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人生

‘도예의 산업화’ 나선 도예가 金九漢씨의 꿈

“‘인생 진행비’ 필요해 궁리하다 보니 新소재 발견”

  • 글 : 김성동 월간조선 기자  ksdhan@chosun.com
  • 사진 : 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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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고등학교서 국악 배웠으나 音大 때려치고 다시 美大 입학
⊙ 70년대 서울대 재학 시절 김지하, 김민기 등과 문화운동
⊙ 東京대 대학원 미학과 유학 중 흙에 관심
⊙ 세계 최초, 세계 최대 도자기로 만든 ‘즈업집’ 완성
⊙ 도자기 생산 공정에서 ‘新소재’ 발견해 국내 및 국제 특허 획득. 일본 자본 등 군침
⊙ NASA가 496억 달러 들여 개발한 신소재와 동일한 生育光線 발생

金九漢
⊙ 66세. 서울대 음대 중퇴, 서울대 미대 졸업. 도쿄대 대학원 미학과 졸업.
⊙ 작품 <망향> 독일 중앙박물관 영구보존, 전시 중. 세계 최초 도자집 ‘즈엄집’(3.8평X높이 4.7m)
    제작(일본 니가타현 공원).
사람들은 미쳤다고 그랬다.
 
  “서울대 나오고 도쿄대도 나왔다는 작자가 되지도 않을 짓을 하니 미쳤다는 말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1997년에 경기도 이천시 신둔면 인후 1리 12번지 주변에서 벌어진 수군거림이다. 도자기로 유명한 그곳 이천에서 도자기를 만든다는 사람들이나 그와 관계된 사람들은 물론이고 전국의 수많은 도예가가 모두 그런 말을 했다.
 
  그런 반응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2.5평 크기 넓이에 높이가 3m를 넘고 두께는 70cm에 달하는 도자기 집을 통째로 구워서 만들겠다니 기존 도예가들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그 ‘미친 짓’을 하려는 작자가 그 한 해 전인 1996년에 길이 10m, 높이 2m 크기의 <백두대간>이라는 당시 국내 최대의 도자기 설치작품을 만든 도예가일지라도 그가 하려는 짓은 ‘미친 짓’이 분명해 보였다.
 
  두 작품의 두께의 차이도 차이려니와 <백두대간>은 작품 내부에 빈 공간이 없는 반면 이 작품은 내부에 사람 여럿이 들어갈 수 있는 2평 크기의 공간을 설치하겠다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도자기 집에 들어가야 할 흙의 양만 해도 47t에 달했다. 도자기 흙 47t이란 웬만한 도예가들이 평생 작품 활동을 하면서 쓰는 양이라고 한다.
 
  수군거림의 대상이 된 당시 만 50세의 조각가(彫刻家)이자 도예가(陶藝家)인 김구한(金九漢)은 주변의 그런 반응에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지금까지의 내 인생이 반은 미친 인생이었어” 하며 피식 웃어넘길 뿐이었다.
 
  스스로 반쯤 미친 인생을 살아왔다고 말하는 김구한씨. 그가 말하는 미친 인생이란 열정의 다른 표현이다. 그의 삶의 어떤 부분이 그를 미치도록 열정적인 삶을 살게 만들었을까. 그것은 어린 시절부터 그가 겪은 지독한 가난과 청년이 돼 눈을 뜨게 된 불의에 대한 저항 의식이었다.
 
 
  8촌인 金斗漢
 
  김구한은 1947년에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대전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부친이 살아계실 때는 서울구경을 갈 때 아버지 소유의 자동차를 타고 갈 정도로 집안에 여유가 있었던 것으로 그는 기억한다. 지금도 어느 해 겨울, 아버지의 승용차를 타고 제1한강교를 건널 때 한강이 꽁꽁 얼어붙어 그 위로 미군 지프가 다니던 광경을 신기하게 차창 밖으로 바라보던 기억이 생생하다.
 
  ‘대한민국 대표 주먹’으로 잘 알려진 김두한(金斗漢)이 그의 8촌형님뻘이다. 대전에 살 때 국회의원이었던 김두한이 집으로 찾아왔던 적이 있다. 덩치가 컸다는 것 외에 김구한이 김두한에 대해 갖고 있는 기억은 없다.
 
  김구한의 행복에 대한 기억은 아주 짧다. 그가 물질적으로 행복했던 기억은 아버지의 승용차로 제1한강교를 지나던 그것 하나로 끝난다. 그가 열 살에 마주한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이어진 형의 죽음과 여동생의 죽음. 초등학생 김구한은 2년 사이에 세 가족의 죽음을 차례로 지켜보게 된다. 그 죽음들을 바라본 끝에는 지독한 가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남은 식솔들을 이끌고 대전을 떠날 결심을 한다. 김구한이 초등학교 6학년 때다. 주변에서는 아버지의 사촌들이 군수를 하는 등(세상에 대해 삐딱한 시선을 갖고 있는 것으로 짐작되는 김구한은 이런 이야기를 할 때 ‘군수도 해 처먹은’이라고 표현했다) 지역사회에서 친척들이 유지로 있는 고향 부여로 돌아갈 것을 권했다. 어린 자식들을 먹여 살려야 할 어머니가 그나마 기댈 언덕이라도 있는 곳이 그곳뿐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어머니는 주변 권유를 물리치고 다른 선택을 한다. 당시 서울의 대표적 빈민촌으로 산의 모양이 낙타의 등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산 이름인 낙산(駱山) 밑 창신동으로 이사를 한다. 1959년이었다. 창신동이 전혀 연고가 없었던 곳은 아니었다. 다만 기댈 곳이 없는 곳이었다.
 
  창신동에는 김구한의 외삼촌이 살고 있었지만 그 외삼촌은 노름으로 재산을 다 까먹고 마부(馬夫)로 일하며 움막집에 살고 있었다. 당시에는 택시나 승용차가 별로 없어서 말이 끄는 수레로 짐을 나르던 시절이었다. 김구한의 가족도 창신동에 거적으로 문을 만들고 기름종이로 벽을 바른 집 한 칸을 얻어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곳에서 맡기 시작한 가난의 냄새는 그가 대학을 가고 군대를 다녀와 한 여자와 살림을 차리고 그 사이에서 아이를 낳은 그 후까지도 아주 오랫동안 그의 주변을 떠나지 않고 늘 코끝에 와 있었다. 성년이 되어서도 그 움막집을 떠나지 못했으므로 그 냄새는 언제나 같았다.
 
 
  그림 재주 믿고 만화가를 꿈꿨지만
 
  빈민촌 움막집에 사는 소년에게도 중학교에 입학해야 할 시기는 어김없이 찾아왔다. 가난했지만 중학교는 꼭 가고 싶었던 소년은 돈을 들이지 않고 갈 수 있는 학교를 찾아봤다. 1970년대가 막 열렸을 때 소년 김구한에게 중학생 교복을 입혀준 곳은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 양성소였다. 현재의 국립국악중고등학교가 그곳이다. ‘국립’이라는 말이 붙은 데서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듯이 학비는 전액 무료였다. 국악을 가르치는 곳이었지만 국어, 영어, 수학 등 학교에서 배우는 모든 과목을 배울 수 있었다. 중고등학교 6년 과정이었으므로 별다른 일이 없는 한 최소 고졸 학력은 확보한 것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대금을 배웠다. 대한민국이 해외에 별로 자랑할 것이 없었던 그 시대 덕분에 그는 일반인이 해외에 나가기 어려웠던 그 시절이었지만 유럽 등으로 해외여행도 하게 된다. 인삼 외에는 이렇다 하게 국제사회에 내세울 것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나라를 알리는 한 수단으로 정부가 해외에서 국악 연주회를 자주 열어준 덕분이었다. 김구한은 대금 연주자로서 국악 연주 여행에 참여할 수 있었다.
 
  남들이 가기 힘든 해외여행도 해봤지만 그것이 빈 주머니를 채워줄 수는 없었다. 미술에 소질이 있었던 김구한은 그 재주를 돈벌이에 활용하기도 한다.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 양성소에서 당시 사용한 영어교과서는 《유니온 잉글리시》 등이었다. 그 영어교과서 뒤편에는 크리스마스 카드에 적합한 그림들이 많았다. 김구한은 그 그림들을 그대로 그려서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들었다.
 
  국악사 양성소 부근에는 당시 휘문고, 중앙고, 창덕여고 등 학교들이 많았다. 김구한은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주변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자신이 직접 그린 크리스마스 카드를 팔았다. 특히 여학생들의 호응이 뜨거웠다.
 
  스스로 그림 그리기에 소질이 있다고 생각한 김구한은 고등학교 2학년 과정에 들어갔을 때 학교를 그만둘 생각까지 하게 된다. 그 무렵 만화에 빠져 돈만 생기면 만홧가게를 들락거리던 그는 박기정 화백이 1962년에 그린 만화 《들장미》를 보고 읽으며 만화가가 될 결심을 한다.
 
  보통 만화책 맨 뒷부분에는 제자모집을 알리는 공고가 있었다. 김구한은 헌 만화책을 어렵게 구해 그대로 그려서 제자모집에 응모했다.
 
  연락이 왔다. 오라고. 지체없이 달려갔다. 학교 출석은 그날로 끝이었다. 한 만화가의 제자가 되었지만 그에게 허락된 일은 검은 부분에 먹칠만 하는 것이었다. 인물이나 배경을 그리는 일은 좀체 주어지지 않았다. 단순 노무자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그렇게 서너 달이 지나갔다. 국악사 양성소 담임선생님이 찾아왔다.
 
  국악사 양성소는 일주일만 결석해도 제적 처리를 하던 곳이었다. 제적 처리에 끝나지 않고 그동안의 무료로 배우며 들어간 비용을 다시 반납해야 했다. 담임선생님은 웬일인지 김구한을 제적 처리하지 않았다. 대신 “너무 아깝다”며 졸업만은 하라고 권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담임선생님에 대한 고마움에 그는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담임선생님의 말씀대로 졸업은 하고 봐야겠다는 결심을 했지만 만화가의 꿈을 접지는 못했다. 국악사 양성소 교육과정에는 미술이 없었다.
 
  직접 스토리를 만들어 만화를 그렸다. 자신이 그린 만화를 들고 출판사를 찾아갔다. 반응은 싸늘했다. 그림을 그릴 때 쓰는 연필이 4B 연필이라는 것조차 몰랐던 그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림 형태는 그럴 듯했지만 기초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탓이었다.
 
 
  사회현실에 눈을 뜨게 해준 김민기
 
  만화가를 꿈꿨던 김구한은 그 꿈을 접고 그 학교를 나온 선배들의 대부분이 그랬듯이 서울대 음대(音大) 국악과에 진학하지만 얼마 안 있어 자퇴를 선택한다. 자퇴하게 된 배경에 대한 그의 술회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금을 불어가지고는 못 먹고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당시는 대금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서양 악기인 플루트를 불면 폼나게 봐주었던 시절이었죠. 대금 가지고 ‘닐리리’ 해서는 도저히 ‘인생 진행비’를 만들 수 없겠더라고요. 그래서 때려치웠어요. 그런데 지금에 와서 보면 거꾸로 된 것 같아요. 끝까지 국악하던 놈들은 대부분 교수가 돼 있더라고(웃음). 그렇다고 부럽다는 것은 아니고. 저는 민기하고 서로 ‘선생질은 하지 말자’고 약속했어요. 그 시절에 애들에게 우리가 뭘 가르칠 수 있었겠어요?”
 
  여기서 김구한씨가 말한 ‘민기’란 노래 ‘아침이슬’을 만든 작곡가이자 가수이면서 지금은 뮤지컬 제작 및 연출가로 활동 중인 김민기씨를 가리킨다. 두 사람은 서울대 미대(美大) 69학번 동기다. 미대 학번은 같지만 김구한씨가 네 살 위다. 김구한씨는 조소과, 김민기씨는 회화과를 다녔다.
 
  뮤지컬이나 연극 등 김민기씨의 작품에는 국악이 중요 요소로 등장한다. 그는 자신에게 “국악에 눈을 뜨게 해준 사람은 김구한”이라고 주저 없이 말한다고 한다. 그는 김구한씨로부터 단소를 배웠다.
 
  김구한씨의 표현을 차용하면 두 환쟁이(김구한)와 풍각쟁이(김민기)의 만남은 미술학원에서 이루어진다. 미대 진학을 꿈꾸는 국악과 자퇴생과 경기고 재학생으로서 만났던 것이다. 그 미술학원은 서울 종로 파고다공원 부근에 있는 향림미술학원이었다.
 
  학원비는 당시 5급 공무원의 한 달 월급과 맞먹는 액수였다. 김구한은 통행금지 후 학원청소를 해주는 조건으로 미술학원을 다닐 수 있었다. 미술에 대한 기초를 제대로 배우게 된 것이다. 그곳에서 만난 김민기는 자퇴생 김구한이 보기에 ‘의식이 깨어 있는 고삐리’였다.
 
  “민기는 그때도 기타를 아주 잘 쳤어요. 그림 실력은 말할 것도 없었고. 저한테 ‘형! 딴다라 했어? 우리 같이 미대 가면 이거 하자’고 하는 거예요. 민기가 말하는 ‘이거’라는 게 노래로 부조리한 사회현실을 고발하는 문화운동이었어요. 당시 나는 우리 사회가 국민교육헌장이나 외워서 그렇게 사는 데인 줄 알았었거든요. 때리면 맞고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하면 하고 하는 곳 말이죠. 그런데 민기는 그런 게 아니라는 거였어요.”
 
  그렇게 두 사람은 서울대 미대에 나란히 합격했다. 김민기씨는 입학 직후 김구한씨에게 문화운동을 같이하자고 했다. 선뜻 응할 수 없었다.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당장 먹고살아야 할 일을 걱정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그렇게 만들었다. 고민 끝에 그가 선택한 것은 군(軍) 입대였다.
 
  “제가 보기에 민기는 저녁이면 대문이 큰 집으로 들어가는데 저는 거적때기를 들추고 들어가는 집으로 가야 했죠. 애주(이애주 전 서울대 교수를 지칭)도 마찬가지였고.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위화감이라고 할까? 뭐 그런 감정들이 저를 주눅 들게 하더군요. 일단 군대로 가고 말았어요. 지원이었죠. 그때 든 주눅이 지금까지도 가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돈을 많이 벌면 꼭 해보고 싶은 일 중 하나가 소년소녀 가장을 돕는 일이에요.”
 
 
  그의 아내는 日本人
 
김구한씨의 작품 <망향>. 일본군 종군위안부로 끌려갔던 배봉기 할머니의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독일 중앙박물관에 영구보존, 전시되고 있다.
  1972년에 군에서 제대한 김구한씨는 대학에 복학했다. 김민기씨는 이미 노래를 통해 활발하게 문화운동을 하고 있었다. “세상을 함께 바꿔보자”는 김민기씨의 설득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김민기씨와 함께 음악작업을 했다. 함께 노래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김민기씨를 통해서 1970년대에 반(反)독재 투쟁에 앞장섰던 장일순 교수, 김지하씨 등을 만났다.
 
  그때부터 제적과 복학을 반복하는 파란만장한 김구한씨의 본격적인 대학생활이 시작됐다. 1974년에는 김민기씨 등과 함께 남의 이름으로 국립극장을 빌려서 당시 기생관광을 비판하는 소리굿 〈아구〉를 무대에 올렸다. 당연히 수배령이 떨어졌다.
 
  “지하 형하고 만날 도망 다니는 게 일이었어요. 절친한 후배인 영동이(국악 작곡가인 김영동씨를 지칭)도 끌어들여 고생 좀 시켰죠. 도망 다니는 일이 꼭 나쁘지는 않았어요. 문경 탄광촌으로 도망쳤다가 도자기도 알게 되고 흙에 대한 관심도 갖게 되었으니까요.”
 
  지금도 손등에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고문도 당해 보고 감옥에 끌려가 고생도 해봤던 그의 대학생활은 ‘서울의 봄’으로 불렸던 시절인 1980년을 마지막으로 끝난다. 입학 12년 만의 졸업이었다.
 
  1972년은 김구한씨 개인에게는 단순히 군에서 제대한 해 이상의 의미를 갖는 해이다. 아내와 살림을 차린 해이기 때문이다.
 
  김구한씨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일본 여학생과 펜팔을 했다. 국악 연주 여행 중 일본에 들렀을 때 딱 한 번 만난 여학생이었다. 그녀가 보낸 편지의 양은 상자 몇 개에 담을 만큼 많았다. 물론 김구한씨도 꼬박꼬박 답장을 해줬다.
 
  군에서 제대하는 날 그 여인이 한국으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바로 살림을 차렸다. 일본인 아내를 맞은 것이다. 거적 같은 문이 달린 창신동 판잣집에서 함께 살다 보니 아이도 생겼다. 지금은 《아사히(朝日)신문》 기자로 있는 큰아들 인동씨는 그렇게 태어났다. 미국 《워싱턴 포스트》에 칼럼도 쓰고 있다고 한다. 인동씨의 아내도 《아사히 신문》 의료담당 기자다.
 
  “아내는 고생 많이 했어요. 큰아이가 한 살 반 때 내가 감옥에 갔는데 아내가 고무신 신고 그놈을 등에 업은 채로 면회를 왔어요. 아내는 많이 울었고 그 길로 아이를 데리고 일본으로 떠났죠.”
 
  세 가족이 다시 만나게 된 때는 김구한씨가 1982년에 일본 도쿄대(東京大) 대학원 미학과로 유학을 가면서다. 8년 반 만의 재회였다. 큰아들은 훌쩍 커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아들 인동씨는 처음 본 것이나 다름없는 아버지 김구한씨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도 이제 아버지가 오셨으니 목말을 탈 수 있겠군요.”
 
  아들의 그 이야기를 들으며 김구한씨는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역대 일본 수상 6명이 김구한이 제작한 陶印 사용
 
통째로 가마에 구워 만든 도자기 집 모형. 규모가 크기 때문에 기존의 도자기를 굽는 방식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김구한씨는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며 도자기 집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경기도 이천과 일본 니가타현 공원에 설치돼 있다.
  일본으로 갔지만 그곳에서도 그의 가난은 멈추지 않았다. 도쿄대 대학원에는 장학금을 받고 갔지만 자치회비라는 게 있었다. 장학금과는 별도였기 때문에 자치회비는 납부해야 했다. 당시 2만5000엔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렵게 그 돈을 마련했다.
 
  도쿄 지리를 몰랐으므로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도쿄대를 찾아가는데 비가 내렸다. 2월에 내리는 비라 제법 차가웠다. 도쿄대에 도착해 자치회비를 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비는 점점 더 거세졌다. 아들이 걸음을 멈추고 아버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비가 너무 많이 오니까 우리 택시 타고 가요.”
 
  아내가 아이를 달래며 말했다.
 
  “우리는 가난하기 때문에 택시를 탈 수 없단다.”
 
  그날 김구한씨는 비를 맞으며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하염없이 울었다고 한다. 일본 도착 후 두 번째 눈물이었다.
 
  도쿄대 대학원 미학과에 재학 중 김구한씨는 일본인들이 1904년에 저술한 《조선문화총람》이라는 아주 두꺼운 책을 접하게 된다.
 
  “그 책을 보는데 소름이 좍 끼칠 정도였어요. 철두철미하게 우리나라를 분석한 자료를 읽으면서 우리가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 1868년에 있었는데 1872년부터 정한론(征韓論)이 대두됐어요. 그때부터 우리 조선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이루어졌던 거죠. 그런데 거기서 제가 다른 부분들은 생략하고 조선에 대한 연구 중 ‘조선에는 온돌이 있어서 조선 사람들은 관절염이 적고 허리 굽은 사람도 적다’는 내용이 있는 거예요.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 구들장 밑에 달라붙은 숯검정과 구들을 덮은 흙이라는 거였죠. 흙을 다루는 도예가로서 눈이 번쩍 뜨였죠.”
 
  막연했지만 그때부터 그는 흙을 통해서 인간을 이롭게 하는 그 무엇인가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됐다. 틈나는 대로 흙과 관련된 연구자료들을 탐독했다. 물론 도쿄대 도서관에 있는 친일(親日) 관련 자료들에도 빠져 있었으므로 흙에 관한 연구에만 전념하지는 못했다.
 
  흙에 관한 연구에 전념하게 된 것은 87년에 귀국하면서부터다. 귀국 얼마 후 그는 이천에 ‘요산도요(窯山陶窯)’를 만들고 본격적인 도예작품 활동에 들어갔다. 지금도 그가 도예 작업을 하고 있는 이천시 인후 1리가 바로 그곳이다.
 
  김구한씨가 자기 인생 이력 중에서 잘 이야기하지 않으려는 부분이 있다. 일본에서 귀국 후 과거 운동권 시절의 인연으로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의 비서 역할도 잠시 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1990년 3당 합당과 함께 김 전 대통령과의 인연을 끊어버렸다고 한다. 이천에서 도예활동을 병행하며 김 전 대통령을 도왔던 인연으로 그는 다케시타, 미야자와 등 역대 일본 수상 가운데 6명에게 도인(陶印·도자기로 만든 인감)을 만들어 80만 엔에 팔았다고 한다.
 
 
  스스로 자신의 작품 가격을 1/10로 낮추게 된 까닭은?
 
김구한씨가 자신의 ‘요산도요’에서 제작하다가 중단한 불상(佛像) 앞에서 불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석굴암 불상의 실제 크기에 맞춰 4m 높이로 제작되던 불상은 제작 후원을 하던 건설사의 부도로 중단됐다. 가마에 굽기 직전에 중단된 이 불상이 제작완료됐다면 영구보존이 가능한 세계 최초의 도자기 불상이 탄생하는 것이었다.
  이제 다시 주변 사람들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야 했던 1997년으로 돌아가 보자. 그는 주변의 따가운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2.5평 크기 넓이에 높이가 3m를 넘고 두께는 70cm에 달하는 도자기 집을 통째로 굽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 모두 “저 도자기 집이라는 것은 굽다가 깨지거나 터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되기를 기대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성공이었다. 바위보다 더 단단한 도자기 집이 탄생한 것이다. 김구한씨는 이 도자기 집의 이름을 ‘즈엄집’이라고 붙였다. 김구한씨의 주장에 따르면 ‘즈엄’이란 흙의 고어(古語)로 순 우리말이라고 한다.
 
  물론 이 즈엄집은 다른 즈엄집을 만들기 위한 실험에 불과했다. 그 후 그는 두 채의 즈엄집을 지어 일반에 공개한다. 내부 3.8평 넓이에 높이 4.7m 크기의 즈엄집 한 채는 일본의 니가타현 공원에 설치됐고 2층으로 만들어진 내부 5.4평에 높이 6.2m인 다른 한 채는 이천 도자 비엔날레 엑스포 공원에 설치됐다. 두 즈엄집 모두 그곳을 찾는 관광객들이 반드시 둘러보는 필수 코스가 돼 있다. 2001년에 니가타현 공원에 설치된 즈엄집은 쓰마리 아트 트리엔날레 참가작이기도 하다. 이천 엑스포 공원에 설치된 즈엄집은 2005년에 제작됐다.
 
  한 분야에 ‘미친’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가 세상 물정에 어둡다는 점일 것이다. 김구한씨가 세상 물정에 얼마나 어두운가를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김구한씨는 1997년에 일본 종군 위안부 배봉기 할머니를 소재로 작품 <망향>을 만들었다. 배봉기 할머니는 종군 위안부를 했다는 수치스러움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끝내 일본에서 숨을 거둔 인물이다. 이 작품은 1999년 독일에서 열렸던 세계조각전시회에 출품됐다.
 
  이 작품을 본 독일 중앙박물관 측은 영구보존작으로 이 작품을 구매하기 위해 김구한씨에게 백지수표를 건넸다. 작품 가격이 아직 책정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김구한씨는 자신의 작품을 독일 중앙박물관이 영구보존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뻤는데 백지수표까지 받고 보니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 비싸게 부르는 것은 자부심을 무너뜨리는 것 같았고 그렇다고 싸게 가격을 책정하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생각해 낸 적정 가격은 1만 달러였다. 그는 1만 달러를 적어 보냈다. 그런데 그가 받은 돈은 1000달러였다. 확인해 보니 그만 ‘0’ 하나를 빼먹고 가격을 적었던 것이다. ‘0’자 하나의 실수가 작품의 가격을 10분의 1로 낮춰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어쨌든 <망향>은 지금 독일 중앙박물관에 영구보존, 전시되고 있고 그 작품으로 김구한씨는 세계가 주목하는 도예가 반열에 오르게 됐다.
 
  김구한씨가 도전한 거대 도자기 작품이 또 하나 있다. 4m 높이로 석굴암불상과 동일한 크기의 불상 제작이다. 완성이 됐다면 국내 최초 영구보존이 가능한 불상이 될 수 있었지만 이 작품은 현재 굽기 직전 상태에서 4년째 작업이 중단된 상태다. 제작비만 7억원이 드는 이 불상 제작은 주택사업을 주로 하는 중견건설회사의 후원으로 진행되다가 그 회사가 부도가 나면서 중단이 된 것이다.
 
  “인생 진행비가 필요해서 시작한 작품인데 그 회사가 부도가 나면서 이런 상태로 있어요. 완성되면 천안에 있는 절로 보내기로 약속이 돼 있었죠. 도자기로 된 불상은 전 세계에 단 하나가 인도에 있는데 그 불상은 높이가 32cm에 불과해요. 이 불상이 완성됐다면 사실상 세계 최초의 도자 불상이 되는 셈이었죠. 즈엄집처럼 이런 거대 불상을 도자로 만든다는 것은 기술적으로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죠. 가끔 스님들이 찾아와서 여러 제안을 하시는데 한마디로 거저 가져가겠다는 생각밖에는 없는 것 같아 다 거절했습니다.”
 
 
  신소재 개발
 
일본 신소재 연구의 대가인 오쿠다 박사가 일본 기후현 세라믹 연구소에 의뢰해 도자기를 굽는 과정에서 개발한 신소재에 대한 실험 결과를 김구한씨에게 직접 설명한 그래프. ‘NASA’와 한자로 ‘重用(중용)’이라고 쓴 오쿠다 박사의 자필이 보이는데 지금 당장이라도 나사에서 사용할 수 있는 신소재라는 의미다.
  김구한씨가 즈엄집 등 거대한 도자기 작품에 매달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지난 10월 28일 기자 일행이 이천에 있는 요산도요를 찾아갔을 때 김구한씨는 실험적으로 만들었던 즈엄집으로 우리를 먼저 안내했다.
 
  창고로 사용 중이었는데 김구한씨는 그곳에다 강아지도 길러보고 당나귀도 길러봤다고 한다. 그런데 신기했던 것은 각종 동물을 그곳에서 키울 때 분뇨 등으로 인해 발생하는 역한 냄새가 안 나더라는 것이다. 그런 설명을 하면서 김구한씨는 즈엄집의 창틀 부분을 가리켰다. 창틀 부분의 두께는 30cm 가량 돼 보였는데 틀 가운데에 검은색의 층이 형성된 게 보였다. 즈엄집을 구울 때 연기 등으로 인해 생긴 카본(carbon)층이었다. 보통 2mm, 3mm 두께의 도자기에서는 생성될 수 없는 물질이었다. 김구한씨가 이천에 정착한 후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찾아내려 했던 ‘인간을 이롭게 하는 그 무엇’이 바로 그것이었다. 김구한씨는 그 물질의 이름을 ‘즈엄숯’이라고 붙였다. ‘흙 숯’이라는 뜻이다.
 
  “이 물질에서 발생하는 것이 바이오 포턴(생육광선·生育光線)이에요. 생육광선이란 한마디로 생명을 키우고 지켜주는 에너지란 뜻이죠. 태양광선의 원적외선 광역 중에 인간생명을 유지하는 데 절대적인 파장인 4~14마이크론 대역을 생육광역이라고도 하죠. 이 도자기를 굽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물질을 세라믹 카본이라고도 하는데 93.5%의 높은 원적외선 방사율을 갖고 있습니다.”
 
  김구한씨는 이 기술에 대해 국내는 물론 세계 특허까지 확보해 놓고 있다. “변호사이자 변리사인 똑똑한 후배가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라고 한다. 이어지는 그의 말이다.
 
  “생육광역은 식물이 광합성을 일으켜 생명을 유지하고 동물의 신진대사를 활발히 촉진시켜 세포의 활성화와 노화를 억제해 주는 광역이기도 하죠. 미국 NASA 우주항공선 내부가 우주에서도 인간이 생존할 수 있는 대표적인 생육광역이라고 합니다. 나사가 이 물질을 개발하는 데 28년 동안 496억 달러가 들었다고 합니다. 저도 한 25~26년 걸린 셈이네요. 그만큼 돈이 들어간 것은 아니지만요.”
 
김구한씨는 원자력연구원 등에 성분 효과 분석을 의뢰해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 같은 말은 김구한 개인의 주장이기만 한 걸까. 김구한씨는 지인을 통해서 일본 신소재 연구의 대가인 오쿠다 박사를 소개받았다. 오쿠다 박사는 일본 기후현 세라믹 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오쿠다 박사의 의뢰를 받아 김구한씨가 개발한 세라믹 카본을 분석한 기후현 세라믹 연구소는 2007년 2월에 놀라운 분석결과를 내놓았다. 김구한씨가 만든 신소재가 93.5%의 놀라운 원적외선 방사율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오쿠다 박사는 김구한씨를 일본 제국호텔에서 만나 “이 개발품은 지금 당장에라도 미국 나사에서 써먹을 수 있는 기술”이라고 했다고 한다.
 
  또한 2012년 2월에는 건설환경시험연구원에서 암모니아 등의 탈취율 실험에서 90.5%의 탈취율이 나왔고, 2012년 3월에 원자력연구원에 의뢰한 실험에서는 암 발생에 원인이 되는 세슘의 흡착률이 53.6%나 됐다.
 
 
  날로 먹으려는 국내 기업들
 
  실제 이 기술은 이미 국내에서 차움병원 회복실 등에서 사용돼 그 효능을 인정받은 바 있다. 그러나 당장 김구한씨가 이 기술을 사용하고 싶은 분야는 열에너지와 관련된 분야다. 세라믹 카본으로 구들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현재 세라믹 카본을 이용한 구들은 경북 청도에 금년 말 완공 예정으로 짓고 있는 주택 8채 침실에 사용될 예정이다.
 
  그동안 알음알음으로 소문을 듣고 찾아온 국내 굴지의 H그룹 등 회사들이 있었지만 김구한씨는 응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특허까지 내놨지만 “거의 날로 먹으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일본도 미쓰이 금속에서는 기술을 팔라는 제안을 해왔고, 한 대형 부동산 회사에서는 생산기지를 일본에 만드는 조건으로 투자를 하겠다는 제안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기자와 만난 다음 날인 29일 일본 측 투자자와의 협의를 위해 출국했다.
 
  기자도 김구한씨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4시간30분 동안 김구한씨가 시험 삼아 만든 메줏덩이 크기에 두께는 그 반만 한 보온용기를 무릎 가까이에 두고 있었다. 그 안에는 세라믹 카본이 들어 있었고 전기를 5분 정도 공급했는데 2시간 이상 따뜻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적은 전기량으로 그 20배 이상의 열에너지를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구들장도 같은 원리로 만들어진다고 한다. 기자와 함께 간 사진기자도 그 실험 아닌 실험에 동참했는데 결과는 같았다. 신기해하는 기자에게 김구한씨는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했다.
 
  “이런 일이 요즘 말하는 신산업을 창조하는 창조경제 아닌가요?”
 
  그러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사람은 원래대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나 봐요. 전 정말 좋은 자본 만나서 이 사업으로 돈 벌면 사회적 기업을 만들어서 경영은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고 내가 고교 시절에 꿈꿨던 우리 전통 악기를 개량하는 일에 여생을 바치고 싶어요. 그 여생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인터뷰가 끝나자 그가 악수를 청하는 손을 내밀었다. 역시 같은 보온용기를 들고 인터뷰에 응했던 그의 손도 따뜻한 온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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