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담 후세인은 한 농가의 채소 보관용 지하실 벽에 구멍을 뚫고 거기에 웅크린 채 잠을 자고 있었다. 후세인은 20~30개의 비슷한 은신처를 돌아다니면서 미군의 추적을 피했다
● 후세인은 권총을 갖고 있었지만, 자살하지도 저항하지도 않았다.
● 사담 후세인 戰犯 재판은 金正日 정권의 앞날을 예고하는 역사적 현장이 된다
● 후세인은 권총을 갖고 있었지만, 자살하지도 저항하지도 않았다.
● 사담 후세인 戰犯 재판은 金正日 정권의 앞날을 예고하는 역사적 현장이 된다
미국의 CNN방송은 즉각 긴급뉴스로 이 사실을 알렸다.
한국 시각으로 12월14일 오후 7시쯤 시작된 CNN의 긴급뉴스는 연합군이 공식 기자회견을 할 때까지 두 시간 동안 사담 후세인 체포를 미국 국방부로부터 공식 확인하지 못했다. CNN은 『사담 후세인을 포함하는 이라크 전직 관료 일행이 체포됐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는 線(선)을 유지했다.
CNN은 바그다드 하늘을 향해 쏟아져 나가는 총성의 의미를 確定(확정)하지 못했다. 바그다드에서는 입소문이 언론 보도보다 빨랐다. 바그다드 특파원은 애매하게 얘기했다.
<연합군 당국이 총기를 모두 압수하고 있지만, 상당수 바그다드 사람들이 개인 화기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총성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적대적인 사격인지, 축하하는 사격인지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제 등 뒤로 총성이 들립니다>
『사담이 잡혔다』는 뉴스는 미국의 동맹국 쪽에서 하나씩 흘러나왔다. <이라크 과도 통치위원회의 한 관계자가 『후세인이 티크리트에서 잡혔다』고 말했다>(AP통신)
<브레머 군정장관(미국인)이 이라크 과도통치위원들에게 후세인 체포 사실을 알렸다>(AP)
스페인을 방문 중인 찰라비 이라크 과도통치위원은 『사담이 잡혔다』고 말했다(로이터 통신). 영국의 외교 소식통들도 사담 체포사실을 확인했다(로이터).
CNN은 마지막 순간까지 신중했다.
『진짜 사담 후세인이 체포됐더라도, 얼굴을 성형했을 가능성이 높아 DNA 검사로 본인을 확인하는 데 며칠이 걸릴 수 있다』는 해설까지 나왔다.
12월14일 오후 3시20분쯤(한국 시간 오후 9시20분)에 시작된 연합군의 첫 공식회견에는 세계의 눈이 쏠렸다.
폴 브레머 軍政(군정)장관은 짤막한 한 마디 말로 모든 걸 설명했다.
『우리가 그를 잡았다』
브레머는 『독재자는 이제 죄수가 됐다』, 『새로운 민주 이라크를 함께 건설하자』고 선언했다.
8개월 동안 미국의 추적을 피해다니던 후세인의 체포가 최종 확인된 순간이었다. 기자회견장에 나와 있던 이라크 언론인들이 벌떡 일어나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몇몇 기자들은 『사담을 죽여라』고 외쳤다. 방송을 보던 바그다드 시민들은 일제히 거리로 뛰쳐나가, 反후세인 깃발을 흔들고, 공중을 향해 총을 쏘아댔다. 거리에 나온 이라크人들은 『우리는 독재자를 제거했다』, 『결혼 기념 파티 때처럼 즐겁다』고 외쳤다. 한 이라크人은 『사담도, 학살된 사람들의 공동묘지도, 테러도 없는 세상을 원한다』고 기뻐했다.
이라크 주둔 미군사령관인 산체스 중장이 체포된 직후의 사담 후세인 모습을 비디오로 보여주자, 기자회견장은 다시 이라크 기자들의 환호성으로 뒤덮였다. 브레머 군정장관은 손을 흔들어 이라크 기자들에게 진정해 줄 것을 요청했다.
브레머 군정장관과 연합군 측의 브리핑, 外信(외신)을 종합하면 후세인 체포는 총알 한 방 쏘지 않은 「無血(무혈) 작전」이었다. 후세인은 권총을 갖고 있었지만, 자살하거나 체포에 저항하지 않았다. AK 47 소총을 갖고 있던 두 명의 다른 이라크 인들은 달아나다가 잡혔다. 체포작전을 지휘한 美 4사단의 레이먼드 오디르노 소장은 『후세인은 「거미 구멍」에 쥐새끼처럼 숨어 있다가 잡혔다』고 말했다. 「거미 구멍」은 저격병이나 특수부대 요원들이 몸을 오랫동안 숨기는 지하 은신처를 지칭하는 미군의 군사 용어다.
「붉은 黎明(여명)」이라고 명명된 후세인 체포작전에는 美 제4사단 1여단 병력 600명과 이들을 지원하는 기병·항공·정찰 병력이 동원됐다. 수색 작전을 주도한 것은 「121」 특수부대. 특수부대원과 CIA 요원으로 편성된 이 부대는 지난 8개월 동안 후세인과 주요 측근들만을 추적해 왔다.
후세인이 은신한 곳은 그의 고향 티크리트에서 15km쯤 남쪽으로 떨어진 「아드와르」의 한 농가였다. 티크리트 江을 사이에 두고 티크리트와 마주 보고 있는 지역이다. 미군 측은 체포작전이 시작되기 11시간 전쯤 후세인이 숨어 있는 지점에 대해 결정적 정보를 입수했다. 美 4사단장 오디르노 장군은 『사담 후세인과 혈연으로 얽힌 사람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후세인에 대한 정보가 조금씩 흘러나왔다』며 『지난 10일 동안 이들 가운데 5명에서 10명까지의 사람을 집중 심문했다』고 말했다.
이들의 진술을 토대로 후세인의 動線(동선)을 좁혀 가던 미군은 후세인의 血族(혈족) 중 한 명으로부터 후세인의 구체적인 은신처를 제보받았다. 오디르노 장군은 『사담 후세인은 (아드와르 인근에) 스무 개에서 삼십 개의 안전 가옥을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며 『체포된 마지막 은신처에 후세인이 오랫동안 머물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오디르노 장군은 『사담이 발견된 장소를 보면 여러분이 알겠지만, 후세인은 수백, 수천 개의 비슷한 은신처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라며 『「사담이 지금 어디쯤 있다」는 정보가 중요했고, 우리는 그 정보를 제때에 입수했다』고 밝혔다.
「붉은 黎明」 작전은 12월13일 오후 6시(이라크 현지 시각)쯤 시작됐다. 「사담 후세인을 죽이든 체포하든 끌고오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미군은 두 개의 목표물을 향해 출발했다. 오후 8시30분쯤 후세인의 신병은 미군의 손 안에 들어왔다.
티크리트의 기지를 출발한 美 4사단 병력 600명과 규모가 확인되지 않는 「121」 특수전 팀이 오후 8시쯤, 후세인이 숨어 있는 것으로 지목된 농가 두 채를 포위했다. 전에도 미군은 아드와르 인근에서 10여 차례에 걸쳐 결정적인 목표물을 포위해 수색작전을 폈지만, 허탕을 쳤다. 12월13일 미군은 다시 두 개의 결정적인 목표물에 대한 정보를 확보한 것이다. 미군들은 후세인의 혈족들이 지목한 두 채의 농가를 수색했지만, 또 허탕을 쳤다. 美 4사단 1여단 지휘관인 힉키 대령은 2km2의 지역을 봉쇄하고, 이 지역을 샅샅이 수색하라고 지시했다. 미군은 곧바로 방이 두 개 있는 흙 벽돌 집을 하나 발견했다.
방의 하나는 침실이었고, 하나는 부엌이었다. 이 농가는 여러 모로 美軍의 눈길을 끌었다. 침실에서는 상표도 뜯지 않은 티셔츠와 양말 등이 발견됐다. 게다가 오렌지 색과 흰색의 택시 두 대가 이 농가 축사 근처에 세워져 있었다. 농가는 티크리트 강변에 있었는데 강가에 후세인에게 물품을 공급해 주는 데 쓰인 것으로 보이는 작은 배가 몇 척 정박해 있었다. 4사단장 오디르노 장군은 「후세인이 적어도 한 시간 전까지 농가에 머물렀다」고 판단을 내렸다. 1여단 병사들이 농가 주변을 봉쇄하고, 121 특수부대가 수색에 나섰다.
수색을 시작하자, 농가 안에서 자고 있던 두 명의 이라크인들이 달아났다. 미군은 이들을 곧 체포했다.
후세인이 숨어 있던 「거미 집」은 이 농가의 지하에 있었다. 농가 근처에서 미군 병사들은 스티로폼과 흙으로 가려진 지하실의 출입구를 발견했다. 은신처는 지하 2m쯤 깊이에 있었고,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좁은 흙구멍이었다.
구멍 입구에는 플라스틱으로 된 덮개가 설치됐고, 천으로 덮개를 가렸다. 그 위에 블록과 짚더미 같은 것으로 다시 은폐했다. 미군 요원들이 덮개를 열어젖혔을 때, 후세인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후세인은 칼과 권총, 100달러짜리로 75만 달러가 든 가방을 가지고 있었다. 사담은 자신의 신분을 밝히곤 입을 닫았다. 오디르노 장군은 『숨어 있던 공간이 너무 좁아, 후세인은 반격할 수 없었다. 사담은 자신을 찾으려는 미군의 압박이 점점 강화되자, 많은 보디가드들을 데리고 다닐 수 없게 됐다. 사담의 옆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고 말했다.
후세인이 은신해 있던 구멍에는 환풍기와 환기용 파이프가 설치돼 신선한 공기를 공급했다. 미군들은 좁은 흙 구멍에 누워 있는 후세인을 끌어내기 위해 삽을 사용했다. 후세인이 숨어 있던 지하실은 농민들이 야채 저장용으로 파놓은 것이었다. 사담 후세인은 아무런 저항 없이 체포에 응했다. 지하 은신처에는 두 정의 AK47 소총과 권총 등이 있었다.
사담에게는 2500만 달러(한화 300억원)의 현상금이 걸려 있었다.
기자회견에서 산체스 중장은 『후세인이 은신처에서 무얼 하고 있었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숨어 있었다』는 조크로 대답했다.
후세인은 체포 당시 텁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상태였고, 오랜 도피생활로 지친 모습이었다. 후세인은 오후 9시15분쯤 헬리콥터 편으로 미군의 안전지역으로 호송됐다.
일부 언론은 『후세인이 바그다드 공항에 있는 미군기지로 옮겨져 조사를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곳에서 후세인은 신체검사를 받았다. 후세인은 아무런 부상을 입지 않았고, 건강상태가 좋은 것으로 확인됐다. 의사 앞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구강 검사를 받는 사담 후세인의 모습은 늙고 지친 노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미군은 후세인 아래에서 일했던 이라크 과도 통치위원회 위원 4~5명을 불러, 체포된 사람이 사담 후세인인지를 확인했다.
DNA검사를 위한 혈액채취가 있었다. 하지만 DNA 검사 판독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그가 진짜 사담 후세인임이 과도통치위원회 위원들에 의해 일찌감치 확인했다.
사담 후세인을 확인한 시아파 무슬림 정당의 압델 마흐디는 『(사담 후세인이) 전혀 뉘우침이 없고, 반항적이었다』고 했다. 압델 마흐디가 『당신이 지금 길거리에 나가면 기뻐서 춤추는 사람들을 보게 될 것이다』고 말하자, 후세인은 『그들은 어리석은 군중일 뿐이야』라고 대답했다. 압델 마흐디가 집단 학살당한 사람들의 무덤을 얘기하자, 후세인은 『그놈들은 다 도둑놈들이야』라고 대답했다.
한 과도통치위원회 위원은 『사담은 전혀 미안해 하는 기색이 없었고, 냉소적이었고, 이라크 인민들을 비웃고 있었다』고 전했다.
신원 확인이 끝난 후 후세인을 30분간 면담한 산체스 중장은 『그는 피곤하고, 운명에 체념한 듯했다』고 말했다. 이 무렵 후세인은 말이 많아졌고, 미군 심문에 협조적인 「罪囚(죄수)」로 변해 있었다.
CNN은 12월13일 밤(이라크 현지 시각) 후세인 은신처와 주변에 대한 추가 수색을 마치고 자정 가까이에 티크리트의 기지로 돌아온 미군 병사들을 화면에 담았다. 병사들은 두 대의 브래들리 장갑차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고, 서로 등을 두드리며 기쁨을 나눴다. CNN의 비디오 화면은 병사들이 터뜨리는 카메라 플래시 불빛으로 가끔씩 번쩍였다.
티크리트의 미군 당국은 작전에 참여했던 병사들에게 철저한 보안을 지시했고, 『무슨 좋은 일이 있었느냐』는 CNN의 사실 확인 요청에 『아무 것도 확인할 입장에 있지 않다』는 대답을 되풀이했다.
사담 후세인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는 2003년 3월20일 미군이 사담 후세인과 이라크 지도부에 대해 「목베기 공습」을 시작할 때부터 미스터리였다. 이라크 방송들이 사담 후세인의 비디오 테이프를 공개한 지 3일 뒤인 4월7일 미군은 후세인 은닉처로 추정되는 바그다드 맨수르 지역에 미사일을 퍼부었다.
사담 후세인의 목을 베기 위한 두 차례의 공습은 모두 실패했다.
후세인은 미군이 바그다드를 함락시킨 2003년 4월9일 무렵 이라크 지도부와 함께 완전히 자취를 감춘 뒤 아드와르의 농가에서 체포될 때까지 8개월간 도피생활을 했다. 후세인은 미군이 바그다드를 장악한 후인 4월17일 베레모와 군복을 착용한 채 바그다드 도심에 나타났고, 아들 우다이와 쿠사이가 미군에 사살된 후 아랍어 방송에 육성 녹음 테이프를 보냈다.
후세인은 「聖戰과 저항」을 끊임없이 촉구했다. 그의 마지막 육성 녹음 테이프는 2003년 11월16일 공개됐다. 미군은 2003년 5월의 終戰 선언 이후 계속되고 있는, 폭탄 테러의 배후로 사담 후세인을 지목해 왔다.
후세인의 체포는 이라크內 저항세력의 사기에 결정적인 타격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이라크인들은 밤마다 찾아오던 후세인의 악령에서 벗어났다. 프랑스 파리에 머물고 있는 호시야르 제바리 이라크 외무장관은 『사담은 다른 독재자들이 그랬듯이 겁쟁이에 불과했다』며 『사담이 다시 돌아올까 두려움에 떨었던 사담 지지자들의 저항이 현저하게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부시 대통령의 再選(재선) 가도에는 녹색 불이 켜졌다. 하지만 中東 문제 전문가들은 두 가지를 걱정하고 있다.
최근 바그다드와 이라크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反美」, 「反연합군」 정서는 후세인의 생존과 큰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전기와 수도, 원유 파이프 라인이 복구돼 이라크인들의 생활이 안정되지 않는 한, 反美 정서는 여전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또한 이라크에서 활동 중인 테러리스트, 무정부주의자,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후세인과 정서적 연계가 희박하다고 한다. 후세인 추종자들의 적극적인 지원이 줄어들면, 이들의 활동은 자연히 위축된다. 하지만 후세인의 체포와 관계없이 이들 극렬 「지하드(聖戰)」 戰士들의 테러행위는 당분간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사담 후세인 체포 이후 남은 문제는 사담에 대한 재판과 처벌이다.
가능성은 세 가지다. 하나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의 테러리스트들처럼 혹은 파나마의 노리에가 대통령처럼 후세인을 미국에 끌고 가서 미국의 법정에 세우는 것이다.
이라크 기자들이 『이라크에서 사형제도가 폐지됐는데, 사담을 극형에 처할 수도 있느냐』고 묻자, 브레머 군정장관은 『이라크 사람들이 사담 후세인에게 처벌(처형)당했듯이, 사담 후세인도 재판받기를 원한다』고 밝혔다. CNN은 『미국은 사담을 재판정에 세우고, 사형시킬 수 있는 의지를 밝혔다』고 보도했다.
둘째는 국제 戰犯(전범) 재판소를 여는 방법도 있다. 세 번째로 이라크 과도통치위원회가 마련한 특별 법정에 사담을 戰犯 혹은 反인륜적 범죄행위자로 세우는 방법이 있다. 지금으로선 이라크인들에게 후세인 처리를 맡길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분석된다.
기자들은 연합군의 첫 공식 기자회견에서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질문했다. 미국은 확정적인 처리방안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을 취했다.
―후세인의 신병을 이라크 경찰이나 이라크 국민들에게 넘길 계획인가.
(산체스 중장)『아직은 말할 수 없다. 그건 앞으로 진행될 문제다. 후세인과 후세인 정권은 재판을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언제 어떻게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후세인의 건강이 좋지 않으면 재판을 연기할 것인가.
『후세인을 언제 정의의 심판대에 세울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논의해 봐야 한다』
―후세인을 이라크의 특수법정에 세울 것인가.
『아직은 진행 중이라 어떤 말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아드난 파차치 이라크 과도통치위원은 수십만 명의 양민을 학살한 후세인을 이라크의 법정에서, 이라크 사람들의 손으로 처리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우리는 내년(2004년) 6월 독자적이고 독립적인 정부를 세우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우리는 총선을 실시할 것이며, 헌법을 제정해 승인을 받을 것이다. 완전히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이라크 정부가 탄생할 것이다. 특별한 법정이 구성돼 反인륜적인 범죄를 처벌할 것이다』
이라크 과도통치위원회의 중요 지도자인 아마드 찰라비는 『사담이 이라크에서 재판받아야 한다』는 의견을 보였다.
『이라크인들이 사담의 죄상을 알 수 있도록 공개적인 재판이 이뤄져야 한다. 사담은 이 범죄행위에 대해 죄값을 치를 것이다』
이라크 과도통치위원회는 2003년 12월11일 사담 후세인 정부의 大학살과 인권탄압을 다루기 위한 특별 법정을 설치했다. 이 법정은 1968년 7월 사담의 바트黨이 집권한 이후부터,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에서 적대적인 분쟁의 종식을 선언한 2003년 5월1일까지의 범죄를 다루게 된다. 사담 후세인은 1979년 대통령이 되었지만, 1970년대 초반부터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1980년대의 쿠르드族 학살, 1991년 걸프戰 직후에 자행된 시아파와 쿠르드族 탄압도 특별 법정이 다뤄야 할 사안이다. 연합군은 현재 5500명의 사담 후세인 정권 부역자들을 억류하고 있다. 이라크 과도통치위원회는 이들의 증언과 함께 사담 정권에서 입수한 비밀 서류, 270개의 공동묘지에서 발견한 학살 희생자 30여만 명을 후세인 처벌의 증거로 확보했다.
사담 후세인에 대한 戰犯 재판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실시된 뉘른베르크·東京 전범 재판을 잇는 역사적인 사건이다. 사담 후세인보다 더 오랫동안 더 혹독하게 주민 학살과 인권유린 범죄를 저지른 「惡의 축」 金正日은 앞으로 가슴 서늘한 날들을 보내야 할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