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기업인 연구] 개성상인 禹相琦 신도리코 창업자

『큰 회사보다는 좋은 회사를 만들겠다』

  • : 조남준  njch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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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헌의 三愛정신을 수치로 구체화한 것이 「3 대 3 대 3 대 1」의 원칙이다. 이익의 3은 사내에 留保하고, 3은 株主들에게 배당하며, 3은 이익을 내준 종업원 몫으로 돌린다. 1은 기업의 존재를 가능케 한 국가사회에 대한 공익사업을 위해 쓴다는 것이다』
아산공장에서 여직원들과 함께한 稼軒(가헌) 禹相琦 신도리코 회장.
1960년대 후반 11월의 어느 날, 청와대.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대통령 집무실에 모여 있었다. 朴대통령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총리! 내가 마침 갖고 싶은 물건이 하나 있는데…』
 
  『각하, 무슨 말씀입니까?』
 
  『복사기를 사 주시오』
 
  『복사기요?』
 
  金鶴烈(김학렬)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外製(외제) 복사기 한 대 값이 웬만한 집 한 채 값인 시절이었다. 게다가 「사 달라」는 대통령의 말이 무슨 뜻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몇 사람이 기계 한 대를 들여오고 있었다. 대통령이 말한 복사기였다. 新都交易(신도교역)에서 개발한 국산 복사기라고 했다. 복사기가 설치되는 동안 대통령은 신도교역 직원들에게 복사기의 개발과정 등을 물었다.
 
  朴대통령의 목소리에는 국산 복사기가 나왔다는 데 대한 뿌듯함이 묻어 있었다.
 
  이 자리에는 朴대통령과 金부총리 외에 金正濂(김정렴) 대통령 비서실장, 신도교역의 禹相琦(우상기) 사장 등이 함께 있었다.
 
  신도교역 禹사장은 「이 복사기가 행정 효율화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라는 朴대통령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네, 동사무소에서 수요가 가장 많은 주민등록 등·초본을 몇 초 만에 복사할 수 있으니, 手記(수기)로 하는 것에 비하면 엄청난 효율성이 있습니다』
 
  『아, 그래요? 그럼 시험 한번 해봅시다』
 
  마침 책상에 놓여 있던 그 날짜 석간을 복사기에 얹고 버튼을 눌렀다. 복사기는 신문과 똑같은 농도로 복사된 신문을 토해 냈다.
 
  『원본보다 더 깨끗하게 나오네』
 
  朴대통령은 감탄했는지 복사기의 버튼을 계속 눌렀다.
 
  『이거, 우리 국산품 맞습니까?』
 
  『네, 국산품입니다』
 
  『국산화율은 얼마나 됩니까?』
 
  『거의 80%입니다』
 
  『아, 그래요? 참으로 수고들 하셨습니다. 국산품을 이렇게 잘 만들어 주어서 고맙습니다』
 
  朴대통령은 복사된 신문을 金부총리에게 들어 보였다.
 
  『이것 보세요. 국산이 이렇게 잘 나오는데 왜 외제를 씁니까? 경제기획원 보고서 카피는 너무 검더라고. 복사기를 바꿔야겠습디다』
 
  金부총리는 그제야 대통령의 진의를 알아차렸다. 朴대통령은 예산권을 쥐고 있는 부총리에게 국산 복사기의 우수성을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다.
 
  朴대통령은 그해 11월 중순부터 열렸던 제1회 전자전시회에서 출품된 일본 도시바(東芝)의 복사기를 보았다. 朴대통령은 옆에 있던 李洛善(이낙선) 상공부 장관에게 『국산 복사기가 있으면 얼마나 좋겠나』하고 얘기했다. 그 말을 들은 李장관이 신도교역의 복사기를 朴대통령에게 선보이는 자리를 마련했다고 한다.
 
 
 
 『숫자의 뒷받침이 없는 보고는 의미 없다』
 
   국산 복사기를 처음 만든 稼軒(가헌) 禹相琦는 전형적인 개성상인이다.
 
  1919년 7월25일, 경기도 개성시 만월동에서 禹震淵(우진연)씨와 李元玉(이원옥) 여사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만월동은 개성을 동서남북 4개 구역으로 나누었을 때, 북부에 속하는 곳으로 부촌이었다.
 
  고려가 망한 뒤, 조선왕조에 복속하기를 싫어하던 선비계층 일부가 가장 천시당하던 상인으로 변신했다. 이들이 「개성상인」이다. 이들은 四介置簿法(사개치부법)이라는 선진 부기법, 松房(송방)이라는 전국적인 네트워크, 差人(차인)이란 일종의 전문경영인 제도를 만들어 냈다. 조선시대의 독특한 상업 형태인 褓負商(보부상)도 그 뿌리가 개성이다.
 
  稼軒은 개성 만월초등학교를 거쳐 개성 공립상업학교에 진학한다. 개성상업은 부산 두 곳과 인천에 이어 전국에서 네 번째로 설립된 5년제 공립상업학교다. 稼軒은 졸업 후, 개성 최대의 기업체였던 송고실업장에서 경리사원으로 잠시 일했다.
 
  그는 평생 수치관리에서 특별한 재능을 발휘했는데, 숫자에 대한 암기력이 대단하여 숫자를 한번 들으면 잊어버리지 않았다. 훗날 사업을 하면서 이러한 숫자감각으로 부하 직원들을 긴장시켰다.
 
  그는 『숫자(data)의 뒷받침이 없는 보고는 의미가 없다』고 했다. 『10% 향상되었다, 20% 하락했다 하는 식으로 구체적인 자료나 수치로 보고하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는 광복 직후, 서울에서 직물류 사업을 하다 6·25 전쟁과 함께 고향 개성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南行(남행)했다. 직물공장을 경영하던 그의 집안은 「반동적 자본가 계급」으로 간주됐다.
 
  부산 피란 시절과 환도 후 10년간, 화재로 全재산을 날리기도 하고 부도가 나 도피생활을 경험했다. 1950년대 말 처남이 근무하는 산업은행 조사부에 들렀다가 일본신문에 난 리코社의 복사기 광고를 우연히 보게 된다.
 
 
 
 1960년 「신도교역」 설립
 
   몇 해 전 재봉틀로 큰돈을 번 稼軒은 첨단기기인 복사기가 다시 행운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광고가 난 일본신문을 통째로 얻어서 산업은행을 나섰다. 稼軒은 무역업에서 제조업으로의 변신을 희망하고 있었다. 稼軒은 일본의 거래처인 마루이치(丸一)무역상사 趙小守(조소수) 사장에게 편지를 띄웠다.
 
  일본에서 답장이 왔다. 일본에서는 복사기 사업이 호황이라는 얘기와 함께 리코社 관계자를 만나게 해주겠다는 내용이었다.
 
  稼軒은 1960년 7월7일 자본금 5000만 환으로 新都交易을 설립한다. 新都는 새로운 사업터전인 서울을 新松都(신송도)라고 여긴 데서 나온 이름이다. 고향 개성에 대한 사랑과, 새로운 고향 서울의 한 시민으로서 새롭게 출발한다는 의지를 담은 것이다.
 
  사무실은 소공동 갱생빌딩 301호이었고, 전시장은 미우만(現 롯데 영플라자) 백화점 1층에 두었다.
 
  신도교역 출범 후 직원들은 복사기 카탈로그를 들고 행정관청과 기업체에 뛰어다니며 복사기의 존재를 알리는 데 주력했다. 문제는 가격이었다. 복사기 한 대 값이 서울의 웬만한 집 한 채 값이었으니 구매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 우리나라 인구는 약 2500만 명, 국민 총생산액은 2449억원, 1인당 GNP는 9900원이었다. 직원들이 쉬지 않고 사무실을 방문해 보지만 팔리는 것은 「가뭄에 콩 나기」였다. 稼軒은 리코 복사기의 가격을 낮추지 않고는 안정적인 영업을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나는 실패를 그냥 흘려 보내지 않았다』
 
   稼軒은 일본 리코社와의 직거래를 구상하게 되었다. 무역대행사인 마루이치(丸一) 측은 신도교역과 리코의 직거래에 기꺼이 다리가 돼 줄 것을 약속했다. 稼軒은 1962년 1월 일본行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1962년 1월의 어느 날, 稼軒은 도쿄 시내 긴자에 있는 리코 사장실에 앉아 있었다. 이 회사의 창업자이자 사장인 이치무라 기요시(市村淸)와의 첫만남이었다.
 
  얼굴이 약간 길쭉한 이치무라는 교장선생님 같은 면모였다. 나이는 稼軒보다 스무 살 가량 위였다. 그는 稼軒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해보라』고 했다. 稼軒은 일제시대에 고등교육을 받은 만큼 일본어를 불편 없이 구사할 수 있었다.
 
  『저는 오랫동안 무역업에 종사해 온 사람입니다. 마루이치를 통해 귀사의 복사기를 수입 판매해 오고 있으며, 이것을 통해 우리 한국에 새로운 복사기 문화를 꽃피게 하고 싶습니다』
 
  『이 사업을 성공시킬 수 있는 당신의 강점은 무엇이오?』
 
  이 물음에 대해 稼軒은 자신의 지난날을 솔직하게 설명했다.
 
  『저는 지금까지 여러 가지 사업을 해왔습니다만 성공보다는 실패를 더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실패의 경험을 통해 아주 사소한 문제가 실패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실패를 그냥 흘려보낸 게 아니라 그 실패를 다음 번 성공을 위한 교훈으로 삼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저의 강점이자 밑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밑천이 있는 한, 결코 두 번 다시 실패하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리코社에 도움이 되는 파트너가 될 것이라고 자신합니다』
 
  이치무라 기요시와 만난 지 나흘쯤 지나자, 리코사는 마루이치를 통해 연락을 해왔다. 신도교역과 한국총판 계약을 맺겠다는 취지였다. 리코 입장에서는 굉장한 모험을 한 것이고, 稼軒 입장에서는 행운을 잡은 것이었다.
 
  5·16 후 군인 행정가들에 의한 행정개혁은 문서 처리의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고, 이것은 사무기기 회사 신도교역의 성장을 견인하는 동력이 되었다. 공급이 주문을 따르지 못했다. 당시는 화폐개혁 직후였다. 대졸 초임이 1만원이었을 때, 16절지 한 장 복사를 하는 비용이 100원이었다.
 
 
 
 기술 독립의 길
 
  복사기가 잘 팔려 나가면서 稼軒의 고민은 깊어 갔다. 외국 물건을 수입해서 이익을 붙여 되파는 자신이 과연 사업가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稼軒이 우선 국산화를 시도한 것은 청사진용 感光紙(감광지)였다. 일반 감광지는 오래 전 국산화됐으나 청사진용 특수감광지는 국산품이 없었다. 복사기가 관수품으로 지정되고 호적 업무의 필수품으로 자리잡게 되면서 여기에 소요되는 감광지의 수요가 폭발했다.
 
  稼軒은 이때부터 청사진용 감광지 개발에 매달려 우여곡절 끝에 생산에 성공했다. 1964년 8월, 여름이 지날 무렵이었다.
 
  여기에 힘을 얻은 稼軒은 곧 이어 복사기 국산화에 나섰다. 목표로 삼은 복사기는 평면 복사기(「리카피 555」)였다. 이것은 일본의 리코社가 1960년에 개발·보급한, 당시로서는 첨단 기종이었다.
 
  모델이 되는 일제 복사기 한 대를 완전 분해해서 거기 들어가는 부속품을 만들거나 구해 가면서 하는 작업이었다. 일부 부품은 직접 만들기도 하고, 케이스 같은 것은 철판을 망치로 두들겨서 만들었다. 부속품 하나를 구하기 위해 청계천을 수없이 오갔다. 그래도 드럼 등 못 구하는 주요 부품은 어쩔 수 없이 리코社의 지원을 받았다.
 
  試製品(시제품) 하나 만드는 데 걸린 시간은 5개월이 넘었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복사기 1호 「리카피 555」다. 시제품의 국산화율은 80% 정도였으나 제품의 성능은 일제의 그것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았다.
 
  특수 감광지의 국산화에 뒤이은 복사기 국산화의 성공은 稼軒과 신도 직원들에게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1964년을 전후하여 이치무라는 기술자를 한국에 파견하여 稼軒을 돕도록 했다. 신도가 복사기를 국산화하면 리코社는 이윤이 많은 완제품을 팔 수 없는데도 신도를 도왔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치무라는 단순한 사업가라기보다 기업을 통해 자신의 심오한 철학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稼軒에게 다가왔다. 稼軒은 이치무라를 만나면서 많은 것을 배웠고 스스로 깨달았다.
 
  거기서 배태된 경영철학이 「三愛精神(삼애정신)」이다. 「나라를 사랑하고, 직장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소박하게 말하자면 『기업을 잘 운영해서 고용을 창출하고, 세금을 잘 내고, 쾌적한 환경을 만들어 줌으로써 종업원들이 직장을 사랑하도록 만드는 것이 곧 애국』이라는 것이었다.
 
  三愛정신을 수치로 구체화한 것이 「3 대 3 대 3 대 1의 원칙」이다. 이익의 3은 기업의 영속적인 발전을 위해 社內에 留保(유보)하고, 3은 자본을 투자한 株主들에게 배당하며, 3은 이익을 내준 종업원 몫으로 돌린다. 1은 기업의 존재를 가능케 한 국가사회에 대한 공익사업을 위해 쓴다는 것이다.
 
  1966년부터 4년 동안 신도교역의 매출은 연평균 증가율 185%라는 기록을 세웠다.
 
  신도교역이 리코와 합작을 검토하던 1969년의 한국경제는 성장기반의 구축과 도약단계 진입기에 해당한다. 바로 1967년부터 1971년 사이의 기간이다.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추진으로 농업을 제외한 모든 부문이 빠른 성장을 거듭하여 이 기간에 한국경제는 연평균 약 10%의 고도성장을 이룩한다. 특히 제조업은 수출의 비약적인 신장에 힘입어 연평균 22%씩 성장하여 경제성장, 산업구조 개선의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된다.
 
  리코社의 당시 사장 다테바야시 미키오는 사업동반자로서 稼軒의 경영능력과 신도의 미래가 무척 밝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稼軒은 1969년 8월31일 이사회를 소집하여 리코와의 합작 假계약을 공표하고, 신도와 리코의 상호를 결합한 「신도리코」라는 새로운 상호를 만들어 냈다.
 
 
 
 「신도리코」의 창설
 
   이어 그해 12월10일 일본 리코 본사에서 兩社(양사) 간 합작계약 조인서가 작성되었다. 투자비율 50대 50, 수권 자본금 12억원, 1차 증자 1억원과 기술지원 등의 내용이 담긴 것이다.
 
  해를 넘긴 1970년 3월16일에 신도리코는 경제기획원으로부터 합작인가를 취득하고 4월16일에는 서울 장충동 타워호텔에서 합작 주주총회를 열기에 이른다. 우리나라에서 사무기기의 본격 양산체제가 열린 것이다. 이 무렵의 상황을 稼軒은 메모로 남겼다.
 
  『50대 50의 출자였다. 나는 합작을 하는 조건으로 리코 측에 세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 경영은 한국 측이 직접 한다. 둘째, 원·부자재에 대한 직접구매 조달권은 한국이 갖는다. 셋째, 기술은 리코가 무상으로 제공한다』
 
  稼軒이 제시한 이러한 조건은 파격적인 것이었다.
 
  복사기 개량을 위한 작업은 끊이지 않아, 합작 전인 1969년 6월에는 국내 최초로 전자식 복사기(「BS-1」)를 생산하게 되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朴正熙 대통령에게 처음 소개된 복사기였다. 이 복사기는 날개 돋친 듯 팔려 신도의 경영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稼軒은 1971년 5월 서울 성동구 성수동 공장을 준공하고, 하왕십리에 있던 본사와 공장을 이 곳으로 이전했다. 성수동 시대가 열린 것이다.
 
  하왕십리 공장이 수공업적 단계의 공장이었다면 성수동 공장은 대량생산을 보장해주었다.
 
  稼軒은 사업을 키워 가면서 「무리한 사업확장으로 기왕의 사업기반을 위태롭게 하지 않는다. 종업원들에게 안정된 직장을 제공한다. 기업의 열매를 3 대 3 대 3 대 1 의 배분원칙에 따라 이 사회에 되돌린다」는 원칙을 지켰다.
 
  이런 다짐에 따라 稼軒은 1973년 5월 「신도리코 장학회」를 설립했다. 장학회는 신도사무기판매가 1000만원, 신도리코 2000만원, 稼軒의 부인 崔順英(최순영)씨가 500만원을 출연하여 총 3500만원으로 출발했다.
 
  1984년 5월에는 자신이 보유한 주식과 신도리코 주식을 출연한 2억1000만원으로 「가헌과학기술재단」을 설립했고, 稼軒 부부의 결혼 50주년이 되는 1994년 6월에는 5억원의 기금으로 사회복지법인 「相英(상영)재단」을 설립했다.
 
  1999년에는 「육영재단」을 설립하여 低소득층과 생활보호자를 대상으로 의료비와 생활비를 지원하거나 급식사업, 복지시설 지원 등의 각종 사회사업을 펼치고 있다.
 
  복사기 기술연구에 대한 稼軒의 열망은 1982년 7월 기술연구소 설립으로 구체화됐다. 세계와 경쟁할 수 있는 연구개발 여건이 마련된 것이다.
 
  미국의 「제록스」, 일본의 「캐논」 같은 세계적 거대기업이 토종업체에 밀린 유일한 나라가 신도리코가 버티고 있는 한국이다. 不敗(불패)의 신화를 자랑하는 삼성도 1990년대 초, 복사기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신도리코의 벽을 넘지 못했다.
 
  신도리코는 기술연구소를 개설할 당시 100여 명의 연구인력을 확보했다. 신도리코의 전체 사원 수가 500명이 안 될 때였다. 기술자들은 일본 리코에 매년 연수를 다녀오며 하나둘 기술을 축적했다.
 
 
 
 제록스와 캐논을 물리친 신도리코
 
  1991년에 나온 국내 최초의 자체설계 복사기(「FT-1000 Ser」)는 신도리코 창업 때부터 계속된 복사기 완제품 개발이란 稼軒의 숙원에 종지부를 찍었다. 신도리코는 IMF 외환위기로 기업투자가 극히 위축된 1998년에도 356억원의 순이익을 올렸고, 경쟁사들이 주춤하는 사이 시장점유율도 더 늘렸다.
 
  신도리코가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은 한 우물파기, 無차입 경영이라는 경영의 원칙을 지켜 왔기 때문이다. 『큰 회사보다는 좋은 회사를 만들겠다』는 稼軒의 집념으로 신도리코는 외환위기 가운데도 적자를 내지 않았다.
 
  2000년 신도리코는 국내 시장점유율 50%를 넘겼다. 그해 1월에는 아산공장 증축공사가 착공되어 디지털 네트워크의 비전을 착실하게 실행해 나갈 수 있게 되었고, 11월에는 세계 프린터 시장 점유율 2위를 달리고 있는 미국 렉스마크(Lexmark)社와 레이저 프린터 「블랙풋」의 3억 달러어치 수출계약을 체결했다. 본격적인 프린터 시장 진출의 시작이었다.
 
  신도리코는 2003년 2억3000만 달러의 수출에 이어 2004년 3억9000만 달러 수출 성과를 거뒀다. 禹相琦 회장은 2002년 3월 임파선 암으로 작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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