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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Q의 시 읽기 〈50〉 이문길·김세환·김기덕·권영옥의 新作

이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들길 산길 막힌 곳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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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과 연륜의 깊이를 느끼게 만드는 신작 《헛간》과 《바람꽃》
⊙ T.S. 엘리엇의 《황무지》 이후 지상(紙上) 최대의 말잔치… 《빅뱅과 에덴》
노(老)시인의 시는 삶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 그들의 신간 시집은 너무 진지해 압도되고 만다.
  시인은 여전히 시를 쓰고 있다. 연륜은 시를 깊고 풍성하게 만든다. 읽고 다시 꺼내 또 읽게 만든다. 시가 너무 진지해 압도되고 만다.
 
  이문길(李文吉) 시인의 시집 《헛간》(북랜드 刊)이 나왔다. 1939년생이니 올해 여든셋. 꼭 1년 전 그를 만났는데 올해는 새 시집으로 다시 조우했다.(참조 《월간조선》 2020년 6월호 〈여든둘 감동 시인 이문길〉)
 

  시집은 아무 장식이 없다. 흰 바탕에 제목과 시인의 이름이 전부다. 저자의 사진, 약력도 없다. 누구에게 시집을 소개할 마음이 없어 보인다. 그저 삶 그 자체를 시로 표현할 뿐이다.
 
  시집은 전체 4부로 구성돼 있다. 1부에 실린 시들은 기자가 1년 전 시작노트에서 읽었다. 다시 읽어보았다.
 
이문길 시인.
  산 뒤에 산이 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이승 끝나면
  저승이듯
 
  산 뒤에 산이 있고
  그 산 넘어 다시 산이 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이문길 ‘말 없는 산’ 일부

 
  이별한 아내를 산에 묻었다. 아내 무덤을 보기 위해 산을 넘었다. 돌아오는 길에 다시 산을 넘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가도 슬프고 / 와도 슬픈 산길’
 
  시 ‘봄’도 울림이 크다. 밤사이 산에 눈이 왔는데 집 마당에는 비가 왔다. 산과 집 사이에 커다란 벽이 있는 듯하다. 이승과 저승처럼. 시인은 커튼을 걷고 하얗게 눈 내린 산을 바라본다. 마치 아내를 바라보는 듯하다.
 
  밤사이
  산에는 눈이 오고
 
  우리 집 마당에는
  비가 왔다
 
  커튼을 걷고 내다본다
  하얗게 눈 내린 산
 
  -이문길 ‘봄’ 전문

 
 
  시를 통해 삶의 정수를 보다, 이문길 《헛간》과 김세환 《바람꽃》
 
이문길 시인의 신작 《헛간》.
  시집 《헛간》은 죽음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삶의 고갱이가 보인다. 노(老)시인에게 전화를 하니 “마지막 시집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더 쓰셔야 한다”고 권했다. 그래서 더 울림이 크다.
 
  시 ‘길’을 읽다 보면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적막이 느껴진다.
 
  길 끝나는 곳에
  바다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더 못 간다
  지난 일 잊어버리라고
  보채는 물결이 있고
 
  마음대로 바람이 오고 가는
  길 없는 곳
  바다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이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들길 막힌 곳
  산길 막힌 곳
 
  -이문길 ‘길’ 전문

 
김세환 시조시인.
  시조시인 김세환(金世煥·75)이 일곱 번째 시조집 《바람꽃》(학이사 刊)을 펴냈다. 시인은 오랫동안 천식을 앓아왔다. “날이 갈수록 병은 깊어지고 온갖 약을 다 써도” 차도가 없었다.
 
  매일 기침으로 힘든 불면의 밤을 지내며 시조를 써왔다. 시인은 “작품 한 편 한 편이 삶의 간절한 기도와 같다”고 말한다.
 
  지쳐 내친 내 명줄
  조였다 풀었다 해도
  미움의 맨살 비비면
  속정이 돋나 보다.
  남은 날
  순종 배우며 함께 지낼 동반자.
 
  -김세환 ‘동반자’ 전문

 
  시인은 지금도 가슴을 찢는 듯한 기침으로 고통의 밤을 보낸다. 그러나 함께 같이 가야 할 병이어서 시인은 순종을 배운다. 어느 날 시인은 깨닫게 됐다. 잠들 수 없게 만든 천식이 ‘부끄러움 돌아보라는 소중한 하늘의 뜻’이라는 사실을.
 
  시인은 “얼마 남지 않은 남은 시간을 알뜰하고 후회 없는 보람찬 시간을 보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거친 숨 달래가며 밤을 밝히는 건
  부끄러움 돌아보라는 소중한 하늘의 뜻
 
  남은 날
  별빛에 피는
  들꽃처럼 살리라.
 
  -김세환 ‘남은 날’ 2연

 
김세환 시인의 신작 《바람꽃》.
  시인에게 시조는 그의 삶의 전부다. 시조와 더불어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가끔 자신의 처지를 모르는 욕심이 솟아나 좌절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골 깊은 슬픔 죄다 태울 순종의 젖은 꽃잎’이기에 제 욕심의 꽃대를 꺾어야만 했다.
 
  아직 남은 달빛으로
  바람 비켜서서
 
  며칠째 뼈를 깎아
  불면의 불 밝히고
 
  골 깊은 슬픔 죄다 태울 순종의 젖은 꽃잎.
 
  고독한 담금질에
  이젠 피멍이 들어
 
  모두 떠안고서도
  언제나 잔잔한 속
 
  도도한 붉은 속울음 제 꽃대를 뚝 꺾다.
 
  -김세환 ‘작은 슬픔에게’ 전문

 
 
  《빅뱅과 에덴》, 紙上 최대의 말잔치
 
김기덕 시인.
  시집이 전체 576쪽이다. 크게 4장으로 이뤄진, 1번에서 1004번까지 이어진 시편들. 시집에는 문장 마침표가 없다. 마침표가 없다는 것은 종결이 없다는 의미다. 네버엔딩 스토리. 종결을 향해 끝도 없이 나아가는 기도의 언어, 고백만 있을 뿐이다.
 
  김기덕(金起德·58) 시인의 신작 《빅뱅과 에덴》(문학공원 刊)이 출간됐다. 마치 창세기의 첫 장 같은 느낌을 주는데 실제로 성경처럼 편집 제본됐다. ‘~했네’ ‘~하였어’라는 고백체 서사적 단문이 읽는 이의 눈에 쏙쏙 박힌다.
 
  이 시에는 수많은 이미지, 시인이 경험한 다양한 사건(에피소드)이 등장하지만 모두 ‘영혼의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동원됐을 뿐이다.
 
  영혼의 세계란 ‘강 건너, 누드의 조각달이 허리 굽혀 기도해야 갈 수 있는 곳’이다. 나룻배를 타지 않고선 건널 수 없는 세상이다.
 
  강을 건너기 위해 배를 타야 하는데 ‘사공이 없는 배’를 타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기계와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하는 사회를 일컫는다. 시인은 말한다.
 
  ‘사물을 믿고 여행하다 잘못되면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불안의 시대에 진정한 선장이 필요하지’(225쪽)
 
  ‘진정한 선장’은 누구일까. 시인은 답을 정하지는 않는다. ‘우주의 끝은 어디일까 어쩜 우주의 끝은 우리들 상상력의 끝이 아닐까’ 하고 정답의 문을 열어놓았다. ‘우주도 하나님도 내가 만들고 있어. 상상력 속에서 탄생하고 존재해’라고 말한다.
 
  ‘우주는 눈으로 보는 게 아니고 상상으로 보는 거야’(371쪽)
 
김기덕 시인의 신작 《빅뱅과 에덴》.
  시인의 눈에 비친, 상상력 속의 인간은 어떤 모습일까. 385쪽의 일화(逸話)를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시인은 요로결석으로 응급실에 실려 간 적이 있다. 그곳에서 수많은 원숭이를 보게 된다. 술 먹고 실려 온 원숭이, 간호사에게 고래고래 욕하는 원숭이, 친구와 술 마시다 싸워서 피를 흘리는 원숭이, 길 가다 정신 잃고 주저앉았다며 히죽거리는 원숭이 등으로 가득했다. 시인이 내린 결론은 이랬다. ‘원숭이들은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진화가 덜 된 원숭이들이 사람들 무리에 섞여 살면서 진화하고 있어. 인간세계엔 진화하지 못한 원숭이가 있고 좀 더 진화한 인간이 있고 새롭게 거듭난 천사가 있어’(385쪽)
 
  시인의 상상력은 ‘진화하는 원숭이’를 넘어 구원(救援)의 문제로 넘어간다. ‘구원’은 십자가와 만나는 일에서 시작해야 하고, 모든 사물 속에 숨겨진 상징을 발견하는 일이 신을 만나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성경의 두께처럼 두툼한 시집 《빅뱅과 에덴》은 결코 하루아침에 쓰이지 않았다. 오랜 시간 동안 쌓아 올린 경험과 사색 위에 언어와 문장을 입혀 완성되었다. 어쩌면 1908년 11월 발표된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 이후 이런 시집은 처음일지 모른다. 이런 묵직한 무게의 시와 시집은 처음일지 모른다. 그런 만큼 이 시집은 그 자체로 오래 기억해야 마땅하다.
 
  이 시집을 읽은 평론가 김순진은 이렇게 의미를 부여했다.
 
  “T.S. 엘리엇의 《황무지》 이후 지상(紙上) 최대의 말잔치가 시작된다. 김동환의 《국경의 밤》과 문덕수의 《우체부》의 맥을 잇는 쾌거라 할 수 있다. 이제 우리나라에도 공자의 《시경(詩經)》,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론(詩論)》에 견줄 책이 생겼다.”
 
 
  고통의 다양한 지층, 《모르는 영역》
 
권영옥 시인.
  시인 권영옥의 신작 시집 《모르는 영역》(현대시학사 刊)은 풍성한 시적 이미지로 가득하다. 시를 읽으며 머릿속이 상상력으로 따스해진다. ‘고통의 다양한 지층에 대한 탐구’(오민석 단국대 교수)여서 더 시집에 손길이 간다. 독자도 시인을 따라 한 계단 한 계단 ‘상처받기 쉬운’ 생을 더듬어본다. 그리고 살아 있음을 깨닫는다.
 
  냉동의 시간을 견뎠던 나는 줄기에도 층계가 생겼다 바람의 무늬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새벽 굴착기에 들이 받쳐 뇌적층이 쿵 떨어진다 그 속에 들어있던 삼엽충이 나동그라지고 빙하기의 끝줄을 잡은 혈관에서도 벌레가 실눈을 뜬다
 
  굴착기 소리는 점점 커진다 내 몸에 모르는 검은 무늬들이 소용돌이친다 예전의 나와 지금 나도 내가 아니다 (하략)
 
  -권영옥 ‘고생대 고사리’ 일부

 
  시인이 그리는 ‘고통의 지층학’은 은유와 비유가 가득한데 이미지가 익숙하지 않고 생생하며 살아 있다. 예컨대 ‘산다는 건 빈 둥지를 잡고 강풍을 견디는 것’이라고 표현하거나 ‘늦가을 미루나무에 걸린 구름을 둘둘 말아서 / 뼈 깊이 고독을 우려내는 자’를 고독의 모양이라 규정한다.
 

  산다는 건 빈 둥지를 잡고 강풍을 견디는 것
  고독이 바닥에 스며들 때까지
  마음은 강준치가 되어 물바위에 머리를 치면서
  동거
 
  뱀잡이수리가 발밑에서 잠입하는 독사를 내려찍어
  제 둥지를 지켜내듯
  늦가을 미루나무에 걸린 구름을 둘둘 말아서
  뼈 깊이 고독을 우려내는 자는
  제 주변을 잘 지켜내는 것
 
  -권영옥 ‘고독의 모양’ 일부

 
  시집을 읽다 보니 시인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하다. 부재(不在)에 대한 슬픔이 그리움에 담겨 있다. 그러나 지금 곁에 없지만 늘 ‘그윽한 눈동자’로 가슴에 있다. 없어도 있는 듯하고, 있는 듯하지만 없다는 사실은 일종의 ‘모르는 영역’이다.
 
  산다는 일은 어쩌면 ‘모르는 영역’이 점점 더 많아지는 일이 아닐까. 어머니에 대한 그림이 커지면 ‘모르는 영역’도 더 커지는 법이다. 그래서 그리움이 더 커진다. 시인의 표현으로 ‘파도의 기포들이 바글바글 들끓’는다.
 
권영옥 시인의 신작 《모르는 영역》.
  땅을 짚어도 무중력 속인 나는 얼마나 가벼운지
  어떤 향기가 누르는 달꽃
  우리 보폭이 넓어지고 있어요
  당신에게 왔다는 것이, 달의 비늘이었다는 것이
  서로의 뺨을 비비는 일이죠
 
  이 섬에는 달맞이꽃 향기가 나요
  봄엔 집과 뜰에 이 꽃을 심어야지 생각하죠
  달을 그리워하며 눈물짓는 당신
 
  그윽한 눈동자를 가슴에만 넣고
  이제 천 년 동안 잊고 살아가야 하는데
  12월의 갈매기 눈빛도 젖어 있어요
  당신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기억하려는 찰나
  바람이 섬의 끝자락으로 데려가네요
 
  파도의 기포들이 들끓어요
  바글바글
  우리 수신호 해요 나는 기억의 향기로 날았다가
  식은 향기로 말하다가 웃다가 찡그리다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만 하고 있어요
 
  엄마 안녕!
  같이 있고자 기적을 일으키려니 달이 보고 웃네요
 
  -권영옥 ‘모르는 영역’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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