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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갑식의 주유천하 〈39〉 한국의 名將 蔡命新 장군의 對공산당 투쟁기

“1945년 김일성과의 遭遇, 그때 그를 따라나섰다면 몇 년 뒤 나의 銃口는 남쪽을 겨냥했을지도 모른다”

글·사진 : 문갑식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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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4·3사건 때 좌익과 대결, ‘섬멸’만큼 ‘감화’도 중요해
⊙ 날 암살하려던 부하들이 나중에는 “조심하라” 돌봐줘
⊙ 6·25 발발 2년 전부터 전투 시작… 고지의 적 토치카 기관총에 소대장·분대장 전사
⊙ 대원들이 포탄 안고 돌진… ‘육탄 10용사’ 잊을 수 없어
⊙ “닭 한 마리만 잡아먹고 가자”는 유혹에 후퇴 늦어 부대가 전멸될 뻔
⊙ 박정희 대령, 낡고 피 묻은 내 점퍼와 자기 고급 점퍼 바꾸자고 해
⊙ 베트남戰 당시 美 언론 “제2차 세계대전 후 최고의 승전보” 극찬
⊙ 강군 토대 닦은 베트남戰… 1964년부터 8년간 31만명 파병, 맹호·청룡 부대 등 신화
참군인 채명신 장군. 2010년 5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 때 모습이다. 사진=조선DB
  올 현충일 문재인 대통령 기념사의 한 대목이다.
 
  “국립서울현충원 2번 묘역은 사병들의 묘역입니다. 8평 장군 묘역 대신 이곳 1평 묘역에 잠든 장군이 있습니다. ‘내가 장군이 된 것은 전쟁터에서 조국을 위해 목숨을 버린 사병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우들인 사병 묘역에 묻어달라’고 유언한 채명신 장군입니다. 장군은 죽음에 이르러서까지 참다운 군인 정신을 남겼습니다.”
 
채명신 장군은 국군 장성 중 유일하게 사병 묘역에 묻혔다. 사진=조선DB
  채명신(蔡命新·1926~2013) 예비역 육군 중장을 이렇게 몇 줄로 평가하는 것은 너무도 단편적이다. 나는 채 장군 생존 시절 몇 차례 인터뷰를 했고 식사를 함께 하기도 했다. 그가 타계하기 전 동부이촌동 자택에서 만났을 때가 마지막이었다. 그때 채 장군은 “짜장면 먹고 가라”고 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노(老)장군에게 폐를 끼칠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였는데, 그게 지금도 후회가 된다.
 
  세월이 흐르다 보니 당시 채 장군이 권한 짜장면이 혹시 그가 잡숫고 싶어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먹고 싶은데 나이 들어 혼자 식당에 가기 계면쩍어서 내게 권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지금에서야 드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죄송해지는데 하필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1년 연수를 하는데 장군의 부음이 들려왔다. 장례까지 참석하지 못한 것이다.
 
  채명신 장군은 1926년 11월 27일 황해도 곡산에서 출생한 뒤 평양 부근에서 성장했다. 평양이라고 하지만 정확히 1890년 말 조부(박진준)가 평안남도 진남포 부근에 세운 덕해교회 근처에서 살았다. 장군이 월남(越南)을 결심한 것은 김일성이 소련군과 함께 북한을 점령한 직후였다. 사달은 교회에 느닷없이 들이닥친 공산당원들이 다짜고짜 “교회 문을 닫으라”고 요구하면서 시작됐다.
 
  모태 신앙으로 목사가 꿈이었던 장군의 피가 순간 거꾸로 치솟았다고 회고했다. 장군은 격앙된 목소리로 그들에게 물었다. “김일성 장군의 정강정책에도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는 걸로 아는데 당신들은 지금 장군님의 지침을 위반하는 것인가?” 공산당원들은 얼굴이 벌게지더니 이렇게 반격하는 것이었다. “천당에 가본 사람이 있는가. 본 사람이 있는가?” 장군은 이에 지지 않았다.
 
  “당신들은 눈에 안 보인다고 공기를 부정하는가?” 궁지에 몰린 공산주의자들의 상황 모면 단골 수법이 있다. “동무! 왜 그리 말이 많소. 말 많으면 반동(反動)이오. 두고 봅시다.” 그 말을 끝으로 그들은 씩씩대며 사라졌다. 하루에도 수십 명이 “동무 잠깐 봅시다”라는 말 한마디에 끌려나가 행방불명되던 시절이었다. 다음 날 가족들이 찾아가 울고불고해도 공산당원들은 아무것도 모른다며 잡아뗐다.
 
2013년 11월 28일 채명신 장군 안장식. 고인의 뜻에 따라 사병 묘역에 안장됐다. 사진=조선DB
  채 장군에게 비슷한 일이 생길 것을 염려한 어머니와 친구들이 월남을 권유했다. 채 장군 역시 떠날 순간이 왔음을 직감했다. 젊은이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내게 “(남으로) 갈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다”고 했다. 권사였던 채 장군의 어머니도 “빨리 가라”고 재촉했다. 1947년 1월 어느 새벽 채 장군은 마침내 남으로 향했다. 문제는 어디로 갈 것이냐였다.
 
  황해도 해주 쪽은 최단(最短) 거리지만 경비가 심했다. 그 때문에 원산까지 가서 철원·연천행(行) 기차를 탄 뒤 38선을 넘는 코스를 택했다. 전곡까지 가면 거리는 짧지만 뭔가 불안해 연천 부근에서 내렸다. 그런데 점점 동행이 생겼다. 처음엔 채 장군 혼자였는데, 일행이 2~3명으로 불더니 나중엔 20명 가까웠다. 그런 ‘대(大)부대’가 이동하는데 연천 부근에서 누군가 다가왔다.
 
  그는 ‘안내자’를 자처했는데 알고 보니 밀고자였다. 그가 일행을 이끌고 간 곳은 연천보안서 안마당이었다. 몽둥이찜질이 시작되더니 보안원은 “스파이 짓 하러 가는 것 아니냐. 너희 신원을 조사해 열흘 안에 처분을 결정한다”며 다그쳤다. 큰일 났다 싶었다. 채 장군은 기독교도에 교사였다. 죄질(罪質)이 가장 나쁘면 즉결, 두 번째면 시베리아 유형인데 그중 하나일 게 뻔했다.
 
  실제로 붙잡힌 지 9일째 되는 날 낯익은 보안서원에게 물었더니 예상했던 답이 나왔다. “동무는 시베리아로 정해졌소!” 운명의 날을 하루 앞두고 채 장군은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한다. 연천 주둔 소련군사령관이 죄수를 점검하러 온 것이다. 그가 앞을 지나는 순간 채 장군은 소련말로 외쳤다고 한다. “다와라시! 야 우치셀리.(동지, 나는 선생이다.)” 무심코 외친 이 한마디가 그를 살렸다.
 
  사령관이 신기하다는 듯 뒤돌아봤다. 채 장군은 알고 있는 소련말을 총동원했다. “야 뚜다 게이죠. 젱기가 무노가 예스시. 젱기 다와이.(나 경성에 간다. 돈이 많다. 돈을 가져오려 한다.)” 서울 삼촌에게 돈 빌려 유학 가려 한다는 뜻을 알아들은 소련군사령관은 손가락을 까딱대며 보안서장을 불러 석방을 명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소코핑 대좌라는 소련인이었다.
 
 
  풀려난 다음 날 채 장군은 38선을 넘었고, 운 좋게도 미군 지프를 얻어 타고 서울에 도착했다. 서울에는 채 장군 선친의 독립운동 동지 이정규와 유림 선생이 계셨다고 한다. 그들의 도움으로 앞날을 모색한 끝에 채 장군은 1947년 4월 모집하는 육사 5기에 지원하기로 했다. 채 장군은 3연대가 있는 부산에서 석 달간 교육을 받고 정식으로 육사에 입소했다.
 
  1948년 4월 6일 졸업과 함께 채 장군을 포함한 9명의 동기가 9연대에 배속됐다. 4월 10일 제주도에 도착하기 전 4·3사태가 터졌다. 4·3사건은 좌익들이 15개 경찰지서 중 14곳을 습격해 경찰을 살해한 사건이다. 그런 분위기 때문인지 채 장군이 맡은 9연대 2중대 4소대원들을 보는 순간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채 장군을 바라보는 소대원들 눈길에서 적개심이 느껴졌다.
 
  살얼음을 걷는 듯한 부대는 6월 18일 밤 박진경 연대장이 암살당하면서 마침내 폭발했다. 배후가 드러났는데 놀랍게도 배후는 바로 채 장군의 직속 상관 문상길 중위였다. 9연대 1000여 명의 지휘 라인은 제주인민해방군사령관 김달삼·이덕구(남로당 제주도당서기)·오일균(일본육사 61기·9연대 대대장)·문상길이었다. 박 연대장 암살 후 그다음 목표는 채 장군이었다.
 
  어느 날 훈련을 마치고 계곡에서 목욕을 하는데 총탄이 날아든 것이다. 더 놀라운 일은 놀란 채 장군을 소대원들이 엄호하며 구출해준 것이다. 소대장으로 있으며 채 장군이 북에서 공산당에게 당했던 일, 월남하면서 겪은 일을 얘기해준 게 일부 소대원을 감화시킨 걸 나중에야 알았다. 채 장군은 이 일로 큰 교훈을 얻었다고 한다. ‘세퍼레이트 앤드 디스트로이(Separate & Destroy).’
 
  채 장군이 훗날 월남전에서 미군에게 격찬받은 ‘분리 후 섬멸’ 전술은 이때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철저하게 적을 분리시킨 후 공격하는 것은 4·3사태와 태백산지구 빨치산소탕작전 때도 유효했다. 이념이나 사상은 하잘것없는 장식품이다. 채 장군은 소대장으로서 이들과 함께 먹고 함께 잤다. 그러자 처음엔 죽일 듯하던 대원들이 “소대장님 조심하십시오”라며 암살 경고까지 해준 것이다.
 
1945년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김일성 장군환영 평양시민대회’에 모습을 나타낸 김일성. 뒤편의 소련군 장성들은 김일성 정권이 소련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보여준다.
  채 장군은 공산당의 허구를 처음 안 날은 1945년 10월 14일이라고 기억했다. 그날 평양 기림리운동장에선 ‘김일성 장군 환영군중대회’가 열렸다. “위대한 조선 독립 투쟁의 영웅인 김일성 장군이 이 자리에 서셨습니다!” 사회자의 말에 5만 인파가 환호했다. 연단(演壇)에 선 이는 백발 성성한 김일성 장군이 아닌 청년이었다. 운동장이 일순 침묵했다. 곳곳에서 탄식 소리도 들렸다. 돌아오는 길에 신문 호외(號外)가 나돌고 있었다. 기사 내용은 ‘가짜 김일성’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채 장군은 김일성 정권에 참여할 뻔한 일이 있었다. 소련군이 ‘평양학원’이란 걸 만들었다. 청년 엘리트를 5~6개월 훈련시켜 군의 초급 지휘관으로 양성하는 사관학교 격이었다. 김일성의 최측근 김책(金策)이 그 중책을 맡았다. 김책은 청년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평양에서 국민학교 교사 30명을 동원했다. 일종의 홍보요원으로 선생들을 이용한 것이다.
 
  채 장군은 당시 독학으로 교사 자격증을 따 진남포 부근 덕해국민학교 교사로 있었는데, 선전요원으로 선발된 것이다. 김책과 처음 만난 날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소련은 사회주의라는데 정말 인민들이 잘사나?” “계급 없는 평등사회가 과연 가능한 것인가?” “어떻게 인간사회에 계급이 없을 수가 있는가?” 이런 질문에 김책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한참을 채 장군을 바라보던 김책은 그러면서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어떻게 사회과학에 그렇게 통달한 것인가?” 채 장군은 “사회과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일이 없다”고 했다. 다만 독립운동, 더 정확히 말하면 무정부주의에 탐닉했던 선친이 읽던 책을 곁눈질한 수준이었다. 김책은 깊은 인상을 받았는지 1946년 2월 8일 열린 평양학원 개교식에 초대했다.
 
  거기서 소개받은 김일성은 호남형으로 덧니가 많았다. 드라큘라 영화 주인공 같은 인상이었는데 나중에 보니 수술을 했는지 덧니가 모두 없어졌다. 김책은 채 장군을 가리키며 “사회과학에 통달한 청년 동무”라고 소개했다. 김일성은 그 말에 대뜸 호의를 보이면서 어깨를 두드리며 이렇게 말했다. “아! 동무 같은 젊은 동무들이 필요하오. 평양으로 가 나와 함께 일합시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처음 맛본 소련 사이다의 달콤함이 사라졌다. 채 장군은 “아버지가 안 계셔서 지금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는 핑계를 댔다. 김일성은 “그럼 김책 동지를 잘 도와주고 어머니를 모실 방안이 생기면 그때 같이 일합시다”라고 했다. 만일 그때 김일성을 따라나섰다면 그로부터 몇 년 뒤 채 장군의 총구(銃口)는 남쪽을 겨냥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운명은 이렇게 바뀐다.
 
 
  채 장군과 공산주의의 전쟁은 6·25가 일어나기 2년 전인 1948년 시작됐다. 1951년까지 채 장군의 뇌리에 남는 사건은 개성 송악산의 ‘육탄(肉彈) 10용사’ 전투, 중공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와의 조우, 닭 한 마리 때문에 부대원 전원이 몰살당할 뻔한 일이었다. 1949년 채 장군은 11연대 4중대장으로 송악산 주봉을 경계로 인민군 1사단과 대치했다. 5월 3일 인민군이 기습을 해왔다.
 
  아군은 다음 날 새벽 즉각 반격했다. 채 장군은 송악산 좌측, 김영직 대위의 하사관교육대는 우측 비둘기고지가 목표였다. 비둘기고지에선 격전이 벌어졌다. 적이 쏴댄 기관포에 소대장과 분대장이 전사했다. 지휘관을 잃은 병사들의 눈에는 보이는 게 없었다. 그들은 육탄 공격을 결심했다. 분개한 1소대 1분대장 서부덕 상사, 박창근 하사, 윤옥춘·황금재·오제용·박평서·이희복·김종해·윤승원·양용순 상병이 자진해서 나섰다. 81mm 박격포탄을 안고 적 토치카로 돌격했다. 자폭 작전이었다.
 
  이들이 그 유명한 ‘육탄 10용사’다. 이 전투에서 채 장군은 네 살 위로 그가 형처럼 생각했던 김영직 대위를 잃었다. 호국(護國)의 표본, 군인정신의 정화(精華)인 그들은 경기도 파주 육탄 10용사 충용탑에 동상이 돼 서 있다. 송악산 전투 후 채 장군은 경북 안동 25연대로 전속됐다.
 
육군은 2014년 11월 19일 채명신 장군 1주기를 앞두고 계룡대 육군본부 회의실을 ‘채명신 장군실’로 명명했다. 사진=조선DB
  1950년 6·25가 터지고 영천 방어전에 임하던 채 장군에게 9월 16일 북진 명령이 내려왔다. 죽령터널~충북 단양~황해도 곡산~평남 덕천까지 파죽지세로 올라가면서 점점 ‘너무 빨리 가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처럼 적들도 무슨 작전을 쓸 것 같았다.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펑더화이가 이끄는 중공 4야전군이 밀고 내려온 것이다.
 
  채 장군은 평북 희천에서 처음 중공군과 교전했다. 그들은 주로 밤에 공격했다. 기분 나쁜 피리 소리에 이어 파란 신호탄이 올라가면 벼락처럼 함성을 질렀다. 해일(海溢) 같았다. 돌이켜보면 아군은 청천강 목 좁은 전선에서 강한 방어선을 쳐야 했다. 그런데 ‘누가 먼저 압록강 물을 떠먹을까’라는 경주만 벌였다. 전략 요충을 그냥 지나친 것이다. 우리와 동해안 전선은 텅 비었다.
 
  중공군은 그 틈을 타고 남진했다. 11월의 낭림산맥은 추웠다. 정신없이 후퇴하다 보니 연대 지휘부와 떨어지게 됐다. 통신마저 끊겨 결국 적진에서 채 장군 대대(북진 중 승진)만 독자 행동을 해야 했다. 며칠 뒤 겨우 통신이 연결됐다. 3대대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대장이 중공군에 포위됐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내리달아도 5시간 거리에 있었다.
 
  대대 병력을 끌고 갈 수 없어 특공대 50명을 이끌고 갔다. 겨우 포위망을 뚫고 연대장을 구출했다. 생존자가 80명에 불과했다. 참패였다. 패잔병을 끌고 일주일째 남하하는데 김영노 연대장이 지친 기색으로 말했다. “채 소령, 닭 한 마리만 먹으면 원이 없겠소. 병력 몇 명 데리고 별도 행동이라도 해 원기를 회복하고 싶소.” 그 닭 한 마리 때문에 채 장군 부대는 전멸 위기를 맞는다.
 
  고기 때문에 작전을 바꾼 건 전쟁을 하면서 처음이었다고 한다. 채 장군 부대는 20여 호쯤 되는 마을을 포위했다. 주민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협박을 가해 1인당 한 마리 이상씩의 닭을 삶아 먹었다. 주린 배를 채우자 병사들이 이내 코를 골았다. 연대장마저 주저앉았다. 채 장군은 연대장에게 “너무 시간을 지체했다”며 행동하자고 했다. 주민들의 불길한 눈빛도 꺼림칙했다.
 
  연대장은 “이 사람아! 왜 급하게 그러나” 하며 화를 냈다. 채 장군은 권총을 뽑아 연대장에게 겨눴다고 한다. “연대장님 때문에 떼죽임당할 순 없습니다. 빨리 일어나지 않으면 쏘겠습니다.” 난리 끝에 지친 부대원을 깨워 1시간 남짓 이동하다 중공군의 매복에 걸리고 말았다. 정신없이 포위망을 뚫고 나와보니 인원이 8명뿐이었다. 그것으로 연대장과 영원히 이별하게 됐다.
 
  지금까지 연대장은 실종으로 기록돼 있다. 그 뒤 잇따라 인민군과 중공군을 만나면서 일행은 3명으로 줄었다. 며칠 뒤 또 위기가 왔다. 그날도 젊은 여인과 아이가 사는 집에 들어가 ‘당 직속 정찰대’라 속여 밥을 얻어먹었다. 졸음이 쏟아지는데 밖에서 눈 밟는 소리가 났다. 포위당한 걸 직감했다. 변소에 있던 여자의 남편이 신고한 것이다.
 
  채 장군은 부하 둘에게 “투항하든지 기회를 봐 도망가라”며 권총을 머리에 갖다 댔다. ‘철컥’ 소리가 들렸는데 불발이었다. 다시 장전하고 머리에 갖다 대는데 부하 정용식 상사가 손을 붙잡는 것이었다. “죽지 말라는데 왜 죽습니까?” 기묘한 말이었다. 그 순간 “손들어!” 하는 소리와 함께 인민군이 총을 겨누며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방아쇠를 당겼다.
 
  ‘탕!’ 소리와 함께 녀석이 고꾸라지자 2탄을 쏘며 밖으로 나왔다. 채 장군을 향해 개머리판을 휘두르는 적병에게 3탄을, 도랑으로 피하는 다른 녀석에게 4탄을 명중시켰다. 1951년 1월, 채 장군은 마침내 연백평야를 거쳐 강화도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겨우 탈출하고 보니 군은 극비리에 그에게 게릴라전을 맡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민간인 300명을 선발한 배경엔 미군의 힐난이 있었다.
 
  그들은 신성모 국방부 장관을 비꼬았다. “북한은 게릴라전에 능한데 남한은 대체 뭐 하는 거요?” 그 말을 듣고 채 장군은 여관으로 돌아왔다. 유격부대가 전멸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인사국장에게 조건을 달아 지휘를 수락했다. “숫자는 50명입니다. 전과를 올리면 GO(게릴라 군번)를 정규 군번으로 바꿔주십시오.” 정일권 참모총장도, 신 장관도 “OK”라고 했다.
 
사단장 시절의 채명신 장군. 왼쪽에서 두 번째가 박정희 준장, 그 옆으로 김용배 소장, 강문봉 중장, 송석하 준장, 채명신 준장이다.
  인민군 복장, 소련제 AK소총, 북한 지폐를 지닌 유격결사 11연대가 마침내 1951년 1월 말 강원도 영월 북방 적진에 잠입했다. 그런데 뒤이어 유격 12연대(160명), 13연대(120명)가 따라왔다. 계획과 달리 유격대는 500명의 부대가 됐다. 채 장군은 내키지 않았지만 부대명을 ‘백골병단(白骨兵團)’으로 바꿨다. 2월 하순 대위가 포함된 적 연락병 5명을 만났다.
 
  그들은 인민군 중좌 차림의 채 장군이 반가운 듯했다. “동무, 어딜 가오?” “전 2군단 예하 69여단 사령부 연락장교입니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채 장군은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그렇소? (주위를 둘러보며) 이놈들 무장해제시키시오!” 그들은 진짜 월척이었다. 69여단장이 인민군 최현 2군단장에게 보내는 극비문서와 부대 배치가 표시된 지도를 갖고 있었다.
 
  정보를 아군에게 보내 2군단을 폭격한 뒤 후퇴 도중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기린리 군량밭이란 마을에 인민군 거물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그는 조선공산당 제2서기이자 현역 중장이며 대남유격대 총사령관 길원팔이었다. 그의 거처에 잠입했다. 의외로 일행은 외팔이 참모장 강칠성 대좌를 포함해 15명과 무장 자위대원 30명뿐이었다. 채 장군은 200명으로 그들을 포위했다.
 
  일단 무장 자위대원부터 처치하기로 하고 대장에게 접근했다. 여기서도 인민군복과 ‘당 직속 정찰대장’이라는 거짓말이 통했다. 영문도 모른 채 모인 자위대원을 무장해제한 뒤 길원팔이 사는 세포위원장 집을 포위했다. 그는 돌연한 국군의 출현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죽기 전까지 “썩어빠진 이승만 괴뢰도당 중에 여기까지 침투할 놈은 없다”는 말을 수십 번 했다고 한다.
 
  길원팔은 거물이었다. 남으로 끌려가기보다 자결을 원했다. 그에게 김일성이 선물했다는 권총에 총알 한 발을 넣어줬다. 2군단이 폭격당하고 길원팔이 살해됐으니 이젠 채 장군 부대가 도망칠 차례였다. 예상대로 적의 부대가 끈질기게 쫓아왔다. 채 장군 부대는 설악산 능선에서 죽을 고비를 맞았다. 적에게 쫓기다 절벽 아래로 뛰었는데 2m 넘는 눈 덕에 살아나 강릉 9사단에 인계됐다.
 
  당시 9사단 참모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대령)이었다. 그는 유격대의 활약상을 흥미 있게 들었다. 어느 날 박 대령이 채 장군을 불고깃집으로 초대했다. 그러면서 적군의 핏자국이 얼룩진 누더기 점퍼를 자기 고급 점퍼와 바꾸자는 것이었다. “이봐, 그거 역사적인 점퍼잖아”라면서. 자기 깨끗한 옷을 후배인 채 장군에게 선물하려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세심한 배려였던 것이다.
 
  한 치의 땅이라도 더 가지려는 혈전(血戰)이 전쟁 말 곳곳에서 벌어졌다. 텍사스고지・M1고지 전투가 대표적인 현장인데 상대는 중공군이었다. 1953년 7월 27일, 3년 2개월에 걸친 포성(砲聲)이 멈췄다. 당시 채명신 장군은 60연대장이었다. 1948년 제주 4·3사건부터 시작된 채 장군과 공산주의의 싸움이 5년을 넘겼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1965년 3월, 김용배 육군참모총장이 채 장군을 호출했다. 육군작전참모부장으로 발령 내면서 1964년 터진 베트남전 연구를 지시했다. 좌익·종북주의자들은 지금 한국의 베트남전 참전을 ‘미제의 용병’이라 폄하한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당시 미국은 한국이 참전하지 않으면 주한미군 2·7사단을 빼려 했다. 당시 미군 1개 사단 전력은 국군 수개 사단에 맞먹을 만큼 강했다.
 
  북한은 1962년 4대 군사노선으로 군비를 증강했다. 우리 전력은 6·25전쟁 때만큼이나 열세였다. 김일성은 “전쟁이 터지면 잃는 것은 휴전선, 얻는 것은 조국통일”이라고 종종 큰소리쳤다. 그런 때 미군 2개 사단의 이탈은 국가 위기였다. 결국 대한민국은 1964년 9월 베트남에 외과병원 장병 130명, 태권도 교관 10명을 파병했다.
 
  1965년 1월 8일 2000명의 군사원조단을 보냈고, 비둘기부대·육군 맹호부대·해병 청룡부대를 파견하게 됐다. 8년간 연인원 31만2853명이 참전하게 됐다. 1972년 3월 사령부가 철수할 때까지 한국군은 월남에서 신화적인 무공을 세운다. 그중 채 장군이 제일 자랑한 것이 ‘두코 전투’와 해병 신화(神話)를 세운 ‘짜빈동 전투’다. 맹호6호, 오작교, 암행어사작전도 그에 못지않다고 했다.
 
여의도비행장에서 거행된 맹호부대 파월 환송식. 박정희 전 대통령이 채명신 사령관에게 부대기를 전달하고 있다.
  1966년 7월 맹호기갑연대 3대대는 미군의 ‘파울리비아 작전’을 지원하러 캄보디아 쪽 국경 4km 지점의 두코(Duc co)로 이동했다. 이때 한국군은 대규모 인원과 화력을 동원하는 미군과 달리 중대(中隊) 위주 전술기지 방어 개념을 도입했다. 8월 9일 밤 10시40분부터 다음 날 새벽 4시30분까지 월맹군 2개 대대가 인해전술로 아군 1개 중대를 기습했다.
 
  적의 맹렬한 기관총과 박격포 공격을 교통호 속에서 견디던 맹호용사들은 미군 전차 2대가 지원해주는 틈을 타 반격에 나섰다. 백병전 결과는 대승이었다. 아군은 7명이 전사했지만, 월맹군 189명을 사살하고 6명을 포로로 잡았다. 기관총·로켓포·실탄 수만 발을 노획했다. 미군사령관은 현장을 찾아 살핀 뒤 “보지 않고는 사실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압승”이라고 했다.
 
‘홍길동 작전’ 중 채명신 사령관이 백마부대를 순시하며 장병들을 격려하고 있다.
  당시 공격부대는 월맹군 88연대 2개 대대 700명 병력으로 아군보다 6배나 많았다. 공산주의자들은 후퇴 때 꼭 시체를 챙겨가는데 그럼에도 200명가량 남긴 걸 보면 500명 가까이를 잃은 게 분명하다. 한마디로 궤멸적 패배를 당한 것이다. 다음 날 현장을 찾은 외신기자 중 1년 후 이스라엘의 국방장관이 된 모세 다얀이 있었다.
 
  그는 통신사 기자였는데, 두코 전투의 포병전에 주목했다고 한다. 그는 이때 경험을 바탕으로 1967년 6일 전쟁 때 전격전(電擊戰)의 신화를 이끈다. 전과를 올렸지만 월맹군의 보복이 걱정됐다. 다섯 달 후 마침내 우려가 사실로 드러났다. 파월 한국군 가운데 가장 북쪽에 위치한 청룡부대 11중대가 타깃이 된 것이다. 청룡부대 주둔지 주변의 부락민들은 거의 적색(赤色)분자였다.
 
  월맹군은 한국군의 손발을 묶으려는 듯 아이들을 앞세워 공격해왔다. 1967년 2월 14일 구정(舊正) 휴전이 끝나는 어두운 밤이었다. 당시 11중대 1소대장이 신원배 장군이다. 화염방사기까지 동원한 월맹군 수백 명이 달려들었지만 2분대장 이중재 하사가 화염방사기 사수의 뒤통수를 개머리판으로 쳐 무력화시켰다. 이진 병장, 김용길 중사는 수류탄으로 적 대전차유탄포·로켓 진지를 무너뜨렸다.
 
  피가 튀고 살이 찢기는 백병전은 다음 날 새벽까지 계속됐다. 결과는 적 사살 243명, 포로 2명. 적 1개 연대 공격을 우리 해병 1개 중대가 막아내자 미국 언론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최고의 승전보라 평가했다. 닉슨 대통령도 나섰다. “17년 전(6·25전쟁 때) 미국이 한국에 심었던 신뢰와 도움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실하게 증명해준 쾌거입니다!”
 
1968년 4월 채명신 주월(駐越) 한국군사령관(왼쪽)은 청와대를 예방해 박정희 대통령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전투 후 《뉴욕타임스》가 월맹의 지령문을 보도했다. ‘100% 승리의 확신이 없는 한 한국군과의 교전을 무조건 피하라.’ 월맹군은 한술 더 떠 한국군을 이렇게 평가했다. ‘한국군은 모두 태권도로 단련된 군대니 비무장 한국군에게도 함부로 덤비지 마라.’ 전투에 참가한 병사 전원이 1계급 특진했다. 대한민국 훈·포상법 제정 이래 처음이었다. 한국은 월남에서 유례없는 전과를 올렸다.
 
  채 장군은 이게 절대적인 전력 열세 속에서도 조국을 지켜낸 6·25전쟁의 경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6·25전쟁과 베트남전을 거치면서 한국군은 세계가 무시할 수 없는 최강의 군대로 재탄생했다. 채 장군은 이후 이세호 장군과 주월한국군사령관직을 교대했다. 당시 채 장군은 가장 유력한 육군참모총장 감이었다. 그런 어느 날 박 전 대통령이 그를 청와대로 불렀다.
 
  “3선 개헌을 하고 싶은데 임자(채명신)의 생각은 어떠냐”는 것이었다. 만일 그때 채 장군이 “당연히 그러셔야죠” 했다면 그는 육군참모총장이 됐을 것이다. 그런데 채 장군은 “5·16은 옳지만 3선 개헌은 옳지 않다”고 했다. 박 전 대통령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 후 채 장군은 육군참모총장이 되지 못했고 브라질・스웨덴・그리스 대사로 머나먼 외국을 떠돌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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