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3~1998년 英 최고 악단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객원지휘자로 초청
⊙ 필하모니아 지휘한 후 모두 CD 14장을 녹음, 이 중 10장 해외 출시
⊙ 옛 소련 출신의 박탕 조르다니아에게서 지휘 배워… 대우 金宇中 회장이 후원
⊙ 父 유진오가 쓰러진 1969년 9월 9일 무슨 일이… 母 ‘이명래고약’ 창업주 이용재
⊙ 필하모니아 지휘한 후 모두 CD 14장을 녹음, 이 중 10장 해외 출시
⊙ 옛 소련 출신의 박탕 조르다니아에게서 지휘 배워… 대우 金宇中 회장이 후원
⊙ 父 유진오가 쓰러진 1969년 9월 9일 무슨 일이… 母 ‘이명래고약’ 창업주 이용재
- 지휘자 유종. 새로운 도전을 꿈꾸고 있다.
해외 유명 오케스트라와 협연해 음반을 남긴 한국 지휘자 중 5명을 꼽으라면 안익태·곽승·금난새·정명훈·유종을 꼽을 수 있다.
정명훈(鄭明勳)이 70여 장, 금난새가 3장, 곽승(郭昇)이 1장, 안익태는 1957년과 1961년 할리우드 볼 심포니와 LA 필을 이끌고 자신의 ‘한국환상곡’을 녹음한 일이 있다.
대한민국 헌법의 설계자로 알려진 현민(玄民) 유진오(兪鎭午·1906~1987) 박사의 아들 유종(兪淙)이 세계적 악단인 영국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무려 14장을 녹음하고, 그중 10장이 해외 출시된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유종 지휘자는 1957년생이니 올해 예순셋. 울산시향과 포항시향의 상임지휘자를 그만둔 뒤 행적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한국 클래식계는 어쩌면 알면서 그를 외면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는 열다섯에 한국을 떠나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등에서 수학했고 미국과 런던, 우크라이나에서 수석지휘자, 객원지휘자 등을 거쳤다. 그러니 학연·지연에서 국내파에게 밀릴 수밖에 없다.
유종은 명문가의 후손이다. 고려대 총장과 초대 법제처장, 대한민국 헌법 기초위원, 한일회담 수석대표(1960년)를 지낸 유진오의 3남이다. 그의 모친은 ‘이명래고약’으로 유명한 이명래의 딸 이용재(李容載·1922~2009)다. 유진오 박사는 두 번의 상처(喪妻) 후 1956년 5월 이용재와 결혼해 3남 종을 낳았다.
기자는 지난 5월 24일 그를 만났다. 60대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동안이었다.
유종은 1993~1998년 영국 최고 악단인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Philharmonia Orchestra)에서 6년 연속 객원지휘자로 초청받았다. 서른일곱부터 마흔두 살까지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던 것일까.
“1993년 무렵, 우크라이나에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구(舊)소련이 붕괴된 직후였는데, 제 지휘 스승(박탕 조르다니아)이 망명 10주년 기념연주회를 ‘해방’된 우크라이나에서 할 때 동행하면서 머무르게 됐어요.
그 시절만 해도 컴퓨터 같은 전자장비나 디지털 녹음기를 찾아보기 어려웠어요. 제정(帝政)러시아 때부터 이어온 음악가들의 자부심 외엔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라 저는 영국의 한 녹음 프로듀서에게 우크라이나 악단의 실황 녹음을 부탁했죠.
그런데 그 프로듀서는 제가 지휘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것이었어요. 과거 KBS교향악단을 지휘한 베르디의 ‘레퀴엠’을 비디오테이프에 담아 보냈어요. 시간이 흘렀고 우크라이나 연주회 일정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왔더니 엄청난 길이의 팩스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영국에서 제 지휘 테이프를 보고 ‘당장 런던을 방문할 수 있냐’는 말과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녹음하는 것을 제안하니 직접 만나 상의하자’는 내용이 팩스에 담겨 있었습니다.”
眼目의 차이, 두 결정
― 그래서 영국으로 날아갔겠군요.
“황당한 제안이라 믿기 어려웠지만 영국을 찾았지요. 첫 만남에서 저는 거듭 우크라이나 악단의 녹음을 부탁했지만, 영국인 프로듀서 생각은 완고했어요. 우크라이나가 아니라 영국에서, 그것도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해달라는 요청이었죠.”
세상일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1년 전 KBS교향악단 총감독은 서른여섯의 그에게 직선적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휘를 너무나 못했다는 말을 들어서, KBS교향악단이 당신을 다시 초청하기 어렵다.”
그런데 그 지휘 녹화 테이프가 지휘자 유종의 운명을 바꾸어버렸다. 두 달 후 런던으로 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했고 첫 CD까지 발매했으니 말이다.
1994년 발매된 첫 CD의 제목은 〈러시안 명곡집(Russian Masterpieces)〉. 무소륵스키의 ‘전람회의 그림’과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왕벌의 기행’ 등을 담았다.
― 안목의 차이입니까.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납니까.
“굳이 음악계만이 아니라 우리나라가 당면한 문제는 어제나 오늘이나 똑같습니다. 전문가 자리에 전문가가 있지 않으니 그런 일이 생겨요. 웃기는 일은 이듬해 KBS 초청으로 베르디의 ‘레퀴엠’을 또 지휘했어요.”
― 부끄러웠나 봅니다.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기준이 없어서일 겁니다.”
필하모니아 휴 빈 악장과의 첫 만남
유종은 1990년대 중·후반 무렵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 후보로 거론된 적이 있었다.
― 어떻게 된 겁니까.
“제가 필하모니아를 지휘하던 1990년대 초에는 상임지휘자 제도가 없었고, 음악감독으로 시노폴리(Giuseppe Sinopoli·런던필 관현악단의 지휘자 역임)가 있었는데, 1년에 한 번 지휘했습니다. 여러 번 초청된 객원지휘자로는 전설적인 지휘자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Carlo Maria Giulini), 미하엘 잔덜링(Michael Sanderling), 예브게니 스베틀라노프(Evgeny Svetlanov) 같은 고령(高齡)의 지휘자가 있었어요.
연주가 많아 악장은 세 명이 돌아가면서 했는데, 그중 휴 빈(Hugh Bean·1929~2003)은 카라얀(Herbert von Karajan·1908~1989)의 악장을 역임한 전설적인 음악가였고, 단원 중 최고령자였어요. 제 녹음과 연주는 거의 휴 빈이 맡았습니다. 그가 ‘줄리니, 잔덜링, 유종의 연주만 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죠.”
유종은 휴 빈과의 인연을 더 소개했다.
“공교롭게도 필하모니아 단원 중에서 처음 만난 이가 휴 빈 악장이었죠. 첫 녹음 때 일찍 연주회장에 도착하려고 했으나 이미 무대에서 어떤 할아버지가 혼자 연습을 하고 있었어요. 그분이 휴 빈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존경하던 음악가라 저로선 영광이었죠.
왜 새벽부터 나와 연습하는지 궁금했어요. 그분 설명은 이랬습니다.
‘노인네라 손이 굳어서 젊은이와 경쟁하려면 젊은이보다 더 많이, 그리고 더 미리 연습하고 몸을 풀어야지요.’”
― 필하모니아와의 녹음 첫 곡을 무소륵스키(Ivo Pogorelich Mussorgsky·1839~1881)의 ‘전람회의 그림’을 선택했는데 이유는 뭡니까.
“제가 12세 때 아버지께 선물로 받은 레코드가 그 곡이었고 연주는 카라얀이 지휘한, 바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연주였지요. 이미 명반으로 유명했는데, 그래서 저는 그 음반을 녹음할 때 단원들에게 보이며 말했죠.
‘고백할 것이 있어요. 여러분의 연주가 저에게 평생 감동을 줬습니다.’
휴 빈은 그 음반에다 사인을 해줬어요. 그리고 필하모니아와의 두 번째 녹음 곡이 발라키레프(Mily Balakirev·1837~1910)의 ‘이슬라메이’였는데 필하모니아가 1950년대에 녹음한 곡입니다. 마타치치(Lovro von Matacic·1899~1985)가 지휘한 그 음반은 오래전에 잊혔지만 저는 그 음반도 녹음할 때 필하모니아 단원에게 보여줬습니다. 그때 휴 빈 악장이 이렇게 말했어요.
‘저도 고백할 것이 있어요. 그 녹음도 제가 했거든요.’
단원들 모두 환호하며 웃었어요. 필하모니아는 처음부터 제게 따뜻한 분위기였습니다.”
지휘자 카라얀, 박탕 조르다니아와의 인연
― 휴 빈과의 첫 연주회는 기억나세요.
“그럼요. 런던에서의 첫 연주회는 녹음 후 1년 뒤에 있었는데, 저명한 평론가가 말하기를 ‘연주회의 마지막 음이 울리고 나니, 악장 휴 빈은 마치 벌떡 일어나 지휘자의 볼을 꼬집어보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고 했습니다. 그 뜻을 이해 못 해 다시 물으니 ‘악장의 눈에 어린 지휘자가 대견스럽고 귀엽게 보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유종과 필하모니아 사이의 인연은 갑자기 생겨난 것은 아니다. 1980년대 20대의 그에게 카라얀은 자신의 리허설, 음반제작, 비디오 촬영 등 모든 것을 참관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카라얀은 리허설만큼은 일반인에게 공개하지 않는 이로 유명하다. 실제로 허락 없이 리허설을 보는 사람이 발견되면 그 사람이 자리를 뜰 때까지 리허설을 멈췄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그런 카라얀이 젊은 유종에게 리허설을 볼 수 있게 허락한 것은 사람을 보는 안목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의 말이다.
“물론 카라얀의 연습 장면을 본다고 지휘 비결을 간파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어요. 카라얀은 한 번도 자기의 지휘 비결을 가르친 적이 없어요.”
어쨌든 카라얀을 관찰하기 위해 그는 여러 차례 필하모니아를 찾았던 것이다.
― 지휘는 누구에게 배웠습니까.
“지휘 스승은 박탕 조르다니아(Vakhtang Jordania·1943~2005)입니다. 그와의 만남은 운명적이었어요. 그때까지 배운 지휘를 뒤엎고 다른 차원의 지휘법을 10년에 걸쳐 다시 배웠으니까요.
그러나 조르다니아는 자발적으로 가르친 게 아닙니다. 제가 일일이 질문을 던진 것에 한해 가르침을 주었기에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박탕 조르다니아는 옛 소련 그루지야 출신이다. 레닌그라드 음악원(現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공부한 그는 1971년 카라얀 지휘 콩쿠르에서 최고상을 받으며 지휘자로서 이름을 처음 알렸다. 1983년 서방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예브게니 므라빈스키의 부지휘자로 있었으며 레닌그라드 라디오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으로 활동했다. 그는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KBS교향악단의 수석 객원지휘자, 대구시향 제7대 지휘자(2002~2004)를 역임한 적도 있다. 계속된 유종의 말이다.
“소련의 유명 지휘자가 망명했는데, 서방에선 그가 누군지 몰라 연주회가 거의 없었습니다. 저는 조르다니아가 스웨덴에 망명했을 때 스웨덴의 음악가 친구를 통해 처음 알게 됐어요. 지휘자는 ‘청기와 장수’와 같아서 절대로 비방을 안 가르쳐줍니다. 그리고 너무나 복잡한 고단위 기술이 눈 깜빡할 순간에 지나가기 때문에 눈을 부릅뜨고 봐도 알기 어렵죠.
저는 고차원의 지휘를 당시 뉴욕에 정착한 조르다니아에게 배우고 싶었는데, 서울에서 ‘라흐마니노프의 밤’ 연주회(1984년 무렵)를 지휘하고 찾아갈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모 잡지사의 청탁을 받아 그분을 인터뷰하게 되었고 그 인연으로 조르다니아가 제 연주회에 참석했습니다. 망명 직후라 시간 여유가 많았던 조르다니아는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지휘의 모든 것을 저에게 전수했습니다.”
― 그 시절, 필하모니아에서 유종은 어떤 존재였을까요.
“단원들이 짓궂게 객원지휘자에게 별명을 붙이곤 하는데,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모독적인 별명도 있었어요. 나중에 우연히 듣게 된 제 별명은 ‘헤르베르트 폰 코리안(Herbert von Korean)’이었어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떠올랐나 봅니다, 하하하. 제 별명을 어머니께서 들으시고 ‘그 표현은 칭찬이 아니니 명심해라’며 엄숙하게 말씀하셨죠.”
카라얀과 코리안, 金宇中 회장
― 카라얀과 코리안이라….
“(카라얀을) 모방한다는 부정적인 표현도 있겠으나, 아마도 기대가 컸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 ‘기대’가 무엇이었냐는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음악가로서 제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기대에 얼마만큼 부흥했는지 여러 장의 CD로 평가받고 싶습니다. 다만 지휘자의 업무는 불행히도 음악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국립이나 시립 교향악단의 경우 공무원과 정치가의 비위를 잘 맞춰주는 것도 지휘자의 임무죠. 사립교향악단은 엄청난 재정문제가 잘 해결되게 직간접적으로 스폰서를 움직이는 것 또한 지휘자의 일이죠. 반대로 행정과 금전을 쥔 자의 입장에서 보면, 말 잘 듣는 꼭두각시 지휘자가 다루기 편리합니다.”
그는 이 대목에서 음악을 둘러싼 현실적인 얘기를 구체적으로 말했다.
“왜 교향악단이 스폰서가 필요할까요. 공연티켓을 잘 팔면 그만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신문이나 잡지에 실린 글이 좋다고 사업이 됩니까? 예술이 꽃을 피우려면 그만큼 지원이 필요합니다. 예술가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예술이 완성될 수 없어요. 지휘자의 악기는 교향악단인데, 음악은 연주하는 즉시 증발해버립니다. 모든 예술 중 제일 추상적이고 규모가 큰 것이 교향악이죠.
일본은 기업과 개인이 무명의 음악가들에게 후원을 많이 합니다. 저는 대우 김우중(金宇中) 회장님을 1983년에 찾아간 계기로 이듬해 ‘라흐마니노프의 밤’ 연주회를 대우 후원으로 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10년 뒤 영국에서 저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관계가 급속도로 발전할 때, 다시 한 번 김 회장님과 대우는 선뜻 스폰서를 해주었어요. 사실 광고비용과 비교하면 예술에 대한 후원 금액은 작지만 효과는 큽니다. 김 회장님은 제가 평생을 노력해도 다 갚을 수 없는 도움을 주셨어요. 그리고 대우의 스폰서 계약이 끝나갈 때쯤 재계약을 고민하신다고 들었는데, 그 후 (IMF로) 대우사태가 벌어졌어요.”
유종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후 모두 CD 14장을 녹음했다. 이 중 10장이 출시되는데 일본의 엑스톤(EXTON) 레이블이 2장이었다. 작년 10월에 발매됐다.
작년에 발매된 음반은 허버트의 ‘아일랜드 광시곡’과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를 커플링한 음반과 라흐마니노프의 칸타타 ‘봄’과 합창교향곡 ‘종’을 묶은 음반이다.
“녹음할 때마다 이 곡이 마지막 녹음이라 생각하며 최선을 다했어요. 결과는 제 기준에 못 미쳤다고 느꼈습니다. 녹음 편집을 하며 만족을 못 했고, 결국 여러 CD의 발매를 늦추게 되었어요. 불행히도 이후 CD는 유행을 잃었고 음반업계는 형체를 찾아볼 수 없는 수준으로 전락하고 말았어요.
2년 전, 아버지의 소설 〈여직공〉이 희곡으로 각색되어 영국에서 순회공연을 했는데, 제가 그 작품을 번역했어요. 순회공연 차 영국에서 만난 옛 친구가 ‘왜 CD 발매를 안 했냐’는 물음에 자극받았습니다.
이번에 나온 두 장의 CD는 거의 20년 전에 편집만 하고 마무리 작업은 안 했던 것인데, 세계 최고 사운드를 만드는 일본 프로듀서가 녹음한 것들입니다. 어쩌면 영원히 빛을 못 볼 뻔했어요.”
1969년 9월 9일, 유진오가 쓰러지던 날…
― 부모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유진오 박사가 쉰둘에 유종 선생님을 낳으셨어요.
“저는 아버지와 대화를 굉장히 많이 했어요. 여섯 살 때 이미 아버지와 친구처럼 대화를 나눴으니까요. 정치든 경제든 교육이든 주제를 가리지 않았어요.
어떻게 보면 아버지는 불운한 분이셨어요. 두 번이나 상처하셨으니까요. 천주교 신자인 어머니(이용재)의 환자분이 (아버지에게) 소개하셨지요. 1930년대 아버지 소설을 보면 당대 현대 여성을 묘사한 장면이 많은데 마치 어머니에게 감명을 받아 쓰신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할까요? 물론 젊은 시절에는 두 분이 뵌 적은 없어요.”
현민의 세 번째 아내는 명래제약 창업주 이용재 여사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던 이명래(1850~1952) 선생이 1906년 프랑스인 신부에게 약학을 배워서 만든 종기 치료제가 이명래고약이다. 선생이 별세한 뒤 막내딸이자 내과 의사던 이용재가 1956년 서울 종로구 관철동에 명래제약소를 세우고 고약을 대량 생산했다.
“욕창이나 종기가 난 데도 쓰였지만 멍든 곳이나 가시를 빼내는 데도 쓰였어요. 제가 어머니께 물었어요. ‘이렇게 싸면 어떻게 팔아요?’ 하고 말이죠. 어머니는 ‘저 백성을 봐라. 어떻게 1전 이상을 받을 수 있겠느냐’고 하셨어요. 전국에서 고약을 사려고 몰려들어 새벽부터 번호표를 나눠주었다고 해요. 그런데 이명래고약은 장점이자 단점이 상업화에 관심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어머니는 평생 이명래고약을 원래 성분 그대로 공급하는 데 힘썼지요.”
이용재 여사는 2009년 11월 12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올해가 10주기다.
― 기억 속 유진오 박사는 어떤 분이셨나요.
이 질문에 유종은, 신민당 총재 시절인 1969년 9월 10일 아버지 유진오 박사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야기를 시작했다. 가장 고통스런 순간으로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당시를 부연설명을 하자면, 박정희 정권이 3선 개헌안을 처리하려 하자, 유진오는 그해 1월 17일 기자회견을 열고 “당의 운명을 걸고 3선 개헌 저지 운동을 벌이고, 소속의원의 총사퇴도 고려하겠다”고 밝혔을 정도로 강경했다. 그러나 그는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3선 개헌안은 통과되고 말았다. 병석에 누웠지만 박정희 정권의 회유와 지지 요청을 여러 번 거절했다고 한다.
“당시 박정희 정권에 맞서 야당은, 그러니까 헌법을 기초한 아버지는 ‘3선 개헌안은 안 된다’는 입장이었죠. 국회에 가서 처음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앉혀놓고 토론하기로 한 전날, 아버지는 그만 풍이 와서 못 가신 거예요.”
그는 유진오가 쓰러지기 전날 밤(69년 9월 9일)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날 쌀쌀했는데 아버지가 집 안에 들어가지 않으셨어요. 제가 ‘들어가세요’ 하니 ‘답답해’ 그러셨죠. 아버지를 모시고 들어갔는데 그날따라 제가 집에서 목욕을 했어요. 아버지가 ‘(목욕 소리가) 시끄러워 못 자겠다’고 하셨어요. 절대로 언성을 높이는 분이 아니신데…. 좀 이상한 느낌이 들었어요.
이튿날 아침에 박순천(朴順天· 1898~1983)씨하고 (야당에서) 누가 왔는데 아버지가 못 일어나시는 거예요. 밤새 풍이 와서 말씀을 못 하시고 침을 흘리시며…. 그날이 3선 개헌안을 두고 토론하기로 한 역사적인 날인데….”
― 당시 거주하던 집은 어디에 있었나요.
“서울 필동이었어요. 돈 없는 야당이 전당대회를 우리 집에서 했습니다. 아버지는 정말 돈 한 푼 안 받고 그 시절 야당을 했어요. 결국 어머니 덕택이에요. 아버지께서 생전 뵙지도 못한 장인어른(이명래)을 왜 그렇게 존경하셨냐 하면 결국은 처가 덕택에 정치를 했으니까요.”
― 아버지는 재산이 없었나요.
“전혀 없었어요. 돈에 관심이 없었어요. 어머니도 마찬가지셨고요. 그나마 싼 고약이 많이 팔려서 재산이 좀 있었는데 어머니는 아버지를 위해 서슴지 않고 다 쓰신 거예요. 그래서 야당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이고, 야당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검은돈의 유혹 없이 정치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지휘자 토스카니니와 ‘불쌍한 할아버지’
― 엉뚱한 질문인데요, 지휘는 어떻게 합니까.
“음… 지휘는 박자를 젓는 게 아니고요, (연주 시간이) 1시간이라고 하면, 여기서 저기까지 전체를 보고 있어야 해요. 눈앞에 콩나물 하나하나까지 파악하되 너무 근시안이면 먼 곳이 안 보이죠.
지휘라는 것은 건축 같기도 하고, 미술하고도 관계 있고, 운동하고도 관계가 있어요. 어느 지점까지 간다면 어느 길로 가야 할지 아는… 어쩌면 정치일지 모르고…. 그러나 결국엔 철학이 아닐까요.
서양음악에서 작곡은 절반의 미완으로 봐요. 연주가 있어야 완성되니까요. 오선지 위에 그려진 콩나물의 의미, 작곡가의 의도, 작곡가의 생애를 파악하지 않고선 그 작품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휘가 필요한 것이죠.
제가 교향곡 한 편을 지휘하는 데 10년 이상이 걸립니다. 악보를 보고 또 보는 것은 기본이죠. 그 곡을 연주한 모든 사람의 연주를 들어봅니다. 녹음기술이 발달하기 전부터 최근까지… 그리고 곡에 관계된 책, 시대와 관계된 자료, 특히 건축 부문의 자료를 열심히 찾아봅니다. 작곡자가 어떻게 살았느냐가 음악과 관련이 많거든요.
그렇다고 10년 동안 매일 그것만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터넷에 있는 정보들은 부정확해 위험해요.”
유종은 유년시절 AFKN(주한미군방송)에서 지휘자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1867~1957) 지휘를 보고 매료되고 말았다. 어쩌면 그가 지휘자의 길을 걷게 된 것도 토스카니니의 강렬한 인상 때문인지 모른다. 그에게 ‘불쌍한 할아버지’라는 별명을 붙였는데 왜 직관적으로 그런 별명을 붙였는지 나중 진짜 지휘자가 되어 알게 됐다고 한다.
“그 시절, 유성기에 리스트의 ‘헝가리 광시곡’을 걸어놓고 주위를 뱅글뱅글 돌며 그 곡을 듣고 또 듣곤 했어요. 그때 듣던 SP판을 아직도 갖고 있어요. 부모님은 저를 위해 (유성기를) 틀어주진 않으셨지만, 저는 교향악단이 만드는 소리를 흥미롭게 느꼈어요.
AFKN의 클래식 프로그램에서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베르디의 ‘운명의 힘 서곡’ 같은 오페라를 자주 봤는데, 속으로 ‘지휘자를 통해서만 음악이 만들어지는가 보다’ 생각했죠. 토스카니니가 나오면 ‘불쌍한 할아버지가 나왔다’고 했는데, 50년이 지나 똑같은 필름을 보게 됐어요. 그때 제가 왜 ‘불쌍한 할아버지’라고 별명을 지었는지 알 수 있었어요.”
― 어떤 의미일까요.
“토스카니니는 너무 힘들게 지휘했어요. 지휘는 힘들게 하면 안 돼요. 땀을 흘려서도 안 됩니다. 연주하는 단원이 땀을 흘려야지요. 얼마나 기술이 부족하고 자신감이 없으면…. 지휘자는 지도자인데, 지도자가 힘들어하면 밑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임무를 수행하나요. 회사나 정치도 똑같습니다. 지도자가 흔들리면 안 되거든요.”
당시 TV 속 토스카니니는 땀을 비 오듯 흘렸던 것이다. 그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제가 어느 날 심장 수술을 하게 된다면 부분마취만 부탁할 겁니다. 수술하는 의사의 얼굴을 보고 싶거든요. 만일 의사 얼굴에 진땀이 나고 표정이 일그러지면 ‘이제 끝이구나’ 하고 스스로 생명을 접을 겁니다.”
악단 수준은, 그 악단이 있는 도시나 국가 수준과 흡사
― 지휘자의 역할이 왜 중요합니까.
“북한 평양에서 하는 매스게임(집단체조)이 예술이냐, 아니냐를 두고 말들이 많지만 음악을 기계적으로 만들면 아름답지 않아요. 100여 명의 연주단과 500여 명의 합창단이 동시에 한 사람의 손길에 맞춰 화음을 이루는 것은 인류가 만든 제일 어렵고 우아한 창작품이 아닐까요.
추상적인 음만 가지고 눈에 안 보이는 것을 느낄 수 있는 형체로 만드는 것을 가능케 하는 이가 바로 지휘자입니다.”
― 지휘의 길이 왜 어렵나요? 작곡가의 의도와 지휘자의 해석 사이 간극을 어떻게 메우나요.
“100명의 연주 잘하는 젊은이를 모은 악단이 연주하면 100명의 독주(獨奏)가 됩니다. 악단이 아름다운 음을 창조하려면 개개인의 실력이 독주자만큼 뛰어나지 않더라도 경험을 토대로 100명이 한마음, 한뜻으로 합칠 때 비로소 합주(合奏)가 됩니다.
한국의 지휘자들은 못하는 단원을 자르고, 패기 있는 젊은 단원을 뽑는 것이 좋은 악단을 만드는 지름길이라 요즘도 착각하고 있습니다. 교체하면 신선감은 생기겠죠.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합주도 사회생활과 같아요. 경력 있는 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것이 진짜 기술입니다. 남하고 같이 공존·공유할 수 있고, 이견이 있더라도 이견의 정당성을 떳떳이 말할 수 있는 존재… 그런 분이 악단에 존재할 때 제대로 합주할 수 있어요.
한국의 근대 교향악 역사는 큰 실수를 했어요. 자꾸 단원을 바꾸었던 것입니다.”
유종은 안익태와 정명훈을 제외하면 세계적인 악단을 장기간 지휘하고 수십 장의 음반을 낸 유일한 한국인이다. 아시아의 클래식 강국인 일본에서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는 한국 악단의 세계화를 위해 이런 덕담을 꺼냈다.
“(한국처럼) 학연·지연, 심지어 군 복무로 생긴 인연까지 엮어 만든 사회는 합주를 할 수 없습니다. 한국의 음악가 수천 명을 심사하며 느낀 점이 있는데, 아무리 실력이 없는 연주자도 곡 하나는 훌륭한 연주를 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박자, 음정 등 꼭 갖춰야 할 기본이 안 돼도, 한 곡을 근사하게 하는 것은 입시 위주로 생긴 기형적인 사회시스템이 가져온 결과로 보여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겉 포장만 잘하면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있다고 믿고 있어요.
기초가 없는 길은 몇 년이 안 돼 사라지고, 재포장을 하더라도 계속 망가집니다. 기초가 단단해야 여유가 생겨 남을 배려할 수 있는 마음이 생깁니다. 사회의 ‘합주’는 그때 생깁니다. 교향악단은 사회를 축소해놓은 모델 같아서 악단의 수준과 성향을 보면, 그 악단이 있는 도시나 국가의 장단점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한국 악단의 학연·지연의 문제에 대해 이런 충고를 덧붙였다.
“일본과 중국에서는 악단 단원 전부를 외국 유학뿐만 아니라 인정받는 외국 악단에서 경험을 쌓은 자들을 모국으로 불러들여 단시일에 노련미가 넘쳐 흐르는 악단을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방침은 교향악단뿐만 아니라 첨단기술을 필요로 하는 과학·의학 등 사회 각계에서도 활용하고 있습니다.”
“지휘를 배우고 싶다고 찾아오는 이가 없어 안타까워요”
― 화려한 이력에도 활동을 중단하고 있는 이유는 뭔가요.
“국내 음악계에서 저를 압니다. 알기 때문에 무시하고… 모르는 사람도 있지만, 아는 사람들이 저를 안 챙겨줘요. 저를 위협적인 존재로 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포항시향에서의 경험이 저에게 큰 트라우마를 줬습니다. 긍정적이고 순수한 의도를 정반대로 몰고 간 일부 단원들을 원망하는 게 아니라, 제 능력의 한계에 실망했죠.
또 경제적 파산에 따른 스트레스가 컸고, 충분히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저를 외면한 것도 이유입니다. 몇몇 외국인 친구의 적극적 도움으로 긴 시간을 연명할 수 있었어요.
그렇다고 넋 놓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브루크너의 교향곡 제3번의 완성판을 만들었습니다. 브루크너는 (3번 교향곡을) 생전 여섯 번 이상 뜯어고쳤지만 확실한 완성판을 못 만들고 세상을 떠났어요.
저는 결국 교향곡 제3번의 완성판을 만들어 아르메니아 국립교향악단을 지휘해 세계 초연(初演)을 했습니다. 브루크너의 음악은 길고 따분해 청중이 지루하게 느끼기 쉬운데, 기립박수를 받았어요.
또 군대에서 다친 신경 때문에 포기했던 첼로를 40년 만에 다시 연주할 수 있게 되었고, 손가락이 다칠까 봐 마음껏 못 했던 무술도 수련하고 있어요. 아버지가 남긴 미발표 소설의 출판을 위해 편집을 시작했는데, 일제강점기 때 출판이 불가능했던 내용이 담긴 장편소설입니다. 원고가 정리되면 출판사를 찾아볼 생각입니다.”
― 유종 선생님에게 지휘를 배우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지휘를 배우고 싶다고 찾아오는 이가 없어 안타까워요.
교향악단 연주회를 국내든 해외든 요새 잘 안 갑니다. 미국과 유럽에서 광적으로 찾아다니던 제 청년기와 대조적이죠.
악단의 단원이 지휘자보다 음악을 더 잘 알고, 심지어 객석에 있는 음악애호가만큼도 지휘자가 음악을 모르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요즘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정치 상황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크라이나는 최근에 정치 경험이 없는 코미디언을 대통령으로 뽑았습니다. 그 사람이 국가를 얼마나 잘 이끌어갈지 모르지만 어떻게 이 지경으로 몰락하나…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저는 질투도 욕심도 없지만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언제라도 제 도움을 요청한다면 기꺼이 승낙할 마음입니다. 음악은 경제학적으로 설명하면 본질적 가치(Intrinsic Value)가 없어요. 음식물처럼 인간의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가치가 아니어서 음악을 외부적 가치(Extrinsic Value)라고 규정하죠.
지난 몇 년은 돈으로 배울 수 없는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생쌀만 먹다가 그것마저 끝나갈 때 체중이 57kg까지 내려갔는데 오히려 그때 하루에 윗몸일으키기를 333번씩 하며 복근을 만들었습니다. 배가 고파 거짓말, 심지어 도둑질도 할 수 있을 것 같았으나 제 중심을 흩트리지 않고 버텼습니다. 주변의 무관심은 오히려 나 자신을 단련시켰고, 음악가로 성숙하게 만들었어요.
그러고 보면, 음악은 본질적인 가치가 분명히 있습니다. 자기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남의 존재도 무시하면 아무리 명예와 돈과 권력이 있어도 행복해질 수 없어요.”
― 지휘자의 진짜 시작은 60세부터라는 말이 있어요. 원숙의 경지에 이를 나이입니다.
“말러(Gustav Mahler·1860~1911) 같은 이는 자신의 비극적 운명에 투덜거리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기운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저 역시 향후 50년은 활동할 것이니, 지금까지의 경험과 실험을 살려 더욱 향상된 모습을 만들리라 다짐합니다.”
“귀가 더 밝아져요…”
― 외람된 얘기지만, 육십줄이 넘어서는 세상을 둥글둥글하게 봐야 한대요.
“어떻게 하면 둥글둥글하게 사는 것인가요?”
― 적당히 타협하고….
“근데 그럴 수가 없네요. 나이가 들면 감각이 둔해진다고 하잖아요. 저는 반대입니다. 귀가 더 밝아져요. 보통사람들이 못 듣는 소리까지 다 들려요. 때로 그 소리로 고통스러워요.”
― 그래요?
“전자파도 다 느끼기 때문에 휴대전화를 오래 손에 쥐지 못해요. 무음으로 해놔도 메시지가 오면 전자파를 느껴요.”
― 그걸 어떻게 느껴요.
“깨요, 그냥…. 자고 있는데 저를 흔들어요. 정말이지 나이가 들면서 오감(五感) 중 눈만 나빠지고 다른 감각은 더 밝아졌어요, 아주 크게…. 이 귀로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정명훈(鄭明勳)이 70여 장, 금난새가 3장, 곽승(郭昇)이 1장, 안익태는 1957년과 1961년 할리우드 볼 심포니와 LA 필을 이끌고 자신의 ‘한국환상곡’을 녹음한 일이 있다.
대한민국 헌법의 설계자로 알려진 현민(玄民) 유진오(兪鎭午·1906~1987) 박사의 아들 유종(兪淙)이 세계적 악단인 영국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무려 14장을 녹음하고, 그중 10장이 해외 출시된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유종 지휘자는 1957년생이니 올해 예순셋. 울산시향과 포항시향의 상임지휘자를 그만둔 뒤 행적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한국 클래식계는 어쩌면 알면서 그를 외면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는 열다섯에 한국을 떠나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등에서 수학했고 미국과 런던, 우크라이나에서 수석지휘자, 객원지휘자 등을 거쳤다. 그러니 학연·지연에서 국내파에게 밀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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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시절 유종을 안고 있는 아버지 유진오와 어머니 이용재. |
기자는 지난 5월 24일 그를 만났다. 60대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동안이었다.
유종은 1993~1998년 영국 최고 악단인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Philharmonia Orchestra)에서 6년 연속 객원지휘자로 초청받았다. 서른일곱부터 마흔두 살까지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던 것일까.
“1993년 무렵, 우크라이나에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구(舊)소련이 붕괴된 직후였는데, 제 지휘 스승(박탕 조르다니아)이 망명 10주년 기념연주회를 ‘해방’된 우크라이나에서 할 때 동행하면서 머무르게 됐어요.
그 시절만 해도 컴퓨터 같은 전자장비나 디지털 녹음기를 찾아보기 어려웠어요. 제정(帝政)러시아 때부터 이어온 음악가들의 자부심 외엔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라 저는 영국의 한 녹음 프로듀서에게 우크라이나 악단의 실황 녹음을 부탁했죠.
그런데 그 프로듀서는 제가 지휘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것이었어요. 과거 KBS교향악단을 지휘한 베르디의 ‘레퀴엠’을 비디오테이프에 담아 보냈어요. 시간이 흘렀고 우크라이나 연주회 일정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왔더니 엄청난 길이의 팩스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영국에서 제 지휘 테이프를 보고 ‘당장 런던을 방문할 수 있냐’는 말과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녹음하는 것을 제안하니 직접 만나 상의하자’는 내용이 팩스에 담겨 있었습니다.”
眼目의 차이, 두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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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6월 2일 서울 필동 집에서 작약이 핀 것을 기념해 부모와 함께 찍었다. 유종의 22세 무렵 모습이다. |
“황당한 제안이라 믿기 어려웠지만 영국을 찾았지요. 첫 만남에서 저는 거듭 우크라이나 악단의 녹음을 부탁했지만, 영국인 프로듀서 생각은 완고했어요. 우크라이나가 아니라 영국에서, 그것도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해달라는 요청이었죠.”
세상일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1년 전 KBS교향악단 총감독은 서른여섯의 그에게 직선적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휘를 너무나 못했다는 말을 들어서, KBS교향악단이 당신을 다시 초청하기 어렵다.”
그런데 그 지휘 녹화 테이프가 지휘자 유종의 운명을 바꾸어버렸다. 두 달 후 런던으로 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했고 첫 CD까지 발매했으니 말이다.
1994년 발매된 첫 CD의 제목은 〈러시안 명곡집(Russian Masterpieces)〉. 무소륵스키의 ‘전람회의 그림’과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왕벌의 기행’ 등을 담았다.
― 안목의 차이입니까.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납니까.
“굳이 음악계만이 아니라 우리나라가 당면한 문제는 어제나 오늘이나 똑같습니다. 전문가 자리에 전문가가 있지 않으니 그런 일이 생겨요. 웃기는 일은 이듬해 KBS 초청으로 베르디의 ‘레퀴엠’을 또 지휘했어요.”
― 부끄러웠나 봅니다.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기준이 없어서일 겁니다.”
필하모니아 휴 빈 악장과의 첫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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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악장 휴 빈. |
― 어떻게 된 겁니까.
“제가 필하모니아를 지휘하던 1990년대 초에는 상임지휘자 제도가 없었고, 음악감독으로 시노폴리(Giuseppe Sinopoli·런던필 관현악단의 지휘자 역임)가 있었는데, 1년에 한 번 지휘했습니다. 여러 번 초청된 객원지휘자로는 전설적인 지휘자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Carlo Maria Giulini), 미하엘 잔덜링(Michael Sanderling), 예브게니 스베틀라노프(Evgeny Svetlanov) 같은 고령(高齡)의 지휘자가 있었어요.
연주가 많아 악장은 세 명이 돌아가면서 했는데, 그중 휴 빈(Hugh Bean·1929~2003)은 카라얀(Herbert von Karajan·1908~1989)의 악장을 역임한 전설적인 음악가였고, 단원 중 최고령자였어요. 제 녹음과 연주는 거의 휴 빈이 맡았습니다. 그가 ‘줄리니, 잔덜링, 유종의 연주만 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죠.”
유종은 휴 빈과의 인연을 더 소개했다.
“공교롭게도 필하모니아 단원 중에서 처음 만난 이가 휴 빈 악장이었죠. 첫 녹음 때 일찍 연주회장에 도착하려고 했으나 이미 무대에서 어떤 할아버지가 혼자 연습을 하고 있었어요. 그분이 휴 빈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존경하던 음악가라 저로선 영광이었죠.
왜 새벽부터 나와 연습하는지 궁금했어요. 그분 설명은 이랬습니다.
‘노인네라 손이 굳어서 젊은이와 경쟁하려면 젊은이보다 더 많이, 그리고 더 미리 연습하고 몸을 풀어야지요.’”
― 필하모니아와의 녹음 첫 곡을 무소륵스키(Ivo Pogorelich Mussorgsky·1839~1881)의 ‘전람회의 그림’을 선택했는데 이유는 뭡니까.
“제가 12세 때 아버지께 선물로 받은 레코드가 그 곡이었고 연주는 카라얀이 지휘한, 바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연주였지요. 이미 명반으로 유명했는데, 그래서 저는 그 음반을 녹음할 때 단원들에게 보이며 말했죠.
‘고백할 것이 있어요. 여러분의 연주가 저에게 평생 감동을 줬습니다.’
휴 빈은 그 음반에다 사인을 해줬어요. 그리고 필하모니아와의 두 번째 녹음 곡이 발라키레프(Mily Balakirev·1837~1910)의 ‘이슬라메이’였는데 필하모니아가 1950년대에 녹음한 곡입니다. 마타치치(Lovro von Matacic·1899~1985)가 지휘한 그 음반은 오래전에 잊혔지만 저는 그 음반도 녹음할 때 필하모니아 단원에게 보여줬습니다. 그때 휴 빈 악장이 이렇게 말했어요.
‘저도 고백할 것이 있어요. 그 녹음도 제가 했거든요.’
단원들 모두 환호하며 웃었어요. 필하모니아는 처음부터 제게 따뜻한 분위기였습니다.”
지휘자 카라얀, 박탕 조르다니아와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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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 스승 박탕 조르다니아. |
“그럼요. 런던에서의 첫 연주회는 녹음 후 1년 뒤에 있었는데, 저명한 평론가가 말하기를 ‘연주회의 마지막 음이 울리고 나니, 악장 휴 빈은 마치 벌떡 일어나 지휘자의 볼을 꼬집어보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고 했습니다. 그 뜻을 이해 못 해 다시 물으니 ‘악장의 눈에 어린 지휘자가 대견스럽고 귀엽게 보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유종과 필하모니아 사이의 인연은 갑자기 생겨난 것은 아니다. 1980년대 20대의 그에게 카라얀은 자신의 리허설, 음반제작, 비디오 촬영 등 모든 것을 참관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카라얀은 리허설만큼은 일반인에게 공개하지 않는 이로 유명하다. 실제로 허락 없이 리허설을 보는 사람이 발견되면 그 사람이 자리를 뜰 때까지 리허설을 멈췄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그런 카라얀이 젊은 유종에게 리허설을 볼 수 있게 허락한 것은 사람을 보는 안목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의 말이다.
“물론 카라얀의 연습 장면을 본다고 지휘 비결을 간파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어요. 카라얀은 한 번도 자기의 지휘 비결을 가르친 적이 없어요.”
어쨌든 카라얀을 관찰하기 위해 그는 여러 차례 필하모니아를 찾았던 것이다.
― 지휘는 누구에게 배웠습니까.
“지휘 스승은 박탕 조르다니아(Vakhtang Jordania·1943~2005)입니다. 그와의 만남은 운명적이었어요. 그때까지 배운 지휘를 뒤엎고 다른 차원의 지휘법을 10년에 걸쳐 다시 배웠으니까요.
그러나 조르다니아는 자발적으로 가르친 게 아닙니다. 제가 일일이 질문을 던진 것에 한해 가르침을 주었기에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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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헝가리 부다페스트 신년음악회를 찾은 유종 지휘자와 어머니 이용재 여사. |
“소련의 유명 지휘자가 망명했는데, 서방에선 그가 누군지 몰라 연주회가 거의 없었습니다. 저는 조르다니아가 스웨덴에 망명했을 때 스웨덴의 음악가 친구를 통해 처음 알게 됐어요. 지휘자는 ‘청기와 장수’와 같아서 절대로 비방을 안 가르쳐줍니다. 그리고 너무나 복잡한 고단위 기술이 눈 깜빡할 순간에 지나가기 때문에 눈을 부릅뜨고 봐도 알기 어렵죠.
저는 고차원의 지휘를 당시 뉴욕에 정착한 조르다니아에게 배우고 싶었는데, 서울에서 ‘라흐마니노프의 밤’ 연주회(1984년 무렵)를 지휘하고 찾아갈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모 잡지사의 청탁을 받아 그분을 인터뷰하게 되었고 그 인연으로 조르다니아가 제 연주회에 참석했습니다. 망명 직후라 시간 여유가 많았던 조르다니아는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지휘의 모든 것을 저에게 전수했습니다.”
― 그 시절, 필하모니아에서 유종은 어떤 존재였을까요.
“단원들이 짓궂게 객원지휘자에게 별명을 붙이곤 하는데,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모독적인 별명도 있었어요. 나중에 우연히 듣게 된 제 별명은 ‘헤르베르트 폰 코리안(Herbert von Korean)’이었어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떠올랐나 봅니다, 하하하. 제 별명을 어머니께서 들으시고 ‘그 표현은 칭찬이 아니니 명심해라’며 엄숙하게 말씀하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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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객원지휘자 시절 유종의 모습이다. |
“(카라얀을) 모방한다는 부정적인 표현도 있겠으나, 아마도 기대가 컸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 ‘기대’가 무엇이었냐는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음악가로서 제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기대에 얼마만큼 부흥했는지 여러 장의 CD로 평가받고 싶습니다. 다만 지휘자의 업무는 불행히도 음악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국립이나 시립 교향악단의 경우 공무원과 정치가의 비위를 잘 맞춰주는 것도 지휘자의 임무죠. 사립교향악단은 엄청난 재정문제가 잘 해결되게 직간접적으로 스폰서를 움직이는 것 또한 지휘자의 일이죠. 반대로 행정과 금전을 쥔 자의 입장에서 보면, 말 잘 듣는 꼭두각시 지휘자가 다루기 편리합니다.”
그는 이 대목에서 음악을 둘러싼 현실적인 얘기를 구체적으로 말했다.
“왜 교향악단이 스폰서가 필요할까요. 공연티켓을 잘 팔면 그만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신문이나 잡지에 실린 글이 좋다고 사업이 됩니까? 예술이 꽃을 피우려면 그만큼 지원이 필요합니다. 예술가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예술이 완성될 수 없어요. 지휘자의 악기는 교향악단인데, 음악은 연주하는 즉시 증발해버립니다. 모든 예술 중 제일 추상적이고 규모가 큰 것이 교향악이죠.
일본은 기업과 개인이 무명의 음악가들에게 후원을 많이 합니다. 저는 대우 김우중(金宇中) 회장님을 1983년에 찾아간 계기로 이듬해 ‘라흐마니노프의 밤’ 연주회를 대우 후원으로 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10년 뒤 영국에서 저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관계가 급속도로 발전할 때, 다시 한 번 김 회장님과 대우는 선뜻 스폰서를 해주었어요. 사실 광고비용과 비교하면 예술에 대한 후원 금액은 작지만 효과는 큽니다. 김 회장님은 제가 평생을 노력해도 다 갚을 수 없는 도움을 주셨어요. 그리고 대우의 스폰서 계약이 끝나갈 때쯤 재계약을 고민하신다고 들었는데, 그 후 (IMF로) 대우사태가 벌어졌어요.”
유종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후 모두 CD 14장을 녹음했다. 이 중 10장이 출시되는데 일본의 엑스톤(EXTON) 레이블이 2장이었다. 작년 10월에 발매됐다.
작년에 발매된 음반은 허버트의 ‘아일랜드 광시곡’과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를 커플링한 음반과 라흐마니노프의 칸타타 ‘봄’과 합창교향곡 ‘종’을 묶은 음반이다.
“녹음할 때마다 이 곡이 마지막 녹음이라 생각하며 최선을 다했어요. 결과는 제 기준에 못 미쳤다고 느꼈습니다. 녹음 편집을 하며 만족을 못 했고, 결국 여러 CD의 발매를 늦추게 되었어요. 불행히도 이후 CD는 유행을 잃었고 음반업계는 형체를 찾아볼 수 없는 수준으로 전락하고 말았어요.
2년 전, 아버지의 소설 〈여직공〉이 희곡으로 각색되어 영국에서 순회공연을 했는데, 제가 그 작품을 번역했어요. 순회공연 차 영국에서 만난 옛 친구가 ‘왜 CD 발매를 안 했냐’는 물음에 자극받았습니다.
이번에 나온 두 장의 CD는 거의 20년 전에 편집만 하고 마무리 작업은 안 했던 것인데, 세계 최고 사운드를 만드는 일본 프로듀서가 녹음한 것들입니다. 어쩌면 영원히 빛을 못 볼 뻔했어요.”
1969년 9월 9일, 유진오가 쓰러지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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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7월 18일 영국 치체스터 대성당에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베르디의 ‘레퀴엠(진혼미사곡)’을 연주한 후 유종 지휘자가 기립박수를 받고 있다. |
“저는 아버지와 대화를 굉장히 많이 했어요. 여섯 살 때 이미 아버지와 친구처럼 대화를 나눴으니까요. 정치든 경제든 교육이든 주제를 가리지 않았어요.
어떻게 보면 아버지는 불운한 분이셨어요. 두 번이나 상처하셨으니까요. 천주교 신자인 어머니(이용재)의 환자분이 (아버지에게) 소개하셨지요. 1930년대 아버지 소설을 보면 당대 현대 여성을 묘사한 장면이 많은데 마치 어머니에게 감명을 받아 쓰신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할까요? 물론 젊은 시절에는 두 분이 뵌 적은 없어요.”
현민의 세 번째 아내는 명래제약 창업주 이용재 여사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던 이명래(1850~1952) 선생이 1906년 프랑스인 신부에게 약학을 배워서 만든 종기 치료제가 이명래고약이다. 선생이 별세한 뒤 막내딸이자 내과 의사던 이용재가 1956년 서울 종로구 관철동에 명래제약소를 세우고 고약을 대량 생산했다.
“욕창이나 종기가 난 데도 쓰였지만 멍든 곳이나 가시를 빼내는 데도 쓰였어요. 제가 어머니께 물었어요. ‘이렇게 싸면 어떻게 팔아요?’ 하고 말이죠. 어머니는 ‘저 백성을 봐라. 어떻게 1전 이상을 받을 수 있겠느냐’고 하셨어요. 전국에서 고약을 사려고 몰려들어 새벽부터 번호표를 나눠주었다고 해요. 그런데 이명래고약은 장점이자 단점이 상업화에 관심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어머니는 평생 이명래고약을 원래 성분 그대로 공급하는 데 힘썼지요.”
이용재 여사는 2009년 11월 12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올해가 10주기다.
― 기억 속 유진오 박사는 어떤 분이셨나요.
이 질문에 유종은, 신민당 총재 시절인 1969년 9월 10일 아버지 유진오 박사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야기를 시작했다. 가장 고통스런 순간으로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당시를 부연설명을 하자면, 박정희 정권이 3선 개헌안을 처리하려 하자, 유진오는 그해 1월 17일 기자회견을 열고 “당의 운명을 걸고 3선 개헌 저지 운동을 벌이고, 소속의원의 총사퇴도 고려하겠다”고 밝혔을 정도로 강경했다. 그러나 그는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3선 개헌안은 통과되고 말았다. 병석에 누웠지만 박정희 정권의 회유와 지지 요청을 여러 번 거절했다고 한다.
“당시 박정희 정권에 맞서 야당은, 그러니까 헌법을 기초한 아버지는 ‘3선 개헌안은 안 된다’는 입장이었죠. 국회에 가서 처음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앉혀놓고 토론하기로 한 전날, 아버지는 그만 풍이 와서 못 가신 거예요.”
그는 유진오가 쓰러지기 전날 밤(69년 9월 9일)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날 쌀쌀했는데 아버지가 집 안에 들어가지 않으셨어요. 제가 ‘들어가세요’ 하니 ‘답답해’ 그러셨죠. 아버지를 모시고 들어갔는데 그날따라 제가 집에서 목욕을 했어요. 아버지가 ‘(목욕 소리가) 시끄러워 못 자겠다’고 하셨어요. 절대로 언성을 높이는 분이 아니신데…. 좀 이상한 느낌이 들었어요.
이튿날 아침에 박순천(朴順天· 1898~1983)씨하고 (야당에서) 누가 왔는데 아버지가 못 일어나시는 거예요. 밤새 풍이 와서 말씀을 못 하시고 침을 흘리시며…. 그날이 3선 개헌안을 두고 토론하기로 한 역사적인 날인데….”
― 당시 거주하던 집은 어디에 있었나요.
“서울 필동이었어요. 돈 없는 야당이 전당대회를 우리 집에서 했습니다. 아버지는 정말 돈 한 푼 안 받고 그 시절 야당을 했어요. 결국 어머니 덕택이에요. 아버지께서 생전 뵙지도 못한 장인어른(이명래)을 왜 그렇게 존경하셨냐 하면 결국은 처가 덕택에 정치를 했으니까요.”
― 아버지는 재산이 없었나요.
“전혀 없었어요. 돈에 관심이 없었어요. 어머니도 마찬가지셨고요. 그나마 싼 고약이 많이 팔려서 재산이 좀 있었는데 어머니는 아버지를 위해 서슴지 않고 다 쓰신 거예요. 그래서 야당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이고, 야당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검은돈의 유혹 없이 정치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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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이 2011년 2월 25일 자신의 사진이 담긴 아르메니아 국립교향악단 포스터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
“음… 지휘는 박자를 젓는 게 아니고요, (연주 시간이) 1시간이라고 하면, 여기서 저기까지 전체를 보고 있어야 해요. 눈앞에 콩나물 하나하나까지 파악하되 너무 근시안이면 먼 곳이 안 보이죠.
지휘라는 것은 건축 같기도 하고, 미술하고도 관계 있고, 운동하고도 관계가 있어요. 어느 지점까지 간다면 어느 길로 가야 할지 아는… 어쩌면 정치일지 모르고…. 그러나 결국엔 철학이 아닐까요.
서양음악에서 작곡은 절반의 미완으로 봐요. 연주가 있어야 완성되니까요. 오선지 위에 그려진 콩나물의 의미, 작곡가의 의도, 작곡가의 생애를 파악하지 않고선 그 작품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휘가 필요한 것이죠.
제가 교향곡 한 편을 지휘하는 데 10년 이상이 걸립니다. 악보를 보고 또 보는 것은 기본이죠. 그 곡을 연주한 모든 사람의 연주를 들어봅니다. 녹음기술이 발달하기 전부터 최근까지… 그리고 곡에 관계된 책, 시대와 관계된 자료, 특히 건축 부문의 자료를 열심히 찾아봅니다. 작곡자가 어떻게 살았느냐가 음악과 관련이 많거든요.
그렇다고 10년 동안 매일 그것만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터넷에 있는 정보들은 부정확해 위험해요.”
유종은 유년시절 AFKN(주한미군방송)에서 지휘자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1867~1957) 지휘를 보고 매료되고 말았다. 어쩌면 그가 지휘자의 길을 걷게 된 것도 토스카니니의 강렬한 인상 때문인지 모른다. 그에게 ‘불쌍한 할아버지’라는 별명을 붙였는데 왜 직관적으로 그런 별명을 붙였는지 나중 진짜 지휘자가 되어 알게 됐다고 한다.
“그 시절, 유성기에 리스트의 ‘헝가리 광시곡’을 걸어놓고 주위를 뱅글뱅글 돌며 그 곡을 듣고 또 듣곤 했어요. 그때 듣던 SP판을 아직도 갖고 있어요. 부모님은 저를 위해 (유성기를) 틀어주진 않으셨지만, 저는 교향악단이 만드는 소리를 흥미롭게 느꼈어요.
AFKN의 클래식 프로그램에서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베르디의 ‘운명의 힘 서곡’ 같은 오페라를 자주 봤는데, 속으로 ‘지휘자를 통해서만 음악이 만들어지는가 보다’ 생각했죠. 토스카니니가 나오면 ‘불쌍한 할아버지가 나왔다’고 했는데, 50년이 지나 똑같은 필름을 보게 됐어요. 그때 제가 왜 ‘불쌍한 할아버지’라고 별명을 지었는지 알 수 있었어요.”
― 어떤 의미일까요.
“토스카니니는 너무 힘들게 지휘했어요. 지휘는 힘들게 하면 안 돼요. 땀을 흘려서도 안 됩니다. 연주하는 단원이 땀을 흘려야지요. 얼마나 기술이 부족하고 자신감이 없으면…. 지휘자는 지도자인데, 지도자가 힘들어하면 밑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임무를 수행하나요. 회사나 정치도 똑같습니다. 지도자가 흔들리면 안 되거든요.”
당시 TV 속 토스카니니는 땀을 비 오듯 흘렸던 것이다. 그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제가 어느 날 심장 수술을 하게 된다면 부분마취만 부탁할 겁니다. 수술하는 의사의 얼굴을 보고 싶거든요. 만일 의사 얼굴에 진땀이 나고 표정이 일그러지면 ‘이제 끝이구나’ 하고 스스로 생명을 접을 겁니다.”
악단 수준은, 그 악단이 있는 도시나 국가 수준과 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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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10일 유종이 아르메니아 국립교향악단을 지휘한 후 기립박수를 받는 모습이다. 브루크너의 교향곡 제3번을 아르메니아 국립교향악단 협연으로 세계 초연했다. |
“북한 평양에서 하는 매스게임(집단체조)이 예술이냐, 아니냐를 두고 말들이 많지만 음악을 기계적으로 만들면 아름답지 않아요. 100여 명의 연주단과 500여 명의 합창단이 동시에 한 사람의 손길에 맞춰 화음을 이루는 것은 인류가 만든 제일 어렵고 우아한 창작품이 아닐까요.
추상적인 음만 가지고 눈에 안 보이는 것을 느낄 수 있는 형체로 만드는 것을 가능케 하는 이가 바로 지휘자입니다.”
― 지휘의 길이 왜 어렵나요? 작곡가의 의도와 지휘자의 해석 사이 간극을 어떻게 메우나요.
“100명의 연주 잘하는 젊은이를 모은 악단이 연주하면 100명의 독주(獨奏)가 됩니다. 악단이 아름다운 음을 창조하려면 개개인의 실력이 독주자만큼 뛰어나지 않더라도 경험을 토대로 100명이 한마음, 한뜻으로 합칠 때 비로소 합주(合奏)가 됩니다.
한국의 지휘자들은 못하는 단원을 자르고, 패기 있는 젊은 단원을 뽑는 것이 좋은 악단을 만드는 지름길이라 요즘도 착각하고 있습니다. 교체하면 신선감은 생기겠죠.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합주도 사회생활과 같아요. 경력 있는 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것이 진짜 기술입니다. 남하고 같이 공존·공유할 수 있고, 이견이 있더라도 이견의 정당성을 떳떳이 말할 수 있는 존재… 그런 분이 악단에 존재할 때 제대로 합주할 수 있어요.
한국의 근대 교향악 역사는 큰 실수를 했어요. 자꾸 단원을 바꾸었던 것입니다.”
유종은 안익태와 정명훈을 제외하면 세계적인 악단을 장기간 지휘하고 수십 장의 음반을 낸 유일한 한국인이다. 아시아의 클래식 강국인 일본에서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는 한국 악단의 세계화를 위해 이런 덕담을 꺼냈다.
“(한국처럼) 학연·지연, 심지어 군 복무로 생긴 인연까지 엮어 만든 사회는 합주를 할 수 없습니다. 한국의 음악가 수천 명을 심사하며 느낀 점이 있는데, 아무리 실력이 없는 연주자도 곡 하나는 훌륭한 연주를 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박자, 음정 등 꼭 갖춰야 할 기본이 안 돼도, 한 곡을 근사하게 하는 것은 입시 위주로 생긴 기형적인 사회시스템이 가져온 결과로 보여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겉 포장만 잘하면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있다고 믿고 있어요.
기초가 없는 길은 몇 년이 안 돼 사라지고, 재포장을 하더라도 계속 망가집니다. 기초가 단단해야 여유가 생겨 남을 배려할 수 있는 마음이 생깁니다. 사회의 ‘합주’는 그때 생깁니다. 교향악단은 사회를 축소해놓은 모델 같아서 악단의 수준과 성향을 보면, 그 악단이 있는 도시나 국가의 장단점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한국 악단의 학연·지연의 문제에 대해 이런 충고를 덧붙였다.
“일본과 중국에서는 악단 단원 전부를 외국 유학뿐만 아니라 인정받는 외국 악단에서 경험을 쌓은 자들을 모국으로 불러들여 단시일에 노련미가 넘쳐 흐르는 악단을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방침은 교향악단뿐만 아니라 첨단기술을 필요로 하는 과학·의학 등 사회 각계에서도 활용하고 있습니다.”
“지휘를 배우고 싶다고 찾아오는 이가 없어 안타까워요”
― 화려한 이력에도 활동을 중단하고 있는 이유는 뭔가요.
“국내 음악계에서 저를 압니다. 알기 때문에 무시하고… 모르는 사람도 있지만, 아는 사람들이 저를 안 챙겨줘요. 저를 위협적인 존재로 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포항시향에서의 경험이 저에게 큰 트라우마를 줬습니다. 긍정적이고 순수한 의도를 정반대로 몰고 간 일부 단원들을 원망하는 게 아니라, 제 능력의 한계에 실망했죠.
또 경제적 파산에 따른 스트레스가 컸고, 충분히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저를 외면한 것도 이유입니다. 몇몇 외국인 친구의 적극적 도움으로 긴 시간을 연명할 수 있었어요.
그렇다고 넋 놓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브루크너의 교향곡 제3번의 완성판을 만들었습니다. 브루크너는 (3번 교향곡을) 생전 여섯 번 이상 뜯어고쳤지만 확실한 완성판을 못 만들고 세상을 떠났어요.
저는 결국 교향곡 제3번의 완성판을 만들어 아르메니아 국립교향악단을 지휘해 세계 초연(初演)을 했습니다. 브루크너의 음악은 길고 따분해 청중이 지루하게 느끼기 쉬운데, 기립박수를 받았어요.
또 군대에서 다친 신경 때문에 포기했던 첼로를 40년 만에 다시 연주할 수 있게 되었고, 손가락이 다칠까 봐 마음껏 못 했던 무술도 수련하고 있어요. 아버지가 남긴 미발표 소설의 출판을 위해 편집을 시작했는데, 일제강점기 때 출판이 불가능했던 내용이 담긴 장편소설입니다. 원고가 정리되면 출판사를 찾아볼 생각입니다.”
― 유종 선생님에게 지휘를 배우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지휘를 배우고 싶다고 찾아오는 이가 없어 안타까워요.
교향악단 연주회를 국내든 해외든 요새 잘 안 갑니다. 미국과 유럽에서 광적으로 찾아다니던 제 청년기와 대조적이죠.
악단의 단원이 지휘자보다 음악을 더 잘 알고, 심지어 객석에 있는 음악애호가만큼도 지휘자가 음악을 모르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요즘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정치 상황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크라이나는 최근에 정치 경험이 없는 코미디언을 대통령으로 뽑았습니다. 그 사람이 국가를 얼마나 잘 이끌어갈지 모르지만 어떻게 이 지경으로 몰락하나…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저는 질투도 욕심도 없지만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언제라도 제 도움을 요청한다면 기꺼이 승낙할 마음입니다. 음악은 경제학적으로 설명하면 본질적 가치(Intrinsic Value)가 없어요. 음식물처럼 인간의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가치가 아니어서 음악을 외부적 가치(Extrinsic Value)라고 규정하죠.
지난 몇 년은 돈으로 배울 수 없는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생쌀만 먹다가 그것마저 끝나갈 때 체중이 57kg까지 내려갔는데 오히려 그때 하루에 윗몸일으키기를 333번씩 하며 복근을 만들었습니다. 배가 고파 거짓말, 심지어 도둑질도 할 수 있을 것 같았으나 제 중심을 흩트리지 않고 버텼습니다. 주변의 무관심은 오히려 나 자신을 단련시켰고, 음악가로 성숙하게 만들었어요.
그러고 보면, 음악은 본질적인 가치가 분명히 있습니다. 자기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남의 존재도 무시하면 아무리 명예와 돈과 권력이 있어도 행복해질 수 없어요.”
― 지휘자의 진짜 시작은 60세부터라는 말이 있어요. 원숙의 경지에 이를 나이입니다.
“말러(Gustav Mahler·1860~1911) 같은 이는 자신의 비극적 운명에 투덜거리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기운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저 역시 향후 50년은 활동할 것이니, 지금까지의 경험과 실험을 살려 더욱 향상된 모습을 만들리라 다짐합니다.”
“귀가 더 밝아져요…”
― 외람된 얘기지만, 육십줄이 넘어서는 세상을 둥글둥글하게 봐야 한대요.
“어떻게 하면 둥글둥글하게 사는 것인가요?”
― 적당히 타협하고….
“근데 그럴 수가 없네요. 나이가 들면 감각이 둔해진다고 하잖아요. 저는 반대입니다. 귀가 더 밝아져요. 보통사람들이 못 듣는 소리까지 다 들려요. 때로 그 소리로 고통스러워요.”
― 그래요?
“전자파도 다 느끼기 때문에 휴대전화를 오래 손에 쥐지 못해요. 무음으로 해놔도 메시지가 오면 전자파를 느껴요.”
― 그걸 어떻게 느껴요.
“깨요, 그냥…. 자고 있는데 저를 흔들어요. 정말이지 나이가 들면서 오감(五感) 중 눈만 나빠지고 다른 감각은 더 밝아졌어요, 아주 크게…. 이 귀로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