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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완의 인간탐험

소설가 李文烈의 ‘불화시대’ 극복기

“내 생애 후반의 고약한 禍 같고, 억울한 禍 같고…”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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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도리가 없어. 아… 옛말에 ‘大同之患(대동지환)은 患이 아니다’고 했잖아요. 모두가 똑같이 당하는 患은 患이 아닌 거지. 그런데 지금 大同之患이 된 거야. 잘못되면 문재인 대통령이 판단을 잘못했다고 해도 大同之患이야. 누구 한 사람이 잘못한 게 아니고, 우리가 다 묵인했잖아요. 다 같이 당하고 효과도 다 같이 누리게 될 것이고…. 그러니까 患이 아닌 것이지. 내가 그렇게 마음을 먹었어요”

⊙ 두 달 전 장편소설 《둔주곡(遁走曲) 80년대》의 1부 연재 서둘러 마쳐… “요즘처럼 자기 검열이 세게 걸린 적 없어”
⊙ “아주 고약한 불협화음 지대를 통과하고 있는 우리 시대의 遁走曲…”
⊙ 최근 자유한국당 조직강화특위 참여 거절해. “전문 칼잡이도 아니고…”
⊙ “(이 시대가) 영남 南人 시절이라고 해도, 이제는 南人의 땅 자체도 용서할 것 같지 않습니다, 절대로…”

李文烈
1948년생. 서울대 사범대 수학 / 197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 《사람의 아들》 《젊은 날의 초상》 《황제를 위하여》 《영웅시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변경》 등 / 오늘의 작가상,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동리문학상 수상
사진=조현호
  소설가 이문열(李文烈·70)은 두 달 전 소설 《둔주곡(遁走曲) 80년대》의 1부 연재를 마쳤다. 향후 총 3부작으로 작품을 완성할 생각이다. 그러나 고통스럽게 1부를 겨우 마쳤다. 이 장편소설은 그가 30~40대 때에 경험한 1980년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간혹 이문열은 “문학 하면서 겪은 80년대 이야기는 대하물이 되어도 모자란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가 쓴 연대기적 소설이자 가족사 소설인 《변경》(2014년 12권으로 재출간)이 195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반의 현실 상황, 그러니까 한국전쟁이 가져다준 혼란과 무질서, 정신적 무정부주의를 극복하는 과정을 그렸다면, 《둔주곡 80년대》는 80년대를 관통하는 역사의 굴곡과 맞닿아 있다. 이른바 ‘서울의 봄’과 광주 5·18항쟁이, 그리고 6월 항쟁이, 보수와 진보의 이념대결이 막 태동하던, 군사정부 아래 산업화의 열매가 수확을 시작하던 시절이었다. 어쩌면 지금도 80년대의 펄펄 끓던 불꽃의 상흔이 한국인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지 모른다.
 
  일흔의 이문열은 바로 희비극이 난무하던 80년대를 관통하기 위해 작년부터 펜을 들었었다. 기자는 지난 10월 10일 오후 경기도 이천의 설봉산 자락, 그의 창작 공간인 부악문원(負岳文院)을 찾았다.
 
  “정말 힘들어요. 하기(쓰기)는 해야 하고… 안 할(쓸) 수는 없고….”
 
  1부를 겨우 끝낸 소설 쓰기가 어렵다는 하소연이었다.
 
  “요즘처럼 자기 검열이 세게 걸린 적이 내 생애 없었습니다. 엄청난 자기 검열 속에 글 한 자, 한 자 쓸 때 조심하고 있어요. 서둘러 연재를 중단한 것도 바로 자기 검열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숨을 쉬더니 말을 이어갔다.
 
  “원래는 1부에 16화(話)가 들어가는데 13화로 끝냈어요. 3화는 더 써야 하는데 못 쓰겠어요. 뭐가 빠졌냐 하면 광주 5·18 이야기를 결국 못 썼죠. 그걸 빼니까 이야기가 애매하게 돼 무슨 문인 회고록인지 르포 기록인지 이상하게 돼버렸어요. 바로 부딪혀보기도 그렇고, 상상력으로 쓰기도 뭐하고…. 소설을 작년 7월부터 시작했으니까,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고 석 달째인데 글쓰기가 뻑뻑해지기 시작하더라고…. 결국 300~400매 빠졌는데 금년 말까지 400매를 더 채워 1부작을 (단행본으로) 낼 생각입니다.”
 
 
  新作 《둔주곡 80년대》에 대하여
 
1977년 대구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상 기념식장에서 이문열씨(앞줄 오른쪽 끝).
  《둔주곡 80년대》 1부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주인공 ‘이불휴’가 식솔들을 모두 이끌고 대구에서 서울로 이사한 첫날 밤 얼큰하게 취해 들어와 막 잠이 들려는 아이들을 깨워놓고 이렇게 말한다. 다음은 소설의 한 단락이다.
 
  〈… “너희들 둔주곡 알지? 바하의 둔주곡. 서로 다른 여러 개의 가락이 함께 진행하는 형식의 곡 말이야. 이 둔주곡은 협화음과 불협화음 공간을 아우르며 지나는데, 나는 이제 이 서울에서, 우리 공간의 중앙, 시간의 중심이 되는 이 서울에서 아주 고약한 불협화음 지대를 통과하고 있는 우리 시대의 둔주곡을 들으려 한다. 잘못 알아들으면 우리 모두 터도 망도 없어질 치명적인 곡을….” 그러나 어느새 식곤증으로 꾸벅 졸고 있는 그의 가족들은 아무도 그의 말을 알아들은 것 같지 않았다.…〉
 
  1부작 끝머리에 나오는 이 의뭉스런 문장은 80년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던 가락, 그 협화음과 불협화음 지대를 글쓰기로 관통하겠다는 이문열 자신에게 던지는 담금질인지 모른다.
 
  ― 소설 제목을 왜 ‘둔주곡’으로 택했는지 이해가 갑니다.
 
  “어쩌면 굉장히 추상적인 접근인데 5개의 서로 다른 가락이 동시에 진행된 곡이 둔주곡이잖아요. 바흐가 제일 많이 작곡했죠. 시끄럽고 안 어울리는 불협화음 구간이 뒷날(시간이 지나면서) 화성악같이 어우러져요. 저는 군부(軍部)의 가락, 반체제의 가락, 민중정부의 가락 등 5개의 둔주곡으로 갈 생각인데 이름을 바꿀까도 생각 중이에요.”
 
  문득 1980년 5·18 당시 이문열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궁금했다.
 
  그는 1977년 대구에서 발행된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나자레를 아십니까〉로 가작 입선했다. 그리고 이듬해 이 신문에 편집부 기자로 입사한다. 보통 신문사는 대졸 학력이 필요하다. 그의 최종 학력은 서울대 사범대 중퇴. 신문사 인사과에 전화해 “학력의 ‘역’자가 ‘이력’할 때 역(歷)입니까, 아니면 ‘힘력(力)’입니까”라고 물으니 수화기 저쪽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그렇게 입사해 32세, 1980년까지 《매일신문》 기자로 일한다.
 
  “그때 《매일신문》 발행부수가 20만 부쯤 됐을 겁니다. 대구에 깔리는 《동아일보》가 5만 부, 《조선일보》는 (동아보다) 5000부 적고, 《중앙일보》는 3만 부… 이래가지고 완전히 황금시대였어요.”
 
  ― 《매일신문》 계실 때 제가 그 신문 배달을 했습니다.
 
  대구에서 자란 기자는 초등학교 시절인 1980년 초 《매일신문》을 배달했다.
 
  “그래요? 하하하. 벌써 40년 전이네요. 그때 신문이 8쪽인데 한 시간에 한 판만 짜면 되던 시절이었어요. 졸병이 퇴근하기도 그렇고 신문사 조사부에서 책을 많이 읽었죠. 작가 지망생이었으니 읽을 것도 많고….
 
  그러다가 《동아일보》에 스카우트돼 (서울로) 올라오려다가 안 가게 됐는데, 그때 쉽사리 안 가도 된다고 생각한 이유가 《매일신문》하고 《동아일보》하고 월급 차이가 5만원도 안 됐어요. 《매일》이 22만원, 《동아》가 26만~27만원. 그때 별로 미련이 없었던 게 에이~ 대구 《매일》 가서 소설이나 쓰지 그랬어요.”
 
  편집이랬자 하루 한 판, 한 시간만 바짝 긴장해서 짜면 오전 11시 이후 오롯이 그의 시간이었다. 상당한 장서가 있던 신문사 조사부를 들락거리며 많은 글을 읽었다. 문학작품보다는 시사적인 책들이 많았다고 한다.
 
  ― 그때 한국문학 중 어떤 책을 읽었나요. 저 혼자 생각에 이광수보다 채만식, 채만식보다 염상섭을 더 좋아하셨을 것 같아요.
 
  “신문사니까 (자료실에) 고전은 아니었고(없었고) 시사나… 군대에 있거나 (고시공부를 한다고) 절(寺)에 있어서 몰랐던 것들을 알게 하는 책들을 많이 읽었어요.
 
  염상섭은 전집을 봤고요. 채만식은 《탁류》만 봤고…. 오히려 이야기꾼으로 김동인이나 이광수 소설을 더 많이 봤어요. 기본적으로 문학을 시작할 때 조악한 번역본인 세계문학전집부터 읽잖아요. 그러다가 나중 대학 가서 글 한번 써볼까 할 때, 한국 작가의 전집을 사서 두 달 만에 독파하곤 했어요.”
 
 
  1980년대 이문열의 민낯
 
  이문열 선생은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 〈새하곡〉이 당선돼 정식으로 중앙 문단에 이름을 알렸다. 그리고 장편 《사람의 아들》로 ‘오늘의 작가상’(민음사 제정)을 수상했다.
 
  “《동아》에서 오라고 해서 갔는데 면접에서 자꾸 대학 중퇴를 따지는 겁니다. 그때 데모를 많이 해서 대학생들이 많이 잘릴 때였거든요. 편집국장이나 주간… 그때 주간이 소설 〈바비도〉 쓰셨던 김성한 선생인데 ‘가재는 게 편’이라고 내 편을 들었어요. 그런데 몇몇 사람이 ‘왜 (대학을) 안 다녔냐’를 자꾸 물어 짜증이 나서 (면접장에서) 일어나 버렸어요.”
 
  당시 면접 경험담은 《둔주곡 80년대》에도 실려 있다. 다음은 소설 속 묘사다.
 
  〈… “삼선 개헌 반대 데모가 한창이라 제적 퇴학이 많았는데, 혹시 그런 쪽과는 관련이 없소?”
 
  그렇게 시작되면서 그에게 한동안 그 면접은 은근히 짜증이 나면서도 실망스럽기 그지없는 신문같이 되어 갔다. 편집국장과 주필이 간간 끼어들어 분위기를 바꾸려고 시도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중략) 마침내 참지 못한 그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제가 무얼 잘못 헤아린 것 같습니다. (중략) 무지와 무례도 사죄드리고 이만 물러갈까 합니다.”
 
  그러자 그때까지 무언가 사뭇 민망하고 또 미안해하는 느낌으로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던 주필이 그런 그의 옷깃을 잡듯 하며 처음으로 엄한 목소리를 냈다.
 
  “이불휴 작가, 나도 있는데 이거 너무 기고만장한 거 아뇨? 집안에 일꾼을 하나 불러 써도 이것저것 알아보고 쓰는 법, 그래도 이만한 신문사 기자를 뽑는 일인데 오죽하겠소? 앉아요. 앉아서 이 어른들 물음 마저 듣고 충분하게 답한 뒤에 일어나도록 하시오.”…〉

 
  이문열 선생은 당시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스카우트라는 표현을 하며 뽑아간다고 해서 왔는데 자꾸 따지니까 짜증이 나지. 급해서 내가 매달린 것도 아니고 오라고 해서 왔는데. 그래서 ‘대구 가서 소설이나 쓸랍니다’ 하고 일어나니까 김성한 선생이 제 손을 잡고 ‘머슴도 알아보고 쓰는데, 그렇게 물어보는 것 여사(餘事)지 왜 그렇게 화를 내느냐’고 그랬어요. 그 이야기를 소설에 약간 변형해서 썼어요.
 
  그렇게 해서 다시 대구로 내려갔죠. 괘씸했죠. 신체검사도 다 하고 사표까지 써서 서랍에 넣어두고 후배 기자한테 ‘내가 못 나오거든 네가 대신 《매일신문》에 전해라’고 해뒀거든요. 월요일에 다시 출근하니 서랍 속에 사표가 그냥 있더라고요. 모르는 척하고 《매일신문》에 석 달 더 다니다가 1980년 7월에 그만뒀어요.”
 
 
  자유한국당 조강특위 참여를 거절한 이유
 
  ― 이제 본격적으로 이야기해 볼까요? 편하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나도 편하게 하려고 생각 중입니다. 요새는 내가 나잇값을 하는지 말이 많아지고 이야기도 두서가 없고…. 옛날에 노인들한테 뭘 물으면 묻는 대로 대답하면 되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말하나 그랬는데 요새 내가 그래요.
 
  그나마 고마운 건 독자는 나를 잊어도 출판사는 나를 안 잊어서 책을 많이 보내줘요. 새로운 책을 안다는 것이 굉장히 감사한데 옛날엔 그게 귀한 일인지 몰랐는데 즐거워요. 신간들 석 달 치가 이 정도입니다.”
 
  커다란 책상에 신간 수백 권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얼마 전만 해도 젊은 기자를 만나면 저 사람이 내 편일까, 아닐까 생각했는데 이제는 안 따집니다. 하하하. 전혀 긴장 안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 얼마 전 전원책 변호사가 자유한국당 조직강화특위에 들어가면서 ‘지금 쇄신 안 하면 자유한국당은 기회가 없다’고 했는데 혹시나 골든타임을 넘긴 것 아닌가요.
 
  “(넘겼다고) 단정하긴 그렇고, 늦어져서 더 어려워진다는 것은 있을 수 있겠죠. 15년 전에, 그러니까 2004년 17대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을 했는데, 지금 조강특위하고 본질은 비슷한 거라고.
 
  그때 한나라당이 차떼기 위기 때문에 80석이 어렵다고 했어요. 공천심사 결과에 전체적으로 동의했고 우리한테 쫓겨난 사람들도 나를 냉대하거나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어요.”
 
  ― 이번에 자유한국당 조강특위 참여를 권유받으셨다고 하더군요.
 
  “칼자루 휘두를 나이도 아니고 50대 후반의 한 번 경험으로 충분한 거지, 전문 칼잡이도 아니고. 하하하. 두 번씩 경험할 필요야….
 
  또 (조강특위) 결정을 두고 제3의, 제4의 분열을 만들 수도 있고…. 왜냐면 성원 전체가 기꺼이 응해 (위원들을) 뽑은 게 아니라고요. 그때와 다르죠.
 
  우리가 결정을 내렸는데, (당에서 내보낼) 세력이 적으면 모를까 상당한 세력으로 남아 있다고요. 말하지 않아도 대개 나가야 할 사람을 두고 일치하는 감정이 있는데, 그 감정의 뿌리가 불행하게도 아직 남아 있어요. 그들 스스로 나가주면 정말 아름답고 좋은 일이겠지만, 그것은 기대할 수 없고, 그렇다고 권위나 제도의 힘으로 밀어붙이기에도 …. 일은 안 되고 판만 크게 벌여서 분열과 반항으로 시끄러워져 더 꼴사나운 모양 보이는 것도….
 
  어쩌면 그 사람들도 그걸 기다리는지 몰라요. 저희끼리 싸워 완전히 (당이) 와해되길 기다리는지 모른다고. 그리고 또 내가 보기에 언론의 동조도 만만치 않아서, 가십처럼 시작해 당 자체를 무너뜨리는 일이 생길 수 있어요.
 
  그런 판에 거기 가서 얼쩡거리다가, 잘못하면 판을 깨지도 못하고, 오히려 상대편에서 제거하고 싶은 사람을 제거하는 도구가 되거나, 아니면 새로운 내분이나 갈등을 증폭시킬 우려가 굉장히 크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나보다 더 젊고, 적극적인 사고를 지닌 이가 나서는 게 맞다 싶었어요.”
 
  ― 조강특위 참여를 안 하겠다고 하니 사모님도 좋아하던가요.
 
  “집사람은 비교적 내가 하는 선택을 지지하는 편이나, 내가 안 할 거라 하니 안도하는….”
 
  ― 조심스런 얘기지만 현재 보수의 위기는 백약이 무효 같아요.
 
  “언론이 백약이 무효이길 바라고 있습니다.”
 
  ― 부자는 망해도 3년 간다던데 이렇게 망가질 수 있나 싶어요.
 
  “그래도 객관적인 것이나 수치는 15년 전(2004년 한나라당)보다 유리합니다. 그때는 80석이 붕괴될까 봐 걱정했습니다. 지금 그때보다는 확보된 의석만 100석이 넘잖습니까.
 
  그때는 또 뭐랄까… 무자비하게 (한나라당을) 와해시킬 만한 세력이 없었습니다. 말로 차떼기 비하는 했어도 다른 권력… 그러니까 물리력이나 검찰(권)력 같은 것이 동원된 적은 없었어요. 지금은 정권이 바뀌고 1년째인데 사방에서 무지막지하게 칼이 안 들어오는 데가 없고… 내가 보기에 그래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감옥 가면, 감옥에 보낼 작정인 것 같은데… 기를 쓰고 감옥에 보내면, 우리나라 사법부가 완전히 사라지는 겁니다. 지금도 권력의 시녀가 돼 있고….
 
  사회 곳곳이 이념적으로 장악돼 있는데 어떤 의미에서든 사법부는 인민재판보다 나을 것 없는… 북한에도, 구(舊)소련에도 사법부가 없습니까? 있었지요.”
 
 
 
2004년 한나라당의 위기와 지금

 
  ― 2004년 ‘차떼기 한나라당’과 비교해 지금 야당 상황을 어떻게 보시나요.
 
  “그때보다 엄청나게 불리하고 위축돼 있고, 국민은 분열된 야당이 치유되길 바라는 게 아니라 더 재미있는 개그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또 유도하고…. 2004년엔 박근혜(전 대통령)가 구심점이 됐는데 지금은 주구(走狗) 언론들이 촛불이랄까 ‘문빠SNS’ 지시를 받아서 개떼처럼 몰려와 필요 이상으로 희화화하고 평가절하시킵니다. 누가 말 한마디 하면 이상하게 만들어버려요. 홍준표 전 대표가 당에 들어와 나름대로 몸부림쳤는데, 지금은 그도 사라지고 희화한 것만 남았어. 자세히 보면 계획적이야…. 당에 구심점이 될 만한 사람을 살려놓지 않아요.”
 
  ― 그래도 누군가가 나타나겠죠.
 
  “지금 (당을 이끌) 사람을 만들기가 어렵거든요. 있는 사람 중에 흠이 적고 기대할 만한 사람이 왜 없었겠어요? 당 대표, 광역단체장 한 분도 있는데…. 김무성이나 오세훈 같은 분도 자기 경쟁력이 있는데, 누구는 개새끼, 누구도 개새끼 하는 마당에 새로 인물을 만든다? 언제 어떻게? 할 사람이 누가 있어. 더불어민주당에서 지원 보내주면 몰라.”
 
  ― 전망이 어두워요.
 
  “물론 중요한 일은 전망만 보고 해서도 안 되겠지만, (전망이) 없더라도 해야 할 일은 해야겠지만 ‘이걸 꼭 내가 해야 되냐’, 그리고 ‘내가 할 때냐’고 할 때, 내가 (조강특위에 참여)하기에는….
 
  과거 3김(金) 시절엔 국민 사이에 기본적으로 없어지지 않는 권위들이 존재했지만 지금은 그런 권위조차 잃어버렸어요.”
 
  ― 사실 한국 정치사 면면을 보면 보수정당의 역사와 다름없었어요. 김영삼(YS), 김대중(DJ) 등이 이끄는 야당 정도가 버텼지, 제3당의 역사는 잔혹사에 가까웠지 않나요.
 
  “물론 YS나 DJ가 모자라는 측면도 많았지만 YS는 그래도 보수 세력의 한 꼭짓점을 쥐고 있었고 DJ는 호남이라는 배경이 있었어요. (지금 야당엔) 그런 사람들이 없어요.”
 
  그러더니 이문열 선생은 지난 10월 6일 경북 영천의 유림(儒林) 행사에 갔던 얘기를 털어놨다.
 
  “며칠 전 유림 행사에 다녀왔어요. 그런데 그곳 분위기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행사를 마치고 영감쟁이들(경상도에서는 노인에 대한 친근한 표현으로 이런 표현을 곧잘 쓴다), 촌(村)선비들 여남은 분과 저녁을 먹었어요. 나보다 나이가 많거나 동배(同輩) 되는 분들이었어요.”
 
  ― 무슨 이야기를 나눴나요.
 
  “‘남북회담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기에, ‘빠르고 늦고의 문제지, (문재인 정부의) 해가 지는 것은 틀림없다’는 식으로 말하니 한 분이 그래요. ‘아무리 그렇지만 남북관계는 그렇게 봐선 안 된다’고요. ‘(남북이 잘 될지)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데 너무 단정해서 말하는 건 안 좋다’는 겁니다.”
 
 
  경북 영천에서의 경험담
 
  이문열 선생은 목을 가다듬으며 조금 비장하게 속에 있는 말을 꺼냈다.
 
  “사실 영천 하면 경상도의 심장부입니다. 6·25사변 때 낙동강 전선의 마지막 방어선이었죠. 이번에 영천에 간 것은 그 고장 출신 지산 조호익 선생에 대해 말하려고 갔어요.”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1545~ 1609)은 퇴계 이황의 제자다.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 최황(崔滉)에게 반항한 죄로 선조 임금 때 관서(關西·평안남북도) 지역으로 유배를 가야 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많은 젊은 후학을 양성하고 임진왜란, 정유재란이 터지자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친 유학자다. 계속된 그의 말이다.
 
  “지산 선생은 선비로 특징도 있고 의병장의 특징도 있어요. 그분이 30대 초반에 이상한 죄에 얽혔는데 애매한 죄예요. 말하자면 ‘지방 유지 갑질죄’ 같은 거예요.
 
  그래서 전가사변(全家徙邊)이라고, 전 가족을 이끌고 변방으로 가서 사는 형벌을 받아요. 굉장히 큰 형벌이에요. 영천 사람에게 평안도에 가서 살라는 건데 17년간 죽을 고생을 하고 살아요.
 
  그때 나이가 서른둘이니 공부는 어느 정도 됐을 것 아닙니까. 관서로 가서 기라성 같은 제자들을 길렀어요. 잠곡(潛谷) 김육(金堉·1580~1658)이란 분이 있어요. 훗날 의정부 영의정에 올랐고 상평통보를 만들었으며 대동법을 시행하기도 했어요.
 
  하여튼 지산은 관서의 인물들을 다 끌어모아 가르쳤어요. 그 얘기를 나중 선조 임금이 듣게 됐어요. 한 신하가 ‘지산은 죄가 없다’고 했고, 지산의 죄를 임금께 고(告)한 이도 ‘잘못이 없다’고 했는데도 선조는 무고한 유배령을 풀어주는 대신 더 많은 학문적 성취를 바라는 뜻에서 ‘관서부자(關西夫子)’라는 칭호를 내렸어요. 관서부자는 관서의 공자(孔子), 관서의 선생이란 뜻이에요. 이후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 의병을 일으켰고 평양회복 전투에도 참전했다고 합니다.”
 
  ― 그래, 영천 지역 유림에게 그 이야기를 전했나요.
 
  “조호익 선생 얘기를 하며 실은 6·25 때 낙동강 전선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거예요. 대륙 세력, 다시 말해 북부 세력이 내려올 때 마지막으로 부딪혔던 곳이 영천입니다. 멀게는 1300년 전 신라가 당나라와 싸우는 밑천이 됐던 곳이 영천이고, 짧게는 낙동강 방어선 전투가 치열했던 곳이 영천입니다.
 
  실제로 낙동강 전선이 무너졌다면 망명정부를 세우거나 제주도로 빠져나오는 것을 검토했다고 해요. 군사학자들도 말하길, 낙동강이 무너졌다면 맥아더 장군이 아니라 우(又)맥아더가 와도 인천상륙작전이 안 됐을 것이라고 합니다. 어쨌든 낙동강 전선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결국 못했어요.”
 
  이 대목에서 그는 감정선이 무너지는 듯 목소리가 떨렸다.
 
  “그러니까, 이제 도리가 없어. 아… 옛말에 ‘대동지환(大同之患)은 환이 아니다’고 했잖아요. 모두가 똑같이 당하는 환은 환이 아닌 거지. 그런데 지금 대동지환이 된 거야. 잘못되면 문재인 대통령이 판단을 잘못했다고 해도 대동지환이야. 누구 한 사람이 잘못한 게 아니고, 우리가 다 묵인했잖아요. 다 같이 당하고 효과도 다 같이 누리게 될 것이고…. 그러니까 환이 아닌 것이지. 내가 그렇게 마음을 먹었어요.… 내 생애 후반의 고약한 화(禍) 같고, 억울한 화 같고…, 거기다 필연성은 더 자주 느껴지고… 결국엔 언제인지 모르지만, 결국엔… 알 수 없는 거지. 다 같이 당하는 화인데….”
 
  ― 지난 6월 지방선거 결과를 보면 조선시대 영남 남인 시절로 돌아갔다는 얘기도 나옵니다. 정당 색깔을 보면 대구·경북을 제외하고 모두 파란색(민주당의 당 색깔)이더군요.
 
  “그렇게만 돼도 다행입니다. 남인 시절과 달라서, 연방제 통일이라든지… 통일정부가 됐을 때, 서열이 없을 수 없거든요. 내가 아무리 봐도 그 사람들(좌파 세력을 지칭하는 말로 들렸다)이 서열 1위에 오를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중대 내지 삼중대로 (북한의) 보조 수단이 될 수밖에 없다고요. 끔찍한 말입니다마는, 만약에 끝이 그렇게 간다면… (통일이 됐을 때) 지구상에서 똑같은 권리를 갖고, 평화적으로 모두 기득권을 똑같이 나누는, 상상 속에선 일어날 수 있지만 역사에선 없고 현대사회에도 없었어요.
 
  딱 한번 예멘에서 안 싸우고 남북이 통일했어요. 안 싸우고 통일하는 바람에 6년 뒤에 내전으로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죽고 지금도 깽판이 돼 있습니다. 그런 예가 없는데 만든다고 하는데, 만드는 방법이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합리적이냐?…. 뭐 이상한 방법으로 하니 내가 비관하는 수밖에요.
 
  다만, 이건 내 개인적인 비관이고 사람들 반응은, 국민 의식까지는 아니지만, 단순히 유행하는 표피심리는 아닌 것 같아요. 꽤나 힘을 가지고 ‘이것만은 봐주자’는 식의….”
 
  ― 조심스런 얘기지만 선생님은 조선시대 영남 남인(南人)으로 돌아가 새로운 글쓰기를 시작할 것 같아요. 악다구니만 남은 남인….
 
  “사실 (이 시대가) 남인 시절이라고 해도 이제는 남인의 땅 자체도 용서할 것 같지 않습니다, 절대로…. 남인의 땅을 용서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문열 선생은 왜 이렇게 비관적으로 돌아서 버렸을까. 그의 소설 《영웅시대》에는 이런 표현이 나온다.
 
  〈… 그래도 가장 좋은 날은 앞날에 남았으리. 우리의 출발은 오직 그것을 위해 있었으리.…〉
 
 
 
가장 격렬하고 비극적인 사건들은 모두 이념의 부재가 아니라 과잉

 

  이문열 선생은 1980년대 초 문단 분위기를 꺼냈다. 그때도 ‘창비’(창작과비평사)와 ‘문지’(문학과지성사)로 문인들이 나뉘었지만 오늘날처럼 적대적이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때 김동리 선생이 쓰러지기 전이에요. 그 양반이 좀 허영이 있어가지고 집을 굉장히 크게 지었어. 단칸방 같은 여러 개의 일본식 다다미방 문을 모두 열면 120명 정도 앉을 수 있는 큰 방이 돼요. 정초가 되면 문인들이 전부 인사를 갔다고. 내가 대구에서 서울로 정착했던 땐데 1980년대 말 무렵이었을 거예요. 그때만 해도 문단이 그렇게 좌우가 없었어요. 다 와서 인사하고 갔어요.
 
  요새 ‘창비’의 맹장인 이시형씨 같은 분도 오고, 동리 선생의 양자라고 불리던 이문구씨도 오고…. 그분은 원래 중도입니다. 재밌는 것이 동리 선생을 (후배 문인들이) 놀리는 거라. 그 양반, 전두환씨가 부르면 가시고, 노태우씨가 부르면 가시고 그랬는데, 그해는 노태우 정권으로 바뀌는 해라.
 
  문인들이 ‘전두환이 낫던가요, 노태우가 낫던가요’ 하고 자꾸 물어요. 그런데 동리 선생이 귀가 어두워 그러셨는지 몰라도 ‘응? 응?’ 그래요. 답하고 싶지 않은 거지. 귀가 어두우시니까 그걸 이용한 거야.
 
  한 시간 걸려서 결국 ‘노태우가 낫다’는 식으로 말하시는 걸 내가 들었다고. 문인들이 다 한자리에 앉아서 그런 대화를 나눴어요. 요새같이 이렇게 흉악하지 않았어요. 이런 강력한 대치는 내가 좌우를 구분하는 게 웃기지마는 좌파 쪽의 책임이 많을 거예요. 군부가 와서 (좌파 문인들을) 팼는지 모르겠지마는….(웃음)”
 
  문학 평단에서 이문열은 여전히 극복의 대상이다. 좌와 우, 보수와 진보의 차원을 떠나 어떤 보편타당한 이념을 제시해 주길 바란다. 문단이 양분되고 찢긴 것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다.
 
  그가 쓴 장편소설 《황제를 위하여》의 서문에는 이런 표현이 나온다.
 
  〈… 멀게는 개화파와 수구파의 투쟁에서, 가깝게는 민주와 공산의 대립에 이르기까지 근세사에 있어서 가장 격렬하고 비극적인 사건들은 모두 이념의 부재가 아니라 과잉에서 나왔다.…〉
 
  ― 우리 사회가, 우리 문단이 이른바 ‘이념의 과잉’에서 해소되는 길을 만약에 선생님께서 찾으신다면 어떤 길이 될까요.
 
  “글쎄… 뭐랄까. 나는 그때 생각은 좀 단순하고 싶었어요. 이념이 되고, 논리가 되고, 사고에 수치를 끼워 넣고, 이렇게 되면 원래는 멀지 않았던 길이 점점 더 멀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단순한 것이 중요한 게 아닌가, 중요하지 않으면 걷어내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여러 사상 중에서 일치하는 게 있어요. 휴머니즘, 인본주의 같은 것을 빼고는 사상이 안 되잖아요. 단순화시키면 서로가 만날 수 있다고요. …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황제를 위하여》를 쓸 때는, 동양의 논리로 어떤 가치를 부여하고 혹은 부정하고 싶었어요. 서양의 사상들이야 요새 많이 하고 있는 것들이니까요.
 
  어제 기자가 온다고 하니 무슨 말을 할까 고심을 해봤어요. 사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주 그런 질문을 받아요.”
 
 
  “내가 구체적으로 한다면 질문부터 시작하지 않을까”
 
  ― 어떤 질문을요.
 
  “‘우리한테 답이 뭐가 있느냐’고. 남아 있는 찌끄러기(찌꺼기) 중에서 누가 중심이 되어 하는 게 맞느냐부터 시작해, 생각 자체도 케케묵은 반공주의부터 연방주의까지…, 우파 연방주의도 있거든요. 연방제까지 갈 수 있는 우파…. 다양한 저거(방안) 중에 답이 어디 있느냐에 대해 (기자가) 질문할 것 같아 답을 찾아봤는데, 참 답이… 곰곰이 생각해 봐도 답이 없고…. 그래서 어떻게 보면 무책임한데, 어쨌든 이게 (자유한국당 조강특위 참여를) 거절한 것도 그런 이유인데…, 인위적으로 개편해서 되지 않고, 좋게 말하면 시대가 좋고 시운이라도 좋으면 모를까…, 하여튼 우리가 다룰 수 있는 방안을 빨리 발견해야 되는데….”
 
  ― 그래도 가야 할 길이 어딘지 글이나 말씀으로 해주길 갈망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사실 새로운 주장이나 이념을 제시하는 일에 자신이 없어요. 다만 사람들이 침묵한다고 해서 다 찬성하는 것은 아닌데 어쨌든 (문재인 정부가 하는 일에) 너무 질문들을 하지 않고, 이 친구들도 설명을 안 하고…. 내가 구체적으로 한다면 질문부터 시작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 질문을요? 어떤 식으로.
 
  “크게 문목(問目)을 두고 그 아래 문항(問項)을 둬서 차근차근 몇 달에 걸쳐 (현 정부에다) 질문을 좀 하고 싶은 게 있어요. 그런다고 옳은 답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나, 예를 들어 대통령이 된 지 한 달도 안 됐는데 꼭 불에 댄 것처럼, 자지러지듯 원전(原電)을 갑자기 폐지를 했잖아요. 거의 준공이 다 돼 가는 몇조짜리 원전(신고리 5·6호기)을 닫아버리고…. 갑자기 왜? 환경 때문인지, 아니면 절약한다고? 위험성 때문에 그랬나?
 
  지금도 이해가 안 돼요. 대통령이 되자마자 제일 먼저 탈원전 공약을 꺼낸 이유를 말이죠. 자기네들이 무슨 원대한 계획이 있는지, 무슨 이익이 생겨 그러는지 궁금합니다. 임종석 청와대비서실장이 중동으로 가고, 중동에서 사람들이 오고…. 모르겠어요. 하여튼 목청 높이지 않고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아요.”
 
  그러더니 선생은 “그런 질문은 놔두고 글쓰기부터 해야 될 텐데…”라며 한발 물러섰다.
 
  “자꾸 궁금증이 생겨 질문 같은 것을 해보고 싶어요. 그러나 현실적으로 어느 자리에 서기보다 함께 답을 찾는 현인회(賢人會) 같은 모임이 있다면 기꺼이 참여하겠습니다. 그러나 어떤 조직이나 당파를 내세우며 무언가를 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일흔에 접어든 이문열은 세상과의 불목(不睦)이 고통스럽지만 새로운 도전을 서두르고 있다. 80년대를 관통하던 거대한 불협화음을 활활 타오르는 소설로 관통하고 싶다. 또 이해할 수 없는 고약한 정권에게 무수한 질문을 쏟아내고 싶다. 어쩌면 선생에게 이 시대는 아주 비극적이고 동시에 극적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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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lskas    (2018-10-25) 찬성 : 17   반대 : 11
이문열 선생이 이 글을 읽어볼지 모르겠지만 문재인의 탈원전은 천주교가 뒤에서 조종한다고 생각해 보지는 않으셨나요?
  정경환    (2018-10-25) 찬성 : 35   반대 : 1
대통령 된지 한달도 안돼 원전 폐지…갑자기 왜? 생각이 없는 정신이상자나 가능하지, 저게 정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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