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학 시절 내몽골 학생운동 주도… 몽골 거쳐 독일 망명
⊙ “할아버지, 중국군에 구금당했다가 폭행 후유증으로 사망, 매장 당시 두개골 파열 상태”
⊙ “중국, 2020년부터 초·중·고 학생들 대상으로 몽골어 대신 중국어 교육 정책 실시”
⊙ “중국 민주화 운동가들과도 접촉… ‘누가 중국의 정권을 잡더라도 내몽골에 대한 말살 정책은 변함없다’고 판단”
숍추드 텀젤투(중국식 이름:시하이밍·席海明)
1956년 내몽골 나이만(奈曼)치 출생. 내몽골대학 역사학과 졸업
⊙ “할아버지, 중국군에 구금당했다가 폭행 후유증으로 사망, 매장 당시 두개골 파열 상태”
⊙ “중국, 2020년부터 초·중·고 학생들 대상으로 몽골어 대신 중국어 교육 정책 실시”
⊙ “중국 민주화 운동가들과도 접촉… ‘누가 중국의 정권을 잡더라도 내몽골에 대한 말살 정책은 변함없다’고 판단”
숍추드 텀젤투(중국식 이름:시하이밍·席海明)
1956년 내몽골 나이만(奈曼)치 출생. 내몽골대학 역사학과 졸업
- 텀젤투 씨가 1979년도부터 독립운동을 해왔고, 앞으로도 할 것이라고 쓴 자필 결의문(왼쪽)과 내몽골법 책자를 들고 있다.
지난 8월 19일 서울대학교 우석경제관에서 ‘2024 중국의 미래 국제컨퍼런스’가 열렸다. 티베트, 위구르, 내몽골 등 중국 내 소수민족에 대한 인권 탄압을 고발하는 행사였다. 이 행사에는 숍추드 텀젤투(68) 내몽골인민당 주석도 참석했다.
티베트는 ‘달라이 라마’라는 정신적 지도자 덕분에, 신장 위구르는 최근 ‘강제 수용소’ 문제로 국제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지만, 내몽골의 인권 상황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몽골공화국[몽골국·외(外)몽골]이 독립국으로 존재하는 데다 내(內)몽골의 경우 이미 오랜 세월에 걸쳐 중국화가 상당 정도로 진행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비사막 북쪽은 외몽골, 그 남쪽은 내몽골로 불리는데 이는 다분히 중국인의 관점이 녹아 있는 명칭이다. 그래서 내몽골 독립을 희구하는 이들은 내몽골 대신 남(南)몽골이라는 표현을 쓴다.
숍추드 텀젤투 주석은 1956년 내몽골에서 태어나 내몽골대학교에서 역사학과를 졸업한 후 국내외를 오가며 평생 내몽골 독립을 위해 활동해왔다. 그는 현재 남몽골쿠릴타이(의회) 의장이자 내몽골인민당 주석을 맡고 있다.
“토지개혁 핑계로 내몽골 땅 강탈”
― 내몽골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내몽골은 중국 안에 있는 지역입니다. 총인구는 2400만 명이지만, 한족(漢族)이 절대다수고 실제 내몽골인은 약 500만 명입니다. 이 외에 현재 중국 동북 3성 지역, 위구르 지역에 거주하는 내몽골인이 100만 명 정도 됩니다.”
― 한족 비율이 상당히 높군요.
“1940년대에 중국 공산당은 토지개혁을 핑계로 내몽골의 땅을 모두 강탈했습니다. 그러고 한족을 저희 지역으로 대거 이주시켰습니다. 한족들이 내몽골로 이주할 경우 복지 혜택을 주기도 합니다. 또 내몽골에서 복무하던 군인이 전역(轉役)할 경우, 해당 지역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직업 배정을 돕고도 있습니다. 이러다 보니 결과적으로 내몽골에서 몽골인은 소수민족이 되고 말았습니다.”
― 내몽골에 중국군은 얼마나 주둔해 있나요.
“내몽골 내 주둔 규모는 병단(兵團·최소 군단급 이상)급입니다. 중국 정규 부대로 분류되지는 않으나 편제는 군인으로 되어 있고 유사시에는 전투에, 평시에는 건설 현장 등에 동원되는 조직입니다. 군인 수는 비공개이고, 지역 호구(戶口) 통계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표면상으로는 국경 경계 임무를 위해 배치되어 있다고 주장하지만 내몽골인의 독립운동을 사전에 억누르기 위한 목적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 중국군 치하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나요.
“1960년대 초 중국과 소련이 사이가 멀어지자, 당시 베이징군구 부사령관 텅하이칭(滕海淸) 중장은 마오쩌둥의 명령을 받고 27군을 이끌고 내몽골로 진입, 전면적으로 계엄을 실시하고 내몽골인을 학살했습니다. 중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1만6200여 명이 희생됐고, 34만 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다고 인정했습니다. 저희 측의 자체적인 조사에 따르면 몽골인은 당시 약 7만 명이 사망했습니다. 제 할아버지도 42일 동안 감옥에 구금되어 있으면서 당한 폭행 때문에 1969년 1월 9일에 사망하셨습니다.”
대학 시절 내몽골학생운동 주도
― 충격이 컸겠군요.
“당시 제 나이가 만으로 12세였습니다. 다행히 어머니는 심문 후 풀려났지만 할아버지는 국가 분열을 도모했다는 누명이 씌워졌습니다. 할아버지 얼굴은 매번 멍이 들어 있었습니다. 사망 당시 할아버지의 두개골은 함몰되어 있었습니다. 집으로 찾아온 인민해방군은 우리 가족들에게 즉시 매장하라면서 집 근처 땅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인민해방군은 할아버지 묘지에서 ‘반역 죄인 숙청’을 자축하는 행사를 진행하고 떠났습니다.”
― 어떻게 독립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나요.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하면서 몽골인으로서 민족의식을 느끼게 됐습니다. 1981년에는 내몽골 지역 6개 대학의 몽골인 학생 3000여 명을 규합해 그해 8월부터 11월까지 ‘내몽골학생운동’을 주도했습니다.”
그가 시위 당시 제기한 사안은 중국의 내몽골 정책, 내몽골 초원 황폐화 문제 등 다양했다. ‘중국 내 기타 성(省)·구(區)에서 내몽골로 지나치게 인구 유입이 늘어나고, 몽골 내 초원도 황폐해진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내몽골자치구 중국공산당위원회 제1서기가 몽골인이 아닌 한족(漢族)인 점도 지적했다. 그는 이 당시 평화시위를 주도하며 후허하오터시(呼和浩特市) 신화광장을 행진했다. 이후 중국 정부는 참여자의 자수를 권했지만, 그를 비롯한 참여자들 다수는 절대 자수하지 않았다고 한다.
― 무장독립투쟁에 대한 계획은 없었습니까.
“PLO(팔레스타인 민족해방전선)에 영감을 받아 1981년 내몽골 민족해방전선도 창설했었습니다. 하지만 테러리스트적인 운동은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는 역량이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현지에 주둔하고 있는 중국 기갑부대 때문에 전력(戰力) 차가 크다고 느꼈습니다.”
“졸업 후 10년간 직장 배정받지 못해”
― 시위 참여에 대한 불이익도 있었습니까.
“대학 졸업 후 10년간 직장을 배정받지 못했습니다. 당시 중국은 졸업 후 직장을 배정했는데, 제게는 직장을 주지 않은 것이죠. 알음알음 임시 교사 자리를 얻었었는데, 중국 정부는 그 일도 할 수 없도록 방해했습니다. 직장을 얻고 싶다면 제 행적에 대해 잘못을 인정하고 배후가 누구인지 밝히라는 요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몽골인이고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배후도 없었습니다.”
― 10년간 어떤 활동을 하셨습니까.
“비밀리에 ‘몽골문화연구회’를 설립, 민족운동을 이어갔습니다. 1990년에는 후허하오터에 ‘각오’라는 몽골학 전문 서점을 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1991년 3월, 현지 관리들로부터 입수한 내부 문건을 통해 당국이 저를 체포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는 “중국 정부가 중국 공산당 내 중요한 자리에 등용하겠다는 제안도 했지만 끝까지 응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1991년 6월 20일 중국 당국의 체포를 피해 몽골(외몽골)로 망명했다. 내몽골 문제를 티베트처럼 국제 이슈화하기 위해서였다.
“1991년 6월 8일 아침 즈음이었습니다. 12일 동안 사람들의 눈을 피해 낮에는 숨고 밤에는 길을 걸어 마침내 몽골 국경에 도착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고향(내몽골) 방향을 돌아보며 세 번 절했습니다. 눈물이 흘렀습니다.”
망명
― 몽골에는 어떻게 입국했나요.
“몽골 정부에 탈출 계획을 사전에 긴밀히 알렸습니다. 국경을 넘자마자 ‘불법 입경죄’로 국경수비대에 체포된 후 소형 비행기 편으로 수도 울란바토르로 이송됐습니다. 당시는 중국-몽골 양국 간 범죄인 인도 조약이 체결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몽골 내부에서는 ‘중국과의 외교 관계를 고려해 강제 송환해야 한다’는 의견과 ‘내몽골 자치구 여론을 감안할 때 송환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으로 나뉘었다고 하더군요. 결국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해 제3국으로 망명시키는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해당 국가의 난민으로 등록하겠다’는 의견은 당시 몽골 정보기관 고위 관리의 아이디어였습니다. 재판 후 3년형이 선고됐지만, 오치르바트 몽골 대통령의 ‘특별사면권’ 행사로 무사히 독일로 갈 수 있었습니다. 이후 중국과 몽골 양국 간 범죄인 인도 조약이 체결되면서, 몽골도 독립운동가들에게 더 이상 안전한 나라가 아니게 됐습니다.”
― 독일을 선택한 이유가 있습니까.
“미국에는 연고가 없었습니다. 또한 미국 내 친중(親中) 스파이가 많아 신변에 위협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나마 독일에는 지인이 있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망명 후 주독일 몽골 대사관에서 몽골에서 주최하는 평화회의에 참석을 세 번이나 요청했었습니다. 중국에 의해 매수된 일부 몽골 관리들이 저를 몽골에서 체포 후, 중국으로 송환하려는 계획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휴가나 건강을 핑계로 결국 가지 않았습니다.”
“미국에서 망명 정부 설립 시도”
― 독일에서의 삶은 어땠습니까.
“처음 2년간은 육체노동으로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이후 현지 대학에서 역사학 공부를 마친 후 우체국에 취업했고. 26년간 야간 근무를 전담하다 2년 전 정년 퇴임했습니다.”
― 가족은 어떻게 됐습니까.
“아내와 딸은 제가 중국을 탈출한 지 6년 후인 1997년 중국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 중국 정부는 가족의 여권 발급을 불허했습니다. 1994년 당시 클라우스 킨켈 독일 외무부 장관이 중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고, 독일 정부에 탄원했습니다. 각고의 노력 끝에 결국 3년 후 가족도 독일로 올 수 있었습니다.”
― 망명 정부 수립을 계획한 적이 있습니까.
“1997년 3월 23일 미국 뉴저지 프린스턴대학교의 한 회의실에서 ‘내몽골인민당’을 창설했습니다. 이어 1998년 워싱턴 DC에서 남몽골 망명 정부 창설도 준비했는데 당시 일부 참여자에 대해 중국 정부의 스파이라는 의심이 제기된 데다가, 망명 정부를 세워도 미국에서 합법단체로 등록할 수 없어서 결국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내몽골인민당이라는 이름은 1966~1976년 일어난 ‘내몽골인민혁명당(1925년 창립) 숙청 사건’ 당시 학살된 내몽골인을 기념하고자 지은 이름입니다.”
― 오늘날 내몽골인들의 독립 의지는 어떻습니까.
“감정적으로는 동의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독립이라는 말을 꺼내는 순간, 탄압의 대상입니다. 저는 중국 정부와 과거부터 꾸준한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1981년도에 내몽골 대표단을 두 차례 베이징을 보냈지만, 오히려 군을 동원하겠다는 위협을 했습니다. 도리(道理)를 따지기 위해 보낸 것인데 오히려 돌아온 답변은 ‘진압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중국 공산당의 총서기는 후야오방(胡耀邦)이었고 시진핑(習近平) 현 중국 공산당 총서기의 아버지인 시중쉰(習仲勳)은 중국 공산당 중앙서기처 상무서기였습니다. 당시 후야오방이 시중쉰에게 쓴 편지도 있었는데 내몽골 상황은 위구르, 티베트와 다른 문제로 판단해야 하고 자칫 잘못하면 속임수에 넘어간다는 내용이었습니다.”
― 최근 중국이 언어문화말살 정책을 펼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2020년부터 초·중·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몽골어 대신 중국어 교육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이미 위구르와 티베트 지역에서는 각각 2017년, 2018년부터 시행되고 있습니다. 결국 중화사상 이식을 목적으로 시행하는 겁니다. 이 같은 조치에 당시 일부 내몽골 공무원과 선생은 자살했고, 일부 학생은 등교 거부를 했습니다. 중국 헌법에는 ‘소수민족이 그들의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고 보강해나갈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지만 전혀 지켜지고 있지 않습니다.”
달라이 라마와 비밀회동
― 혹시 달라이 라마와 만난 적은 없습니까.
“1992년 몽골에서 달라이 라마와 비밀회동을 가졌습니다. 달라이 라마가 제의한 ‘티베트-내몽골-위구르 3자 회의’의 초대 내몽골 대표로 지명된 덕입니다. 3자 회의는 달라이 라마가 1985년 처음 주창했지만 실제로는 1992년에 제가 내몽골 대표가 된 후에야 공식 가동됐습니다. 그 과정에서 해외 중국 민주화운동 인사들과도 다수 접촉했었습니다.”
하지만 달라이 라마와 중국 관계에 변화가 생기며 3자 회의는 중지됐다고 했다. 중국 민주화 인사들과도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지만, 2012년 즈음 ‘중국의 민주화운동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누가 중국의 정권을 잡더라도 내몽골에 대한 말살 정책은 변함이 없다고 판단하게 됐습니다. 이 때문에 ‘중국의 지배하에서는 우리에게 희망은 없으며, 오로지 중국이 해체돼 남몽골이 독립되는 것이 유일한 출로’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저도 곧 일흔이 넘어가는 나이입니다. 얼마나 더 살지는 모르나 죽기 전까지 변함없이 내몽골 민족을 위해 헌신하겠습니다.”⊙
티베트는 ‘달라이 라마’라는 정신적 지도자 덕분에, 신장 위구르는 최근 ‘강제 수용소’ 문제로 국제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지만, 내몽골의 인권 상황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몽골공화국[몽골국·외(外)몽골]이 독립국으로 존재하는 데다 내(內)몽골의 경우 이미 오랜 세월에 걸쳐 중국화가 상당 정도로 진행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비사막 북쪽은 외몽골, 그 남쪽은 내몽골로 불리는데 이는 다분히 중국인의 관점이 녹아 있는 명칭이다. 그래서 내몽골 독립을 희구하는 이들은 내몽골 대신 남(南)몽골이라는 표현을 쓴다.
숍추드 텀젤투 주석은 1956년 내몽골에서 태어나 내몽골대학교에서 역사학과를 졸업한 후 국내외를 오가며 평생 내몽골 독립을 위해 활동해왔다. 그는 현재 남몽골쿠릴타이(의회) 의장이자 내몽골인민당 주석을 맡고 있다.
“토지개혁 핑계로 내몽골 땅 강탈”
― 내몽골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내몽골은 중국 안에 있는 지역입니다. 총인구는 2400만 명이지만, 한족(漢族)이 절대다수고 실제 내몽골인은 약 500만 명입니다. 이 외에 현재 중국 동북 3성 지역, 위구르 지역에 거주하는 내몽골인이 100만 명 정도 됩니다.”
― 한족 비율이 상당히 높군요.
“1940년대에 중국 공산당은 토지개혁을 핑계로 내몽골의 땅을 모두 강탈했습니다. 그러고 한족을 저희 지역으로 대거 이주시켰습니다. 한족들이 내몽골로 이주할 경우 복지 혜택을 주기도 합니다. 또 내몽골에서 복무하던 군인이 전역(轉役)할 경우, 해당 지역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직업 배정을 돕고도 있습니다. 이러다 보니 결과적으로 내몽골에서 몽골인은 소수민족이 되고 말았습니다.”
― 내몽골에 중국군은 얼마나 주둔해 있나요.
“내몽골 내 주둔 규모는 병단(兵團·최소 군단급 이상)급입니다. 중국 정규 부대로 분류되지는 않으나 편제는 군인으로 되어 있고 유사시에는 전투에, 평시에는 건설 현장 등에 동원되는 조직입니다. 군인 수는 비공개이고, 지역 호구(戶口) 통계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표면상으로는 국경 경계 임무를 위해 배치되어 있다고 주장하지만 내몽골인의 독립운동을 사전에 억누르기 위한 목적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 중국군 치하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나요.
“1960년대 초 중국과 소련이 사이가 멀어지자, 당시 베이징군구 부사령관 텅하이칭(滕海淸) 중장은 마오쩌둥의 명령을 받고 27군을 이끌고 내몽골로 진입, 전면적으로 계엄을 실시하고 내몽골인을 학살했습니다. 중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1만6200여 명이 희생됐고, 34만 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다고 인정했습니다. 저희 측의 자체적인 조사에 따르면 몽골인은 당시 약 7만 명이 사망했습니다. 제 할아버지도 42일 동안 감옥에 구금되어 있으면서 당한 폭행 때문에 1969년 1월 9일에 사망하셨습니다.”
대학 시절 내몽골학생운동 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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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몽골 자치구 기(旗). |
“당시 제 나이가 만으로 12세였습니다. 다행히 어머니는 심문 후 풀려났지만 할아버지는 국가 분열을 도모했다는 누명이 씌워졌습니다. 할아버지 얼굴은 매번 멍이 들어 있었습니다. 사망 당시 할아버지의 두개골은 함몰되어 있었습니다. 집으로 찾아온 인민해방군은 우리 가족들에게 즉시 매장하라면서 집 근처 땅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인민해방군은 할아버지 묘지에서 ‘반역 죄인 숙청’을 자축하는 행사를 진행하고 떠났습니다.”
― 어떻게 독립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나요.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하면서 몽골인으로서 민족의식을 느끼게 됐습니다. 1981년에는 내몽골 지역 6개 대학의 몽골인 학생 3000여 명을 규합해 그해 8월부터 11월까지 ‘내몽골학생운동’을 주도했습니다.”
그가 시위 당시 제기한 사안은 중국의 내몽골 정책, 내몽골 초원 황폐화 문제 등 다양했다. ‘중국 내 기타 성(省)·구(區)에서 내몽골로 지나치게 인구 유입이 늘어나고, 몽골 내 초원도 황폐해진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내몽골자치구 중국공산당위원회 제1서기가 몽골인이 아닌 한족(漢族)인 점도 지적했다. 그는 이 당시 평화시위를 주도하며 후허하오터시(呼和浩特市) 신화광장을 행진했다. 이후 중국 정부는 참여자의 자수를 권했지만, 그를 비롯한 참여자들 다수는 절대 자수하지 않았다고 한다.
― 무장독립투쟁에 대한 계획은 없었습니까.
“PLO(팔레스타인 민족해방전선)에 영감을 받아 1981년 내몽골 민족해방전선도 창설했었습니다. 하지만 테러리스트적인 운동은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는 역량이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현지에 주둔하고 있는 중국 기갑부대 때문에 전력(戰力) 차가 크다고 느꼈습니다.”
“졸업 후 10년간 직장 배정받지 못해”
― 시위 참여에 대한 불이익도 있었습니까.
“대학 졸업 후 10년간 직장을 배정받지 못했습니다. 당시 중국은 졸업 후 직장을 배정했는데, 제게는 직장을 주지 않은 것이죠. 알음알음 임시 교사 자리를 얻었었는데, 중국 정부는 그 일도 할 수 없도록 방해했습니다. 직장을 얻고 싶다면 제 행적에 대해 잘못을 인정하고 배후가 누구인지 밝히라는 요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몽골인이고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배후도 없었습니다.”
― 10년간 어떤 활동을 하셨습니까.
“비밀리에 ‘몽골문화연구회’를 설립, 민족운동을 이어갔습니다. 1990년에는 후허하오터에 ‘각오’라는 몽골학 전문 서점을 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1991년 3월, 현지 관리들로부터 입수한 내부 문건을 통해 당국이 저를 체포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는 “중국 정부가 중국 공산당 내 중요한 자리에 등용하겠다는 제안도 했지만 끝까지 응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1991년 6월 20일 중국 당국의 체포를 피해 몽골(외몽골)로 망명했다. 내몽골 문제를 티베트처럼 국제 이슈화하기 위해서였다.
“1991년 6월 8일 아침 즈음이었습니다. 12일 동안 사람들의 눈을 피해 낮에는 숨고 밤에는 길을 걸어 마침내 몽골 국경에 도착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고향(내몽골) 방향을 돌아보며 세 번 절했습니다. 눈물이 흘렀습니다.”
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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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몽골 자치구 지역(빗금 부분) |
“몽골 정부에 탈출 계획을 사전에 긴밀히 알렸습니다. 국경을 넘자마자 ‘불법 입경죄’로 국경수비대에 체포된 후 소형 비행기 편으로 수도 울란바토르로 이송됐습니다. 당시는 중국-몽골 양국 간 범죄인 인도 조약이 체결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몽골 내부에서는 ‘중국과의 외교 관계를 고려해 강제 송환해야 한다’는 의견과 ‘내몽골 자치구 여론을 감안할 때 송환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으로 나뉘었다고 하더군요. 결국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해 제3국으로 망명시키는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해당 국가의 난민으로 등록하겠다’는 의견은 당시 몽골 정보기관 고위 관리의 아이디어였습니다. 재판 후 3년형이 선고됐지만, 오치르바트 몽골 대통령의 ‘특별사면권’ 행사로 무사히 독일로 갈 수 있었습니다. 이후 중국과 몽골 양국 간 범죄인 인도 조약이 체결되면서, 몽골도 독립운동가들에게 더 이상 안전한 나라가 아니게 됐습니다.”
― 독일을 선택한 이유가 있습니까.
“미국에는 연고가 없었습니다. 또한 미국 내 친중(親中) 스파이가 많아 신변에 위협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나마 독일에는 지인이 있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망명 후 주독일 몽골 대사관에서 몽골에서 주최하는 평화회의에 참석을 세 번이나 요청했었습니다. 중국에 의해 매수된 일부 몽골 관리들이 저를 몽골에서 체포 후, 중국으로 송환하려는 계획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휴가나 건강을 핑계로 결국 가지 않았습니다.”
“미국에서 망명 정부 설립 시도”
― 독일에서의 삶은 어땠습니까.
“처음 2년간은 육체노동으로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이후 현지 대학에서 역사학 공부를 마친 후 우체국에 취업했고. 26년간 야간 근무를 전담하다 2년 전 정년 퇴임했습니다.”
― 가족은 어떻게 됐습니까.
“아내와 딸은 제가 중국을 탈출한 지 6년 후인 1997년 중국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 중국 정부는 가족의 여권 발급을 불허했습니다. 1994년 당시 클라우스 킨켈 독일 외무부 장관이 중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고, 독일 정부에 탄원했습니다. 각고의 노력 끝에 결국 3년 후 가족도 독일로 올 수 있었습니다.”
― 망명 정부 수립을 계획한 적이 있습니까.
“1997년 3월 23일 미국 뉴저지 프린스턴대학교의 한 회의실에서 ‘내몽골인민당’을 창설했습니다. 이어 1998년 워싱턴 DC에서 남몽골 망명 정부 창설도 준비했는데 당시 일부 참여자에 대해 중국 정부의 스파이라는 의심이 제기된 데다가, 망명 정부를 세워도 미국에서 합법단체로 등록할 수 없어서 결국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내몽골인민당이라는 이름은 1966~1976년 일어난 ‘내몽골인민혁명당(1925년 창립) 숙청 사건’ 당시 학살된 내몽골인을 기념하고자 지은 이름입니다.”
― 오늘날 내몽골인들의 독립 의지는 어떻습니까.
“감정적으로는 동의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독립이라는 말을 꺼내는 순간, 탄압의 대상입니다. 저는 중국 정부와 과거부터 꾸준한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1981년도에 내몽골 대표단을 두 차례 베이징을 보냈지만, 오히려 군을 동원하겠다는 위협을 했습니다. 도리(道理)를 따지기 위해 보낸 것인데 오히려 돌아온 답변은 ‘진압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중국 공산당의 총서기는 후야오방(胡耀邦)이었고 시진핑(習近平) 현 중국 공산당 총서기의 아버지인 시중쉰(習仲勳)은 중국 공산당 중앙서기처 상무서기였습니다. 당시 후야오방이 시중쉰에게 쓴 편지도 있었는데 내몽골 상황은 위구르, 티베트와 다른 문제로 판단해야 하고 자칫 잘못하면 속임수에 넘어간다는 내용이었습니다.”
― 최근 중국이 언어문화말살 정책을 펼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2020년부터 초·중·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몽골어 대신 중국어 교육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이미 위구르와 티베트 지역에서는 각각 2017년, 2018년부터 시행되고 있습니다. 결국 중화사상 이식을 목적으로 시행하는 겁니다. 이 같은 조치에 당시 일부 내몽골 공무원과 선생은 자살했고, 일부 학생은 등교 거부를 했습니다. 중국 헌법에는 ‘소수민족이 그들의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고 보강해나갈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지만 전혀 지켜지고 있지 않습니다.”
달라이 라마와 비밀회동
― 혹시 달라이 라마와 만난 적은 없습니까.
“1992년 몽골에서 달라이 라마와 비밀회동을 가졌습니다. 달라이 라마가 제의한 ‘티베트-내몽골-위구르 3자 회의’의 초대 내몽골 대표로 지명된 덕입니다. 3자 회의는 달라이 라마가 1985년 처음 주창했지만 실제로는 1992년에 제가 내몽골 대표가 된 후에야 공식 가동됐습니다. 그 과정에서 해외 중국 민주화운동 인사들과도 다수 접촉했었습니다.”
하지만 달라이 라마와 중국 관계에 변화가 생기며 3자 회의는 중지됐다고 했다. 중국 민주화 인사들과도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지만, 2012년 즈음 ‘중국의 민주화운동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누가 중국의 정권을 잡더라도 내몽골에 대한 말살 정책은 변함이 없다고 판단하게 됐습니다. 이 때문에 ‘중국의 지배하에서는 우리에게 희망은 없으며, 오로지 중국이 해체돼 남몽골이 독립되는 것이 유일한 출로’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저도 곧 일흔이 넘어가는 나이입니다. 얼마나 더 살지는 모르나 죽기 전까지 변함없이 내몽골 민족을 위해 헌신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