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뮤지컬「요덕 스토리」정성산 감독

북한동포들에게「우리가 당신들을 잊지 않고 있다」고 전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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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인권에 대한 투쟁을 멈추지 말라는 격려로 알고 싸우겠다』

申周鉉 데일리NK 취재부장
북한 정치범수용소를 다룬 뮤지컬 「요덕 스토리」가 태풍을 몰고 왔다. 이 무겁고 칙칙한 뮤지컬을 준비할 당시 무대에 작품을 올릴 수 있을까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다. 스태프와 배우들도 무사히 공연을 마쳤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고 한다.
 
  기적이 일어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제작비 문제로 「요덕 스토리」 공연이 좌초 위험에 처했다」는 보도가 나가자마자 정성산 감독의 통장은 불이 나기 시작했다. 1000원, 2000원의 쌈짓돈이 쌓이기 시작했다. 한 달 만에 후원자가 1000명이 넘어섰다. 소리 없이 200만원을 던져 주고 간 중년의 신사도 있었다.
 
  결국 뮤지컬이 무대에 올랐고 2만 관객 동원이라는 대형사고를 쳤다.
 
  뮤지컬 「요덕 스토리」는 초연 공연에 2만3000명이라는 관객을 동원했다. 국내 창작 뮤지컬 관객기록 동원 中 최대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작품은 창작뮤지컬, 신인 연출가, 신인 배우, 칙칙한 소재, 열악한 극장이라는 다섯 가지 惡材(악재)를 안고 출발했지만, 시원하게 그 장애물을 걷어냈다.
 
 
 
 『이제야 빚 갚는 기분』
 
뮤지컬「요덕 스토리」中 수용소 수감자들을 고문하는 장면.
  공연이 끝난 지 1주일 후 정성산 감독을 만나기 위해 서울 강남구 역삼동 연습실을 찾았다. 여전히 사무실은 분주하다. 누가 찾아와도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보인다. 일정표에는 5월 스케줄까지 빼곡히 들어찼다. 7월에는 미국공연이 예정돼 있다.
 
  脫北者 출신인 정감독은 『남한에 온 지 10년이 넘었지만, 이제야 빚을 갚는 기분』이라고 했다.
 
  『평생 갚아야 할 마음의 짐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말 감사드려요. 국민이 보내 주신 성금은 사실 저에겐 「총알」이었습니다. 골리앗과 싸우는 다윗과 같은 존재에게 국민들이 총알을 보내 준 것이죠.
 
  승리의 원동력은 바로 국민들입니다. 다들 부모님 같은 마음으로 격려하고 후원해 주셨어요. 그런 감사함이 있었기 때문에 공연이 가능했습니다. 「평생 북한인권에 대한 투쟁을 멈추지 말라」는 격려로 알고 싸우겠습니다』
 
  ─뮤지컬 「요덕 스토리」로 대한민국에 문화적 충격을 던져 줬습니다. 국민적 관심을 모으게 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진실을 찾고자 하는 국민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북한인권에 대한 진실과 삶에 대한 진실, 민족의 아픔을 찾고자 하는 마음이 모아진 것이라고 봅니다. 정부의 對北정책에 가려진 북녘의 진실을 찾는 힘이죠. 진실을 찾고자 했던 국민의 마음이 요덕 스토리에 모아진 것이라고 봅니다』
 
 
 
 관객들을 주시한 정감독
 
「요덕 스토리」中 수용소 수감자들이 수용소에서 태어난「요덕」이를 돌보는 장면.
  ─뮤지컬을 관람한 관객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던가요.
 
  『연령대마다 특징이 있어요. 나이 지긋한 분들께서는 「(북한주민을) 너무 잊고 산 것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젊은 사람들은 「정말 저렇게 끔찍하냐」고 묻고요. 초등학생들은 「요덕이(극중 요덕수용소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미안해요」 라고 말해요』
 
  ─정감독은 공연이 시작되면 시종일관 관객석을 감시하는 「지독한 감시자」의 모습을 보입니다. 관객들이 어떤 장면에서 가장 戰慄(전율)하던가요.
 
  『脫北者들은 오히려 이 뮤지컬이 실제 현실보다 약하다는 반응이에요. 전체적으로 공연을 쭉 보고, 최종 장면에서 많이 우십니다. 「아버지(주님) 남조선에만 가지 마시고, 공화국 이곳 요덕에도 와 주소서. 아버지 제발 이 땅에 와 주소서」라는 노래가 나오면 통곡하는 분들도 계세요. 다들 그 메시지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시는 것 같습니다』
 
  ─어린이 관객도 유난히 많았는데요.
 
  이 질문을 하자 정감독이 활짝 웃었다.
 
  『부모님 손잡고도 오고, 단체로도 많이 왔어요. 2만3000명의 관객 중에 3000명 정도가 어린입니다. 물론 제일 많은 연령층은 50~60代이지만 젊은층도 많았어요. 사인회를 하면 어린이들이 난리가 나요. 아이들이 「잘 봤는데, 너무 울었어요」라고 해요.
 
  한 꼬마에게 「어떻게 왔냐」고 물었더니 「엄마가 돈을 주면서 학원에 가지 말고 뮤지컬 보고 오라고 해서 왔어요」라며 「이 이야기가 진짜예요? 왜 학교에서는 이런 걸 가르쳐 주지 않는 거죠?」라고 물어요』
 
 
 
 『북한 팔아 장사한다는 소리 듣기 싫어』
 
   ─자라나는 세대들이 공연을 보고 뭘 배웠을까요.
 
  『한 학생이 뮤지컬을 보고 홈페이지에 「통일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우리도 먹고살기 힘든데 脫北者들은 왜 자꾸 내려오냐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친구 따라서 공연을 보고 이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통일 통일 통일 통일」이라고 써놓은 것을 봤습니다. 요덕수용소에 있는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 통일이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요덕 스토리」 嬖人(폐인)도 있다고 들었는데요.
 
  『20代 중반 젊은 아가씨예요. 초연에만 여섯 번을 봤답니다. 그리고 볼 때마다 사인을 받으러 와요. 「왜 그렇게 자주 보냐」고 누군가 물었어요. 「볼 때마다 가슴이 저미는데, 나도 모르게 또 오게 된다. 보면 볼수록 감사한 마음이 든다」라고 해요. 그때 정말 뮤지컬 만들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연이 끝나면 좀 쉬고 싶다고 했는데, 쉴 새가 있었나요.
 
  『쉬지 못했죠. 쉬고 싶다고 쉬어지겠습니까. 1000만 명이 이 뮤지컬을 봐야 한다는 목표를 다시 세웠습니다. 이 뮤지컬이 북한 정치범수용소 해체운동의 디딤돌이 돼서 결국 북한의 정치범수용소가 해체돼야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아요. 그때 가서 쉴 수 있겠죠. 이 뮤지컬도 따지고 보면 수용소 수인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것이니까요』
 
  정감독은 결의에 차 있었다. 장황하지 않고 할 말만 했다. 좀더 솔직한 심정을 캐묻고 싶어졌다.
 
  ─주위에서 돈 좀 벌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법도 한데요. 실제 수익이 좀 남았습니까.
 
  『초반 공연에 무료 초대권을 많이 보냈습니다. 공연 수익은 아직 제작비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저희는 뮤지컬 OST(오리지널 사운드 트랙 음반)도 만들지 않았어요. 북한을 팔아 장사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거든요.
 
  지방공연을 할 때는 현지에서 병마와 싸우는 어린이들을 돕는 일을 한 가지씩 할 계획이에요. 배우들이나 스태프들에게도 항상 그런 점을 강조합니다. 노래나 율동을 함부로 변형시키는 것도 못 하게 하죠. 이 뮤지컬을 돈벌이로 삼을 생각은 없습니다. 공연을 계속할 수 있는 수익이 생긴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정부의 잘못된 對北정책 고발』
 
지난 4월2일 마지막 공연이 끝난 후 엄지손가락을 쳐들며 출연진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정감독.
  ─뮤지컬의 가치를 액수로 환산해 본 적이 있나요.
 
  『한 대학 교수님께서 뮤지컬의 상품적 가치를 분석해 준 메일을 보내왔어요. 「요덕 스토리」로 파생된 브랜드 네임 효과가 300억원에 달한답니다. 그분께서 항목별로 평가해 주셨는데, 마지막에 「요덕 스토리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쓰셨어요. 그 멘트가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제작 당시 정부로부터 갖가지 압력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통일부 당국자가 「요덕 스토리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우려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는데요.
 
  『그런 말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정부에 하고 싶은 말도 없고요. 이 뮤지컬은 盧武鉉 대통령이나 정치인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닙니다. 국민들을 위해 만든 것이죠. 그것으로 족합니다』
 
  ─정말 아무 할 말이 없습니까.
 
  『이 뮤지컬은 정부의 잘못된 對北정책도 고발하고 있어요. 결국 무엇이 진실이냐로 판가름 날 것입니다』
 
  ─뮤지컬에 脫北者들의 참여가 있었습니까.
 
  『사실 脫北者들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제작이 힘들었을 것입니다. 요덕수용소에서 직접 고초를 겪으신 김영순 어머님이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70세가 넘은 나이에도 매일 오셔서 북한 按舞(안무)를 지도해 주셨어요. 양손에 항상 먹을 것을 들고 오셨습니다. 가르치면서 우시고, 배우들 연기를 보면서 또 우셔요. 배우들이 김영순 어머님을 보고 각성이 많이 됐습니다.
 
  북한민주화운동본부의 강철환·안혁·박상학·김태진씨 등도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이분들은 수용소를 직접 경험한 분들입니다. 「요덕 스토리」는 이분들의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죠』
 
 
 
 북한에서의 어린 시절
 
  ─脫北者 출신이 뮤지컬을 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화제가 되는데요. 정감독의 예술적 소양은 어디서 나왔다고 보십니까.
 
  『저는 북한에서 먹을 것 입을 것 걱정 안 해보고 자랐습니다. 아버지가 金正日 관저 생필품을 조달하는 부서에서 일하셨거든요. 저는 11세까지 정상적인 아이가 아니었어요. 머리카락도 제대로 자라지 않고 고개는 옆으로 항상 처져 있었어요. 부모님은 제가 평생 장애를 가지고 살 것으로 생각하셨답니다. 근데 제가 고등중학교를 다닐 때부터 몸이 회복됐어요. 그래서 부모님이 어떻게 할까 고민하시다가 농촌지원이나 노동을 하지 않는 예술학교로 보내기로 하셨습니다. 그것이 출발이 됐죠』
 
  ─타고난 재능보다는 후천적인 노력이 컸겠군요.
 
  『금성고등중학교(現 금성학원)는 북한에서 최고급 간부들의 자제만 오는 곳이에요. 어렸을 때부터 예술적 재능을 갈고 닦은 아이들이죠. 저는 아버지가 힘을 써 줘서 가능했죠.
 
  처음에는 성악반에 들어갔는데 노래가 될 리 있나요. 그 다음에는 화술반·미술반을 전전했습니다. 그러다 창작반에 들어가서 정착을 했죠. 그러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에도 말썽을 많이 부렸어요. 예술학교에 예쁜 여학생이 많으니까 다른 학교 남학생들이 자꾸 집적거립니다. 그래서 싸움도 많이 했죠. 그러다가 사회안전부(경찰)에 끌려간 적도 있어요』
 
  ─졸업 후 대학에 가지 않고 軍에 입대한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금성고등중학교를 졸업하면 대부분 음악무용대학이나 연극영화대학을 가요. 대학을 졸업하면 보천보 전자음악단이나 만수대 예술단에 가죠. 「휘파람」을 부른 전혜영이 제 후배입니다. 근데 저는 이런 쪽보다는 북한에서 대접받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그중에서도 對南사업을 하는 것이 저의 희망이었죠.
 
  삼촌의 도움으로 3월 입대가 결정돼서 평안남도 소강에 있는 부대로 직접 찾아갔습니다. 부대에 갔더니 한 간부가 「동무가 정성산이구먼」 한마디 하더니 막사로 데려가서 일만 시키는 겁니다. 일주일 동안 잡부로 일하고 농사일만 했습니다. 「이건 아니다」 싶어 그냥 부대를 나와 버렸습니다. 탈영이죠. 아버지 힘만 믿고 내키는 대로 행동했습니다. 삼촌이 부랴부랴 찾아오셔서 다시 「어디 가고 싶으냐」고 묻기에 휴전선 民警부대에 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軍에 정식 입대하게 됐습니다』
 
 
 
 金日成 앞에서 공연하고 칭찬 받아
 
공연이 끝난 후 사인을 받기 위해 줄을 선 관객들.
  ─軍에서 예술적 소양을 인정받아 평양 연극영화대학에 입학하는 특혜를 받았는데, 북한에서 중앙당 간부 정도의 배경이 아니고서는 쉽지 않은 일이 아닙니까.
 
  『1986년 軍에 입대해서 정말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탈영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지만, 같이 근무하는 대원들의 배경도 만만치 않아서 쉽사리 행동은 못 했습니다. 1987년부터 詩나 글을 써서 올리면 곧잘 당선이 됐습니다.
 
  그러다 대회에서 1등을 하고 사단 사령부 작가를 거쳐 군단사령부까지 갔습니다. 그곳에서 진가를 발휘했죠.
 
  2년에 한 번씩 인민군대에서 최고의 작품을 골라 평양에서 공연을 합니다. 「근무자 예술축전」에 참가해 金日成 앞에서 공연을 했습니다. 북한 특수부대의 行軍(행군) 이야기였는데,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제목이 「뒤로 전달」이었을 겁니다. 산사태와 악천후로 좌표를 잃은 특수부대가 며칠을 굶으면서 行軍합니다. 좌표를 찾아야만 식량을 배급받을 수 있는데, 行軍 도중 副대대장이 주머니를 만져 보니까 아내가 싸준 엿이 한 덩어리 있었답니다. 그는 엿을 먹지 않고 「뒤로 전달. 전사 동무에게로」를 외칩니다. 그런데 엿을 받은 전사가 이 엿을 먹지 않고, 다시 「앞으로 전달. 부대장 동지에게로」를 외칩니다. 이런 전우애와 조국애를 그린 극이었습니다.
 
  金日成은 이 공연을 보고 「병사들의 마음과 조국애를 읽을 수 있는 아주 좋은 작품」이라고 敎示(교시)했습니다. 북한에서는 최고의 영예죠. 이것이 평양 연극영화대학에 입학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됐습니다』
 
 
 
 남한 라디오 방송 자주 들었다
 
  ─북한에서 남한 방송을 자주 들었습니까.
 
  『1994년 金日成이 사망한 후 소집 명령이 떨어져 과거에 있던 부대로 돌아갔습니다. 특별한 보직이 없어서 부대 방송국에 자주 들락거렸어요. 그곳은 24시간 전기가 들어오고 전기장판이 있어서 따뜻하게 지낼 수 있거든요. 그곳에서 日製(일제) 라디오로 남한 KBS 사회교육방송을 들었습니다. 매일같이 자주 들었습니다. 재미있었거든요』
 
  ─어떻게 발각됐습니까.
 
  『남한 라디오 방송을 듣다가 잠이 들어 버렸어요. 근무에 안 나오니까 보위지도원이 찾으러 왔다가 남한 방송을 들으면서 자고 있는 저를 발견한 거죠. 아침에 눈을 떴는데 라디오가 없어졌어요. 사단 보위부장이 아버지와 친분이 있어서 그냥 넘어가려 했는데, 적발했던 보위지도원이 군단에 찌른 거예요. 보위부에 끌려가 초심을 받으면서 무수히 맞고 짓밟혔습니다』
 
  ─조사를 받고 어디로 끌려갔습니까.
 
  『서부 사리원 노동연대로 갔습니다. 한 개 연대가량의 범죄자들 가운데 정치범죄자들을 구분해서 혹독하게 조사나 교육을 진행합니다. 여기서는 간수가 직접 때리지 않습니다. 서로 때리게 해서 이긴 사람들에게 밥을 주고 나머지는 굶기는 것도 태반입니다.
 
  조사는 고문과 함께 이뤄집니다. 손톱밑에 날카로운 대침을 꽂아 놓으면 그냥 볼펜으로 건드려도 고통은 상상하기 힘듭니다. 여기서 3개월 동안 20kg이 빠진 것 같아요. 그리고 재판을 해서 13년 刑(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재판이 끝나면 실컷 먹게 해줍니다. 「장군님의 마지막 배려로 잘 먹고 혁명화 잘해서 黨에 보답하라」고 하죠』
 
  ─탈출과정도 드라마틱합니다. 수용소로 가는 도중 호송차가 전복되는 사고가 있었다면서요. 그것도 잠들어 있는 사이에요. 정감독은 「잠 자는 사이」에 운명이 몇 번씩 바뀌는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수용소로 호송되는 날에 비가 부슬부슬 왔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로 그냥 눈을 붙이고 잠을 청했습니다. 한참을 가는데 「우당탕」하는 소리가 나더니 차가 뒤집어진 거예요. 차에서 나와 기어서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한참 뛰어가니까 황해남도 금천군이 나와요. 그곳에서 다시 개성으로, 평양으로 몰래 들어갔습니다. 이미 집안은 지방으로 疏開(소개)당하고 친구들도 조사를 받은 상태였어요. 더 이상 평양에 머물 수 없었습니다. 결국 중국으로 탈출하는 길밖에 없었죠』
 
 
 
 아버지는 정치범수용소에서 처형당해
 
  ─아버지가 정치범수용소에서 처형당했다는 소식은 어떻게 알게 됐습니까.
 
  『처음 남한에 와서 일이 잘 풀렸어요. 돈이 생기면 북한에도 보냈죠. 근데 제가 1998년 KBS 2TV에서 방영한 「진달래 꽃 필 때까지」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했습니다. 북한의 「기쁨조」도 다룬 드라마였죠. 그 일로 아버님이 수용소에 끌려가서 공개처형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당시 북한은 KBS 방송국 폭파위협까지 했어요. 金正日의 가장 예민한 부분을 다루는 데 제가 참여했으니 아버지가 그렇게 되신 거죠. 그 일을 전해 듣고 저도 죽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관객 1000만 동원이 목표』
 
   ─정감독은 이 뮤지컬을 제작하면서 「용서」라는 말을 자주 썼는데요.
 
  『영화 시나리오를 쓰면서 처음에는 욕도 많이 들어가고, 북한 지도부를 저주하는 내용도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쓰다 보니까 이것이 용서로 바뀌었습니다. 물론 제가 접하게 된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습니다만, 이들의 죄를 제 마음속에서 용서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金正日에게 「그만 죽이라」는 메시지를 분명히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더 이상 많은 사람들에게 恨(한)을 만들지 말라」고 하고 싶었습니다』
 
  ─제작 당시 기대보다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다음 목표를 잡았나요.
 
  『대한민국 국민 1000만 명이 이 뮤지컬을 보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절대 빈말이 아닙니다. 그냥 공연이라고 하면 이런 목표를 갖지 않습니다. 「요덕 스토리」는 개인적으로는 수용소에서 처형당한 아버지를 위한 恨풀이입니다만, 다른 한편으로는 북한동포들에게 「우리가 그들을 잊지 않고 있다」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국민 1000만 명이 이 뮤지컬을 보아야 할 이유는 분명합니다. 북한동포들의 고통을 우리 국민이 알아야 하기 때문이죠』
 
  ─뮤지컬을 통해 국민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세계 역사를 보면 문학예술이 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詩 한 편이 대중을 감동시키고, 그들을 정의로운 투쟁으로 이끌어 가죠. 그것이 문화의 힘입니다. 저는 뮤지컬을 통해 북한의 진실을 폭로할 것입니다』
 
  뮤지컬 「요덕 스토리」는 7월부터 미국 공연에 들어간다. 정감독은 뮤지컬 팀을 두 개로 만들어 국내 공연도 계속할 계획이다. 그의 말대로 1000만 명이 「요덕 스토리」를 관람한다면, 아니 그 10분의 1만 들어와도 세상은 바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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