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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픽션

내 아버지의 6·25 전쟁 ② 낙동강 방어전

“지금 파는 참호가 우리의 무덤이다!”

글 : 길도형  도서출판 타임라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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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 길운하(1933~1997), 동락리 전투 승전 후 7연대 전원 1계급 특진… 병적에 오르지 못하고 비공식적 ‘이병’ 계급장 달아
⊙ 피란민 속에 숨어든 적 공작조, “국방군이 생사람 죽인다!” “인민에게 총을 겨누지 마라!”
⊙ 옥녀봉 전투에 투입된 학도병들, 공포에 질려 허공에 총질
동락리 전투 승리 후 7연대 전 장병은 1계급 특진했다.
  음성·동락리 전투
 
  - 오는 7월 6일은 음성 동락리와 용원리 일대에서 벌어진 동락리 전투(7연대의 음성 전투)가 있은 지 74주년 되는 날이다. 7연대 12중대의 하우스보이에서 소년병이 된 선친(길운하·1933~1997년)도 물론 그 현장에서 북괴군 15사단 48연대의 남하에 맞서 총을 쏘고 거침없이 돌격했다. 7연대 2대대와 3대대가 주축이 된 완벽한 승전이었다.
 
  흔히 2대대에 의한 동락국민학교 기습으로 일군 승전으로 정사에는 기록되어 있으나 이 얘기는 선친으로부터 들은 바가 없다. 선친은 저수지 부근의 도로상에서 전투를 벌였다고 했다. 이 저수지가 음성군 생극면 용원리에 있는 신덕저수지이고 거기서 서쪽 생극면 방향으로 바로 붙어 있는 동네가 동락리이다.- (필자 주)

 
  7월 1일 횡성에서 철수한 7연대는 ‘8사단의 철수를 엄호하라’는 사단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원주 남쪽 14km 거리에 있는 신림고개(가리파고개)를 점령함으로써 평창에서 제천으로 철수하는 8사단을 엄호하는 데 성공한다. 하루 동안 신림고개를 점령하며 적의 남하를 차단한 7연대는 8사단 10연대에 진지를 인계하고 충주로 철수, 충주중학교 운동장에 집결했다.
 
  7월 4일, 6월 25일부터 29일까지 춘천을 사수함으로써 수원으로 진격하여 서울을 포위하려던 적의 전략적 목표를 무산시킨 7연대는 개전 후 열흘여 만에 부대 재편성에 들어갔다. 인원과 장비를 점검하며 전사상자와 실종으로 발생한 결원을 확인하고 중대별 인원을 재조정했다. 춘천 전투를 비롯하여 홍천, 횡성, 원주 신림 전투를 치르는 동안 7연대도 800명이 넘는 적지 않은 병력 손실을 입었다.
 
  소년은 12중대의 하우스보이에서 말단 소총수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공식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6월 25일 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열외의 하우스보이에서 중대, 소대, 분대의 구성원으로서 군율과 군기, 명령과 지시, 부대 전술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당위가 소년에게 부과됐다는 점이다. 물론 그럼에도 소년이 전사(戰死)하거나 탈영한다 해도 그것을 공식화하거나 군법에 회부하여 처벌할 아무런 근거도 없었다.
 
  소년은 중대의 간부들이나 병사들에게 여전히 ‘꼬마’로 불렸다. 군수계원이 소년에게서 전사한 병사의 소총과 철모, 탄띠 등을 회수해갔다. 그리고 새 M1 소총과 철모, 탄띠, 군장이 지급됐다. 총기 사용법은 이미 실전을 통해서 체득했다. 분대 선임병들이 소년에게 군장 꾸리는 요령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동안 어깨너머로 보거나 병사들의 군장 꾸리는 것을 도운 덕분에 별다른 어려움 없이 군장을 꾸릴 수 있었다.
 
 
  “장호원을 탈환하라”
 
7연대장 임부택 중령.
  7월 3일 저녁, 장호원이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말이 병사들에게도 전해졌다. 7연대 병력이 임시 주둔한 중학교 운동장에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장호원은 충주에서 직선거리로 35km 떨어진 사통팔달 교통의 요지로, 충주와 이천의 중간쯤이다. 7월 1일 육군본부의 지시로 6사단은 19연대를 긴급히 이천으로 투입했다.
 
  19연대는 적과 근접전을 벌이며 적의 남하를 최대한 지연시키라는 지시를 받고 있었다. 사단사령부가 충주에 주둔한 가운데 2연대는 충주 방어 준비를 하고 있었고, 7연대는 원주-단양 축선 방어를 8사단에 인계하고 충주중학교로 이동하여 임시 주둔지 정리 및 부대 재편성을 서두르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장호원이 적의 수중에 들어간다는 것은 사단이 양분될 위기이자 2연대가 적에게 포위, 고립된다는 것을 뜻했다.
 
  6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7연대장 임부택 중령에게 명령했다.
 
  “장호원을 탈환하라!”
 
  연대장은 적정을 모르는 상태로 야간 이동은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날이 밝는 대로 1개 대대를 보내 적정을 확인한 다음 연대 주력을 투입하겠다는 복안을 사단장에게 제시하여 승인받았다.
 
  그러나 이미 장호원으로 진출한 북괴군 15사단은 곧바로 남하하여 음성 점령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예하 48연대가 음성 동락리로 진출했고 49연대는 무극리로 남하하고 있다는 첩보가 2대대로부터 입수됐다.
 
  연대장은 대대장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
 
  “1대대는 7월 5일 08시 충주를 출발, 음성으로 이동하여 무극리 방면으로 남하하는 적을 포착하는 대로 섬멸하라. 3대대는 7월 5일 08시 장호원 방면으로 직진하여 장호원에서 남하하는 인민군을 견제하면서 질서 있게 철수, 동락리 남방 저수지 부근에서 연대 예비대로 대기하라. 2대대는 동락리 일대의 고지를 확보하고 3대대의 철수를 지원하라.”
 
  저녁 식사를 마치는 대로 연대 전 병력 취침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장마철로 접어든 7월 초의 후덥지근한 공기가 야전 막사를 짓눌렀다. 출동 대기 상태로의 취침을 지시받은 병사들이 전투화를 신은 채 간이침상에 쓰러지기가 무섭게 코를 골기 시작했다. 6월 25일 첫새벽, ‘비상’ 외침과 함께 잠에서 깬 이후 춘천, 원창고개, 홍천, 횡성, 원주를 거쳐 충주까지 철수하는 동안 장병들은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할 겨를이 없었다. 밤이 깊어가면서 다행히 공기가 선선해지고, 사방의 벽면을 말아 올린 막사 안으로 시원한 바람도 드나들었다.
 
 
  기름종이에 싼 주먹밥
 
  7월 5일 새벽 4시, 기상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막사마다 불침번들의 “기상!” 외침이 모처럼의 곤한 잠에 빠져 있던 병사들의 새벽 단잠을 깨웠다. 병사들은 졸린 눈을 비빌 새도 없이 각 막사 앞에 준비된 밥과 국을 반합에 담아 단숨에 들이켰다. 식사를 마친 병사들 순서대로 기름종이에 싼 주먹밥과 건빵 한 봉지씩이 지급됐다. 소년은 주먹밥은 반합 속에, 건빵은 군장 주머니 속에 넣고 중대 막사 앞에 도열했다.
 
  새벽 5시, 정찰조 임무가 부여된 9중대가 선두로 출발한 가운데 10·11·12중대 병력을 태운 트럭들이 속속 충주중학교 운동장을 빠져나가 생극면 병암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생극은 오늘날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으로,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과 맞닿아 있다.
 

  오전 8시 무렵, 3대대가 동락리 기름고개를 통과하며 직선 구간으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전방에서 모터사이클을 앞세운 북괴군 정찰대가 전진하고 있었다. 확인과 동시에 “부대 전투 준비, 전원 하차!” 하는 소리가 들렸다. 병사들은 신속하게 하차하여 도로 주변의 참호며 자연 엄폐물들로 산개하여 공격 태세를 갖췄다. 마침 그 지역은 지난밤 2대대가 주둔했던 곳인지라 차량 행렬의 앞쪽에 있던 9·10·11중대원들은 어렵지 않게 엄폐물로 산개하여 즉각적인 사격 태세를 취했다.
 
  대열의 후미를 따르던 12중대도 도로 옆의 밭두렁을 엄폐물 삼아 박격포와 대전차포 진지를 구축했다. 12중대의 중화기들이 적 정찰대 후방을 타격하는 것과 동시에 적과 근접한 대대원들의 개인 화기와 중기관총이 불을 뿜으며 아직 도로상에서 우왕좌왕하는 적들을 쓰러뜨렸다. 적이 공격을 포기한 채 퇴로를 찾아 우왕좌왕하자 근접 사격을 하던 9중대와 11중대원들이 일제히 달려 나가며 추격을 시작했다. 12중대의 박격포들이 쉴 새 없이 적의 후방과 차량을 강타했다. 소년은 트럭과 박격포 진지를 부지런히 오가며 포탄을 들어 날랐다.
 
  그때 “소총수 사격 준비!” 하는 소리와 함께 12중대 소총수들이 중화기 진지와 참호에서 벗어나 일제히 개활지 언덕으로 올라섰다. 곧이어 “엄호 사격 개시, 발사!” 하는 소리와 함께 공격 중대원들 너머 건너편에서 대응 사격을 준비하는 적병들에게 12중대 소총수들의 총탄이 날아들었다. 소년은 차량과 논밭두렁에 몸을 숨기고 아군 공격대원들을 향해 대응 사격을 하는 적병들을 향해 한 발 한 발 침착하게 방아쇠를 당겼다. 한 명, 두 명, 세 명… 소년은 자신의 총탄에 맞아 쓰러지는 적병 숫자를 세면서 방아쇠를 당겼다.
 
 
  용원리 도로
 
  혼돈에 빠져 우왕좌왕하거나 결사적으로 응사하던 적들이 마침내 타고 왔던 차량과 모터사이클을 버리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달아나는 적들 앞에서 박격포탄이 작렬했다. 전의를 상실한 적들은 포연 속에 쓰러지는 동료들 시체를 밟고 넘으며 모도원 방향으로 달아났다. 3대대는 후방에 대기 중인 트럭들에 공격대원들을 분승(分乘)시켜 후퇴하는 적을 뒤쫓으며 생극면 일대를 손에 넣고 장호원으로의 진출을 시도했다.
 
  동락리 도로상에서 적과 조우하면서 시작된 3대대의 추격전은 그러나 장호원과 금왕 방면으로 갈라지는 병암리(현재 생극면 신암리) 삼거리를 앞에 두고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오후 5시 못 미친 시각, 삼거리 방면에서 연대 규모의 적이 쫓겨온 우군 정찰대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의 진격은 무모하다고 판단한 대대장은 적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차량 행렬을 정지시켰다. 적은 진격해온 3대대에 대한 상황 파악을 못 한 듯 삼거리에서 화력으로만 대응하면서 전진하지 않았다. 3대대는 일몰 시까지 화력으로 맞대응하며 대치했다. 3대대는 해가 지자 9중대 일부 병력을 대치선에 잔류시키고, 나머지 중대 병력은 전원 차량에 분승, 후방으로 철수시켰다.
 
  야간에 주로 이동하며 공격하는 적의 특성을 고려한 철수로, 9중대 잔류 병력에는 정찰조 역할이 부여됐다. 아울러 적이 기동을 시작하면 정면 대결을 피해 지연전을 펼치며 철수하여 본대와 합류하라고 지시했다. 완전히 어두워진 뒤에야 3대대는 동락초등학교 앞을 지나 신덕저수지 부근에 이르러 하차했다. 그러고 곧바로 적의 공격에 대비하여 주변 고지와 진지들로 이동했다.
 
  3대대와 일전을 치른 적은 북괴군 정찰대였다. 적 연대 주력은 일몰과 함께 3대대 병력이 철수하는 것을 보면서 뒤따라 남하를 시작했다. 3대대가 철수한 것을 전면 퇴각으로 오해한 적은 밤새 이동하여, 6일 날이 밝을 무렵에는 동락리를 지나 용원리 도로상으로 접어들었다.
 
  3대대는 9중대 정찰조로부터 적의 상황을 보고받고 동락리 310고지와 용원리 일대로 부대를 이동시켰다. 7월 6일 날이 밝자 도로 주변에 매복해 있던 9중대가 용원리 도로를 따라 천천히 남하하는 적을 향해 사격을 개시했다. 선두 차량이 황급히 정차하며 적병들이 차에서 뛰어내렸다. 북괴군 지휘부는 일단의 잔병들이 저항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정찰 중대가 어렵지 않게 격퇴할 것으로 여긴 적병들은 일렬로 밀집한 차량에 탑승한 채 상황이 정리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전날 밤 310고지와 용원리 일대 능선부에 매복해 있던 3대대원들이 적의 본대 양쪽 측면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좁은 간격 일렬로 늘어선 차량이 앞으로 나아가지도 차를 돌려 도주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상태에서 3대대원들의 총격에 적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져 갔다. 소년은 자신이 쏜 총탄에 쓰러져 가는 적병들의 숫자를 헤아리며 다시 한 번 묘한 쾌감과 함께 자신감이 생겼다.
 
 
  동락리 전투
 
  용원리 도로상에서의 격렬한 총격 소리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동락리 일대에 주둔해 있던 2대대가 3대대의 공격으로 오도 가도 못 하는 적의 후미로 들이닥쳤다. 2대대는 부용산 일대를 방어하기 위해 경계를 강화하고 있었다. 이런 중 총격 소리에 쌍안경으로 동락리 일대 도로를 감시 관측하고 있던 병사가 대대장에게 보고했다.
 
  “대대장님, 괴뢰군이 동락리 도로상에 가득합니다!”
 
  쌍안경으로 동락리 일대 도로를 살펴본 대대장은 적을 섬멸할 호기로 판단하고 중대장들에게 즉각 출동하여 적의 후방 도로를 봉쇄하고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적은 전날 병암리 부근 삼거리 도로상에서의 총격전 대치 끝에 3대대 병력이 철수하는 것을 보고 7연대가 음성 방어를 포기하고 전면 후퇴한 것으로 판단, 용원리 저수지 주변에서의 주간 휴식을 목표로 경계를 소홀히 한 채 용원리로 들어서다 무방비 상태로 3대대의 정면과 측면 공격에 이어 2대대에 의한 후방 공격을 받게 된 것이었다. 일대 혼란에 빠진 적병들이 차량과 각종 야포, 장비들을 버려둔 채 흩어지기 시작했다.
 
  소년은 차량에서 뛰어내리는 적병들을 향해 M1 소총을 난사했다. 무질서하게 흩어지는 적병들을 조준사격 대신 총구 끝으로 쫓으며 연신 방아쇠를 당겼다. 여덟 발들이 클립 탄창이 갈아 끼우기 무섭게 튀어 나갔다. 중대원들이 도주하는 적들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소년도 병사들 속에 섞여 적들을 쫓아 달렸다.
 
  무기를 팽개치고 달아나던 적병들이 총격을 받고 속절없이 쓰러졌다. 그러다 도주를 멈추고 적병들이 곳곳에서 손을 들어 투항했다. 북괴군 연대 주력을 싣고 온 도로상의 수많은 차량과 야포며 장비들이 고스란히 7연대의 전리품이 되었다.
 
 
  북한 소년병
 
  중대원들이 항복한 적병들을 생포해 와 그들이 타고 온 차량에 탑승시켰다. 소년은 인민군 병사들 가운데에 자신보다 어려 보이는 병사들이 땡볕에 그을리고 땀으로 범벅이 된 꾀죄죄한 얼굴로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어떤 어린 포로는 엉엉 소리 내어 울고 있었다. 북괴군 군관으로 보이는 자가 소리쳤다.
 
  “이 종간나 새끼, 괴뢰군 앞에서 눈물 보이지 말라고 했지? 남조선 해방전쟁에 나선 위대하신 수령님의 전사가 울면 쓰갔어?”
 
  이 말에 어린 포로가 울음을 그쳤다. 그 얼굴에는 포로가 된 두려움보다는 군관의 질책으로 인한 공포가 확실히 더해 보였다. 선임하사가 군관을 제지하며 소리쳤다.
 
  “닥쳐! 당신은 지금부터 포로야. 포로면 포로답게 행동해. 코흘리개 어린애들까지 끌고 와 해방전쟁? 동포들 등골이나 빼먹던 김일성이 주구 주제에 저 어린애들한테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군관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제야 자신이 포로 신분임을 깨달은 듯 뭐라 항변할 것처럼 하더니 입을 닫았다. 소년은 중대 고참 병사의 ‘코흘리개 어린애’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따지고 보면 북괴군 소년 병사보다 키만 컸지 자신도 소년병이었다. 그것도 정식 군인이 아닌! 이런 한편으로 자신은 스스로 원해서 이 자리에 있는 것이기에 북괴군 어린 병사들과 자신을 비교하면 안 된다는 자부심이 들었다.
 
  포로가 된 적병들은 그들이 가져온 각종 야포며 장비들과 함께 임시수도인 대전으로 실려 갔다. 승리였다. 소년의 승리였고, 7연대의 승전이었다. 국군 제6사단의 승전이었고, 대한민국 국군이 개전 이래 처음 북괴군을 선제 타격하여 거둔 승전이었다.
 
  소년은 춘천 116고지 전투에서 맛봤던 승전과는 다른 희열이 느껴졌다. 소년은 적병들이 자신 앞에 두 손 들고 항복하던 순간, 그 낯선 상황에 멈칫했다. 같은 사람이어도 상황에 따라 사람의 관계가 완전히 달라진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 총으로 적병을 쏘아 죽일 때는 와닿지 않았던 적이란 개념이 항복한 적병들을 통해 비로소 소년의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길 이병’
 
6·25 참전용사 길운하 선생(원 안). 사진=길도형
  이튿날인 7월 7일, 연대장 임부택 중령이 작전 지역을 방문했다. 연대장은 부대 승전을 자축하고 장병들의 노고를 치하하면서 임시수도 대전에 머물고 있는 대통령이 부대 표창과 함께 7연대 전(全) 장병의 1계급 특진을 지시했다고 전했다. 연대장의 훈시가 끝나자 7연대 장병들은 함성을 지르며 승리를 자축했다.
 
  1개 연대를 잃은 북괴군 15사단의 대대적인 반격 또한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다. 훈시를 마친 연대장은 각 대대 방어진지로의 이동을 재촉했다. 3대대 부대원들이 생극 방면 모도원으로의 진출을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이런 와중에도 전원 1계급씩 특진한 병사들은 흰 페인트를 구해 와 철모와 전투복에 갈매기(∨) 한 줄씩 그려 넣으며 승전과 특별 진급의 기쁨을 만끽했다. 아군 사상자가 거의 없는 전투였던 만큼 7연대 장병들의 기쁨은 배가됐다.
 
  소년은 중대가 사용할 실탄과 포탄을 수령해 트럭에 싣고 있었다. 한 고참 병사가 소년을 불렀다.
 
  “어이 꼬마, 이리 와봐라.”
 
  소년은 고참 병사에게 달려갔다. 고참 병사가 소년의 철모를 벗겨 들며 말했다.
 
  “꼬마야, 너도 갈매기 하나 그려 넣어야지?”
 
  그러자 다른 고참 병사가 말했다.
 
  “얘는 정식 군인이 아니잖습니까? 정식으로 입대해 군번을 받아야 군인 아니겠습니까?”
 
  병사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갑론을박하고 있을 때였다. 소대 선임하사가 지나가다 끼어들었다.
 
  “안타깝지만 이 아이는 아직 군인이 아니다. 병적(兵籍)에 올리고 싶어도 아직 나이가 차지 않아 모병 대상이 아니라고 한다.”
 
  “선임하사님, 그래도 꼬마가 우리 중대에서 함께 생활한 지 3개월이나 됐습니다. 춘천에서부터 여기까지 전장에서 생사를 함께한 전우입니다.”
 
  “그걸 누가 모르나? 어쩔 수 없다.”
 
  그러더니 소년의 철모를 뺏어 들고 페인트 붓을 들고 있는 병사에게 말했다.
 
  “그 붓 좀 이리 줘봐라.”
 
  선임하사는 병사가 건넨 붓에 페인트를 묻히더니 소년의 민무늬 알철모에 V(브이)자 갈매기 한 마리를 그려 넣었다.
 
  “자, 써봐라.”
 
  소년이 철모를 썼다. 병사들이 웃음을 터뜨리며 한마디씩 했다.
 
  “그럴듯한데?”
 
  “이젠 꼬마가 아니라 길 이병이라고 불러야겠군.”
 
  선임하사가 한마디 했다.
 
  “너희 다 1계급 특진을 축하한다. 그동안 정말 잘 싸웠다. 이 아이도 훈련 한 번 받지 못하고 우리와 같이 적과 싸웠다. 그럼에도 1계급 특진 대상이 아니라고 하니 나도 무척 아쉽다.”
 
  그러고는 더욱 커진 목소리로 병사들에게 말했다.
 
  “자, 정식이고 공식이고 뭐가 중요하냐. 우리가 이 아이를 길 이병으로 부르고 전우로 여기면 되지. 안 그런가?”
 
  병사들이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맞습니다!”
 
  소년은 어느새 중대의 하우스보이가 아니라 피로 맺은 전장의 전우가 되어 있었다.
 
 
  조령 방어전
 
  - 북괴군 15사단 48연대를 궤멸시킴으로써 적의 기동력을 크게 떨어뜨린 7연대는 적의 서부 전선 지속적인 남하에 따른 육군본부의 축차(逐次) 철수 지시에 따라 충주를 떠나 지연전을 펼치며 소백산맥 방면으로 이동해 갔다. 분명 철수였지만, 서부 전선과는 달리 중부 전선 전장의 주도권은 6사단이 쥐고 있었다.- (필자 주)
 
  충주-음성지구 전투를 치르며 6사단 전체가 전력 손실이 거의 없는 상태로, 아니 오히려 적을 완파하고 노획한 차량 등의 장비가 더해져서인지 병사들의 사기는 철수하는 부대답지 않게 충천해 있었다. 12중대 중화기 소대에 배속된 소년은 60mm 박격포와 57mm 무반동총을 동료 병사들과 번갈아 군장 위에 얹어지고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남쪽 고장을 걷고 또 걸었다. 북한군 쪽에서 쏜 각종 포탄이 수시로 날아들었고, 그때마다 장병들은 길 양쪽으로 산개해 엄폐물에 의지한 채 지연 대응 사격을 했다. 그러나 대응 사격과 포격을 하는 데에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너무 컸다. 박격포 진지를 구축하고 후방에 적이 빤히 보이는데도 함부로 포탄을 날릴 수가 없었다.
 
  철수하는 병력 사이사이로 남루하고 꾀죄죄한 흰옷 입은 피란민들이 지게며 각종 수레에 양식과 세간들을 가득 실은 채 군인들을 따라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걷다 보면 어느 순간 군 병력과 피란민들이 뒤섞여 무질서해지기 일쑤였다. 헌병들이 수시로 나서 민간인들이 군 행렬 속으로 섞여 들지 못하게 통제를 시도했다.
 
  이런 가운데 철수하는 군인과 피란민들 사이에 흉흉한 소문도 나돌았다. 서쪽에서는 북괴 공산군과 남한 좌익 앞잡이들의 만행으로 수많은 무고한 사람이 죽임을 당하거나 끌려갔다는 것이다. 소문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피란민들을 더욱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한편으로는 피란민들 사이에서 국군이 무고한 양민들을 좌익 부역자들로 몰아 닥치는 대로 학살하는가 하면, 서울 시민들이 아예 피란하지 못하도록 한강 다리를 폭파했다는 말을 공공연히 떠벌이는 자들이 수시로 목격됐다. 철수하는 군 병력과 인산인해를 이룬 피란민들이 뒤섞인 채 괴산을 지나 조령(새재)을 앞둔 문경 부근에서의 혼란은 극심하기 짝이 없었다.
 
 
  첩자 제압
 
6·25 전쟁 당시 8사단 정훈장교였던 고(故) 한동목 예비역 중령이 촬영한 경북 영천의 피란민 행렬. 북한군은 피란민 사이에 침투하여 아군을 교란하려 했다. 사진=조선DB
  사단사령부로부터의 지시가 은밀하게 말단 소대로까지 전파되기 시작했다. 추격하는 적이 월악산 계곡을 통해 빠르게 남진, 문경을 점령해 철수하는 6사단의 퇴로를 차단하고 섬멸을 시도하기 위해 6사단 병력의 철수 속도를 지연시키려는 공작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적의 포위망에 빠지기 전에 새재를 넘어 문경을 선점하고 안정적으로 적의 남하를 지연하는 작전을 전개해야 했다. 그러나 군 행렬에 피란민들이 뒤섞여 군 장비뿐 아니라 병력의 이동조차 쉽지 않았다.
 
  이런 와중 온통 남루한 흰색 옷을 입은 피란민들 사이사이에서 수상한 행적과 소문들이 흘러나와 퍼지고는 했다. 크고 작은 소동이 연이어 벌어지고 피란민들은 수시로 혼란 상황에 빠져 국군 장병들에게 삿대질하는 등 이상행동이 잦아졌다.
 
  어느 순간, 지휘관들의 신호를 받은 병사들이 조직적으로 움직이며 피란민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총검을 겨눈 병사들의 서슬 퍼런 눈초리가 피란민들을 훑기 시작했다. 그러잖아도 황급히 집을 떠나 피란길에 나선 사람들이 불안한 눈길로 군인들을 바라보았다. 이런 중 갑자기 어디선가 거친 욕설이 오가는가 싶더니 여자들의 비명이 들렸다. 군인들이 한 사내를 체포해 몸수색을 시작했다. 그러자 인파 속 곳곳에서 “국방군이 생사람 죽인다!” “인민에게 총을 겨누지 마라!” 하는 소리가 들리며 피란민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방송 차량 스피커에서 단호한 명령 소리가 울려 퍼졌다.
 
  “피란민 속에 괴뢰군 첩자들이 숨어들었다. 모조리 체포하고 저항하면 사살해!”
 
  이미 피란민들 속으로 조직적으로 파고든 군인들이 미리 점찍은 사내들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고함과 격렬한 저항이 이어지는 가운데 피란민들이 길 한쪽으로 몰렸고, 체포를 면한 사내들이 근처 산으로 도주를 시도하며 숨기고 있던 총기를 꺼내 추격하는 병사들을 쏘기 시작했다. 사내들이 달아나며 난사하는 총탄에 맞아 피란민들이 쓰러졌다. 병사들이 응사하는 총탄에 달아나는 북괴군 공작조 사내들이 쓰러지고, 포위된 채 엄폐물에 숨어 대치 중인 자들도 있었다.
 
  이렇게 피란민들 속으로 숨어 들어와 6사단의 남하를 지연시키는 공작을 벌이던 적 첩자들 제압 작전이 마무리됐다. 사단 지휘부는 가두방송으로 방금 벌어진 일들을 피란민들에게 설명했다. 그러나 적 공작조의 총격으로 가족을 잃은 피란민들이 거칠게 항의하고, 여자들이 길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하는 난감한 상황이 이어졌다. 피란민들과 일정 거리를 두고 앞서 남하를 시작한 군인들을 향해 사정을 모르는 피란민들이 야유와 욕설을 퍼부어댔다. 소년으로서는 피란민들의 난동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음성 전투 후 충주를 거쳐 괴산까지 오는 동안 피란민이 급격히 늘면서 6사단 병력과 뒤섞이는 혼잡한 상황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병사들은 사단장을 비롯한 지휘관들의 엄격한 지시와 통제하에 피란민들에게 어떤 피해도 주는 일이 없어야 했다. 비록 철수 중이지만, 6사단 장병들은 전투마다 혁혁한 전과를 올리며 사기가 높았던 만큼 피란민 보호와 배려, 지원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6사단은 철수는 하고 있었으나 적의 공세에 밀린 후퇴는 아니었다. 서부와 동부 전선이 적의 공세에 밀리며 전선(戰線)이 남하해 가는 까닭에 전선을 횡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차례로 남하였다.
 
 
  남하
 
  7연대는 음성 전투에서 거둔 승전의 여세를 몰아 계속 주도권을 쥐고 점차 남하해 갔다. 7연대는 효과적인 지연전을 펼치며 괴산, 연풍, 조령, 옥녀봉 전투를 통해 적의 진격 속도를 크게 떨어뜨렸다. 이미 급파되어 온 미군이 죽미령과 천안에서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퇴한 탓에 북괴군은 8월 초에 이미 낙동강 서쪽 강안(江岸)까지 진출한 상태였다. 낙동강을 전선으로 동남부 일부와 제주도만 남고 남한 전역이 북한의 수중에 떨어진 것이다. 서쪽이 낙동강 줄기를 따라 전선이 교착되고, 북쪽으로는 영천과 신령 일대, 동쪽으로는 포항까지 이어지는 선이 최후의 저지선이 되었다.
 
  7연대는 전장의 주도권을 쥐고 7월 13일 이후 문경 조령(새재)을 넘어 점촌으로 축차 남하해 갔다. 그리고 함창에서 적에게 큰 타격을 가한 뒤 의성과 상주 사이의 안계와 군위 아래쪽 효령을 잇는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 지역은 아군 공병이 장애물 설치 작업을 하고 있던 바로 전방이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아군의 대전차지뢰가 폭발하면서 지프에 탑승 중이던 이상근 연대장(대령)과 유병욱 연대장이 순직하는 일이 벌어졌다. 함께 탑승 중이던 운전병과 부관들도 함께 순직했다. 부대 간 정보 공유가 힘든 상황에서 벌어진 참변이었다.
 
  차례로 남하할수록 부대 간 방어 지역이 좁혀지는 상황에서 피란민들까지 인산인해를 이루고 수시로 적병들이 피란민과 뒤섞이는 일이 벌어졌다. 이 바람에 근접한 적을 보고도 포격과 항공 공격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연속됐다. 날이 어두워지면 피란민들은 쉴 곳을 찾아 주변 공터 등으로 흩어졌다.
 
  그러면 북괴군은 전차를 앞세우고 남하해 왔다. 도로를 중심으로 주변 산야의 참호 속에 매복 중이던 연대 병력은 이미 북괴군의 전차 공격쯤은 능숙하게 감당해내고 있었다. 대전차 화기가 불을 뿜으면 앞서 남하하던 북괴군 전차들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이때를 기다려 참호에 매복해 있던 병사들이 뒤따르던 적병들 속으로 뛰어들어 수시로 백병전이 벌어졌다. 백병전은 한밤중에도 벌어졌는데, 피아 구분이 되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서로의 머리통을 더듬어 가며 차고 때리고 찌르는 식이었다. 이런 중 미군이 본격 참전한 가운데 낙동강 방어전도 본격화했다. 국군도 속수무책으로 밀리던 초반의 열세를 극복하고 결사적인 대응으로 북괴군을 막았다.
 
 
  모기, 벌레, 들쥐와 싸우며
 
  1950년 7월 12일, 2연대가 이화령을, 19연대가 조령 방어를 맡은 가운데 7연대는 사단의 작전 계획에 따라 조령을 넘어 문경으로 남하했다. 그리고 사단사령부가 위치한 문경 시내를 중심으로 좌측 황계산부터 백화산 사이 서남쪽 고지에서 측후방에 이르는 지역을 1대대와 2대대가 담당한 가운데, 3대대는 문경 동북쪽으로 이동해 팔영산에서 횡(橫)으로 이어진 갈평리 계곡 방어를 위해 팔영산 방향으로 이동했다.
 
  소년의 소대는 팔영산 전면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7월 중순 한여름으로 접어들었고, 장마에 따른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는 집중호우로 인해 참호에 물이 차고 교통호를 따라 물이 흘렀다. 배수구를 만들어도 빗물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전투와 이동, 진지 공사와 매복이 잠깐의 쉴 틈도 없이 이어졌다.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는 장맛비와 장맛비가 그친 뒤의 후덥지근함과 끈적함이 병사들을 괴롭혔다. 이에 더해 숲속의 모기와 벌레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병사들의 맨살을 물고 피를 빨았다. 진지 공사가 끝나기 무섭게 먹을 것을 찾는 들쥐들도 참호에 구멍을 파고 들락거리며 병사들 군장을 들쑤셨다. 소년은 춘천을 떠날 때의 복장 그대로였다. 갈아입을 여벌 전투복과 군화 한 켤레 없는 상태로 벌써 20여 일이 흘렀다. 이 전쟁이 이제 시작이란 것을 소년은 알 턱이 없었다.
 
  질척거리는 산기슭 맨땅을 파헤쳐 참호를 구축하는 병사들 이마에서 구슬땀이 흘렀다. 땀과 빗물에 젖은 군복을 벗어 말릴 시간도 공간도 없는 상태로 내리는 빗물이 그대로 고이는 병참호에 기대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적을 기다려야 했다.
 
  7월 15일, 2연대와 19연대가 막고 있던 이화령과 조령을 치열한 공방전 끝에 점령한 북괴군 1사단은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오전 6시 문경을 향해 총공세를 퍼부었다.
 

  6사단은 이화령과 조령, 문경 방어 전투를 통해 북괴군 1사단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지연시키며 문경 방어선에서 차례로 철수했다. 소년으로서는 정신없이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은성 부근에서 고지를 옮겨 다니며 북괴군과 전투를 치르고, 연대는 다시 낙동강 상류의 한 지류인 영강에 도착해 진지를 구축했다.
 
  지연전을 통한 축차 철수였지만 춘천과 인제, 홍천을 적에게 내줬고 횡성과 원주를 내줘야 했다. 이어 충주와 음성을 내주었고, 소백산맥 방어선의 조령과 이화령, 문경까지 내주었다. 6사단 장병들은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개전 후 지금까지 철수에 철수를 거듭하고 있었다. 말이 좋아 축차 철수지 자신들이 지켜야 할 땅을 적에게 내준다는 것은 군인으로서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장병들 대부분이 방어선을 물릴 때마다, 그렇게 ‘후퇴’할 때마다 울분을 삼키고 눈물을 삼켰다. 이런 장병들의 마음을 모를 리 없는 연대장이 진지 구축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연대원들을 중대별로 돌아보며 당부하고 의지를 북돋았다.
 
  “더 이상 물러설 수도, 물러설 곳도 없다. 지금 파는 참호가 우리의 무덤이라 여기자. 조국을 위해, 부모 형제를 위해 기필코 이곳을 사수하자.”
 
  월남민인 소대 선임하사는 김일성을 비롯한 이북 공산 집권 세력에 대한 적개심이 남달랐다. 큰 형님뻘인 선임하사는 늘 앞장서 달리며 전장의 병사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전투가 끝나면 병사들을 위로하는가 하면, 때에 따라서는 가차 없는 호통과 기합으로 병사들의 군기를 바로 세웠다.
 
 
  옥녀봉 전투
 
  - 7연대는 문경 전투 후 남쪽의 은성 부근에서 다시 북괴군의 공세에 맞서 7월 19일부터 28일까지 열흘여에 걸쳐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소백산맥 방어선이 무너진 뒤로 낙동강을 넘어서기 직전까지의 북괴군의 공세를 지연시키기 위한 전투였다. 낙동강 상류 지류인 영강 주변 옥녀봉 일대를 사수하기 위한 3차에 걸친 전투를 통해 연대뿐 아니라 6사단 전체의 피해도 극심했다. 그러나 끝내 옥녀봉을 탈환하고 적을 격퇴함으로써 북괴군의 낙동강 도하 진격을 저지했다.- (필자 주)
 
  7월 20일, 7연대는 영강 서쪽 413고지와 옥녀봉에서 증강된 연대 병력의 적과 밀고 밀리는 공방전에 돌입했다. 옥녀봉 좌일선에 배치된 3대대는 쏟아지는 적의 포화를 고스란히 감당하며 진지를 고수했다. 413고지 1대대 진지가 적의 파상공세 속에 고전하고 있었고, 취약부를 뚫고 적군 일부가 413고지 남단 신대리에 예비대로 있던 2대대 진지까지 근접했다.
 
  선봉이 7연대의 방어선에 돌파구를 마련함에 따라 적은 연대 규모 병력을 집중 투입하며 연대의 배후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돌출된 좌일선을 담당하고 있던 3대대까지 적에게 포위되는 상황에 직면함으로써 연대 전체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이러는 동안 아군 측으로부터 아무런 엄호 포격이 이루어지지 않아 조령 남쪽 6사단 방어선 전체가 와해될 위기에 처했다.
 
  1대대와 2대대가 413고지와 옥녀봉에서 철수하여 그 후방 영강을 끼고 새 방어선을 구축함에 따라 옥녀봉 방어선에는 3대대만이 남게 되었다. 연대 규모 적군에 둘러싸인 3대대에 이남호 대대장이 옥녀봉 9부 능선 관측소에서 엄명했다.
 
  “일보도 물러설 수 없으니 진지로 접근하는 적을 그 자리에서 격멸하라.”
 
  오후 2시경, 413고지를 점령한 채 숨을 고르던 적이 삼면에서 옥녀봉을 에워싸고 진지로 파고들었다. 분대 단위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병참호에 엄폐한 소대원들에게 수류탄 두 발씩이 더 지급됐다. 1대대와 2대대가 적의 공세에 밀려 영강으로 물러나 방어선을 치고 있는 상황에서 3대대 홀로 삼면이 포위된 상황에서 연대 규모 적군을 상대해야 했다.
 
  마침내 북괴군의 공격이 개시됐다. 선봉에 선 적병들이 진전(陣前)까지 근접할 때를 기다리던 소대원 중 누군가의 수류탄 투척에 이은 폭발 소리를 신호로 적군을 향해 일제히 수류탄이 날아갔다. 기관총이 달려드는 적군을 향해 불을 뿜었다. 그러나 수적 우세로 밀려드는 북괴군의 수류탄 공격이 소대 진지를 강타하고 82mm 박격포탄이 배후의 12중대 본부를 강타했다. “진지를 사수하라!”는 중대장의 고함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중대장의 육성은 총포탄 소리와 양쪽 병사들의 아우성 속에 묻혀버렸다. 수적으로나 화력으로나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을 때, 박격포탄이 연거푸 적진으로 날아들었다. 대대 중화기중대에서 쏜 81mm 박격포탄이 연거푸 북괴군의 배후를 때리며 앞서 달려들던 돌격조를 본대와 분리시켰다. 돌격조의 머리 위에서도 박격포탄이 떨어져 내렸다. 당황한 북괴군 돌격대들이 기관총탄에 맞아 쓰러지거나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3시간여, 물러났다 돌격하기를 반복하던 북괴군 머리 위로 미군 전투기가 날아들며 기관총을 쏘고 포탄을 투하했다. 집요하게 돌격해 오던 북괴군이 마침내 옥녀봉을 포기하고 413고지 북단으로 퇴각했다.
 
 
  학도병
 
6·25 당시의 학도의용군. 애국심은 훌륭했지만 실제로 전쟁터에서 제대로 싸우기에는 경험이 너무 없었다.
  이렇게 옥녀봉 1차 전투는 끝났다. 그러나 1차전의 패전을 만회하고 옥녀봉을 탈취함으로써 공세의 우위를 놓치지 않기 위해 바로 다음 날인 7월 21일 북괴군의 2차 옥녀봉 공격이 재개됐다. 북괴군은 대대 규모를 능가하는 포병 화력과 연대 규모 병력으로 옥녀봉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옥녀봉 전방 305고지에 배치된 소년의 소대는 적의 진격을 최대한 지연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소대 병력이 절반 가까이 줄어든 상태였고 신병 충원은 제때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학도의용병 3명이 소대에 긴급 투입됐다. 소대장으로부터 특별 지시를 받은 선임하사가 학도병들을 춘천에서 소년에게 그랬던 것처럼 자기 옆에 머물게 했다. 군장에 총을 들었지만, 소년은 그들의 허여멀건한 얼굴에 잠시 뭔지 모를 이질감이 느껴졌다. 포성과 폭발음이 작렬하는 가운데 대대 규모 북괴군이 305고지 전면에 모습을 나타냈다. 적들은 305고지를 단숨에 삼키기라도 할 것처럼 엄폐물을 찾아 몸을 숨겨가며 기민하게 소대원들을 압박해 들어왔다.
 
  소대원들은 적의 총탄이 교통호 벽에 와 박히고, 박격포탄이 참호 주변으로 떨어져 폭발하며 흙더미를 덮어씌우는 순간에도 소대장의 신호를 기다리며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이미 305고지 양옆 기슭과 능선들에서는 콩 볶는 듯한 총격 소리가 들렸고, 포탄이 작렬하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마침내 적병이 던진 수류탄이 교통호 턱 바로 앞에 떨어지며 작렬했다. 이것이 신호인 양 신호병의 호각 신호가 울려 퍼졌다. 호각 소리와 함께 분대 단위로 조를 짜 수류탄 투척 순서를 기다리고 있던 1분대원들이 수류탄을 투척했다. 수류탄을 투척한 1분대원들이 엄호 사격하는 가운데 2분대원들이 수류탄을 던졌다. 이어 3분대, 4분대원들의 수류탄 투척이 이어졌다. 그러나 수류탄과 총격 대응에도 불구하고 수적 우위를 앞세운 적은 거침없이 소대 진지를 압박해 들어왔다.
 
  교통호 속으로 수류탄이 날아들어 폭발하기 시작했다. 몸을 날려 폭발을 피한 소대원들이 벙커로 몰려들었다. 소년은 선임하사와 한 조가 되어 적병의 돌격을 저지했다. 그 옆에서는 학도병 3명이 공포를 이겨내며 방아쇠를 당기고 있었다. 그러나 학도병들의 총구는 허공을 향하고 있었다. 선임하사가 소년에게 지시했다.
 
  “너는 신병들 데리고 벙커로 가서 소대장 지시를 기다려. 여기는 일단 내가 맡는다고 하고.”
 
  소년이 망설이자 선임하사가 다그쳤다.
 
  “빨리 얘들을 벙커로 데리고 가 인마! 얘들은 어차피 여기서 더 못 버텨.”
 
美 F-80 전폭기의 오폭으로 인한 비극
 
  옥녀봉 2차 전투가 있던 7월 21일 오후 2시경, 미 공군 F-80 전폭기 1개 편대가 옥녀봉을 향해 비행해 왔다. 대대장과 대대원들 모두 미 공군기의 등장을 반기며 절대적 수세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F-80 편대는 3대대 지휘관측소를 비롯한 옥녀봉 일대의 아군이 집결해 있는 곳마다 기관총 사격을 가하고 폭탄을 투하했다. 옥녀봉이 적의 수중에 떨어진 것으로 잘못 판단한 편대장의 어이없는 실수였다. 지휘관측소가 폭격에 날아갔고, 기총소사로 말미암아 중대장 한도선 대위를 비롯한 3명이 전사하고, 5명이 중상을 입고 긴급히 후송됐다. 2포대의 관측 하사관도 기관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총알을 아껴라”
 
  소년이 두 학도병을 앞세워 벙커로 들어갔다. 벙커에서는 소대장이 중대장에게 무전으로 상황 보고를 하고 있었다. 소년은 매우 심각한 상황임을 직감했다. 교통호 쪽에서 실탄을 가져오라는 외침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벙커에는 더 이상 버틸 실탄도 수류탄도 바닥난 상태였다. 이제 병사 개개인이 보유한 실탄과 수류탄으로 버틸 수밖에 없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소대장이 M1 소총에 착검하고 벙커 밖으로 나갔다. 소년이 그 뒤를 따랐다. 학도병들 또한 뒤따라 나오다 소대장의 제지로 다시 벙커로 들어갔다.
 
  “너희는 별도 지시가 있을 때까지 여기 있어.”
 
  선임하사가 교통호를 종횡무진하며 병사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자기 위치를 사수하라! 총알을 아껴라! 반드시 조준해서 사격해!”
 
  소대장이 선임하사를 불러 말했다.
 
  “옥녀봉 좌측을 맡은 1대대도 고전을 면치 못하는가 보오. 우리 대대 9중대 진지가 괴뢰군에게 넘어갔고, 10중대도 뒤로 밀리고 있다 하오.”
 
  선임하사가 소대장에게 물었다.
 
  “우리 소대도 최악입니다. 실탄과 수류탄 모두 개별 병사들이 가진 게 다입니다. 일단 뒤로 물러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소대장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연대장님과 대대장님 모두 305고지 현 위치를 고수하라는 명령이오. 곧 증원 병력이 올 것이오.”
 
  그러나 적병들이 참호 속으로 뛰어들어 육박전이 벌어질 때마다 사상자가 속출했다. 하지만 더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북괴군이 퇴각했다 다시 난입하기를 거듭하는 동안 증원군은 여전히 오지 않았다. 소대 사상자만 예닐곱 명에 이르렀다. 대대 전체가 5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며 혼전을 거듭하는 동안, 3대대장 이남호 중령은 옥녀봉 9부 능선 지휘관측소에 버티고 서서 흩어지는 병력을 수습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305고지를 고수할 수 없었다. 대대장은 곧바로 해당 소대와 중대 병력을 옥녀봉 남쪽으로 조정 배치했다.
 
  옥녀봉 2차 전투는 많은 전사자와 부상자를 남긴 채 적에게 옥녀봉을 넘겨주고 3대대는 387고지로 이동, 진지를 구축했다. 옥녀봉 전투가 재개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튿날인 7월 22일, 7연대는 옥녀봉 전면의 387고지를 점령한 데 이어 옥녀봉 탈환을 위한 대대적인 공세에 들어갔다. 옥녀봉 3차 전투가 7연대의 반격으로 시작된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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