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관광부는 조선 중기의 文臣인 申欽(신흠·1566~1628)을 이달(2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했다. 申欽은 張維(장유), 李廷龜(이정구), 李植(이식)과 더불어 조선 중기 漢文四大家로 불릴 정도로 뛰어난 학문과 문장력을 소유했으며, 당시 각종 외교ㆍ의례문서의 제작과 詩文의 정리에 큰 공헌을 했다.
申欽은 당시 시대상을 반영한 120수가 넘는 장편詩, 2000여 수의 漢詩, 수많은 한글 시조를 남겨 국문학사에도 빠뜨릴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그의 漢詩는 절구, 율시를 비롯 賦(부), 辭(사), 樂府(악부)에 이르기까지 폭넓고 다양하여 古文(漢學) 부흥에 앞장선 그의 면모를 잘 보여 준다.
申欽의 본관은 平山, 호는 玄軒(현헌), 象村(상촌), 玄翁(현옹), 放翁(방옹)이다. 그는 일곱 살에 부모를 잃고 외조부인 宋麟壽(송인수) 손에 자라면서 폭넓은 독서와 思惟(사유)를 했다.
1585년 진사시와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급제했다. 이후 그는 1613년 永昌大君(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려고 반역을 도모했다는 구실로 大北派(대북파)가 小北派(소북파)를 제거한 「癸丑獄事(계축옥사)」에 연루되어 파직당할 때까지 매우 바쁜 관직생활을 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그는 三道巡邊使(삼도순변사) 申砬(신립)을 따라 鳥嶺(조령)전투에 참가했으며, 都體察使(도체찰사) 鄭澈(정철)의 종사관으로도 활약했다. 1593년 이조좌랑직을 맡으면서 對明 외교문서의 작성에 관여했고, 곧 이조정랑, 사복시첨정으로 승진했다.
1599년 申欽은 장남 翊聖(익성)이 선조의 딸 貞淑翁主(정숙옹주)의 부마로 간택되자 동부승지로 발탁됐다. 같은 해 형조·이조·예조·병조 참의와 대사간을 역임했다. 1601년 春秋諸氏傳(춘추제씨전)을 합찬한 功으로 가선대부에 오르고, 이어 예문관제학, 예조참판, 병조참판, 홍문관 부제학, 성균관대사성, 도승지 등을 차례로 역임했다.
申欽은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파직을 당한 후 춘천으로 유배되었다가 1621년 사면됐다. 1623년 仁祖 즉위와 함께 申欽은 다시 예문관·홍문관 대제학에 중용되었고, 같은 해 우의정에 올랐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좌의정으로 세자를 수행하여 전주로 피란을 갔으며, 같은 해 9월 영의정에 올랐다 별세했다.
申欽은 주자학의 空理空論(공리공론)的 측면을 비판하고 학문의 진실성과 실천성을 강조한 인물이었다. 그의 시문집인 「象村集(상촌집)」은 국정·민정 전반에 관한 다양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 조선 중기의 정치·외교·군사·사상·문학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쓰이고 있다. 사후에 文貞(문정)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