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이야기] 건망증

  • : 임혜기  haeky33@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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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惠基
美 뉴욕 거주. 서울 출생. 이화女大 정외과 졸업. 渡美 후 뉴욕 조선일보 칼럼니스트, 뉴욕 한국일보 기자, 뉴욕 한국일보 문화 섹션지 「라이프 타임스」 편집장 역임. 장편소설 좥셋은 언제나 많고 둘은 적다좦, 좥사랑과 성에 관한 보고서좦 등 출간. 그 외 수필집과 번역서 다수.
친구들과 모임이 있었다. 식당 근처까지 갔는데 문득 그들에게 꼭 보여 줘야 할 사진을 집에 두고 왔다는 생각이 들어 급히 집으로 되돌아갔다. 사진을 책상 위에 두었다고 생각했는데, 사진이 보이지 않아서 그냥 식당으로 갔다.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식사를 했다. 식사를 하는 내내 사진을 찾지 못하면 어떡하나 걱정이 됐다.
 
  식사 후 메모할 노트와 펜을 찾다가 가방 안에서 사진 봉투를 발견했다. 사진을 찾았다는 반가운 마음도 잠시, 슬그머니 걱정이 됐다. 친구들과 모임 약속을 하고 바로 사진을 챙겨 넣은 모양인데, 그 사실 자체가 기억에 없었다. 건망증? 혹시 치매?
 
  이런 걱정을 하소연하듯 친구들에게 털어놓자, 친구들은 저마다 자신들도 얼마나 정신이 없는지에 대해 한동안 수다를 떨었다.
 
  A는 『은행에서 돈을 찾은 후 슈퍼마켓에 갔다가 안경을 은행에 두고 온 것이 생각나 은행으로 돌아가 안경을 찾고 보니, 이번에는 지갑을 슈퍼마켓 카트(손수레) 위에 놓고 온 적이 있다』고 했다.
 
  B는 『아들이 결혼기념일 선물로 디너 콘서트 입장권을 선물했는데, 공연장에 가서 보니 콘서트 입장권 대신 아이들 학교에서 보내 준 경매 입장권을 갖고 간 적이 있다』고 했다. 그는 집으로 전화해서 입장권 번호를 확인한 후 입장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건 그래도 다행이다. C는 여권을 가지고 오지 않아서 비행기를 못 탄 적이 일년에 두 번이나 있었다고 한숨짓는다.
 
  이렇듯 서로의 건망증 사건을 듣다 보니 위로가 됐다. 우리가 이럴 때 『정신이 없어서 깜빡했다』고 말하듯 서양 여자들도 이런 실수를 『정신이 나갔다(absence of mind)』고 표현한다.
 
  「정신이 없는 것」과 「건망증」과 「기억 상실」은 유사하지만 차이와 강도가 조금씩 다른 것 같다. 정신이 없는 것은 서두르다가 깜빡하는 실수이다. 건망증은 뇌의 기억 구조가 원활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기억상실은 이보다 더 심각한 대뇌 피질의 심각한 부실을 의미하는 것이 될 성싶다.
 
  사람들은 기억과 관련된 실수를 했을 때에는 「정신이 없었다」는 것으로 가볍게 믿고 싶어 한다.
 
  나이와 건망증은 사실 큰 상관이 없다고 한다. 내가 딸에게 하는 잔소리 중의 하나가 무심해서 잊고, 잃어버리고 하는 부주의에 관한 것이다. 아이들은 어른보다 소지품을 잃어버리고 다니는 경우가 더 많지만, 이것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사실 요즘은 뇌가 단순하고 편안하게 지내기 힘든 세상이다. 우리가 매일 접하고 보고 듣고 기억해야 정보의 양은 대단히 많다. 시시각각 듣고 보는 뉴스를 모두 기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뇌는 머릿골 속의 히포캠퍼스라는 융기에 살짝 들어왔던 정보를 뇌의 코텍스로 옮기기 전 스스로 기억에서 제외하는 결정을 내린다는 주장도 있다.
 
  부주의와 건망증으로 생겨나는 것이 분실물이다. 분실물을 보관하는 분실품센터를 예로 들면 사람들이 잊고, 잃는 것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알 수 있다.
 
 
 
 프랑스의 분실품센터
 
  프랑스는 나폴레옹의 지시로 200년 전 파리에 분실품局(국)을 만들었다. 고위 내무관료 출신이 초대 국장을 맡은 것으로 보아 상당한 위상을 가진 기관이었던 것 같다. 전설적인 경찰력을 자랑한 루이 루팽이 1893년 체제를 정비한 후, 분실품의 주인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분실품의 주인을 찾아주기 위해 노력한다.
 
  지난 봄 뉴욕에 사는 한 여인이 파리에서 다이아몬드 다섯 개가 든 주머니를 분실했다가 분실품局의 노력 끝에 분실물을 찾았다. 주머니 속에 의사의 명함이 있었는데 이것이 단서가 됐다. 그 여인은 본인이 직접 분실물을 찾아가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다시 파리로 건너가야 했지만, 『잃어버린 다이아몬드를 다시 보리라는 생각은 결코 못 했다』며 감격스러워했다.
 
  파리의 분실품은 계절과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한때 많이 들어오던 여자의 모자나 남자의 「커프스 링크」(소매 끝에 다는 액세서리) 등은 이제 보기 힘들다고 한다. 대신 요즘에는 10년 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휴대폰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고 한다. 하루 평균 40개의 휴대폰을 수거한다고 한다.
 
  파리 분실물센터의 분실물이 주인을 찾는 경우는 단지 25%에 불과하다. 쌓인 물건들은 석 달에 한 번씩 소각하거나 경매에 부쳐 처분한다. 휴대폰 같은 귀중품은 18개월간 보관해 둔다. 지금 현재 3400개의 휴대폰을 보관하고 있는데 시시각각 그중 하나가 울려 댄다고 한다.
 
  그 외에 특별한 가치가 있거나 별난 물건들도 보관한다. 그중에는 바이올린, 웨딩드레스, 구두, 의족, 장전된 권총, 의학도가 잃어버린 것으로 추정되는 다섯 개의 해골도 있다. 파리까지 들고 가서 잃어버린 사연이야 짐작할 수 없지만 뉴욕의 9·11 사태 때 월드트레이드센터에서 떨어져 나온 두 개의 콘크리트 덩어리도 있다고 한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분실물센터인 만큼 보관된 물품도 찬란한 역사를 자랑한다. 나폴레옹 시대의 騎兵刀(기병도)를 비롯해 영국 빅토리아 여왕 때의 망원경까지 소장하고 있다. 프랑스의 분실품局은 박물관을 방불한다는 자랑이다.
 
 
 
 레이건의 기억상실
 
  잃어버린 물건은 다시 찾을 수 있지만 잃어버린 기억은 돌아오기 쉽지 않다. 나이가 들면 치매가 아니라도 다소 차이는 있지만 기억력 감퇴를 당연하게 여긴다. 그래서인지 미국에도 「노인성 치매」를 소재로 한 유머들이 많다.
 
  레이건 前 대통령은 한 상원의원이 은퇴하는 자리에서 이런 유머를 소개했다.
 
  <老부부가 침실에 들기 전 아내가 남편에게 부탁한다.
 
  ─여보, 아이스크림이 꼭 먹고 싶은데 사 놓은 것이 없어요.
 
  『내가 사다 주리다』
 
  ─정말 고마워요. 바닐라 아이스크림에 초콜릿 소스를 뿌려 주세요. 그 위에 생크림도 올려 줘요. 잊지 않게 적어 가세요.
 
  『잊지 않을 거요. 바닐라 아이스크림에 초콜릿 소스, 그리고 생크림』
 
  ─맨 위에 체리도 올려놔 줘요. 잊지 않게 적으세요.
 
  『안 잊으리다. 바닐라 아이스크림에 초콜릿 소스, 그리고 생크림과 체리』
 
  사러 나갔던 남편이 돌아와 건네주는 봉투를 열어 보니 햄샌드위치가 들어 있었다. 아내는 한숨을 쉬며 말한다.
 
  ─여보, 내가 잊지 않게 꼭 적어 가라고 했죠. 당신 샌드위치에 겨자 소스 바르는 걸 잊었어요>
 
  그로부터 7년 후, 레이건 前 대통령은 치매를 앓기 시작했다. 레이건은 의사에게 『내게 세 가지 문제가 있다』며 자문을 구했다고 한다.
 
  『의사 양반, 첫째 문제는 내가 기억력을 잃어 가는 것이오. 그리고 나머지 두 가지는 생각이 안 나는군요. 잃은 물건은 어딘가에 존재하련만 잃은 기억은 어디로 사라지는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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