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피아노를 네 살 때부터 치기 시작했는데, 콩쿠르에서 몇 번의 입상을 한 덕분으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던 중 서울 예원중학교에 입학했는데 학교의 특성도 있고 대구에서 자란 나는 문화적 차이로 많은 갈등을 겪었다. 친구들은 물론, 선생님들의 관심과 사랑은 받지 못했다.
학교 적응이 힘든 만큼 성적도 많이 떨어져, 어느 선생님에게 과외를 받았지만 성적이 좀체 향상되지 않았다. 그러자 그 과외 선생님이 『하나를 제대로 하면 모든 것을 제대로 할 수 있는데, 공부를 이렇게 못하는데, 피아노는 제대로 치냐』하고 말했다. 그 말에 상처를 받은 나는 오기가 생겼다.
그후 미국의 월넛힐고교로 유학을 간 나는 매주 토요일 뉴잉글랜드음악원 예비학교에서 음악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변화경 선생님을 만나면서 달라졌다. 변선생님은 홀로 유학을 온 내게 어머니와 같이 각별히 신경을 써주었다. 크리스마스나 생일 때면 좋은 글이 담긴 편지로 늘 격려를 해주셨는데 그 표현 하나하나가 고되고 외로운 유학생활에 큰 힘이 되었다. 유학 생활도 어느덧 1년쯤 된 어느 날이었다. 「차이코프스키 협주곡」을 연습하는데, 악보도 잘 못 보고 연습에 진척도 보이지 않는 나에게 변선생님이 말했다.
『미국에까지 와서 공부하는데,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정도는 입상해야 되지 않겠니?』
이 말은 내가 올라야 할 하나의 큰 산이었다. 당시 웃음으로 넘긴 이 말이 나중에 내게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선생님들의 가르침과 사랑으로 나의 공부와 피아노 실력은 놀라운 발전을 가져왔고, 메릴랜드 국제 콩쿠르에서 1위에 입상하는 등 성공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1993년, 클라이반 국제 콩쿠르에서 처음 실패를 맛본 뒤 나는 극심한 좌절을 겪었다. 심지어는 피아니스트의 길을 포기하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때 선생님은 나에게 용기를 주시며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 나가도록 적극 도와주셨다. 결국 나는 한국 국적으로는 처음으로 상위에 입상하는 기록을 남겼다. 그때의 감회는 아직도 새롭기만 하다.
언젠가 변화경 선생님이 『네가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다』고 하신 적이 있다.
학생을 볼 때 「장래 어떻게 될 것이다」 하는 말들이 빗나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눈에 띄지도 않던 아이가 두각을 나타내는 경우가 있고, 반면 장래가 희망적으로 보였던 아이가 평범하게 지내거나 그보다 못한 경우도 있다. 학생들에게는 선생님의 세심한 배려와 관심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학생들에게 상상력과 꿈을 키워주어야 한다. 오만은 바로잡아주어야 하지만, 특히 내성적인 학생들에게 격려와 용기를 아끼지 않아 그들이 상상력과 창의력, 꿈과 희망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학생에게 건네는 자그마한 배려의 한마디가, 혹은 관심이 성공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任雄均 (임웅균·한국예술종합대 교수, 성악가)
『너는 타고난 성악가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일이다. 다함께 노래를 부르는 시간에 선생님께서는 「점점 세게」라는 음악 용어를 설명해 주셨는데, 나는 점점 세게 하라고 하시길래 점점 더 큰 목소리로 노래를 했다. 워낙 성량이 풍부한데다, 세게라고 하니까 힘을 줘서 목소리가 튀었는지, 선생님은 『너 이리 나와, 노래도 못하면서』 하시더니 뺨을 연달아 두 번 때리며 막 화를 내셨다.
그 이후로 나는 노래는 하지 않았다.
성악가보다 더 뛰어난 노래 실력을 가진 어머니를 닮아 나도 노래를 잘할 거란 생각이 있었고, 무엇보다 어린이 합창단의 유니폼이 멋있어서 합창단원이 되고 싶었던 내 꿈은 산산조각 난 거다. 충격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서울 성수중학교 1학년 때 음악 선생님은 기악과를 전공하셨다. 그때 미국 민요를 배우고 바로 실기 시험을 봤는데 59점을 받았다(같은 음악인이라도 실제로 기악과 출신은 성악에 대한 문외한일 경우가 있다).
「음 역시 난 노래에는 자질이 없구나」 하는 생각에 다시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음악 시간도 너무너무 싫었다.
하지만 내 인생의 전환기는 찾아왔다. 2학년 때 새로운 음악 선생님이 오셨다. 이송매 선생님. 그분이 와서 처음 음악 시험을 치는데, 실기 시험으로 내준 노래는 「내고향으로 날 보내주」였다.
이미 음악에 대해서 포기한 나로서는 거칠게 막 불렀다. 1절을 부르고 나자 선생님은 『너 任雄均이야? 몇 번이지?』 하며 일일이 물어 적어 가셨다. 그 다음 음악시간에 들어온 이송매 선생님은 나를 보고 노래를 불러보라고 했다. 노래를 잘 못한다고 하니까 일단 불러보라며 『너 노래 잘해』 하시는 것이었다. 내가 노래를 다하고 나자 급우들 보고 『박수박수』 하시더니, 『너는 타고난 성악가다. 너 같은 놈이 노래해야지, 누가 하냐?』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때 내 음악 실기 점수는 98점이라는, 거의 만점을 받았다. 그후 이송매 선생님은 1년 내내 나에게 노래시키는 재미로 음악시간을 보내실 정도였고, 칭찬 또한 아끼지 않았다. 그 덕분에 나는 고등학교 진학을 해서도 음악에 대한 호감을 잃지 않았다.
선생님의 그 한마디는 단순히 음악에 대한 자신감을 심어준 데 끝나지 않았다. 내 인생을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된 것이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 나는 전교 회장으로 정치에 생각을 두고 陸士(육사)로 진학할 예정이었다. 그렇지만 나의 성격을 너무나 잘 아는 어머니는 정치보다는 성악을 할 것을 강하게 추천하셨고, 나도 순순히 따랐다. 『너는 타고난 성악가다』하는 이송매 선생님의 말씀이 귓가에 생생했기 때문이다. 나는 5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연습하고도 연세대 음대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그렇게 성악가의 길이 시작이 되었다. 만일 5학년 때 담임선생님과 중1 때 음악 선생님의 말에 더 이상 음악을 하지 않았다면 이만큼 성장한 내가 있을 수가 있을까?
한 사람의 무심한 말 한마디로 우리는 얼마든지 훌륭하게 될 수 있는 인재를 잃어버리게 될지 모른다. 한 학생을 훌륭히 키워내는 것은 작게는 그 사람의 일생을 위해서, 크게는 국가적으로도 중요한 일이다.
난 교사들이 학생을 자기 자식이라고 생각해 주길 바란다. 자식을 잘못되게 하는 부모는 없다. 자식이라고 생각한다면 함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식 기르는 마음으로, 좀더 정성을 기울여 주자. 나라를 위한 인물이 수도 없이 많이 나올 것이다.
金章煥 (김장환·침례교 세계연맹 총회장, 극동방송 사장, 수원중앙침례교회 목사)
『열심히 노력하면 너는 반드시 할 수 있다』
水源(수원)에서 광복을 맞을 때까지 일본인 선생에게 공부를 배웠다. 초등학교에서 한국말을 못하게 하면서 친구들끼리 서로를 고발하게 하였으니 선생님에 대한 기억이 좋을 리 없다. 4학년 때 담임인 이토 선생은 특별히 더 엄했는데 덩치 큰 아이들의 뺨을 철썩철썩 때리곤 했다. 광복이 되자 이토 선생에게 배운 졸업생들이 그 집으로 달려가서 『쪽발이는 일본으로 돌아가라』고 고함을 지르며 기물을 부수었다.
일본인 선생이 물러가고 한국인 선생이 담임을 맡았지만 그리 나아진 것도 없었다. 당시에도 어머니들의 치맛바람이 드셌는데 선생님은 학교에 자주 찾아오는 학부형들의 자녀들을 편애하였다. 나는 학교 다닐 때 웅변대회에 나가고 싶었으나 선생님은 늘 부잣집 아이에게 기회를 주었다. 그래서 나 혼자 뒷동산 솔밭에 가서 웅변연습을 했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全과목 성적이 秀(수)를 기록했지만 우등상은 엉뚱한 아이에게 돌아갔다. 중학교 입학시험을 쳤을 때 우등상을 받은 아이는 떨어지고 나는 합격을 했다.
수원농림중학교에서도 웅변대회 때면 선생님이 한 아이를 지목해서 그 아이만 집중적으로 연습시켜서 내보냈다. 그래서 결국 한국에서 학교에 다니는 동안 웅변대회에 한 번도 나갈 수 없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한국전쟁이 나면서 학교는 휴교를 했고 나는 하우스보이가 되어 미군부대를 따라다녔다. 거기서 기적처럼 칼 파워스라는 병사를 만났고, 그가 나를 미국으로 데려가 대학원까지 8년간 공부시켰다. 사우스 캐롤라이나州에 있는 밥 존스 중학교 3학년에 편입하였을 때 영어라고는 간단한 명령어 몇 마디밖에 할 줄 몰랐다. 그랬으니 나의 학교 생활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가는 일이다.
고국 생각에 날마다 울면서 지내고 있을 때 기숙사에서 함께 지냈던 제리 메이저라는 대학생이 내게 예수님을 전해주었다.
『예수님께 네가 도움을 요청하면 너의 인생을 책임지실 거야』
예수를 믿으면서 나는 조금씩 안정이 되었다. 하지만 영어를 익히는 일은 쉽지 않았고 영어를 잘하지 못하니 매사에 자신이 없었다. 첫 학기 때 유급 대상이었지만 선생님들은 열심히 하려는 내 열의를 가상히 여겨 진급을 시켜주었다. 선생님들은 내가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셨는지 방과 후에 따로 영어를 가르쳐 주었다.
그러던 중 밥 존스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에서 웅변대회가 열렸다. 누구를 지목해서 내보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웅변원고를 써내게 하여 그 가운데서 우수한 내용을 가려냈다. 미국에서 느낀 민주주의에 관해서 쓴 내 원고가 채택되었고 유니스 리스라는 여선생님의 지도로 꿈에 그리던 웅변연습을 하게 되었다. 선생님은 나의 발음을 고쳐 주시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고 나는 입에 구슬을 물고 연습에 몰두했다. 연습할 때마다 선생님이 내게 늘 이렇게 격려해 주셨다.
『열심히 노력하면 너는 반드시 할 수 있어』
나는 선생님의 격려에 힘입어 입에서 피가 날 정도로 연습했고 그 결과 전국대회에서 1등을 하여 아이젠하워 대통령상을 받았다. 학교로 돌아왔을 때 에드워드 학장은 채플시간에 이렇게 말했다.
『이 작은 소년이 맨 처음 내 사무실에 왔을 때 단 한마디의 영어도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윌리엄스버그에서 열린 전국고등학생 웅변대회의 우승자로서 밥 존스 고등학교의 명예를 드높였습니다』
나는 유니스 리스 선생님의 『노력하면 반드시 할 수 있다』는 말씀과 에드워드 학장님의 『학교의 명예를 드높였다』는 말씀에 큰 용기를 얻었다. 나는 교사들에게 당부하고 싶다.
『학생 한사람 한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여 주기 바란다. 가난한 학생이든 공부를 못하는 학생이든 차별하지 말고 모든 학생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길 바란다. 선생님들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면 그 학생은 결코 자랄 수 없을 것이다. 개개인에게 뜨거운 관심을 갖고 지도할 때 학생들이 장차 큰 일꾼이 될 것이다. 눈에 띄는 몇몇 아이를 편애하지 말고 모든 학생에게 애정과 관심을 가지는 선생님이 되어주길 바란다』
徐廷旭(서정욱·과학기술부 장관)
『엔지니어는 정직하고 정확해야 한다』
방석을 바로 놓고 바로 앉아라, 신발을 바로 벗어 놓아라, 음식을 먹을 때 소리를 내지도 남기지도 말아라. 이러한 가정교육 때문인지 지금도 나는 걸상이나 방석을 바로 놓고 앉아야 마음이 편하며, 음식을 남기면 죄스럽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매일 아침 회초리에 절을 시키신 선생님이 계셨다. 그분은, 『「敎」는 孝와 文을 합성한 字이며, 文은 회초리치는 형상이므로 孝는 매로 가르치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자식이 귀여우면 매로 키우라」는 우리 속담과 「매질을 아끼면 자식을 버린다」는 영국 속담이 있는 것 같다. 선생님은 음식을 먹기 전에 반드시 손을 씻도록 하셨으며, 파리를 잡아오라 하시고는 그만큼 성냥으로 바꾸어 주셨다. 위생과 청결을 생활화하도록 가르치신 것이다.
커서도 나는 훌륭한 선생님을 만났다. 텍사스 A&M 대학 유학시절에 만난 저먼(John P. German) 교수님은 연구실에서는 무척 엄하시면서도 개인적으로는 多情多感(다정다감)하셨다. 스승에 대한 제자의 존경이나, 제자에 대한 스승의 사랑은 서양이라고 다를 바 없었다.
교수님은 『엔지니어는 정직하고 정확해야 한다. 글을 잘 써야 하며, 발표력이 뛰어나야 한다. 사진도 잘 찍어야 하며, 음악, 미술 등 예술에 대한 소양이 있어야 한다』고 늘 강조하셨다.
다정다감하면서도 강의준비도 빈틈이 없으셨다. 그러나 학점이 박해 학생들은 혼이 났다. 실험 리포트에 데이터가 허술하면 퇴짜를 맞고, 잘못된 문법이나 쓸데없는 말은 붉은 글씨로 지적을 받았다. 숙제나 리포트도 제출시간을 조금 어기거나, 팀멤버의 이름을 잘못 썼다가는 감점을 당했다.
학부과정 때의 일이다. 집에서 답안을 작성해오는 시험을 치를 때다. 마감 시간을 아슬아슬하게 넘겨 선생님 방으로 달려가는데 열려 있던 문이 닫혔다. 노크를 하고 들어가 제출했다. 며칠 후에 보니 마감 시간에 늦었다는 이유로 5점을 감점당했다. 한번은 선생님의 이름 가운데 글자 P를 R이라고 했다가 10점 만점 리포트에서 0.5점을 감점당했다.
또 한번은 연구조교 시절 사진 필름을 사오라고 하시어 수소문하여 제법 싸게 사왔다고 생각했는데 더 싼 곳을 알려주시며, 그렇게 하다간 연구실이 파산한다고 꾸지람을 하셨다. 이렇게 절차탁마되다 보니, 매사를 깐깐하게 大觀細察(대관세찰)하는 제2의 천성이 생겨 중요한 국책연구개발 사업을 관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저먼 선생님과 사모님은 내 아내와 딸에게 그지없이 인자하셨다. 자주 집에 불러주시는 등 객지생활의 고독을 달래주셨다. 귀국 후 30년이 가깝도록, 선생님과는 꾸준히 서신왕래를 했고, 자주 찾아뵈었다. 애석하게도 선생님은 5년 전에 돌아가셨다.
학창시절을 회상하다 보니, 나야말로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 스승의 은혜를 많이 받고 살아왔음을 새삼 깨닫는다. 나의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스승의 가르침이 잘못 나타나 그분들을 욕되게 한 점은 없는지 항상 걱정이 된다. 내가 제자나 후배들로부터 너무 엄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 것은 학창시절에서 얻은 제2의 천성 때문인지 모른다.
李相禹(이상우·서강대 정치학 교수)
『잠자리, 개나리도 한 번만 살고 간다』
서울 봉래초등학교 5학년 때인 1949년. 쉬는 시간에 나가 놀던 아이들이 잠자리를 잡아 날개를 자르고 개나리 가지를 꺾어 집을 만들어 준다고 법석을 떨었다. 그때 담임 조규복 선생님께서 그 모습을 보시고는 교실에 들어온 학생들에게 눈을 감게 하고 한 시간 동안 특강을 하셨다.
『잠자리 날개를 자르면 잠자리는 날지 못해 결국 죽는다. 그런데 잠자리도 사람처럼 이 세상에 단 한 번 태어난다. 너희들은 장난으로 잠자리 날개를 잘랐지만, 잠자리는 일생을 마치는 불행을 맞게 된 것이다. 얼마나 불쌍하냐? 개나리도 생물체이다. 말을 못해 그렇지 가지를 자르면 얼마나 아프겠니? 사람은 자기가 살기 위해 다른 동물과 식물을 죽이고 먹고 하지만 장난으로 남을 죽이고 상하게 해서야 되겠느냐?』
선생님이 하도 진지하게 말씀하셔서 학생들은 모두 울었다. 그 뒤부터는 모두 개미가 기어가면 밟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걷게 될 정도로 생명존중 사상이 몸에 배었다. 후에 6·25를 겪으며 사람이 사람을 무참히 죽이고 괴롭히고 하는 것을 보면서 생명에 대한 외경심은 더욱 커졌다. 조규복 선생님의 말씀을 계기로 「사람과 사람이 서로의 생명을 존중하고 나아가서 모든 살아있는 것끼리 서로 함께 잘사는 세상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어린 내 머리 속에 깊게 심어졌다.
나는 평생을 전쟁과 평화, 사회 갈등을 연구 주제로 삼아 공부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평화질서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조각 지식을 만들어 내는 일을 나의 평생의 과업으로 삼아 오늘도 살아가고 있다. 조규복 선생님은 오늘의 나를 만드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선생님이다. 나는 평생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 뜻을 나의 학생들에게 전하려고 지금도 나는 교단에서 노력하고 있다.
姜英勳(강영훈·前 국무총리)
『의지가 있는 곳에 길은 언제나 열려 있다』
영변농업학교 3학년 재학 중 조선어 독본 학습교실. 때는 1937년 봄 학기의 어느 날이었다. 담당선생은 우리나라에서 잠업분야 원로이신 朴炳禧(박병희) 선생이었다. 朴선생님은 성격이 호탕하신 분으로 교실에서 가끔 조선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하시면서 은근히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깨우쳐 주시기 위해 힘쓰셨다.
학생들이 교칙을 위반하였다고 징계를 당할 때는 언제나 변론을 해주어 학생 모두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영변농업학교에는 열 명의 선생 중 일본인 선생이 8명, 한국인 선생이 2명이었는데 朴선생님과 후에 용산중학교 교장이 되신 閔承福(민승복) 선생이었다.
그 어느 날 조선어 독본시간, 책도 안 가지시고 교실에 들어오신 朴선생께서 『오늘이 조선어독본 마지막 날』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학생들은 그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한 가운데 침묵만이 교실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누구도 질문을 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나는 참다못해 『조선 사람이 조선어를 왜 배울 수 없단 말입니까』하고 당돌하게 질문을 하였다.
선생께서는 『조선 총독부 지시이니 나로서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너희들이 의지만 있으면 교실이 아닌 어디에서나 조선에 관한 공부를 스스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의지가 있는 곳에 길은 언제나 열려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말하더니, 한국 민족 문화에 관한 이야기를 한 시간 가량 하셨다.
나는 『의지가 있는 곳에 길은 언제나 열려있다』고 하신 선생님 말씀이 온몸을 전기처럼 스쳐 지나감을 느꼈다. 나는 우리 민족에 관한 것을 알기 위하여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대학까지 가기 위해 농업학교 4학년 때 일본 히로시마에 있는 高田中學으로 전학을 하게 되었다. 高田中學의 교과 내용에서, 특히 수학 영어는 농업학교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영어를 예로 들자면 농업학교 1학년 영어교과서 첫 페이지에 「GO」 한 단어만 있었는데 중학교 1학년 영어 교과서 첫 페이지에는 간단한 문장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그곳에서 첫 학기는 무척 힘든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어려울 때면 언제나 朴선생님의 『의지가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씀을 생각했다. 「男兒立志出鄕關 學若不成死不還(남아입지출향관 학약불성사불환)」이라는 漢詩(한시) 한 편을 벽에 써붙이고 걸어가는 나의 면학의 길은 내가 세운 목표를 향한 의지와 내가 당면한 현실의 유혹과의 싸움의 연속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만주 침략 정책을 모르는 처지에서, 모든 민족이 공존 공영하는 道義(도의) 세계 건설에 관한 학문을 연수한다고 하는 만주 소재 建國大學(건국대학)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처음 만난 분이 「독립 선언문」을 기초하신 분으로 대학에 조선 민족 대표 교수로 와 있던 六堂(육당) 崔南善(최남선) 선생이었다.
六堂께서 신입생에게 하신 말씀을 요약하면 『너희들은 조선 사람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라』하는 것이었다. 나는 한평생 한국 사람으로서의 긍지를 가지고 세계 어디를 가든지 한국 사람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일이 없도록 노력하며 살고자 애써왔다.
朴선생의 한마디 말씀은 나의 인생 행로를 바꾸어 주셨고 崔선생의 한마디 말씀은 나로 하여금 한평생 한국 사람임을 잊지 않고 노력하도록 격려가 되어주셨다. 내가 훌륭한 선생 두 분을 모실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의 축복이 아닐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