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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元老 연극연출가 김정옥의 ‘살아남은 자’의 고백

“나는 살아남았다. 광대를 꿈꾸었다”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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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남 어촌의 요(窯)에서 한 줄기 연기 보고 아득한 세계 동경해
⊙ 광주西中 시절, 친구 8명과 九麥會 조직… 6·25 겪으며 흩어져
⊙ ‘신문학원’ 합격… 등록금 구하러 낙향했다가 살아남아
⊙ 1950년 民靑의 “자아비판하고 뉘우치게 하는” 강요에 실망
⊙ “억세게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지만 살아남아서 처진 落伍者”

金正鈺
1932년 출생. 광주서중, 서울대 불문과 졸업, 프랑스 소르본대 영화연구소 등에서 현대불문학, 영화, 연극 등 수학 / 중앙대 연극영화과 교수, 예술대 학장, 예술대학원 초대원장 역임 / 국제극예술협회(ITI) 회장, 한국연극협회 이사장, 문화예술진흥원장,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역임. 現 얼굴박물관 관장
사진=조준우
  6·25가 발발한 지 70년이 지난 후 ‘살아남은 자’의 고백을 한 원로가 있다. 해방 이후 1세대 연극연출가로 꼽히는 김정옥(金正鈺·90) 선생.
 
  1959년부터 중앙대 연극영화과 교수로 재직하며 많은 제자를 예술인의 길로 이끌었다. 극단 민중극장, 극단 자유의 동인으로 〈따라지의 향연〉 〈무엇이 될고 하니〉 등 100여 편이 넘는 연극작품을 연출한 그였다.
 
  1995년 6월에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열린 국제극예술협회(International Theater Institute) 세계 총회에서 아시아인으로는 처음으로 회장이 되었고 3차례 연임(7년)한 뒤 명예회장으로 추대됐다. 문화예술진흥원장(2000), 대한민국예술원 회장(2011) 등을 역임했으며, 대한민국예술원상(1993), 은관문화훈장(1998), 대한민국을 빛낸 호남인상(2021) 등을 수상했다.
 
  기자는 지난 4월 김정옥 선생의 6· 25 체험기를 듣기 위해 경기도 광주를 찾았다. 선생의 아호는 석두(夕杜). 시인 신석정(辛夕汀·1907~1974년)과 두보(杜甫·712~770년)에서 한 글자씩 따왔단다. ‘살아남은 자’의 감회란 어떤 것일까. 그는 “슬픔과 분노, 찌꺼기가 되어 살아남은 것 같은 허전함과 억울함, 찜찜함…”으로 표현한다.
 
  “아니, 살아남았다기보다도 살아남아서 처진 낙오자(落伍者)라는 생각이 듭니다. 전쟁의 파편이 되어 녹슬어가고 있다는 느낌이죠.
 
  운이 좋아서라면 억세게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지만 그보다도 나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회색분자였기에 살아남았는지 모릅니다. 본색을 드러내지 않은 위장된 회색분자라서 살아남았는지 모르죠.”
 
 
  “하여튼 나는 살아남았다”
 
원로 연극연출가 김정옥은 한국 현대 연출의 전위적 제의극의 선구자이다.
  ― 살아남았으니 어쨌든 증언할 수 있는 것이지요.
 
  “하여튼 나는 살아남았어요. 그래서 억울하게 죽어간 친구들, 그들을 위해 뭔가 고백하고 증언하고 뭔가 진혼(鎭魂)하는 굿판을 벌이고 싶었는지 모르죠. 그래서 나는 연극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석두 김정옥은 좌파도 우파도 아닌 삶을 살았다고 말한다. “좌와 우에 양다리 걸친 사이비라고 할까. 좌우와 보수와 진보의 이념적 갈등 속에서 언제나 반동분자요, 수정주의였지만 그래서 위장자가 되어 어렵사리 살아남았다고 할 수 있다”고 토로한다.
 
  기자는 석두 선생과 더불어 과거 여행을 시작했다. 그는 일제 시대 공의(公醫)였던 부친의 근무지에 따라 전남 영암군 독천소학교에 입학했다가 2학년 때 해남군 송지면 산정소학교, 다시 4학년 때 나주군 남평소학교로 전학해 졸업(1944년)한다. 시골서 도시로 유학 간 광주서중학교 시절의 그는 내성적이고 얌전한 학생이었다. 원예반에 들어가 화초를 가꾸었을 정도다.
 
  “한반도 최남단 해남의 산정소학교에 다니던 시절이 떠오릅니다. 학교에서 한 5리 떨어진 어촌에 옹기를 굽는 요(窯)가 있었어요.
 
  옹기를 구울 때는 연기가 한 줄기 하늘로 길게 피어올랐죠. 교실 창밖으로 그 하얀 연기를 곧잘 바라보곤 했어요.”
 
 
  마침내 기다렸던 흰 연기
 
  그날도 피어오를 그 한 줄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업시간 선생님의 말씀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침내 기다렸던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는 “와~” 하고 환성을 질렀다. 교사와 급우들이 일제히 그를 쳐다봤다.
 
  “왜 그러지?”
 
  “저기 연기가 피어올랐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러나 “한 줄기 연기는 나의 인생, 나의 길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고백한다.
 
  “푸른 하늘로 사라져 가는 한 줄기 연기에서 뭔가 아득한 세계에의 동경과 꿈을 키웠던 소년은 자라나면서도 현실적인 세계보다 상상의 세계, 꿈의 세계, 사라져 가는 세계, 멀리 떠나가는 세계, 영상의 세계, 연극의 세계에 끌리게 되었어요.”
 

  광주서중에 들어간 석두는 외톨이가 되었다. 탈출구는 영화였다. 당시 중학생은 공식적으로 영화를 볼 수 없었다. 만약 들키는 날에는 퇴학을 각오해야 했다.
 
  “영화를 보기 위해 치마를 입고 얼굴에 분을 칠하고서 영화관에 갔어요. 영락없이 계집애 같다는 말을 들었지요.
 
  그리고 해방 후에는 영화보다 지방 순회공연을 하는 가극단, 악극단의 무대를 열심히 보러 다녔습니다.”
 
  석두의 어머니(최영수)는 그 시절 숙명여고를 나온 신여성이었다. 숙명여고 시절 소설가 최정희(1912~1990년)가 기숙사 룸메이트였다. 최정희는 어느 글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방에 영화를 좋아하는 문학소녀 최영수가 있었는데 그녀의 아들이 김정옥이다. 그 아들이 연극을 한다. 무엇이든지 한 대에 되는 게 아니다.’
 
 
  유랑극단의 서글픈 나팔소리
 
  유랑극단의 레퍼토리는 대개 감상적인 멜로드라마가 대부분이었지만 여주인공의 애절한 노래 속에 민족의 슬픔과 울분이 담겨 있었다. 석두는 유랑극단의 서글픈 나팔소리에 매혹되었다.
 
  “여관비도 제대로 치르지 못한 채 뿔뿔이 헤어지는 유랑극단의 서글픔과 아픔을 목격했어요. 무대를 떠나는 그들의 탄식을 듣고 한없이 슬펐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내 인생길을 뚜렷이 설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소년 시절의 이런 체험이 나의 길을 서서히 암시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1947년 중학교 4학년(그러니까 지금의 고교)이 되면서 더욱 대담해졌다. 학교에는 잘 나가지 않고 서울에 올라가 국도극장, 단성사, 수도극장이나 연극, 악극의 공연을 보러 다녔다. 학교가 열려 있을 때와 닫혀 있을 때가 반반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동맹파업이 잦았다.
 
  5학년이 되어 교내 친탁반탁 물결을 접하고선 아예 무단결석을 했다. 서울상대에 다니는 사촌 형과 서울의대에 다니는 형의 하숙집을 오가며 서울에 눌러앉았다. 소공동에 있던 남대문도서관이나 국립도서관에 입장해 도서관이 문을 닫는 밤 9시까지 자리를 지키며 공부한 기억도 있다.
 
  “검정시험에 합격해 중앙대 국문과에 입학했어요. 국문과를 택한 이유는 간단해요. 일제강점기 때 한글이나 국문학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검정고시, 다시 광주서중으로
 
6·25가 발발한 이듬해 모인 문학서클 ‘구맥회(九麥會)’ 회원들. 왼쪽 뒤부터 시계방향으로 김정옥, 김호종, 문숙영, 장태규, 정시년. 생존자 중 한 명은 사진에서 빠졌다. ‘살아남은’ 이들은 스스로 ‘구맥의 파편’이라 불렀다.
  당시 광주서중은 자퇴 처리가 안 돼 있었다. 중학생이자 대학생인 이중 신분으로 광주와 서울을 오갔다. 머리는 어느덧 길어 장발이었다.
 
  “한번은 길에서 중학교 훈육 주임 선생님을 만났어요. 장발을 한 나를 알아본 것이었죠. 선생님은 문예반 지도 교사를 하신 분이었어요. 선생님께 ‘광주서중을 관두고 중앙대생’이라고 했지만, 막무가내 이발관으로 끌고 가 머리를 밀었어요.”
 
  “반년 후면 졸업인데 무슨 소리냐. 중학교를 졸업하는 것이 대학 졸업보다 더 중요하다. 중학교 동창이나 동문이 얼마나 중요한지 넌 모른다”고 설득한 것이다.
 
  석두는 이튿날 6개월 만에 다시 광주서중을 찾았다. 내심 껄끄러웠으나 급우들은 그를 반기며 아무도 장기 결석에 대해 묻지 않았다.
 
  ―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가요.
 
  “세상이 하도 시끄러우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서로 묻지 않은 것이죠. 혼란기였지만 그 대신 관대했어요. 장기 결석을 하고도 졸업을 할 수 있었으니 혼란기에만 있을 수 있는 일이었지요.”
 
  1949년 6학년이 되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입시 열기가 뜨거웠다. 어느 날 여학생 4명, 남학생 4명과 함께 9명이서 구맥회(九麥會)라는 연합 문학 동아리를 만들었다. 보리처럼 구수하고 생명력이 있는 문학을 하자고 만든 구맥회는 이태준(李泰俊·1904~?), 정지용(鄭芝溶·1903~1950년), 김기림(金起林·1908~?) 등이 중심이 된 구인회(九人會)를 흉내 낸 것이었다.
 
  “우리는 시, 수필, 단편소설 등을 쓰고 필사본의 동인지를 만들기도 했어요. 나는 프랑스 시인 랭보와 보들레르를 논하기도 했고요. 구맥회 회원들을 향해 ‘야, 문호들이 오시는군’ 하고 비꼬는 친구들도 있었어요. 아무래도 대입을 준비하는 친구들 눈에는 거슬릴 수밖에 없었겠지요.”
 
  석두는 1950년 봄 6년제 광주서중을 졸업하고 동시에 중앙대 국문과 2학년에 등록했다.
 
 
  이북 방송 듣고 남한 침공 확신해
 
《매일경제》 1983년 11월 29일 자 9면에 연재된 김정옥의 〈나의 유학시절〉 기사. 프랑스 소르본대 시절의 모습이다.
  1950년 5월 총선거가 있었다. 그 무렵 구맥회 동인 가운데 정서홍은 고려대 철학과, 신태호는 서울대 정치외교학과(당시는 정치학과와 외교학과가 분리되기 전이었다)에 진학했다.
 
  “우리는 북한 김일성의 남침, 그것도 단시일 내에 38선을 넘어오리라는 것을 거의 확신하고 있었어요. 그때로서는 꽤 귀했던 제니스 라디오의 FM 전파를 통해 이북 방송을 들을 수 있었어요.”
 
  매일같이 민전(民戰)의 노래와 조국통일 행진곡이 흘러나왔고 내일이라도 당장 쳐내려 올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그해 5월 총선거를 앞두고 선거 유세 현장에 가보았어요. 조소앙(趙素昻·1887~1958년)의 연설에 놀랐는데, 그는 김구(金九·1876~1949년) 선생을 모시고 평양 다녀온 얘기를 하면서 ‘북한이 엄청난 군비를 소련한테 받고 있으며, 북한 전체가 병영화되고 있어 우리가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더군요.”
 
  5월 총선거는 이승만 세력의 참패로 끝이 났다. 반공(反共)을 국시(國是)로 삼고 북진통일을 외치던 이승만의 몰락은 북한으로선 희망적인 정국이었다. 그런데 평화통일을 내세우고 남북 사회단체의 평화회의를 제의하고 있는 북한 정권이 전쟁 준비에 광분하고 있었으니 그로선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북한 정권이 위장술을 쓰고 있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들은 침공을 준비하며 평화통일을 내세우고 민주주의와 민족을 내세우는데, 남쪽의 대한민국은 반공과 북진통일을 내세우니 뭔가 거꾸로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죠.
 
  미국이 대한민국과 이승만 정권을 포기하고 북조선의 인민군이 남반부를 점령해 적화통일이 될 거라는 시나리오가 곧 현실화될 것같이 느껴졌어요.”
 
 
  신문학원과 김기림
 
맨 오른쪽 끝이 김정옥 선생이다. 중앙대 연극영화과 교수이자 연출가, 문화 행정가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런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진로를 고민하던 김정옥과 구맥회 친구 정서홍은 신문기자의 꿈을 꾸며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공산화되었을 때 우리 같은 계급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직종이 신문기자일지도 몰라.”
 
  “너(서홍)는 지주의 아들이니 꼼짝없이 당하는 거지. 우리 집(석두)은 의사니까 그래도 기술 노동자야.”
 
  “기술 노동자도 원래 성분이 문제야. 너네 할아버지, 외할아버지 다 지주 아니냐? 그리고 너 자신이 문제야. 퇴폐적 인텔리겐차로 낙인이 찍힐 테니까.”
 
  당시 신문기자가 되려면 청계천3가에 위치한 조선신문학원에 들어가야 했다. 신문학원은 유일한 언론인 양성기관인 셈이었다. 대학 2학년 과정을 수료해야 ‘학원’에 입학할 자격이 주어지고 까다로운 시험도 쳐야 했다.
 
  석두와 서홍 두 사람은 대학 2학년 수료증을 위조해 원서를 냈다. 위조 수료증을 만드는 데 1만원이 들었다.
 
  “신문학원 입학시험을 치는데, 필기시험은 시사(時事)와 관련해 주제나 내용을 주고 기사를 작성하는 것이었는데 구두시험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시험관 중에 중앙대에 출강하던 시인 김기림 선생이 계셨거든요.”
 
  석두는 중앙대 국문과를 전공하면서 부전공으로 영문과 수업을 듣고 있었다.
 
 
  신문학원 합격과 落鄕
 
  김기림은 금방 제자를 알아봤다.
 
  “내 강의를 듣는 학생인 것 같은데 ‘Rolling Stone gathers no Moss(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라고 진득하게 한자리에 붙어서 공부를 해야지 신문학원에는 왜 들어오려고 하나?”
 
  그러자 옆에 앉은 다른 시험관이 지원서류를 보며 이렇게 덧붙였다.
 
  “H대학 2년 수료라는 것은 다 거짓이구먼. 중앙대를 다니면서 언제 H대학을 다니나?”
 
  서류가 가짜라는 것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굴하지 않았다. 서류야 뭐 형식적이지 중요한 건 필기시험 결과가 아니겠느냐 생각했다. 필기 결과가 좋다면 꼭 붙여달라고 배짱 좋게 간청했다. 그러나 결과는 낙방. 다시 학원에 찾아갔다.
 
  그만큼 신문학원에 들어가는 것이 절실한 꿈이요, 바람이었다고 할까…. 두 사람은 교학과장을 만났다. 교학과장은 두 사람을 알아보고 이렇게 말했다.
 
  “필기시험이 뛰어나니 이달 말까지 등록을 하도록 해요. 7월 1일부터 강의가 시작되니까.”
 
  합격자 명단에는 빠졌으나 필기성적이 좋으니 등록하면 받아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날이 1950년 6월 20일이었다.
 
  6월 22일 석두와 서홍은 광주로 내려왔다. 신문학원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잠시 낙향한 것이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잠시 광주에 내려간 것이 행운이었어요. 서울서 6·25를 체험하지 않았으니…. 당시로 본다면, 굳이 이념 성향이 좌파가 아니더라도 이북이 전쟁에서 이길 것 같다고 생각하는 이가 많았거든요. 만약 서울에 남았다면…, 그런 친구들에 휩쓸려 인민군 의용대에 들어가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러나 광주로 내려갔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죠.”
 
 
  “박헌영 동지 만세!”는 不許
 
  6·25가 발발했다. 석두와 서홍은 석두의 외할머니 연줄로 노령산맥 기슭의 외딴 마을 시골집 사랑의 골방에 한동안 틀어박혀 꼼짝 않고 숨어 지내다 광주로 갔다.
 
  얼마 후 좌익 단체인 민주청년동맹(민청)에서 인민군 환영대회를 개최했다. “주최 측 요원으로 참가하라”는 민청의 제안은 거절하였으나 호기심에 몰래 가보았다. 대회는 인민군 만세, 김일성 장군 만세를 외치며 금남로에서 황금정 쪽으로 행진하는 행사로 이어졌다. 그는 그 행진에 끼어들지 않고 멀리서 관망했다.
 
  “누군가가 ‘김일성 장군 만세’나 ‘인민군 만세’ 대신 ‘박헌영 동지 만세!’라는 구호를 외쳤습니다. 그러자 행렬의 군중도 덩달아 ‘박헌영 만세’를 외치자 인민군 복장의 두 병사가 ‘김일성 장군 만세’를 외치며 박헌영 지지를 제지하는 겁니다.
 
  그러고는 두 병사가 ‘박헌영 만세’를 외친 청년을 호되게 몰아세우는 눈치였어요.”
 

  이때 구식 비행기가 나타나 환영 행렬의 군중에게 기총사격을 가했다. 순식간에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고 한다. 미처 피하지 못한 사람들이 우왕좌왕했고, 기총사격에 부상을 입거나 사망한 사람도 없지 않은 듯 들것을 든 사람들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환영대회가 씁쓸한 풍경으로 돌변한 것이다.
 
  한편, 광주 민청은 광주서중 출신의 좌익계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자발적으로 발족되었다. 친구 정서홍은 도민청(道民靑) 위원, 김정옥은 시민청(市民靑) 위원이 되었다.
 
  민청은 매일 아침마다 전원이 돌아가며 자아비판을 강요했다. 그는 “아침마다 이것저것 꾸며내 자아비판을 하고 뉘우치고 하는 것이 지겹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세 친구의 운명
 
1993년 극단 ‘자유’ 단원들과 프랑스 파리의 롱푸앙 극장에서 김정옥이 연출한 〈꽃, 물 그리고 바람의 노래〉를 공연한 뒤의 모습이다.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김정옥.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진실성이 결여된 자아비판을 듣는 것도 견디기 힘들었다.
 
  “더는 참을 수 없어서 조직에서 이탈하기로 결심했어요. 민청에 한동안 안 나가니 친구(정서홍)가 찾아왔어요. 잘못하면 반동으로 몰리니 참고 민청에 나가라는 것이었죠.
 
  난 항변했어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자유를 포기할 수 없다’고. ‘특히 문학에 뜻이 있고 예술적 창조에 뜻이 있다면 자유가 있어야 한다’고 했죠.
 
  친구는 ‘조국이 통일되어 평화로운 세상이 되면 자유도 누릴 수 있다’고 했지만 ‘그럴 것 같지 않다. 매일 아침 자아비판을 하라는데 자유가 있겠냐?’고 했지요. 그리고….”
 
  ― 그리고….
 
  “공산주의를 하더라도 남쪽에서 올라가서 해야지 북쪽에서 내려와서 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들이 우리를 심사하고 지시하고 감시하고…. ‘박헌영 만세’를 외쳤다고 몰아세우고….”
 
  이튿날 아침, 친구 J가 찾아왔다. J는 1년 전에 월북한다고 찾아와서 석두의 하숙방에서 이틀을 보내고 간 3명의 친구 중 한 사람이었다.
 
  친구 3명은 월북하자마자 곧바로 남파 공작원, 유격대를 훈련하는 군관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3개월 후 오대산 방면의 유격대로 남파되었다. 그러나 곧바로 토벌대에 의해 생포되었다. L은 육군형무소에 수감되자마자 곧바로 총살되었고, J와 K는 함평 유지이자 재력가인 J 부친의 구명운동으로 총살을 면한 채 춘천형무소에 수감되었다.
 
 
  民靑을 거부하다
 
  춘천형무소에서 6·25를 맞이한 두 사람은 탈출에 성공, K는 오대산 빨치산에 합류했고 J는 그 길로 남하해 광주로 온 것이었다. J는 민청 담당 지도원이었다.
 
  석두 선생의 회고다.
 
  “J가 나더러 시민청에 복귀하라고 설득했죠. ‘당성(黨性)이 있어야 예술가도 될 수 있다’고. 하지만 민청에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어요.
 
  난감해하던 J가 ‘그럼, 민청 서울본부와 연락이 두절된 상태인데 석두 네가 연락책으로 서울에 갔다 올래?’ 하더군요. 잠시 피해 있으라는 것이었어요.
 
  이튿날 아침, 민청에 가서 서울본부에 전달할 서류 뭉치를 받아 자전거를 타고 출발했어요. ‘한양천리길’… 자전거를 타고 서울 가는 것은 처음이어서 설레었죠.
 
  광주 시내를 벗어나자마자 따발총을 든 인민군 두 사람이 길을 가로막고 자전거를 빼앗았어요. 서울본부로 가는 길이라고 설명해도 막무가내였죠.”
 
  결국 광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한데 불과 한 달여 사이 인민군 병사의 인상과 표정이 너무 달라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에 쫓기는 사람들로 느껴졌던 것이다. 다시 광주 집으로 돌아오니 서울서 내려온 형의 친구가 있었다.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니 형의 친구의 말은 이랬다.
 
  “너, 여기서 자전거 뺏기기를 참 잘했다. 서울 가면 의용군에 끌려가든지 굶어 죽든지 양단간이야. 그리고 전쟁은 이미 결판났어.”
 
 
  “그리고 전쟁은 이미 결판났어”
 
1964년 제1회 《한국일보》 연극영화상에서 연출상을 수상한 김정옥.
  형의 친구 말에 따르면, 인민군의 보급로가 끊겼고 탄약은 바닥났으며, 병사들이 포탄을 짊어지고 전선에 나가는데 “그래가지고 싸움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형의 친구의 시골집에서 당분간 숨어 지냈어요. 동란의 와중 뜻밖의 평화로운 시간이었죠. 그 형이 어느 날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소식을 알려주었어요. 하지만 그 조용한 마을도 안전한 곳이 아니었어요. 야밤에 빨치산이 내려와 몇 집을 들러 곡식을 털어가는 겁니다. 언제 또 내려올지 몰라 두려운 마음에 광주로 돌아갔어요.”
 
  김정옥은 1950년 11월 ‘누구여!’라는 시를 썼다.
 
  나는 아저씨 편이여!
  할머니는 외쳤다.
 
  할머니는 괜찮아, 어느 편이든
  집에 누구 없어, 할매 말고?
 
  다 떠나갔어.
  첫째는 국방군 따라가고
  둘째는 산사람 따라가고
  그리고는 없어
 
  아무도 없어
 
  나는 아저씨 편이랑께…!
 
  -김정옥의 ‘누구여!’ 전문

 
 
  구맥의 破片들…
 
  ― 문학을 꿈꾸던 구맥회 친구들은 이후 어떻게 됐나요.
 
  “전쟁의 회오리바람이 스쳐간 뒤 9명 중 3명은 떠나가고 6명만 남게 됐어요.
 
  한 친구는 폐병을 앓으면서 약물치료도 받지 못하고 떠나갔고, 정서홍은 민청을 따라 영암의 월출산에 입산했다가 전사했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그의 가까운 친척이 국군의 헌병사령관이었다고 해요. 그런 친구가 유격대 영웅으로 전사를 하다니, 아이러니한 시대의 장난이 아닐 수 없었죠.
 
  서울대생 신태호는 인민군에 입대해 이북으로 갔다는 소문만 있을 뿐 행방을 모릅니다. 나중에 듣기로, 김일성대학에서 공부하기 위해 북으로 갔다고 해요. 그러나 당원이 아니어서 대학에 갈 수 없었고 결국 탄광 일을 했다고 해요. 이후 소식은 알 수 없지만 아마 사망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하여튼 9명의 구맥회 동인 가운데 3명이 1950년 시작된 6·25전쟁 1년 사이에 사라진 것이다. 남은 6명 중 5명이 기념사진을 찍고 ‘구맥의 파편(破片)’이라는 사진 캡션을 달았다.
 
  한국전쟁 중인 1951년 2월, 문교부령 제19호 ‘대학교육에 관한 전시 특별조치령’에 따라 종합대학 성격의 전시(戰時) 연합대학이 부산과 대구, 광주 등지에 생겼다.
 
  “전선이 소강상태가 되자 이승만 대통령이 전시 연합대학을 설치했어요. 학생들을 전선으로 보내 소모품으로 삼을 게 아니라 그들에게 학업을 계속하게 해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죠. 이승만 덕분에 입대하지 않고 계속 대학에 다닐 수 있게 됐어요.”
 
 
  1951년 서울대 불문과에 들어가다
 
문화예술진흥원장 시절의 김정옥. 이름 없는 예인의 숨결이 담긴 목각인형을 들여다 보고 있다. 사진=조선일보DB
  그 무렵, 부산에서 서울대 단과대학이 개교했다. 석두는 서울대 불문과로 대학을 옮겼다.
 
  ― 불문과를 택한 이유는요?
 
  “할리우드 영화보다는 문학 성향이 강한 프랑스 영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까요? 마르셀 카르네의 〈인생유전(Les enfants du paradis, 1945)〉 같은 시적(詩的) 작품이나 장 콕토의 〈비련〉, 줄리앙 디비비에르의 〈무도회의 수첩〉, 르네 클레망의 〈금지된 장난〉 같은 프랑스 작품에 심취됐어요.
 
  일본어로 번역된 보들레르나 랭보의 시를 읽고 벼락치기로 불어 공부를 해서 불문과에 입학한 것이죠.”
 
  당시 서울대 불문과 정원은 10명인데, 지원자는 100명에 가까웠다. 10대 1의 경쟁을 뚫은 것이다.
 
  “평소 실력보다는 시험을 잘 치는 편이어서 합격할 수 있었어요. 대학 시절에는 영도(零度)동인, 구도(構圖)동인 등 문학 지망생들과 어울려 시를 쓰곤 했어요.”
 
  ― 프랑스 유학을 1956년에 떠난 것으로 알고 있어요.
 
  “유학도 이승만 덕분이죠. 이 대통령은 미래의 인재를 길러야 한다고 생각해 학생들에게 병역을 유보하고 해외 유학의 길을 열어주었어요. 단 유학 검정시험을 치르게 했고, 시험에 합격한 사람에게는 출국할 때 600달러, 그리고 매월 140달러를 환전해서 송금할 수 있게 했지요.”
 
  연간 수출액이 100만 달러도 채 되지 않고 외화보유액이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닌 외환 사정과 암달러 시세가 공정 환율의 배가 넘던 외환 사정을 고려할 때 해외 유학생에게 주어진 혜택은 각별한 정책적 뒷받침 없이는 불가능한 조치였다.
 
  그가 경험한 당시 파리는 어땠을까?
 
  “파리의 공기는 서울의 공기와 완전히 달랐죠. 통금시간, 반공법, 여기다 일제의 잔재인 허구한 금지관행 속 공기와는 그 무게가 달랐어요.”
 
  더욱이 석두의 관심 분야였던 연극이나 영화 분야에 있어 파리는 세계 문화예술의 중심도시였다.
 
  영화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비토리오 데시카(De Sica Vittorio) 감독의 〈자전거 도둑〉, 로베르토 로셀리니(Roberto Rossellini) 감독의 〈무방비 도시〉 등의 이른바 네오리얼리즘의 이태리 영화가 주목을 받았으나 1950년대 후반에는 알랭 레네(Alain Resnais),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 프랑수아 트뤼포(François Truffaut) 등 이른바 프랑스의 누벨바그(Nouvelle Vague)가 예술영화의 세계적 주류로 등장했다.
 
  “미국의 할리우드는 상업적인 면에서는 세계의 영화 흥행을 주도했으나, 예술적인 면에서는 이태리, 프랑스, 독일, 스웨덴, 영국 등 구라파 영화가 주도했다고 볼 수 있어요.
 
  파리는 그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었죠. 영화의 관객운동이라 할 수 있는 ‘씨네 클럽 운동’, 시네마테크로 대표되는 ‘필름 라이브러리 운동’이 한창이었어요. 영화가 단순한 흥행이나 오락이 아니라 20세기의 새로운 영상문화로 자리매김하고 있었죠. 연극 역시 파리가 세계적 중심도시라는 명성을 잃지 않고 있었습니다.
 
  나는 소르본대 근처에 있는 ‘필름 라이브러리’에서 매일 3편씩 영화를 보았어요. 대부분 영화는 내가 보지 못한 것이기에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 영화 공부를 다 한 것이라 생각했어요. 졸업할 때까지 400여 편 정도를 감상할 수 있었죠.”
 
 
  柳致眞과의 만남, 그리고 ITI
 
2000년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열린 세계극예술협회(ITI) 총회에서 김정옥 회장이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김정옥은 프랑스 영화대학인 이데크(IDHEC)에 입학했으나 6개월 뒤 소르본대학의 영화학 연구소로 옮겨 영화를 공부하고 현대불문학 강의도 들었다.
 
  파리에 유학 온 지 2년 차 되던 해, 동랑(東朗) 유치진(柳致眞·1905~ 1974년) 선생이 부인과 동반해서 파리에 왔다. 동랑과 석두의 인연은 동숭동의 서울대 문리대 캠퍼스에서 동랑의 희곡론 강의를 수강한 데서 출발한다. 희곡 현상 모집에서 당선된 친구(오상원)가 심사위원장이었던 동랑에게 ‘희곡 잘 쓰는 작가 지망생’으로 소개하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는 동랑이 파리 연극인과 만나거나 극장을 방문할 때 안내 역할을 맡았다.
 
  “한번은 동랑이 파리의 유네스코에 본부가 있는 국제극예술협회(ITI) 본부를 방문하자고 하시더군요. 동랑은 ITI의 한국본부를 만들었으면 한 것이죠.”
 
  동랑과 석두는 1957년 유네스코의 ITI 본부를 방문, ITI 한국본부의 발족과 가입 의사를 표명했다. 이듬해 동랑이 한국 대표로 헬싱키 총회에 참가했다. 석두는 총회에는 참가하지 못했지만 그 중간 심부름을 했다.
 
  “그동안 한국 연극이 일본을 통해서 서구 연극을 받아들였다면 ITI 가입 등을 계기로 서구 연극을 직접 만나고 교류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인연이 1981년부터 그가 ITI 집행위원과 부회장으로 활동하는 밑거름이 되었고, 1995년 동양인 첫 ITI 회장이 되고 3차례나 연임할 수 있었다.
 
  ― 6·25 체험기 잘 들었습니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씀이 있을까요.
 
  “온 국민의 통일에의 염원은 간절하지만 흡수 통일이나 전쟁을 통한 통일을 꿈꾸어서는 안 됩니다. 성급한 바람은 21세기에 또 다른 6·25의 비극을, 한반도의 비극을 가져올지 몰라요.
 
  때로 기다려야 합니다. 20세기에 시작해서 21세기, 필요하다면 22세기까지도 기다리면 평화적 통일이 기적처럼 찾아오고 이루어질지도 모르잖아요? 체제와 관계없이 평화적 공존 속에서 통일은 언젠가 기적적으로 찾아올 것입니다.”⊙
 
김정옥의 연극 연출세계
  연극의 길, 광대의 길

 
  한국 연극사에 김정옥만 한 다채롭고 화려한 연극세계를 지닌 연출가가 또 있을까. 연출가 외에 문화예술 행정가로서 능력은 일단 논외로 하자. 동양인 최초로 국제극예술협회 회장이 되어 7년간 독재를 한 ‘국제 경영자’다.
 
  철사처럼 부드럽고 모가 없지만 철사보다 훨씬 강하고 단단한 성격의 소유자인 그는 작품에서도 독특한 세계관을 담았다.
 
  연극 〈무엇이 될고 하니〉(1978)에서 전통의 재창조를 향한 자신의 방법론, 즉 “제3의 연극을 위한 새로운 연출미학”을 마련했다. 한국 전통연회 및 무속(巫俗) 제의(祭儀)인 굿의 형식을 우리의 연극적 유산으로 수용한 것이다. 소설가 최인훈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1970), 가르시아 로르카의 〈피의 결혼〉(1984), 〈바람은 불어도 꽃은 피네〉(1984) 등을 통해서 연극을 ‘서양적인 것에서 동양적인 것으로’ ‘이국적인 것에서 한국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연극 〈따라지의 향연〉(1966)처럼 연극성과 현대성을 가미해 만든 작품도 김정옥의 대표작 중 하나다. 당대 한국 사회가 안고 있던 가난과 유복, 비천과 고귀 같은 사회 격차를 풍자적으로 희극한 작품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이 작품은 김정옥에게 동아연극상(대상)을 안겼다.
 
 
  이오네스코가 내한해 찬사 보내다
 
  부조리극 또는 반(反)연극의 대표작인 연극 이오네스코의 〈대머리 여가수〉(1963)는 지금도 회자(膾炙)하는 작품이다. 극이 초연됐을 때 “하필이면 왜 난해한 전위극을 시도하느냐”는 비판이 안팎에서 있었지만 객석은 그의 전위적인 노력에 박수를 보냈다. 이후 김정옥의 주요한 레퍼토리 중 하나가 되어 자주 무대에 올렸다. 박근형, 오현주, 김혜자, 추송웅, 박정자, 김무생, 권성덕, 김정, 구문회 등이 대(代)를 이어 배역을 맡았다. 1977년 이오네스코가 내한(來韓)해 연극을 관람한 뒤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그의 말이다.
 
  “연극은 다른 어느 예술보다 인간적인 예술이고 민중의 예술입니다. 사람 인(人), 사이 간(間) 자를 풀어보면 그게 바로 연극과 같은 의미예요. 그 연희자(演戱者)가 광대지요.
 
  저는 자유라는 말과 광대라는 말을 좋아해요.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서 왕에게 옳은 소리를 하는 유일한 자가 광대이듯이, 연극이야말로 세상이 거꾸로 돌아갈 때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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