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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현대사

용산과 함께한 국방부 청사 70년사

국방부 청사에는 지하 주차장이 없다!

글 : 김광우  전 국방부 기획조정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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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방부 구관 건립 시에는 “美 펜타곤 뺨치는 호화건물” 소리 듣기도
⊙ 용산우체국 뒤편(1949년) → 후암동(1953년) → 삼각지(1970년)
⊙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는 1966년 작사… 1967년 말 준공된 삼각지 입체교차로와는 무관
⊙ 국방부, 2003~2012년 청사 분리되었을 때 경험했던 비능률 되풀이할 듯
대통령집무실 등이 들어선 국방부 청사. 2003년 준공되었다. 사진=조선DB
  윤석열(尹錫悅) 대통령은 5월 10일 취임과 동시에 서울 용산의 국방부 청사를 대통령집무실로 개조하여 사용하기 시작했다. 대통령집무실이 이전한다는 것은 대통령비서실(정원 445명)과 대통령경호처(정원 662명) 또한 함께 옮기는 것을 의미한다(직제령 정원표 참조). 비서실 소속의 국정상황실과 국가위기관리센터, 그리고 경호처 소속의 경호상황실, 경호 장비와 차량 등의 운영에 필요한 시설도 함께 이전해야 한다. 대통령집무실만이 아니라 청와대 관련 조직이 모두 이전하는 커다란 프로젝트라고 하겠다.
 
  현재 국방부 청사 지역에는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합참)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국방부 근무지원단, 군사법원, 국방부 조사본부, 국방시설본부, 국방컨벤션 등 국방부 직할(국직) 부대와 기관들이 함께 위치하고 있다. 복합 군사시설 단지(military complex)라고 할 수 있다. 문재인 정부가 못 한 청와대 이전을 윤석열 정부가 실행에 옮기게 된 것은 청와대라는 복합시설 이전을 위해 용산 병영시설 단지의 용도변경이라는 발상의 전환을 한 덕분이라고 본다.
 

  6·25전쟁 이후 지금까지 ‘용산’이라고 하면 미군부대와 국방부가 떠올랐다. 하지만 용산 미군기지의 평택 이전 사업이 마무리되는 단계에서 청와대라는 커다란 조직이 이전해옴에 따라 용산 군사시설에 거대한 변화의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다. 이 기회에 용산과 함께한 국방부 청사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첫 청사는 하나은행 명동사옥 자리
 
국방부 첫 청사는 명동 KEB하나은행 본점 자리에 있었다. 사진=조선DB
  국방부는 우리 정부에서 가장 오래된 중앙부처이다. 우리나라 법률 제1호는 1948년 제정된 정부조직법이다. 그 이후 지금까지 정부조직이 수없이 개편되어왔지만 명칭 변경 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는 부처는 국방부와 법무부뿐이다. 국가 존립과 직접 관련되는 ‘국방’과 ‘법무’ 기능은 다른 정부 기능과 차별성이 분명하기 때문일 것이다.
 
  국방부는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독립청사를 사용하였다. 지휘통제 및 상황시설 확보, 시설과 인원 보안 등 군사시설로서의 특수성 때문이다. 국방부는 첫 청사로 1948년 8월 지금의 KEB하나금융그룹 명동사옥(옛 외환은행 빌딩) 자리에 있던 건물을 1년 정도 사용하다 1949년 6월 지금의 용산우체국 뒤편 건물로 이전하였다. 1948년 처음 출범할 때 국방부 정원은 24명에 불과하였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임시로 부산으로 이전하였다. 함께 부산으로 간 국방부는 1950년 8월 지금의 부산 수정초등학교를 전시(戰時) 청사로 사용하였다. 휴전협상이 한창이던 때 정부는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이때 서울로 온 국방부는 1953년 7월 용산구 후암동에 청사를 마련하고 1970년까지 17년간 사용하였다. 이른바 국방부의 후암동 시대라고 하겠다. 후암동 국방부 청사가 있던 곳은 후일 병무청, 서울지방병무청 자리이다.
 
 
  無梁板 공법으로 시공
 
1970년 준공된 국방부 구관. 당시에는 ‘호화건물’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사진=조선DB
  1970년 국방부는 용산 삼각지에 청사를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지금의 국방부 별관(또는 구관)이다. 6·25전쟁을 겪고 난 후 자주국방을 위한 조직과 인원이 급격히 팽창함에 따라 새로운 청사 확보가 불가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건물은 1966년 터파기를 시작하여 1970년 지하 1층 지상 10층으로 완공되었다. 설계는 당시 국내 최고였던 ‘종합건축사무소’가 맡았고, 시공은 대림산업, 건평 8300평, 공사비는 13억원이었다. 비슷한 시기인 1967년 착공되어 1970년 완공된 광화문 정부서울종합청사(지하 3층, 지상 19층)의 당시 공사비 47억원과 비교할 때 단독 청사로서는 상당한 공사비라고 하겠다. 《대림산업 60년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고속 엘리베이터, 자가발전 설비, 냉난방 및 환기시설, 전자동 제어 장치, 화재경보 장치 등 최신 설비를 갖춤으로써 최고급 빌딩이라는 평판을 들었다. 특히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무량판 공법에 의해 시공된 복도를 고급 대리석으로 마감하여 건물 내부의 중후함과 세련미를 갖춘 것으로 평가를 받았다.〉
 
  대들보[梁]가 없이 슬래브와 지붕만으로 하중을 견디도록 한 구조가 무량판(無梁板) 공법이다. 이렇게 하면 보를 설치하기 위한 30~50cm 정도의 수직 공간을 별도로 확보하지 않아도 되므로 층고를 확보하는 데 유리하다. 국내 민간 건축에서 무량판 구조를 적용한 것은 1975년 압구정동 현대아파트가 처음이다. 여러 가지 내부 시설을 갖추다 보니 현대식 최고급 빌딩이라는 평가도 있었다. 건물 완공 직후 1970년 11월 26일 국회 예산결산위원회에서 최치환 공화당 의원은 “새 국방부 청사가 미국 펜타곤을 뺨칠 정도로 호화청사”라고 지적하기도 하였다.
 
 
  軍部의 권위를 표현
 
  이 건물과 관련하여 세 가지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먼저 이 건물의 겉모습이 매우 권위주의적이라는 점이다. 위압적이고 육중한 육면체 빌딩이 높은 곳에 위치하면서 주위를 내려다보는 분위기다. 건물 설계자 이호진은 “시절이 시절인 만큼 천하를 호령하는 군부(軍部)의 권위를 외형으로 표현해야 했다. 견고하고 웅장한 인상을 주는 좌우 대칭의 박스형 건물로 고지대에 앉힌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두 번째로 이 건물의 중앙에서 북쪽으로 가상의 선을 그으면 세종로를 지나 청와대와 만난다는 것이다. 필자가 서울 지도를 놓고 직접 선을 그어보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서울시내에 큰 고층빌딩이 없던 당시 이 건물은 주변에서 가장 높고 큰 건물이었다. 멀리 서울역이 내려다보였으며 청와대가 보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청와대가 아니라 북한을 바라보게 건축함으로써 대북(對北)경계와 북진(北進)통일의 의지를 반영하였다는 설도 있다. 건물의 북향(北向)을 두고서 청와대를 바라보느냐 북한을 바라보느냐에 대하여 설계자의 의도를 지금은 확인할 길이 없다. 주변 도로 여건상 건물 북쪽이 주 출입구가 될 수밖에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건물이 북향이 되었을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세 번째로 이 건물에 1983년 5월 18일 밤 큰 화재가 발생하였다. 밤 11시30분경 9층에서 시작된 불은 9층과 10층의 합참(合參) 사무실을 전소시키고 새벽에 진화되었다. 용산소방서뿐만 아니라 서울시내 많은 소방차가 동원되었다고 하니 엄청난 화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사무실에서는 철제 캐비닛을 사용하였는데 여기에 보관되어 있던 종이문서들이 모두 재가 되었다고 한다. 전자문서가 아니라 오로지 타자기와 종이로 문서를 작성하던 시절이었으므로 엄청난 서류가 화재로 사라진 것이다. 건물 안전진단을 하고 일부 리모델링을 한 후 건물을 다시 사용하였지만 건축 구조적으로 골병이 든 것은 분명했다.
 
 
 
新청사와 合參 청사

 
2012년 준공된 합참 청사도 권위주의적 모습을 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사진=조선DB
  호화청사로 지적받기도 했던 이 건물도 30년이 경과하면서 노후화되기 시작하였고, 조직 확대 및 합참과 함께 사용함으로 인한 사무 공간 협소 문제로 새로운 청사 건립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어렵사리 900억원의 예산을 확보하여 2003년 10월 13일 지금의 국방부 청사가 준공되어 10월 31일 입주하였다. ‘어렵사리’라는 표현 이상으로 신축 공사비 확보와 설계 변경으로 인한 공사비 증액 과정에서 예산 확보가 쉽지 않았다.
 
  이 건물은 국방부와 합참이 절반씩 사용하는 것으로 설계 시공되었고, 계획대로 지상 1~4층은 국방부가, 5~9층은 합참이 입주하였다. 국방부는 장관실 등 조직의 절반만 이 건물로 입주하였고 나머지는 옛 청사(별관)에 그대로 잔류하였다. 국방부 본부 조직이 두 개의 건물로 나뉘어 있는 불편함과 합참의 독립청사 확보 필요성 등이 제기되어 2012년 합참 청사가 준공되었다. 예산은 국방비 중 방위력개선비로 집행하였다.
 
  이에 따라 10년간 두 집 살림을 하던 국방부는 하나의 건물로 합치게 되었고, 합참은 1963년 창설 이후 처음으로 독립된 청사를 가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텅 비게 된 별관 건물은 2013년부터 2016년까지 총공사비 486억원을 들여 리모델링 공사를 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12·12사태 때 총격전으로 별관 건물 1층 복도 대리석 벽면에 있던 총알 자국도 이때 완전히 없어졌다.
 
 
  지하 주차장이 없는 이유
 
  별관 청사가 북향인 것과 달리 국방부 신청사는 남향이며 건물 바로 앞에 연병장을 마련하였다. 전형적인 병영시설 배치 모습이다. 이 건물의 겉모습도 매우 권위주의적이다. 육중한 육면체 건물이 연병장을 내려다보면서 남쪽(국립박물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대리석으로 외벽을 마감하고 건물 정면 좌우로는 구조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회랑을 설치함으로써 권위주의적 모습을 더하고 있다.
 
  무릇 건물 설계자는 건물주의 생각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건물 발주자로서 국방부 지휘부의 의견이 설계에 크게 반영되어 민간 건물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띠게 되었다. 이 건물도 호화청사라는 일부의 비난이 없지 않았다. 다음은 《경향신문》 2003년 11월 4일 자 기사 내용 중 일부다.
 

  〈국방부가 최근 준공한 신청사에 당초 설계까지 바꿔가면서 로열층인 10층에 장군급 전용 식당과 휴게실 등을 만든 것으로 밝혀져 빈축을 사고 있다. 또 3성 장군급 이상 및 차관보급 이상 간부 사무실마다 개인 화장실과 세면실을 설치했으며, 일주일에 2~3차례밖에 이용하지 않는 육·해·공군 참모총장 집무실과 접견실을 별도로 마련했다.〉
 
  대략 10년의 시차를 두고 국방부 청사 서편에 신축한 합참 청사의 모습도 국방부 청사와 비슷하다. 지상 10층, 남향, 육중한 육면체 외양, 건물 앞 연병장 등이 공통점이다. 다른 점이라면 건물 외벽을 일부 유리로 마감 처리한 점이 되겠다. 합참 신청사는 건물 지하의 특수시설 설치에 적지 않은 건축비가 들었다. 아마 지상보다 지하에 더 많은 돈이 들어갔을 수도 있다.
 
  국방부 청사의 특징은 건물 지하에 주차장이 없다는 점이다. 지하에 특수시설을 설치하다 보니 지하 주차장을 설계하기가 곤란했을 것이다. 미국 연방정부의 경우 특수시설의 바로 아래 지하에는 주차장을 설치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차량 폭탄테러 등을 예방하기 위해서다.
 
 
  ‘돌아가는 삼각지’
 
삼각지에 있는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 노래비’. 정작 이 노래와 삼각지 입체교차로는 관계가 없다. 사진=조선DB
  국방부 청사를 이야기하면서 삼각지를 빼놓을 수 없다. 국방부 앞 삼각지는 지금은 사거리가 되었지만 한때 ‘돌아가는 삼각지 로터리’였다. 기록에 의하면 삼각지 입체교차로는 1967년 착공되어 불과 11개월 만인 같은 해 12월 30일 준공되었다. 준공식에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육영수(陸英修) 여사, 박지만 군(당시 초등학생), 김현옥(金玄玉) 서울시장, 그리고 김성은(金聖恩) 국방장관 등이 참석하였다. 서울의 명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당시 국방부 청사는 후암동에 있었는데 국방장관까지 준공식에 참석한 사연이 궁금하다. 국방부 별관 건물은 1970년에 준공되었으니 1967년에는 이미 건물 공사가 한창이었을 것이다. 머지않아 국방부가 삼각지로 이사 올 예정이었기 때문에 삼각지 입체교차로 준공식에 국방부 장관이 참석했을 것으로 짐작해본다.
 
  서울의 발전을 상징하는 명물이었던 이 입체교차로는 교통량이 폭주하면서 1980년대 후반부터 교차로로서의 기능을 발휘하기는커녕 출퇴근 때 교통체증을 일으키는 애물단지가 되었다. 지하철 4호선 공사와 겹치면서 1994년 이 입체교차로는 철거되기에 이르렀고, 삼각지는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한때 삼각지 로터리로 유명했건만 입체교차로가 없어지면서 지금은 어느 누구도 삼각지 뒤에 로터리라는 말을 붙이지 않는다.
 
  삼각지 하면 가수 배호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는 용산 삼각지 입체교차로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이 노래의 가사에서 삼각지는 연인(戀人)을 만나지 못하고 되돌아가는 일반적인 의미의 삼각지를 뜻한다. 이 노래가 1966년 작사되고 이듬해 삼각지 로터리가 착공 및 준공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하지만 서로 비슷한 시기에 노래도 유명해지고 입체로터리도 서울의 명물이 되면서 배호의 노래와 입체교차로를 함께 연결 지어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이를 기억하여 용산구청은 2000년 삼각지 이면도로를 배호길이라고 지정하였고, 2001년도엔 삼각지 사거리에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 노래비를 세웠다. 길 이름에 우리나라 대중가수 이름이 들어간 것도 이것이 처음이고 대중가수 노래비로서도 최초였다. 노래비는 지하철 4·6호선 삼각지역 14번 출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세상만사 관심을 가지고 봐야 보이듯이 이 노래비도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는 이에게만 보인다.
 
 
  국방부 조직, 한군데로 모이게 될 것
 
  국방부는 6·25전쟁 이후 후암동 청사 17년, 국방부 별관 33년, 그리고 지금의 건물에서 19년을 일해왔다. 이제 대통령집무실로 청사를 비워줌으로써 국방부 장관과 일부 직원은 합참 청사로, 나머지는 몇 군데로 분산 배치되게 되었다. 국방부 청사가 없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방부로서는 앞으로 상당기간 불편과 시련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국방부는 조직의 분산으로 인한 업무상 비능률을 2003년부터 합참 청사가 신축된 2012년까지 대략 10년을 경험한 바 있다.
 
  국방부는 지금까지 용산을 떠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국방부 조직을 한군데로 모아야 한다는 논의는 언젠가는 다시 힘을 받을 때가 올 것이다. 그때 새로운 국방부 청사의 위치 역시 용산일 것이라는 추측과 기대를 담아본다.
 
  용산 삼각지의 장점은 지하철 4·6호선이 지나는 더블역세권이라는 점이다. 앞으로 정부세종청사나 정부과천청사 등에서 대통령실로 일 보러 오는 공무원들은 KTX 서울역과 지하철을 이용하면 청와대 시절보다는 더욱 편리할 것이다. 삼각지역은 이제 역이름을 바꾸든지 ‘대통령실’ 명칭을 병기(倂記)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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