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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완의 인간탐험

KBS 원로 아나운서 위진록

“6·25! 임시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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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 19세 청년, KBS 서울중앙방송국 아나운서가 되다
⊙ 구민과 〈똘똘이의 모험〉, 장민호와 〈청실홍실〉 방송
⊙ “화신백화점~탑골공원까지 벽보 소리 내어 읽으며 발성 연습”
⊙ “김구 하관식 중계 당시 棺 뚜껑에 떨어지는 흙덩이 소리 담으려 마이크 들이대”
⊙ “9·28 서울 수복 방송, 서울시민에게 부르짖듯이 말해”
⊙ 70여 년간 해외에서 살게 된 것은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전쟁 때문

韋辰祿
1928년생. 평양사범학교 중퇴 / 서울중앙방송국(KBS) 아나운서(1947), 일본 도쿄의 유엔군사령부방송(VUNC) 출장 파견(1950~1972) / 미국 이민, 재미 방송인협회 고문, 가주예술인연합회 회장 역임
원로 아나운서 위진록.
  미국 LA에 사는 《월간조선》 독자 김혜택 선생이 자신이 사부(師父)로 모신다는 분의 자서전을 보내왔다. 480쪽에 달하는 두께의 《고향이 어디십니까?》(2013년 모노폴리 刊)를 펼치자마자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책의 부제(副題)는 ‘KBS 원로 아나운서 위진록의 고백적 기록’이었다.
 
  책을 다 읽은 뒤 위진록 선생과 이메일 서신을 여러 차례 주고받았다. 위 선생은 “아무래도 이번 일이 제 생애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벤트(?)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위진록(韋辰祿·94). 1928년 황해도 재령에서 가난한 지방관리의 2남 9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개성, 평북 선천 등을 전전했다. 1940년 평양사범에 입학했으나 학교 기숙사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적발돼 3학년 때 중퇴하고 만다.
 
 
  서울역 驛夫에서 국영방송 아나운서로
 
젊은 시절의 위진록. 일본 유엔군총사령부 방송을 할 때의 모습이다.
  회사 잡역부 등을 거쳐 서울역 역부(驛夫)로 일하며 광복을 맞았다. 독학으로 한글을 깨친 뒤 1947년 KBS 제1회 방송극 연구생 모집에 합격했다. 라디오 드라마에 출연했으며 연속 아동극 〈똘똘이의 모험〉의 아저씨 역으로 발탁되어 ‘똘똘이(구민)’와 함께 우리나라 아동극의 한 장을 펼쳤다. 같은 해 9월 KBS 아나운서 모집에 합격, 만 19세 국영방송 아나운서라는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평양사범 중퇴를 졸업으로 속여 KBS에 입사해 일생 동안 마음의 상처로 남았다. 1948년 KBS 제1회 방송극 현상 모집 당선, 1950년 6·25전쟁 발발 1보 방송, 9·28 서울 수복 1보 방송의 기록을 남겼다. 한 달 예정으로 일본 도쿄의 유엔군총사령부방송(VUNC)에 파견되었으나 22년을 도쿄와 오키나와에서 근무하다가 1972년 미국으로 이민했다. 현재 LA에 살고 있다.
 
  다음은 위 선생과의 문답이다.
 
  ― 제일 궁금한 것은 요즘 근황입니다. 그리고 건강은 어떠신지요.
 
  “만 94세, 94세 치고는 주위 사람들이 놀랄 만큼 건강한 편이고 잘 늙어가고 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약 5000보를 40분 정도의 속도로 걷습니다. 과거 50년 동안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계속하고 있습니다.
 
  자서전에 고백한 것처럼 15세 때 담배를 피우다 퇴학당하고 44세 때까지 체인 스모커였으나 미국 이민 오는 비행기 안에서 끊고 지금까지 궐련에 손대 본 일이 없습니다. 건강의 일등공신은 금연인 것 같습니다.”
 
 
  매일 5000보씩 걸어
 
위진록 선생이 쓴 자서전 《고향이 어디십니까?》(2013). 한 방송인의 생애와 한국 현대사의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 운전은 하시나요.
 
  “약 2년 전에 운전면허를 반환했고 또 COVID-19 팬데믹 탓으로 외부와의 접촉은 거의 없습니다. 유일한 취미는 독서와 클래식 음악을 듣는 것입니다. 독서는 성경에 관한 책과 주로 인간관계의 갈등을 묘사한 세계명작소설이나 예전에 읽었던 작품을 되풀이 읽으면서 새로운 감동을 느낍니다.
 
  주위의 젊은 친구들이 농담조로 ‘선생님, 이번에는 연애소설 한번 쓰세요’라고 권할 때마다 유혹을 느끼곤 합니다. 앞으로 94세 노(老) 작가의 연애소설이 한국에서 출판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걸기대!!”
 
  ― 요즘 식사는 어떻게 하시나요? 한국 음식이 그리울 때 어떻게 하시나요? 예를 들어 청국장이나 생선, 열무김치, 깻잎장아찌 같은 고향 음식이 먹고 싶을 때는.
 
  “나이에 비해 식성이 좋아서 뭐든지 잘 먹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20여 년 살았고, 일본에서 22년, 미국에서 50년 살았기에, 햄버거나 프렌치프라이는 지금도 자주 먹는 편이며 사시미나 스시 등 일본 음식은 자랑은 아닌데 ‘~통(通)’ 소리를 들을 만큼 아는 것이 많습니다. 한국 음식은 이곳 LA 주위에 각종 한국 음식점이 있으나 역시 집에서 동반자가 정성껏 만들어주는 한국 음식이 제일이지요.
 
  고향이 이북이다 보니 냉면, 만두 등을 좋아해서 집에서 가끔 만들어 먹습니다. 평상시에 술은 마시지 않습니다. 특별한 날, 가족모임이나 손님이 찾아왔을 때 포도주나 청주를 몇 잔 정도 마시는 게 다입니다.”
 

  ― 요즘 한국과 관련한 뉴스를 자주 접하시나요? 한국은 대선을 통해 우파 정부가 탄생했습니다. 대선 결과에 대한 미국 교민들의 반응은 어떤지 궁금합니다.
 
  “대선 결과 우파 정부가 탄생되어 개인적으론 적이 안심되고 여기 동포들도 새 정부 탄생을 환영하는 분위기입니다.
 
  나는 2020년 3월, 서울에서 문재인 정권의 북한 정책을 고발하는 내용의 책을 발간한 일이 있습니다. COVID-19 팬데믹이 바야흐로 시작된 때, 혹독한 눈보라가 들이닥치던 때, 아흔이 넘는 내가 직접 미국에서 서울로 날아가 ‘문재인의 종북 정책을 고발한다!’라는 커다란 광고판을 목에 걸고 시청 앞, 광화문, 덕수궁 앞 등, 거리거리에 서서 길가는 사람들에게 책을 나누어 준 일이 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로부터 비난과 욕설을 들으면서…. 그러나 나를 반겨주는 시민들도 있었어요. 당시 4월 총선을 앞둔 때였고 결과적으로 보수 진영의 패배로 돌아갔었죠. 그때를 회상하며 이번 대선 결과를 마음속으로 축하하였지요.”
 
 
  정부수립기념식전 중계방송
 
  ― 한국 사회가 이전에도 그랬지만 이념으로 갈라지는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해방 직후 상황과 비교할 때 달라진 게 없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해방 3년 후에 일어난 ‘여수·순천 반란 사건’에 관한 기억을 더듬어보기로 하겠습니다. 당시 KBS에서는 ‘여순 반란 사건’이라고 호칭하였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대한민국이 같은 해 유엔 감시하에 실시된 남한만의 자유선거에 의해 제헌국회가 성립되고 대통령이 선출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당시 신참 아나운서였으나 선거 상황을 중계방송했었죠. 나는 정부 수립 식전(式典)도 중계방송한 멤버의 한 사람이었어요.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이 선거 및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반대한 무리는 스탈린 공산정권과 그 사주를 받은 김일성 일당이었고 여순 지역에 둥지를 튼 남로당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단지 2개월 후의 일입니다.
 
  지금 기억하기로 이 사건에서 희생된 사람의 수는, 정확하진 않지만 최대 100명대의 숫자를 넘지 않았어요. 그러나 현재 우리가 접하는 숫자는 엄청나게 달라요. 70여 년 사이에 여순 사건의 규모가 확대된 것은 왜일까요?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KBS 아나운서들은 여순 사건을 일으킨 사람들을 ‘공산 반도(叛徒)’라고 호칭하였습니다. 생각건대 그 전통을 이어받은 혹은 이어받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아직 음으로 양으로 일반 시민을 선동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들 사이에서 소아병적(小兒病的)이라고 불리는 그들은 화합이 아니라 항상 분열을 일삼고 있어요. 북한 김정은, 김여정을 따르며 무조건 동조하는 좌파 선동가가 사라진다면 한국 사회의 분열사태도 해결되지 않을까요?
 
  미국에도 북한의 김씨 일가를 무조건 받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그렇게 북한이 좋으면 가족을 데리고 북한에 가서 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 그러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KBS, 매너리즘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느낌”
 
  ― KBS에 대한 국민적 사랑이 예전만 못 한 것이 사실입니다. 덕담을 부탁드립니다.
 
  “일제 시대에 태어나서 일본 교육을 받고 어린 시절에 일본 사람과 한 직장에서 일도 하였고 6·25 후에는 일본 도쿄에 있는 ‘유엔군총사령부방송(VUNC)’에서 22년을 근무하였습니다. 통틀어 39년을 일본 문화권에서 산 셈입니다. 그래서 방송도 NHK와 KBS를 자주 비교할 때가 있어요.
 
  한마디로 NHK는 항상 새롭고, KBS는 보도나 연예 면 등에서 매너리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출연자들의 패션, 화장, 장면 장면을 구성하는 세트, 소도구 제작이 너무 무신경하고 프로그램의 종류와 범위가 협소하다는 생각이에요.
 
  방송을 포함한 일반 예술에서는 대중의 기호에 아부하는 대신 대중의 기호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것, 제작자의 뜻에 따르도록 시청자를 계몽하는 식의 적극성이 필요합니다. 한마디로 국민으로부터 받아내는 시청료가 시청자에게 값어치 있게 돌아가지 않는 느낌이에요. 아나운서들의 몸짓, 표정, 음성 등에서 좀 더 친근감, 겸손함이 엿보였으면 합니다. 방송하는 사람이 그렇게 특별한 사람은 아니니까요.
 
  방송은 어디까지나 시청자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시청자를 위해 봉사한다는 생각을 잊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거리 벽보 읽으며 발성 연습
 
KBS 서울중앙방송국 성우들 모습이다. 사진=다음 카페 ‘춘하추동방송’ 이미지
  ― 아나운서 시절, 자신만의 발성 훈련법이 궁금합니다. 북한 사투리를 극복하고 정확한 표준 모국어를 구사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셨고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는지 알려주세요.
 
  “아나운서가 되기 전에 성우로 방송극에 투신하였습니다. 아직 TV가 없었을 때니까 라디오 드라마에 출연하기 시작했죠. 그때 내가 최초로 출연한 것은 당시 가장 청취율이 높았던 아동 연속극 〈똘똘이의 모험〉이었습니다. 이 드라마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똘똘이와 동네 아저씨가 서로의 우정과 사랑으로 주위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해결해나가는 동화 같은 드라마였죠. 지금도 80대는 기억하는 분이 계시겠지만, 당시 열아홉인 내가 ‘아저씨’, 초등생인, 이후에 성우로 한 시대에 획을 그은 구민(具珉)씨가 ‘똘똘이’ 역이었습니다.
 
  이렇게 아나운서가 되기 전에 잠깐이나마 성우로 일한 경험이 있어서 후일에 우리나라 최초의 연속 방송극 〈청실홍실〉에서 장민호(張民豪)씨와 함께 삼각관계의 주인공을 맡아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한국에서 처음으로 아나운서와 성우를 겸할 수 있는 방송인이 되었다고 할까요? 가끔 혼자 회심의 미소를 짓곤 합니다. 성우란 목소리만으로 드라마를 연기해야 하기에 다양한 발성법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배우기 시작한 것이 러시아의 무대 연출가이며 연극 이론가였던 스타니슬랍스키(Konstantin Stanislavski)가 고안한 호흡 조절에 의한 발성법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면 1945년 8·15 해방은 내게 기쁨과 동시에 걱정 근심으로 다가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말, 우리 한글 문장에 익숙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어요. 그래서 해방 후 종로 화신백화점에서 시작하여 탑골공원에 이르는 건물에 나붙었던 벽보를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면서 소리 내어 읽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사투리가 자연스레 사라졌습니다.”
 
 
  “가장 힘들었던 방송은 김구 하관식 중계”
 
방송계의 전설로 불리는 민재호 아나운서. 사진=다음 카페 ‘춘하추동방송’ 이미지
  ― 서울중앙방송국 아나운서 시절, 기억에 남는, 애착이 가는 방송 프로그램이 있었다면 말씀해주세요.
 
  “시 낭송 〈꽃다발〉 프로가 일주일에 한 번 저녁 시간에 방송되었습니다. 주제음악은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제6번 비창의 제1악장 제2 주제, 저 아름다운 안단테, 이 음악이 나를 충동하는 바람에 방송계에 투신하게 되었지만, 우리나라는 물론 해외의 서정시를 당시의 유명한 남녀 배우들이, 어느 편인가 하면 영탄조(詠歎調)로 낭송하는 것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해방 후 오랫동안 계속 방송된 아나운서 대선배이신 민재호(閔宰鎬)씨의 〈민주주의 해설〉을 청취하는 사람도 많았고, 개인적으론 알렉상드르 뒤마 원작인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김내성(金來成·1909~1957년)씨가 번안한 연속 방송극 〈진주탑〉이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주제 음악인 시벨리우스 작곡 교향시 ‘핀란디아’와 겹쳐 신극 출신 무대배우 이백수(李白水)씨의 차분하면서도 어딘가 저력을 느낄 수 있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위진록은 ▲김구 선생의 장례식 중계 ▲6·25 발발 제1보 “6·25! 임시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9·28 서울 수복 제1보 “여기는 서울중앙방송국입니다”를 직접 육성으로 방송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백범 김구(金九· 1876~1949년) 선생이 암살당한 때는 1946년 6월 26일이었어요. KBS 전신인 서울중앙방송국은 7월 5일 3개의 중계반을 동원해 국민장(葬)을 보도할 계획이었고, 효창공원에서의 하관식 중계는 내가 맡게 됐지요.
 
  며칠 동안 김구 선생의 전기를 읽고 생전에 그분과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을 찾아가 자료를 수집하고 장의사를 찾아가 하관식의 절차, 의식의 내력 등을 배웠습니다. 수집한 자료를 촘촘히 기록해 현장에 가지고 갔죠.
 
  장례식 중계 당일 방송 개시를 알리는 ‘큐’ 사인이 떨어지는 순간, 방송국장이 뛰어와 내가 들고 있는 원고 뭉치를 낚아챘어요. 그러곤 원고 뭉치를 북북 찢어버리는 거예요.
 
  장례식을 너무 슬프게 진행해 흥분한 민중이 들고일어날까 두려워한 정부 당국의 지시임을 알 수 있었죠. 순간 당황했지만 그동안 준비하면서 머릿속에 입력해둔 자료를 침착하게 생각하며 김구 선생의 상여가 미리 파놓은 묘혈 앞에 도착할 때까지 실황을 중계했어요. 돌이켜보면 김구 선생 하관식 중계가 방송 인생 중 가장 힘든 방송이었죠.
 
  나는 관 위에 떨어지는 흙덩이 소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마이크를 관 가까이에 바싹 들이댔어요.
 
  ‘뚜당땅!’
 
  관 뚜껑을 두드리는 흙덩이 소리를 청취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생생히 들려주고 싶었어요.”
 
 
  6·25 발발 방송
 
  선생이 전하는 1960년 6·25 발발 보도도 극적이다.
 
  “숙직이어서 후배 아나운서와 밤 11시경에 방송을 끝내고 숙직실로 쓰고 있던 제2스튜디오로 갔어요. 국악방송을 하는 다다미 20장 정도가 깔린 스튜디오였지요. 이튿날 새벽 5시10분쯤 스튜디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눈을 떴는데 박 대위라는 육군 군인이 서 있었습니다. 그는 마치 명령하듯 종이 한 장을 내밀며 이것을 즉시 방송하라고 말했어요.
 
  〈오늘 새벽 북한 공산군이 38선 전역에 걸쳐 공격을 시작했다. 국군은 모두 원대에 복귀하라.〉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두근거리기 시작했어요. 나는 ‘아침 방송이 6시30분부터 시작하기에 지금 방송해도 들을 사람이 없을 것이고 이런 중요한 내용을 상부 허락 없이 마음대로 방송할 수 없다’고 거절했지요.
 
  곧바로 방송국장 대리인 민재호씨에게 연락을 취했고 그는 국방부 정훈국장과 연락한 후 방송국으로 달려와 나에게 ‘원고를 작성하여 곧 방송하라’고 지시했어요. 그때가 오전 7시가 채 안 됐을 때로 기억합니다.
 
  ‘임시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임시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새벽 북한 공산군은 38선 전역에 걸쳐서 전면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안심하십시오. 우리 국군이 건재합니다. 거듭 말씀드리겠습니다….’”
 
 
  9·28 서울 수복 방송
 
1950년 9·28 서울 수복 방송을 했던 연희송신소 모습이다. 사진=다음 카페 ‘춘하추동방송’ 이미지
  서울이 인민군에 의해 장악됐을 때 위진록은 경기도 문산에 있던 배우 최무룡의 집으로 피신을 했다. 또 임진강 변 고랑포(경기 연천군 장남면에 있던 옛 나루터)의 한 소작인 집에서 한동안 숨어 지냈다.
 
  그러다 국군과 유엔군 병사들이 북쪽으로 행진하는 모습을 보고 방송국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방송국은 완전히 폭파되어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몇몇 기술자와 함께 당인리(지금의 서울 마포구 당인동) 연희송신소로 향했다. 다행히 송신소는 완전히 살아 있었다. 송신소 기술자와 방송국 중계 직원들이 협력해 부랴부랴 임시방송실을 마련했다. 그러고 수복의 제 일성(一聲)을 방송했다.
 
  “여기는 서울중앙방송국입니다. 여기는 서울중앙방송국입니다.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그리고 서울시민 여러분, 오늘 새벽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은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완전히 탈환하고 패주하는 공산군을 추격하여 북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자유를 되찾았습니다. (하략)”
 
  ― 당시를 회상하면 어떤 장면이 잊히지 않습니까.
 
  “6·25 발발 첫 방송은 사실 원고를 쓰고 방송했지만 나 자신도 민족상잔의 큰 비극을 알리는 방송이 될 줄은 몰랐어요. 그러나 9·28 서울 수복을 알리는 방송은 달랐어요. 연희송신소에 설치한 임시 스튜디오에서 서울시민에게 부르짖듯이 방송한 기억을 잊을 수 없습니다.
 
  지난 2017년 한 다큐 팀과 당시 9월 28일, (내가) 여름 홑바지 바람으로 달려간 길을 더듬어 간 일이 있습니다. 안암동에서 종로, 광화문을 지나 완전 폭파된 정동방송국을 둘러보고 서대문을 거쳐 신촌에서 당인리까지 어떻게 달려갔을까 하고 감개무량하였습니다.
 
  얼마 전에 미국에서 어떤 여성이 6·25 체험담을 기록한 책에 ‘6·25가 일어나던 날 아침, 공산군 남침을 알리는 아나운서의 어조가 꼭 이승만 박사의 어조와 같더라’고 쓴 것을 읽으면서 실소를 금할 수 없었어요. 앞으로 50년이 지나면 멍멍 개 짖는 소리 같았다고 쓰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하고 서글퍼지네요.”
 
 
  인민군 돕던 선배 아나운서들 자취 감춰
 
1952년 11월 2일 이익홍 서울시장(콧수염) 주례로 위진록은 동료 아나운서 최창숙과 결혼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던 시절에 행방불명 혹은 처형당한 것으로 알려진 그의 선배 아나운서 소식은 서울 수복 이후에도 여전히 알 수 없었다고 한다. 또 평양에서 온 방송요원을 열성적으로 도운 아나운서들은 인민군이 패주하면서 그들과 함께 북쪽으로 갔거나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이런 날이 반드시 돌아오리라고 굳게 믿으며 필사적으로 숨어 다닌 내가 이후 할 일이 많았어요. 한동안 연희송신소에 기거하면서 방송했죠.”
 
  ― 서울중앙방송국 시절, 함께 땀을 흘렸던 방송인 중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누구인가요.
 
  “학력이 없어 아나운서 시험을 칠 자격이 없던 내게 은연중 응시를 권하신 민재호 대선배님을 잊을 수 없습니다. 1947년 당시 문자 그대로 과도기였기에 그런 일이 가능하였고 3명 채용에 120명이 응시한 지망자 중 열아홉에 불과했으나 최고점으로 합격되었으니 70여 년 전 나도 만만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열아홉에 한 나라 중앙방송국 아나운서가 되었다는 것, 기네스북 감이지요.”
 
  ― KBS 아나운서나 방송 관계자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많이 가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미국에 계시는 방송인의 근황이랄까 소식이 궁금합니다.
 
  “홍양보(洪陽寶) 아나운서는 일본 VUNC에서도 같이 일했던 선배님인데 3~4년 전에 미국에서 100세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어요. 옛날 〈똘똘이의 모험〉에 출연한 구민씨는 수년 전 한 번 만났으나 소식 두절 상태입니다. 우리 집 가까이에 살면서 자주 만나던 성우 주상현(周尙鉉)씨는 작년에 세상을 떠났고요.”
 
 
  “북한 전부가 제 고향”
 
지난 2010년 평양사범 동창들과. 오른쪽에서 세 번째(앉은이)가 위진록 선생이다.
  ― 인생에서 가장 자부심을 느낀 선택은.
 
  “평양사범에 입학하였던 일. 아시는 바와 같이 3학년 때 담배를 피우다 들켜 퇴학당했지만 그 3년 동안에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을 배웠습니다. 평양사범은 나를 추방하였으나 모교이자 사춘기의 잊을 수 없는 배움의 마당이었습니다.
 
  KBS 아나운서가 되었기 때문에 6·25동란 때 고국을 떠나 지금까지 70여 년간 해외 생활이 이어지고 있고, 이역만리에서 생을 마치게 될 것 같지만, 그러나 따지고 보면 해외에서 살게 된 것은 아나운서가 된 탓이 아니라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전쟁 때문이었다고 해야겠지요.”
 
  ― 살아오시며 자신의 성장에 영향을 미친 인물은 누구입니까? 롤 모델이 있었습니까.
 
  “어려서부터 가난하게 살며 슬픔과 외로움을 벗 삼아 살아왔고 학력도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외로운 늑대처럼 스스로를 믿으며 살아왔습니다. 따라서 롤 모델 같은 건 없습니다. 다만 철이 들기 시작한 14~15세 때에 알게 된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고난 많았던 세월에 큰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 선생님의 책 제목처럼 누가 ‘고향이 어디십니까’라고 물으면 보통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어떨 때 고향이 가장 그리운가요.
 
  “‘고향이 어디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좀 구차스럽지만 ‘태어난 곳은 재령이지만 북한의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살았으니 북한 전부가 제 고향’이라 답합니다. 세상 떠난 부모님과 식구들을 생각할 때 고향이 가장 그립습니다.”
 
 
  “전력투구하며 살아왔다”
 
1990년 북한 남(南)신의주 형님 가족들과. 치마저고리를 입은 분이 형수님이다.
  ― 과거의 어느 한 시점으로 돌아가 고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어느 때로 돌아가 어떻게 고치고 싶습니까.
 
  “생각해보면 어느 때를 되돌아보아도 전력투구하며 열심히 살아왔기 때문에 그런 생각해본 일은 없습니다. 한 가지, 미국에 이민 와서 바닷가의 낡아빠진 햄버거 가게를 속아서 사게 된 탓으로 가족에게 무척 고생을 시킨 일이 있습니다. 그때 무언가를 결정할 때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 북한에 사는 형제의 근황은 어떤가요? 아울러 세 자녀를 훌륭히 키우셨는데 근황이 궁금합니다.
 
  “북한에는 6·25 때 인민군 장교로 남파되어 전사한 형님의 가족이 신의주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내가 30년 전, 북한으로 찾아가서 한 번 만났는데 이후 소식이 끊겨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들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장남은 예일대와 하버드 법대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변호사 일을 하다가 적성에 맞지 않는다며 초등학교 선생을 30년 가까이하고 있습니다. 딸은 하버드대학을 거쳐 UC버클리 법대를 졸업하고 뉴욕에서 유능한 여류 변호사 소리를 듣고 있었으나 결혼 후에는 자녀교육이 더 중요하다며 가정주부가 되었어요. 막내아들은 UC샌디에이고와 대학원에서 공중위생학을 전공하고 미국의 의료기관인 카이저 퍼머넌트(Kaiser Permanente)에서 오랫동안 근무하고 있습니다.”
 
  ― 거창한 질문일 수 있지만 사랑은 무엇입니까. 사랑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고향이 어디십니까?》를 관통하는 큰 그림은 ‘사랑’인 것 같아서요.
 
  “사랑의 본질은 역시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할 때 서로 기쁘게 주고받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요?
 
  지금 생각하면 그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 모두가 그립습니다. 그들에게 베푼 사랑보다 내가 받은 사랑이 더 컸구나 하고 스스로의 죄의 용서를 비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 살아오시며 잊히지 않는 인물, 꼭 만나고 싶으신 분이 계신가요? 소식이 궁금한 분들이 있으신가요.
 
  “사는 동안 잊히지 않는 분이 여럿 있으나 《월간조선》 독자들이 알 만한 인물들이 아닌 것 같아 생략하겠습니다. 그리고 만나보고 싶은 사람은 어머니입니다. 70년 동안 해외에 살면서 돌아가실 때까지 제대로 자식 구실을 해드리지 못한, 한평생 고생만 하시다 돌아가신 어머님이 가슴 저리도록 보고 싶습니다.”
 
 
  “책에서 책으로 이어지는 인연”
 
위진록 선생은 한국에서 20여 년, 일본에서 22년, 미국에서 50년을 살았다.
  ― 한국인으로 태어나신 것이 가장 자랑스러울 때가 언제인가요. 부끄러울 때는 질문드리지 않겠습니다.
 
  “해방 후에 금수강산, 백의민족, 단일민족 하면서 가슴 뿌듯하게 자랑하던 마음이 차차 사라진 상태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위에 가난하면서도 열심히 정직하게 살아온 한국인과 만나 대화를 나눌 때 자랑스럽습니다.”
 
  ― 《월간조선》 독자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해주세요.
 
  “《월간조선》을 구독하시는 여러분 반갑습니다. 생각해보면 희한한 일입니다. 우연한 기회에 거의 10년 전에 발행된, 미국에 사는 한 노인의 자서전을 읽게 된 《월간조선》 기자가 있었고, 자서전 《고향이 어디십니까?》를 읽으면서 느낀 기자의 생각이 있었고, 그 생각이 여러분께서 읽으신 글로 활자화된 것입니다.
 
  책에서 책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인연이 여러분과 저 사이에 맺어졌다는 이 사실이 얼마나 희한합니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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