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佑光의 일본 再발견] 경영자가 일본 경제위기의 원인

  • 글 : 이우광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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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마 사장’(인기만화주인공), 삼성 높이 평가하면서 글로벌 경영 나서, ‘볼륨존전략’ 등 先導
⊙ 실제 일본 경영자들은 조정자형, 기존 노선 지키기가 주요 업무
⊙ 이나모리 교세라 명예회장의 JAL회장 취임은 프로 경영자 부족 보여줘

李佑光
⊙ 1952년 출생. 중앙대 통계학과 졸업. 日도쿄대 경제학부 박사과정 수료.
⊙ 삼성경제연구소 일본연구팀장, 해외연구실장 역임.
‘시마 고사쿠’ 시리즈의 작가 히로카네 겐시.
일본 국민들처럼 만화를 좋아하는 국민은 없을 것이다. 지하철에서 어른들이 만화에 심취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일본임을 실감할 때도 있다. 아소 다로(麻生太郞) 전 총리는 유명한 만화광이고 한국에도 번역된 베스트셀러 <바보의 벽> 저자이며, 해부학자인 요로 다케시(養老孟司) 도쿄대 명예교수가 <만화를 더 많이 읽으세요>라는 책을 낼 정도로 일본국민들은 만화에 친숙하다. 일본 만화시장은 최근 들어 약간씩 줄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5000억 엔 규모이며, 단행본과 잡지가 반반 정도이다. 일본 만화시장이 엄청나게 크다는 것은 미국 만화시장이 일본시장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약 360억 엔 규모에 불과하다는 것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일본 어른만화 중에 일본경제의 동향, 대기업 간의 경쟁, 대기업 내부에서의 권력투쟁, 경제의 말단에서 일하는 샐러리맨들의 군상 등을 리얼하게 묘사하여 인기를 얻고 있는 작품 ‘시마 고사쿠(島耕作)’ 시리즈가 있다. ‘시리즈’라고 말하는 것은 주인공인 시마 고사쿠가 과장 때인 1983년에 <과장 시마 고사쿠>로 시작하여 부장, 이사, 상무, 전무를 거쳐 2008년 사장이 될 때까지 ‘직책+시마 고사쿠’로 제목이 바뀌어 연재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인의 ‘시마 사랑’은 대단하다. 1983년 발행 이후 지금까지 4000만 부 가까이 팔렸고, 드라마와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2008년 시마의 사장 취임 때에는 일본 주요 일간지들이 일제히 보도했을 정도이다. <주간 아사히>에서는 아소 다로 당시 총리와 시마 사장과의 인터뷰 기사를 특집으로 싣기도 했다. 시마에 대한 열기는 일본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한국어·영어로도 번역되어 한국에도 상당한 팬이 있다. 또 영국 <이코노미스트>지(誌)는 만화 주인공을 처음으로 기사로 취급하는 ‘명예’를 부여하기도 했다.
 
 
  시마는 단카이 세대 샐러리맨의 상징
 
  그렇다면 시마가 사랑받는 비결은 무엇일까?
 
  첫째, 일본 샐러리맨들 스스로의 모습을 시마 시리즈가 투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마는 작가인 히로카네 겐시(弘兼憲史) 씨와 마찬가지로 1947년생 전후(戰後) 베이비 붐 세대(일본에서는 ‘단카이(團塊)’ 세대로 표현한다)이다.
 
  시마는 와세다(早稻田)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1970년에 하쓰시바전기산업주식회사에 입사하여 광고과에서 회사생활을 시작한다. 하쓰시바(初芝)는 작가인 히로카네 씨가 만화가로 데뷔하기 전에 다녔던 마쓰시타전기(松下電器産業 현재는 파나소닉)를 모델로 한 회사이다. 따라서 독자들은 시마 고사쿠를 가공(架空)의 인물이 아니라 자신이나 동료처럼 보고 있는 것이다.
 
  또 자신들이 일본경제의 주인공이라는 일종의 책임감 같은 것도 느끼는 모양이다. 사실 일본의 ‘단카이’ 세대는 전후 일본경제의 산 증인들이다. 이들은 고도성장기에 청춘을 보냈고, 1970년에 입사한 얼마 후에는 제1차, 2차 석유위기를 차례로 겪지만 에너지 절약적인 자동차, 가전(家電), 기계 산업을 일으켜 세계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하지만 과장 시절인 1985년에는 프라자 합의로 급격한 엔고(円高)라는 암초를 만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른 수건도 다시 짜는’ 각고의 노력으로 암초를 피해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보유하는 경제대국의 주역이 된다. 그러나 부장 시절인 1990년대에는 이러한 영광이 화근이 되어 버블 형성과 붕괴라는 홍역을 치르고, 각고의 노력으로 겨우 임원이 된 2000년대 초반에는 ‘잃어버린 10년’을 극복하는 고투(苦鬪)가 계속된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일본 제조업 부활’이라는 성과를 맛보는 듯했으나, 지금은 세계금융위기라는 직격탄을 맞고 비틀거리는 일본기업의 CEO로서 전 세계 여기저기를 뛰어다니고 있다. 이러한 모습이 일본 샐러리맨 자신들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하다는 것이다.
 
 
  시마, 일본 기업의 과제를 미리 예시
 
인기만화 주인공 시마 고사쿠는 단카이 세대 일본 샐러리맨의 상징이다.
  둘째는 시마 시리즈가 일본 기업 사회의 현실을 잘 표현한다는 것이다. 즉 작가가 다녔던 마쓰시타전기의 경영방침이 만화에 그대로 묘사되고 있다.
 
  예를 들면, 2008년 10월 2일에 발매된 <사장 시마> 1권에는 그 다음 해에 하쓰시바가 사명(社名)을 변경한다는 것과 통합 브랜드를 내세운다는 것을 발표했다. 이는 실제로 2008년 10월 1일에 마쓰시타전기산업이 파나소닉주식회사로 사명을 변경한 것, 그리고 내쇼날(National) 브랜드를 파나소닉(Panasonic)으로 통일할 것을 미리 예견한 것이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또 2008년 11월 7일에 파나소닉과 산요가 합병한다고 발표한 것도 만화에서는 이미 하쓰시바 즉 파나소닉과 고요(五洋) 즉 산요가 합병하여 지주회사가 되어 있었다.
 
  ‘사전에 정보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 작가인 히로카네는 “내가 파나소닉 사장이라도 역사적으로 관계가 깊고 전지(電池) 기술이 뛰어난 산요를 다른 기업이 인수하는 것을 보고 있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에 서둘러서 썼다”라고 말했다.
 
  셋째, 일본기업의 과제를 미리 예시하기 때문이다. 시마 고사쿠 사장은 취임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세계시장 공략을 위해 싱크로 글로벌(synchro global)을 슬로건으로 내세워 새로운 브랜드 전략을 추진한다. 구체적으로는 소자화(少子化)로 인구가 감소하고 있는 일본시장보다는 경제가 급성장하고 있는 중국이나 인도에서 적극적으로 사업을 추진한다.”
 
  이 경영방침은 최근 일본기업들이 제조업 생존을 위해서는 신흥시장 공략이 불가피하다는 ‘볼륨 존’ 전략을 2년 전에 천명한 것이어서 시마 사장의 선견성(先見性)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요즘 시마 사장은?
 
  또 이때에 시마 사장은 이미 삼성전자를 일본기업이 경계해야 할 대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일본기업들이 삼성전자를 한 수 아래로 보고 있지만, 이는 삼성전자의 진정한 실력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라면서 “지금은 일본기업들이 단지 반도체나 액정에서 삼성전자에 뒤처지지만, 앞으로는 전지 분야에서도 경쟁력을 상실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시마는 독립성이 강하고, 결단력과 책임감이 있으며, 과감하게 연애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속마음(혼네: 本音)을 나타내지 못하고 겉마음(다테마에: 建前)으로 행동하는 일본 샐러리맨들과는 다른 모습이지만, 그 때문에 그들은 시마에게 열광한다. 그래서 <이코노미스트>지는 “일본사회에서는 시마와 같은 사람은 사장이 될 수 없고 좌천되어야 마땅하다”고 꼬집었다.
 
  요즈음 시마 사장은 성장이 정체(停滯)하고 있는 일본기업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경쟁자인 한국기업과 맞서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 일본기업들이 기술 중시 성장 전략을 취했던 것과는 달리 M&A를 적극적으로 구사하는 성장전략을 취하기도 한다. 또 신흥시장의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 어제는 러시아에서, 오늘은 중국에서 뛰고 있다. 또 최근에는 중국 경제의 역동성(力動性)을 몸소 느끼기 위해 만국박람회를 준비하는 상하이에서 활약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의 장점인 기술과 중국의 장점인 자본을 결합한 합작회사 설립을 검토하기도 한다. 또 향후에는 회사명을 ‘TECOT’로 개명한다고 한다. TECOT는 TEC=technology와 ECO=ecology의 합성어로, 한정된 에너지를 최대한으로 활용하기 위한 기술을 중시하겠다는 것으로 쉽게 말하면 녹색사업에 회사의 중점을 두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렇다면 실제 일본기업들의 경영자들은 시마 사장처럼 선견성도 있고 또 글로벌화(化)된 인물들이 대부분일까? 실상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일본의 유명 헤드헌터인 오카지마 에쓰코(岡島悅子)는 “지금 일본기업들의 업적이 악화되고 있고, 또 ‘잃어버린 10년’이 ‘잃어버린 20년’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은 일본의 경영자들이 안고 있는 문제점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대부분의 일본 경영자들은 아직도 기존 노선 지키기가 주요 업무이며, 약간의 개선을 거듭하는 노력을 추가하는 것으로 경영자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는 “경영자의 이러한 역할은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경제에서나 가능하다”면서 “‘비연속’적이란 표현이 적절할 지금의 일본경제하에서는 이러한 경영자는 실격(失格)”이라고 말한다.
 
 
  일본경제 침체 원인은 경영자에게 있다
 
  글로벌화한 경제에서는 경쟁 환경이 복잡할뿐더러 수시로 급변한다. 때문에 경영자들이 내려야 할 의사결정도 결단이 쉽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항상 트레이드 오프(trade off)적인 상황에서 결단을 내려야 하는 어려운 국면의 연속이므로 경영자의 업무는 누구나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프로야구선수가 프로팀 감독이 쉽게 될 수 없는 것은 프로야구에서는 상식이다. 이는 감독과 선수의 역할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 기업에서는 선수가 금방 감독이 된다는 것이다. 그만큼 일본은 프로 경영자 시장이 취약한 것이 큰 문제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일본의 기업인이나 학자들은 ‘일본은 전문경영 체제, 한국은 재벌(財閥)오너 체제’라며 일본의 경영자 시스템이 한국보다 선진 시스템인 것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외환(外換)위기 때에는 한국의 재벌 시스템이 문제가 되어 경제위기를 초래했다는 시각이 많았다.
 
  그러나 메모리 반도체에 이어 액정에서도 일본기업이 한국기업에 따라잡히자 이번에는 한국 경영자들의 빠른 결단과 과감한 투자 때문이라고 한국 대기업의 기업 시스템을 치켜세우고 있다.
 
  또 일본경영자와 미국경영자들을 곧잘 비교하기도 한다. 미국경영자들은 단기 업적과 주주(株主)를 중시하고 엄청난 보수를 받아 가지만, 일본의 경영자들은 장기적인 시야를 가지고 이해관계자를 중시하는 경영을 하기 때문에 기술개발이 용이하고, 또 보수(報酬)도 신입사원의 10배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에 노사(勞使)화합이 잘된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일본기업들의 침체가 계속되자 최근에는 일본의 경영자 시스템을 미국처럼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 빈번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고도 성장기에는 잘 작동해 왔던 일본 경영자 시스템이 지금에 와서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가장 큰 문제점은 불연속적이고 글로벌한 경영환경임에도 불구하고 빠르고 과감한 의사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구조라는 것이다. 특히 국내 또는 사내(社內)의 의견조정에 상당한 에너지가 소요되는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일본에서는 CEO로서 리스크를 지고 과감한 결단을 내리는 리더형(型)이 아니라 항상 사내 또는 사외(社外)의 의견을 조정하여 결론을 이끌어내는 조정자 역할을 중시해 왔다. 그리고 실제로 누가 최종 의사결정자인지도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책임소재도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후지쓰의 사장 사임 소동
 
노조에 전 후지쓰 사장.
  최근 일본 경영자 시스템의 문제점을 상징하는 사장 ‘사임(辭任)소동’이 지금 유명 전자업체인 후지쓰에서는 벌어지고 있다.
 
  작년 9월에 사장직에서 물러난 노조에(野副州旦) 전(前) 사장이 올 3월 요코하마재판소에 후지쓰를 상대로 ‘이사로서의 지위보전을 요구하는 가(假)처분’을 신청하였기 때문이다. 노조에 전 사장 측 주장은 당시 부당하게 사장직에서 물러났으므로 복직(復職)시켜 달라는 것이다.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회사 측은 후지쓰의 자(子)회사 주식 매각과 관련된 투자펀드회사가 ‘반(反)사회적 세력’인 줄 알면서도 노조에 전 사장이 거래를 했다는 것이고, 노조에 전 사장 측은 그런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
 
  사실관계는 차치하더라도 노조에 전 사장이 사장직을 사임하는 과정이 지극히 일본적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본인은 지난해 9월 25일, 회장·상담역 등 6명이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불려갔다. 그는 이 자리에서 “기업의 톱이 반사회적 세력이 배경으로 있는 상대와 거래를 하게 되면 상장(上場)폐지 규정에 저촉되는 것을 알고 있느냐. 후지쓰가 상장폐지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사임하라”는 말을 듣고 ‘그것밖에 방법이 없다면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사임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회사를 떠나야 했다. 대외적(對外的)으로는 ‘질병’ 때문이라고 발표됐다.
 
  노조에 전 사장은 “이후 조사를 해 보니 회사 측이 말한 사실관계가 달랐다. 사임은 회사 측이 강요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후지쓰는 노조에 전 사장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맞서고 있다.
 
  이 사건이 보여주는 시사점은 일본의 경영자 시스템에 아직 섭정(攝政)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일본기업에서 ‘도리시마리야쿠(取締役: 등기이사) 상담역’은 대표적인 섭정 포스트이다. 격무와 어려운 의사결정은 사장에게 맡기고 이사회 등에서 중요 안건이나 인사(人事)에 있어서 실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일본에서도 한때 이러한 문제점을 개혁하기 위해 소니나 호야(HOYA)와 같은 기업들은 사외이사제를 도입하는 등의 개혁을 추진했다. 하지만 후지쓰와 같은 회사에서 이런 문제가 불거지는 것을 보면 아직 일본기업 전체로 일반화되지는 않은 모양이다.
 
  기업 내의 경영자 시스템에도 문제가 많지만 일본 전체로 보아도 프로 경영자가 적다는 탄식도 들린다.
 
  예를 들면 법정정리에 들어간 일본항공(JAL)의 CEO인 회장에 교세라 명예회장이었던 이나모리 가즈오(稻盛和夫) 씨가 취임했다는 사실도 문제라면 문제라는 것이다.
 
 
  현재의 경영자 시스템은 맥아더의 유산
 
JAL회장으로 취임한 이나모리 가즈오 교세라 명예회장.
  물론 이나모리 회장은 1조 엔이 넘는 매출을 올리는 거대기업 교세라를 일으킨 훌륭한 경영자로, 1984년에는 KDDI를 설립하는 등 통신사업에도 뛰어들어 성공을 거두었다. 뿐만 아니라 ‘아메바 경영’이라는 독특한 독립채산제 경영기법을 제안, 일본은 물론 해외에도 경영기법을 전파(傳播)하는 등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훌륭한 경영자이다. 게다가 일본 재계(財界)에서는 흔치 않게 일찍부터 민주당 정권을 지지하여 현(現)정권과도 친밀감이 있기 때문에 JAL 재생(再生)의 적임자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규모도 크고 복잡하기 그지없는 JAL 재생 문제에는 체력과 기력이 필요하다. 78세의 경영자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녹록한 일이 아니다. 비판자들은 “미국 같으면 기업재생 경험이 풍부한 전문 경영자, 항공업계 출신의 컨설턴트 등의 전문가들이 거론되고, 이들에 대한 검증이 충분히 진행된 후에 기업재생을 맡을 사장이 결정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말한다. 비판자들은 “이번 이나모리 회장의 선임과정을 보면 일본의 프로 경영자 시장이 얼마나 얕은지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결국 일본의 경영자 시스템은 많은 문제점을 배태하고 있는 시스템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일본은 미국처럼 경영자와 주주 간의 치열한 공방을 거쳐 지금의 시스템으로 정착된 것이 아니다. 어찌 보면 일본의 민주주의와 마찬가지로 외부로부터 주어진 시스템이다.
 
  전후 맥아더의 GHQ(연합군총사령부)는 당시의 재벌기업들에도 전쟁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보고 4대 재벌, 즉 미쓰이(三井), 미쓰비시(三菱), 스미토모(住友), 야스다(安田)의 4가(家) 출신 경영자를 추방하고, 산하기업에 대한 지령권·관리권 행사를 금하는 재벌 해체를 단행했다. 그 결과 기업그룹이 형성되었고, 또 기업그룹이 전문경영인 집단에 의해 지배되는 구조가 이어져 오면서 지금의 경영자 시스템이 구축된 것이다.
 
  물론 천재적인 경영자가 다수 출현한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IHI(이시가와지마중공업)의 사장을 지냈고, 도시바의 재건에 성공한 도코 도시오(土光敏夫)나, 또 도시바 사장과 전경련 회장을 역임했던 이시자카 다이조(石坂泰三) 등이 그 예이다.
 
  그렇다고 오너(同族)기업이 없는 것은 아니다. 주로 전후에 급성장한 기업 중에 오너기업이 많다.
 
  최근 품질문제와 경영자 승계문제가 맞물려 큰 홍역을 치르고 있는 도요타도 일본의 대표적인 오너기업이다. 또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가 창업하여 최근 사명을 바꾼 파나소닉(舊 松下電器産業)도 오너기업으로 분류된다. 일본에는 일찍부터 사철(私鐵)이 발달하였는데 사철·부동산·백화점에 세트로 투자하여 큰 부를 거머쥔 한큐(阪急電鐵), 도큐(東京急行電鐵), 세이부(西武鐵道) 등도 대표적인 오너기업이다. 이 밖에도 대표적인 제약회사인 다이소제약(大正제약), 다케다약품(武田藥品工業)과 건설회사인 가시마(鹿島)건설, 식품회사인 아지노모토(味の素)도 오너기업이다.
 
  그러나 일본 대기업 중에는 이런 오너기업은 특별한 경우이고 대부분은 전문경영인 기업이다.
 
  이러한 일본의 경영자 시스템에 변화의 조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본 최대 전자업체인 히타치에서 최근 그러한 조짐이 감지되고 있다. 히타치제작소는 1년 만에 일본 대기업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사장 인사를 단행하는 공격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히타치 등 경영자 시스템 변화 조짐
 
  히타치는 2009년 3월 7873억 엔의 적자를 내자 당시 후루가와(古川一夫) 사장보다 일곱 살이나 많은 가와무라(川村隆) 사장을 선임하여 경영통합, 사업철수 등의 개혁을 추진했다. ‘출혈(出血)’이 어느 정도 수습되자 이번에는 1년 만에 다시 나카니시(中西宏) 사장을 선임하는 이례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히타치는 최근 GE와의 연합으로 UAE의 원전수주에 나섰으나, 한국 팀에 고배(苦杯)를 마셨다. 히타치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 새로운 경영진으로 전열을 가다듬고 1조 엔이나 하는 영국의 고속전철 수주를 위해 매진하고 있다.
 
  일본은 지금 경영자 문제로 진통을 겪고 있는 듯하다. 즉 ‘이것이 일본형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경영자 시스템을 구축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최근 업적이 승승장구하고 있고 일본의 최고 부자로 등극한 유니클로의 야나이 다다시(柳井正) 회장도 65세에 은퇴하기로 천명했지만, 누구에게 바통을 넘겨줄지 시스템으로서 정해진 바는 없다. 앞으로 일본이 어떠한 경영자 시스템을 구축해 나갈지 경쟁자인 우리 기업으로서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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