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초순의 두만강과 압록강. 「두만강 푸른 물에 노젓는 뱃사공」도, 「압록강의 뗏꾼들과 뗏목」도 없었다. 더구나 두만강은 푸른 물도 아니었다.
안수길의 소설 「북간도」의, 한국판 집시의 슬픔만 차올랐다. 압록강 2000리, 두만강 1000리. 그 구비구비마다에는 우리 민족의 엘레지가 불쑥불쑥 튀어나와 나의 애간장만 녹여냈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는, 脫北者(탈북자)는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었다. 조선조 때로부터 일제 때,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유랑민」 「이주민」 「탈북자」란 이름으로 渡江(도강)은 이어지고 있다.
못 살아서, 못 먹어서, 쫓겨서, 그리고 자유와 연인을 찾아서.
다시 한번, 역사는 반복한다.
압록강, 그리고 두만강. 유유히, 그러나 때로는 사납게 흘러 내린다. 중국과 북한, 그리고 러시아를 가르며. 그러면서 끝없이 天涯(천애)협곡과 들판을 만들어 내고 있다.
두 강변은 이미 晩秋(만추)였다. 바람따라 兩岸(양안)의 역사는, 전설은 부활하고 있었다.
압록강과 두만강. 백두산 천지에서 동서로 각각, 막바로 흐른다고들 알고 있다. 그러나 아니다.
두만강은 백두산의 동남쪽에 있는 대연지붕 밑에서 약 60리나 떨어져 있는 홍토수, 석을수, 약류수 등 작은 물줄기 셋이 합쳐져 상류가 된다. 이어 홍단수, 홍기하, 서두수 등의 支流(지류)가 보태지면서 화강 편마암층을 관류해 무산, 온성을 지나 동쪽으로 나간다. 그리고 다시 남쪽으로 기울어지면서 동해로 흘러든다. 두만강은 420km, 약 1000리다.
압록강은 백두산 주봉 서쪽에서 발원, 난강과 포도하가 합류하는 대양치구 아래로부터 시작된다. 남쪽으로 흐르다 혜산에서부터는 다시 서쪽으로 흐르면서 허천강, 장진강 등의 支流를 모은다.
중강진에 이르러서는 서남쪽으로 흐른다. 그러다 도중에 자성강, 범어강 등의 支流를 합치면서 큰 강을 이뤄 황해로 들어간다.
압록강은 兩岸의 6만1889㎢의 흙을 적시며 돌아 든다. 장장 790km. 약 2000리다. 압록강은 그 물빛이 오리대가리 빛처럼 푸르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압록강, 상류로부터 장백과 자강도 혜산, 임강과 자강도 중강진, 집안과 자강도 만포, 관전과 평안북도 초산, 단동과 평안북도 신의주를 구분지으며 중국과 북한의 국경을 만든다.
두만강. 상류로부터 화룡시 숭선진 고성리와 양강도 대흥단군 삼장리, 화룡시 덕화향 남평과 함경북도 무산군 칠성리, 용정시 삼합과 함경북도 회령을 가른다.
그리고 용정시 개산툰진과 함경북도 온성군 삼봉, 도문시와 함경북도 남양시, 훈춘시 삼가자향 사타자와 함경북도 은덕군(전 종성군), 훈춘시 경신진 권하와 함경북도 온성군 등리 강하나를 사이에 두고 중국과 북한이 이마를 맞대고 있다.
취재는 압록강 하류인 요녕성 丹東(단동)에서부터 시작, 상류인 길림성 長白(장백)으로 이어지는 코스를 택했다.
아, 압록강. 그리고 어두컴컴한 신의주
10월 초순. 중국 요녕성 심양. 심양에서, 오후 1시 승용차를 세내 단동으로 흘렀다. 6시간 만에 도착한 단동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요녕성 단동. 중국에서 제일 큰 국경도시. 낙엽이 步道(보도) 위를 뒹굴고 있다. 영상 7~8도쯤 됐을까. 쌀쌀했다. 예약된 호텔은 단동의 중심가에 있다.
5층에 있는 방은 불을 켜지 않아도 가로등 불빛 때문에 훤했다.
창가에 앉아 담배 한 개비를 물었다. 눈길은 자연스레 시가지를 향했다. 그런데, 호텔 바로 앞은 아, 압록강. 그 강너머 바짝 붙어 있는, 어두컴컴한 도시. 그건 바로 평안북도 신의주였다.
신의주는 어둠에 묻혀 숨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가뭄에 콩 나듯 불빛이 뵐 뿐이다. 그것도 강건너 등불처럼 아련했다. 안내인인 단동의 조선족 우길성(51)씨에게 물었다.
『신의주는 북한에서도 큰 도시인 걸로 알고 있는데, 어째 불빛도 없고, 「유령의 도시」 같네요』
『기래도 요즘사 많이 나아뎠디요. 1년전만 해도 완전히 깜깜했더랬수. 드문드문 불빛이 보이는 곳은 감시초소입네다. 불빛이 안 보이는 건, 북한애들이 燈火管制(등화관제)를 해서 기래요』
호텔을 나섰다. 밤 8시. 압록강과 바로 잇대 있는 단동, 그 부둣가는 손잡고 가는 연인들로 인해 더욱 정겨웠다. 국경도시 다웠다. 파인의 詩(시) 「국경의 밤」이, 그리고 얼핏 부산 남포동의 밤거리가 떠올랐다.
신의주쪽 강변에, 불을 대낮같이 밝힌 큰 선박이 눈에 들어 왔다. 그리고 무슨 깃발같은 것도 나부꼈다. 우길성이 묻지도 않았는데 말했다.
『저건, 도박선입네다. 깃발은 북조선 인공기인게지. 국적은 북조선으로 돼 있지만, 중국인이 임자입네다. 북조선 사람들은 특수층 외엔 얼씬도 못하디오. 주로 중국의 돈 많은 장사꾼들이, 도박선에서 날밤을 새며 도박을 합네다. 나도, 말만 들었디, 가볼 수가 없시오. 내 친구 중에, 돈많은 날건달이 있는데, 저곳에 가서 한번은 1만원(한국돈 135만원)을 날렸다고 합데다. 1만원이면, 우리 같은 월급장이들 2년치 월급이우다. 저, 도박선, 모르긴 해도, 하룻저녁 수입이 엄청날 거우다』
북한 식당의 女복무원
중국돈 1원은 한국돈으로 135원 꼴이다(이하 화폐단위는 모두 중국돈으로 표기).
밤 9시쯤. 배가 고팠다. 우길성은 북한사람이 경영하는, 한 음식점으로 안내했다. 음식점 입구에는 스무 살 안팎의 아가씨 둘이 우리를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아가씨들은 빨강색 치마와 노랑 저고리, 그리고 중굽의 구두를 신었다. 긴머리를 뒤로 틀어 핀을 꼽았다. 옷차림에서 북한냄새가 났다. 한국의, 1950년대의 한복같았다. 하지만 그게 더욱 신선했고 향수마저 자아냈다.
차림표를 봤다. 해파리 냉채 28원, 쇠고기회 15원, 가물치회 60원, 동태회(1000g) 18원, 잉어회 35원, 단고기(개고기) 무침 35원, 동태식혜 18원, 통배추 김치(800g) 10원, 배추김치(200g) 5원, 개갈비찜(1000g) 35원, 닭갈비 졸임(500g)28원, 메밀국수(500g) 10원 등이었다.
메밀국수와 쇠고기회를 시켰다. 메밀국수는 평양냉면을 연상하고 기대를 해선지 별로였다. 쇠고기회는 한국의 것과 비슷했다. 배를 가늘고 길게 썰어 얹어 놓았다. 단동産 배갈을 한잔 입에 털어 넣었다. 39도짜리였다. 독하긴 해도 먹을 만 했다.
식사 도중 한 아가씨가 마이크를 잡더니 한국에서도 익히 알려진 「반갑습니다」와 「휘파람」을 불렀다. 목소리가 높고 낭랑했다. 또 다른 20代 초반의 아가씨가 다가와 웃으면서 말했다.
『노래 한 곡조 하시라요』
딴엔 상냥하게 말했지만, 목소리의 톤이 높은 데다 강한 발음이어서 「시비 거는 조」로 들렸다.
아가씨들은 예외없이 앞가슴에 「김일성 배지」를 달고 있었다.
『한국노래도 부를 수 있습네까?』
내가, 북한말조로 말하자, 그 아가씨는 한참 깔깔댔다.
『「아침이슬」이 있습네다. 아침이슬 작사가 김민기는 우리도 잘 알고 있지요』
노래 목록집을 다 뒤졌지만, 「아침이슬」 외에 한국 노래는 아무것도 없다. 노래 목록집엔 북한노래와 중국노래名만 절반씩, 새까맣게 적혀 있었다. 노래 부르는 걸 포기했다.
『이보라요, 아가씨. 담배 있습네까? 그래, 「평양」이란 담배 있지요. 날래 갔다 주기요』
『아이, 「평양」보다는 「령광」이 훨씬 고급입네다』
「령광」은 북한의 최고급 담배로 한 갑에 40원이라고 했다. 엄청 비싸다. 한국돈 5400원이 아닌가. 약간 독하긴 해도 피울만했다.
살갑게 대하는 한 아가씨에게 이름과 나이를 물었다. 그 아가씨는, 1950년대 한국의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나오는 「영희와 바둑이」의 「영희」 같았다. 몹시 수줍어 했다. 뺨에 홍조까지 띠며, 간신히 말했다.
『고성희라고 합네다. 스물둘이야요』
그 아가씨는 3년 복무기간 중 이미 1년반을 지나 1년 반 후면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우길성이 말했다.
『여기, 나와 있는 체니들, 엄청 똑똑합네다. 북한에선 엘리트들이야요. 黨性(당성)이 쎄질 아이하면 절대 여길 보내디 않아요』
『북한 공장, 이젠 연기가 나우』
식당을 나오니 이미 10시 반. 강변을 따라 이어지는 가로등은 파란불을 죽이고 빨간불만 살려 놓았다. 강으로부터 휘돌아 나오는 싸한 바람이 옷깃을 때렸다. 왠지 바닷바람처럼 약간은 짠 냄새가 났다. 우길성은, 단동쪽은 압록강 하류여서 그렇단다. 단동에서 1km만 더 나가면 황해라고 한다.
이튿날. 약간 구름 낀 날씨. 스산했다. 아침 9시께 부두로 갔다. 바로 앞의 신의주는 그런대로 눈에 들어왔다. 유람선을 빌렸다. 兩岸(양안)을 한 바퀴 도는 데 80원이었다. 모터를 단 유람선은 빨랐다. 신의주와 20m쯤의 사이를 두고 물살을 가른다.
신의주 둑길엔 미루나무가 3000여 m 줄지어 있다. 그 둑길로 인민군 복장을 한, 30代 사내 둘이 자전거를 타고 가고 있다. 손을 흔들었지만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둑길 바로 뒤. 여기저기에선 포크레인이 눈에 띈다. 뭔가 공사를 하고 있다.
신의주-단동 철교를 300여 m 앞둔 물길. 둑앞, 바로 강가에서 여자 인민군 둘이 뭔가 정답게 얘길하고 있다. 손에 잡힐 듯했다. 20代 후반쯤으로 보였다.
다른 유람선에서 누군가가 『안녕하세요』를 외쳤다. 여자 인민군 둘이 힐끗 한번 쳐다보더니, 이내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만다. 신의주의 철교가 끝나는 강가. 그곳에 꽤 큰 2층짜리 하얀 건물이 나타났다.
우길성이 말했다.
『저건, 신의주 海關(해관·세관)입네다. 해관 바로 뒤에 감시초소가 있습네다』
신의주 세관에서 100여 m 떨어진 곳엔 큰 공장굴뚝이 너댓 개 보인다. 아직 이른 시간이어선지 굴뚝엔 연기가 나지 않았다. 우길성이 공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야, 북한의 공장엔 거미줄 친 지가 2~3년 됐수다. 기름이 있어야 연기가 나든 말든 하디. 기런데 올해 들어스리, 가끔씩 연기가 나긴 하우. 다 한국에서 원조해준 덕이 아이겠슴』
이번엔 단동 쪽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단동과 신의주를 한번 비교해 보시오. 단동은 고층건물도 많고스리, 비까번떡하디오. 신의주를 보시라요. 얼마나 구차한가. 20년 전만 해도 단동보다 신의주 쪽이 훨씬 나았쇠다』
그랬다. 단동 쪽은 빨간 지붕을 한 고층건물들이 줄지어 서있다. 어디 유럽쯤의 한 도시 같았다.
신의주를 봤다. 지프 1대와 승용차 1대가 둑길 안쪽으로 난 도로를 통해 세관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제껏 신의주 쪽에서 한 대의 차도 못 봐선지, 그게 신통방통했다.
유람선은 압록강 폭의 중간쯤을 훨씬 넘어서 북한 쪽에 바짝 다가가 있다. 정확히는, 국경을 침범한 것이다. 일순 안달이 났다. 하지만 이곳 兩岸 사람들은 예사였다.
유람선이 철교 밑을 지나 다시 兩岸의 하류 쪽으로 머리를 돌리는데, 무동력 어선 한 척이 물결에 흔들리며 떠다니고 있었다. 그 어선엔, 얼핏 봐서 칠순도 넘어뵈는 사내가 뭔가를 잡고 있었다.
「북한 사람」이라는 울림이 왔다. 유람선을 멈추게 했다.
『안녕하세요. 한국에서 왔는데요』
이내 대답이 왔다.
『반갑쇠다. 어째, 압록강 구경하러 왔수까』
그 어부는 새카만 얼굴에 바짝 말라 있었다. 더욱이 더 이상 낡을 수가 없는 까만 옷을 걸치고 있어 초라함을 더했다. 그러나 사람좋은 얼굴에, 순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어부는, 조개를 한 주먹 집어 우리에게 건네 줬다.
『이거, 한번 드셔 보시구레. 맛이 그만이우다』
그건 재첩이었다. 씨알이 어른 엄지손가락만 했다.
『지금 단동엔 꽃제비는 없수다』
오전 10시. 단동 부두는 사람들로 북적댔다. 우글대는 잡상인들. 대뜸 한국인임을 알아보고 북한우표를 들이밀며 사란다. 우길성이 바쁜 일이 있다며, 다른 안내인을 소개해 줬다. 30代 후반의 조선족. 조씨라고만 밝혔는데, 한국말이 상당히 서툴렀다.
조씨와 걸어서 압록강 舊橋(구교)로 향했다. 舊橋 입구에는 일본 군인들의 초소가 당시의 모습대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 빨간 벽돌로 만든 초소는, 갈색으로 물든 등나무 줄기로 덮여 있다.
舊橋 입구. 15원짜리 철교 입장권을 샀다. 한마디도 알아 들을 수 없는, 중국노래가 계속 귀청을 때린다. 철교 난간을 따라 200m쯤 걸었을까.
그곳에는 무참히 끊겨져 있는 철교가, 전쟁의 휴유증을 앓고 있었다.
단동-신의주 철교는 두 개다. 舊橋와 新橋(신교). 舊橋는 강복판으로부터 신의주쪽으로 콘크리트 기둥만 남아 있을 뿐이다. 舊橋의 동강난 부분은 폭탄과 기관총 세례를 받아 걸레처럼 구겨져 있다.
舊橋는 더 이상 다리가 아니다. 관광용일 뿐이다. 舊橋의 지금 이름은 「압록강 端橋(단교)」. 舊橋와 바짝 붙어 있는 新橋는 이따금씩 기차와 화물차가 양안을 오가고 있었다.
舊橋는 1950년 11월8일 한국전쟁 때 미군 B29 폭격기 100여 대의 집중폭격으로 중간부분이 상당히 잘라져 나갔다. 중국은 곧바로 수리를 해 멀쩡해졌다.
그러나 다음해 2월 다시 집중 폭격을 맞고는 완전히 동강났다. 손쓸 수 없을 만큼.
舊橋는 본디 큰배가 지나갈 땐 몸체를 비틀어 통과시키는 기계장치가 있었다. 옛날의 부산 영도다리가 다리를 위로 치켜 들어 큰배가 지나가게 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조씨와 이런저런 얘길 하다 「꽃제비」 얘기가 나왔다.
『지금 단동엔 「꽃제비」는 없수다. 여직 남아있는 꽃제비들은 이젠 17~18세의 청년이 됐지. 이젠 꽃제비가 아니지. 이들은 이젠, 시장통을 기웃거리지 않습네다. 통크게(?) 놀지. 이들에게 1원짜리를 앵겼다간 창피만 당하는 기지. 최소한 10원짜리는 줘야 욕을 아이 먹는단 말이지.
기러고, 1년 전부터는, 脫北者도 보기 힘드오. 가끔씩 오는 脫北者들도 이젠, 못 먹어서 오는 게 아이지. 중국에 돈벌러 오는 게지. 脫北者들은 대개 중국에 인척이 있시오. 더구나 중국에서 살다가 간 사람들이 대부분이우다. 그러니까스리, 중국말도 유창하지』
단동과 신의주. 중국과 북한. 북한이 중국보다 상대적으로 잘 살았다는 1960~ 70년대만 해도 중국에서 북한으로의 탈출이 많았다.
그러던 게 1980년대 들어선 북한에서 중국으로의 탈출이 많아졌다.
두 나라의 경제사정에 따라, 단동에서 신의주로, 신의주에서 단동으로의 탈출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 중국 조선족들은 이제 절차가 번거로워서 북한의 친척들에게 쌀을 갔다 주기가 힘드오. 설사 친척이 쌀과 돈을 달라고 아우성쳐도, 「밑빠진 독에 물붓기」라 이젠 우리 중국 조선족들도 지쳤다이.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하는 거 아니우까』
脫北者들을 북한 보위부원이 직접 잡아 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대개 중국 공안원이 잡아서 북한 보위부원에게 넘겨 준단다.
3~4년 전, 脫北者들을 넘겨 받은 북한 보위부원들이, 중국인들이 보는 데서 철사줄로 코를 꿰거나, 손바닥을 꿰는 짓을 했다. 그때 중국 공안원들이 강력 항의를 했다.
『철사줄로 꿰매든, 실로 꿰매든 다 좋다. 그러나 이짓을 중국에선 하지 말라. 너희 나라에 가서 해라』
이후 중국에선 철사줄로 꿰매는 건 사라졌다고 한다. 중국 공안원들은 脫北者들을 봐도 웬만하면 잡지 않는다고 한다.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다, 인도적 차원에서 대충 얼버무리고 만다는 것이다.
『보름 전에 보따리 장사하는 북한 동무를 만났더랬는데, 북한의 인민학교(초등학교)에서 「破鐵(파철)」을 학교에 가져 오라구 쪼인단메다. 그러커면, 어드메서 파철을 구합네까. 학생들이 노는 공장에 몰래 들어가 선반을 뜯어내다 학교에다 바친다는 게지』
단동의 인구는 70만명. 조선족은 2만2000명 정도. 丹東(단동)은 이름 그대로 「붉은 동방」. 사회주의 중국의 「혁명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1965년 전까지의 이름은 安東(안동). 당나라 때 안동도호부의 관할구역이었다.
압록강에 뗏목이 없다
단동은 중국에서도 별명이 가장 많다. 압록강으로 흘러내린 땟목이 운집된다고 해 「木都(목도)」, 잠업이 중국 제일이라고 해 「누에의 고향」 「비단 도시」, 소주 항주와 겨눌 만큼 경치가 아름답다고 해 「동북의 작은 蘇杭(소항)」 등으로도 불린다.
그러나 한편 저목장이 많아 불이 자주나는 통에 「불의 도시」, 한국전쟁 당시 중국의 최전방이어서 용감한 戰士(전사)가 많았다고 해 「영웅의 도시」로 불리기도 한다.
단동엔, 아니 압록강엔 그 유명하던 뗏목을 보기가 힘들다. 압록강 뗏목의 종착지에서 뗏목을 볼 수 없다는 건 압록강엔 더 이상 뗏목이 없다는 얘기다.
조선족 음식점에서 만난 40代 조선족 아주머니는 「당분간 뗏목을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단정한다.
『북한에서 팔아 먹을 거이라곤 뗏목밖에 없습네다. 기걸 몇십년 내리 팔아 먹기만 했으니까니 뭐가 남겠소. 기러고, 알곡을 심자고 온 산에다 다락밭을 맹글어 놨으니, 홍수만 나면 산사태가 말할 수 없이 많이 난단 말이지. 산에 나무가 없으니 당연한 게지. 기러니, 밀려내리는 토사가 어딜 가겠소. 압록강으로 밀려 든단 말이지. 자연 수심도 얕아져, 설사 뗏목이 있다 허드래도 띄울 수가 없단 말이지』
국경지대의 북한 산들은 하나같이 민둥산이었다. 처참했다. 해발 200~300m의 산등성이까지 다락밭을 만들어 놨다. 누더기옷이었다.
산등성이의 밭은 웬만한 장정이 아니면 올라갈 수도 없다. 봄에 씨를 뿌렸다가 추수 때 한번 정도 올라간다고 한다. 다락밭은 방치되고 있다. 생산성 따위는 당초 염두에도 없는 것 같다.
중국은 산을 엄청나게 잘 가꾼다. 목재가 널부러져 있는데도 북한의 목재를 사간다. 나무도 물론 허가 없인 절대 벨 수가 없다. 압록강가에는 공장도 못 짓게 한다. 일찌감치 환경을 단도리하고 있는 것이다.
다락밭은 북한의 「주체농업」 「全국토 다락밭 만들기」의 산물이다. 다락밭은 물론 국토가 좁은 나라에서 경작지를 늘린다는, 긍정적인 면이 없진 않다.
그러나 다락밭은 토사유실 방지 시설이 있어야 한다. 석축을 쌓고 빗물의 통로를 만들고 또 두렁을 높여야 한다. 그런데도 이런 장치들은 압록강변을 휘젓고 다니는 내내 단 한 건도 뵈질 않았다.
40代 조선족 아주머니는 『다락밭은 북조선을 살리는 게 아니고 죽이는 짓』이라며 흥분한다.
『다락밭이라는 데가, 돌멩이 천지임메, 돌 반 흙 반이우. 그기서 무슨 곡식이 자라겠슴. 옥수수도 아이 자라오. 자라봤댔자말라 비틀어지고, 중국처럼 튼실한 게 아이지』
압록강변을 흐르는 동안, 이따금씩 강변 마을 뒷산엔 몇 그루의 赤松(적송)이 보이긴 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푸근하기보다 썰렁했다.
민둥산은 비단 압록강변뿐만이 아니라고 한다. 평양-원산 간 국도변 산도 온통 다락밭 투성이란다. 북한의 모든 산이 모두 다락밭이 된 것이다.
한때 뗏목을 탔다는, 78세의 한 조선족 노인을 수소문해 만났다. 그 노인은 「그 시절」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겼다.
『스물두 살 때 뗏목을 탔더랬지. 압록강은 물론 송화강, 흑룡강까지 가서 일했수다. 압록강에선 임강에서부터 해관촌까지 탔지. 그때, 북조선의 산은 큰 나무가 엄청나게 많았더랬소』
脫北者를 만나다
단동에는 신의주로 가는 1일 관광코스가 있다. 1인당 중국돈 380원. 일반 월급장이들의 한 달 월급에 가까운 액수다. 그러나 실상 신의주엔 별 볼 게 없다고 한다.
여기다 감시인이 따라 붙어, 절대 서민들과의 개별 접촉은 할 수 없다. 다만 토종닭과 토종개가 맛이 좋고 예술단 공연은 꽤 볼 만하기 때문에, 그런대로 관광객은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단동에는 요즘 어딜 가나 조선족들 간에 이런 말들을 곧잘 한다.
『야, 金正日(김정일) 위원장이가 몇 달 전 신의주 강변에 와서 단동을 40분간 쳐다보며 골똘히 뭔가 생각하고 갔다더라. 뭘 생각했을까. 아마도 「저쪽 중국은 잘사는데, 왜 이쪽 북한은 못 사는가」고 생각한 게 아일까?』
단동 변두리에서 옷가게를 하며 제법 잘 산다는, 30代의 한 조선족 여자는 돈만 있으면 신의주에 가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고 말한다.
『해관에 뇌물 100원만 먹이면 대개 눈감아 주디오. 북조선 해관에서는, 중국에서 북조선으로 가져가는 물건은 제한을 요즘은 아이 하지. 북조선에서 물건을 빼내 오는기 아이고, 가져간다는데, 뉘기가 싫어하겠슴. 북조선 해관에서도, 물건이 아무리 많아도 옛날처럼 해관원들이 뺏고 하는 일은 별로 없시오. 그저 좋은 게 좋다는 식이디오』
저녁에 조선족 음식점을 찾았다. 단고기(개고기)가 전문이다. 조선족들 몇사람과 우스개 소릴 하다가, 누군가가 어딘가에 脫北者가 살고 있다는 귀띔을 해줬다.
수소문 끝에 그 脫北者와 절친하다는, 조선족 사내 윤씨를 만났다.
윤씨는 50代 후반으로, 첫마디가 『어려울 거라』고 했다. 그러나 꼭 만나게 해달라고 졸랐다. 어쩔 수 없었던지 윤씨는 그 脫北者를 만났지만, 처음엔 말도 못 꺼내게 했다고 한다.
윤씨가 『한국사람인데, 절대 해를 끼칠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한번 만나라』고 설득했지만 실패했다. 이튿날, 또 윤씨가 아침부터 찾아가 식사를 같이하며 서너시간을 설득한 끝에야 가까스로 그 脫北者와 전화통화를 할 수 있었다.
그 脫北者의 목소리는 젊었다. 명랑하고 싹싹했다.
주위의 눈을 피해, 그 脫北者가 살고 있는 변두리 어느 허술한 민가로 찾아 갔다. 오후 2시쯤인데도 방안은 어두웠다. 수인사를 나눴다.
그 脫北者는 스물셋의 남자였다. 이름은 김주천(가명). 주천 외에도 어머니와 누나가 있었다. 그들은 눈인사만 해왔다.
어디서 구했는지 커피를 타내 왔다. 한국의 맥심커피였다.
처음 한동안 취재노트를 꺼내지 않았다. 그들에게 자극을 줘, 얘기가 겉돌까 우려됐기 때문이다. 『어떻게 생계를 이어가고 있느냐?』는 둥 일상적 얘기만 했다.
긴장이 풀리길 기다렸다. 20여 분간 듣기만 했다. 그때서야 주천은, 경계심을 푸는 것 같았다. 얘기가 진지해졌다. 취재노트를 슬그머니 꺼냈다.
주천은 첫번째 脫北 후 중국 각지를 떠돌며 닥치는 대로 살았다. 공사판에도 기웃대고, 농사일도 거들며 지냈다. 우선 굶지 않아도 돼 너무 좋았다. 그러나 북한에 있는 둘째형이 늘상 맘에 걸렸다.
다시 두만강을 건너다
흑룡강성 하얼빈. 김주천은 다시 북한 회령으로 가기로 했다.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 하지만 두 살 위의 둘째형을 구해야만 했다. 죽지 못해 살고 있을 둘째형만 생각하면 피가 역류할 지경이었다.
그때 역시 脫北者인 누나뻘 되는 희연(가명·34)이 함께 가겠다고 나섰다. 주천이는 둘 다 위험해진다며 거절했다. 그러나 희연은 막무가내였다. 희연은 붙잡혀 죽을 땐 죽더라도 부모를 꼭 만나야 된다고 했다.
둘은 그러나 변변한 준비도 없었다. 일단 일을 저지르고 보자는 것이었다. 돈이라야 주천이 가진 중국돈 1500원과 희연이 마련한 중국제 약품 한 상자가 전부였다.
둘은 일단 기차로 연길로 갔다. 회령을 가려면 두만강 쪽이 훨씬 가깝기 때문이다. 다시 연길에서 용정의 삼합으로 갔다.
1998년 11월 중순의 두만강. 오후 4시 반께. 영하의 날씨였다. 오래지 않아 四圍(사위)에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두만강 건너편의 북한. 멀리 보이는 몇채의 인가에는 저녁 연기가 고즈넉이 퍼져 나가고 있었다. 강폭은 불과 20여 m. 둘은 서슴없이 물 속을 헤집었다.
처음부터 춥다는 감각은 없었다. 물 속을 꽤나 길게 헤집은 것 같았다. 그러나 10여 분이 지났을 뿐이다. 둘은 이윽고 북한땅 강변에 발을 디뎠다. 젖은 신발, 젖은 옷. 비로소 온몸이 심하게 떨려왔다.
둘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100여 m를 갔을까. 웬 사내 둘이 달려오고 있었다.
『동무들, 서라이』
가까이서 보니 인민군복을 입은 건장한, 20代의 사내들이었다.
둘은 숨이 막혔다. 그러나 이내 태연하려 했다.
『야, 이 간나새끼야! 너, 어디갔다 오는 기야?』
두 사내는 희연을 제쳐둔 채 주천만 닦달했다.
『뉘깁니까?』
『뉘긴 뉘기야. 이 새끼야. 우린 국경경비대원이야. 너, 이 새끼, 중국에서 오는 기지?』
『예, 기래요. 관광갔다 옵네다』
『무시기, 이 간나새끼, 관광은 무슨?』
그러면서 국경경비대원 중 하나가 주천의 뺨을 갈겼다. 그리고 발길질을 해댔다. 그런데, 하늘은 있었다. 경비대원 중 한 명의 얼굴이 익었다. 분명 어디서 본 얼굴이었다. 그렇다! 1년 전 북한에서 중국으로 내뺄 때, 두만강을 건너기 직전, 주천을 잡았던 바로 그 경비대원이었다.
그 경비대원은 주천으로부터 중국돈 100원을 받고 脫北을 눈감아 줬었다. 주천이 「살았다 싶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 새끼야, 내다!』
1년 새 그 경비대원은 전사에서 상등병으로 진급해 있었다. 나이도 주천과 엇비슷했다. 주천의 뺨을 갈긴 경비대원은 전사로 풋내기였다.
『야, 이 새끼, 너 안 죽고 살았구나. 1년만에 만나는구먼. 기래 어떻게 또 기어들어 왔니? 기런데, 동무, 지금 이 길로 다시 중국으로 가라우. 안 기러면 나도 죽어야!』
『무시기, 난 못 간다이』
『중국이라고, 별 수 있겠슴메』
그러면서 주천은 버티기 작전으로 나갔다. 희연이 준비해 간, 비닐에 든 배갈 한 개와 사탕 한 봉지를 잽싸게 그 상등병의 손에 쥐어줬다. 배갈은 중국돈 2원짜리로 싸구려였다. 그러나 북조선에선 금싸라기다. 한참을 실랑이하다, 그 상등병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꼭, 회령에 가야 하는가? 기렇다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이』
그러면서 둑길 바로 아래, 한 民家(민가)를 가리켰다.
『너, 이제부터 저 집에서 내가 연락할 때까지 꼼짝하지 말고 기다려야 한다』
주천과 희연은 300m쯤 떨어진 그집으로 갔다. 이미 밤이었다. 그러나 그 집엔 불빛이 보이지 않았다. 주천은 이내 이집도 전형적인, 함경도 농가임을 알았다. 흙벽돌 외벽에 회칠을 하고 방 두 칸 중간에 부엌이 있다.
그 집엔 60代 초반의 할머니와 여덟 살, 열두 살짜리 손자 둘이 있었다. 그들은 그동안에도 이런 일이 잦았는지 별반 놀라는 기색도 없었다. 아니 무관심했다.
할머니는, 우선 두 사람에게 이불을 씌워 주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할머니가 드디어 말했다.
『기래, 중국엔 무시기로 갔다 왔수까. 중국이라고 별 수 있겠슴메. 죽더라도 고향땅에서 죽어야디』
『우선, 불이나 켜고 이야기합시다. 내, 그 기름값은 주겠수다』
할머니는 그제서야, 부엌으로 가 감춰뒀던 기름을 가지고 와 등잔에 불을 밝혔다. 그러나 밝기가 영 시원치 않았다. 겨우 얼굴이나 알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장판 밑은 모래가 사각댔다. 시멘트가 없어 모래와 흙을 섞어 방바닥을 발랐기 때문이다.
주천과 희연은 그제서야 배가 고팠다. 주천은 마침 잔돈이 없었다. 그러나 100원짜리를 꺼낼 수가 없었다. 중국돈 100원짜리는, 북한에선 구경조차 하기 어려운, 큰 돈이었다.
100원짜리를 할머니에게 들려 줘 먹을 것을 사오게 하는 건 위험천만이었다. 「안전원에게, 내 잡아가시오」라는 것과 같았다.
『뭐, 외상으로라도 뭘 좀 사오시오. 애들도 있는데, 배를 채워야 하지 않겠소』
할머니는 내키지 않은 듯 나갔다. 30분쯤 후에야 두부밥 네 덩이를 들고 돌아왔다. 두부밥은 콩비지와 옥수수를 버무린 주먹밥이다.
두 아이들은 순식간에 두부밥 한 덩이씩을 먹어 치웠다. 주천과 희연은 두부밥 덩이를 절반도 못 먹고 있을 때였다. .
두 아이들은 주천과 희연이 먹는 것을 보고 있었다.
『야, 이거, 더 먹어라』
희연이 나머지 두부밥을 주자, 아이들은 그것마저도 금세 먹어 치웠다.
대충 허기를 면하자 주천과 희연은 졸음이 왔다. 그러나 잘 수가 없었다. 주천은 희연이 가지고 온 사탕을 꺼내 두 아이들에게 줬다. 두 아이들은 주천을 「큰사람(대단한 사람)」으로 알았다.
그리고 이내 주천을 『삼촌! 삼촌!』하며 따랐다. 방은 溫氣(온기)라곤 없었다. 너무 추워 이빨이 딱딱거렸다. 이 모습을 본 할머니가 변명삼아 푸념했다.
『어디, 먹고 죽자고 해도 남기(나무)가 없으니까니 어쩌겠소. 참아야지』
두만강변의 11월 중순은 이미 겨울이다. 밤이 되면서 기온은 급강하했다. 영하 3~4도는 족히 되는 것 같았다.
보위부 지도원을 들이받고 도주
밤 8시나 됐을라나. 주찬과 누나는 그 와중에도 이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방문을 세차게 흔들었다.
『문 열어!』
문을 열어주고 말고가 없었다. 이내 방문이 거칠게 열리며 한 그림자가 들이닥쳤다. 어두워 그림자가 가까이 다가서서야 50代 사내임을 알았다.
그 사내는 金日成 때 「세포비서」에게만 나눠 줬다던 채모자(도리우치)를 쓰고 있었고 당꼬바지 차림에 북한군 군화를 신고 있었다.
그 사내는 대뜸 주천을 발로 걷어차며 말했다.
『야, 이 새끼야, 날래 일어나라우』
『뉘, 뉘기야?』
『내래, (국경) 봉쇄지도원이야. 날래 중국에서 가져온 짐을 내놓아라』
『기딴 거 없시오』
『뭐야, 이 새끼야』
사내는 이내 주천에게 주먹질과 발길질을 한꺼번에 해댔다. 약품 상자는 먼젓번 국경경비대원이 이미 빼앗아 가고 없었다.
주천이 그때 상황을 말했다.
『그 아바이가 무슨 힘이 있겠슴둥. 기래, 내 묵사발이 된 것처럼 엄살을 피웠지, 뭐. 내가 묵은 집은 「1동 2세대」가 살았는데, 같이 사는 그 집 사내가 우리를 보자마자 인차(금방) 기관에 찔른 게지요, 뭐. 소위 「반동분자」를 보고 고자질 안하면 그 사람도 된통 당하게 되니끼니, 어쩔 수 없었던 게지』
한참 발길질을 하던 국경 봉쇄지도원은 씩씩대더니 나가버렸다. 이제 괜찮은가 보다고 한숨 돌리고 있는데 이번엔 보위부 지도원이 들이닥쳤다.
지도원도 들어서자마자 발길질을 해댔다. 이번엔 强度(강도)가 엄청났다. 아까 국경봉쇄지도원이 때리는 건 약과였다. 눈이 돌 정도였다. 주천은 「이번에 붙들리면 죽는다」 「이렇게 맞다가는 죽겠다」 「내빼야만 한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스쳤다.
『지도원 동무, 내 짐이 어디 있는지 가르쳐 주겠소』
『기래, 날래 말하라우. 지금 김(정일) 장군께서 밀수 때문에 얼마나 심려하시는 줄 알아』
다행히 보위지도원은 닭발(권총)이 없었다. 주천은 냅다 지도원의 머리를 박았다. 50代 초반의 지도원은 이내 뻗고 말았다. 주천은 용수철처럼 방문에서 튕겨져 나갔다. 바지에 러닝셔츠 차림이었다. 윗옷은 걸치지도 못했고 신발도 꿰지 못한 채였다. 대문엔 빗장이 걸려 있었다. 대문에 잇대 있는 한 길 흙담을 훌쩍 뛰어 넘었다.
그리고 산을 두 개나 넘었다. 오던 길로 되돌아 갈 순 없었다. 두만강변쯤을 어림하고 죽어라 뛰고 뛰었다. 어느새 두만강이 코앞에 있었다.
와중에도 바로 강물에 뛰어들면 심장마비로 죽는다는 생각에 심호흡을 하고 맨손체조를 했다.
그리고 물에 뛰어들었다. 폭 30m 쯤의 강물을 순식간에 건넜다. 이미 중국땅, 삼합이었다. 건너자마자 힘이 쭈욱 빠져 강변에 벌렁 누워 버렸다. 그대로 잠들고 싶었다.
얼마 후 강변 건너에서 『저놈, 잡아라! 저놈, 잡아라!』하는 소리가 들렸다. 주천은 다시 일어나 냅다 뛰었다.
『우리라고 평생 이렇게 살겠니?』
다행히 그곳 지리엔 밝았다. 그전에도 이곳을 통해 중국땅에 들어 왔기 때문이다. 아는 조선족 집으로 갔다. 얼핏 시계를 봤다. 새벽 3시였다. 아는 조선족 집은 다행히 대문 빗장을 걸어 두지 않았었다.
방문 앞에 살그머니 다가가 몇번 문을 두드렸다. 옆집 중국사람도 조심해야 한다. 재수 없다 보면, 중국 公安(공안)에게 고자질당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뉘기요?』
『할머니, 납니다. 주천입네다』
60代 중반의 할머니는 이내 문을 따주었다. 방안에 들어선 주천은 말을 할 수 없었다. 얼굴은 물론 온몸이 얼어 있었기 때문이다. 발에선 피가 흘렀다. 바지도 여기저기 찢겨져 있었다. 생각해보니 논둑이 얼어 붙었고 그건 바로 칼이었던 탓이다.
할머니는 『시상에, 시상에』만 연발했다. 그리고 이내 주천의 젖은 옷을 벗겼다. 그리고 벽장을 뒤져, 아들이 입던 옷을 갈아 입혔다. 그리고 이불을 덮어 준 후 부엌으로 갔다. 따뜻한 된장물을 가져다 마시게 했다. 주천은 긴장이 풀리면서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주천은 그후 희연이 어떻게 됐는지 알지 못한다. 둘째형도 빼내 오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회령에 갔고 둘째형을 만났다. 그러나 둘째형은 한사코 脫北할 수 없다는 거였다.
둘째형은 주천에게 말했다.
『내레, 脫北할 자신이 없어야. 기러다가 잡히면 끝장이야. 기러니 너라도 중국에 가서 잘 살아라. 좋은 시절이 오면 만나겠지. 우리라고 평생 이렇게 살겠니』
몇날 며칠을 『가자』고 했지만 둘째형은 끝내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주위의 친구들이 脫北하다 잡혀 종신교화원으로 가거나 총 맞아 죽는 걸 본 탓이다.
주천의 두 번째 脫北은 그닥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중국에선 또 다시 떠돌아 다녔다. 청도, 천진 등지의 한국인이 하는 노래방에 취직, 월 600원 정도를 받으면서 1년 가까이 살 수 있었다.
그러다 두 달 전 어머니, 누나와 합류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얘길하지 않았다.
주천에게, 한국에 대해 그전에도 뭘 좀 알고 있었냐고 물었다.
『라지오(라디오)를 통해서 대충 알고 있었디오. 북한에선 라지오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도 있시오. 북한의 라지오는 모두 북한 중앙방송, 하나만 청취하도록스리 조작이 돼 있단 말입니다. 기래, 내 중국에서 조작이 안 된 라지오를 구해 들었지요. 기런데 서울 말씨가 처음엔 영어 같기만 해서 무슨 말인지, 통 못 알아 들었지. 자꾸 들으니까니 알게 됩데다』
주천은 『회령에서, 脫北者들이 코를 철사줄로 꿰인 채 시내를 도는 것을 봤다. 주민들은 脫北者들에게, 「이 반역자야!」 하며 돌을 던지는 것도 봤다』고 한다.
『총살당하는 사람들의 구덕(구덩이)도 팠다』고 한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치는지, 더 이상의 얘기는 하지 않으려 했다.
그동안에도 네 시간이나 흘러 저녁밥 때였다. 나는 훗날 인연이 있으면 다시 만날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하고 그 집을 나왔다.
주천이 얘기하는 동안 말없이 눈물만 떨구던, 60代 초반의 주천의 어머니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천의 누나가 문 밖까지 따라 나오며 한 마디 했다.
『우린 사실 한국 사람들이 도와줘 살고 있시오. 정말 고맙지요. 중국 조선족들마저도, 어떤 사람은 우릴 대놓고 괄세한단 말입네다. 못 살아서 도망쳐온 거렁뱅이라는 거디요. 물론 잘해주는 사람도 많지요. 요즘 한국에서 북조선에다, 쌀을 보낸다는데, 북조선 인민들은 쌀 구경도 못합네다. 다 군량미로 들어갑네다. 옥수수도 북한 서민들에까진 차지가 돌아오지 아이 하지요. 꼭 도와 주려면, 비료를 보내주는 게 가장 좋을 겁네다』
수풍발전소
오후 2시께. (단동에서 80㎞ 떨어진) 관전현 창덕 하구에서 배를 타고 장전향 라고소촌으로 향했다. 뱃길로 1시간쯤 가자 북한 삭주군 청수화학공업단지가 나타난다.
뱃전에서 얼핏 봐도 그 규모가 상당히 컸다. 2km쯤에까지 공장이 잇대 있다. 모두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이곳을 조금 지나자 이내 농촌지역. 강변의 야트막한 언덕에서 중학생 또래의 애들 셋이 춤을 추고 있었다. 그냥 마구잡이로 몸을 흔드는 거였다.
손을 흔들자 이들은 풋감을 줬다. 손으로 주다가 그것도 성에 안 찼는지 발까지 동원하는 거였다. 한국의 옛날 농촌아이들이, 철로가에 주는 「정다운 풋감」이 아니라, 뭔가 불만에 찬 풋감이었다. 씁쓸했다.
관전현 장전향 라고소촌까지는 뱃길로 꼬박 세 시간이 걸렸다.
북한 삭주군 수풍리와 마주한, 200여 가구가 사는 마을. 수풍발전소를 낀 덕에 관광객이 심심찮게 찾아들면서 살림살이가 좋아졌다. 삭주군 수풍발전소는 64만kw의 전력을 생산한다. 라고소촌 사람들은 압록강에서 망둥이, 잉어 등을 잡아 관광객을 상대로 팔아 짭짤한 수입을 올리기도 한다.
나는 60代의 한 조선족을 붙들고 물었다.
『바로 앞의 북한 마을과는 가끔 왕래가 있나요?』
『그딴 건, 묻지 말라우』
그리곤 말문을 애써 닫아 버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곳 사람, 특히 조선족들의 일거수 일투족은 바로 수풍리에서 훤하게 알고 있다고 한다. 한국 사람들과 너무 깊은 얘길를 할 경우 「要주의 인물」이 되는 탓이다.
『전깃불이 수수떡이다』
북한의 수풍발전소 바로 옆엔 조그만 마을이 있다. 발전소 직원들의 숙소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뒤의 민둥산 허리에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 만세」라는 구호가 박혀 있다.
관전현 창덕 하구에서 압록강을 계속 끼고 승용차로 흐른 지 3시간 만에 도착한 集安市(집안시). 집안에서는 가장 좋다는 중심가의 호텔로 갔다.
그러나 뜻밖에 숙박절차가 까다로웠다. 프론트에서 20代 후반의 아가씨가 『여권부터 보여 달라』고 한다. 아주 사무적이다. 서비스란 개념은 아예 없었다.
이어 프린트된 종이를 한 장 꺼내 주며 적으라고 한다. 前 숙박지, 중국 방문 이유, 체류일정 등을 기재하라는 거였다. 10년 전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 기분이었다.
그때 중국에선, 어느 호텔이나 이런 걸 요구했던 것이다. 요즘에도 이런 호텔이 있다니! 거기다 호텔도 우중충했고 너무 낡았다.
「관광도시-集安」과는 너무 동떨어졌다.
5층의 방엘 갔다. 침대와 의자, 그리고 목욕탕이 딸려 있긴 했다. 전깃불을 켰다. 그러나 너무 어두웠다. 촛불 밝기였다. 이걸 북한에선 『전깃불이 수수떡이다』라고 말한다.
숙박료는 1박에 150원. 비수기의 요금 치고는 싼 것도 아니었다. 연변의 수준급 호텔도 비수기엔 150원이나 200원이기 때문이다. 이 호텔의 시설은 한국의 여인숙 정도였다.
조선족 안내인 정관출(42)에게 『왜, 전깃불이 어둡냐?』고 물었다. 대답은 간단했다. 『여기선 그렇다』는 거였다.
목욕을 하기 위해 샤워 꼭지를 틀었다.
그러나 누런 찬물만 쏟아지는 게 아닌가. 온수는 저녁 6시부터 2시간 동안만 공급한다는 거였다. 샤워를 포기하고 대충 얼굴만 훔치고 호텔을 나섰다.
오후 4시께. 호텔 앞엔 오토바이꾼들이 서너 명 진을 치고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오토바이를 타라는 시늉을 해댄다. 정관출은 내게, 『절대 타지 말라』고 한다.
『저눔들은 깡패요. 특히 관광객들만 보면 바가지를 씌우디오. 압록강변과 시내를 한 바퀴 도는데, 1원이면 되는데, 관광객들, 특히 한국 사람에겐 20~30달러를 받아 낸다 말이오. 안 주면 인상을 험하게 쓰고스리, 협잡꾼들인 게지』
호텔 앞 광장공원은 한적했다. 벤치에 앉아 쉬고 있노라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든다.
첫눈에 북한 사람들임을 알 수 있었다. 30代 초반쯤의 두 여자는 검은 통치마에 흰저고리, 가슴엔 김일성 배지를 달고 있다. 나머지 20代 후반의 두 여자는 감색 투피스를 입었다. 모두 검정 통굽 구두를 신고 있다.
대여섯 명의 40~50代 남자들은 검정양복에 채모자를 썼다. 그들은 뭔가 떠들썩하게 말하고 웃으며 기념사진을 찍는다고 정신이 없어 보였다.
한참을 망설이다 그들에게 다가갔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신의주에서 왔습네다. 기런데 선생님은 서울에서 오셨지요? 우린 公務(공무)로 출장 온 겁네다』
『아, 그래요. 요즘 한국과 북한 사이가 많이 개선되고 있는 것 아시죠?』
『기렇겠지요. 우린 본래 한국에 惡(악)감정은 없습네다』
30代의 통치마를 입은 여자가 밝은 목소리로 말한 후 이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더 이상 말을 건넬 수가 없어 슬쩍 그 자리를 떴다.
集安. 길림성의 최남단. 한때 고구려의 도읍지. 사면이 산과 물로 둘러싸여 있고 기후가 온화해 「小江南(소강남)」이라 불린다. 또한 중국에서도 가장 유명한 인삼 産地(산지)다.
集安의 인구는 21만여 명. 이중 조선족은 1만여 명이다. 압록강 건너는 북한 자강도 만포市. 두 곳을 잇는 철도에는 이따금씩 화물열차가 다니고 있었다.
「관광도시-集安」은 역사 속의 도시일 뿐이다. 集安은 중국에서도 발전이 더딘 곳이다. 한국이나 일본 등지에서의 관광객들 때문에 그런대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427년 고구려의 도읍지가 평양으로 옮겨가고 668년에 고구려가 멸망한 후 1000여년 동안 버림받아 왔다. 고구려의 유적들은 세월 속에 잊혀지고 도굴당해 여지없이 파괴됐다.
그러나 아직도 7800여 개의 크고 작은 무덤들이 있다. 集安에서는 돼지우리, 김치 움막까지도 고구려의 궁성 돌로 만들어졌음을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지금 국내성터 주위에는 아파트들이 즐비하게 서있다. 동남 성벽은 허물어지고 대신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나머지 궁성터나 병영, 연병장도 콩과 옥수수밭으로 변한 지 오래다.
『핸드폰씨, 계십니까?』
오후 8시께. 조선족들이 몰려 사는 녹강촌을 찾았다. 5층짜리 아파트 3棟(동)에 500여 가구의 조선족들이 살고 있다.
녹강촌은 본디 농촌 지역이었으나 集安시에 편입되면서 대지보상을 받은 돈으로 아파트를 지었다고 한다.
이곳에선 만난 「기」씨라고 밝히는 40代의 한 조선족과 얘길 나누다 脫北者에 대한 얘길 들었다.
『올 7월 초쯤 됐을 거우다. 내 관전으로 가는 버스에서 50代의 한 부부를 만났는데, 차림새는 멀건했지만두, 어째 낌새가 이상하더라 말입데. 脫北한 사람 같더란 말임메. 내, 그래 조용조용 물었더이, 그렇다고 합데. 버스라 사람들이 많아서스리, 내 명함만 주고 내렸더랬지. 기런데, 한 보름쯤 후엔 전화가 왔는데, 대뜸 「핸드폰씨, 계십네까?」 그러는 게라. 하도 어이가 없어서, 「내, 핸드폰씨가 아이고 기 아무개」라고 말했디.
기래 어느 은밀한 곳에서 만났더랬는데. 대학교원(교수)이라는데, 건축학을 했다던가 기래요. 그 교원부부는, 내게 한국에 갈 수 있게 해달라고 하는데, 내 무슨 재간이 있어야지. 지갑에 있던 돈 500원을 털어주고 보냈더랬지. 그 이후엔 아무런 연락이 없지. 기런데, 대학교원이란 사람이가, 핸드폰을 처음 본 게지. 명함에다스리 핸드폰이라 적어놨는데, 기걸 보고 글쎄, 내 이름이 핸드폰이라고 여긴 게지』
2년 전에만 해도 압록강에 얼음이 풀리면 이따금씩 시체가 떠내려 왔다. 물론 脫北하다 죽은 북한 사람들이다.
기씨는 말을 이었다.
『1998년도에 정말 脫北者들이 많았수다. 한달이 먼, 그저 10여 명도 넘었더랬지. 한번은 20代 아가씨들 셋이 集安에 왔더랬지. 기중 1명은 농촌으로 가 중국인과 결혼해 산다고 하고, 1명은 식당에서 일을 했더랬는데, 덜컥 임신을 했더랬지. 기래 병원에서 애를 떼다가스리, 누군가가 찌르는 통에 북조선으로 끌려 갔다고 하구, 나머지 1명은 어디론가 내뺐다고 합데』
본디 북한돈 1원은 중국돈 1원 몇십전 꼴로 북한돈이 비싸다. 그러나 북한이 경제가 무너지면서 북한돈은 망명정부의 지폐만큼이나 가치가 폭락했다.
이제 중국돈 1원은 북한돈 30~40원 꼴이다. 이것도 상황에 따라 40~50원꼴이 되기도 한다고 한다. 集安에선 관광객들을 상대로 북한돈 1원을 중국돈 1원과 바꿔주는 장사꾼도 있는데, 앉은 자리에서 30~40배의 폭리를 취하는 꼴이다.
보름 전에 만포를 다녀왔다는 40代 초반의 한 조선족 보따리 장수는 말했다.
『북조선 돈으론 아무것도 못 사우. 노임이라고 몇십원 받아 봐야 헛방이지. 기러니, 모든 노동자들이 국가에 무료로 봉사하는 게지. 량권(식권) 몇장 받는 것이가 차라리 실속이 있지』
『북한 사람들이 한국의 원조 믿고 3년 내 중국 따라 잡는다고 큰 소리』
조선족 무역상 박상동(38)을 만났다. 서울의 월급장이만큼이나 말쑥하게 차려 입었다. 북한 사투리도 거의 쓰지 않았다. 달걀형의 은색테 안경을 끼고 있었다.
『1년 전에만 해도 북한에서 통나무를 수입하고 식량을 수출하는 등 생필품 수준의 물품을 취급했는데, 요즘은 설비자재를 취급합니다. 2개월 전엔 러시아제 트럭 다섯 대를 수입해 북한에다 수출했지요. 단, 물건은 북한에서 내 통장에 돈을 입금한 뒤에라야 보내 줍니다. 결제는 달러로 하는데 제때 정확히 보내줍니다. 통행증으로 필요時 수시로 만포를 드나 듭니다. 앞으로 보따리 장수들은 줄어들 겁니다. 북한의 경제가 점차 나아지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박상동은 또 만포 사람들을 포함해 북한사람들의 최근 사정을 전해준다.
『1997년, 1998년이 가장 어려웠었습니다. 한국의 IMF 시기와 묘하게 맞아 떨어졌지요. 지금도 도시는 많이 나아졌지만, 농촌은 아직 많이 힘듭니다. 아이들이, 버린 사과 꼭다리까지 주워 먹는 판국이지요. 그러나, 요즘 들어 북한 사람들은 「앞으로 3년 후면 중국을 따라 잡는다」고 큰 소릴 칩니다. 아마도 한국의 원조를 믿는 모양입니다』
集安에서 臨江(임강) 가는 길은 해발 2000여 m의 九折羊腸(구절양장)이다. 밑을 보면 천길 골짜기. 어지럽다. 강원도 대관령길은 여기에 비하면 양반이다. 1차선 도로. 차들의 통행이 뜸하다. 승용차는 온길을 전세낸 듯 달렸다.
10월 중순의 이곳도 이미 晩秋. 滿山紅葉(만산홍엽)이다. 선명한 노란빛과 핏빛이 대조를 이루며 한폭의 수채화를 만들고 있었다.
달리는 승용차에 이따금씩 휘감기는 낙엽. 「憂愁(우수)」와 「別離(별리)」, 그리고 「첫사랑」을 떠올리게 했다.
그 길을 네 시간이나 달리자 가까스로 평지가 나타났다. 다시 두 시간을 꼬박 달리고서야 臨江이 다가왔다.
가는 곳곳 논두렁이나 산비탈엔 비닐로 송유관처럼 만든 울타리가 끝없이 이어졌다. 만리장성 같다. 그 울타리는 바로 참개구리를 잡기 위한 것이었다.
참개구리 기름은 1㎏에 1600원을 호가한다고 한다. 참개구리 요리는 한 접시(다섯마리)에 100원을 넘었다. 정력에 좋다고 한다.
실제 臨江에 거의 도착할 즈음, 한 젊은 중국인 사내가 참개구리 열 마리를 실에 꿰어 팔고 있었다.
중강진을 바라보며
臨江. 압록강 건너 맞은편은 북한 자강도 중강진. 「한국에서 가장 춥다」고 늘상 얘길 듣던 그 중강진이었다. 그러나 중강진 시내는 산을 하나 넘어야 있고 만포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압록강변 농촌 마을이 다.
오후 다섯시께. 강너머로 뵈는 중강진 농촌마을. 물동이를 이고 가는 아낙네들. 저녁밥을 짓는 연기. 1950년대의, 한국의 농촌이 아스라하게 피어났다. 강변에서 그물질하는 사내는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손을 흔들며 『안녕하세요』를 외쳤지만 예상대로 반응이 없었다. 비단 여기뿐만이 아니다. 어디서도 손을 흔드는 북한 사람들을 본 적이 없다. 약속이나 한 걸까.
농사를 짓는다는 40代의 한 조선족 여자는 한국을 엄청난 나라로 알고 있었다.
『그저, 남조선이가, 이제 잘 사니까스리, 우리 조선족도 중국인들에게, 氣(기)가 산단 말이오. 남조선이가, 세계에서 네 번째로 잘 산다고 합데. 기리고, 호주 올림픽에서 남조선과 북조선이가 손잡고 입장하는 걸 보고 내레, 밤새 울었지요』
청진에서 평양까지 기차로 1주일이 걸려
다음날 臨江과 중강진을 연결하는 철교에 올랐다. 중국 군인들의 입회 아래 딱 중간지점까지 갈 수가 있었다. 중강진 강변엔 미루나무가 마치 철벽처럼 北으로의 眺望(조망)을 가로막고 있다.
조선족 안내인은 중강진의 옥수수밭을 가리키며 말했다.
『중강진의 옥수수는 臨江 옥수수보다 키가 절반밖에 아이 되오. 기렇다고 여기나 저기나, 압록강만 아니면 바로 붙어 있는데, 토질이 다르겠슴? 북조선은 비료가 모자란 게지. 기러고 씨만 뿌려 놓고 별로 관리를 아이하는 것 같단 말이오』
臨江 강변 유원지로 갔다. 러시아식 집들이 계획적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여기저기에 노점상들이 있고 야바위꾼들도 있었다.
말 타는 곳도 있었다. 2원을 주고 망원경을 통해 중강진을 봤다. 오후 4시께였는데 삭정이단과 볏짚을 이고 가는 아낙네들이 보였다.
강가엔 빨래하는 아낙네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아이들, 군복입은 사내들 등이 보였다. 대부분 검정색이나 국방색 계통의 옷을 입고 있어 우중충해 보였다. 이따금씩 하얀 색깔의 옷도 보이긴 했다.
이날 밤. 묵고 있는 호텔에서 40代의 한 남자 脫北者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고향이나 人的사항은 전혀 말하지 않았다. 청진에서 평양까지 기차를 타고 갔을 때의 얘기부터 꺼냈다.
『1998년이었소. 가을이었는데, 날씨는 화창했디오. 청진에서 기차를 탔소. 평양을 가자면, 운수대통하면 24시간, 재수 없으면 1주일이 걸립네다. 남조선 사람들은 내 얘길 안 믿을 거우다. 기러나, 내가 왜 이 마당에 거짓부렁을 하겠수까』
그러면서 그 사내는, 얼마 전 친척이 갔다 줬다는 북한 담배 「평양」을 한 개비 물었다.
『이 려과(필터)담배, 북조선에선 아무나 피울 수 없는 거우다. 黨간부들이나 부자가 아니먼 구경하기도 힘드우다』
그 사내는 한동안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
『북조선의 기차는 전기로 가지요. 그런데 전력이 부족하니까니, 이따금씩 뒷걸음 친다 말이우. 한번은 기차가 급경사에서 뒷걸음을 하는 통에 여러 사람이 沒死(몰사)하는 참변도 있었지요. 기차는 보통 전동기가 8개인데 낡아서, 계속 마사진단(부서진단) 말이오. 내가 탄 기차는 8개의 전동기 중 5개가 마사지고 3개만 가지고 움직이니까니 무슨 속력이 있겠슴.
기차가 평양까지 1주일을 가자면, 돈 없는 사람은 먹을 걸 구할 수도 없어 더러는 굶어 죽기도 합네다. 청진에선 기차가 임산부처럼 배가 불룩해집네다. 무슨 소린가 하니, 기차 지붕에까지 빽빽이 앉아 있으니 기렇지. 왜, 6·25 동란 때, 피란민 실은 기차 있디오, 기걸 연상하먼 틀림없수다. 또 한번은 기차 빵통(화통) 위에 탄 사람이가 感電(감전)당해 즉사한 적도 있우다. 그 사람은 배낭에 도끼를 넣고 탔더랬는데 도끼 대가리가 전기에 닿아 죽은 거디오. 와, 그 사람의 혀가 말려서 입안으로 들어가 있었더랬지』
「양담배 세 막대기」에 평양 入城
평양에서 그닥 멀지 않은 신성천역쯤에 가면 그 많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텅텅 비게 된다. 이곳에서 승무원이 올라와 여행증명서, 차표를 검사한다고 했다.
『기런데, 여행증명서에도 가짜가 있단 말이오. 여기저기서, 빽을 동원해 가짜로 만든 증명서가 많다 보니까니, 승인번호가 겹치기도 한단 말이지. 내가, 발급받은 것도 쎈 사람을 통해 가짜로 발급받은 건데, 이게 역전 검사에서 들통이 났단 말이우다. 사지에 힘이 쭈욱 빠집데다.
내, 기래 아는 보위안전부원에게 쭈루룩 달려갔디오. 얘길 하니까니, 「동무, 걱정 말라요」 합디다. 얼마 아이 있어 내 여행증명서에 적힌 「청진시로 다시 돌아가시오」가 지워지고 대신 「청진시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글씨가 적혔더랬지. 기랬는데, 세상엔 공짜가 없는 거우다. 그 보위안전부원이 고려호텔로 가자고 그러두만. 외화가게로 나를 데려가더니만, 양담배 세 막대기(보루)를 사달라는 거우다.
어쩌겠슴. 비상금으로 넣고 있던 금쪽 같은 달러를 꺼내스리, 내 사줬지. 기랬더니 이 보위안전부원이 그럽디다. 「동무, 다음부턴 마음 턱 놓구스리 평양에 오우. 내 이름만 대면 다 통할 거우다」라고 큰소리 뻥뻥 칩데다』
이 脫北者는 여기서 일단 말을 끊었다. 또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물더니 말을 이었다.
『군인들도 굶는 건 마찬가지우』
『내, 지금 당장 먹을 것 없어도 자유가 있어 훨훨 날 것 같수다. 기러고 중국에선 굶어 죽는 법은 없수다. 먹을 게 넘쳐 난단 말이우』
그러면서, 퍽퍽 울었다.
『내, 이 얘긴 아이 하려 했는데… 내, 세살 아래 남동생이 굶어 죽었수다. 굶어 죽은 동생의 항문을 보니, 어른 주먹만큼 커져 있습데다. 지금도 그 생각만 하먼, 미치겠수다. 북조선이 옛날엔 잘살았다구 기러는데, 내 기억으론 한번도 잘산 적이 없수다. 다만 지금처럼 굶어 죽는 사람은 없었다는 말이지. 친척이 일본에 있으면 부자디오. 그밖엔 전부 못 사우. 특수층만 빼고 말이지요』
이 脫北者가 청진의 어느 고급중학교에 다니던 1975년. 한번은 농촌에 갔다. 농촌일손돕기 같은 거였다. 여름이었다. 죽어라고 하루종일 일을 했다. 그러나 가지고 간 양권(식권)으로도 뭘 사먹을 수가 없었다. 그만큼 모두 가난했다. 이틀을 내리 굶었다.
『정말 하늘이 노랗게 보입데다. 농가 부엌에 놓여 있는 까만 비누가 떡으로 보여, 집어 먹을 뻔한 적도 있었더랬지. 그 다음날, 하도 일을 열심히 하니까니, 안 됐던지 그 동네 책임자가 감자를 한 소쿠리 내주며 다른 동무들한데는 얘기 말라고 했지』
북한 농촌 곳곳에선 장마당이 선다. 원래 농토산물밖에 거래를 못하게 돼있다. 그러나 식량사정이 악화된 1988년부터 장마당에 중국상품이 발을 붙이기 시작했다.
그전에도 소규모의 장마당은 있었다, 중국 조선족들이 배갈, 쌀, 담배 등을 들고 친척을 방문하면서부터다. 이 물품이 흘러 장마당꼴이 형성됐다.
『金日成이가 사망하면서부터 점차 북조선이 어려워지더니, 1997년부터는 정말 어려웠댔지. 쌀 배급이 끊어지기 시작했지. 기래, 대부분의 농민들이, 강냉이, 밀가루, 콩비지를 섞어 죽을 쒀 먹었오. 여기다 된장을 조금 푼, 시라지국(시래기국)을 먹었지요. 지금도 열 집이면 일곱 집이 그렇게 먹구 살지』
부자라고 해야 돈이 많이 있는 건 아니다. 집이 있고 TV나 냉장고 등이 있으면 부자로 분류된다. 대부분의 농민들은 하루살이 인생이다. 그날 벌어 그날 먹고 산다. 1998년엔 「하루에 한 끼 굶기 운동」을 했다. 두 끼는 멀건 죽을 먹는다.
직장에선 식량배급표를 준다. 갓난 아기는 쌀 100g, 소학생에겐 400g, 중학생은 500g, 공민은 700g이다.
그러나 식량배급표도 1998년에 들어서는 쓸모가 없어졌다. 배급소에도 쌀이 없기 때문이다. 밀린 배급표가 수북이 쌓이기가 일쑤였다.
가을엔, 그래도 추수절이 돼선지 통강냉이 배급을 준다. 이때 모아둔 배급표가 있으면 물론 도움이 된다. 그러나 당장 배가 고픈 농민들은 가을이 되기 전에 배급표를 팔아 먹기 때문에 통강냉이마저도 차례가 오지 않는다.
金日成 생일이나 북조선 노동당 창건일(10월10일)엔 한 가구당 쌀 1kg씩이 돌아 온다. 또 설날이면 쌀 2kg을 준다.
『남조선이나 미국, 일본에서 주는 쌀 말이우, 이건 몽땅 다 그저 군량미로 들어가오. 한번 들어가면 절대 아이 나오지. 오래 돼 냄새가 나야, 그때서야 배급쌀이 돼 나온단 말이지. 원조, 그딴 거 아무리 주면 뭘 하우. 다, 높은 놈들 배만 채우는 게지. 군인들도 굶는 건 마찬가지우』
이 脫北者는 중국에 있으면서 그동안 일곱 번이나 북한의 청진을 들락댔다. 그러다 여섯 번째에, 청진의 작은 분주소(파출소)에 잡혀갔다. 보름을 갇혀 있다 나왔다.
『야, 분주소 놈들 독하오. 분주소에 떠억 들어가자마자 몇놈이 달려들더이 나를 개 패듯이 패는 거우다. 오후 5시부터 밤 12시까지 발길질, 몽둥이 찜질 등 무차별로 패는 거라. 상처 따위는 관계치 아이하지. 심사도 아이하오. 무조건, 때려서 죄를 뽑자(자백)는 거지. 반쯤 죽이는 거우다.
다른 건, 기래도 참겠는데, 양 오금에 각목을 끼우고 무릎을 꿇리고 앉혀 위에서 누르면, 오금이 마사지지. 그저, 제입으로 무슨 죄든 지었다고 하는 게 상책이지. 안 맞을려고, 안 한 것도 했다고 하는 게지. 나는, 「기차 대가리(화통)를 도둑질했다」고 썼다가 「민하게(미련하게) 논다」고 또 터졌지. 기래도, 분주소 감방은 좋은 거우다. 한번에 100원씩 약을 쓰먼, 집에서 밥을 날라다 먹게끔, 눈도 감아 준단 말이지』
『개대가리, 또 하나 들어왔구나!』
안전부(경찰국) 감방은 도살장이다. 한번 들어가면 최소한 6개월은 나올 수가 없다. 짠물(죄를 짜내는 것, 자백하게 하는 고문)을 6개월간 버텨야 살아 나올 수가 있다. 그러나 6개월간의 고문을 견뎌낼 독종은 없다. 대부분 죽어서야 나온다. 이 脫北者는 안전부 감방에도 가봤다고 한다. 한 2개월 살다가 누가 뒤를 봐줘 살아 나왔다.
안전부 감방은 지하 2층으로 돼 있었다. 입구는 전기문이다. 버튼을 누르면 문이 열린다. 감방 복도에 들어서면 간수들이 반갑게(?) 맞아 준다.
『개대가리(신입 죄수) 또 하나 들어왔구나』
간수들은 예외없이 개대가리를 반쯤 죽여 놓는다. 기를 팍 죽여 놔야 고분고분해지기 때문이다.
『너, 이름 뭐야?』
대답도 하기 전에 간수는 말한다.
『개대가리, 너, 오늘부터 이름은 없다. 2000번이다』
다음엔 교정 간수가 들어 온다. 감방 내 온갖 규칙을 가르쳐 준다.
『누가 부르면, 예, 2000번입니다, 또 어디서 왔어 하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청진시, 하는 식으로 씩씩하게 말해야 한다, 알겠어』
이후 이 개대가리가 씩씩하게 대답을 안하면, 이번엔 담담 교정간수가 반쯤 죽게 된다.
겨울엔 그야말로 죽을 판이다. 감방 새로 통바람이 불어온다. 얼어 죽지 않기 위해 자연 독기가 생긴다. 통상 한 평 반쯤의 감방에 예닐곱 명이 들어 앉았다. 죄수들은 간수를 「선생님」이라 불러야 한다. 구멍(배식구)을 통해 밥이 들어온다.
『야, 밥 먹어라』
무 시라지국(시래기국)에 삶은 깡치(통강냉이를 통째로 누른 것) 한 덩이가 전부다. 깡치는 주먹으로 짜면 한숟갈 정도다. 무 시라지국은 모래가 버석댄다. 추수 후 여기저기 쓰레기처럼 뒹구는 무를 주워다, 소금을 뿌려 만든 것이다.
『죄수들도 입이 쎄고(말발이 좋고), 힘이 쎄야 제 밥그릇을 챙길 수 있단 말이지. 순둥이는 머저리(바보) 취급당하지. 힘쎈놈한데 깡치도 뺏긴단 말이지. 일단, 이 감방에 들어오면, 늙은이, 젊은이가 없우. 서로 반말을 하니까니』
겨울의 감방엔 이가 득실댄다. 이도 쌀알만큼이나 크다. 속옷을 한 번만 털어도, 이가 여기저기 툭툭 떨어진다.
아침 5시엔 「공기조절(통풍)」을 한다고 또 한바탕 난리다. 간수들은 이 감방 저 감방을 다니며 『문 열어라』며 고함치고 다닌다.
『「이잡이 시간」도 준단 말이지. 서로서로 이를 잡아 주는데, 이를 잡아 양재기에 털어 놓고스리, 흰 천을 덮고 누르면 흰 천이 금세 붉게 물든단 말이우』
계획도시-김정숙 邑
臨江에서 長白(장백) 가는 길. 해발 1500m쯤의 高山(고산)지대가 펼쳐진다. 개마고원 같았다. 침엽수, 활엽수 등 키가 크고 쭉쭉 뻗은 나무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다. 여기다 잎들은 황, 홍색으로 곱게 물들어 있다. 캐나다의 평원을 지나치는 것 같다. 고산지대는 승용차로 2시간 반을 가는 동안에도 끝나지 않았다. 중국은 큰나라였다.
장백현 13도구 마을.
승용차를 놓고 식당에서 압록강변으로 200m 정도 걸어 들어갔다. 북한의 김정숙邑(읍)이 보였다. 전원도시였다. 25년 전에 계획도시로 만들었다고 한다.
驛舍(역사)에는 金日成 초상화가 걸려 있다. 그리고 옆 건물 벽 윗부분엔 「위대한 공산주의 혁명투사 김정숙 동지를 따라 배우자」라고 붉은 색으로 큰 글씨가 씌어져 있다.
오후 6시가 되자 김정숙邑은 일시에 전깃불이 켜졌다. 김정숙邑 옆에는 김형직 邑이 있다.
다시 長白市로 승용차는 길을 줄였다. 잘 포장된 도로에 이따금씩 큰 돌멩이가 몇 개씩인가 놓여 있었다. 이는 차의 과속을 방지키 위한 것이란다.
장백현 15도구에는 조선족 민속촌 건설이 한창이었다. 현 차원의 공사인데, 이미 큰 기와집 하나는 공사가 마무리되고 있었다.
장백현은 1988년 중국 정부에서 장백 조선족 자치현으로 지정한 곳이다.
이어 16도구. 맞은편 북한 쪽엔, 民家(민가)가 아닌, 한국의 시골 초등학교 같은 건물이 나타난다. 무슨 정보기관이란다. 너댓 채의 건물에도 에누리 없이 구호가 씌어져 있다.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
북한의 여느 국경도시와는 다른 혜산市
長白市. 해발 869m의 탑산에 올랐다. 강 건너 북한 혜산市가 한눈에 찬다. 혜산은 강변을 따라 길게 누워 있는데, 얼핏 봐도 장백보다 커보였다. 혜산은 양강도 도청소재지. 평양 신의주 다음으로 잘사는 도시라고 한다.
망원경을 통해 본 혜산엔 「항일전쟁기념승리탑」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깃발 아래 무장한 용사들이 돌격하는 모양이 조각돼 있다. 혜산은 비교적 포장이 잘돼 있고 나무도 잘 가꾸어져 있었다.
혜산은 압록강 연안의 여느 북한 도시보다 활기차 보였다. 이따금씩 매미차(승용차)도 보였다. 사람들의 움직임도 다소 포착됐다. 여느 국경도시와는 확실히 달랐다.
장백의 인구는 7만6000여 명. 이중 조선족은 1만3000여 명. 장백은 고산지대로 춥다. 10여 년 전만 해도 9월 말이면 눈이 발목을 덮을 만큼 내렸다. 그러나 요즘들어 지구 온난화 현상 때문인지 눈이 적게 내린다고 한다.
되레 서울에 눈이 많이 온다고 부러워하는 눈치다.
겨울 평균기온은 영하 20도. 추울 땐 영하 30도까지도 내려간다. 장백 시내엔 한글 간판이 적지않게 눈에 띈다. 하나같이 한자와 병기돼 있다. 「정양 살진소(正陽 肥牛)」 「장백리발점」 「설아 머리방(미장원)」 「려인(麗人) 촬영사(사진관)」 「금화 미발청(美髮廳·미장원) 「창통 컴퓨터(電腦)」 「란란 수발방(修髮房·머리고치는 방) 등의 간판이 인상적이다.
지금도 두만강 연안 조선족들은 다른 민족과 결혼하면 주위의 말밥(입살)에 오르내린다. 물론 많이 희석되긴 했지만. 장백에서 조그마한 음식점을 하는 한 조선족 여자는 말한다.
『요즘, 뉘기가 꼭 조선족끼리의 결혼만 주장하겠슴메. 저의 시어머니는 漢族(한족), 남편은 몽골족, 시누이 남편 중 하나는 滿族(만족), 다른 하나는 回族(회족)입네. 다섯 민족이 함께 살아도 일없슴메』
장백에도 1997년엔 脫北者들이 쏟아졌다. 개인보다는 가족단위가 많았다. 하루에 많은 때는 100여 명이 넘었지만, 이중 절반은 잡혀 북한으로 되돌아 갔단다.
쇠고기 장사를 한다는, 30代 후반의 한 조선족 사내는 『脫北者들은 혜산市가 아니라 주로 내지인들이었다』고 말한다.
『굶는 데는 천하장사가 없습네다. 아무리 압록강이 넓다한들, 감시가 심하다 한들, 그기 무슨 소용이오. 脫北者들은 산에 숨기도 하고 다른 내지로 내뺐지. 장백의 조선족들, 脫北者들을 참 많이 도왔습네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돈 주고, 다둑거려 북조선으로 돌려 보냈지요. 중국이라고 어디 호락호락합네까. 중국말도 한 마디 못하고, 친척도 없는데,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중국 쫄개미들아, 담배 한 갑 달라야』
요즘 이곳의 압록강은 개울이 된다. 갈수기인 겨울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어린아이라도 건널 수 있겠네요. 북한에서 중국으로 맘만 먹으면 올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자, 50代의 한 조선족 아주머니는 어이 없다는 듯 웃기부터 했다.
『기게, 건너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닙메. 북조선 강변엔, 5리에 하나씩 국경경비 초소가 있디요. 밤낮으로 잠복근무를 하는데, 군인들이 망원경을 들고 설칩네다. 낮이면 5리 안쪽은 개미새끼 움직이는 것까지 다 볼 수 있습네다. 기래, 누가 몰래 강을 건너기라도 하먼 재빨리 가까운 초소로 연락해 제꺽 잡아 버립네다. 북조선 군인아들, 아주 독하고 골(머리)도 잘 돌아가지』
옆에서 50代 중반의 한 조선족 사내가 말을 거든다.
『한낮에 압록강가에 낚시를 하러 가면, 북조선 군인 아들이 말을 걸어옵네다. 「중국 쫄개미(하인)들아. 중국 자본주의놈들아」 「야, 담배 한 갑만 빌려 달라야」 하며 실실 웃는단 말이지. 기래 담배가 있으면 비닐에 싸서 던져주지』
북한 국방경비대원 중 더러는 중국돈 100원을 주면 渡江(도강)을 눈감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재수 없으면 돈도 약발이 없다.
脫北者 한 사람만 잡아도 군인들은 공산당원이 되고 급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전사에서 상등병이 되면 끗발도 세진다. 상등병이 전사에게 양말 빠는 것까지 시킨다.
북한 군인들의 의무복무기간은 10년이다. 脫北者가 엄청나게 쏟아지던 1997년부터 당초 8년에서 2년 연장됐다고 한다.
고급중학교(고등학교)를 나와 군사학교에 가서 4년간 교육을 받으면 군관(장교)이 된다. 그러나 군관은 토대(성분)가 나쁘면 될 수가 없다. 월남가족이라도 있으면 꿈도 꿀 수 없다.
압록강을 사이에 둔 중국과 북한의 국경지대. 중국 쪽은 환한데, 북한 쪽은 어두컴컴하다. 그런데 북한 쪽이 환할 때가 있다. 한국에서 군사 작전이 있을 때다. 장백에서 묵은 호텔도 節電(절전), 節水(절수)가 철저했다. 밤 12시면 엘리베이터 운행이 정지된다. 더운 물은 아침 저녁 1시간만 나왔다.
다음날 長白 시내를 걸었다. 장백극장은 선전 포스터 하나 없다. 연극이나 영화 상영이 없는 날이었다. 영화관 겸용 극장에는 미국, 인도, 일본 영화가 곧잘 상영된다.
장백에서 혜산까지의 통행증을 만드는 데는 물론 돈이 든다. 통행증 1일짜리는 300원, 2일짜리 700원, 3일짜리 1100원이다. 7일짜리는 주로 관광용인데 장백에선 없다. 연길에는 있는데 기천원을 呼價(호가)한다. 7일짜리는 평양에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보름 전에 2일짜리 통행증으로 혜산을 다녀왔다는, 30代 중반의 한 중국인은 말한다.
『북조선 사람들, 참 친절하다. 그러나 어딜 가도 감시원이 꼭 따라 붙어 불편하다. 여기저기, 마음대로 구경하고 싶은데 그게 안 된다. 감시원도 친절하긴 하다. 그러나 서민들과는 접촉을 절대 못하게 한다. 관광도 지정된 코스만 다녀야 한다. 내가 묵은 호텔에는, 金大中 대통령과 金正日 위원장이 악수하는 사진이 걸려 있었다』
장백에선 수돗물을 그냥 마신다. 압록강물을 정수한 것이다. 물세는 1인당 3원이다.
두만강 1000리
무시로 드나들던, 두만강 국경
두만강 1000리. 두만강은 광복 후 오랫동안 국경 구실을 제대로 못했다. 중국과 북한. 같은 사회주의 국가라는 명분에 묻혀 국경이 무시됐다.
兩岸의 사람들은 통행이 자유로웠다. 여권이나 통행증 따위가 없어도 잘만 왕래했다.
「만주」. 통상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의 3省(성)을 말한다. 조선족은 중국에서 열한 번째로 많은 소수민족이다. 조선족은 대부분 동북3성에 살고 있는데 200만명 정도다. 이중 63%는 길림성에, 25%는 흑룡강성에, 나머지 11%는 요녕성에 있다.
연변에만 70만명이 살고 있는데 특히 두만강변에 집중해 있다. 그러나 조선족은 연변 총인구의 38%를 차지할 뿐이다. 연변은 한반도의 5분의 1만하다.
연변에는 延吉(연길) 圖們(도문), 龍井(용정), 和龍(화룡), 春(훈춘), 汪淸(왕청), 安圖(안도), 敦化(돈화) 등의 市와 현이 포함돼 있다. 이중 돈화는 1958년 10월에 연변에 편입됐다. 연변은 북한(523㎞) 및 소련(223㎞)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조선족들은 대부분 100가구 이상의 집단생활을 하고 있어, 우리나라 各道의 방언이 그대로 살아 있다. 두만강변은 함경도, 압록강변은 평안도, 그리고 북쪽의 흑룡강성은 경상도와 전라도 방언을 쓴다.
길림성 화룡시 고성리 숭선진. 여기서 가뜩이나 좁은 두만강 폭은 더욱 좁아져 있다. 오후 2시. 개울 같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 양강도 대홍단郡 삼장리와 중국 숭선진이 마주하고 있다. 아니 붙어 있다. 불과 100여 m 거리엔 함경북도 무산군이 잇대 있다.
숭선진의 두만강가에 선다. 간간이 흩뿌리는 빗발. 삼장리의 회색빛 낡은 건물 20여 채가 눈에 가득 들어 온다. 한 건물 벽에 팔자좋게 누워 있는 빨간색 구호.
「21세기의 태양 김정일 장군 만세」
40代 노동자로 뵈는 한 사내가 강가에 나와 얼굴을 몇번인가 씻더니 이내 자리를 뜬다. 숭선진 쪽에서 누군가가 말을 붙인다.
『안녕하세요』
사내는 들은 척도 않고 잰걸음으로 사라진다. 빗발은 잦아 들고 얇은 햇살이 두만강 위에 내린다. 부르릉, 부르릉. 강한 엔진음을 내며 실한 트럭이 대여섯 대 줄을 지어 어디론가 가고 있다. 트럭들엔 노동자 몇 사람과 군인들이 각각 타고 있다. 숭선진 쪽으론 눈길도 주지 않는다.
『저 트럭은 어디로 가는 겁니까?』
『아, 저거요. 벌목장으로 가는 겁네다』 40代의, 조선족 사내가 이내 말을 받았다.
『저 트럭은 북한제입니까? 아주 좋아 뵈네요』
『아닙네다. 저건, 일제야요. 삼장리 사람들이 공작(일)을 잘해 쌀 소출을 많이 올린다고스리, 김정일 장군이 상으로 내린 겁네다』
「딸을 팔아 먹는다」는 말의 속사정
숭선진의 한 농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슬레이트를 이고 있는 집. 울타리도 없다. 누런 개와 까만 개가 꽁지를 살래살래 흔들며 반긴다. 100여 평쯤 되는 남새밭도 있다.
한 칸짜리 방. 가장자리의 솥에서 구수한 된장냄새가 풀풀 난다. 40代 중반의 조선족 주인 사내는 한국의 갈데없는 농부 몰골이다.
둥근 소반에는 배갈 2병, 김치와 콩나물국, 명태, 시래기국 그리고 메기탕이 올라 있다.
메기는 집앞 두만강에서 건진 것이다. 팔뚝만한 게, 한국 메기보다 갑절 굵었다. 명태는 북한산으로 속살이 아주 연했다. 포들포들하게 씹히는 맛이 일품이었다.
30代 후반쯤의 주인집 아주머니는 별 말이 없었다. 그저 수줍게 웃으며 간신히 한마디 했을 뿐이다.
『아주바이, 차린 건 없수다. 많이 드시기요』
주인사내는 두서너 잔의 배갈에 불콰해진 얼굴로 푸념했다.
『북조선 사람들은 정말 불쌍하다이. 살기가 너무 바쁘오(어렵소). 제 아버지가 딸을 팔아먹는단 말이오. 중국 사람에게스리. 이게 어디 인간이 할 짓임메』
「딸을 팔아먹는다」는 말의 속사정은 다르다.
북한의 가난한 아버지는 딸의 입 하나라도 건사하라고 중국 남자에게 주고 만다. 이럴 경우 예부터 「처녀 기근」에 시달려 온 중국 남자 쪽에서 몇천원(한국돈 기십만원)씩을 여자측에 건네는데 이걸 빗댄 말이다.
30∼40년 전 한국에서 딸을 식모로 보낸 「한국의 가난한 아버지」와 닮아 있다.
「한국 손님」을 보러 온 몇몇 조선족 사내들은 각각 사연들을 보탰다.
『북조선에서 명색이 대학선생질을 한다는 한 중늙은이가, 지난 늦여름에 이곳에 슬쩍 왔지비. 그 꼴이라니, 상거렁뱅이였수다. 그래도 자존심은 셌댔지. 감자를 비럭질도 아이 했지. 여기저기 밭에서 이삭줍듯 주워낸 감자가 얼추 한 가마니가 됐더랬소. 그걸 가지고스리 한밤중에 渡江했는데, 뒤에 들었소만 그걸 인민군들이 전부 뺏았다고 합데. 세상에 벼룩의 간을 빼먹지, 그게 인간의 탈을 쓰고 할 짓인메』
『탈북자들 중에는, 중국 기관에 뇌물을 기천원(한국돈 몇 십만원)을 멕이고 중국 공민증을 구한 사람도 있다이. 기러고, 북조선에서 스리, 똘방한(똑똑한) 사람이 아이먼 탈북도 못한다는 게지』
『1980년대 초만 해도 북조선이가, 여기 중국보다 살림살이가 나았음메. 이젠 역전됐으니, 세상일 참 알다가도 모르겠수다』
『여름엔 강물이 불어 북조선에서스리, 渡江이 많지 않수다. 그러이 얼음이 깡깡 어는 三冬(삼동)에야 북조선 사람들이가 자주 들락댄단 말이오』
『연변에 사는 조선족들도 문제가 많단 말이지. 도대체, 아새끼들을 생산하지 않으려 한단 말이오. 아새끼 적게 낳는 게 상책이라는 게지. 살기가 바쁘니까 기렇겠지만스리. 그러이, 조선족들 씨가 마를 판이오. 또한 조선족 체니들도 이제는, 중국인에게도 시집을 간단 말이지. 아, 10년 전만 해도 조선족 사람끼리가 아니면 혼인을 아이했단 말이오』
앞문을 막으면 뒷문이 열린다
중국 內 조선족이 가장 많이 산다는 연변도 시나브로 조선족이 줄고 있다. 10년전, 조선족과 중국인의 비율이 70대 30 쯤 됐으나 이젠 역전되고 있다.
한때 조선족 비율이 80%를 웃돌던 변방의 농촌도 이젠 20%도 채 안 되는 곳이 수두룩하다. 본디 두만강 연안 농촌은 거의 모두가 조선족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절반이 중국인이다. 1970년대까지 漢族이 단 1가구도 살지 않던 숭선진에 지금은 중국인이 1000여 명을 헤아리게 됐다.
조선족 마을이 중국인 마을로 뒤바뀐 사례도 허다하다. 화룡시 숭선진 하천과 원봉, 로과진 치마대 등은 중국인들이 차고 앉았다.
「연변조선족자치주」라는 말이 무색하게, 나날이 조선족은 줄고 있다. 이러다간 중국 조선족들은 화롯가에 떨어지는 눈 처럼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조선족들 사이에서도 팽배하고 있다.
1995년에만 해도 고성리 세관 자리엔 변방검사소가 있었다. 세관처럼 정규화되지 않아 휴대품 검사가 대충대충이었다. 중국과 북한, 兩岸의 보따리 장사꾼들은 두만강을 오가며 짭짤하게 재미를 봤다.
여기다, 이 소문을 따라 다른 세관을 피해 각지의 보따리 장수들이 고성리로 몰렸다. 300 가구가 채 안 되는 고성리의 개인 여관은 물론 민박까지 매일 초만원이었다.
북한 보따리 장수들은 주로 친척 방문증을 이용해 장사를 했다. 그러나 2년 전 변방검사소가 세관이 되자 사정은 달라졌다. 세관답게 물품 검사가 까다로워진 것이다.
또한 북한은 중국의 친척방문일 경우 1년에 한 번으로 제한했다. 이에 따라 우선 북한 보따리 장수들이 녹아났다.
중국의 보따리 장수들도 점차, 북한으로의 통행증 구하기가 힘들어졌다.
양국의 보따리 장수들로선 이젠 국경 세관을 드나 드는 게 큰 고역이 된 것이다. 화룡시에 산다는 40代 초반의 조선족 보따리 장수 김철우는 푸념한다.
『도대체, 국경이 뭡네까. 예전엔 여권은 물론 통행증 없이도 마음대로 들락댔더랬는데, 고성리와 삼장리 사람들이 서로 장소를 바꿔가며 운동회도 했는데 말이디』
그러나 돈이나 「빽」 있는 보따리 장수들은 수월하게 국경을 넘나든다. 뇌물이나 각종 인간관계를 동원하기 때문이다.
한 조선족 보따리 장수는 배갈과 맥주만 100상자를 싣고 들어갔다. 한 번 장사에 크게는 20여 만원, 작게는 1만원 규모. 보통 두세 집의 물건을 실으면 트럭 한 대분이 넘는다.
조선족 보따리 장수들이 북한에 들고가는 짐보따리는 크고 무겁지만 싸구려 저질품이다. 옷, 쌀, 밀가루, 담배 등이 主宗이다. 옷은 대개 한벌에 20원 안팎짜리다. 양말은 한두 번 신으면 실밥이 일어나고 몇번 빨면 버려야 할 정도다. 담배는 몇십전하는 저질품이고, 배갈도 몇원짜리일 뿐이다.
이에 반해 북한에선 명태 낙지(오징어) 해삼 등 주로 해산물을 가지고 나온다. 해산물은 중국에선 고가품으로 탈바꿈한다. 김철우는 다시 말을 이었다.
『2~3년 전만 해도 보통 열 배 이상은 이문이 생겼디오. 그러나 요즘은, 북조선 사람들의 눈도 밝아졌고, 장사에 각종 제한이 많아져, 이문이 많이 줄었지요. 기래도 아직 갑절 장사는 되우다』
연기가 나지 않는, 무산市의 공장들
밀수도 없지 않다. 「이익이 생기면 지옥이라도 간다」는 말이 여기서도 통한다. 앞문을 막으면 뒷문이 열리고 뒷문을 단속하면 벽이 터지게 마련이다.
숭선진 고성리에서 20km 떨어진 곳. 인근 국도 언덕엔 떡갈나무 사이로 대리석 詩碑(시비)가 하나 애처롭게 서있다. 「리욱 시비」였다. 리욱은 중국 조선족 詩壇(시단)의 개척자다.
리욱 詩碑 앞 두만강 너머에는 함경북도 무산 시가지가 한눈에 잡힌다.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노천철광이 있는 곳이다. 무산의 철은 중국 철수입의 거점이었다. 중국이 수입하는 철은 하루 평균 트럭 80대분. 겨울에는 수입이 일시 중단된다. 철에 수분이 있어 얼어들기 때문이다.
공업도시 무산. 그러나 무산의 곳곳에 서있는 공장은 하나같이 긴 잠에 빠져 있다. 연기 하나 나질 않는다.
변두리 주택가엔 얼기설기 회색빛의 집들이 잇대 있고 역시 사람 그림자도 없다. 다들 어디로 간 걸까. 도대체 사람 냄새가 나질 않는다.
강변의 집단농장. 사료로 쓰기 위한 옥수수단만이 군데군데 무더기로 서 있을 뿐이다. 무산은 회령 부령 경성 세 곳의 교차점이다. 남으로 가면 명천 길주 단천이 나타나는 군사요충지이기도 하다.
북한 사람들의 중국 쪽으로의 渡江은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渡江하는 사람은, 지금의 脫北者와 다를 게 없다. 1721년 조선조 때에도 渡江은 있었다. 함경북도 종성에선 군졸과 백성들의, 중국으로의 渡江사건이 터져 주모자 2명이 참수되기도 했다.
「나중에 삼수갑산을 갈지라도」라는 말은 이때부터 생겼다고 한다. 조선조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에 못 이겨, 또 각종 재해로, 정든 고향땅을 등졌다.
「먹기 위해」 중국땅으로 도망쳤던 것이다. 사내는 등에 짐을 지고, 여자는 짐을 머리에 이는, 「男負女戴(남부여대)」한 모습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도문에 사는, 75세의 한 조선족 노인은 말했다.
『130년 전에, 함경북도 경원에서 살던 내 조부께서 중국땅으로 渡江했수다. 그해 가뭄이 어찌나 심했던지, 풍년이 들어도 굶어 죽는다는 그 세월에 어찌 살 수가 있었겠슴둥. 나무뿌리와 풀뿌리로 연명했는데 나중엔 이것마저 거덜났다고 합데. 사람들은 얼굴이 누렇게 뜨다 못해 퉁퉁 붓고 풀독에 죽는 사람도 많았다고 했디오. 기래 우리 조부님은, 굶어 죽으나, 渡江하다 잡혀 죽으나 매일반이라고 생각해 식솔들을 거느리고 渡江한 거우다』
당시 함경북도민들의 유일한 삶의 출구는 渡江뿐이었다. 「먹다 죽은 귀신은 때깔도 곱다」는 말이 너무 사실적이었다. 이 조선족 노인은 조부가 이따금씩 읊조리던 「越江(渡江)곡」을 지금도 기억한다.
『월편에 나부끼는 갈대잎 가지는/애타는 내 가슴을 불러야 보건만/이 몸이 건너면 월강죄란다/기러기 갈 때마다 일러야 보내며/꿈길에 그대와는 늘 같이 다녀도/이 몸이 건너면 월강죄란다』
남편이 먼저 渡江하고 미처 渡江하지 못한 아내들은 두만강 쪽을 바라보며 별리의 설움을 곱씹어야만 했다.
『새봄이 다가도록 기별조차 없는 님을/가을밤 雁信(안신)까지 또 어찌 참으래요/두만강 얼음물은 다 풀리어 간다는데/새봄이 아니오라 열세봄 지났어도/못 참을 내 아니언만 가신님 날 잊을까/강남의 제비들은 제 집 찾아 왔다는데』
『강 건너, 사촌이 서 있더란 말이우다』
화룡시에 사는 조선족 오정숙 할머니(76)는, 어릴 적에 口傳(구전)으로 들은 「장포수에 관한 얘기」를 한다.
장포수의 부모는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밤중에 건넜다. 그러나 이내 겨울이 닥쳐오고 있었다. 그러나 돈 한푼 없는 부부는 한동안 轉轉乞食(전전걸식)했다. 나중에는 구걸도 힘들어 열두 살짜리 아들을 청국 사람에게 내주었다. 그 대가로 좁쌀 두 말이 돌아왔다. 그 몇년 후 그 아들은 변발을 하고 청국옷을 걸치고 있었고 성씨도 「왕」씨가 돼 있었다. 두 부부는 그 아들을 끌어안고 흐느낄 뿐이었다.
옛 이주민들은 이판사판으로 온 가족이 渡江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 집을 두고 남편 혼자서 고향과 잠시 이별했던 것이다.
남편들이 먼저 가서 터를 잡아 놓고 가족을 데려가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강만 건너면 살 길이 열린다는 풍문은 풍문으로만 머문 경우도 적지 않았다. 적수공권이 하루 아침에 강만 건넌다고 살림이 펴지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숭선진 고성리엔 脫北者들이 심심찮게 들르는 곳이다. 40代의 한 조선족 아주머니의 얘기.
『이곳엔 脫北者들을 푸술하게(많게) 볼 수 있우다. 1996년 겨울이었지 아마. 밤이 깊어 자려고 금방 불을 죽였는디,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란 말이우. 내, 기래 다시 불을 켜고 옷을 줏어 입고스리, 문을 여니까니, 아 강 건너 사촌이, 서있더란 말이우다. 머리는 수건으로 잔뜩 싸매고 있었고, 덜덜 떠는 거이, 불쌍해서 못 보겠더란 말이지.
뒷고방에 숨어서 일주일을 묵었더랬지. 누가 볼까봐서스리, 가슴이 콩콩 뛰더란 말이지. 밀차(차)에 쌀 한 포대, 밀가루 한 포대, 다른 부식을 골똑(잔뜩) 실어서 보냈지. 그 사촌이 얼음강판을 넘어가니까니, 그 가족들이 숲속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더란 말이우』
고향과 가까운 두만강을 택해 渡江
요즘 함경도 쪽에서의 脫北者들도 대부분 고향과 가까운 두만강가를 택해 渡江한다. 옛날의 이주민들도 그랬다. 두만강 상류 무산에서는 백두산 지대로, 두만강 중류 회령과 종성에서는 연길 쪽으로, 하류의 경흥 등에서는 훈춘 쪽을 잡았다.
이주길은 여러 갈래였지만 가장 흔한 방법은 회령-삼합-달라지-명동-용정에 이르는 길이었다.
삼합은 용정에서 41km 거리에 있다. 삼합 건너편엔 함경북도 회령이 버티고 있다. 회령은 고층건물이 서고 공장이 즐비한 산업도시였다.
삼합에서 1km 떨어진 곳에 삼합해관이 있다. 1941년 삼합과 회령을 잇는 국경다리가 만들어졌다. 다리 길이 300m, 너비는 6m. 다리 위로는 무시로 화물트럭이 오간다. 북한 쪽에선 명태 해삼 등 해산물과 철재, 중국 쪽에선 옥수수 콩기름 의류 등이 주류다.
이곳의 최고 호황기는 1988년으로 수출입 화물량이 6만5000t, 출입 인원수가 年間 5만8000명에 이르렀다. 그러던 것이 1996년에는 수출입 물량이 1만6000t, 출입 인원수가 2만3000명쯤으로 떨어졌다. 1970년도에도 脫北者들은 있었다. 다만 그때는 「무단 이주민」으로 여겼을 뿐이다. 1970년 훈춘의 각 초소의 보고서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지금 조선 남녀노소들이 이곳을 부단히 왕래하는데 그들은 마을마다 찾아 다니며 유리걸식하고 있다. 그러나 언어가 통하지 않으므로 물어도 그 실정을 알 수 없는 가련한 형편이다」
渡江한 그들은 살기 위해 어린 자식들을 쌀 한 말에 팔아 넘기기도 했다. 열두 살짜리 딸아이를 헐값으로 산 주인은 이 소녀를 숫제 노예취급이었다.
수십 마리의 소를 맡기면서도 식사는 멀건 죽 한 사발이었다. 어쩌다 소가 한 마리라도 뵈질 않으면 한밤중이라도 찾아 오라고 매질이었다.
딸아이는 어둠 속을 『쇄자(송아지), 쇄자!』를 외치며 정처없이 들판을 돌아쳤다. 그러나 그 소리마저 억수로 쏟아지는 빗속에 묻혀 버리고 만다. 그 며칠 후 딸아이는 폐렴으로 죽고 말았다.
화룡시 덕화진 남평리. 두만강 폭 30여m를 사이에 두고 함경북도 무산군 노덕리가 마주하고 있다. 남평은 산을 뒤로 하고 남향으로 문을 내고 노덕리는 북쪽 산비탈에 북향으로 문을 내 두 마을 사람들은 문을 열기만 하면 무시로 얼굴을 맞대게 된다.
남평해관과 노덕리 통행검문소가 두 곳을 연결하는 공식통로. 1994년 봄 북한에서 놓은 국경다리는 너비 3m, 길이 50m, 기둥은 철판이고 다리표면은 널판이다. 남평 쪽으로부터 30m 되는 곳에 철문을 장치해 두 나라의 경계선으로 삼고 있다.
남평리와 노덕리. 두 곳 주민들은 여름이면 서로 헤엄쳐 건너와 필요한 물건을 바꾸거나 사기도 한다. 물살이 센 곳에선 배를 주로 이용한다. 강 복판에서 뱃머리를 맞대고 물품을 교환한다. 남평리 쪽에선 담배, 술, 사탕, 빵, 쌀, 옷가지 등 주로 생필품이고, 노덕리 쪽에선 동, 은, 명태, 해삼 등이다.
일제 때, 연변 제1의 도시 용정
龍井(용정). 광복 전까지 북간도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 인구 7만여. 근래들어 연길에 비해 상대적으로 퇴락했다. 용정은 조선 사람들이 회령과 무산으로부터 연길 왕청 훈춘 화룡 일대로 들어가는 교통요지였다.
회령에서 용정까지는 건장한 청장년의 걸음으로는 하룻길이고 부녀자의 걸음으로는 하루 반이었다. 그래서 이주민들은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거나 점심을 먹기가 일쑤였다.
나그네들은 봇짐을 풀어놓고 두레박을 빌어 우물물을 마시거나 얼굴과 팔다리를 씻어 路毒(노독)을 풀었다. 그러나 우물이 깊어서, 두레박으로 쉽게 물을 풀 수가 없었을뿐더러 매우 시끄럽기까지 했다.
한번은 이곳으로 이사온 한족 忠(충)씨가 꾀를 냈다. 우물 곁에 말뚝을 박고 두레박을 단 용두레를 비끄러맨 것이다. 이때부터 쉽게 물을 풀 수가 있었다.
이후 이 한촌은 「용두레촌」이라 불렀는 데 한자로는 부득이 「龍井村(용정촌)」이라고밖에 표기할 수 없어 오늘의 용정이 됐다고 한다.
圖門(도문). 연변에서 유일하게 두만강에 붙은 도시다. 옛이름은 회막동. 현 도문의 서남쪽에 있는 마을 이름이었다. 100여년 전 산동사람 조개명이 이곳에 와서 살기 시작했다고한다. 이후 강 건너 함경북도 남양군 일대의 사람들이 강을 건너와 살기 시작하면서 도문이 형성됐다.
도문 강변. 남양시가 바로 손에 잡히는 곳. 강변 주차장에서 택시가 서자마자 한무리의 장사꾼들이 들이닥쳤다.
『북한우표예요. 한국돈도 받아요. 1만원입니다』
도문과 남양시 사이에 난 국경다리. 도문교. 중국땅 쪽 절반까지 가려면 20원을 주면 된다.
도문은 1931년도에는 100여 가구만이 사는 寒村(한촌)이었으나 지금은 10만명을 웃도는 도시로 변했다. 도문은 南으로 강을 사이에 두고 남양市와 마주하고 北으로는 연변과 흑룡강성에 잇대 있다. 교통 요지다.
연변 각지와 장춘 심양 北京으로 통하는 열차는 모두 도문이 시발점이다. 두만강 연안에서 북한과의 교역량이 가장 많다.
본디 도문 해관은 훈춘 해관의 분소였다. 그러던 게 도문의 수출입 물량이 폭발적으로 늘면서 되레 훈춘 해관이 도문 해관의 분소가 되고 말았다. 고층건물 사이로 게딱지 같은 집이 잇대 있고 연길에선 이미 자취를 감춰버린 인력거가 아직도 택시와 공존하고 있다.
일본으로 밀항했다가 알거지가 돼 돌아 왔다는, 42세의 조선족 사내 강씨를 만났다. 강씨가 말하는 밀항 사건의 요지.
『1997년 여름이었다. 며칠 전 이웃에 살던 김씨 부인을 만났다. 김씨 부인은 김씨가 일본으로 돈벌이를 갔는데, 한달 수입이 엄청나다고 했다. 한국은 뒤꽁무니도 못 쫓아 온다는 거였다. 너무 부러웠다. 그러나 일본에 갈 경비 십수만원을 구하는 게 문제였다. 십수만원은 내겐, 천문학적 숫자다. 그땐 사실 다급했다. 아내가 다니는 식품공장도 불경기로 문을 닫게 됐고 내가 다니던 직장도 오늘, 내일 끝장날 판이었다. 둘다 실업자가 되면, 아홉 살짜리 아들놈의 학비는?
돈만 벌 수 있다면 일본이 아니라 아프리카엔들 못 가랴 싶었다. 아내와 의논 끝에 아내가 처남, 처형 등에게 얘기해 13만5000원이란 거금을 꿔왔다.
「이 돈을 날려 버리면 우리 식구는 길거리에 나 앉아야 해요」라고 아내는 말했다. 나를 포함해 일행 3명은 北京으로 갔다. 北京엔 일본행을 주선해 주겠다는, 한국인 朴모씨가 있었다. 朴모씨는 대뜸 「약속한 돈을 가져왔느냐?」며 돈 얘기부터 했다. 별로 맘에 안 들었다.
13만5000원. 이중 일본으로 입국하는데 들어갈 돈 12만원, 중국을 떠나기 전 드는 경비 5000원을 빼면 실제 일본에서 내가 쓸 수 있는 돈은 1만원(당시 일본돈 15만엔)이었다.
계약금으로 3만원을 朴씨에게 줬다. 그러나 朴씨는 나머지 9만원도 빨리 달라고 성화였다. 당초 계약이 일본에 도착하면 9만원을 주게 돼 있었다. 그래서 거절했다. 朴씨는 더 이상 독촉할 명분이 없었던지, 투덜대기만 할 뿐 더 이상 재촉을 하지 못했다.
박씨는 北京에서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우리 일행들이, 거금을 쓰도록 강요했다. 닷새 동안 5000원을 날렸다. 朴씨가 조선족의 땟국물을 빼야 한다며 사우나, 이발관, 백화점 등으로 끌고 다니며 돈을 펑펑 쓰게 한 탓이다.
5000원이면 나의 1년 수입도 넘는 돈이다. 이때서야 알았지만, 일본행은 정상 루트가 아닌, 위조여권으로 나간다는 거였다. 이 위조여권에서, 우리의 신분은 중국조선족이 아니라 한국인이라는 거였다.
불안해, 다시 도문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3만5000원이 이미 날아 가버렸기 때문이다.
朴씨 말로는 여권 만드는 사람에게 이미 그 비용이 지불됐다는 것이다. 우리는 北京에서 계림, 그리고 마카오로 갔다. 일본으로 직행할 경우 가짜여권이 탄로나기가 쉽다는 거였다.
마카오에서 朴씨는, 「내 말을 안 들으면 일본에 갈 수 없다」는 식의, 半협박, 半회유조로 우리 일행에게 각각 9만원씩, 총 27만원을 거둬 갔다. 그런데, 朴씨는 그 돈을 모두 도박으로 날렸다.
어쨌든 우리 일행은 홍콩을 거쳐 12월7일 드디어 일본 후쿠오카에 도착했다. 그러나 위조여권이 들통나 버렸다. 이날 우리 일행은 손목에 수갑을 찬 채 후쿠오카 세관 수용소에 가둬졌다. 그 보름 후 우리 일행은 나가사키 수용소로 옮겨졌다. 두 수용소에선 지겨운 심문만 계속됐다.
1998년 새해를 수용소에서 맞았다. 내나이 마흔이 되는 해였다. 1월5일 다시 후쿠오카로 돌아왔다. 그날 우리 일행 3명 모두에게 1회용 중국여권이 나와 있었다. 나에겐 아내의 편지도 있었다. 「지나간 일을 악몽으로 돌리고 새로 시작하자」는 내용이었다.
1월7일, 수용소를 나서던 날, 일본인 조사관이 우리 일행에게 말했다. 「앞으로도 일본에 오시는 걸 환영합니다. 그러나, 중국여권으로 오시오」
그날 우리는, 중국행 비행기에서 구름 사이로 일본해를 내려다 보며 웃을 수 있었다』
「리틀 서울」-연길
장백산(백두산) 가는 길목. 안도현 이도백하. 「강원도 조선족 식당」에 들렀다. 40代 초반의 한 조선족 사내가 쇠고기국밥을 먹다가 알은 체를 했다.
『한국에서 왔수까? 내, 여기, 이도백하에서 조부 때부터 살고 있지요. 긴데, 듣자하니, 요즘 또 한국경제가 마사지고(무너지고) 있다는데, 어떠우까?』
『그럭저럭 괜찮습니다』
『기런데, 왜, 한국신문에선 그렇게 곧 마사질 것처럼 보도를 합니까? 우리 조선족들까지 불안합니다. 한국이 잘 살아야 우리 조선족들도 기를 펴고 살 수 있지』
『여긴, 脫北者들이 없습니까?』
『요즘 들어 많이 줄었디오. 1997년엔 숱하게 많았지오. 장백에서 철길을 따라 脫北者들이 왔더랬는데, 그기 어디 사람꼴이오. 신발은 완전히 닳아 버리고 발바닥은 피멍이 들어 있고, 바짝 말라 귀신꼴이었지비. 그래, 내, 약 발라주고 신발 주고 옷 주고, 일자리가 있으면 주선해 주었지. 돌봐준 脫北者만도 30명을 족히 넘을 거우다』
그러나 脫北者 중 절반 이상은 잡혀 다시 북한으로 갔고 나머지도 농촌이나 식당에서 일해 주며 겨우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다고 한다.
택시는 장백산을 헤집고 난 길을 따라 연길로 향했다. 그 샛길가에는 적송, 백송, 붓나무, 사시나무 등 갖가지 나무들이 빼곡히 차있다. 이미 단풍이 절정이었다.
연길시.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州都인구 30여 만명. 이중 아직은 조선족이 절반을 넘는다. 연길은 10년 전만 해도 조그마한 한촌이었으나 이젠 제법, 큰 도시로 바뀌었다.
연길은 「리틀 서울」이다. 서울이 재채기를 하면 연길은 감기에 걸린다. 1997년 한국의 IMF 때는, 기실 한국보다 더 힘들어 했던 게 연길이다.
한국으로부터의 손님이 끊겨 연길의 호텔과 음식점은 파리만 날렸다. 연길은 한글 간판이 중국어 간판보다 더 큰데다 분위기 마저 한국의 지방도시를 빼닮았다.
연길에선 한국돈도 그대로 통용된다. 연길에서 가장 많은 것은 다방과 노래방이다. 한 집 건너씩이다. 다방에선 커피값을 통상 10원을 받는데, 서민들로선 엄청난 값이다. 웬만한 봉급장이의 월급이 500원 안팎이다. 커피 한 잔에 한달 월급의 50분의 1이 달아나는 셈이다.
그래서 서민들은 다방 출입을 거의 하지 않는다. 아니 못 한다. 연길의 노래방은 서울의 노래방과는 규모가 다르다. 방의 규모가 서울의 단란주점 수준이다. 서울 노래방의 서너 갑절 크기다. 입장료는 150원에서 200원. 캔맥주 10병과 안주, 콜라 등이 나온다. 시간은 무제한이다.
『이게 우리집의 남북통일』
53세의 한 조선족 검사는 말한다.
『중국도, 이젠 조기퇴직 바람이 불고 있습네다. 특히 기업체는 50세 이상은 몽땅 퇴직시키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지요. 우리 검찰도, 원래 정년은 60세인데, 지금은 달라지고 있습네다. 55세가 되면 퇴직시키려 하디오. 그러나 60세까지는 월급을 100% 그대로 줍네다. 그리고 60세 이후 죽을 때까진 기본급을 주디오』
검사생활 20년이 넘었지만, 그의 월급은 1000원 정도다. 그러나 그 아들은, 올해 군관이 됐는데 초봉이 1200원이다.
중국에선 군인들의 대우가 좋다. 언젠가 주은래가 한 민간인에게 『당신은 땀을 흘리지만, 군인은 피를 흘릴 사람이다』라는 말을 한 후 군인들의 대우가 급상승했다고 한다.
군인은 제대 후 취업이 보장되기 때문에 중국에서 군인은 인기다. 통상 10 대의 1의 경쟁을 뚫어야 군인이 될 수 있다.
연변의 조선족들 중 한국사람에 대한 서운한 맘을 가진 사람도 적지 않다. 물론 한국의 사기꾼들에게 결혼, 취업사기를 많이 당한 후의 일이다.
한때 조선족들 사이에선 「한국」 다음에 「놈」자를 붙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한국에의 원망도 많이 사그라들고 있다.
40代의 한 조선족 작가는 말한다.
『어딜 가나, 사기꾼은 있디오. 특히 한국사람만 사기를 치는 건 아니우다. 기러고, 사기도 한국의 사기꾼들과 조선족들이, 짜고 하는 것도 없지 않지요. 조선족들이, 한국을, 서울을 드림랜드로만 생각하는 게 문제입니다. 어딜 가나 일해야 먹고 사는 거지요. 그리고, 한국을 동포라고 해, 막연히 기대려는 구석도 있디오. 기대를 하니까니, 실망도 큰 겝니다. 모두들, 다 자기가 살기가 분주하니 기런 거지요. 내레, 지난해 서울에도 다녀 왔더랬는데, 서울 사람들 잘 대해 줍데다』
요즘엔, 조선족들 사이에 일본으로의 유학바람이 불고 있다. 여기엔 「도피성 유학」도 없지 않다.
중국의 대학문이 높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에서 아르바이트를 잡기가 쉬워, 일단 일본에만 가면 대학은 다닐 수 있다는, 기대도 한몫하고 있다.
하얼빈에 살고 있다는 50代 후반의 한 조선족 詩人은 말했다.
『내, 딸아이가 지금 北京대학 4학년입네다. 내년에, 서울대학교에 유학을 가게 되는데, 내 기분이 너무 좋수다. 내, 딸아이에게 늘상 말하디오. 「야, 너는 한국사람에게 시집을 가라. 기러고 너, 남동생(연변대 2학년 재학)은 북조선 여자한테 장가들먼스리, 이게 남북통일이 아닌가?」고 말입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