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BC 전용기 배제가 언론 탄압? 본분 다하고 할 소리”
⊙ “기본적으로 PD 저널리즘은 사기… PD가 직접 나와서 기자처럼 보도하는 건 우리나라뿐”
⊙ “노조 힘 비대해지면서 MBC 망조 들어”
⊙ “대한민국은 활보하는 고정간첩 조직과 同居하는 체제”
⊙ “北 통전부 인사, ‘南운동권 인사들 평양 모처로 데려가 학습시켰다’”
⊙ “지금 우리나라는 ‘민주화 인사들의 도떼기시장’”
金榮日
1948년생. 고려대 독어독문과 / 동아일보사(동아방송) 보도국 기자, KBS 경제부 기자, MBC 보도국 기자, 초대 동유럽 특파원 겸 주베를린 특파원, MBC 국제부장, MBC 보도국 취재담당 부국장, 보도제작국장, MBC 통일방송연구소 소장(국장), 前 강릉 MBC 사장, 불교방송(BBS) 사장
⊙ “기본적으로 PD 저널리즘은 사기… PD가 직접 나와서 기자처럼 보도하는 건 우리나라뿐”
⊙ “노조 힘 비대해지면서 MBC 망조 들어”
⊙ “대한민국은 활보하는 고정간첩 조직과 同居하는 체제”
⊙ “北 통전부 인사, ‘南운동권 인사들 평양 모처로 데려가 학습시켰다’”
⊙ “지금 우리나라는 ‘민주화 인사들의 도떼기시장’”
金榮日
1948년생. 고려대 독어독문과 / 동아일보사(동아방송) 보도국 기자, KBS 경제부 기자, MBC 보도국 기자, 초대 동유럽 특파원 겸 주베를린 특파원, MBC 국제부장, MBC 보도국 취재담당 부국장, 보도제작국장, MBC 통일방송연구소 소장(국장), 前 강릉 MBC 사장, 불교방송(BBS) 사장
- 사진=월간조선
‘바바리’를 휘날리며 나타난 원로(元老) 기자. 금자탑을 쌓던 추억을 말하다,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어디 가서 창피해서 말을 못 하겠어. 내 친정(親庭)이나 다름없는데, 너무 부끄러워. 수많은 선배들이 쌓은 빛나는 전통을 누구 마음대로, 무슨 권한으로 허무냐고. 이거 탈레반이 수천 년 문화유산을 대포로 훼손하는 짓거리하고 뭐가 달라요?”
김영일(金榮日·74) 전 강릉 MBC 사장의 기자 시절 보도는 달랐다. 살아 있었다. 구랍 11월 30일 광화문에서 만나 우리 언론의 민낯을 함께 들여다 보았다.
동아일보사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부마민주항쟁, 사북항쟁, 10·26사건, 12·12 군사반란, 5·18 민주화운동의 현장을 취재했다. 이후 KBS를 거쳐 1981년 MBC로 이직해 기자 생활의 대부분을 보냈다. 초대 베를린 특파원을 하며 동유럽 해체 한가운데 서서 변화의 소용돌이와 독일 통일 과정을 몸소 겪었다. 1983년 10월 9일, 버마(현 미얀마) 아웅산 테러 사건을 취재하다 겨우 목숨을 건지고 돌아와 1984년 8월 15일 동서 냉전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을 생생히 전했다. 1989년 11월 10일에는 동서독 간 자유 왕래의 전야를 직접 생중계했다. ‘우리는 한민족이다(Wir sind ein Volk!)’를 외치는 독일인의 육성을 그대로 전했다. 2003년에는 이라크전 취재단장으로 요르단 암만에서 전쟁 취재를 진두지휘했다. 외국 언론사들은 생명보험을 들어줬는데 당시 한국은 무보험이었다. ‘살아서만 돌아오라’는 격려 하나에 힘입어 짐을 쌌던 건, 사명감 때문이었다. 김 전 사장은 “기자가 현장에서 한 시대를 기록하고 그 시대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은 천운(天運)”이라고 했다. 그런 그가 “친정이 부끄럽다”고 했다.
“왜곡방송은 他殺행위”
― 이른바 ‘바이든’ ‘날리면’ 자막 사태, 어떻게 봤습니까.
“부끄러워서 원. 상상도 못 할 일이에요. 무슨, 청력이 강아지의 몇십 배라도 된답니까. 그게 어떻게 단박에 식별이 되냐고요. 설혹 ‘바이든’이라 했다고 하더라도, 국제사회에 먹칠하려고 환장한 거 아닙니까. 미국 FBI나 CIA가 바보예요? 거기서는 진실을 다 알고 있어요. 문화 선진국이 아무나 되냐고. 정말 창피해요.”
그는 “현장 취재에서 예습은 의미가 없다. 미리 짜 놓는다고 폭탄이 이쪽에서 더 크게 터져주지 않는다”면서 ‘있는 그대로의 보도’를 전제로 한 순발력을 강조했다.
― 최근 MBC 〈PD수첩〉의 김건희 여사 대역 논란도 있었죠.
“기본적으로 PD 저널리즘은 사기예요. PD가 직접 나와서 기자처럼 보도하는 건 우리나라밖에 없어요. 기자 위에 PD가 있는 구조예요. 물론 과거 〈PD수첩〉의 순기능도 있었지만 자극적인 프로그램으로 살림에 보탬이 안 될 때가 허다합니다. 공정성이 없는 거죠. 가령 이명박 정부 때 광우병 파동으로 재미를 봤잖아요. 한데 문재인 정부 때는 그보다 더 국민 생활, 산업 전반에 파급력이 강한 원전 폐기 정책에는 왜 꿀 먹은 벙어리였을까요.”
― 대통령실에서는 결국 동남아 순방 기간 MBC 기자의 대통령 전용기 탑승을 배제하고, MBC의 출입기자 등록 취소 등도 검토했습니다. 이거 언론 탄압 아닙니까.
“자기 본분과 책임을 다한 뒤 받은 결정이라면 탄압이 맞겠죠. 일각에서 이 같은 대응을 강경하다고 하는데, 그건 정도(正道)예요. 강경파로 몰 게 아니라고. 내가 대통령이었다면 거기서 그치지 않을 거예요.”
지난 2022년 11월 18일 출근길 문답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전용기에 MBC 탑승을 불허한 것에 “(MBC가) 아주 악의적인 행태를 보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후 MBC 기자는 윤 대통령에게 ‘무엇이 악의적이냐’고 물었고 대통령실 비서관과의 고성으로까지 이어졌다. 이날부로 대통령실 용산 이전의 상징과도 같았던 출근길 문답이 전격 중단됐다.
‘자유와 정의를 찾아’ MBC로 이직
― MBC 기자의 소동이 발단이 됐지만, 정부와 언론과의 관계 설정과도 맞물리는 문제여서 예민한 반응도 뒤따르고 있습니다.
“왜곡방송과 편파방송은 타살(他殺)행위, 살인행위입니다. 가령 〈PD수첩〉 천안함 편은 희생자들을 두 번 죽였지 않습니까? 그 피해는 엄청 크고 절대 원상 복구가 안 돼요. 공중파라는 건 국민의 거라는 겁니다. 독점이 안 되는 거라고요. 국민의 자산을 위임받아 운영하면서 언론의 가장 기본적인 윤리와 가치를 내팽개치고, 그걸 이용해서, 책임도 못 질 거면서, 왜 타살행위를 하느냐 이겁니다.”
그는 한때 누구보다 언론 탄압에 저항했던 인물이다. 고려대 재학 시절에는 민주화운동의 선봉에 섰다. 이강식 고려대언론인교우회 상임고문은 “고대 시위대의 선봉장에 마이크를 들고 피를 토하던 청년학도 김영일이 있었다”고 했다. 김 전 사장은 “반(反)독재, 반민주, 반칙, 불의에는 눈을 감지 말라는 안암골의 경책은 모교가 내 손에 쥐여준 최대의 노자(路資)였다”고 했다.
데모에 앞장서고, 학교에서 제적을 당하고, 수배당해 도망 다니고, ASP(Anti Government Student Power·반정부 학생운동) 딱지를 붙인 채 군대 생활을 했다. 졸업반. 진로 고민을 할 때 선배들은 그에게 ‘노동운동’을 하라고 권했다. 한데 집안 형편상 취업을 해야 했다.
때마침 학생처장이 동아일보사에서 기자를 뽑는다는 소식을 알려줬다. 1960~1970년대 《동아일보》는 야당성이 강한 신문이었다. 그런데 1970년대 중반 들어 정권에 탄압을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동아투위 사건’이다. 김 전 사장은 “동아일보사라니 솔깃했다”면서 “자유언론수호투쟁의 맥도 잇고 취업도 해결할 수 있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기회가 될 수 있겠다 싶었다”고 했다. 그는 방송기자를 1지망으로 써 동아방송에 입사했다.
1980년 11월 30일, 동아방송은 개국 17년 만에 문을 닫았다. 전두환 정권의 언론통폐합 때문이었다. 이후 KBS에 둥지를 튼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동아방송이 내세운 방송 목표는 ‘자유와 정의 편에 서서 어떤 독재자도 반대한다’는 거였어요. 그런데 KBS에 와서 보니, 정권 나팔수로 부역시키는 강제수용소나 진배없더군요.”
그렇게 ‘자유와 정의를 찾아’ MBC로 이직한 거였다. 1981년 7월 1일이었으니, 40여 년 전이다. 김 전 사장은 “MBC와 일부 야당 의원들이 작금의 사태를 당시 동아일보사와 동일시하려 한다”면서 “그때는 모두가 권력에 굴종하고 침묵할 때 유일하게 언론의 길을 지킨 언론사에 대해 정권이 기업을 압박해 광고를 못 주게 한 사건”이라고 했다.
‘勞營방송 MBC’
―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인 김상훈 의원이 2022년 11월 17일 MBC를 향해 “윤석열 대통령과 현 정부에 대해 악의적인 보도와 의도적인 비난으로 뉴스를 채워 왔다”며 MBC 광고기업 제품 불매운동을 언급했는데요. 이건 어떻게 봅니까.
“그건 패착이죠. 광고는 전적으로 기업이 선택하도록 둬야죠. 자유경제체제에 반하는 발언이에요. 그걸 정부·여당이 통제하려고 하면 사회주의, 독재주의입니다. 자유는 주되, 책임에 대해서는 엄격히 물어야죠. 그게 윤리국가고 법치국가인 겁니다.”
― 요즘 TV를 봅니까.
“잘 안 봅니다.”
― 뉴스를 꼭 봐야 한다면 무슨 채널을 틀겠습니까.
“김민배, 신동욱이 나오는 TV조선.”
― ‘만나면 좋은 친구’였던 MBC가 왜 이렇게 된 걸까요.
“1988년과 1992년 대규모 파업 등의 영향으로 원래 노조가 강한 분위기였던 차에 언노련 결성 핵심인 최문순 전 노조위원장이 2005년 차장급에서 사장으로 발탁되면서 노조의 위세가 몇 단계 상승했어요. 1992년에는 내가 걸프전 취재로 해외에 나가 있었는데, 그사이 노조의 힘이 비대해진 거죠. 그때부터 망조가 든 거예요. 노영(勞營)방송이 된 거죠.”
특히 문재인 정부 들어 2012년 파업 때 해직됐던 전직 노조위원장들이 연거푸 사장이 되면서 노조의 파워는 절정에 달했다.
“제아무리 임원이라고 해도 노조가 비판하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조합원에게 얹혀서 갈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됐어요. 조금 뭐 하면 노조탄압이다, 뭐다, 하니까요. 민노총에 가입해서 울타리를 쳐놨는데, 연봉 1억원 가까이 받는 노조원이 무슨 얼어 죽을 노동자입니까. 운전기사, 비정규직까지 노조 가입하는 조건으로 죄다 정규직이 된 거 아닙니까. 참담하죠.”
‘주인 없는 회사’
― 말씀대로라면 근 30년 세월 동안 노조의 횡포가 있었다는 건데, 그걸 견제할 기능이 없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MBC가 주인 없는 회사라 그렇습니다.”
MBC 경영진 임면권은 방문진 이사회가 갖는다. 여야 6대 3으로 구성돼 있다. 이사 임기는 3년이다. 이명박 정권 출범 때는 기존 임기를 보장해줬다. 그러나 문재인 정권 출범 때는 노조와 좌파단체들이 보수 성향 이사들의 집, 학교, 교회까지 쫓아다니며 압박했다. 결국 2명이 사퇴하면서 6대 3이던 비율이 4대 5가 됐다. 그렇게 기존 사장을 쫓아낼 수 있었다. 요컨대 ‘내 편’이 정권을 잡으면 노조가 쫓아내고, ‘네 편’이 되면 노조 탄압을 외치는 식이다. ‘주인 없이 노조라는 터줏대감만 판치는 조직’이라는 얘기는 그래서 나왔다.
― 개선 방안은 없는 겁니까.
“지배구조를 바꾸면 가능해요.”
― 그간 어떤 정권도 못 한 일인데요.
“표를 의식하니까요. 윤석열 대통령이라면, 글쎄요.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 국민의힘에서는 그 일환으로 MBC 민영화 얘기를 하더군요.
“그건 상당히 복잡한 문제입니다. 민영화의 시작은 주식 상장인데 코스피 기준 최소 조건이 100만 주거든요. 지금 MBC는 20만 주의 비상장 주식회사니, 이걸 쪼개야 된단 말이에요.”
MBC는 20만 주의 비상장 주식회사로,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가 14만 주(70%), 정수장학회가 6만 주(30%)를 갖고 있다. 코스피 기준 일반 기업이 주식 상장을 하려면 최소 조건이 100만 주다. 유상증자해서 100만 주로 늘릴 경우, 정수장학회 지분은 6%로 축소될 수 있다. 정수장학회에서 반길 리 없다. 주식 분할의 방법도 있다. 1주를 5~10주로 쪼개는 거다. 민영화를 위한 이 같은 의사 결정은 모두 방문진 이사회에서 한다. 방문진 이사 9명 중 6명은 문재인 정부 시절 더불어민주당에서 추천한 인사들로 알려져 있다. 이들의 임기는 2024년 7월까지다. 아예 방문진법을 없애는 방법도 있다. 그런데 2024년 6월까지 국회 다수당은 민주당이다. 이 모든 허들을 넘고 시장에 나왔다고 쳐도 문제다. MBC의 대주주가 되려면 약 30% 수준의 지분을 갖고 있어야 한다. 30%는 1조원으로 추산된다. 과연 MBC가 1조원을 투자할 만큼 가치 있는 기업인가 하는 의문이 따른다.
“민영화는 이렇듯 복잡한 과정이 필요합니다. 당장 민영화가 아니라도 방법은 있어요.”
‘떠난 후 기억되는 기자’
― 그게 뭐죠.
“우선 책임과 권한에 대한 규정을 확실하게 만들면 됩니다. 그리고 지배구조에 있어서 현재 양극화된 양당 체제에 근거한 이사회가 아닌, 예컨대 독일의 제2공영방송인 ZDF의 방송평의회의 모델을 차용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어요. 노조, 정당, 종교 등 각계 다양한 영역을 대표하는 77명으로 구성된 일종의 조합형 모델이에요. 현재의 다수, 혹은 소수밖에 없는 구조에서 벗어나 이사회 인원을 대폭 증원해 다양한 이해집단의 대표들로 구성하도록 하는 건데, 지금은 다들 쉽게 가려고 하니까, 시도를 못 하는 거죠. 쉽게 간다고 오래가는 것도 아닌데. 어쨌든 이번에 칼자루를 만일 쥐었다면, 손을 봐야 합니다. 비록 완성형은 안 될지라도요.”
― 좋은 기자란 뭘까요.
“단순해요. 정도(正道)를 걸으면 됩니다. 왜곡 없이 사실을 전달하는 것. 검은 것을 희다고 우기지 않는 것. 후배들에게 누누이 한 말이 있습니다. 떠난 후 기억되는 기자가 돼라. 기자 명함으로 잇속 챙기려 하지 말고, 조금 손해 보는 듯 일하라.”
떠난 후 기억되는 기자. 본인 얘기이기도 하다. 정확히는 그의 보도가 그렇다. 역사의 페이지 곳곳에 남았다. 바웬사 폴란드 노조지도자, 동백림 사건에 연루됐던 정규명 물리학자, 독일 통일의 아버지인 빌리 브란트도 세 차례나 단독으로 인터뷰했다.
빌리 브란트의 조언
“1991년 8월 제46차 UN총회를 앞뒀을 때였어요. 빌리 브란트에게 독일 통일의 대부로서, 통일 선배국인 독일을 대표해서 남북통일에 조언을 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랬더니 정색하고 자세를 고치면서 ‘무슨 조언? 조언,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그저 민족끼리 자주 접촉하고 교류하면서 한 핏줄, 한 민족임을 교감하는 일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동서독이 통일은 됐지만, 통일의 완성체인 진정한 통합은 앞으로 한 세대가 더 걸릴 거다. 동독은 북한과는 달리 역사, 국어, 음악, 기초과학 등에서 서독과 크게 다르지 않고 왜곡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서독의 경제자원으로 동독의 인권신장을 끌어냈다. 사실 표현 미술 분야에서만 공산주의 냄새가 날 뿐이었다. 그런데도 동서독은 45년간 다른 체제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이질감 해소, 동질성 원상회복은 말이 한 세대지 한 세기가 걸릴지도 모른다고 하더군요.”
탈냉전의 현장을 지켜보면서 냉전의 고도(孤島)인 북한도 바뀌기를 바랐다. 특파원 생활 이후 남북 관계에 매달린 이유다. 취재 보도는 물론 대북 교류·협력 사업에도 직접 나섰다. 2001년 MBC 통일방송연구소 소장에 임명되며 평양도 15차례나 다녀왔다. 2002년 9월 동평양극장에서의 가수 이미자 공연, 같은 달 평양·서울 간 실시간 생방송 뉴스 보도 모두 그의 작품이다.
그는 “통일방송연구소는 김대중 정부 들어 남북화해협력 6·15선언 이후 남북교류협력을 통한 동질성 회복, 위기감 해소, 한반도 평화 정착 기여를 목적으로 했다”면서 “실제로는 조사부처럼 평양 자료를 수집하는 일도 했다”고 했다.
― 독일 통일, 동유럽 해체의 산증인을 북한 인사들은 어떻게 보던가요.
“김정일 정권 말기 무렵이었어요. 어느 날 한 북한 인사가 묻더라고. ‘소장님, 독일 통일은 순전히 흡수통일 아닙네까?’ 하고요. 그러더니 ‘우리 공화국 동무들은 말은 못 해도 흡수통일은 지고 들어간 것으로 여기고 두려워하고 있는 게 사실입네다’ 하더군요. 이건 평양에서 듣기 상당히 어려운 얘기입니다.”
남파 경험 털어놓은 북 인사
― 뭐라고 답했습니까.
“‘우리가 통일을 외쳐도 주변 외세 때문에 할 수도 없다. 중국, 러시아가 원할 것 같아? 일본, 미국도 통일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냐고. 갈라놓고 힘 뺀 상태로 한반도를 관리하고 싶지, 강한 한반도를 원하겠냐고. 통일의 주적은 남북이 아니라 외세다. 사정이 이런데 뭔 흡수통일을 지레 겁내냐. 진정한 통일은 화학적 통일이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소장님, 시원합네다’ 하기에 ‘그러니까 우리 그날을 위해 더 열심히 통일 사업에 나서자고. 알았지? 위하여! 건배!’ 했죠.”
술잔을 수차례 부딪치자 더 놀라운 얘기도 나왔다고 했다. 북한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의 실장급 인사의 입을 통해서다.
“한번은 평양 인사들과 고려호텔 2층 바에서 새벽 2시까지 로얄 XQ 2병을 폭탄주로 말아 먹은 일이 있었어요. 함께 마시던 일행이 다 돌아가고, 민화협의 40대 실장급이랑 둘이 남게 됐단 말이에요. 단둘이 추가로 1병을 더 시키고, 몇 순배 오간 뒤 ‘자네 민화협에 오기 전에 무슨 일을 했는가’ 하고 물었더니….”
참고로 김 전 사장에 따르면 로얄 XQ는 일명 ‘김일성주(酒)’로 당시 한 병에 200달러였다. 평양에서는 이를 마시는 것 자체를 신분 상승으로 여기는데, 이 ‘귀한 술’을 북측 인사들에게 종종 사줬다고 한다.
― 물었더니요.
“그랬더니 ‘한때 저는 서해 공해상을 통해 밀입국한 남측 운동권 인사들을 남포항에서 인계받아 평양 모처로 데려가 학습시키고 다시 남포항까지 인솔해 공해상으로 보내는 일을 주로 했습니다’라더군요.”
― 남파 간첩 관리? 폭탄 발언이네요.
“그 친구가 당시 40대 민화협 실장인데, 게네는 옷만 갈아입는 거니까 사실은 통일전선부(통전부) 소속이라 보면 돼요. 폭탄선언이잖아요. 그때가 새벽 한 시쯤 됐을 거야. 우리 둘밖에 없었지만, 주변에 종업원들은 있었어요. 종업원들도 다 감시원이고 정보원이거든요. 도청도 하고 있다고. 거기서 내가 충격적이라면서 정색하면 안 되잖아요? 일단 포커페이스를 하고 있다가, 모르는 척하면서 ‘공해상으로 가려면 자국기를 달아야 하는데, 그게 어찌 가능했냐’고 했더니 ‘다 방법이 있습니다. 눈에 띄게 하면 되겠습니까’ 하더라고. 그게 뭐겠어요. 어선이겠어? 목선이겠어? 잠수함이지.”
김정은이 믿는 구석
― 운동권 누구라고는 말 안 하던가요.
“누군지는 따로 묻지 않았어요. 포커페이스를 해야 했으니까. 근데 빤하지 않아요? 그때 느꼈지. 대한민국은 활보하는 고정간첩 조직과 동거(同居)하는 체제구나. 북한 주민들은 흡수통일과 한미연합군사훈련에는 극도의 불안감을 보이는데, 김정은은 미사일 도발을 계속하잖아요. 심지어 이태원 국가 애도 기간에도 도발을 하는 것 보면 믿는 구석이 있는 거죠. 자신들에게 충성맹세를 하고 대남적화통일, 체제전복대열에서 내부 총질에 앞장서겠다고 약속한 남한 고정간첩망이 든든한 뒷배로 있는 것이니, 소름 끼치는 일입니다. 충실히 간첩 교육을 받고 돌아온 그들이 조직과 세 불리기, 가지치기를 얼마나 했을지 짐작 가지 않아요? 그런데 문재인 정부에서는 대북라인을 초토화시키고 대공수사권도 무력화(無力化)시킨 거예요.”
― 근데 그 실장은 그런 얘기를 그렇게 쉽게 합니까.
“결코 쉽게 한 게 아니에요. 사회주의는 의심이 워낙 많으니, 곁에 사람을 많이 안 둡니다. 나와는 워낙 스킨십이 많았지. 나는 북에서 정보 보고도 필요 없는 사람이에요. 워낙 왔다 갔다 했으니까. 직항으로도 세 번이나 다녀왔는걸. 김영일 치면, 내 이력이 다 나온다고. 그때가 김정일 체제 끝물일 때였어요. 그 실장이 당시 북한의 미래 먹거리를 고민하더라고요. ‘젊은 세대인 김정은이 후계자가 되면 미래 먹거리는 4차산업 쪽으로 잡는 게 좋을 거다, 참모인 네가 IT산업을 공부해서 기여하라’는 얘기를 해줬어요. 그때 해킹하고 자금 조달하는 데 딱 꽂혔을 거 아니에요. 그걸로 지금 먹고살잖아요. 세계 경제 흐름과 차세대 리더의 참모로서 필요한 역량을 얘기해줬더니 아주 감동을 하고 듣더라고요. 그 무렵 로얄XQ를 한 병 더 시키고 룡성맥주를 타줬더니, 이놈이 남파 경험을 털어놓은 거지.”
“지금 우리 문화판은 돼지 머리에 진주 목걸이”
‘역사서’를 방불케 하는 취재기를 엮어 지난 2022년 11월에는 책도 냈다. 《이제서야 확 까발린다》다. 일필휘지였다. 약 400페이지 분량을 한 달 반 만에 썼다. 김성호 전 국가정보원장은 서평에서 “김영일의 이야기는 첩보전에 나선 정보요원들의 활약상을 방불케 한다”고 했다. 종군기자 출신인 이진숙 전 대전 MBC 대표이사·사장은 “책은 단순히 한 명의 회고담이 아닌 대한민국의 역사와 세계의 역사가 담겨 있다”고 했다.
― 앞으로 계획은 뭡니까.
“내 나이가 지금 7학년 중반(70대 중반)인데 뭔 욕심이 있겠어요. 앞으로 밥 빌어먹을 일도, 그렇다고 잃을 것도 없어요. 다만 내가 인복은 있어요. 인연법에 따라 내가 필요한 곳이 있다면, 일당백을 하고 싶습니다. 남북문제, 언론환경 개선, 혹은 ‘개딸’ 같은 무지몽매한 이들 정신 개조에 일조하거나요.”
그는 “선진국의 여부는 그 나라의 문화가 결정한다”고 강조했다.
“지금 우리 문화판은 돼지 머리에 진주 목걸이, 딱 그 격입니다. 소프트웨어가 강국을 만듭니다. 하드웨어만 바꾼다고 될 게 아니에요. 대한민국에서는 지금 선전과 선동으로 만들어진 문화가 가랑비에 옷 젖듯 스며들고 있어요. 일명 떼법이 상위법이 돼버렸잖아요. 나는 이참에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특전사나 참모총장 출신으로 뽑았으면 좋겠어요.”
― 위험한 발언 아닐까요.
“그 정도로 심각하다는 얘기예요. 탄압? 참나, 지금까지 누려온 건 생각도 안 하고. 지금 민주화 외치는 인사들의 지향점이 뭔지는 모르지만, 도떼기시장이에요. 이 말을 꼭 써주세요. ‘지금 우리나라는 민주화 인사들의 도떼기시장’이라고요.”⊙
“내가 어디 가서 창피해서 말을 못 하겠어. 내 친정(親庭)이나 다름없는데, 너무 부끄러워. 수많은 선배들이 쌓은 빛나는 전통을 누구 마음대로, 무슨 권한으로 허무냐고. 이거 탈레반이 수천 년 문화유산을 대포로 훼손하는 짓거리하고 뭐가 달라요?”
김영일(金榮日·74) 전 강릉 MBC 사장의 기자 시절 보도는 달랐다. 살아 있었다. 구랍 11월 30일 광화문에서 만나 우리 언론의 민낯을 함께 들여다 보았다.
동아일보사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부마민주항쟁, 사북항쟁, 10·26사건, 12·12 군사반란, 5·18 민주화운동의 현장을 취재했다. 이후 KBS를 거쳐 1981년 MBC로 이직해 기자 생활의 대부분을 보냈다. 초대 베를린 특파원을 하며 동유럽 해체 한가운데 서서 변화의 소용돌이와 독일 통일 과정을 몸소 겪었다. 1983년 10월 9일, 버마(현 미얀마) 아웅산 테러 사건을 취재하다 겨우 목숨을 건지고 돌아와 1984년 8월 15일 동서 냉전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을 생생히 전했다. 1989년 11월 10일에는 동서독 간 자유 왕래의 전야를 직접 생중계했다. ‘우리는 한민족이다(Wir sind ein Volk!)’를 외치는 독일인의 육성을 그대로 전했다. 2003년에는 이라크전 취재단장으로 요르단 암만에서 전쟁 취재를 진두지휘했다. 외국 언론사들은 생명보험을 들어줬는데 당시 한국은 무보험이었다. ‘살아서만 돌아오라’는 격려 하나에 힘입어 짐을 쌌던 건, 사명감 때문이었다. 김 전 사장은 “기자가 현장에서 한 시대를 기록하고 그 시대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은 천운(天運)”이라고 했다. 그런 그가 “친정이 부끄럽다”고 했다.
“왜곡방송은 他殺행위”
― 이른바 ‘바이든’ ‘날리면’ 자막 사태, 어떻게 봤습니까.
“부끄러워서 원. 상상도 못 할 일이에요. 무슨, 청력이 강아지의 몇십 배라도 된답니까. 그게 어떻게 단박에 식별이 되냐고요. 설혹 ‘바이든’이라 했다고 하더라도, 국제사회에 먹칠하려고 환장한 거 아닙니까. 미국 FBI나 CIA가 바보예요? 거기서는 진실을 다 알고 있어요. 문화 선진국이 아무나 되냐고. 정말 창피해요.”
그는 “현장 취재에서 예습은 의미가 없다. 미리 짜 놓는다고 폭탄이 이쪽에서 더 크게 터져주지 않는다”면서 ‘있는 그대로의 보도’를 전제로 한 순발력을 강조했다.
― 최근 MBC 〈PD수첩〉의 김건희 여사 대역 논란도 있었죠.
“기본적으로 PD 저널리즘은 사기예요. PD가 직접 나와서 기자처럼 보도하는 건 우리나라밖에 없어요. 기자 위에 PD가 있는 구조예요. 물론 과거 〈PD수첩〉의 순기능도 있었지만 자극적인 프로그램으로 살림에 보탬이 안 될 때가 허다합니다. 공정성이 없는 거죠. 가령 이명박 정부 때 광우병 파동으로 재미를 봤잖아요. 한데 문재인 정부 때는 그보다 더 국민 생활, 산업 전반에 파급력이 강한 원전 폐기 정책에는 왜 꿀 먹은 벙어리였을까요.”
― 대통령실에서는 결국 동남아 순방 기간 MBC 기자의 대통령 전용기 탑승을 배제하고, MBC의 출입기자 등록 취소 등도 검토했습니다. 이거 언론 탄압 아닙니까.
“자기 본분과 책임을 다한 뒤 받은 결정이라면 탄압이 맞겠죠. 일각에서 이 같은 대응을 강경하다고 하는데, 그건 정도(正道)예요. 강경파로 몰 게 아니라고. 내가 대통령이었다면 거기서 그치지 않을 거예요.”
지난 2022년 11월 18일 출근길 문답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전용기에 MBC 탑승을 불허한 것에 “(MBC가) 아주 악의적인 행태를 보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후 MBC 기자는 윤 대통령에게 ‘무엇이 악의적이냐’고 물었고 대통령실 비서관과의 고성으로까지 이어졌다. 이날부로 대통령실 용산 이전의 상징과도 같았던 출근길 문답이 전격 중단됐다.
‘자유와 정의를 찾아’ MBC로 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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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2년 9월 28일 MBC 본사 앞에서 박대출 MBC 편파·조작방송 진상규명 태스크포스(TF) 위원장과 권성동 국민의힘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위원이 윤석열 대통령의 뉴욕 발언 보도에 대해 항의하는 모습. 사진=조선DB |
“왜곡방송과 편파방송은 타살(他殺)행위, 살인행위입니다. 가령 〈PD수첩〉 천안함 편은 희생자들을 두 번 죽였지 않습니까? 그 피해는 엄청 크고 절대 원상 복구가 안 돼요. 공중파라는 건 국민의 거라는 겁니다. 독점이 안 되는 거라고요. 국민의 자산을 위임받아 운영하면서 언론의 가장 기본적인 윤리와 가치를 내팽개치고, 그걸 이용해서, 책임도 못 질 거면서, 왜 타살행위를 하느냐 이겁니다.”
그는 한때 누구보다 언론 탄압에 저항했던 인물이다. 고려대 재학 시절에는 민주화운동의 선봉에 섰다. 이강식 고려대언론인교우회 상임고문은 “고대 시위대의 선봉장에 마이크를 들고 피를 토하던 청년학도 김영일이 있었다”고 했다. 김 전 사장은 “반(反)독재, 반민주, 반칙, 불의에는 눈을 감지 말라는 안암골의 경책은 모교가 내 손에 쥐여준 최대의 노자(路資)였다”고 했다.
데모에 앞장서고, 학교에서 제적을 당하고, 수배당해 도망 다니고, ASP(Anti Government Student Power·반정부 학생운동) 딱지를 붙인 채 군대 생활을 했다. 졸업반. 진로 고민을 할 때 선배들은 그에게 ‘노동운동’을 하라고 권했다. 한데 집안 형편상 취업을 해야 했다.
때마침 학생처장이 동아일보사에서 기자를 뽑는다는 소식을 알려줬다. 1960~1970년대 《동아일보》는 야당성이 강한 신문이었다. 그런데 1970년대 중반 들어 정권에 탄압을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동아투위 사건’이다. 김 전 사장은 “동아일보사라니 솔깃했다”면서 “자유언론수호투쟁의 맥도 잇고 취업도 해결할 수 있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기회가 될 수 있겠다 싶었다”고 했다. 그는 방송기자를 1지망으로 써 동아방송에 입사했다.
1980년 11월 30일, 동아방송은 개국 17년 만에 문을 닫았다. 전두환 정권의 언론통폐합 때문이었다. 이후 KBS에 둥지를 튼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동아방송이 내세운 방송 목표는 ‘자유와 정의 편에 서서 어떤 독재자도 반대한다’는 거였어요. 그런데 KBS에 와서 보니, 정권 나팔수로 부역시키는 강제수용소나 진배없더군요.”
그렇게 ‘자유와 정의를 찾아’ MBC로 이직한 거였다. 1981년 7월 1일이었으니, 40여 년 전이다. 김 전 사장은 “MBC와 일부 야당 의원들이 작금의 사태를 당시 동아일보사와 동일시하려 한다”면서 “그때는 모두가 권력에 굴종하고 침묵할 때 유일하게 언론의 길을 지킨 언론사에 대해 정권이 기업을 압박해 광고를 못 주게 한 사건”이라고 했다.
‘勞營방송 MBC’
―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인 김상훈 의원이 2022년 11월 17일 MBC를 향해 “윤석열 대통령과 현 정부에 대해 악의적인 보도와 의도적인 비난으로 뉴스를 채워 왔다”며 MBC 광고기업 제품 불매운동을 언급했는데요. 이건 어떻게 봅니까.
“그건 패착이죠. 광고는 전적으로 기업이 선택하도록 둬야죠. 자유경제체제에 반하는 발언이에요. 그걸 정부·여당이 통제하려고 하면 사회주의, 독재주의입니다. 자유는 주되, 책임에 대해서는 엄격히 물어야죠. 그게 윤리국가고 법치국가인 겁니다.”
― 요즘 TV를 봅니까.
“잘 안 봅니다.”
― 뉴스를 꼭 봐야 한다면 무슨 채널을 틀겠습니까.
“김민배, 신동욱이 나오는 TV조선.”
― ‘만나면 좋은 친구’였던 MBC가 왜 이렇게 된 걸까요.
“1988년과 1992년 대규모 파업 등의 영향으로 원래 노조가 강한 분위기였던 차에 언노련 결성 핵심인 최문순 전 노조위원장이 2005년 차장급에서 사장으로 발탁되면서 노조의 위세가 몇 단계 상승했어요. 1992년에는 내가 걸프전 취재로 해외에 나가 있었는데, 그사이 노조의 힘이 비대해진 거죠. 그때부터 망조가 든 거예요. 노영(勞營)방송이 된 거죠.”
특히 문재인 정부 들어 2012년 파업 때 해직됐던 전직 노조위원장들이 연거푸 사장이 되면서 노조의 파워는 절정에 달했다.
“제아무리 임원이라고 해도 노조가 비판하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조합원에게 얹혀서 갈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됐어요. 조금 뭐 하면 노조탄압이다, 뭐다, 하니까요. 민노총에 가입해서 울타리를 쳐놨는데, 연봉 1억원 가까이 받는 노조원이 무슨 얼어 죽을 노동자입니까. 운전기사, 비정규직까지 노조 가입하는 조건으로 죄다 정규직이 된 거 아닙니까. 참담하죠.”
― 말씀대로라면 근 30년 세월 동안 노조의 횡포가 있었다는 건데, 그걸 견제할 기능이 없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MBC가 주인 없는 회사라 그렇습니다.”
MBC 경영진 임면권은 방문진 이사회가 갖는다. 여야 6대 3으로 구성돼 있다. 이사 임기는 3년이다. 이명박 정권 출범 때는 기존 임기를 보장해줬다. 그러나 문재인 정권 출범 때는 노조와 좌파단체들이 보수 성향 이사들의 집, 학교, 교회까지 쫓아다니며 압박했다. 결국 2명이 사퇴하면서 6대 3이던 비율이 4대 5가 됐다. 그렇게 기존 사장을 쫓아낼 수 있었다. 요컨대 ‘내 편’이 정권을 잡으면 노조가 쫓아내고, ‘네 편’이 되면 노조 탄압을 외치는 식이다. ‘주인 없이 노조라는 터줏대감만 판치는 조직’이라는 얘기는 그래서 나왔다.
― 개선 방안은 없는 겁니까.
“지배구조를 바꾸면 가능해요.”
― 그간 어떤 정권도 못 한 일인데요.
“표를 의식하니까요. 윤석열 대통령이라면, 글쎄요.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 국민의힘에서는 그 일환으로 MBC 민영화 얘기를 하더군요.
“그건 상당히 복잡한 문제입니다. 민영화의 시작은 주식 상장인데 코스피 기준 최소 조건이 100만 주거든요. 지금 MBC는 20만 주의 비상장 주식회사니, 이걸 쪼개야 된단 말이에요.”
MBC는 20만 주의 비상장 주식회사로,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가 14만 주(70%), 정수장학회가 6만 주(30%)를 갖고 있다. 코스피 기준 일반 기업이 주식 상장을 하려면 최소 조건이 100만 주다. 유상증자해서 100만 주로 늘릴 경우, 정수장학회 지분은 6%로 축소될 수 있다. 정수장학회에서 반길 리 없다. 주식 분할의 방법도 있다. 1주를 5~10주로 쪼개는 거다. 민영화를 위한 이 같은 의사 결정은 모두 방문진 이사회에서 한다. 방문진 이사 9명 중 6명은 문재인 정부 시절 더불어민주당에서 추천한 인사들로 알려져 있다. 이들의 임기는 2024년 7월까지다. 아예 방문진법을 없애는 방법도 있다. 그런데 2024년 6월까지 국회 다수당은 민주당이다. 이 모든 허들을 넘고 시장에 나왔다고 쳐도 문제다. MBC의 대주주가 되려면 약 30% 수준의 지분을 갖고 있어야 한다. 30%는 1조원으로 추산된다. 과연 MBC가 1조원을 투자할 만큼 가치 있는 기업인가 하는 의문이 따른다.
“민영화는 이렇듯 복잡한 과정이 필요합니다. 당장 민영화가 아니라도 방법은 있어요.”
‘떠난 후 기억되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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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90년 10월 통독연방공화국이 통일을 공식 선포한다는 내용을 리포트하는 모습. 사진=김영일 |
“우선 책임과 권한에 대한 규정을 확실하게 만들면 됩니다. 그리고 지배구조에 있어서 현재 양극화된 양당 체제에 근거한 이사회가 아닌, 예컨대 독일의 제2공영방송인 ZDF의 방송평의회의 모델을 차용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어요. 노조, 정당, 종교 등 각계 다양한 영역을 대표하는 77명으로 구성된 일종의 조합형 모델이에요. 현재의 다수, 혹은 소수밖에 없는 구조에서 벗어나 이사회 인원을 대폭 증원해 다양한 이해집단의 대표들로 구성하도록 하는 건데, 지금은 다들 쉽게 가려고 하니까, 시도를 못 하는 거죠. 쉽게 간다고 오래가는 것도 아닌데. 어쨌든 이번에 칼자루를 만일 쥐었다면, 손을 봐야 합니다. 비록 완성형은 안 될지라도요.”
― 좋은 기자란 뭘까요.
“단순해요. 정도(正道)를 걸으면 됩니다. 왜곡 없이 사실을 전달하는 것. 검은 것을 희다고 우기지 않는 것. 후배들에게 누누이 한 말이 있습니다. 떠난 후 기억되는 기자가 돼라. 기자 명함으로 잇속 챙기려 하지 말고, 조금 손해 보는 듯 일하라.”
떠난 후 기억되는 기자. 본인 얘기이기도 하다. 정확히는 그의 보도가 그렇다. 역사의 페이지 곳곳에 남았다. 바웬사 폴란드 노조지도자, 동백림 사건에 연루됐던 정규명 물리학자, 독일 통일의 아버지인 빌리 브란트도 세 차례나 단독으로 인터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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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냉전의 현장을 지켜보면서 냉전의 고도(孤島)인 북한도 바뀌기를 바랐다. 특파원 생활 이후에는 남북 관계에 매달렸다. 지난 2002년 평양에서 열린 이미자 공연도 그의 작품이다. 사진=조선DB |
탈냉전의 현장을 지켜보면서 냉전의 고도(孤島)인 북한도 바뀌기를 바랐다. 특파원 생활 이후 남북 관계에 매달린 이유다. 취재 보도는 물론 대북 교류·협력 사업에도 직접 나섰다. 2001년 MBC 통일방송연구소 소장에 임명되며 평양도 15차례나 다녀왔다. 2002년 9월 동평양극장에서의 가수 이미자 공연, 같은 달 평양·서울 간 실시간 생방송 뉴스 보도 모두 그의 작품이다.
그는 “통일방송연구소는 김대중 정부 들어 남북화해협력 6·15선언 이후 남북교류협력을 통한 동질성 회복, 위기감 해소, 한반도 평화 정착 기여를 목적으로 했다”면서 “실제로는 조사부처럼 평양 자료를 수집하는 일도 했다”고 했다.
― 독일 통일, 동유럽 해체의 산증인을 북한 인사들은 어떻게 보던가요.
“김정일 정권 말기 무렵이었어요. 어느 날 한 북한 인사가 묻더라고. ‘소장님, 독일 통일은 순전히 흡수통일 아닙네까?’ 하고요. 그러더니 ‘우리 공화국 동무들은 말은 못 해도 흡수통일은 지고 들어간 것으로 여기고 두려워하고 있는 게 사실입네다’ 하더군요. 이건 평양에서 듣기 상당히 어려운 얘기입니다.”
남파 경험 털어놓은 북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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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통일방송연구소장이던 시절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방북단과 함께 방북했을 때 만경대에 있는 김일성 생가를 방문했다(뒷줄 왼쪽 끝이 김영일 전 사장). |
“‘우리가 통일을 외쳐도 주변 외세 때문에 할 수도 없다. 중국, 러시아가 원할 것 같아? 일본, 미국도 통일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냐고. 갈라놓고 힘 뺀 상태로 한반도를 관리하고 싶지, 강한 한반도를 원하겠냐고. 통일의 주적은 남북이 아니라 외세다. 사정이 이런데 뭔 흡수통일을 지레 겁내냐. 진정한 통일은 화학적 통일이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소장님, 시원합네다’ 하기에 ‘그러니까 우리 그날을 위해 더 열심히 통일 사업에 나서자고. 알았지? 위하여! 건배!’ 했죠.”
술잔을 수차례 부딪치자 더 놀라운 얘기도 나왔다고 했다. 북한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의 실장급 인사의 입을 통해서다.
“한번은 평양 인사들과 고려호텔 2층 바에서 새벽 2시까지 로얄 XQ 2병을 폭탄주로 말아 먹은 일이 있었어요. 함께 마시던 일행이 다 돌아가고, 민화협의 40대 실장급이랑 둘이 남게 됐단 말이에요. 단둘이 추가로 1병을 더 시키고, 몇 순배 오간 뒤 ‘자네 민화협에 오기 전에 무슨 일을 했는가’ 하고 물었더니….”
참고로 김 전 사장에 따르면 로얄 XQ는 일명 ‘김일성주(酒)’로 당시 한 병에 200달러였다. 평양에서는 이를 마시는 것 자체를 신분 상승으로 여기는데, 이 ‘귀한 술’을 북측 인사들에게 종종 사줬다고 한다.
― 물었더니요.
“그랬더니 ‘한때 저는 서해 공해상을 통해 밀입국한 남측 운동권 인사들을 남포항에서 인계받아 평양 모처로 데려가 학습시키고 다시 남포항까지 인솔해 공해상으로 보내는 일을 주로 했습니다’라더군요.”
― 남파 간첩 관리? 폭탄 발언이네요.
“그 친구가 당시 40대 민화협 실장인데, 게네는 옷만 갈아입는 거니까 사실은 통일전선부(통전부) 소속이라 보면 돼요. 폭탄선언이잖아요. 그때가 새벽 한 시쯤 됐을 거야. 우리 둘밖에 없었지만, 주변에 종업원들은 있었어요. 종업원들도 다 감시원이고 정보원이거든요. 도청도 하고 있다고. 거기서 내가 충격적이라면서 정색하면 안 되잖아요? 일단 포커페이스를 하고 있다가, 모르는 척하면서 ‘공해상으로 가려면 자국기를 달아야 하는데, 그게 어찌 가능했냐’고 했더니 ‘다 방법이 있습니다. 눈에 띄게 하면 되겠습니까’ 하더라고. 그게 뭐겠어요. 어선이겠어? 목선이겠어? 잠수함이지.”
김정은이 믿는 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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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강변에서 찰칵! 사진 왼쪽이 인민문화궁전, 오른쪽 삼각형 건물이 류경호텔이다. |
“누군지는 따로 묻지 않았어요. 포커페이스를 해야 했으니까. 근데 빤하지 않아요? 그때 느꼈지. 대한민국은 활보하는 고정간첩 조직과 동거(同居)하는 체제구나. 북한 주민들은 흡수통일과 한미연합군사훈련에는 극도의 불안감을 보이는데, 김정은은 미사일 도발을 계속하잖아요. 심지어 이태원 국가 애도 기간에도 도발을 하는 것 보면 믿는 구석이 있는 거죠. 자신들에게 충성맹세를 하고 대남적화통일, 체제전복대열에서 내부 총질에 앞장서겠다고 약속한 남한 고정간첩망이 든든한 뒷배로 있는 것이니, 소름 끼치는 일입니다. 충실히 간첩 교육을 받고 돌아온 그들이 조직과 세 불리기, 가지치기를 얼마나 했을지 짐작 가지 않아요? 그런데 문재인 정부에서는 대북라인을 초토화시키고 대공수사권도 무력화(無力化)시킨 거예요.”
― 근데 그 실장은 그런 얘기를 그렇게 쉽게 합니까.
“결코 쉽게 한 게 아니에요. 사회주의는 의심이 워낙 많으니, 곁에 사람을 많이 안 둡니다. 나와는 워낙 스킨십이 많았지. 나는 북에서 정보 보고도 필요 없는 사람이에요. 워낙 왔다 갔다 했으니까. 직항으로도 세 번이나 다녀왔는걸. 김영일 치면, 내 이력이 다 나온다고. 그때가 김정일 체제 끝물일 때였어요. 그 실장이 당시 북한의 미래 먹거리를 고민하더라고요. ‘젊은 세대인 김정은이 후계자가 되면 미래 먹거리는 4차산업 쪽으로 잡는 게 좋을 거다, 참모인 네가 IT산업을 공부해서 기여하라’는 얘기를 해줬어요. 그때 해킹하고 자금 조달하는 데 딱 꽂혔을 거 아니에요. 그걸로 지금 먹고살잖아요. 세계 경제 흐름과 차세대 리더의 참모로서 필요한 역량을 얘기해줬더니 아주 감동을 하고 듣더라고요. 그 무렵 로얄XQ를 한 병 더 시키고 룡성맥주를 타줬더니, 이놈이 남파 경험을 털어놓은 거지.”
“지금 우리 문화판은 돼지 머리에 진주 목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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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서 같은 취재기를 엮어 지난 2022년 11월 《이제서야 확 까발린다》를 펴냈다. |
― 앞으로 계획은 뭡니까.
“내 나이가 지금 7학년 중반(70대 중반)인데 뭔 욕심이 있겠어요. 앞으로 밥 빌어먹을 일도, 그렇다고 잃을 것도 없어요. 다만 내가 인복은 있어요. 인연법에 따라 내가 필요한 곳이 있다면, 일당백을 하고 싶습니다. 남북문제, 언론환경 개선, 혹은 ‘개딸’ 같은 무지몽매한 이들 정신 개조에 일조하거나요.”
그는 “선진국의 여부는 그 나라의 문화가 결정한다”고 강조했다.
“지금 우리 문화판은 돼지 머리에 진주 목걸이, 딱 그 격입니다. 소프트웨어가 강국을 만듭니다. 하드웨어만 바꾼다고 될 게 아니에요. 대한민국에서는 지금 선전과 선동으로 만들어진 문화가 가랑비에 옷 젖듯 스며들고 있어요. 일명 떼법이 상위법이 돼버렸잖아요. 나는 이참에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특전사나 참모총장 출신으로 뽑았으면 좋겠어요.”
― 위험한 발언 아닐까요.
“그 정도로 심각하다는 얘기예요. 탄압? 참나, 지금까지 누려온 건 생각도 안 하고. 지금 민주화 외치는 인사들의 지향점이 뭔지는 모르지만, 도떼기시장이에요. 이 말을 꼭 써주세요. ‘지금 우리나라는 민주화 인사들의 도떼기시장’이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