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당국에 의해 공항서 체포… 세 쌍둥이 중 한 명 숨져”
⊙ “‘전기의자’ 고문받아… 5~11세 여자아이 성폭력도”
⊙ “위구르 이주 漢族, 원하기만 하면 집과 여자 차지할 수 있어”
⊙ “꼭 여러분의 나라를 지키길 바랍니다”
미흐리굴 투르순(Mihrigul Tursun)
1989년생. 중국 신장(新疆)에서 출생, 광저우대학교·이집트 영국 대학교 졸업 / 미국 거주 중
⊙ “‘전기의자’ 고문받아… 5~11세 여자아이 성폭력도”
⊙ “위구르 이주 漢族, 원하기만 하면 집과 여자 차지할 수 있어”
⊙ “꼭 여러분의 나라를 지키길 바랍니다”
미흐리굴 투르순(Mihrigul Tursun)
1989년생. 중국 신장(新疆)에서 출생, 광저우대학교·이집트 영국 대학교 졸업 / 미국 거주 중
- 사진=고기정
“2015년, 우루무치 디워푸 국제공항에서 있었던 일은 제 인생에서 가장 큰 상처입니다. 태어난 지 45일째인 세 쌍둥이를 부모님께 보여드리기 위해 비행기에서 막 내렸을 무렵,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직감이 들었습니다.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던 중국 공안에게 민족적 증오와 혐오를 조장한 혐의로 체포당한 뒤, ‘중국을 사랑하는 것에 동의하느냐’는 문서에 서명을 하고 나서야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아이 한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8월 21일, 서울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만난 미흐리굴 투르순(Mihrigul Tursun·34) 씨의 말이다. 중국 정부에 의해 세 번이나 위구르 수용소에 수감됐던 그는 서울대학교에서 열린 ‘중국의 미래 국제컨퍼런스’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투르순 씨는 오랫동안 잠을 자지 못해 한쪽 눈이 붉게 충혈된 상황에서도, 서툰 영어로 자신이 겪었던 끔찍한 일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신장(新疆) 위구르 자치구에서 태어나 광둥성(廣東省)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다 영어를 배우기 위해 이집트로 유학을 갔다. 이후 이집트 국적의 남편과 결혼했으며, 그곳에서 세 쌍둥이를 출산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행복은 친정을 방문하기 위해 고향을 찾으면서 산산조각 났다.
친정 방문했다가 ‘민족 간 증오·차별 조장’ 혐의로 체포돼
― 왜 위구르인 수용소에 가게 됐나요.
“2015년이었습니다. 세 쌍둥이를 낳은 지 45일이 되었을 무렵 부모님을 만나러 중국으로 돌아왔죠. 그때 중국 당국이 공항에서 저를 붙잡았고, 아이들은 강제로 중국어 교육 캠프에 보내졌습니다.”
― 체포 이유가 뭐였나요.
“중국 당국은 ‘민족적 증오와 차별을 조장한 혐의를 받고 있다’고 체포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이후 세 달 동안 수용소에 갇혀 있어야 했습니다.”
― 중국 당국이 특별히 요구한 것이 있나요.
“이집트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이름을 중국식으로 바꾸기를 요구했고, 중국 당국이 만든 문서에 서명하라고 강요했습니다. 제 아이들은 이집트에서 태어난 이집트 사람입니다. 남편과 제가 ‘서류에 서명할 수 없다’며 완강하게 버티자 바로 수용소에 수감했습니다.”
― 중국 당국이 만든 문서의 내용은 뭐였나요.
“중국을 사랑하는지와 제가 이집트에서 낳은 아이들이 중국 출신이 되는 것에 동의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불합리한 것에 동의하라는 얘기였어요. 저는 위구르인이고, 남편은 이집트 사람입니다. 아이들에게 중국 국적을 주고 싶지 않아서 서류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중국 당국, ‘서류에 서명해야만 아이 돌려주겠다’”
― 서명을 하지 않으면 아이들을 돌려주지 않겠다고 하던가요?
“네. 경찰은 ‘서류에 서명해야만 아이를 돌려주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아이와 부모를 떨어뜨려 수감시켰죠. 서류에 ‘서명을 하지 않으면 감옥에서 나갈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우리 부부는 서류에 서명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감 기간 중 투르순 씨가 낳은 세 쌍둥이 중 한 명이 숨졌다. 중국 당국이 ‘아이들이 아프다’며 투르순 씨를 잠시 풀어주고는 창 너머로 세 아이를 보게 했는데, 다음 날 세 아이 중 가장 건강했던 아들이 싸늘한 주검이 된 것이다. 덤덤한 태도를 유지하던 투르순 씨는 숨진 아이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눈물을 보였다. 이후 남은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투르순 씨와 그의 남편은 중국 당국이 내민 서류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갓난아기들이잖아요.
“네. 당시 젖먹이였던 제 아이들은 중국 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건강이 악화됐고, 결국 한 명은 사망했습니다. 기저귀를 갈아주고, 젖을 먹이는 등, 모자지간에 해야 될 일을 모두 막아버려서….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서류에 서명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그 뒤로 재차 수감됐나요?
“총 세 번 수감됐습니다. 첫 번째 수감당했을 때는 아이가 아팠기 때문에 중국 당국은 저를 임시 석방해주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제 소중한 아이가 목숨을 잃었죠. 하지만 임시 석방이었고 제가 블랙리스트에 등재돼 여권도 압수된 상태라 아무 데도 갈 수 없었습니다. 이후 2016년 4월, 두 번째로 수용소에 수감됐습니다. 이때는 제가 많이 아파 병원으로 이송됐는데, 중국 당국은 입원한 상태임에도 저를 끈질기게 감시했습니다. 치료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수감당한 때는 2017년 10월입니다. 저는 2015~2018년까지 남편과 자유롭게 연락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중국 당국이 24시간 저를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친구들도 수용소에 갇혀 있나요?
“네. 제 친구 세 명이 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나머지 친구들도 생사가 불분명합니다.”
― 수용소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나요.
“위구르 수용소 수감자들은 ‘차라리 죽여달라’고 말할 정도로 여러 끔찍한 고문을 받기도 합니다.”
― 고문이라뇨?
“온몸을 결박(結縛)하는 전기의자에 앉아야 했습니다. 거기에 앉으면 정신연령이 다섯 살이 되는 것만 같아요. 저는 고문 때문에 아직도 공황장애를 앓고 있습니다. 의자에 앉으면, 끔찍한 괴로움이 몰려오지만 몸부림치지도 못합니다. 수용소에 온 사람들은 남녀 할 것 없이 머리를 삭발당합니다. 전 간수(看守)의 무차별적 폭력으로 한쪽 귀의 청력을 잃었습니다. 지금도 왼쪽 귀가 잘 들리지 않아요. 그리고 중국은 수용소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함구(緘口)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인터뷰 내내 투르순 씨는 ‘잘 들리지 않는다’며 목소리를 높여 질문해달라고 요구했다. 때로는 질문의 요지를 파악하기 위해 오른쪽 얼굴을 기자에게 가까이 들이대기도 했다. 왼쪽 귀의 청력을 잃어버려 소리를 잘 들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잃어버린 청력을 되찾기 위해 병원을 방문하는 등 여러 노력을 했지만, 이미 청력이 심하게 손상된 상태라 별다른 수가 없어 두 달에 한 번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는 청력을 유지하는 약을 넣고 돌아온다고 한다.
― 성적(性的) 폭력도 있었나요.
“있었습니다. 저는 성희롱·성폭력을 당하기 전 수용소에서 풀려났지만, 5~11세의 어린 여자아이들이 성폭력을 당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기혼 여성들은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어린 여자아이들을 상대로 성적 폭력을 저질렀어요. 정말 끔찍한 광경이었죠.”
“아무 잘못 없는 경우가 대부분”
― 고문의 이유는 무엇인가요.
“전기의자에서 고문받고 있을 때, 저에게 고통을 주던 중국인 간수가 ‘위구르족인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수용소에 끌려온 이들은 저처럼 아무 잘못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유일한 공통점은, 모두 위구르인이라는 것이었죠. 그들은 단지 위구르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말로 표현하지도 못할 고문을 가했습니다.”
― 수용소 시설은 어떤가요.
“매우 열악합니다. 좁은 감방에 60명의 수감자가 한꺼번에 수감되는데, 누울 자리가 없어서 잠을 자는 것도 순번을 정합니다. 화장실 앞에는 감시카메라가 설치되어 있고, 공산당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게 합니다. 정신 개조를 하는 것이죠. 또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약을 먹입니다. 저는 그 약을 먹고 월경(月經)이 중단됐습니다. 강제로 불임 수술을 받은 여성 수감자도 있습니다.”
― 위구르인에게 수용소란 ‘공포의 장소’겠네요.
“네. 중국 당국의 규제는 수용소에 끌려가지 않으려 서로서로 감시하는 폐단(弊端)을 낳았습니다.”
― 중국은 수용소가 직업 교육을 하는 곳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실인가요?
“거짓말입니다. 저는 수용소에 있으면서 단 한 번도 직업 교육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 중국 정부의 주장과 반대되는 주장이네요.
“직업 교육을 받았다면, 월급이 들어와야 합니다. 저는 어떠한 월급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중국 정부는 자신들이 저지른 과오를 덮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 중국이 위구르족 영역에 한족을 많이 이주시켰다던데요.
“네. 지속적으로 한족 비율이 늘고 있습니다.”
― 위구르 자치구로 이주한 한족은 특혜를 받나요?
“매우 많은 특혜를 받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이주한 한족이 어느 위구르인의 집이 마음에 들 경우, ‘너, 나가’ 하면 그 집이 자신의 것이 됩니다. 말 한마디로 자신이 원하는 집에서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족 남성은 원하는 위구르 여성과 결혼을 할 수도 있습니다. 집과 마찬가지로, ‘너, 나랑 결혼해’ 한마디에 원하는 위구르 여성과 결혼을 할 수 있는 것이죠. 또한 위구르 지역으로 이주한 한족은 일을 하지 않아도 위구르인들이 노동해 버는 돈의 두 배가량을 국가로부터 지원받습니다.”
― 한족과의 결혼에서 위구르인의 의사는 반영되지 않나요?
“한족 남성의 선택을 받은 위구르 여성은 절대 거부할 수 없습니다. 거부할 경우 곧장 수용소로 끌려가게 됩니다.”
― 직접적인 갈등은 없나요?
“앞서 말했듯, 한족은 중국 당국의 특혜를 받고 위구르 지역으로 이주해 옵니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어요. 집을 사는 것도, 원하는 여성과 결혼을 하는 것도 한족이라면 가능하죠. 그렇기 때문에 위구르인들은 한족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풀려난 후에도 中 감시 계속돼… 소녀로서의 삶 잃었다”
― 위구르만의 문화가 많이 희석될 것 같은데요.
“이미 많은 부분을 억압당하고 있습니다. 위구르 언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상점에서 판매되는 물품들도 모두 중국어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위구르만의 독특한 문화가 없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 풀려난 후에는 어떤 삶을 살았나요.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삶입니다. 중국 정부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휴대폰을 통해 위구르인을 감시합니다. 저 또한 미국으로 이주했음에도 지속적인 해킹 공격으로 인해 휴대폰 번호를 6번이나 변경했습니다.”
― 중국 당국이 가족을 볼모로 협박하진 않던가요?
“수없이 많은 협박을 했습니다. 여동생, 남편, 제 두 아이를 가지고 줄곧 협박했습니다. 제 부모님은 현재도 위구르 지역에 살고 계시는데, 자유롭게 연락할 수 없어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투르순 씨는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어떤 일을 하고 싶나’라는 기자의 질문에 결국 눈물을 터뜨렸다. 연신 ‘미안하다’며 눈물을 훔친 그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없어서 더욱 눈물이 난다”면서 “어렸을 적에는 화장도 하고, 머리도 기르고, 위구르 음식을 먹으며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 다시 태어난다면 그것을 모두 누리고 싶다”고 말했다.
― 투르순 씨의 꿈은 무엇인가요.
“제 꿈은 위구르인들이 우리의 지역을 되찾는 것입니다. 현재 위구르인들은 중국 정부의 규제에 쫓겨나듯 다른 나라에서 살고 있습니다. 위구르인들이 다시금 모여 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일제강점기를 경험한 한국에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꼭 여러분의 나라를 지키길 바랍니다. 나라의 독립과 자유를 지켜야지만 여러분의 꿈과 언어와 삶과 후손을 지킬 수 있습니다.”⊙
8월 21일, 서울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만난 미흐리굴 투르순(Mihrigul Tursun·34) 씨의 말이다. 중국 정부에 의해 세 번이나 위구르 수용소에 수감됐던 그는 서울대학교에서 열린 ‘중국의 미래 국제컨퍼런스’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투르순 씨는 오랫동안 잠을 자지 못해 한쪽 눈이 붉게 충혈된 상황에서도, 서툰 영어로 자신이 겪었던 끔찍한 일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신장(新疆) 위구르 자치구에서 태어나 광둥성(廣東省)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다 영어를 배우기 위해 이집트로 유학을 갔다. 이후 이집트 국적의 남편과 결혼했으며, 그곳에서 세 쌍둥이를 출산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행복은 친정을 방문하기 위해 고향을 찾으면서 산산조각 났다.
친정 방문했다가 ‘민족 간 증오·차별 조장’ 혐의로 체포돼
― 왜 위구르인 수용소에 가게 됐나요.
“2015년이었습니다. 세 쌍둥이를 낳은 지 45일이 되었을 무렵 부모님을 만나러 중국으로 돌아왔죠. 그때 중국 당국이 공항에서 저를 붙잡았고, 아이들은 강제로 중국어 교육 캠프에 보내졌습니다.”
― 체포 이유가 뭐였나요.
“중국 당국은 ‘민족적 증오와 차별을 조장한 혐의를 받고 있다’고 체포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이후 세 달 동안 수용소에 갇혀 있어야 했습니다.”
― 중국 당국이 특별히 요구한 것이 있나요.
“이집트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이름을 중국식으로 바꾸기를 요구했고, 중국 당국이 만든 문서에 서명하라고 강요했습니다. 제 아이들은 이집트에서 태어난 이집트 사람입니다. 남편과 제가 ‘서류에 서명할 수 없다’며 완강하게 버티자 바로 수용소에 수감했습니다.”
― 중국 당국이 만든 문서의 내용은 뭐였나요.
“중국을 사랑하는지와 제가 이집트에서 낳은 아이들이 중국 출신이 되는 것에 동의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불합리한 것에 동의하라는 얘기였어요. 저는 위구르인이고, 남편은 이집트 사람입니다. 아이들에게 중국 국적을 주고 싶지 않아서 서류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중국 당국, ‘서류에 서명해야만 아이 돌려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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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미국 내 중국 영사관 앞에서 반중 시위대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사진=뉴시스 |
“네. 경찰은 ‘서류에 서명해야만 아이를 돌려주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아이와 부모를 떨어뜨려 수감시켰죠. 서류에 ‘서명을 하지 않으면 감옥에서 나갈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우리 부부는 서류에 서명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감 기간 중 투르순 씨가 낳은 세 쌍둥이 중 한 명이 숨졌다. 중국 당국이 ‘아이들이 아프다’며 투르순 씨를 잠시 풀어주고는 창 너머로 세 아이를 보게 했는데, 다음 날 세 아이 중 가장 건강했던 아들이 싸늘한 주검이 된 것이다. 덤덤한 태도를 유지하던 투르순 씨는 숨진 아이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눈물을 보였다. 이후 남은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투르순 씨와 그의 남편은 중국 당국이 내민 서류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갓난아기들이잖아요.
“네. 당시 젖먹이였던 제 아이들은 중국 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건강이 악화됐고, 결국 한 명은 사망했습니다. 기저귀를 갈아주고, 젖을 먹이는 등, 모자지간에 해야 될 일을 모두 막아버려서….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서류에 서명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그 뒤로 재차 수감됐나요?
“총 세 번 수감됐습니다. 첫 번째 수감당했을 때는 아이가 아팠기 때문에 중국 당국은 저를 임시 석방해주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제 소중한 아이가 목숨을 잃었죠. 하지만 임시 석방이었고 제가 블랙리스트에 등재돼 여권도 압수된 상태라 아무 데도 갈 수 없었습니다. 이후 2016년 4월, 두 번째로 수용소에 수감됐습니다. 이때는 제가 많이 아파 병원으로 이송됐는데, 중국 당국은 입원한 상태임에도 저를 끈질기게 감시했습니다. 치료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수감당한 때는 2017년 10월입니다. 저는 2015~2018년까지 남편과 자유롭게 연락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중국 당국이 24시간 저를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친구들도 수용소에 갇혀 있나요?
“네. 제 친구 세 명이 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나머지 친구들도 생사가 불분명합니다.”
― 수용소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나요.
“위구르 수용소 수감자들은 ‘차라리 죽여달라’고 말할 정도로 여러 끔찍한 고문을 받기도 합니다.”
― 고문이라뇨?
“온몸을 결박(結縛)하는 전기의자에 앉아야 했습니다. 거기에 앉으면 정신연령이 다섯 살이 되는 것만 같아요. 저는 고문 때문에 아직도 공황장애를 앓고 있습니다. 의자에 앉으면, 끔찍한 괴로움이 몰려오지만 몸부림치지도 못합니다. 수용소에 온 사람들은 남녀 할 것 없이 머리를 삭발당합니다. 전 간수(看守)의 무차별적 폭력으로 한쪽 귀의 청력을 잃었습니다. 지금도 왼쪽 귀가 잘 들리지 않아요. 그리고 중국은 수용소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함구(緘口)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인터뷰 내내 투르순 씨는 ‘잘 들리지 않는다’며 목소리를 높여 질문해달라고 요구했다. 때로는 질문의 요지를 파악하기 위해 오른쪽 얼굴을 기자에게 가까이 들이대기도 했다. 왼쪽 귀의 청력을 잃어버려 소리를 잘 들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잃어버린 청력을 되찾기 위해 병원을 방문하는 등 여러 노력을 했지만, 이미 청력이 심하게 손상된 상태라 별다른 수가 없어 두 달에 한 번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는 청력을 유지하는 약을 넣고 돌아온다고 한다.
― 성적(性的) 폭력도 있었나요.
“있었습니다. 저는 성희롱·성폭력을 당하기 전 수용소에서 풀려났지만, 5~11세의 어린 여자아이들이 성폭력을 당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기혼 여성들은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어린 여자아이들을 상대로 성적 폭력을 저질렀어요. 정말 끔찍한 광경이었죠.”
“아무 잘못 없는 경우가 대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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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고기정 |
“전기의자에서 고문받고 있을 때, 저에게 고통을 주던 중국인 간수가 ‘위구르족인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수용소에 끌려온 이들은 저처럼 아무 잘못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유일한 공통점은, 모두 위구르인이라는 것이었죠. 그들은 단지 위구르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말로 표현하지도 못할 고문을 가했습니다.”
― 수용소 시설은 어떤가요.
“매우 열악합니다. 좁은 감방에 60명의 수감자가 한꺼번에 수감되는데, 누울 자리가 없어서 잠을 자는 것도 순번을 정합니다. 화장실 앞에는 감시카메라가 설치되어 있고, 공산당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게 합니다. 정신 개조를 하는 것이죠. 또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약을 먹입니다. 저는 그 약을 먹고 월경(月經)이 중단됐습니다. 강제로 불임 수술을 받은 여성 수감자도 있습니다.”
― 위구르인에게 수용소란 ‘공포의 장소’겠네요.
“네. 중국 당국의 규제는 수용소에 끌려가지 않으려 서로서로 감시하는 폐단(弊端)을 낳았습니다.”
― 중국은 수용소가 직업 교육을 하는 곳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실인가요?
“거짓말입니다. 저는 수용소에 있으면서 단 한 번도 직업 교육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 중국 정부의 주장과 반대되는 주장이네요.
“직업 교육을 받았다면, 월급이 들어와야 합니다. 저는 어떠한 월급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중국 정부는 자신들이 저지른 과오를 덮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 중국이 위구르족 영역에 한족을 많이 이주시켰다던데요.
“네. 지속적으로 한족 비율이 늘고 있습니다.”
― 위구르 자치구로 이주한 한족은 특혜를 받나요?
“매우 많은 특혜를 받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이주한 한족이 어느 위구르인의 집이 마음에 들 경우, ‘너, 나가’ 하면 그 집이 자신의 것이 됩니다. 말 한마디로 자신이 원하는 집에서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족 남성은 원하는 위구르 여성과 결혼을 할 수도 있습니다. 집과 마찬가지로, ‘너, 나랑 결혼해’ 한마디에 원하는 위구르 여성과 결혼을 할 수 있는 것이죠. 또한 위구르 지역으로 이주한 한족은 일을 하지 않아도 위구르인들이 노동해 버는 돈의 두 배가량을 국가로부터 지원받습니다.”
― 한족과의 결혼에서 위구르인의 의사는 반영되지 않나요?
“한족 남성의 선택을 받은 위구르 여성은 절대 거부할 수 없습니다. 거부할 경우 곧장 수용소로 끌려가게 됩니다.”
― 직접적인 갈등은 없나요?
“앞서 말했듯, 한족은 중국 당국의 특혜를 받고 위구르 지역으로 이주해 옵니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어요. 집을 사는 것도, 원하는 여성과 결혼을 하는 것도 한족이라면 가능하죠. 그렇기 때문에 위구르인들은 한족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장 위구르와 위구르인 漢族과 강제 결혼하는 위구르 여성들 신장 위구르 자치구는 중국 서쪽 멀리 떨어진 지역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서 10세기 이슬람교로 개종한 유목 민족인 위구르족의 여러 왕조가 명멸을 거듭했다. 이후 1759년에 중국[당시 청(淸)나라]에 완전히 복속되어 ‘신장성(新疆省)’이 되었다. ‘신장’은 글자 그대로 ‘새로운 영토’라는 의미다. 공산 정권이 수립된 후인 1955년 명목상 위구르인들의 자치를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성급(省級)인 ‘신장 위구르 자치구’가 됐다. 그러나 한족(漢族)의 이주, 이슬람교 박해 등으로 위구르인들의 저항이 이어져 왔다. 1988년에는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현재 중국 정부는 위구르 자치구에 대한 한족의 이주를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중국 심장부로부터 대규모 인구 유입이 이뤄지면서 신장 인구의 한족 비율은 1949년 6%에서 2011년에는 38%로 늘어났다. 이에 그치지 않고 중국 당국은 중국 내에서 가장 자유로운 거주 규정을 마련하여 한족이 대규모로 이주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중국 전역에서 주민들의 도시 유입은 엄격하게 통제되고 있지만, 위구르족이 다수인 지역에서는 지켜지지 않고 있다. 미 국무부는 2017년 4월 말 중국 당국이 최대 200만 명이 넘는 위구르족 무슬림들을 정치 교육을 위한 수용소에 구금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했다. 2022년 미국 의회는 중국의 위구르족 탄압에 대한 강경 조치를 요구하는 법안을 초당적으로 발의했다. 이에 중국 당국은 강제수용소의 존재를 부인하며 ‘범죄자들을 위한 직업교육센터’라고 강변하고 있다. 당시 화춘잉(華春瑩)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미국 의원들은 무슨 우월감으로 다른 나라의 내정에 왈가왈부하는가”라며 “잘못된 정보와 강한 이데올로기적 편견으로 다른 나라의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섭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현재 유엔(UN)을 비롯한 국제기구들은 중국의 위구르인 탄압을 ‘반(反)인류 범죄’로 규정했다. |
“풀려난 후에도 中 감시 계속돼… 소녀로서의 삶 잃었다”
― 위구르만의 문화가 많이 희석될 것 같은데요.
“이미 많은 부분을 억압당하고 있습니다. 위구르 언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상점에서 판매되는 물품들도 모두 중국어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위구르만의 독특한 문화가 없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 풀려난 후에는 어떤 삶을 살았나요.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삶입니다. 중국 정부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휴대폰을 통해 위구르인을 감시합니다. 저 또한 미국으로 이주했음에도 지속적인 해킹 공격으로 인해 휴대폰 번호를 6번이나 변경했습니다.”
― 중국 당국이 가족을 볼모로 협박하진 않던가요?
“수없이 많은 협박을 했습니다. 여동생, 남편, 제 두 아이를 가지고 줄곧 협박했습니다. 제 부모님은 현재도 위구르 지역에 살고 계시는데, 자유롭게 연락할 수 없어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투르순 씨는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어떤 일을 하고 싶나’라는 기자의 질문에 결국 눈물을 터뜨렸다. 연신 ‘미안하다’며 눈물을 훔친 그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없어서 더욱 눈물이 난다”면서 “어렸을 적에는 화장도 하고, 머리도 기르고, 위구르 음식을 먹으며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 다시 태어난다면 그것을 모두 누리고 싶다”고 말했다.
― 투르순 씨의 꿈은 무엇인가요.
“제 꿈은 위구르인들이 우리의 지역을 되찾는 것입니다. 현재 위구르인들은 중국 정부의 규제에 쫓겨나듯 다른 나라에서 살고 있습니다. 위구르인들이 다시금 모여 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일제강점기를 경험한 한국에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꼭 여러분의 나라를 지키길 바랍니다. 나라의 독립과 자유를 지켜야지만 여러분의 꿈과 언어와 삶과 후손을 지킬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