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 문신이자 死六臣의 한 사람인 梅竹軒(매죽헌) 成三問(성삼문ㆍ1418~ 1456)이 이달의 문화인물에 선정됐다.
成三問은 集賢殿(집현전) 학사로 있으면서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에 공헌한 학자이자, 君臣 간의 의리를 위해 목숨을 버림으로써 朝鮮朝(조선조) 忠臣의 典型(전형)을 세운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成三問은 1418년(태종 18년) 충청도 홍주군(現 충남 홍성군)에서 태어났다. 18세 때인 1435년(세종 17년) 生員試에 합격한 成三問은 이어 1438년에는 式年文科에 급제하였고,1447년에는 문과 重試에서 장원을 차지했다.
式年文科에 급제한 후 成三問은 당시 학문 연구기관이던 集賢殿의 학사로 발탁되었다. 1442년에는 왕명에 의해 같은 集賢殿 학사들인 朴彭年(박팽년), 申叔舟(신숙주), 河緯地(하위지) 등과 함께 삼각산 津寬寺(진관사)에 들어가 賜暇讀書(사가독서: 젊은 학자에게 휴가를 주어 공부하게 한 것)를 하면서 학문 연마에 힘을 쏟았다.
1443년(세종 25년) 한글이 창제되자 成三問은 申叔舟, 崔恒(최항), 朴彭年, 姜希顔(강희안) 등과 더불어 「훈민정음(1446년)」을 간행하는 데 참여했다. 그는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음운서인 東國正韻(동국정운ㆍ1448년)의 편찬, 중국 음운서인 洪武正韻(홍무정운ㆍ1455년)의 번역 사업에 참여하였으며, 음운 연구를 위하여 수차례에 걸쳐 중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오늘날 東國正韻과 洪武正韻은 초기 훈민정음과 한글 자형의 변천 연구뿐 아니라 중국의 음운사 연구에 있어서도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1453년(단종 원년) 수양대군(뒷날 세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당시 재상이던 金宗瑞(김종서), 皇甫仁(황보인) 등을 제거하고 결국 왕위까지 찬탈하자(1455년), 成三問(당시 동부승지)은 朴彭年, 河緯地, 柳誠源(유성원), 兪應孚(유응부), 李塏(이개) 등과 더불어 세조를 제거하고 上王인 단종을 복위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들의 단종 복위 계획은 사전에 누설되어 成三問은 거사에 참여한 이들과 함께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1456년 사형을 당했다.
成三問은 1691년(숙종 17년) 伸寃(신원)이 되었고 死六臣墓가 있는 노량진 愍節書院(민절서원)에 六臣과 함께 祭享(제향)되었다. 1758년(영조 34년)에는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忠文(충문)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문집으로 成謹甫集(성근보집)이 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