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부상병이 “이제는 집에도 못 가고 죽겠구나” 하고 말하는 순간, 적의 122mm 포탄이 날아와 터져서 파편이 그 부상병 이마를 치고 나가 앞으로 넘어지며 전사하는 것을 본 연대장이 상황실로 들어갔다. ‘이런 것이 전쟁이구나’ 하는 것을 실감했다.
⊙ 인천 학도의용대원으로 참전… 육군 통신병으로 강원도 고성·간성과 ‘철의 삼각지’ 전투, 지리산 공비토벌 나서
⊙ ‘외금강 앞 능선, 시체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 공비들은 세수를 못 해 얼굴이 까매… 산속에서 결혼해 임신한 여성도 여러 명
⊙ 휴전 며칠 전 美 통신병에게 휴전 얘기 들어… 대대장, 연대장도 휴전되는지 몰라
⊙ 인천 학도의용대원으로 참전… 육군 통신병으로 강원도 고성·간성과 ‘철의 삼각지’ 전투, 지리산 공비토벌 나서
⊙ ‘외금강 앞 능선, 시체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 공비들은 세수를 못 해 얼굴이 까매… 산속에서 결혼해 임신한 여성도 여러 명
⊙ 휴전 며칠 전 美 통신병에게 휴전 얘기 들어… 대대장, 연대장도 휴전되는지 몰라
- 임영환(오른쪽) 학도병과 전우 최준갑.
인천 학도의용대원으로 6·25전쟁에 참전한 임영환(林永煥·86)씨가 기자를 찾아온 것은 2014년이었다. 그는 자신의 전쟁 체험담 원고를 기자에게 건넸다. 워드 프로세스로 작업한 26쪽 분량의 원고였으며, 약간의 대화 후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다. 그리고 까맣게 잊어버렸다.
5년이 지난 4월 어느 날 그 원고가 떠올랐다. 책상을 뒤져보았다. 색이 조금 바래 있었다. 그제야 원고를 처음부터 읽어보았다. 다 읽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두꺼운 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었다.
혹시나 편찮으시지 않을까, 작고하셨을까 조심스러웠다. 망설이다 전화를 걸었다. 집 전화였는데 받지 않았다. 휴대전화 역시 받지 않았다. 1시간 뒤 다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길게 흐르고 전화를 끊으려는데 수화기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혹시… 임영환 어르신이신가요?”
“네, 전데요.”
“《월간조선》 기자입니다. 기억나십니까.”
“어… 5년 만이네요.”
그는 5년 전 만난 기자를 기억하고 있었다. 지난 5월 2일, 우리는 서울 광화문에서 만났다. 나무 지팡이를 짚고 나타난 그는 걸음이 약간 불편했지만 건강해 보였다.
임영환의 일생을 요약하면 이렇다.
1934년 8월생. 인천 창영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인천 영화중학교에 입학해 6·25전쟁을 맞았다. 1950년 12월 28일 인천 학도의용대에 입대했다. 1951년 1월 육군 제2훈련소와 통신학교(3기)를 거쳐 육군 수도사단에 배속되었다. 통신병으로 참전한 후 만기제대한 것은 1955년 1월 10일. 2년 뒤에 아내 이연하(83)씨와 결혼해 아들 셋을 두었다. 한국미곡창고, 대한통운에서 근무했고 중장비 회사인 동일중기㈜의 대표이사를 지냈다. 대한중기협회 인천지부장을 3년간 역임했다. 1987년과 2006년 인천시장 표창을 받았다.
― 6·25전쟁 체험담을 5년 만에 읽어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솔직히 얘기하면… 머리가 모자라요. 중3 까까머리가 입대했으니 배운 게 없어요…. 당시 인천에서 학도병 3000명이 출정했습니다. 이후 창원·마산·통영을 왔다 갔다 하는 사이에 무려 1000명이 사라졌어요. 중간에 떨어져 나가고 목적지에 도착한 사람이 2000명이었죠. 그중 600~700명은 해병대 5기와 6기생이 되고 나머지 1300~1400명은 육군에 입대했어요. 육군 통신학교에 600~700명이 가고, 나머지는 전방 각 사단에 배치됐지요.
저는 통신학교에 들어갔는데 당시 통신장비가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 때 미군이 쓰던 것이었어요. 심지어 6·25전쟁 때 인민군 통신병이 쓰던 무전기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군이 소련에 원조해준 것이었죠.”
6·25전쟁 때 학도의용대는 의병(義兵)과 다름없다. 정규군이 아니었다. 전쟁 사흘 만에 수도가 함락되자 6월 29일 수원에서 ‘비상학도대(非常學徒隊)’를 조직해 한강을 도하하려던 인민군을 저지하러 참전한 것이 계기였다.
기자는 인터뷰와 전쟁 체험담으로 6·25 당시 참상을 재구성해 보았다. 그의 체험기는 화려한 수사(修辭)는 없지만 진솔하고 사실적인 문체였다. 일부 문체적 오류 등은 어법에 맞게 고쳤다. 지면 제한으로 일부만 발췌해 소개한다.
마대 속에 볏짚을 넣어 듬성듬성 꿰맨 자루를 깔고 잠들어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인천 지역 출신 학생들은 다 같이 모여 호국을 다짐하고, 한데 뭉쳐 학생들의 조직체를 만들 것을 결의했다. 우리는 당시 고려대 2년생인 이계송 동지를 의용대장으로 선출하여 지역별로 지대를 구성하여 시내 관공서를 경비하며 치안 유지를 담당(6월 28일 군경이 인천을 철수했을 때)했다.
또한 피란민들의 안내 활동과 군 입대자 안내에 협조하면서 학도의용대 조직활동을 했다. 그러던 중 7월 4일 북한군이 인천을 점령하자 우리는 개별적으로 피란길에 오르고, 일부는 지하로 잠적했다.
그 후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인천이 수복되면서 여러 방면으로 흩어졌던 동지들이 모여들었다. 이때 현인고 출신 이계송 동지의 지시 및 조직으로 각 지대(북구, 동구, 서구, 부평, 남동, 계양, 주안, 해성) 책임자를 선임하여 북한군 치하에 있을 때 협조자들을 색출하여 경찰에 인계했다.〉
― 피란 간 것은 1·4후퇴 때인가요.
“아뇨, 1950년 12월 18일 오후에 3000명의 인천 지역 학생들이 국방부 정훈국의 연락을 받고 모여 출정식을 가진 뒤 남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어요. 당시 인천 시민이 28만명인데 한 집에 1~2명이 출정하게 된 것이죠.”
인천 석바위(주안동)를 지나 신천리(뱀내장터), 수암을 지나 수원 방향으로 걸어가는데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12월 22일 대구에 도착해 육군본부에서 학생증과 인천학도 의용대원이란 증명서를 주고 받았다. 육본의 지시로 걸어서 밀양·삼량진을 거쳐 절반은 창원·마산·통영 방위군 훈련소로, 나머지는 부산으로 가니 모두 배편으로 마산에 집결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할 수 없이 마산행 화물 여객선에 몸을 실었다.
이듬해 1월 10일 부산진초등학교에 있던 제2육군훈련소에 입소하며 정식 군인이 되었다.
〈첫 주는 제식훈련, 다음 주는 총을 쏘는 자세 및 전투 훈련을 받았는데, 여전히 군복도 없이 군모는 미군들 뜨개질 모자가 지급되었다. 주말이 되어서야 중공군 방한복과 밀양직 군복, 일제 군화가 지급되었다. 2주일간 이불로 모포가 한 개씩 지급되었지만 깔고 잘 요가 없어 마대 속에 볏짚을 넣어 듬성듬성 꿰맨 자루를 학교 마룻바닥에 깔고 잤다. 볏짚 먼지가 말할 수 없이 많아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식사 역시 밥그릇이 모자라 프라이팬 뚜껑, 물컵 등으로 먹는 열악한 환경 때문에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훈련소에서는 우리가 훈련을 받고 방위군으로 배치될 것으로 알았지만, 일주일 후 우리 소년 학도병에게 군번을 주면서 현역으로 입대하게 하였다. 모든 것은 정부 지침에 따른 것으로 생각된다.〉
임영환은 육군 통신학교에서 무선교육을 받은 뒤 1951년 5월 10일 육군 수도사단 통신부대로 떠났다.
― 통신병으로 바로 전방에 투입되셨나요.
“대구 보충대를 떠나 울진을 거쳐 동해안을 끼고 북으로 북으로 달린 기억이 납니다. 흙물(갯벌)인 서해와 달리 동해는 너무 고왔어요. 파란 물결과 흰 파도가 일렁였지만 전선이 가까워 올수록 마음이 무거웠어요. 어느 곳으로 가는지 알 수 없었거든요. 뜬소문으로 철의 삼각지(북측 평강·김화·철원)에서 중공군과 인민군이 합세해 아군을 전멸시키고 남하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나는 최준갑 군과 둘이 26연대에 배속되었다. 당시 연대 통신대는 대관령 밑 어느 개울 옆 초가집이었는데 우리가 현지에 도착하니 통신대장인 대위가 이렇게 물었다.
“귀관들, 지금 몇 살인가?”
아마 나이가 어려 보여 기가 막힌 모양이었다. 나는 홀로 연대CP(후방 보급 지휘소)에 머무르며 삼척으로 이동하는데 길가 무연탄의 까만 먼지가 바람이 불면 날아와 얼굴이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누구를 위해 전쟁의 희생물이 되어야 하는지…
― 첫 전투를 기억하시나요.
“1951년 6월 18일 2대대로 전출 가서 이튿날 아침 산골짜기를 거쳐 능선을 올랐어요. 그 능선이 향로봉이었고, 그날 저녁 향로봉 오른쪽 능선 정상에 대대OP(전방 지휘소)가 있었는데 OP 앞으로 외금강이 흐르고 있었어요.
그날 저녁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어요. 처음 겪는 전투라 겁이 났지만 부대원들이 마음을 안정시켜주었어요. 다음 날 아침 산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먹구름 위에 우리가 있었습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아름답게 보이는데, 구름 위의 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마치 마귀가 나올 것 같은 으슥함을 느꼈어요.
새벽에 동해에서 떠오르는 해는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는데, 멀리 성냥개비 반 개 정도로 보이는 배에서 불이 번쩍 하더니 한참 후 함포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는 당시 참상을 이렇게 적었다.
〈우리 대대가 외금강 앞 능선 쪽으로 2km 정도 전방으로 이동했는데, 전일 작전에서 교전했던 참상이 눈에 들어왔다. 적들은 포와 기관총 및 지뢰 등으로 엄청난 피해를 당해 시체가 까맣게 타 있거나 말로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의 상태로 널려 있었고, 아군의 시체도 있었다. 그 높은 곳에서 시체를 운반할 수가 없어 그곳에다 묻어주었다. 시체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날 전방 약 2km 지점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총소리가 콩 볶듯 들린 얼마 후 인민군 취사병이 잡혀왔는데, 도주하다 바위에서 떨어져 무릎이 깨져 걷지도 못했다고 한다.
“그에게 정보를 수집한 후 대대장은 수색대 선임하사에게 어떤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 후 총소리가 들렸지요. 다시 향로봉 정상을 넘어 왼쪽 능선을 따라 이동하는데, 산이 높아 구름 속에서 전진하느라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수백 구의 시체를 밟고 걸었어요. 왜 누구를 위해 알지도 못하는 산골짜기에서 전쟁의 희생물이 되어야 하는지 한스러웠어요.”
얼마 후 그는 사단 교육대로 차출되었다. 교육대에는 통신학교 동기생이 많았다고 한다. 교육기간 중 923.5고지(강원도 고성의 간성 지역 고지를 말한다)를 공격하는 작전이 있었는데, 2대대는 좌우로 1대대와 3대대가 엄호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고지를 점령했다.
“돌아온 부대원들 말이, 적이 퇴각하면서 기관총 사수·부사수를 토치카 기둥에 묶어놓고 고참병들은 도망가고 졸병들만 남겨 끝까지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으로 보였다고 합니다.”
교육을 수료하고 복귀하는데 부대가 설악산 진부령 정상 향로봉 방향 약 100m 지점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야간에 전화선 가설을 위해 나간 통신 장교와 가설 병들에게 사고가 발생해, 1명이 전사하고 3명이 부상당했다.(1951년 8월 23일경)
“깜깜한 밤이어서 지뢰 매설 상황을 잘 몰랐던 겁니다. 앞서가던 대구 출신 이주영 이등중사가 지뢰를 밟자 연쇄폭발로 뒤따라가던 병사들이 부상당한 거지요.”
그는 그날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다음 날 아침 전사자를 귀환시키라는 명을 받고 현지에 가보니 전사자의 시체가 여기저기 잘려 나가고 파리가 엄청 달라붙어 보기가 안쓰러웠다. 시신을 수습하는데 금방이라도 매설된 지뢰가 터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때 KSC(당시 노무사단에 파견된 인부) 노무자에게 “(전사자들을) 들고 오라”고 지시했지만 거부하는 바람에 영등포 출신 이등중사와 같이 들어가 둘이서 간신히 들고 나왔다. 지뢰가 눈에 띄게 모 심듯이 묻어놓아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곳에서 KSC에게 시신 이송을 부탁하고 고지에서 내려오는데 근방에 건봉사라는 절이 보여 이곳이 강원도 고성 근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순 반란사건의 현장에 가다
임영환은 6·25전쟁 당시 지리산 공비토벌에 참여했다. 1951년 9월 27일의 기억이다.
속초항에서 밤 8시쯤, 파도치는 바다를 향해 닻을 올렸다. 부산으로 간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지만 정확히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일본 배를 탔는데 배멀미 탓에 갑판이 더러워졌다. 이틀 뒤 배는 여수항에 입항했다. 닻을 내리고 하선하니 오후 3시가 되었다. 대기 중이던 트럭을 타고 순천농업중학교에 도착하니 운동장에 24인용 미군 천막 20~30개가 있었고 바닥에는 볏짚이 깔려 있었다.
“그곳(순천) 출신 병사 말이, 예전 여수·순천 반란사건 당시 숨진 사람들이 널려 있던 곳이라더군요.”
임영환의 부대는 광양을 거쳐 섬진강 나루에 도착해 근방을 둘러보았다. 다리가 폭격으로 무너져 있었다. 다시 작은 배로 도강해 경남 하동에 도착했다. 섬진강 강가에서 천막을 치고 하룻밤 쉬었는데 이튿날 하동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그의 말이다.
“하동서(署) 악양지서, 학예지서가 공비에 포위되어 위험한 상태고, 하동 마을의 소 72마리가 탈취되었다는 겁니다. 공비들은 우리가 도착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어요. 바다를 통해 왔으니 정보가 없었던 것이죠. 다음 날 악양면에 들어가니 집마다 붉은 글씨가 적힌 삐라(선전물)가 붙어 있었어요.”
이때부터 지리산 공비토벌이 시작됐다. 박격포와 기관총으로 응사하며 추격하자 공비들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공비들이 전투경찰은 만만했지만 중화기로 무장한 정규군은 상대하기 어려웠으리라.
― 당시 전공(戰功)은 어떠셨나요.
“많은 공비를 포로로 잡았고, 악양지서와 학예지서에 갇혀 있던 양민 350명 정도를 구출했어요.”
― 또 다른 기억은.
“쌍계사(하동군 화개면)로 진입해 절 외각에 본부를 설치했는데, 이곳에 종이를 만드는 원료인 닥나무가 많았습니다. 밤이 되자 날씨가 추웠어요.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으니 몸이 노곤해지며 잠이 솔솔 왔어요. 아궁이에 불을 때고 있던 스님이 (제가) 안쓰러웠는지 걸치던 옷을 주셨어요.”
한번은 섬진강변을 수색하는데 어느 집의 큰 장독대가 보이더란다. 200m쯤 되는 거리였는데 한 대원이 칼빈 총으로 장난 삼아 장독대를 맞췄다.
“독 뒤에 공비가 있었던 겁니다. 사살된 거지요. 공비들은 사방팔방에 우리가 생각지 못한 곳에 은신하고 있었던 것이죠. 적들은 항상 우리를 보고 있었습니다.”
중공군식 방한복 입고 산으로 산으로…
우리 국군은 지리산에 흩어져 잠복하던 공비들을 차례차례 토벌했다.
〈우리 중화기가 어둠을 뚫고 불을 뿜기 시작하여 박격포까지 동원되어 3~4시간 동안 피아간에 교전이 있었다. 이날 전 대원이 수색 및 잔당 소탕에 투입되어 포로들을 잡아왔다. 그중에는 1949년 여수·순천 반란사건 당시 입산하여 숨어 지내던 공비가 군단장 칭호를 받으며 지휘하고 있다가 잡혔고, 허름하고 나이 많은 촌로도 잡혀 왔는데 대퇴부에 포탄 파편에 의한 부상을 당해 뼈가 보일 정도여서 위생병이 압박붕대로 감아주었다. 이들은 영하 20도 정도의 날씨에 며칠을 굶으며 도주하고 있었다.
공비들은 발이 전부 동상에 걸려 잘 걷지도 못했다. 군단장에게 “왜 자수하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자수하여 매 맞아 죽는 것보다 나을 것 같았다”고 하였다. 공비들 중에 산속에서 결혼을 하여 임신 중인 자가 여러 명 있었다. 얼굴은 세면을 못하여 까맣고 손등도 씻지 못해 말로 다 못할 정도로 더러웠다.〉
1951년 12월 28일은 임영환에게 아주 특별한 날이었다. 하사로 진급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화물열차를 타고 전주에 도착해, 전주농업학교 뒷산을 넘어 완주군 고산면에 도착했다. 능선을 따라 내려가는데 일반 민가에는 접근하지 말라는 연락이 왔다. 열병이 만연하고 있었다.
“그곳은 본래부터 곶감이 유명한 곳이에요. 감이 주렁주렁 달려 먹음직스러워 보였어요. 보병들이 감을 따러 산기슭으로 올라갔는데 신발 자국을 보고 미행해 공비를 잡았습니다. 그날 늦은 저녁에는 2명의 여자가 잡혔는데 저와 동향이었어요. 집이 (인천) 인현동이고 인천여중에 다니던 학생들이었죠. 수첩에 기록해놓고 언제든 집에 가면 알려주리라 생각했는데 전선을 다니다 보니 수첩이 눈비에 맞아 뭉개지고 말았어요.”
전쟁 중이었지만 산중에는 짐승이 많았다.
“갈대가 많아 수색하기가 어려워 야간에는 방어에 치중했어요. 한번은 산돼지와 사슴 한 마리씩을 포획했어요. 원래 작전 중에 잡은 동물은 병사들에게 피해가 온다고 먹지 않는데 그날은 고기를 먹었어요. 처음 먹었는데 맛이 없었어요. 이튿날 공비들이 포위망을 뚫고 도피하기 위해 산불을 질러 우리 병사 두 병이 죽었어요. 이후 대대장은 작전 중에 절대 동물을 사살하지 못하도록 특명을 내렸죠.”
임영환 부대는 이후 남원·함양·구례 등을 거치며 공비를 완전 소탕한 뒤 1952년 3월 19일 화물차를 타고 전방으로 다시 복귀했다.
“6개월간 머리도 못 깎고 목욕도 못 했어요. 밀양직 광목으로 만든 군복 위에 중공군식 방한복을 입고 산으로 산으로 돌아다녔으니까요. 누가 봐도 거지 중 상거지였어요.”
길을 잘못 들면 적의 시체를 밟고 다녀야 했다
이후 임영환은 전략 요충지인 ‘철의 삼각지’에서 생사를 넘나들었다. 강원도 금성군(지금의 철원군 김화읍) 인근 ‘663고지’를 잊을 수 없다. 깊고 울창하던 산은 쌍방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나무는 없고 돌산이 되었다”고 기억했다.
“고지에서 내려가려면 나무 뿌리 또는 전화선을 붙들지 않으면 내려갈 수가 없었는데 피아간 너무 처참한 전쟁이 벌어지다 보니 능선은 절벽이 되어 있었죠. 밤이 되면 소총, 기관총, 박격포 소리가 불빛과 함께 사방으로 콩 볶듯 요란했어요. 전투가 끝나면 언제 싸웠느냐는 듯이 고요했지만 피아간 엄청난 희생자가 발생했어요.”
그가 쓴 체험담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어느 날 수색대원이 팬티 바람에 새벽녘에 돌아왔다. 적의 시체 주머니를 더듬어 정보가 될 자료가 없나 조사했는데 시체가 어찌나 많은지 무릎까지 차서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매일매일 똑같은 전투는 계속되었다. 우리 병사들의 전사도 많아졌다.
어느 날은 임무를 교대하고 내려와 석식 후 상황실로 가려는데 교대했던 중사가 포 파편에 전사했다. 다음 날은 통신병인 주문진 중학교 출신 김금선 중사가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 이렇게 전쟁은 날이 갈수록 상황이 악화되었다.
어느 날 사단장은 연대 상황실에서, 연대장은 대대장실에서, 대대장은 OP 상황실에서 작전에 임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전선의 ‘빽’이라고 하는 것이, (당시 화폐로) 100만원이 있으면 후방에서, 돈이 없으면 전선으로 배치된다고 널리 알려져 있었다. 연대장이 정오쯤 답답하니까 잠깐 담배를 피우려고 벙커 앞에 나와 있었다. 그때 부상병들이 30~40명 모여 있었는데 팔과 등에 부상당한 어느 병사가 “이제는 집에도 못 가고 죽겠구나” 하고 말하는 순간, 적의 122mm 포탄이 날아와 터지며 파편이 그 부상병 이마를 치고 나가 앞으로 넘어지며 전사하는 것을 본 연대장이 상황실로 들어갔다. ‘이런 것이 전쟁이구나’ 하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1953년 5~7월, 휴전을 앞두고 피아간 전투는 절정에 다다르고 있었다. 계속된 그의 말이다.
“상황이 계속 악화일로를 걷고 있을 때 포병 관측병이 적진지 후방에서 탱크 3대가 올라오는 사진을 가져왔어요. 적이 탱크 공격을 감행할 계획인 듯했지요. 당시 아군은 대동아전쟁 때 미군이 쓰던 탱크인데 뚜껑이 없어서 드럼통을 오려 용접하고 그 위에 모래자루를 올려놓은 게 고작이었죠. 적의 (소련제) 탱크와 대조적이었어요.”
그날 저녁 적진지 세 방향에서 포탄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아군 지휘소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대대장, 작전관, 정보관, 미군 및 요원들이 모두 부상을 당했죠. 밤이라 전투기 요청은 불가능해서 할 수 없이 아군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지원 포 사격을 요청했어요. 덕분에 적들은 누그러졌지요.”
“이튿날 오전 쌍안경으로 보니 적진의 바위산이 뻐그러져 있었다”고 했다. 그만큼 포의 위력이 대단했다. 하지만 언제 그랬느냐는 듯 매일 새로운 전투가 반복됐다.
“포탄이 쌍방으로 날아 들어와 양쪽 병사들이 하늘로 날아다녔어요. 직접 포탄에 맞은 병사는 형체조차 없는데도 상부에서 전사자를 찾아오라고 지시가 하달되었죠. 없는 시신을 어디서….”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적을 잡으러 갔다가 잡혀가면 전사자로 보고했어요. 지휘관들은 책임을 면하려고 허위보고를 했지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어요. 간혹 엄청난 희생을 본 병사가 탈영한 경우도 있었고, 탈영으로 허위보고된 신병(총의 부속을 찾다가 늦게 돌아온)이 아군 연대장에 의해 현장에서 사살된 일도 있었어요. 아비규환이었죠.”
〈8사단과 교대하고 우리 2대대는 후방으로 이동 대기 중 병력을 보충받으며 지형능선 후방으로 다시 이동 대기하고 있는데 그곳은 적들의 시체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흩어져 있어 살짝 흙을 덮어놓은 곳이었다. 길을 잘못 들면 적의 시체를 밟고 다녀야 했다.〉
휴전하던 그날 밤의 여우 울음소리
임영환은 1953년 7월 19일을 평생 잊을 수 없다. 미군 통신병에게서 7월 27일 밤 10시 휴전한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것이다.
“그 미군은 통신병인데 미군 벙커가 포탄에 날아가 버려 오갈 데가 없었어요. 그 병사가 ‘영어 할 줄 아느냐’고 물어요. 중학교에서 조금 배운 말로 대화를 나누는데 놀랍게도 7월 27일 전쟁이 끝난다는 겁니다.
깜짝 놀라서 대대장에게 보고하니까, 대대장은 권총을 빼 들면서 ‘이 새끼 입다물어. 누가 그러더냐’고 추궁해요. ‘미군 병사에게 들었다’고 하자 얼굴이 하얘지더군요. 이 양반이 연대장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봐도 ‘무슨 얘기냐’는 반응이었죠. 연대장도 몰랐던 겁니다. 연대장이 다시 사단장에게 물으니, 느낌에 사단에서는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연대·대대에 작전상 지시를 내리지 않은 것 같았어요.
당시 미군 병사들은 휴전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으나 우리 국군은 시달을 안 한 겁니다. 도망갈까 봐….”
다음 날부터 “현재 재고 탄약을 작전에 필요한 만큼 남기고 적진을 향해 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제한적으로 쓰던 탄약을 마음놓고 쏘라는 것”이었다.
7월 27일 밤 10시까지 어마어마한 전투는 계속되었고, 밤 10시에 쌍방의 총성이 멎었다.
“그런데 조용한 밤 10시에 여우 울음소리가 제일 먼저 들렸어요. 그 전투 속에 어떻게 살아 있었을까요?”
그는 자신이 쓴 6·25 체험기를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학도병에 대해 한 말씀드리겠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열네 살에서 열일곱 살 먹은 소년병이 그 무거운 M1 소총을 들어야 했으니… ‘어른 군인’에 비해 일찍 죽을 수밖에요. 세월이 흘러 지금 생존자는 1000명 미만입니다.
(학도병이) 군에 들어갈 때 정부는 ‘학교에 복귀하면 우리가 책임지고 학업에 종사할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했어요. 다시 학교로 돌아가리라 했지만, 실행이 안 됐어요. 4~6년간 군에 발목이 잡혔는데 제대하니 공부할 여유가 없었던 겁니다.”
인터뷰를 끝내고 지하철 1호선 시청역까지 바래다 드리려 했지만 한사코 마다했다. “혼자 가겠다”고 고집했다. 그러곤 이런 말을 덧붙였다.
“그때 전쟁은 일본식(式) 공격전쟁이어서 희생이 너무 많았어요. 작전에 따른 부대 배치와 정보를 활용한 전쟁이어야 하는데 무조건 공격해서 희생이 많았습니다.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 남북관계가 좋아지면 전우의 유해가 묻힌 곳을 다시 발굴해야 합니다. 3사단, 8사단, 6사단, 수도사단 등 4개 사단이 ‘철의 삼각지’에서 전멸당했으니까요. 전우들을 묻은 곳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5년이 지난 4월 어느 날 그 원고가 떠올랐다. 책상을 뒤져보았다. 색이 조금 바래 있었다. 그제야 원고를 처음부터 읽어보았다. 다 읽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두꺼운 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었다.
혹시나 편찮으시지 않을까, 작고하셨을까 조심스러웠다. 망설이다 전화를 걸었다. 집 전화였는데 받지 않았다. 휴대전화 역시 받지 않았다. 1시간 뒤 다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길게 흐르고 전화를 끊으려는데 수화기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혹시… 임영환 어르신이신가요?”
“네, 전데요.”
“《월간조선》 기자입니다. 기억나십니까.”
“어… 5년 만이네요.”
그는 5년 전 만난 기자를 기억하고 있었다. 지난 5월 2일, 우리는 서울 광화문에서 만났다. 나무 지팡이를 짚고 나타난 그는 걸음이 약간 불편했지만 건강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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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환씨가 컴퓨터 워드로 작성한 26쪽 분량의 전쟁 체험담 원고. |
1934년 8월생. 인천 창영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인천 영화중학교에 입학해 6·25전쟁을 맞았다. 1950년 12월 28일 인천 학도의용대에 입대했다. 1951년 1월 육군 제2훈련소와 통신학교(3기)를 거쳐 육군 수도사단에 배속되었다. 통신병으로 참전한 후 만기제대한 것은 1955년 1월 10일. 2년 뒤에 아내 이연하(83)씨와 결혼해 아들 셋을 두었다. 한국미곡창고, 대한통운에서 근무했고 중장비 회사인 동일중기㈜의 대표이사를 지냈다. 대한중기협회 인천지부장을 3년간 역임했다. 1987년과 2006년 인천시장 표창을 받았다.
― 6·25전쟁 체험담을 5년 만에 읽어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솔직히 얘기하면… 머리가 모자라요. 중3 까까머리가 입대했으니 배운 게 없어요…. 당시 인천에서 학도병 3000명이 출정했습니다. 이후 창원·마산·통영을 왔다 갔다 하는 사이에 무려 1000명이 사라졌어요. 중간에 떨어져 나가고 목적지에 도착한 사람이 2000명이었죠. 그중 600~700명은 해병대 5기와 6기생이 되고 나머지 1300~1400명은 육군에 입대했어요. 육군 통신학교에 600~700명이 가고, 나머지는 전방 각 사단에 배치됐지요.
저는 통신학교에 들어갔는데 당시 통신장비가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 때 미군이 쓰던 것이었어요. 심지어 6·25전쟁 때 인민군 통신병이 쓰던 무전기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군이 소련에 원조해준 것이었죠.”
6·25전쟁 때 학도의용대는 의병(義兵)과 다름없다. 정규군이 아니었다. 전쟁 사흘 만에 수도가 함락되자 6월 29일 수원에서 ‘비상학도대(非常學徒隊)’를 조직해 한강을 도하하려던 인민군을 저지하러 참전한 것이 계기였다.
기자는 인터뷰와 전쟁 체험담으로 6·25 당시 참상을 재구성해 보았다. 그의 체험기는 화려한 수사(修辭)는 없지만 진솔하고 사실적인 문체였다. 일부 문체적 오류 등은 어법에 맞게 고쳤다. 지면 제한으로 일부만 발췌해 소개한다.
마대 속에 볏짚을 넣어 듬성듬성 꿰맨 자루를 깔고 잠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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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학도병으로 6·25에 참전한 임영환씨. |
또한 피란민들의 안내 활동과 군 입대자 안내에 협조하면서 학도의용대 조직활동을 했다. 그러던 중 7월 4일 북한군이 인천을 점령하자 우리는 개별적으로 피란길에 오르고, 일부는 지하로 잠적했다.
그 후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인천이 수복되면서 여러 방면으로 흩어졌던 동지들이 모여들었다. 이때 현인고 출신 이계송 동지의 지시 및 조직으로 각 지대(북구, 동구, 서구, 부평, 남동, 계양, 주안, 해성) 책임자를 선임하여 북한군 치하에 있을 때 협조자들을 색출하여 경찰에 인계했다.〉
― 피란 간 것은 1·4후퇴 때인가요.
“아뇨, 1950년 12월 18일 오후에 3000명의 인천 지역 학생들이 국방부 정훈국의 연락을 받고 모여 출정식을 가진 뒤 남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어요. 당시 인천 시민이 28만명인데 한 집에 1~2명이 출정하게 된 것이죠.”
인천 석바위(주안동)를 지나 신천리(뱀내장터), 수암을 지나 수원 방향으로 걸어가는데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12월 22일 대구에 도착해 육군본부에서 학생증과 인천학도 의용대원이란 증명서를 주고 받았다. 육본의 지시로 걸어서 밀양·삼량진을 거쳐 절반은 창원·마산·통영 방위군 훈련소로, 나머지는 부산으로 가니 모두 배편으로 마산에 집결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할 수 없이 마산행 화물 여객선에 몸을 실었다.
이듬해 1월 10일 부산진초등학교에 있던 제2육군훈련소에 입소하며 정식 군인이 되었다.
〈첫 주는 제식훈련, 다음 주는 총을 쏘는 자세 및 전투 훈련을 받았는데, 여전히 군복도 없이 군모는 미군들 뜨개질 모자가 지급되었다. 주말이 되어서야 중공군 방한복과 밀양직 군복, 일제 군화가 지급되었다. 2주일간 이불로 모포가 한 개씩 지급되었지만 깔고 잘 요가 없어 마대 속에 볏짚을 넣어 듬성듬성 꿰맨 자루를 학교 마룻바닥에 깔고 잤다. 볏짚 먼지가 말할 수 없이 많아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식사 역시 밥그릇이 모자라 프라이팬 뚜껑, 물컵 등으로 먹는 열악한 환경 때문에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훈련소에서는 우리가 훈련을 받고 방위군으로 배치될 것으로 알았지만, 일주일 후 우리 소년 학도병에게 군번을 주면서 현역으로 입대하게 하였다. 모든 것은 정부 지침에 따른 것으로 생각된다.〉
임영환은 육군 통신학교에서 무선교육을 받은 뒤 1951년 5월 10일 육군 수도사단 통신부대로 떠났다.
― 통신병으로 바로 전방에 투입되셨나요.
“대구 보충대를 떠나 울진을 거쳐 동해안을 끼고 북으로 북으로 달린 기억이 납니다. 흙물(갯벌)인 서해와 달리 동해는 너무 고왔어요. 파란 물결과 흰 파도가 일렁였지만 전선이 가까워 올수록 마음이 무거웠어요. 어느 곳으로 가는지 알 수 없었거든요. 뜬소문으로 철의 삼각지(북측 평강·김화·철원)에서 중공군과 인민군이 합세해 아군을 전멸시키고 남하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나는 최준갑 군과 둘이 26연대에 배속되었다. 당시 연대 통신대는 대관령 밑 어느 개울 옆 초가집이었는데 우리가 현지에 도착하니 통신대장인 대위가 이렇게 물었다.
“귀관들, 지금 몇 살인가?”
아마 나이가 어려 보여 기가 막힌 모양이었다. 나는 홀로 연대CP(후방 보급 지휘소)에 머무르며 삼척으로 이동하는데 길가 무연탄의 까만 먼지가 바람이 불면 날아와 얼굴이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누구를 위해 전쟁의 희생물이 되어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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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당시 임영환씨는 육군 26연대 2대대 통신대원으로 복무했다. 오른쪽에서 세 번째 헤드폰을 쓴 이가 임영환씨다. |
“1951년 6월 18일 2대대로 전출 가서 이튿날 아침 산골짜기를 거쳐 능선을 올랐어요. 그 능선이 향로봉이었고, 그날 저녁 향로봉 오른쪽 능선 정상에 대대OP(전방 지휘소)가 있었는데 OP 앞으로 외금강이 흐르고 있었어요.
그날 저녁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어요. 처음 겪는 전투라 겁이 났지만 부대원들이 마음을 안정시켜주었어요. 다음 날 아침 산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먹구름 위에 우리가 있었습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아름답게 보이는데, 구름 위의 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마치 마귀가 나올 것 같은 으슥함을 느꼈어요.
새벽에 동해에서 떠오르는 해는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는데, 멀리 성냥개비 반 개 정도로 보이는 배에서 불이 번쩍 하더니 한참 후 함포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는 당시 참상을 이렇게 적었다.
〈우리 대대가 외금강 앞 능선 쪽으로 2km 정도 전방으로 이동했는데, 전일 작전에서 교전했던 참상이 눈에 들어왔다. 적들은 포와 기관총 및 지뢰 등으로 엄청난 피해를 당해 시체가 까맣게 타 있거나 말로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의 상태로 널려 있었고, 아군의 시체도 있었다. 그 높은 곳에서 시체를 운반할 수가 없어 그곳에다 묻어주었다. 시체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날 전방 약 2km 지점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총소리가 콩 볶듯 들린 얼마 후 인민군 취사병이 잡혀왔는데, 도주하다 바위에서 떨어져 무릎이 깨져 걷지도 못했다고 한다.
“그에게 정보를 수집한 후 대대장은 수색대 선임하사에게 어떤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 후 총소리가 들렸지요. 다시 향로봉 정상을 넘어 왼쪽 능선을 따라 이동하는데, 산이 높아 구름 속에서 전진하느라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수백 구의 시체를 밟고 걸었어요. 왜 누구를 위해 알지도 못하는 산골짜기에서 전쟁의 희생물이 되어야 하는지 한스러웠어요.”
얼마 후 그는 사단 교육대로 차출되었다. 교육대에는 통신학교 동기생이 많았다고 한다. 교육기간 중 923.5고지(강원도 고성의 간성 지역 고지를 말한다)를 공격하는 작전이 있었는데, 2대대는 좌우로 1대대와 3대대가 엄호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고지를 점령했다.
“돌아온 부대원들 말이, 적이 퇴각하면서 기관총 사수·부사수를 토치카 기둥에 묶어놓고 고참병들은 도망가고 졸병들만 남겨 끝까지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으로 보였다고 합니다.”
교육을 수료하고 복귀하는데 부대가 설악산 진부령 정상 향로봉 방향 약 100m 지점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야간에 전화선 가설을 위해 나간 통신 장교와 가설 병들에게 사고가 발생해, 1명이 전사하고 3명이 부상당했다.(1951년 8월 23일경)
“깜깜한 밤이어서 지뢰 매설 상황을 잘 몰랐던 겁니다. 앞서가던 대구 출신 이주영 이등중사가 지뢰를 밟자 연쇄폭발로 뒤따라가던 병사들이 부상당한 거지요.”
그는 그날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다음 날 아침 전사자를 귀환시키라는 명을 받고 현지에 가보니 전사자의 시체가 여기저기 잘려 나가고 파리가 엄청 달라붙어 보기가 안쓰러웠다. 시신을 수습하는데 금방이라도 매설된 지뢰가 터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때 KSC(당시 노무사단에 파견된 인부) 노무자에게 “(전사자들을) 들고 오라”고 지시했지만 거부하는 바람에 영등포 출신 이등중사와 같이 들어가 둘이서 간신히 들고 나왔다. 지뢰가 눈에 띄게 모 심듯이 묻어놓아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곳에서 KSC에게 시신 이송을 부탁하고 고지에서 내려오는데 근방에 건봉사라는 절이 보여 이곳이 강원도 고성 근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순 반란사건의 현장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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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에 찍은 가족 사진. 윗줄 왼쪽부터 장남 임재규, 차남 임정규, 3남 임희규씨. 아랫줄은 임영환씨와 부인 이연하씨. |
속초항에서 밤 8시쯤, 파도치는 바다를 향해 닻을 올렸다. 부산으로 간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지만 정확히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일본 배를 탔는데 배멀미 탓에 갑판이 더러워졌다. 이틀 뒤 배는 여수항에 입항했다. 닻을 내리고 하선하니 오후 3시가 되었다. 대기 중이던 트럭을 타고 순천농업중학교에 도착하니 운동장에 24인용 미군 천막 20~30개가 있었고 바닥에는 볏짚이 깔려 있었다.
“그곳(순천) 출신 병사 말이, 예전 여수·순천 반란사건 당시 숨진 사람들이 널려 있던 곳이라더군요.”
임영환의 부대는 광양을 거쳐 섬진강 나루에 도착해 근방을 둘러보았다. 다리가 폭격으로 무너져 있었다. 다시 작은 배로 도강해 경남 하동에 도착했다. 섬진강 강가에서 천막을 치고 하룻밤 쉬었는데 이튿날 하동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그의 말이다.
“하동서(署) 악양지서, 학예지서가 공비에 포위되어 위험한 상태고, 하동 마을의 소 72마리가 탈취되었다는 겁니다. 공비들은 우리가 도착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어요. 바다를 통해 왔으니 정보가 없었던 것이죠. 다음 날 악양면에 들어가니 집마다 붉은 글씨가 적힌 삐라(선전물)가 붙어 있었어요.”
이때부터 지리산 공비토벌이 시작됐다. 박격포와 기관총으로 응사하며 추격하자 공비들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공비들이 전투경찰은 만만했지만 중화기로 무장한 정규군은 상대하기 어려웠으리라.
― 당시 전공(戰功)은 어떠셨나요.
“많은 공비를 포로로 잡았고, 악양지서와 학예지서에 갇혀 있던 양민 350명 정도를 구출했어요.”
― 또 다른 기억은.
“쌍계사(하동군 화개면)로 진입해 절 외각에 본부를 설치했는데, 이곳에 종이를 만드는 원료인 닥나무가 많았습니다. 밤이 되자 날씨가 추웠어요.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으니 몸이 노곤해지며 잠이 솔솔 왔어요. 아궁이에 불을 때고 있던 스님이 (제가) 안쓰러웠는지 걸치던 옷을 주셨어요.”
한번은 섬진강변을 수색하는데 어느 집의 큰 장독대가 보이더란다. 200m쯤 되는 거리였는데 한 대원이 칼빈 총으로 장난 삼아 장독대를 맞췄다.
“독 뒤에 공비가 있었던 겁니다. 사살된 거지요. 공비들은 사방팔방에 우리가 생각지 못한 곳에 은신하고 있었던 것이죠. 적들은 항상 우리를 보고 있었습니다.”
우리 국군은 지리산에 흩어져 잠복하던 공비들을 차례차례 토벌했다.
〈우리 중화기가 어둠을 뚫고 불을 뿜기 시작하여 박격포까지 동원되어 3~4시간 동안 피아간에 교전이 있었다. 이날 전 대원이 수색 및 잔당 소탕에 투입되어 포로들을 잡아왔다. 그중에는 1949년 여수·순천 반란사건 당시 입산하여 숨어 지내던 공비가 군단장 칭호를 받으며 지휘하고 있다가 잡혔고, 허름하고 나이 많은 촌로도 잡혀 왔는데 대퇴부에 포탄 파편에 의한 부상을 당해 뼈가 보일 정도여서 위생병이 압박붕대로 감아주었다. 이들은 영하 20도 정도의 날씨에 며칠을 굶으며 도주하고 있었다.
공비들은 발이 전부 동상에 걸려 잘 걷지도 못했다. 군단장에게 “왜 자수하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자수하여 매 맞아 죽는 것보다 나을 것 같았다”고 하였다. 공비들 중에 산속에서 결혼을 하여 임신 중인 자가 여러 명 있었다. 얼굴은 세면을 못하여 까맣고 손등도 씻지 못해 말로 다 못할 정도로 더러웠다.〉
1951년 12월 28일은 임영환에게 아주 특별한 날이었다. 하사로 진급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화물열차를 타고 전주에 도착해, 전주농업학교 뒷산을 넘어 완주군 고산면에 도착했다. 능선을 따라 내려가는데 일반 민가에는 접근하지 말라는 연락이 왔다. 열병이 만연하고 있었다.
“그곳은 본래부터 곶감이 유명한 곳이에요. 감이 주렁주렁 달려 먹음직스러워 보였어요. 보병들이 감을 따러 산기슭으로 올라갔는데 신발 자국을 보고 미행해 공비를 잡았습니다. 그날 늦은 저녁에는 2명의 여자가 잡혔는데 저와 동향이었어요. 집이 (인천) 인현동이고 인천여중에 다니던 학생들이었죠. 수첩에 기록해놓고 언제든 집에 가면 알려주리라 생각했는데 전선을 다니다 보니 수첩이 눈비에 맞아 뭉개지고 말았어요.”
전쟁 중이었지만 산중에는 짐승이 많았다.
“갈대가 많아 수색하기가 어려워 야간에는 방어에 치중했어요. 한번은 산돼지와 사슴 한 마리씩을 포획했어요. 원래 작전 중에 잡은 동물은 병사들에게 피해가 온다고 먹지 않는데 그날은 고기를 먹었어요. 처음 먹었는데 맛이 없었어요. 이튿날 공비들이 포위망을 뚫고 도피하기 위해 산불을 질러 우리 병사 두 병이 죽었어요. 이후 대대장은 작전 중에 절대 동물을 사살하지 못하도록 특명을 내렸죠.”
임영환 부대는 이후 남원·함양·구례 등을 거치며 공비를 완전 소탕한 뒤 1952년 3월 19일 화물차를 타고 전방으로 다시 복귀했다.
“6개월간 머리도 못 깎고 목욕도 못 했어요. 밀양직 광목으로 만든 군복 위에 중공군식 방한복을 입고 산으로 산으로 돌아다녔으니까요. 누가 봐도 거지 중 상거지였어요.”
길을 잘못 들면 적의 시체를 밟고 다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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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 삼각지’인 철원평야에는 격전의 상처가 지금껏 남아 있다. 남방한계선 바로 앞의 옛 월정리 역사에 있는 평강 군민의 망향비와 6·25격전의 전적판. |
“고지에서 내려가려면 나무 뿌리 또는 전화선을 붙들지 않으면 내려갈 수가 없었는데 피아간 너무 처참한 전쟁이 벌어지다 보니 능선은 절벽이 되어 있었죠. 밤이 되면 소총, 기관총, 박격포 소리가 불빛과 함께 사방으로 콩 볶듯 요란했어요. 전투가 끝나면 언제 싸웠느냐는 듯이 고요했지만 피아간 엄청난 희생자가 발생했어요.”
그가 쓴 체험담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어느 날 수색대원이 팬티 바람에 새벽녘에 돌아왔다. 적의 시체 주머니를 더듬어 정보가 될 자료가 없나 조사했는데 시체가 어찌나 많은지 무릎까지 차서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매일매일 똑같은 전투는 계속되었다. 우리 병사들의 전사도 많아졌다.
어느 날은 임무를 교대하고 내려와 석식 후 상황실로 가려는데 교대했던 중사가 포 파편에 전사했다. 다음 날은 통신병인 주문진 중학교 출신 김금선 중사가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 이렇게 전쟁은 날이 갈수록 상황이 악화되었다.
어느 날 사단장은 연대 상황실에서, 연대장은 대대장실에서, 대대장은 OP 상황실에서 작전에 임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전선의 ‘빽’이라고 하는 것이, (당시 화폐로) 100만원이 있으면 후방에서, 돈이 없으면 전선으로 배치된다고 널리 알려져 있었다. 연대장이 정오쯤 답답하니까 잠깐 담배를 피우려고 벙커 앞에 나와 있었다. 그때 부상병들이 30~40명 모여 있었는데 팔과 등에 부상당한 어느 병사가 “이제는 집에도 못 가고 죽겠구나” 하고 말하는 순간, 적의 122mm 포탄이 날아와 터지며 파편이 그 부상병 이마를 치고 나가 앞으로 넘어지며 전사하는 것을 본 연대장이 상황실로 들어갔다. ‘이런 것이 전쟁이구나’ 하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1953년 5~7월, 휴전을 앞두고 피아간 전투는 절정에 다다르고 있었다. 계속된 그의 말이다.
“상황이 계속 악화일로를 걷고 있을 때 포병 관측병이 적진지 후방에서 탱크 3대가 올라오는 사진을 가져왔어요. 적이 탱크 공격을 감행할 계획인 듯했지요. 당시 아군은 대동아전쟁 때 미군이 쓰던 탱크인데 뚜껑이 없어서 드럼통을 오려 용접하고 그 위에 모래자루를 올려놓은 게 고작이었죠. 적의 (소련제) 탱크와 대조적이었어요.”
그날 저녁 적진지 세 방향에서 포탄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아군 지휘소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대대장, 작전관, 정보관, 미군 및 요원들이 모두 부상을 당했죠. 밤이라 전투기 요청은 불가능해서 할 수 없이 아군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지원 포 사격을 요청했어요. 덕분에 적들은 누그러졌지요.”
“이튿날 오전 쌍안경으로 보니 적진의 바위산이 뻐그러져 있었다”고 했다. 그만큼 포의 위력이 대단했다. 하지만 언제 그랬느냐는 듯 매일 새로운 전투가 반복됐다.
“포탄이 쌍방으로 날아 들어와 양쪽 병사들이 하늘로 날아다녔어요. 직접 포탄에 맞은 병사는 형체조차 없는데도 상부에서 전사자를 찾아오라고 지시가 하달되었죠. 없는 시신을 어디서….”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적을 잡으러 갔다가 잡혀가면 전사자로 보고했어요. 지휘관들은 책임을 면하려고 허위보고를 했지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어요. 간혹 엄청난 희생을 본 병사가 탈영한 경우도 있었고, 탈영으로 허위보고된 신병(총의 부속을 찾다가 늦게 돌아온)이 아군 연대장에 의해 현장에서 사살된 일도 있었어요. 아비규환이었죠.”
〈8사단과 교대하고 우리 2대대는 후방으로 이동 대기 중 병력을 보충받으며 지형능선 후방으로 다시 이동 대기하고 있는데 그곳은 적들의 시체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흩어져 있어 살짝 흙을 덮어놓은 곳이었다. 길을 잘못 들면 적의 시체를 밟고 다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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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공동 유해 발굴 예상지 철의 삼각지. 임영환씨는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철의 삼각지에 묻었던 전우들의 유해를 발굴해야 한다”고 말했다. |
“그 미군은 통신병인데 미군 벙커가 포탄에 날아가 버려 오갈 데가 없었어요. 그 병사가 ‘영어 할 줄 아느냐’고 물어요. 중학교에서 조금 배운 말로 대화를 나누는데 놀랍게도 7월 27일 전쟁이 끝난다는 겁니다.
깜짝 놀라서 대대장에게 보고하니까, 대대장은 권총을 빼 들면서 ‘이 새끼 입다물어. 누가 그러더냐’고 추궁해요. ‘미군 병사에게 들었다’고 하자 얼굴이 하얘지더군요. 이 양반이 연대장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봐도 ‘무슨 얘기냐’는 반응이었죠. 연대장도 몰랐던 겁니다. 연대장이 다시 사단장에게 물으니, 느낌에 사단에서는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연대·대대에 작전상 지시를 내리지 않은 것 같았어요.
당시 미군 병사들은 휴전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으나 우리 국군은 시달을 안 한 겁니다. 도망갈까 봐….”
다음 날부터 “현재 재고 탄약을 작전에 필요한 만큼 남기고 적진을 향해 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제한적으로 쓰던 탄약을 마음놓고 쏘라는 것”이었다.
7월 27일 밤 10시까지 어마어마한 전투는 계속되었고, 밤 10시에 쌍방의 총성이 멎었다.
“그런데 조용한 밤 10시에 여우 울음소리가 제일 먼저 들렸어요. 그 전투 속에 어떻게 살아 있었을까요?”
그는 자신이 쓴 6·25 체험기를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학도병에 대해 한 말씀드리겠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열네 살에서 열일곱 살 먹은 소년병이 그 무거운 M1 소총을 들어야 했으니… ‘어른 군인’에 비해 일찍 죽을 수밖에요. 세월이 흘러 지금 생존자는 1000명 미만입니다.
(학도병이) 군에 들어갈 때 정부는 ‘학교에 복귀하면 우리가 책임지고 학업에 종사할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했어요. 다시 학교로 돌아가리라 했지만, 실행이 안 됐어요. 4~6년간 군에 발목이 잡혔는데 제대하니 공부할 여유가 없었던 겁니다.”
인터뷰를 끝내고 지하철 1호선 시청역까지 바래다 드리려 했지만 한사코 마다했다. “혼자 가겠다”고 고집했다. 그러곤 이런 말을 덧붙였다.
“그때 전쟁은 일본식(式) 공격전쟁이어서 희생이 너무 많았어요. 작전에 따른 부대 배치와 정보를 활용한 전쟁이어야 하는데 무조건 공격해서 희생이 많았습니다.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 남북관계가 좋아지면 전우의 유해가 묻힌 곳을 다시 발굴해야 합니다. 3사단, 8사단, 6사단, 수도사단 등 4개 사단이 ‘철의 삼각지’에서 전멸당했으니까요. 전우들을 묻은 곳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