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활력 잃은 부산… 원도심 재개발과 해양도시라는 천혜 조건 활용해야
⊙ 신문기자 시절… 공공저널리즘 표방하며 사회문제 해결, 대안까지 제시
⊙ 슬럼화된 원도심 재개발… 살던 주민은 개발에 소외되고 쫓겨나
安炳吉
1962년생. 부산대 법학과, 同 대학원(행정학), 동아대 행정학 박사, 미국 클리블랜드주립대 객원연구원 / 《부산일보》 사회부장·정치부장·편집국장·대표이사 사장 역임 / 한국지방신문협회 회장, 한국신문협회 부회장, 부산경영자총협회 부회장 역임. 現 원도심 미래연구원 원장
⊙ 신문기자 시절… 공공저널리즘 표방하며 사회문제 해결, 대안까지 제시
⊙ 슬럼화된 원도심 재개발… 살던 주민은 개발에 소외되고 쫓겨나
安炳吉
1962년생. 부산대 법학과, 同 대학원(행정학), 동아대 행정학 박사, 미국 클리블랜드주립대 객원연구원 / 《부산일보》 사회부장·정치부장·편집국장·대표이사 사장 역임 / 한국지방신문협회 회장, 한국신문협회 부회장, 부산경영자총협회 부회장 역임. 現 원도심 미래연구원 원장
- 안병길 원도심 미래연구원장.
‘배산임해(背山臨海)’의 부산은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꿈틀대는 도시다. 가요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떠올리지 않아도 수많은 이미지가 부산이란 용광로를 연상시킨다. 출항하는 컨테이너선 너머로 넘실대는 바다가 펼쳐져 있고 그 위로 ‘부산 갈매기’가 맴도는 도시…, 그 도시를 발로 뛴 이가 있다.
안병길(安炳吉·58) 전 《부산일보》 사장은 거시적 부산이 아니라 미시적 부산의 심장 박동 소리를 기록으로 전한 인물이다. 이 신문사의 베테랑 사회부 기자로 사건 현장을 두루 누볐다. 물론 사회부장과 정치부장 등을 맡은 다음 편집국장(2010년)이 되었다. 이후 2015년부터 4년간 신문사 대표이사로 재직하다 지난 2월 물러났다.
얼마 전 자유한국당의 영입 인사로 물망에 올랐었다. 보류가 되긴 했으나 ‘서울 사람들’은 그가 누군지 궁금해했다. 기자는 지난 10월 31일 서울 논현동에서 그를 만났다.
“부족한 저를 인재로 영입하겠다니 고맙죠. 늘 어디든 경쟁자가 있잖습니까. 잘 되리라 생각됩니다. …근데 정치가 참 험악하네요. 하하하.”
― 정치부장도 하셨지요.
“네. …곁에서 (기자로) 관전하는 것과 현실은 확실히 다르네요.”
― 노른자위 부서장만 하셨어요.
“정치부·사회부 같은 소위 ‘스트레이트 부서’만 돌았지만 광고국장, 판매국장까지 맡았어요. 기자 출신이 광고·판매까지 책임진 사례는 드물잖아요? 제가 총무국장, 문화사업국장 등 몇 개만 빼고는 신문사 보직을 거의 다 했어요.”
― 기자가 영업파트로 발령 나면 좌천 아닌가요.
“그런 것은 아니었고, 그 무렵 영업파트를 책임질 자원이 없어 사장님이 ‘당신이 가서 좀 해보라’고 하셔서 갔어요. 현역 시절, 저는 군소리 안 했어요. (위에서) 가라면 어디든 갔습니다. 그 자리에 가서 잘하면 다른 자리로 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 정말 그랬을까요.
“생소한 업무는 정말 힘들었어요. ‘왜 내(나)만 맨날 궂은일 시키냐’고 하소연하곤 했어요. 그런데 기피부서를 경험하니 훗날 신문사 경영에 큰 도움이 되었어요.”
안병길 전 사장의 고향은 경남 진주. 진주고를 나와 부산대 법대를 졸업했다. “판검사가 될 생각은 안 했다”고 한다. 처음으로 치른 언론사 시험에 덜컥 합격해 ‘부일(부산일보) 기자’가 된 것은 1987년 무렵이었다.
“사실, 출신을 말하자면 저야말로 흙수저, 무수저죠. ‘고구마 줄기 팔아서 학교 다닌다’고 할 정도로 고학(苦學) 비슷하게 학교를 다녔어요. 법학에 흥미를 못 느꼈고 군에 다녀와서 언론사 시험을 준비했습니다. 당시에도 콧대 높은 기자 되기가 어려웠어요. 그런데 첫 시험에 운이 좋게 됐는데 두려움도 컸죠. 하지만 저만의 ‘글쓰기’에 자신이 있었어요.”
흙수저, 33년간 ‘부일 기자’ 되다
아무래도 33년간의 부일 시절이 궁금했다. 기자 안병길은 1990년 12월에 쓴 ‘택시기사 가스 중독’ 기사를 먼저 떠올렸다. 그에게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을 안긴 기사다.
“사회부 초년병 기자 시절이었습니다. 어느 날 내근을 하고 있는데 한 통의 제보 전화를 받았어요. 가스 중독으로 사지 마비가 된 택시기사가 있다는 겁니다.
아시다시피 LPG 택시는 말 그대로 LP가스를 연료로 쓰잖아요. 당시 LPG 차는 배관 등의 문제로 가스 누출이 빈번했어요. 차가 쌩쌩 달리면 가스 냄새가 운전석 쪽으로 스며들었고 종일 운전하는 기사는 고스란히 그 냄새를 맡아야 했습니다.”
― 그래서 제보자를 만났습니까.
“취재해보니 ‘아, 이 사람은 가스에 중독된 게 맞다. 산재(産災)다’라고 확신하게 되었어요. (보도 후) 사회적인 파장이 컸습니다. 사람들이 그제야 택시기사가 가스에 노출될 수 있다고 인식하게 됐죠.”
그때부터 각 택시회사는 정기적으로 택시를 점검하고 가스 누출이 안 되도록 주의 조치를 취했다고 한다. 물론 택시기사 스스로 경각심을 높이기에 충분했다.
“사지가 마비된 택시기사의 아내 이름이 권정시(權貞是)씨입니다. 그 아내에 대한 후속 기사를 썼어요. 남편의 증세를 호소하며 생계를 위해 ‘민주 양말’을 팔고 있었죠. 그녀의 딱한 처지를 알게 된 택시기사들이 양말을 사주기 시작했습니다. 후속 보도 이후 사람들의 관심과 온정 덕에 그분 형편이 좀 나아졌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부산일보》 1990년 12월17일자 기사의 한 대목이다.
〈… “3년6개월의 차령이 다 된 고물차를 끌던 남편은 종종 눈이 따갑고 머리가 아프며 전신에 힘이 없다고 호소했습니다. 처음엔 택시기사들에게 흔히 있는 만성 피로쯤으로 생각했습니다.”(중략)
“이젠 돈도 기력도 모두 탈진 상태입니다. 당장 끼니도 이어가기 힘들고….”
주위를 에워싼 택시노동자들은 권씨의 아픔이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앞다퉈 양말을 사기 시작, 불과 몇 시간 만에 갖고 갔던 삼백 켤레가 모두 팔렸다. 새벽 4시께 퉁퉁 부은 다리를 이끌고 집으로 돌아온 권씨는 남편이 다시 직장을 되찾고 가정이 웃음을 되찾을 날을 그리며 꿈나라로 빠져들었다. 安炳吉 기자…〉
기자 안병길은 ‘공공저널리즘(public journalism)’에 관심이 많았다. 학술 전문서적인 《시민 속의 언론, 공공저널리즘》(2003년), 《행동하는 언론, 공공저널리즘》(2005년) 등을 펴냈고, 〈공공저널리즘이 정책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시민의 ‘공공생활(public life)’을 강조하는 것에 착안한 공공저널리즘은 1990년대 이후 미국 언론학계와 언론계의 화두로 부각될 만큼 새로운 언론운동의 하나로 주목받았다. 다른 말로 ‘시민저널리즘’이라 부른다.
“기자들은 흔히 모든 사회현상을 객관적 시각에서 바라보고 해석·분석하려 하지요. 그걸 ‘객관주의 언론(objective journalism)’이라 부르지만 저는 생각이 달랐어요. 너무 자주, 또 너무 오랫동안 많은 기자는 지역사회에서 발생하는 일이 자신과 무관하며, 매일매일 발생하는 뉴스를 전달만 해주면 그만이라는 식의 직업적 태도를 가져왔어요.
객관주의 언론의 신념이 저널리즘의 직업적 전문성을 제고(提高)했다지만, 객관주의의 가면(假面)에 안주하는 측면이 많았어요. 공공저널리즘 연구에 천착해오신 동아대 신방과 김민남 교수님을 뵙고 제 언론관이 바뀌게 됐어요.”
시민 속으로… 공공저널리즘과의 만남
2001년 여름, ‘부산 사나이’ 추신수가 MLB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서 뛰었던 것처럼, ‘부산 기자’ 안병길 역시 클리블랜드주립대에서 객원연구원으로 공공저널리즘을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1년간 배운 공공저널리즘은 한마디로 ‘시민 속으로 파고드는 시민저널리즘’이다. 시민, 즉 독자와 함께 호흡하고 대화하며, 쌍방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지역 이슈를 해결해나가는 ‘공동체 언론’을 말한다.
귀국 후 그는 2002년 9월부터 사회부장 직을 맡으면서 ‘우리 곁의 빈곤’ 시리즈를 시작했다.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을 안긴 이 기획물은 공공저널리즘을 표방한 남다른 기획, 남다른 취재였다.
“짐작건대 공공저널리즘을 지향한 우리나라 최초의 보도 프로젝트가 아닐까요? 사회복지 중에서 늘 중요한 게 ‘빈곤 문제’잖아요. 부자들의 재산도 상·중으로 나눌 수 있듯 빈곤도 그렇습니다. 당시 학자들 사이에서 ‘차상위(次上位)계층’이라는 생소한 개념에 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제일 바닥의 빈곤층보다 한 단계 위가 차상위 빈곤층입니다.
사실 빈곤층으로 분류된 계층은 정부에서 주는 돈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차상위 빈곤층은 여러 가지 이유로 기초생활 수급자가 되지 못해요. 부양할 가족이 있거나 차가 한 대라도 있으면 생활실태 조사에서 불가 판정을 받아요. 그 사람들은 ‘이럴 바에 차라리 수급자가 되는 것이 낫겠다’며 생업을 포기해 점점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지죠. 차상위층은 학자들 사이에서나 통용되던 때에 언론이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어 사회화시켰습니다.”
여러 차례 시리즈 기사를 쓴 뒤 《부산일보》는 부산시와 연계해 ‘빈곤 응급전화’를 가동했다.
“전화로 직접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는 분도 계셨고, 도움이 필요한 분들을 소개하는 경우도 많았어요. 전화를 받으면 찾아가서 즉시 해결해주는 시스템을 언론 주도로 만들었다는 데서 의미가 있죠. 계속 시스템을 운영할 수 없어 민간에 위탁, 운영을 넘겼지만 많은 보람을 느꼈습니다.”
사실 언론이 문제점을 지적하기보다 직접 문제해결에 나서기란 쉽지 않다. 안병길 사회부장의 기획기사는 부산시 복지정책은 물론 정부의 복지 시스템까지 변화시켰다. 공공저널리즘의 위력을 확인시킨 셈이었다.
2004년 사회부장에서 정치부장으로 보직이 바뀐 뒤에도 공공저널리즘 실험은 계속됐다. 이번에는 ‘빈곤 응급전화’가 아니라 ‘시민패널-후보 이슈 토론’이었다. 시민패널 기획은 일종의 유권자 중심의 선거 보도였다. 요즘은 언론사마다 시민단체나 학계 등 외부 전문가를 초빙해 후보자의 자질과 공약을 점검하는 경우가 많지만, 당시엔 획기적인 ‘신상’이었다.
“2004년 17대 총선 당시 공공저널리즘을 적용해 시민패널단을 만들었습니다. 총선 후보들의 공약을 시민의 눈높이로 검증하자는 시도였죠. 당시 언론은 검증 없이 후보들의 일방적 자기주장을 그대로 싣는 수준이었어요.
먼저 부산시 전체 선거구마다 5~6명씩 참가하는 패널단을 구성했죠. 패널이 총선 후보를 불러 2~3시간씩 질문을 하고 답변을 들었어요. 신문 양쪽 면을 모두 할애해서 시민이 후보자를 한눈에 볼 수 있게 했어요.”
한국기자협회는 《부산일보》의 ‘시민패널-후보 이슈 토론’ 기획에 ‘총선 보도상’을 수여했다. 전국 모든 언론의 총선 보도 중 가장 우수했다는 것이다.
“기자 시절을 돌이켜보면 사회 부조리를 파헤치거나 폭로한 기사도 떠오르지만, 그것보다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더 흥미를 느꼈고, 그 일에 천착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기본적으로 언론은 사회 약자를 대변해야 합니다. 사회 공동체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해결하려 노력해야 해요.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 언론이 정치권을 향해 ‘대안 제시도 안 한다’고 욕할 게 아니라 언론이야말로 대안을 제시해야 하지 않을까요?”
― 공공저널리즘은 제가 아는 전통적인 언론관과 다르군요.
“(공공저널리즘에 대한) 저항 또한 만만치 않았어요. 언론이 시민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객관적인 사실과 정보 전달에만 충실해야 한다는 객관주의를 고집하는 이들의 비판이 거세죠. 엘리트 언론들은 ‘의제설정 기능을 언론이 해야지 왜 시민이 하느냐’며 떨떠름하게 여겼어요.
그러나 언론과 언론인이 지역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고, 언론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이 이루어지기 시작했죠. 그 결과 공공저널리즘이 지역 내에서 확실히 자리 잡게 됐어요.”
《부산일보》 사장 시절…
종이신문이 위기를 겪고 있다. 중앙지, 지방지 다 마찬가지다. 디지털 기술발전이 신문산업을 크게 위축시켰다. 한국만 그런 게 아니다.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의 종이신문 역시 발행부수와 광고수익 감소로 몸살을 앓고 있다. 종이신문의 폐간 및 지면 축소, 배달지역의 축소, 구독료 인상 등 생존 방안들을 내놓았지만 거대한 위기의 수레바퀴를 막지 못하고 있다.
안병길 기자는 2015년부터 지난 2월까지 《부산일보》 사장으로 신문 경영을 현장에서 지휘했다. 한국지방신문협회 회장, 한국신문협회 부회장, 한국디지털뉴스협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그에게 종이신문의 미래를 물어보았다.
“지금 종이신문은 과거 부산의 대표산업이던 신발산업 같은 처지가 되었어요. 지방신문은 경영이 더 어려워졌고 《부산일보》 역시 예외가 아니었어요. 구독 대가로 경품을 주는 ‘비대 신문’ ‘자전거 신문’이란 말이 생겨났을 정도로 중앙지의 지방 공략이 거셌으니까요.
언론학자 중 몇몇은 신문산업이 사라질 것으로 예언하지만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물론 신문의 세(勢)가 약화될 것이나 신문이 지닌 고유한 영역을 계속 개척해나갈 것으로 봅니다. 왜냐면 인쇄 매체만이 가진 매력이 있고, 지금까지 그랬듯, 사람들의 정서적 지적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으니까요. 신문은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세요.
“종이신문의 경영은 지금보다 더 어려워질 테지만, 라디오와 비슷할 거라 생각합니다. 한때 라디오는 영상 미디어의 등장으로 사라질 것으로 봤잖아요. 하지만 고정 마니아층이 있는 라디오는 여전히 생동감 넘치는 현장의 소리를 전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종이신문 역시 잉크 냄새가 나는 신문을 집어 들며 그날의 세상 소식을 읽는 아날로그의 기쁨을 선사할 거라 봅니다.”
안 전 사장은 덧붙여 이런 말도 했다. “종이신문 중에서도 지방신문 위기는 더 절박하다. 그러니 저널리즘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신문 외 수익사업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사장 시절) 기자들이 충분히 월급 받고 해고 불안 없이 다닐 수 있어야 좋은 기사를 쓴다고 강조했어요. 저는 신문 외 사업에 눈길을 돌렸는데 일본의 중앙지나 지방지를 조사해보니 대개가 호텔 등 다양한 수익사업을 하고 있더군요. 《부산일보》 자매지인 《서일본신문》을 찾아간 적이 있어요. 글쎄, 신문사가 골프장, 호텔, 여행사, 방송사 등 24개 자회사를 갖고 있더라고요. 깜짝 놀랐습니다.”
안병길 사장은 취임 후 “신문이 적자라도 신문 외 경영으로 적자를 메우겠다”고 각오를 다졌다고 한다.
“《부산일보》에 윤전기가 5대 있었는데 본사를 포함해 3곳에 흩어져 있었어요. 이를 한곳으로 모으고, 이전한 윤전기 터(금정구 장전동)에다 아파트를 건립했어요. 《부산일보》는 시행사가 되어 건설업체와 파트너십을 맺었죠.”
― 신문 노조의 반대는 없었나요.
“‘사장은 밖에 나가 수익을 만들어오라’는 게 구성원들의 요구였어요. 처음에는 실패의 두려움으로 회의적인 시각이 있었죠. 경험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대박이 났죠.
또 다른 수익사업으로 본사(동구 수정동)에 윤전기와 발송시설을 들어내고 그 자리를 리모델링해서 각종 상점과 편의점, 병·의원을 입주시켜 임대수익을 창출했어요.”
이뿐만이 아니다. 《부산일보》는 중소 규모 비즈니스 호텔(영도구 봉래동)을 새로 지었고 자회사를 설립해 호텔운영도 직접 하고 있다. 호텔은 해안 도로변에 위치해 객실 대부분은 바다와 도심 조망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와 함께 북항 재개발 지역과 동부산 관광단지 주변의 땅 일부를 매입하는 등 신문사의 미래 먹거리를 마련해두었다.
피란수도 부산의 미래와 비전
부산은 6·25의 피란수도였다. 지금도 경사면에 차곡차곡 쌓인 집들부터 산을 깎아 만든 높고 가파른 계단이 있다. 천지가 산동네다.
낮에는 산비탈 동네가 안 보이지만 밤이면 불야성이다. 그러나 도시가 외각으로 팽창하면서 원도심과의 도시 내 격차 문제가 심각하다. 그는 신문사 사장에서 물러난 뒤 ‘원도심 미래연구원’을 설립했다.
“원도심이랄 수 있는 부산의 속살이 동구, 서구, 중구, 영도구입니다. 한때 부산의 중심지였지만 세월이 흘러 쪼그라들었어요. 주요 기관도 외부로 이전해버렸죠. 지역경제 역시 5명 미만의 소상공인 업체가 중심이고 전통시장과 골목시장이 많아 온라인 쇼핑 같은 소비 패턴 변화에 취약할 수밖에 없죠.
10년 전부터 부산시가 슬럼화된 원도심을 재생시키려 ‘산복도로 르네상스’ 프로젝트를 추진 중입니다. 원도심 지역 산복도로 일대의 지역 자원을 활용한 주민 참여형 도시 재생사업인데, 추진하다 보니 여러 문제가 생겼습니다. 살던 주민은 재개발에서 소외되어 쫓겨나게 된 것이죠.
어떻게 재개발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연구원을 만들었어요. 대규모 개발도 좋지만 사람 중심 재개발에 방점을 두고 추진해야 하지 않을까요?”
― 자신만의 부산론(論)이 궁금합니다.
“부산은 매력 도시입니다. 개방적이고 기질도 화끈하죠. 반면 불의를 못 참습니다. ‘부산 갈매기 기질’이랄까요? 장점을 잘 살리면 역동적인 도시가 될 수 있어요. 부산의 제일 큰 문제는 도시가 자꾸 침체된다는 점입니다. 인구가 줄고 제조공장마저 떠나버려 서민의 살림살이, 먹거리가 문제입니다.
그 돌파구는 해양도시 장점을 살리는 데 있어요. 낙후된 도심의 재개발과 바다라는 천혜의 자연조건을 활용하는 수밖에요.”
― 어떻게요.
“부산은 야경(夜景) 도시입니다. 야경이 그렇게나 아름답습니다. 원도심권의 천마산, 황령산, 영도에서 바라보는 부산 야경은 세계 어느 곳보다 아름답거든요. 이 야경을 관광 상품화해 해양 관광도시로 만들어야 해요. 또 크루즈선을 활용해 배를 타고 부산항 인근을 관광할 수 있도록 해양 관광시설을 다양하게 만들면 좋겠어요.”
안 전 사장은 광안대교를 유독 강조했다. 1990년대 해운대 신도시 건설로 인해 해운대구와 수영구를 잇기 위해 2003년 개통된 2층 구조의 해상교량이 광안대교다.
“광안리 바다 위를 지나는 광안대교에서 도심의 야경을 보면 어떨까요? 바닷속이 훤히 비치는 유리로 된 접근로를 만들어 걸어서 광안대교까지 이동하면 새로운 볼거리가 될 겁니다.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처럼 다리 위를 사람들이 걸어 다닐 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사실 교각 사이에 엘리베이터와 인도를 만들어놨어요. 만들어놓고 여태 사장을 시키고 있거든요.”
‘새로운 활력’에 굶주린 관광 부산, 야경 부산의 상징이 광안대교다. 인근 해운대 동백섬에서 서쪽으로는 누리마을 APEC 하우스와 날씬하게 직선으로 뻗은 광안대교가 넘실대는 바다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동쪽으로는 해운대 해수욕장이 부산다움의 늠름한 파도를 끌고서 달맞이고개를 넘고 있다.
그는 가덕도 신공항 이야기를 꺼냈다.
“대륙의 관문 도시답게 뱃길, 물길은 잘 연결돼 있어요. 안타까운 것은 일본 오사카, 나고야, 후쿠오카 같은 도시에 비해 인프라가 부족하달까? 특히 도시가 발전하려면 육로와 항구, 공항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돼야 해요. 김해공항은 현재 포화상태입니다. 관문 공항이 필요해요.
앞으로 비행기 탑승이 버스 타는 것만큼 폭발적으로 늘어날 겁니다. 김해공항을 확장해서 이용하면서 중장기적으로 가덕도 신공항을 건설하는 게 옳다고 봅니다. 가덕공항이 생겨도 김해공항이 폐쇄될 리는 없어요.”
― 마지막으로 2020년 부산의 민심을 어떻게 전망하세요.
“부산의 민심을 헤아리지 못하는 정당은 지지를 받을 수 없을 겁니다. 무턱대고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시대는 저물었다고 봐요. 시민 속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는 정치인과 정당이 선택받지 않을까요?”⊙
안병길(安炳吉·58) 전 《부산일보》 사장은 거시적 부산이 아니라 미시적 부산의 심장 박동 소리를 기록으로 전한 인물이다. 이 신문사의 베테랑 사회부 기자로 사건 현장을 두루 누볐다. 물론 사회부장과 정치부장 등을 맡은 다음 편집국장(2010년)이 되었다. 이후 2015년부터 4년간 신문사 대표이사로 재직하다 지난 2월 물러났다.
얼마 전 자유한국당의 영입 인사로 물망에 올랐었다. 보류가 되긴 했으나 ‘서울 사람들’은 그가 누군지 궁금해했다. 기자는 지난 10월 31일 서울 논현동에서 그를 만났다.
“부족한 저를 인재로 영입하겠다니 고맙죠. 늘 어디든 경쟁자가 있잖습니까. 잘 되리라 생각됩니다. …근데 정치가 참 험악하네요. 하하하.”
― 정치부장도 하셨지요.
“네. …곁에서 (기자로) 관전하는 것과 현실은 확실히 다르네요.”
― 노른자위 부서장만 하셨어요.
“정치부·사회부 같은 소위 ‘스트레이트 부서’만 돌았지만 광고국장, 판매국장까지 맡았어요. 기자 출신이 광고·판매까지 책임진 사례는 드물잖아요? 제가 총무국장, 문화사업국장 등 몇 개만 빼고는 신문사 보직을 거의 다 했어요.”
― 기자가 영업파트로 발령 나면 좌천 아닌가요.
“그런 것은 아니었고, 그 무렵 영업파트를 책임질 자원이 없어 사장님이 ‘당신이 가서 좀 해보라’고 하셔서 갔어요. 현역 시절, 저는 군소리 안 했어요. (위에서) 가라면 어디든 갔습니다. 그 자리에 가서 잘하면 다른 자리로 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 정말 그랬을까요.
“생소한 업무는 정말 힘들었어요. ‘왜 내(나)만 맨날 궂은일 시키냐’고 하소연하곤 했어요. 그런데 기피부서를 경험하니 훗날 신문사 경영에 큰 도움이 되었어요.”
안병길 전 사장의 고향은 경남 진주. 진주고를 나와 부산대 법대를 졸업했다. “판검사가 될 생각은 안 했다”고 한다. 처음으로 치른 언론사 시험에 덜컥 합격해 ‘부일(부산일보) 기자’가 된 것은 1987년 무렵이었다.
“사실, 출신을 말하자면 저야말로 흙수저, 무수저죠. ‘고구마 줄기 팔아서 학교 다닌다’고 할 정도로 고학(苦學) 비슷하게 학교를 다녔어요. 법학에 흥미를 못 느꼈고 군에 다녀와서 언론사 시험을 준비했습니다. 당시에도 콧대 높은 기자 되기가 어려웠어요. 그런데 첫 시험에 운이 좋게 됐는데 두려움도 컸죠. 하지만 저만의 ‘글쓰기’에 자신이 있었어요.”
흙수저, 33년간 ‘부일 기자’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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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한국기자협회가 선정한 ‘이달의 기자상’을 받은 안병길 기자. |
“사회부 초년병 기자 시절이었습니다. 어느 날 내근을 하고 있는데 한 통의 제보 전화를 받았어요. 가스 중독으로 사지 마비가 된 택시기사가 있다는 겁니다.
아시다시피 LPG 택시는 말 그대로 LP가스를 연료로 쓰잖아요. 당시 LPG 차는 배관 등의 문제로 가스 누출이 빈번했어요. 차가 쌩쌩 달리면 가스 냄새가 운전석 쪽으로 스며들었고 종일 운전하는 기사는 고스란히 그 냄새를 맡아야 했습니다.”
― 그래서 제보자를 만났습니까.
“취재해보니 ‘아, 이 사람은 가스에 중독된 게 맞다. 산재(産災)다’라고 확신하게 되었어요. (보도 후) 사회적인 파장이 컸습니다. 사람들이 그제야 택시기사가 가스에 노출될 수 있다고 인식하게 됐죠.”
그때부터 각 택시회사는 정기적으로 택시를 점검하고 가스 누출이 안 되도록 주의 조치를 취했다고 한다. 물론 택시기사 스스로 경각심을 높이기에 충분했다.
“사지가 마비된 택시기사의 아내 이름이 권정시(權貞是)씨입니다. 그 아내에 대한 후속 기사를 썼어요. 남편의 증세를 호소하며 생계를 위해 ‘민주 양말’을 팔고 있었죠. 그녀의 딱한 처지를 알게 된 택시기사들이 양말을 사주기 시작했습니다. 후속 보도 이후 사람들의 관심과 온정 덕에 그분 형편이 좀 나아졌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부산일보》 1990년 12월17일자 기사의 한 대목이다.
〈… “3년6개월의 차령이 다 된 고물차를 끌던 남편은 종종 눈이 따갑고 머리가 아프며 전신에 힘이 없다고 호소했습니다. 처음엔 택시기사들에게 흔히 있는 만성 피로쯤으로 생각했습니다.”(중략)
“이젠 돈도 기력도 모두 탈진 상태입니다. 당장 끼니도 이어가기 힘들고….”
주위를 에워싼 택시노동자들은 권씨의 아픔이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앞다퉈 양말을 사기 시작, 불과 몇 시간 만에 갖고 갔던 삼백 켤레가 모두 팔렸다. 새벽 4시께 퉁퉁 부은 다리를 이끌고 집으로 돌아온 권씨는 남편이 다시 직장을 되찾고 가정이 웃음을 되찾을 날을 그리며 꿈나라로 빠져들었다. 安炳吉 기자…〉
기자 안병길은 ‘공공저널리즘(public journalism)’에 관심이 많았다. 학술 전문서적인 《시민 속의 언론, 공공저널리즘》(2003년), 《행동하는 언론, 공공저널리즘》(2005년) 등을 펴냈고, 〈공공저널리즘이 정책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시민의 ‘공공생활(public life)’을 강조하는 것에 착안한 공공저널리즘은 1990년대 이후 미국 언론학계와 언론계의 화두로 부각될 만큼 새로운 언론운동의 하나로 주목받았다. 다른 말로 ‘시민저널리즘’이라 부른다.
“기자들은 흔히 모든 사회현상을 객관적 시각에서 바라보고 해석·분석하려 하지요. 그걸 ‘객관주의 언론(objective journalism)’이라 부르지만 저는 생각이 달랐어요. 너무 자주, 또 너무 오랫동안 많은 기자는 지역사회에서 발생하는 일이 자신과 무관하며, 매일매일 발생하는 뉴스를 전달만 해주면 그만이라는 식의 직업적 태도를 가져왔어요.
객관주의 언론의 신념이 저널리즘의 직업적 전문성을 제고(提高)했다지만, 객관주의의 가면(假面)에 안주하는 측면이 많았어요. 공공저널리즘 연구에 천착해오신 동아대 신방과 김민남 교수님을 뵙고 제 언론관이 바뀌게 됐어요.”
시민 속으로… 공공저널리즘과의 만남
2001년 여름, ‘부산 사나이’ 추신수가 MLB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서 뛰었던 것처럼, ‘부산 기자’ 안병길 역시 클리블랜드주립대에서 객원연구원으로 공공저널리즘을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1년간 배운 공공저널리즘은 한마디로 ‘시민 속으로 파고드는 시민저널리즘’이다. 시민, 즉 독자와 함께 호흡하고 대화하며, 쌍방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지역 이슈를 해결해나가는 ‘공동체 언론’을 말한다.
귀국 후 그는 2002년 9월부터 사회부장 직을 맡으면서 ‘우리 곁의 빈곤’ 시리즈를 시작했다.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을 안긴 이 기획물은 공공저널리즘을 표방한 남다른 기획, 남다른 취재였다.
“짐작건대 공공저널리즘을 지향한 우리나라 최초의 보도 프로젝트가 아닐까요? 사회복지 중에서 늘 중요한 게 ‘빈곤 문제’잖아요. 부자들의 재산도 상·중으로 나눌 수 있듯 빈곤도 그렇습니다. 당시 학자들 사이에서 ‘차상위(次上位)계층’이라는 생소한 개념에 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제일 바닥의 빈곤층보다 한 단계 위가 차상위 빈곤층입니다.
사실 빈곤층으로 분류된 계층은 정부에서 주는 돈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차상위 빈곤층은 여러 가지 이유로 기초생활 수급자가 되지 못해요. 부양할 가족이 있거나 차가 한 대라도 있으면 생활실태 조사에서 불가 판정을 받아요. 그 사람들은 ‘이럴 바에 차라리 수급자가 되는 것이 낫겠다’며 생업을 포기해 점점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지죠. 차상위층은 학자들 사이에서나 통용되던 때에 언론이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어 사회화시켰습니다.”
여러 차례 시리즈 기사를 쓴 뒤 《부산일보》는 부산시와 연계해 ‘빈곤 응급전화’를 가동했다.
“전화로 직접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는 분도 계셨고, 도움이 필요한 분들을 소개하는 경우도 많았어요. 전화를 받으면 찾아가서 즉시 해결해주는 시스템을 언론 주도로 만들었다는 데서 의미가 있죠. 계속 시스템을 운영할 수 없어 민간에 위탁, 운영을 넘겼지만 많은 보람을 느꼈습니다.”
사실 언론이 문제점을 지적하기보다 직접 문제해결에 나서기란 쉽지 않다. 안병길 사회부장의 기획기사는 부산시 복지정책은 물론 정부의 복지 시스템까지 변화시켰다. 공공저널리즘의 위력을 확인시킨 셈이었다.
2004년 사회부장에서 정치부장으로 보직이 바뀐 뒤에도 공공저널리즘 실험은 계속됐다. 이번에는 ‘빈곤 응급전화’가 아니라 ‘시민패널-후보 이슈 토론’이었다. 시민패널 기획은 일종의 유권자 중심의 선거 보도였다. 요즘은 언론사마다 시민단체나 학계 등 외부 전문가를 초빙해 후보자의 자질과 공약을 점검하는 경우가 많지만, 당시엔 획기적인 ‘신상’이었다.
“2004년 17대 총선 당시 공공저널리즘을 적용해 시민패널단을 만들었습니다. 총선 후보들의 공약을 시민의 눈높이로 검증하자는 시도였죠. 당시 언론은 검증 없이 후보들의 일방적 자기주장을 그대로 싣는 수준이었어요.
먼저 부산시 전체 선거구마다 5~6명씩 참가하는 패널단을 구성했죠. 패널이 총선 후보를 불러 2~3시간씩 질문을 하고 답변을 들었어요. 신문 양쪽 면을 모두 할애해서 시민이 후보자를 한눈에 볼 수 있게 했어요.”
한국기자협회는 《부산일보》의 ‘시민패널-후보 이슈 토론’ 기획에 ‘총선 보도상’을 수여했다. 전국 모든 언론의 총선 보도 중 가장 우수했다는 것이다.
“기자 시절을 돌이켜보면 사회 부조리를 파헤치거나 폭로한 기사도 떠오르지만, 그것보다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더 흥미를 느꼈고, 그 일에 천착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기본적으로 언론은 사회 약자를 대변해야 합니다. 사회 공동체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해결하려 노력해야 해요.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 언론이 정치권을 향해 ‘대안 제시도 안 한다’고 욕할 게 아니라 언론이야말로 대안을 제시해야 하지 않을까요?”
― 공공저널리즘은 제가 아는 전통적인 언론관과 다르군요.
“(공공저널리즘에 대한) 저항 또한 만만치 않았어요. 언론이 시민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객관적인 사실과 정보 전달에만 충실해야 한다는 객관주의를 고집하는 이들의 비판이 거세죠. 엘리트 언론들은 ‘의제설정 기능을 언론이 해야지 왜 시민이 하느냐’며 떨떠름하게 여겼어요.
그러나 언론과 언론인이 지역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고, 언론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이 이루어지기 시작했죠. 그 결과 공공저널리즘이 지역 내에서 확실히 자리 잡게 됐어요.”
《부산일보》 사장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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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8월 네팔 지진으로 많은 이재민이 발생했다는 외신을 접하자 《부산일보》는 초록우산어린이재단과 공동으로 ‘학교 다시 세우기 캠페인’에 나섰다. 안병길 사장이 네팔 현지 학교를 찾은 모습이다. |
안병길 기자는 2015년부터 지난 2월까지 《부산일보》 사장으로 신문 경영을 현장에서 지휘했다. 한국지방신문협회 회장, 한국신문협회 부회장, 한국디지털뉴스협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그에게 종이신문의 미래를 물어보았다.
“지금 종이신문은 과거 부산의 대표산업이던 신발산업 같은 처지가 되었어요. 지방신문은 경영이 더 어려워졌고 《부산일보》 역시 예외가 아니었어요. 구독 대가로 경품을 주는 ‘비대 신문’ ‘자전거 신문’이란 말이 생겨났을 정도로 중앙지의 지방 공략이 거셌으니까요.
언론학자 중 몇몇은 신문산업이 사라질 것으로 예언하지만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물론 신문의 세(勢)가 약화될 것이나 신문이 지닌 고유한 영역을 계속 개척해나갈 것으로 봅니다. 왜냐면 인쇄 매체만이 가진 매력이 있고, 지금까지 그랬듯, 사람들의 정서적 지적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으니까요. 신문은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세요.
“종이신문의 경영은 지금보다 더 어려워질 테지만, 라디오와 비슷할 거라 생각합니다. 한때 라디오는 영상 미디어의 등장으로 사라질 것으로 봤잖아요. 하지만 고정 마니아층이 있는 라디오는 여전히 생동감 넘치는 현장의 소리를 전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종이신문 역시 잉크 냄새가 나는 신문을 집어 들며 그날의 세상 소식을 읽는 아날로그의 기쁨을 선사할 거라 봅니다.”
안 전 사장은 덧붙여 이런 말도 했다. “종이신문 중에서도 지방신문 위기는 더 절박하다. 그러니 저널리즘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신문 외 수익사업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사장 시절) 기자들이 충분히 월급 받고 해고 불안 없이 다닐 수 있어야 좋은 기사를 쓴다고 강조했어요. 저는 신문 외 사업에 눈길을 돌렸는데 일본의 중앙지나 지방지를 조사해보니 대개가 호텔 등 다양한 수익사업을 하고 있더군요. 《부산일보》 자매지인 《서일본신문》을 찾아간 적이 있어요. 글쎄, 신문사가 골프장, 호텔, 여행사, 방송사 등 24개 자회사를 갖고 있더라고요. 깜짝 놀랐습니다.”
안병길 사장은 취임 후 “신문이 적자라도 신문 외 경영으로 적자를 메우겠다”고 각오를 다졌다고 한다.
“《부산일보》에 윤전기가 5대 있었는데 본사를 포함해 3곳에 흩어져 있었어요. 이를 한곳으로 모으고, 이전한 윤전기 터(금정구 장전동)에다 아파트를 건립했어요. 《부산일보》는 시행사가 되어 건설업체와 파트너십을 맺었죠.”
― 신문 노조의 반대는 없었나요.
“‘사장은 밖에 나가 수익을 만들어오라’는 게 구성원들의 요구였어요. 처음에는 실패의 두려움으로 회의적인 시각이 있었죠. 경험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대박이 났죠.
또 다른 수익사업으로 본사(동구 수정동)에 윤전기와 발송시설을 들어내고 그 자리를 리모델링해서 각종 상점과 편의점, 병·의원을 입주시켜 임대수익을 창출했어요.”
이뿐만이 아니다. 《부산일보》는 중소 규모 비즈니스 호텔(영도구 봉래동)을 새로 지었고 자회사를 설립해 호텔운영도 직접 하고 있다. 호텔은 해안 도로변에 위치해 객실 대부분은 바다와 도심 조망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와 함께 북항 재개발 지역과 동부산 관광단지 주변의 땅 일부를 매입하는 등 신문사의 미래 먹거리를 마련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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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기자 시절 안병길. |
낮에는 산비탈 동네가 안 보이지만 밤이면 불야성이다. 그러나 도시가 외각으로 팽창하면서 원도심과의 도시 내 격차 문제가 심각하다. 그는 신문사 사장에서 물러난 뒤 ‘원도심 미래연구원’을 설립했다.
“원도심이랄 수 있는 부산의 속살이 동구, 서구, 중구, 영도구입니다. 한때 부산의 중심지였지만 세월이 흘러 쪼그라들었어요. 주요 기관도 외부로 이전해버렸죠. 지역경제 역시 5명 미만의 소상공인 업체가 중심이고 전통시장과 골목시장이 많아 온라인 쇼핑 같은 소비 패턴 변화에 취약할 수밖에 없죠.
10년 전부터 부산시가 슬럼화된 원도심을 재생시키려 ‘산복도로 르네상스’ 프로젝트를 추진 중입니다. 원도심 지역 산복도로 일대의 지역 자원을 활용한 주민 참여형 도시 재생사업인데, 추진하다 보니 여러 문제가 생겼습니다. 살던 주민은 재개발에서 소외되어 쫓겨나게 된 것이죠.
어떻게 재개발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연구원을 만들었어요. 대규모 개발도 좋지만 사람 중심 재개발에 방점을 두고 추진해야 하지 않을까요?”
― 자신만의 부산론(論)이 궁금합니다.
“부산은 매력 도시입니다. 개방적이고 기질도 화끈하죠. 반면 불의를 못 참습니다. ‘부산 갈매기 기질’이랄까요? 장점을 잘 살리면 역동적인 도시가 될 수 있어요. 부산의 제일 큰 문제는 도시가 자꾸 침체된다는 점입니다. 인구가 줄고 제조공장마저 떠나버려 서민의 살림살이, 먹거리가 문제입니다.
그 돌파구는 해양도시 장점을 살리는 데 있어요. 낙후된 도심의 재개발과 바다라는 천혜의 자연조건을 활용하는 수밖에요.”
― 어떻게요.
“부산은 야경(夜景) 도시입니다. 야경이 그렇게나 아름답습니다. 원도심권의 천마산, 황령산, 영도에서 바라보는 부산 야경은 세계 어느 곳보다 아름답거든요. 이 야경을 관광 상품화해 해양 관광도시로 만들어야 해요. 또 크루즈선을 활용해 배를 타고 부산항 인근을 관광할 수 있도록 해양 관광시설을 다양하게 만들면 좋겠어요.”
안 전 사장은 광안대교를 유독 강조했다. 1990년대 해운대 신도시 건설로 인해 해운대구와 수영구를 잇기 위해 2003년 개통된 2층 구조의 해상교량이 광안대교다.
“광안리 바다 위를 지나는 광안대교에서 도심의 야경을 보면 어떨까요? 바닷속이 훤히 비치는 유리로 된 접근로를 만들어 걸어서 광안대교까지 이동하면 새로운 볼거리가 될 겁니다.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처럼 다리 위를 사람들이 걸어 다닐 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사실 교각 사이에 엘리베이터와 인도를 만들어놨어요. 만들어놓고 여태 사장을 시키고 있거든요.”
‘새로운 활력’에 굶주린 관광 부산, 야경 부산의 상징이 광안대교다. 인근 해운대 동백섬에서 서쪽으로는 누리마을 APEC 하우스와 날씬하게 직선으로 뻗은 광안대교가 넘실대는 바다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동쪽으로는 해운대 해수욕장이 부산다움의 늠름한 파도를 끌고서 달맞이고개를 넘고 있다.
그는 가덕도 신공항 이야기를 꺼냈다.
“대륙의 관문 도시답게 뱃길, 물길은 잘 연결돼 있어요. 안타까운 것은 일본 오사카, 나고야, 후쿠오카 같은 도시에 비해 인프라가 부족하달까? 특히 도시가 발전하려면 육로와 항구, 공항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돼야 해요. 김해공항은 현재 포화상태입니다. 관문 공항이 필요해요.
앞으로 비행기 탑승이 버스 타는 것만큼 폭발적으로 늘어날 겁니다. 김해공항을 확장해서 이용하면서 중장기적으로 가덕도 신공항을 건설하는 게 옳다고 봅니다. 가덕공항이 생겨도 김해공항이 폐쇄될 리는 없어요.”
― 마지막으로 2020년 부산의 민심을 어떻게 전망하세요.
“부산의 민심을 헤아리지 못하는 정당은 지지를 받을 수 없을 겁니다. 무턱대고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시대는 저물었다고 봐요. 시민 속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는 정치인과 정당이 선택받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