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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脫北 후 脫中…동남아에서 만난 13인의 탈북민

중국으로 팔려간 뒤 냉장고에서 발견된 탈북 여성…中 만행 알려야

글 : 박지현  월간조선 기자  talktome@chosun.com

취재지원 : 여리고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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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死線 넘은 탈북민과 구출에 목숨 건 이들의 이야기
⊙ 中 反간첩법개정후 구출 활동 제약 심각…“다음 세대가 없다”
⊙ 북송 될 바에 죽겠다며 혈관 물어뜯는 탈북민…中강제북송은 엄연한 국제법위반
⊙ 탈북민 사이 공안에 포섭된 간첩 끼어들어 脫北 루트 노출되기도
⊙ “탈북민에 어떤 의미 부여하는가에 대한민국 미래 걸려 있어”
  허연 다리가 덜 익은 멍으로 얼룩져있었다. 군데군데 긁힌 자국도 보였다. 발톱은 반쯤 날아가고 없었다.
 
  “죽어도 한 번 죽지 않습니까?”
 
  어제 막 메콩강을 건너 동남아 모처에 도착한 탈북민 김모(某)씨가 말했다. 몸피가 호리한 30대 여성이다. 그 험한 여정을 어찌 버텼냐는 말에 돌아온 답이었다. 해사한 얼굴과 달리 말투는 퍽 대찼다.
 
  한국행을 앞둔 탈북민들을 만나기 위해 한 동남아 국가를 찾았다. 2월 16일부터 18일까지 사흘 동안 13명의 탈북민들을 만났다. 《1만 킬로미터》의 저자 이지성 작가, 수퍼맨 목사(63)와 함께다.
 
  2월은 이 지역 여행의 적기(適期) 중 하나다. 습도가 낮고 낮엔 따뜻한데 저녁은 산산해서다. 어딜 가나 관광객으로 붐볐다. 대다수에게는 휴양지지만 탈북민에게 이 나라는 자유를 향한 마지막 관문이다.
 
  요즘은 북한에서 바로 넘어오는 탈북민은 거의 없다. 대부분 중국에서 체류하던 이들이다. 코로나19 이후 김정은이 국경지대를 봉쇄했기 때문이다. 중국 내 탈북민들의 70~80%는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 등을 거쳐 이곳으로 온다. 산 넘고, 물 건너 약 일주일간의 시간이 걸린다. 이들은 이 나라에 도착해야 비로소 안도한다. 탈북민의 한국행에 가장 협조적인 국가라서다.
 
  그렇다고 방심(放心)은 금물이었다. 탈북민은 엄밀히 말하면 밀입국자이자 불법체류자다. 이들을 돕는 행위 역시 불법이다. 취재의 경우에는 불법밀입국 방조죄가 될 수 있다. 자국 관광객 감시 목적으로 중국 사복 공안(公安)들이 이곳에 매복해 있다는 얘기도 들렸다. 묘한 긴장감 속에 첫 번째 지역을 찾았다. 보안을 위해 지명(地名)은 모두 생략한다.
 
 
  다섯 번 팔려갔던 여성
 
탈북민들이 한국으로 가려면 경찰서에 들어가서 북한에서 왔다고 밝혀야 한다. 그들은 이후 추방 형식으로 한국으로 보내진다. 사진은 동남아 모처에 위치한 경찰서. 사진=월간조선
  우리는 커다란 차를 빌려 같이 움직였다. 수퍼맨 목사는 운전기사 뒷자리에 앉아 길을 안내했다. 이곳 운전기사는 급작스러운 끼어들기에도 태평했다. 도로 위에서 경적소리를 들은 기억은 없다.
 
  수퍼맨 목사는 실명을 쓰지 않는다. 얼굴도 숨긴다. 신변보호 차원이기도 하지만, 애초에 주목받는 게 싫다고 했다. 지난 30년간 철저히 음지(陰地)에서 익명으로 활동하며 4500명의 탈북민을 구출했다. 그중에는 핵개발 관련 고위직, 인민군 고급 장교, 국가안전보위부·인민보안부 고위 관료와 다수의 국군포로도 포함돼 있다. 이 과정에서 8번 체포되고, 감옥도 3번이나 다녀왔다. 오른발에는 총상(銃傷)도 남아 있다. 인신매매에 처한 북한 여성을 구하기 위해 마피아와 몸값 협상을 하다 그렇게 됐다고 한다. 이지성 작가는 2018년부터 이런 목사를 돕고 있다. 수퍼맨 목사의 말이다.
 
  “탈북민들 보면 겉모습은 우리와 똑같잖아요. 그 속은 문드러져 있을 겁니다. 탈북민 대부분이 여성인데, 중국에 정착했던 탈북 여성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곤 모두 팔려갔다가 오는 겁니다. 어린아이가 70세 남편과 살기도 하죠. 다섯 번 팔려갔다가, 여섯 번째 겨우 도망쳐 나온 아이도 있었어요. 만나는 남편마다 아이를 낳아서 누가 누구 애인지도 모르고, 그 충격에 실어증에 걸린 채 왔더군요. 팔려간 시기를 보면 13세, 15세도 허다해요. 그때를 떠올리면 아이들이 막 경기를 일으키며 웁니다. 괴성을 지르며 데굴데굴 굴러요. 내가 팔려온 몸이라 생각해 보세요. 사는 게 사는 거겠습니까. 어떤 아이는 도망쳐 나왔다가 에이즈에 걸린 사실을 알고 선양(瀋陽)에서 목숨을 끊기도 했어요. 남편에게 맞아 죽는 것도 여러 번 봤습니다. 시신을 1년 동안 냉장고에 방치한 경우도 있었고요.”
 
 
  중국의 인신매매 조직
 
  북한 여성들은 돈을 벌기 위해 중국행을 택했다가 영문도 모른 채 물건처럼 거래된다. 유형은 여러 가지다. 우선 무작정 혼자 중국 땅을 밟은 경우다. 국경지에 발 디디자마자 이들은 민가(民家)에 들어가 도움을 청하는데, 그 지역 집들은 모두 중국 인신매매조직과 연결이 돼 있다. 민가에서부터 범해지고, 인신매매 조직원에게 돌아가며 겁탈당한 뒤 중국 농가나 성매매업소로 팔려나간다. 북한에서 브로커의 인솔을 받고 중국에 온 경우도 마찬가지다. 탈북 여성이 중국 국경에 다다르면 브로커들에게 인신매매 조직이 접근해 온다. 브로커와의 협상 끝에 조직은 탈북 여성들을 ‘취업시켜 주겠다’고 속이고 팔아버린다. 이미 중국에 나와 있는 탈북민 브로커가 취업 알선을 명목으로 인신매매에 가담하기도 한다. 수퍼맨 목사는 “브로커를 잘못 만나면 이밖에도 미얀마 반군(叛軍)에게 끌려가기도, 동남아 국가로 팔려가기도 한다”고 했다.
 
  “서글픈 게, 북한에서는 이제 중국 농가에 팔려가는 건 시집가는 것처럼 예삿일로 여기기도 한다는 겁니다. 너무 가난하니까 돈 좀 있는 곳으로 시집간다고, 엄마, 거기 가서 연락할게요, 하는 애들이 굉장히 많아요. 이게 지금 시대에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탈북민은 현행법상 대한민국 국민임에도, 우리나라 위정자들은 이런 탈북민의 인권 유린을 묵과하고 중국 눈치만 보고 있죠. 역사는 이런 대한민국을 과연 어떻게 기록할까요.”
 

  창밖으로 한갓진 풍경이 이어졌다. 간간이 오토바이가 지나갈 뿐 차도, 사람도 없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서있는 전봇대 개수를 눈으로 쫓았다. 그러면서 팔려 다니는 삶을 상상해봤다. 워낙 비현실적이라 감정이입조차 되지 않았다. 그저 이 나라 전봇대가 네모난 이유가 뭐였더라, 하는 생각만이 둥둥 떠다녔다.
 
 
  아이 유치원 보내고 몰래 도망
 
대부분의 탈북민은 메콩강을 건너 동남아 모처로 들어온 뒤 한국으로 간다. 사진은 메콩강에서 보트에 몸을 싣는 탈북민. 사진=여리고미션
  5분 후. 그 비현실적인 삶을 산 이들과 마주 앉게 됐다. 2개월 전 이곳으로 온 탈북민들이었다. 각각 양강도 온성과 무산, 함경북도 혜령, 함흥, 청진이 고향이라고 했다. 나이는 30대, 40대, 50대로 다양했다. 유일한 남성인 김모씨는 중국에서 16년을 살며 식당 일을 했다고 했다. 중국에서 가장 짧게 산 사람은 온성 출신의 탈북 여성 김모씨였다. 5년을 살았다.
 
  “북조선에서 아버지가 7년간 뇌혈전증(腦血栓症)을 앓았어요. 병원비가 모자라서 마음을 많이 썼는데, 누가 중국에서는 식당 일만 해도 한 달에 2000~3000위안(약 38만~56만원)을 번대요. 아버지 손을 잡고 세 달만 돈 벌어가지고 오겠다고, 올 때까지 죽지 말라고 하고 중국으로 갔어요. 중국 도착 후엔 나를 차에 태워서 어디 가는지 말도 없이 한나절을 가더니, 어느 농촌마을에 세웠어요. 거기가 어딘 줄, 중국말도, 글도 모르지, 그냥 거기서 애를 낳고 살 수밖에요.”
 
  과거사를 초연하게 털어놓던 김씨는 이 대목부터 조금 파들거리기 시작했다.
 
  “남편이 일하러 간 사이, 다섯 살 애를 유치원에 보내놓고 몰래 나온 거예요. 나는 북한에도 여섯 살 난 자식이 있습니다. 그렇게 농촌으로 가는 줄 알았다면, 그 차를 타지 않았을 텐데. 북한에 자식을 두고 오니까 하루 24시간 중 20시간은 눈물이 나왔어요. 밥숟가락 들 때마다 가슴팍이랑목구멍이 아파서 삼키질 못했어요. 중국 자식은 한국에 가서도, 설사 남편이 자식을 안 준다고 하더라도, 얼굴을 볼 수는 있겠지 하는 희망이 있는데, 북한 자식은 이제 목소리도 못 듣지 않습니까.”
 
 
  200만원에 팔려간 엄마
 
  함흥이 고향인 석모씨도 중국에 생때같은 자식을 두고 왔다. 10여 년 전, 22세의 나이에 엄마 손을 잡고 압록강을 건넌 뒤, 엄마와 각각 다른 집으로 팔려갔다고 한다. 그는 스스로를 ‘팔려갔다’고 말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마치 날씨 얘기를 하듯 덤덤했다. 그게 일상이었던 거다.
 
  “브로커들은 돈을 벌어야 하니까 그냥 팔아버리는 거예요. 한번 팔리면 방법이 없어요. 일단 팔려갔다가 빨리 도망칠 수밖에요. 근데 애가 생기면 그럴 수가 없잖아요. 아이가 클 때까지 기다려야죠. 중국에 도착하자마자 엄마랑 헤어졌는데, 서로의 집이 그리 멀진 않았어요. 엄마는 1만 위안(약 200만원)에 팔려갔는데, 얼마 뒤 엄마가 맞고 산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그 돈을 주고 엄마를 우리 집으로 데려왔어요.”
 
  석씨는 이어 다소 뜻밖의 말도 했다.
 
  “다행히 제가 부잣집에 시집가서 가능했어요. 운 좋게 남편도 좋은 사람이어서 고생을 안 하고 애만 돌보고 살았어요. 여기 와 보니까 다들 힘들게 살았다는데, 혼자 편하게 산 것 같아 미안해요. 중국을 떠난 건, 아이에게 떳떳하고 싶어서예요. 애가 커가면서 눈치가 생겨서 자꾸 ‘왜 내 출생증엔 엄마 이름이 없어요?’라는 질문을 했거든요. 또 제 인생에 애밖에 없는 게 아니잖아요. 저도 내 사업을 하고, 대학도 다녀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중국에 있는 남편과 상의 후 한국으로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한국에 가서 자리 잡은 뒤 가족들을 다 데리고 올 생각이에요.”
 
 
  신분 없는 삶
 
  이들은 중국에서 이름도, 국적도 없이 살아간다. 신분이 없기 때문에 아프면 연고가 있는 개인병원 외엔 못 간다. 암처럼 큰 병에 걸리면 방도가 없다. 한국에 왔지만 그간 병이 악화된 걸 모른 채 갑자기 눈감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그야말로 무연고자(無緣故者)의 쓸쓸한 죽음이다. 순전히 치료 목적으로 국경을 넘기도 한다. 살기 위해 사선을 밟는 아이러니다.
 
  30대 여성인 윤모씨는 북한에서 산 세월과 중국에서 산 세월이 거의 같다. 고등학생이었던2006년 홀로 탈북해 중국에서 18년을 살았다. 중국과 북한, 어느 쪽이 더 고된 삶이었을 지 짐작되지 않았다.
 
  “둘 모두 지옥 같았어요. 북한에서는 먹을 게 없었고, 중국에서는 먹고는 살았는데 신분이 없었으니까요. 중국에선 옷 공장에서 15년을 일했는데, 단속이 뜰까 봐 늘 심장이 콩알만 해져서 살았어요. 매일 누가 잡으러 오는 악몽을 꾸고, 놀라서 깨곤 했죠. 18년 동안 매일 이렇게 잤어요.”
 
 
  강제 북송의 현실
 
  윤씨가 태아처럼 몸을 웅크리며 말했다. 그 긴 시간 동안 단 하루도 편히 자지 못했단 건 과장이 아니었다. 한 차례 북송(北送) 경험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했다.
 
  “중국 가고 2년 만에 공안에게 잡혔어요. 일하던 공장에 불시에 들이닥쳤는데 제가 신분증이 없고, 중국말도 잘 못하니까 바로 끌려간 거죠. 보름쯤 구금돼 있다가 북송돼 신의주 집결소에서 6개월 동안 강제노역을 해야 했습니다. 저 말고도 북송된 사람 30명이 같이 있었어요. 어느 날 그 안에서 허약(영양실조)이 왔고, 간수와 같이 병원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그가 담배를 사러 간 사이에 죽어라 도망쳤습니다. 중국에 있었기에 망정이지, 한국에 가려다가 북송됐으면 저는 지금 여기 없을 겁니다.”
 
  같은 시공간 아래 한쪽에선 이렇듯 잔인한 ‘생존 게임’을 벌여야 한다는 현실이 가혹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지난해 중국 난닝(南宁)에서만 무려 212명이 강제 북송됐다고 한다. 차 안에서 수퍼맨 목사가 한 얘기가 떠올랐다.
 
  “북송 위기에 처한 현장을 보면요, 처참하기 그지없습니다. 잡히자마자 혈관을 물어뜯는 아이에서부터, 북송되느니 먼저 죽겠다며 전력을 다해 벽에다 머리를 박기도 하고요. 어떤 애들은 바짓단에 매달려 살려달라고 막 울부짖습니다. 전(前) 정부 때 특히 이런 일이 잦았어요. 동남아에서 체포된 탈북민 15명을 중국으로 보내버려서, 어렵게 다시 데려왔더니, 또 보내버리기도 했어요. 애들이 가기 싫어서 막 졸도를 하는데도요.
 
  결국 미국 소재 국제인권단체를 통해 정부에 압력을 넣는 방식으로 그들을 다시 빼내올 수 있었어요. 이번 정부 들어서는 같은 상황이 발생했을 때 외교부 장관이 직접 나서 해결을 해줬습니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도 이런 경우 적극적으로 나서 중국과 협의를 했습니다. 중국 정부의 탈북민 강제 북송은 엄연한 국제법 위반입니다. 중국은 난민 지위 협약과 고문 방지 협약에 가입했으면서도 이들을 북송해 왔어요. 이 같은 야만적 행태에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밖으로 나오자 해가 지고 있었다.
 
  갓길에 대기 중이던 차에 올라탔다. 러닝차림으로 쉬고 있던 운전기사가 느린 속도로 웃옷을 걸쳤다. 차는 다시 도심지로 내달렸다. 수퍼맨 목사가 말했다.
 
  “아까 석씨가 한 말 기억하시죠. 남편이 좋은 사람이라고 한 거. 그거 체면 때문에 한 소립니다. 남편이 좋으면 왜 도망을 치겠어요. 목사를 처음 만나면 울면서 본인이 당했던 걸 다 털어놓는데, 외부인들 앞에서는 말을 바꾸는 거예요. 참 서글프죠. 김정은 체제, 중국공산당이 아니었다면 배낭여행으로 와야 할 나라에 목숨을 걸고 넘어와서, 애써 괜찮은 척하는 모습이…. ‘제 남편은 좋은 사람이었어요.’ 상당히 많은 탈북 여성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뜻밖의 말이라는 생각은 했었다. 문득 두 아이가 굴뚝청소를 했는데, 한 아이는 얼굴이 하얗고, 다른 아이는 얼굴이 까맸다는 얘기가 떠올랐다. 다 같이 팔려갔다 도망쳐 왔는데, 한 아이만 잘 살았다는 건 애당초 불가능한 거였다.
 
 
  탈북민 구출 조직이 와해되는 이유
 
  10년 전만 해도 한 해 1200~1300명의 탈북민이 이 나라 땅을 밟았다. 지금은 150~200명 정도로 대폭 줄었다. 북한에서 넘어오는 이는 물론이고, 중국발(發) 탈북민도 급감했다. 중국의 감시망이 날로 옥죄어오면서다. 수퍼맨 목사의 말이다.
 
  “중국이 탈북민의 한국행을 기를 쓰고 막는 이유가 있어요. 중국 농촌지역에 팔려가 애를 낳아 기르던 탈북여성들이 빠져나가면 가정이 해체되기 때문입니다. 그 규모가 사회적 문제가 될 정도로 커요. 또 이들이 한국에서 중국의 만행을 알리면 국제사회의 압박이 들어오니까 그게 싫은 거예요. 고위층이나 해커 등 정보력이 있는 탈북민의 경우엔 외교적 문제가 부담인 거고요.”
 
  중국은 2022년 1월 1일 시행한 국경법에 따라 국경을 맞댄 14개국 사이에 4m에 달하는 철조망을 쌓았다. 일부 산간 지역을 제외하고 중국 내 95%의 탈북민을 등기하는 작업도 마쳤다. 이를 통해 탈북민의 동공, 걸음걸이, 음성, 필체 등 모든 정보를 입력해 관리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탈출을 시도조차 못 하는 탈북민이 많다고 한다.
 
  탈북 루트를 지속적으로 개척해야 하는 것도 이래서다. 조여 오는 감시를 피하려면 우회하고, 또 우회해야하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브로커 비용도 폭등했다. 코로나19 전에 비해 대략 10배나 비싸졌다고 한다. 지금은 탈북민 한 명 구출에 1300만~1800만원이 든다.
 
  “중국에서 탈북민을 돕다가 잡히면 과거엔 최대 7년형이었는데, 지금은 10년형도 내립니다. 반(反)간첩법 개정 이후 단속도 더 철저해졌어요. 이 일을 하려는 사람이 줄어드니 비용이 오를 수밖에요.”
 
  탈북민 구출 작업에 참여한 인원 중 40명이 철창신세 중이라고 한다. 이지성 작가는 “중국 입장에서 브로커들은 ‘애 낳고 잘 사는 여자를 밀입국시키는 죄질이 아주 나쁜 사람’”이라면서 “반간첩법 개정 이후에는 브로커들을 (보석 등으로) 빼내기도 더 어려워졌다. 누군가를 구해내는 것으로 누군가가 감옥에 가야 된다면 이게과연 옳은 일인가 하는 딜레마도 있다”고 했다.
 

  수퍼맨 목사의 말이다.
 
  “최근 시진핑 정권 반체제 인사들의 망명이 늘어난 것도 한몫했습니다. 부유한 인사들은 ‘중국 국경을 넘는비용’으로만 브로커에게 3만 달러(약4300만원)씩 지불합니다. 탈북민들은 과거 이 비용으로 500~600달러(약 70만~80만원)를 내다, 지금 대폭 올라 5000~6000달러가 됐지만 여전히 반체제 인사와는 5~6배 차이가 나요. 기왕이면 큰돈으로 몰리겠죠. 자연히 탈북민 구출 조직이 와해(瓦解)돼 버린 겁니다. 그래도 아직은 제 몸이 받쳐주지만, 앞으로가 문제입니다. 이 일을 할 다음 세대가 없어요.”
 
  현재 탈북 루트는 수퍼맨 목사가 대부분 개척한 것이라 봐도 과언이 아니다. 루트가 폐쇄되면 호랑이가 나오는 산길, 독사가 우글거리는 밀림을 다니면서 또 다른 경로를 구축한다. 과거 러시아·몽골 쪽 길도 개척했지만, 몽골에서 체포되는 바람에 동남아 쪽으로 넘어올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소수지만 여전히 러시아 쪽으로 넘어오는 탈북민도 있다.
 
  “시베리아 지역을 지나는데 표범과 호랑이 발자국이 있더라고요. 겨울에 영하 30도까지 내려가는데다, 폭죽도 가지고 다녀야 해서 녹록지 않았어요. 부산에서 스타렉스를 선적해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탈북민을 태워 보기도 했는데, 그건 너무 멀었죠. 이밖에도 비행기로, 배로 데려오기도 했었는데, 이것도 나름의 한계가 있었어요. 여러 시행착오 끝에 이 나라를 통한 경로를 구축한 겁니다. 이 라인마저 막히면 안 되는데 걱정입니다.”
 
 
  탈북민 사이 끼어든 간첩
 
  탈북 루트는 언제든 폐쇄될 수 있다. 외부에 노출됐을 경우 더욱 그렇다. 현재까지 폐쇄된 루트는 20개 정도 된다고 한다.
 
  “탈북민들은 4~5명씩 함께 움직이는데, 그사이 간첩이 끼어 오기도 합니다. 재작년에 있었던 일이에요. 중국에서 넘어올 땐 추적을 피해야 하기 때문에 휴대폰은 무조건 브로커에게 건네야 합니다. 그중 한 아이에게 또 다른 휴대폰이 있었고, 그걸로 우리 루트를 실시간으로 공안에 보고한 거예요. 완전히 노출돼 버린 거죠. 어느 지점에 갔더니 공안 8명이 대기하고 있었고, 우리 멤버는 꼼짝없이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공안에서 포섭한 거였어요. 월 5000위안(약 80만원)을 받는다더군요.”
 
  이럼에도, 오늘도 사지(死地)를 뚫고나오는 전사(戰士)들이 있다.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다음 지역으로 출발했다. 어제 막 도착한 탈북민 4명이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이번엔 차를 타고 한나절을 가야 했다. 자다 깨다하며 꽤 오랜 시간 앉아 있었다. 창밖을 보니 검문소로 보이는 곳을 지나고 있었다.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간혹 탈북민이 붙잡히면요, 이러는 경우도 있어요. 없는 얘기까지 지어서하는 거예요. 나는 올 마음이 없었는데 목사에게 협박을 당한 거다, 그래서 수만 달러를 뜯겼다, 이런 식으로요. 허허. 그 행동이 이해가 가면서도 그럴 때면 참, 뭐랄까, 씁쓸해요. 고맙다는 말 들으려 이 일을 하는 건 아니지만, 코로나 이후 구출한 약 220명의 아이들 중 한국에 가고 나서 인사해 온 탈북민이 딱 한 명 있었어요. 대다수 탈북민은 ‘우리가 있으니까 목사와 선교사들도 먹고산다’고 생각해요. 가치관이 완전히 다른 거죠.”
 
 
  이 일을 하는 이유
 
  그는 한참 생각에 빠졌다 다시 입을 뗐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런 생각이 들어요. 제가 올해 63세입니다. 은퇴할 나이에 1년에도 몇 번씩 전쟁터 같은 현장에 와서 잠도 잘 못 자고 체포의 위협을 무릅써 가며 왜 이 일을 하고 있는 거지? 지금이라도 북한 체제가 무너져서 이 일을 안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매일같이 해요. 그런데 생명을 구한다는 건요, 그건 전혀 다른 가치더라고요. 이런 손해를 모두 상쇄하고도 남는 거더라고요. 목사로서 더 큰 의미는 뭔 줄 아세요. 복음을 알게 됐다는 거예요.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은 배신당할 것을 아셨지만 사랑을 멈추지 않으셨어요.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말이에요. 성과나 열매 없이, 부어도, 부어도 끝이 없는 이 길을, 내가 원치 않음에도 계속 가게 되는 게 복음을 깨닫기 위한 것이라면 참으로 특별한 은혜 아닌가 싶어요.”
 
  수퍼맨 목사는 원래 사업가였다. 중국에 진출해 원단 수입업을 했는데, 1997년 국내 본사가 부도나며 사업 기반이 무너졌다. 죽으려던 순간에 ‘내 형편이 저 애들보다는 낫지’ 싶었다. 고난의 행군 시기 중국으로 넘어온 꽃제비들을 보면서다. 죽을 각오로 저들을 위해 살아보자 결심했다. 대출을 받아 옌지(延吉), 선양, 다롄(大連) 등에 쪽방을 얻고 탈북민들의 은신처를 만들었다. 1999년 가을, 옌지의 은신처로 풍계리 핵 실험장 터널 공사에 관여한 기술자가 찾아왔다. 자신을 중국 밖으로 탈출시켜 줄 수 있냐고 물었다. 이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구출 작업에 뛰어들었다.
 
  돈만 생기면 구출 작업에 썼다. 빚이 커졌고, 지금도 다 못 갚았다. 2년 반 전까지 월세 30만 원짜리 지하방에서 살았다. 1만 원짜리 의료보험을 70개월 동안 못낸 적도 있었다. 그러다 2017년 이지성 작가를 만나며 사정이 폈다. 이 작가는 동남아 현장에서 구출 활동을 돕는 것은 물론, 얼굴과 이름 없는 수퍼맨 목사를 대신해 탈북민의 현실을 알리고 후원 조직을 꾸리는 역할을 했다. 자신도 부동산까지 팔아가며 사비(私備)를 썼다. 둘은 매년 후원 멤버들과 함께 동남아 지역을 찾기도 한다. 그들도 직접 인권 현장을 봐야 한다는 차원에서다.
 
가수가 노래 불러주고, 한의사는 약침 놔주고…
 
  비단 이지성 작가와 수퍼맨 목사뿐만이 아니다. 이번 동남아 방문에는 탈북민 구출 활동을 후원하는 여러 인사도 함께했다. 밴드 몽니의 보컬 김신의, 박지훈 법무법인(유) 충정 파트너 변호사, 최병호 국제혁신영재사관학교 교감, 최영문 대추밭한의원 원장, 사업가 이권수씨(여행업 등이다. 모두 이지성 작가의 《1만 킬로미터》를 읽고 북한 인권의 실상을 접했고, 자발적으로 후원에 동참하게 된 이들이다.
 
  후원 멤버들이 직접 인권 현장을 방문하자, 구출 활동에 대한 공감대가 더 깊어졌고, 이를 통해 더 많은 후원을 끌어낼 수 있었다. 자연스레 선순환 구조가 형성된 셈이다. 일부는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방문하기도 했다.
 
  이지성 작가는 “기부금 같은 물질적 후원뿐만 아니라 법률 상담 등 후원의 종류는 다양하다”면서 “탈북민이 한국에 오면 사비를 들여 관광을 시켜주는 분들도 있다”고 했다. 이렇게 후원 활동에 참여하는 인원은 약 20명에 달한다.
 
  이번 방문에서 가수 김신의는 탈북민에게 직접 찬송가와 가요를 불러줬다.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은 탈북민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최영문 원장은 긴 여정에 지친 탈북민들에게 손수 약침을 놔줬다. 탈북민들은 “금세 몸이 생생해졌다”며 웃었다. 최병호 교감은 “선교사분들과도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였다”면서 “현지에서 힘들게 사역하시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응원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탈북민의 의미
 
수퍼맨 목사가 구한 162명의 탈북 아이들. 이 중에는 장기 적출용으로 매매될 위기에 처했던 아이들도 있다. 사진=여리고미션
  일각에서는 탈북민을 데려와서 뭘 하냐고 한다. 그들이 독재 정권의 실상을 폭로할 수 있는 유일한 증인이라서다. 국제사회는 그들을 통해 중국과 북한을 압박할 수 있다. 이것 말고도 또 있다. 수퍼맨 목사의 말이다.
 
  “지금 북한에서 유통되는 돈의 85%가 중국 화폐입니다. 중국어도 꽤 많이 쓰여요. 자연스럽게 중국화가 되는 중입니다. 이런 북한 내부에도 한국을 동경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국에 가족이 있는 이들이에요. 이런 끄나풀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우리가 북진(北進)했을 때 태극기를 흔들어줄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에요. 탈북 여성들이 인신매매를 당할 때 5세 미만의 북한 아이들은 장기 적출용으로 팔려갑니다. 그동안 그런 아이 162명을 구출해 한국으로 데리고 왔어요. 그중에는 배꼽도 안 떨어진 아기도 있습니다. 그런 아이들이 적어도 인구절벽 시대에 어떤 보탬이라도 되지 않겠어요?”
 
  이지성 작가는 “우리가 북한 인권의 증인인 탈북민에게 어떤 세계사적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대한민국의 미래가 걸려 있다”고 했다.
 
  “ICBM·SLBM 등 북핵 능력이 고도화되면서 미국 본토가 핵위협에 노출되는 상황이 오면 미국은 당연히 북한과 핵협상을 할 겁니다. 이를 막을 수 있는 건 북한 인권밖에 없어요. 인권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북한과 핵협상을 하는 것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과 협상했던 것과 똑같다는 걸 미국 사회에 알려야 합니다. 미 의회의 한반도평화법안을 막는 유일한 법안 또한 북한인권법이고요. 그러기위해서는 탈북민들을 자유와 인권의 증인으로서 국제사회에 서는 인재로 길러야 하는데, 쉽지는 않아요. 대부분은 한국에 오면 숨어 살기 바쁘고, 북한 인권 단체들은 ‘몇 명을 데려왔고, 누가 더 불쌍한지’에만 초점을 맞추고, 돈만 걷어가니까 이 분야가 자꾸 위축되고 왜 탈북민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기 어려워진 겁니다.”
 
 
  ‘코리안 드림’
 
밤중에 아이를 업고 라오스산을 넘는 탈북민과 브로커. 라오스산은 험준하기로 유명하다. 사진=여리고미션
  장장 6시간을 달려 어느 시골마을에 도착했다. 사위(四圍)가 워낙 적막해 잠자리 날갯짓 소리마저 들렸다. 어제 막 도착한 탈북민들이 있는 곳이었다. 한 탈북 여성의 반쪽밖에 남지 않은 발톱이 눈에 띄었다. 이곳에 오려면 반드시 넘어야 하는 라오스산은 험준하기로 유명하다. 비올 때는 미끄러져서, 돌이 굴러와 맞아 머리가 깨져서, 지팡이인 줄 알고 뱀을 잡았다가 죽기도 하고 그런단다. 얼마 전엔 다섯 살 아이가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발톱이 빠지는 건 일도 아니라고 했다.
 
  이들 네 명은 각각 양강도 김정숙군, 함경북도 경성군와 함흥, 황해북도 사리원이 고향이라고 했다. 모두 중국 거주 기간은 10년이 넘는다. 이 지역 국경을 밟는 순간 일제히 눈물을 터뜨렸다고 했다. 이곳에 도착해 며칠 만에 밥다운 밥을 먹었다. 메뉴는 미역국이었다.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모두들 한국에 갈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이유는 거창하지 않다. 30대 박모씨는 “대학에서 영어를 배워보고 싶다”고 했다. 유모씨는 “작은 중국식당을 차릴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고 했다. 이모씨는 “한국은 노력한 만큼 잘살 수 있는 곳이라 들었다”고 했다. 우리에겐 그저 무덤덤한 일상의 나라가 누군가에겐 목숨을 걸어야 갈 수 있는 꿈의 나라라는 사실에 새삼 먹먹했다.
 
  이 중 여성 세 명은 어김없이 팔려갔었고, 피붙이들을 떼어놓고 왔다. 김모씨는 “팔려온 몸이기 때문에 조금만 말을 안 들어도 맞는 경우가 많았다”고 했다. 역시 날씨 얘기를 하듯 무심한 어조였다. “죽어도 한 번 죽지않습니까?”라던 그의 말은 이후에도 한동안 길을 걷다가, 숟가락을 들던 중에, 타자를 치다 말고, 맥락도 없이 끼어들곤 했다.
 
 
  눈물로 이루어진 강
 
지금은 중단됐지만 대부분의 탈북민은 한때 골든트라이앵글 지역의 메콩강을 통해 이 나라로 들어왔다. 탈북민들이 이 나라 땅을 밟기 직전 건넜던 철다리다. 사진=월간조선
  짧은 만남을 끝내고 계속해서 북쪽으로 올라갔다. 노을이 질 때쯤 다다른 곳은 골든트라이앵글. 이번 일정의 종착지다. 여기서는 세 나라가 한눈에 들어온다. 태국, 미얀마, 라오스. 남루악강과 메콩강은 이 나라들 사이에서 만나 작은 삼각주를 만들고 다시 흘러간다. 지금은 중단됐지만, 한때 이곳으로 탈북민들이 많이 들어왔다. 수퍼맨 목사는 “아직도 메콩강만 보면 심장이 쿵쾅거린다”고 했다.
 
  “지금 건기라서 그런지 물이 굉장히 많이 말랐네요. 저기 오른쪽 밑에 철다리 보이시죠. 탈북민이 이 나라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밟는 게 저 다리였어요. 예전엔 이쪽 도롯가에 조그마한 여관이 하나 있었어요. 저희가 여관 주인을 포섭해서 탈북민 임시 거처로 쓰기도 했죠. 어쩌다 산사태가 나서 애들이 못 넘어오면 일주일 동안 언제 오려나, 눈이 빠져라 기다렸던 장소도 여깁니다.”
 
골든트라이앵글에서 바라본 라오스 땅. 중국 자본이 투자한 건물들이 보인다. 사진=월간조선
  20년 전쯤엔 중국 베이징에서 골든트라이앵글까지 6개월 동안 걸어온 여자아이도 있었다고 한다.
 
  “걷다가, 팔려갔다가, 도망 나와서 남의 집 일해 주다, 또 나와서 걷고. 뙤약볕에 피부가 다 그을리고 고생을 얼마나 했는지 스무 살 아이가 곱절은 더 돼 보였어요. 메콩강에 빠져 죽은 목사와 탈북민도 꽤 돼요. 그중엔 암 치료를 위해 한국행에 나선 탈북 여성도 있었죠. 2000년 초반 여기 처음 왔을 땐 집이 몇 채 없었어요. 세계에서 공기가 제일 맑은 곳 중 하나였는데, 중국 자본이 들어온 이후부터 뿌예졌어요.”
 
  목사의 손가락이 건너편 국가의 땅을 가리켰다. 대형왕관을 뒤집어쓴 듯한 외형의 카지노호텔이 보였다. 이 나라는 2007년부터 중국 자본을 투입해 골든트라이앵글 경제특구를 조성했다. 300만원어치 칩을 교환해야만 입장할 수 있는 이 호텔은, 이 지역 카지노 열풍의 시초쯤 된다. 사람답게 살아보겠다고 중국을 등지고 몇 날 며칠을 도망쳐 온 곳에서 가장 먼저 맞닥뜨려야 하는 게 화염처럼 넘실대는 중국 자본이라니, 불편한 마음이 서걱거렸다. 말없이 아래를 내려다봤다. 탈북민의 눈물과 땀을 삼킨 사연 많은 강은 묵묵히 제 갈 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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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달기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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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2025-04-08) 찬성 : 0   반대 : 0
한참을 책상위에 기사를
띄워놓은채 앉아있습니다 이제는...... 더이상......
미룰수없고 모른척할수 없을 듯합니다
  감사    (2025-04-08) 찬성 : 0   반대 : 0
대한민국이 무엇을 해야하는지 깨닫게 해주는 귀한 기사입니다.

글을 읽으며 드는 감정은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댓글을 남기는 행위조차 감히라는 생각이 듭니다만 아무댓글이 없는 자리에 한 줄의 글이 혹여 작은 응원이 될까하여 남겨봅니다.

저의 미숙한 생각으로는, 처음으로 힘이 있는 건장한 남자 청년이고 싶고, 억만장자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것만으로 걸어갈 수 있는 길이 아니지만, 목사님께서는 청년도 아니시고 억만장자도 아니신데 걸어가고 계시지만, 어리석은 수준으로는 이런 생각밖에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쪼록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기사를 접할 수 있기를 바라고 바라며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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