 보장된 계약기간도 없었다. 항상 필요할 때 아무나 불러 사령탑을 맡기는 협회행정이 문제다>
 
  ― 당시에 왜 전임감독 제도를 하지 않았습니까.
 
  『돈도 아끼고 성적이 나쁘면 쉽게 자르려고 그랬지요. 이제야 털어놓는 얘기지만 나는 대표팀 감독하는 동안 월급 한 푼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청소년대표 때도 그랬고, 국가대표 때도 마찬가집니다. 88팀 만들어서 월드컵 유치를 위해 아프리카와 中東으로 돌아다니며 순회경기를 벌였지만 급료는 구경도 못 했습니다』
 
  ― 그럼 생활비는 어떻게 조달합니까.
 
  『수당으로 때웠지요. 선수는 하루 1만원, 감독은 3만5000원. 어쩌다 친선경기에서 입장 수입이 좋으면 100만원 정도 떼 주기도 합디다. 경기가 없을 땐 빈 털터리지요』
 
 
 
 협회의 횡포
 
   朴감독은 당시 협회의 횡포가 이만저만 아니었다고 흥분했다.
 
  『월급을 안 주면 전권이라도 주던지. 지금까지 내가 가장 많이 감독을 맡았는데 그건 그만큼 많이 땜질로 사용했다는 증거지』
 
  사실 朴감독은 대표팀 감독을 6차례나 했다. 그가 국내 최다이고 다음이 김정남 감독(5회)이다. 횟수가 많다 보니 근무일수도 1724일간으로 김정남(871일)의 두 배다.
 
  이란戰의 참패로 朴감독의 월드컵 사령탑 꿈은 물거품이 됐다. 그 바통은 차범근에게 넘겨졌으나 그 역시 중도하차 당했다. 차범근 역시 월드컵 참패 직후 「선수들에게 당했다」고 털어놓아 충격을 주었다.
 
  UAE에서 돌아온 朴감독에게는 오라는 곳도 없고 갈 곳도 마땅찮았다. 그는 중국으로 향한다. 1부 리그의 「武漢(우한)」 팀. 1998년 여름, 날은 너무 더워 운동장 기온이 40℃를 넘었다. 月 3만 달러를 받기로 했으나 현장에 가보니 전용구장도 없고 합숙소도 형편없었다.
 
  그런데 석 달 만에 구단주가 팀을 다른 기업에 팔았다. 그리고 朴감독더러 따라가라고 했다. 朴감독은 따졌다. 「소속 팀이 바뀌었으니 계약은 무효」라며 귀국해 버렸다. 돌아와서는 여자축구연맹 창설에 참가했다.
 
  『귀국 후 「숭민 원더스」라는 여자축구단의 단장을 맡고 있으니까, 정몽준 회장이 「이왕 하는 김에 여자축구연맹을 만들자」고 했어요. 그래서 여자연맹 초대회장직을 맡았지요. 국내 中·高·실업팀을 모두 가입시켰지요. 기금만도 2억원 정도 됩니다』
 
  그러던 중 대구시민의 축구단인 「대구 FC」가 창단감독을 찾았다.
 
  ― 성적은 어떻습니까.
 
  『작년에는 7위를 했습니다. 자금이 부족해 좋은 선수를 확보하지 못하는 게 안타깝습니다. 70%의 戰力만 돼도 100%짜리 상대를 이길 수 있겠는데 지금은 55%밖에 안 됩니다. 좀더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지난 2월23일 통영에서 열린 「한국·중국·호주 3개국 클럽대항戰」에서 우승을 한 것이 그나마 큰 위안이 되고 있다.
 
  ― 대구는 정이 듭니까.
 
  『괜찮습니다. 처음에는 사투리를 잘 몰라 실수도 했지요. 한번은 동네 목욕탕에 가서 비누칠을 하고 있는데 탕 안에서 누군가 「어이 朴감독 아이가∼」 하며 큰소리를 쳐요.
 
  샤워물 소리 때문에 잘 못 들었는데 그 사람이 대뜸 「와∼ 대답이 없노, 기분 나쁘나∼」 해요. 듣다 보니 화가 나서 「여보, 초면에 왜 반말입니까」 했더니, 탕에서 불쑥 나오더니 대뜸 「내가 언제 반말했노, 朴감독 아이가 캤는데」 하면서 「나이 육십에 별꼴을 다 보네」 하며 씩씩거립니다. 그래서 「나는 68세요」 했더니 위아래를 한참 살피더니 「몸이 하도 야무져서 육십까지 안 되는 줄 알고 그만 실례했심더」 합디다』
 
 
 
 『영원한 축구인으로 기억되고 싶다』
 
  ― 요즘도 골프를 치십니까.
 
  『한 달에 한 번 정도 나갑니다』
 
  ― 스코어 관리는 잘 됩니까.
 
  『80을 넘기지 않습니다』
 
  ―정치판에서 유혹이 있을 법도 한데.
 
  『요즘은 조용합니다. 「국민의 정부」 때는 공천을 줄 테니 입당하라고 몇 차례 권유가 왔고, 1992년에는 국민당 정주영 회장이 「일화의 연고지인 구리에서 출마해라」고 해서 대신 이주일을 추천했습니다』
 
  ― 앞으로의 계획은.
 
  『올해로 지도자 생활 41년째입니다. 제자가 전국에 50명이나 되고요. 늙은이의 욕심이 있다면 후배들에게 영원한 축구인으로 기억되는 일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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