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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삼성 회장의 생생한 육성으로 듣는 ‘삼성 新경영’(1993~1996) (1)

IMF사태 예측 등 이건희 회장 업무지시 녹음테이프 30개(1000分 분량) 내용 전격 공개

글 : 권세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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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으로 가면 나는 관둘 거야!”

이 회장은 “그룹의 목표와 회장의 경영철학을 실천하는 사람은 임원과 일반 직원들인데, 회장에서 비서실-사장-임원-직원으로 전달되는 동안 뜻이 왜곡돼서는 곤란하다”며 “내 얘기와 지시, 회의내용을 그대로 녹음해서 직원들 앞에서 틀어주라”고 당부했다.

⊙ 그룹 新사업·人事·M&A(기업인수합병)·부동산·위기관리 등 하나하나 꼼꼼하게 지시, 현명관 비서실장에게 모두 녹음하도록 한 이건희 회장
⊙ 玄 전 비서실장 “피상적으로만 알려졌던 이건희 회장 진면목 알리고 싶어… 4차 산업혁명시대 맞아 혁신 추구하는 기업인들에게 좋은 참고자료 될 것”
⊙ IMF사태 예측 “97~98년이 되면 기본 경쟁력이 안 돼서 진짜 불경기가 온다. 지금 대비하지 않으면 큰일”
⊙ 50대 초반의 이건희, 늘 새로운 아이디어 제시 “발상이 말랑말랑하지 않으면 안 돼!”
⊙ “삼성은 사람에 해로운 일, 사회 혼란을 가져오는 일, 싸구려 물건을 파는 일은 안 한다”
⊙ 1996년 춘천 공사 현장에서 사고 나자 격노, “이런 식으로 가면 나는 관둘 거야! (계열사) 사장들 다 자필로 앞으로 어떻게 할지 써내라 해”
⊙ “노인과 아이들을 중요시하지 않는 나라는 망하게 돼 있어. 젊은 사람들이 전부 도망가버린다고”
⊙ “제일 무서운 사람은 회장도 대통령도 아닌 소비자, 국민이야”
  한국 경제는 물론 세계 경제에도 큰 업적을 남긴 이건희 삼성 회장이 2020년 10월 25일 별세했다. 이건희 회장은 선대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3남으로 1987년 11월 삼성그룹 회장에 취임했다.
 
  이 회장은 1993년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모든 걸 바꿔라”라며 삼성의 질적 성장과 혁신을 선언했다. ‘프랑크푸르트 선언’으로 불리는 이 선언 이후 수년간 이건희 회장이 직접 진두지휘한 혁신은 ‘삼성 신(新)경영’으로 불리며 삼성을 국내 1위 기업으로 만드는 원동력이 됐다.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는 말도 이때 나왔다. 이후 삼성은 반도체 등 핵심 사업의 성장세를 이끌어냈고, 신경영 선언은 삼성 역사에서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삼성 신경영과 급성장의 원동력이 이건희 회장의 리더십이었다는 점에 의문을 갖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회장은 신경영에 나서면서 전자, 중공업, 금융, 유통, 생활 등 모든 분야를 철저하고 꼼꼼하게 챙겼다. 그룹 내 각사의 업무뿐만 아니라 그룹 전체의 신사업, 인사(人事), 부동산, 언론, 대관(對官) 업무까지 이 회장이 일일이 챙겼다.
 
  이 같은 사실은 이 회장이 비서실장과 나눴던 대화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 회장은 신경영 선언 4개월 후 비서실을 개편했다. 기존 조직으로는 강도 높은 개혁을 해나가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삼성그룹 공채 출신이 아닌 현명관 삼성건설 사장을 비서실장에 임명하고 삼성의 완전한 변화를 지시했다. 비서실은 이후 구조조정본부, 전략기획실, 미래전략실로 이름이 바뀐 삼성의 핵심 조직이다. 이 회장은 3년간 비서실장으로 일했던 현명관 비서실장에게 신경영의 ‘알파와 오메가(처음과 끝)’를 전수했다.
 
 
  피상적으로 알려졌던 이건희 회장의 진면목 드러나
 
1993년, 52세의 이건희 회장.
  그뿐만 아니라 이 회장은 비서실장에게 자신의 모든 업무 지시와 통화를 녹음하도록 했다. 녹음테이프를 남겨놓아 자신의 지시가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일이 없도록 한 것이다.
 
  이 회장은 “그룹의 목표와 회장의 경영철학을 실천하는 사람은 임원과 일반 직원들인데, 회장에서 비서실-사장-임원-직원으로 전달되는 동안 뜻이 왜곡돼서는 곤란하다”며 “내 얘기와 지시, 회의내용을 그대로 녹음해서 직원들 앞에서 틀어주라”고 당부했다. 임원과 직원들이 회장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실천하도록 하려는 뜻이었다.
 
  현명관 전 비서실장은 이 회장의 육성이 생생하게 담긴 녹음테이프 40여 개를 보관하고 있다. 이 회장은 당시 소니(Sony)의 최첨단 음향기기던 DAT(Digital Audio Tape) 플레이어를 사용했고, 측근과 가족들에게도 이를 사용하도록 했다. 테이프 내용은 이건희 회장의 업무 지시가 상당 부분이지만 그 외 한국 경제 전반에 대한 고민과 우려, 범(汎)삼성가에 대한 고민 등이 포함돼 있다. 범삼성가 이야기는 당시 삼성그룹 계열 분리 과정에서 업무상 녹음한 내용이다.
 
  현 전 비서실장은 이 회장 별세 후 깊은 고민 끝에 이 테이프의 내용을 공개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20년 넘게 테이프를 보관한 이유에 대해 “이건희 회장의 육성이 담긴 이 테이프들이 삼성의 자산이라 생각하고 언젠가는 돌려줄 생각이었다”고 했다. 그는 “신경영을 추진하며 처절하게 고민하고 연구하고 몸부림치던 이 회장의 모습을 생생하게 공개하고 싶었다”고 공개 이유를 밝혔다. 현 전 실장의 얘기다.
 
  “‘왜 이제와서 공개하느냐’는 오해의 소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회장의 육성 공개를 결심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그동안 피상적으로만 알려졌던 이건희 회장을 제대로 알리고 싶었습니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 같은 얘기만 알려지다 보니 요즘 사람들은 이 회장을 운 좋아서 혁신에 성공한 기업인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아요. 극히 한정된 어록만 나와 있어 이 회장에 대해 정확히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회장이 신경영을 추진하면서 얼마나 삼성의 미래와 국가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고 치열하게 미래 전략을 세웠는지 생생하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육성 공개는 이건희 회장의 진면목을 재조명하는 계기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지금처럼 한국과 세계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경영혁신을 추구하는 기업인들에게 이 회장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서입니다.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경영자가 새로운 전략을 모색하고 혁신을 하고자 하면 국내에서 가장 성공적인 경영혁신을 이뤄낸 이 회장의 이야기를 참고하는 게 도움이 될 겁니다.”
 
  테이프는 모두 이건희 회장이 신경영을 선언한 후 직접 그룹의 대소사를 챙기고 지시한 3년간(1993~1996년)의 것이다. 삼성의 자동차산업 진출 시도, CJ와 신세계의 계열 분리, 제일병원과 강북삼성병원 인수, 김영삼 정권과의 마찰 등 삼성의 굵직한 사건이 모두 이 시기에 일어난 만큼 삼성에는 격변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질풍노도를 헤쳐나가는 이 회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지면을 통해 소개한다. 녹음된 대화 및 전화통화 시간은 1000여 분(分)에 달하지만, 기업 및 집안 내부 사정과 관련한 내용은 일단 이번 호에서 제외했다.
 
 
  Part 1 세계 일류 기업을 만들기 위한 기업인 이건희의 일성(一聲)
 
이건희 회장이 1993년 6월 프랑크푸르트에서 임직원 간담회를 갖고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며 新경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육성녹음으로 느낀 이건희 회장에 대한 인상은 늘 차분한 목소리와 약간 느린 속도의 말투를 유지하며, 긴급하거나 심각한 사건에도 크게 언성을 높이거나 화를 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회장은 말수가 많지 않으며 절제된 언어를 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비서실장이나 사장단과의 대화에서는 소소한 일까지 하나하나 꼼꼼히 체크하며 자신의 의견을 길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였고, 감정적으로 자극을 받았을 때는 격한 단어를 내뱉기도 한다.
 
  대화에는 이 회장이 자주 사용하는 말버릇이 몇 가지 등장한다. 업무 지시를 할 때 “내 뜻을 아시겠지”와 “녹음하고 있나?”, 그리고 아이디어를 제시할 때 “연구해봐” 등이다. “빨리해”와 “무조건 해”도 종종 등장하는데, 말 그대로 이런 말이 붙은 지시사항은 1~2일 내로, 반드시 시행해야 하는 사항이었다. 이 회장은 사장단에게 업무 지시나 회의를 할 때 대체로 반말체를 사용하지만 동갑(1942년생)인 비서실장에게는 존댓말과 반말을 섞은 반(半)존대체를 사용했다. 기사에서는 편의상 전체를 반말체로 소개한다.
 
  이 회장은 업무 지시를 하지 않을 때도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비서실장을 찾았다. 현명관 비서실장을 임명한 지 얼마 안 된 시점(1993년 11월)에 이 회장이 새벽 2시 반에 비서실장에게 전화해 강조한 이야기다.
 
  “세계를 향한 전략을 짜야 돼. 마스터플랜을 만들어보자고. 세계 1위를 하려면 업(業)의 개념을 잘 연구해야 돼. 반도체건 브라운관이건 전술은 있는데 전략이 없단 말이야. 전략을 세우고 업의 개념을 세우고 설계, 생산성, 인건비, 물류, 데이터분석까지 쭉 해야 돼. 그리고 삼성에서 떼어낼 업종은 뭐냐, 삼성이 더 깊이 들어갈 업종이 뭐냐, 그 업에서 내 위치가 어디냐 이런 걸 완전히 분석을 해야 되고. 그리고 인력은 기초가 있으면 좋겠어. 중학교, 고등학교 때부터 똑똑한 아이들 골라서 거기(우리 업에) 맞춰가지고 키워야 된다고.”
 
 
  새벽에 전화해 “지금이 외자 유치 기회”
 
  “그리고 내가 늘 얘기하지만 100불짜리를 제발 80불에 팔지 말라는 얘기야. 80불짜리를 80불에 파는 건 좋다 이거야. 근데 덤핑은 하지 말라고. 우리 철칙은 싼 물건은 될 수 있는 대로 하지 말라는 거야. 정 하려면 철학이 있는 걸 해야지. 시계로 치면 스와치 같은 거, 플라스틱으로 만들지만 철학이 있는 저렴한 가격이거든. 싸게 많이 판다고 해도 철학이 있는 걸로 하자고. 될 수 있으면 삼성은 그런 건 안 하면 좋겠고. (신경영 선언) 1년쯤 지나니까 (사내)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어. 앞으로 우린 된다는 얘기야. 전략만 잘 세우면 된다고.”
 
  “삼성은 삼성다운 걸 하면서 세계 일류, 고부가가치를 만들어야 돼. 이런 큰 전략을 만드는 회의를 일 년에 여섯 번쯤은 해야 돼. 틀만 만들어놓으면 그 방향으로 쭉 가면 되거든.”
 
  “다들 5년 후 10년 후에는 뭘 할지 걱정은 하고 있나? 각 팀 각 부서에서 매일 걱정해야 돼. 시뮬레이션은 하고 있나? 생각해본 적도 없는 거 아냐? 일본 일류 회사들은 직급별로 내년에 뭘 할지를 다 파악하고 있어. 우리는 사장 중역들도 내년에 뭘 할지 모르고 있단 말이야.”
 

  이 회장이 ‘문득 생각나’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하는 경우는 대부분 그 주제가 ▲한국 경제는 앞으로 무엇을 먹고살 것인가 ▲사람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 ▲엔고 현상을 어떻게 활용해 우리 경제를 성장시킬 수 있나 등이었다. 1993~1994년은 일본 엔(円)화가 가치 절상된 엔고(円高) 현상이 지속됐다. ‘잘나가던’ 일본 경제의 위기였다. 이건희 회장은 엔고 현상에 대해 누구보다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엔고를 기회로 외국 회사, 특히 일본 회사의 생산시설 등 외국자본 유치를 서둘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이나 미국, 선진국 기업들을 끌어들일 기회야. 그들 입장에선 한국이 이뻐서가 아니라 한국밖에 안 되는 게 몇 가지 있거든. 중국, 동남아에는 조선, 철강, 자동차 같은 투자집약적 산업이 준비가 안 돼 있어. 투자에 고임금 노동을 필요로 하는 산업이거든. 이런 업종을 지금 우리가 잘 하면 제대로 끌어들일 수 있는데. 정부가 한일관계 끊어놓으면 엄청난 손해가 생길 거라고.”
 
  한번은 해외 출장 중인 비서실장에게 전화해 약 한 시간 동안 엔고 현상 대책을 논의하기도 했다.
 
  “내가 전화한 건 말이지. 엔고가 자꾸 확대되잖아. 그러면 일본의 기계, 전자, 철강, 자동차 산업이 빠져나가지 않을 수가 없어. 무엇보다도 전자는. 지금이 좋은 기회니까 연구를 해보라고. 도시바, 미쓰비시, 샤프 이런 데다 냉장고, VTR 같은 건 우리나라에서 만들어 가라고 하는 건 어때.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잖아. 알아보라는 정도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들어가라는 얘기야.
 
  일본 기업들은 지금 언뜻 중국 같은 데 나가려는 발상을 하겠지. 그런데 그걸 우리가 가져온다고 해봐. 거제조선소 같은 데서 만들어서 바로 배로 싣고 가버리면 그날 도착하잖아. 서로가 이익이 된다고. 저쪽(일본 기업)은 싸게 만들면서 우리가 경영하고 생산하면 안심이 되잖아. 동남아나 중국으로 가면 얼마나 신경 쓰이겠냐고. 우리가 하면 단순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이 아니지. 단순 OEM은 저쪽도 관심 없지 않겠어? 내가 말한 이런 식으로 저쪽을 설득해야 돼. 이사급, 상무급에서 자꾸 만나라고.”
 
  “전문가를 통해서 삼성 이미지메이킹을 하는 걸 검토해봐. 미국에다 삼성 PR을 해야 되겠어. 실패하면 몇백만 불 날리는 거지만 이런 건 성공하면 몇만 배, 몇십만 배의 성과가 되는 거야. 국내에서 하는 것보다 그게 훨씬 효과적이거든.”
 
  “정보가 요즘 구태의연해. 세계 변혁을 분석하고 예측을 해야 되는데 정보가 한때 반짝하더니 요즘은 신문 1면 톱 소개하는 수준이야. 해외 경제연구소, 주간지, 월간지, 경제지 같은 걸 다 분석해보라고. 비서실에 팀 하나 만들어서 정보 분석하고 각 사에 나눠줘.”
 
인간 이건희의 취미
 
스포츠에 관심이 지대했던 이건희 회장은 IOC 위원직을 맡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도 기여했다. 2011년 7월 6일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평창의 2018 동계올림픽 유치가 확정되자 이 회장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건희 회장은 인터뷰도 거의 하지 않고 대중 앞에 모습을 보이는 일이 많지 않아 그의 개인사가 그의 입을 통해 직접 알려진 경우는 드물다. 유일하게 이건희 회장의 취미 등 개인사가 알려진 인터뷰가 《월간조선》 1989년 12월호 ‘오효진의 인간탐험’ 이건희 인터뷰다. 당시 이 회장은 기자와 신라호텔부터 한남동 집까지 하루 종일 함께하며 이런저런 속내를 털어놓았다.
 
  이 회장의 개인적 관심사는 애견, 영화, 자동차, 스포츠였다. 어린 시절부터 성격이 외향적이기보다는 내성적인 편이어서 혼자 즐기는 취미와 관심사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회장은 어릴 때부터 개를 무척 좋아했고 삼성에 입사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1975년에는 진돗개애호협회 회장을 맡기도 했고, 삼성 안내견학교를 만들고 세계 유수의 도그쇼(dog show)에 삼성이 직접 후원할 정도로 애견인으로서의 활동이 적지 않았다. 한남동 집에서 100마리가 넘는 개를 키우다 이웃의 지적에 개들을 에버랜드로 보냈다는 일화도 있다.
 
  영화를 매우 좋아해 비디오테이프를 엄청나게 수집했다는 사실도 《월간조선》 인터뷰를 통해 알려졌다. 자동차에도 어린 시절부터 관심이 지대해 10대 시절 운전을 하기도 하고, 자동차를 분해한 경험도 있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삼성이 외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동차산업에 진출하려 한 것도 이 회장이 원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돌기도 했다.
 
  스포츠에도 높은 관심을 보였다. 고등학교 시절 레슬링부에서 활동한 이 회장은 회장 취임 후에 삼성의 스포츠도 1등으로 만들겠다고 결심하고 야구·농구 등의 종목에 대한 투자와 인재 스카우트에 관심을 쏟았다. 스포츠가 국제교류와 세계평화에 기여한다고 여긴 이 회장은 IOC 위원이 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삼성은 1997년부터 올림픽 스폰서로 활동했고, 이 회장은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꾸준히 스포츠 외교 활동을 펼쳐 평창이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Part 2 人事를 중시한 이건희
 
1996년 여름 애틀랜타올림픽 관련 행사에 참석한 이건희 회장(오른쪽)과 현명관 비서실장.
  이건희 회장은 계열사별 임원 상여금 차별화, 고졸사원 승진 기회 확대, 해외 주재원 이중급여 문제 시정 등 인사(人事) 관련 문제에도 직접 나섰다. 평소 하던 얘기는 이렇다.
 
  “사람이 제일 중요해. 절대로 파벌 만들면 안 돼. 하나회 같은 거 보라고. 사람은 주기가 있어서 잘될 때가 있고 안 될 때가 있는 거야. 잘될 때 이쁘다 하고 안 될 때 밉다 하고 이런 거 하지 말라고. 실수하면 바로 바꿔버리고 그러면 사람이 클 수가 있나. 인간이 일 년에 석 달 꽃 피지 못해. 내 경험상 그래. 결단 잘되고 좋은 결과 나오고 하는 게 일 년에 두 달 하기 힘들다고. 잘못되고 사고 나면 빨리 수습하고 반성하고 기록하면 돼. 그걸 숨겨놓는 게 나쁜 거지.”
 
  그는 직접 나서서 급여체계를 개선했다. 먼저 같은 수준으로 맞춰져 있던 계열사 사장단의 상여금에 차등을 둘 것을 지시했다.
 
  “능력 있는 사람과 아닌 사람의 갭(gap)을 크게 하라고. 계열사별로 하는 일이 다르잖아. 일에 따른 대우를 해줘야 일할 맛도 나는 거 아냐. 나랑 윗사람이랑 평가 기준이 달라서 헷갈린다 하면 의논하면 되는 거고. 불만 있을까 봐 겁낼 필요 없어.”
 
  이후 상여금 차등화는 임원과 사원까지 시행됐다.
 
  이 회장은 그때까지 대졸 사원과 고졸 사원의 승진과 급여 등이 현격하게 차이 나고 있는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직접 지시를 내렸다. 비서실장에게 한밤중에 전화해 한 이야기다.
 
  “쭉 생각해본 거 결심을 했는데. 고졸 중 실력 있는 이는 정직하게 올려주자고. 과장이든 부장이든 이사든 달아줄 수 있어야 돼. 혼다(Honda)가 그러고 있다는데. 혼다는 입사를 하면 학력을 다 없애버린다네? 누가 고등학교를 나오고 대학을 나왔는지 전혀 따지려 하지 않고 따지지도 않는대. 그게 오늘날의 혼다를 만든 전부는 아니지만 원동력 중 하나야.
 
  우리는 직반장(편집자 주: 공장 등 생산현장의 직급)들이 올라가지도 못하고 손해 보고 있는 거 아니냐고. 10년을 일해도 4급이고 잘해야 3급(편집자 주: 삼성 직급 기준)이잖아. 승진을 시키자고. 다만 조건을 영어나 일어 2급 이상으로 하면 돼. 다른 외국어도 좋고 영어나 일어면 더 가산점을 주고. 또 신경영을 얼마나 잘 이해하는지 시험을 보는 거지. 신경영 책자 안에서 문제를 내 시험 보게 하고 예를 들어 80점 이상이면 승진 조건이 된다든가. 직반장들이 승진을 못 하니 대졸 사원들에게 콤플렉스가 생기잖아. 이걸 바꾸려면 임원들부터 교육을 시켜야 돼. 고졸을 고졸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편집자 주: 익명처리) 알지. 얼마나 일 잘해. 그런데 이 친구 지금 제일 겁내는 게 삼성은 대졸 아니면 안 된다는 거야. 물론 우리는 대졸이면서 아주 우수한 사람들도 필요하지만 그건 0.1%에 불과하잖아. 설계나 개발, 디자인은 대졸이 한다 해도 그게 전부는 아니니까. 다만 고졸 승진에는 외국어 우수, 신경영 시험성적 우수라는 조건을 붙이면 되겠지.”
 
  비교적 방만하게 운영되던 주재원 시스템도 국제화에 발맞춰 시정을 지시했다.
 
  “(주재원이) 해외 나가면 현지에서도 받고 국내에서도 월급이 100% 나가잖아. 이게 어디서부터 생긴 역사고 왜 그렇게 된 거지? 우리가 앞으로 국제화를 제대로 하려면 다른 나라는 안 하는데 우리만 하는 건 곤란해. 그만큼 손해 보고 들어가는 거잖아. 기업경쟁력이 약화되는 거야. 그룹 주재원으로 나갔는데 소속은 원래 다니던 회사인데다 거기에서 월급 주다 보니까 소속감은 그 회사로 가잖아. 이 제도는 없애고 다 현지에서 줘버려. 외환자유화도 됐으니까 현지에서 받고 한국에 처자식이 있건 부모가 있건 그쪽으로 보내주면 되잖아.”
 
 
  “미국 대기업의 한국인 찾아서 스카우트하자”
 
현명관 전 삼성그룹 비서실장이 보관하고 있는 이건희 회장의 육성 녹음테이프들.
  그는 삼성이 처음 시작하는 업종인 삼성자동차의 인재를 구하는 데 총력을 다하라며 구체적인 지시를 하기도 했다.
 
  “닛산하고는 제휴하고 있지만 마쓰다, 도요타 이런 (자동차)회사에서도 뽑아오고. 미국 자동차 ‘빅3(포드・GM・크라이슬러)’에 한국 사람이 꽤 있을 거야. 다 찾아내. 보통 수준으로 시작해서는 현대차하고 경쟁할 수 있겠냐고. 사람 뽑는 데 총력을 다해야 돼. 미국 자동차 회사에서 한국인 데려오는 방안 추진하고, 물론 미국 사람이라도 오겠다면 좋고.
 
  그리고 자동차도 디자인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지. 앞으로 디자인 경쟁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쪽(외국의 자동차 디자이너들)은 한국을 좀 무시할 거야. 그러니까 우리가 그런 외국의 디자인학교를 들여오려고 해. 근데 아무리 좋은 학교라도 배우는 사람이 받아들일 능력이 없으면 안 되잖아. 자동차 총괄할 인물로 일본이나 미국 사람도 찾아봐. 한국에 그런 사람 있다면 현금 100억원이라도 주고 데려오고 싶어.
 
  신입사원도 마찬가지야. 안 되면 교육이라도 제대로 시켜야 된다고. 고졸·대졸 사원들을 100명 이상씩 닛산에 상주시키는 거지. 월급은 우리가 주고. 거기서 일 배우고 일 해주고 오도록 하자고. 발상이 말랑말랑하지 않으면 절대 안 돼.”
 
  이 회장의 인사에 대한 관심은 제조업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는 프로야구 구단 삼성라이온즈의 인적 개혁도 요구했다. 모든 분야에서 ‘1등 삼성’을 원한 이 회장은 삼성라이온즈가 1위를 하지 못하는 점을 안타까워했다.
 
  “해태(타이거즈)는 외국에서 선수 데려온다며. 야구가 (기업) 이미지에 상당히 중요한 거라고. 전략·전술이 필요해. 가능성이 있다면 몇십억 투자하는 건 문제가 아냐. 2급 인재 10명을 10억에 뽑는 것보다 A급 인재 한 명을 15억에 뽑는 게 낫거든. 운동도 그래. 야구뿐만 아니라 농구, 탁구 다. 근데 이건 내가 프로야구 생길 때(1982년)부터 얘기한 거거든. 왜 그렇게 말을 안 듣지. 잘하는 사람은 공정한 기준으로 막 올려주라고 해. 그런 제도를 만들겠다고? 당연히 만들었어야지.”
 
  그는 ‘1등 삼성’ 유지를 위해 그룹 임직원들의 마음가짐과 자세를 중시했다.
 
  “금년에 전무급 이상 한번 정신교육 시키는 걸 연구해봐. 부장급 이상에게도 위기의식을 한 번 더 주입해서 상품이나 서비스의 질도 올리면서 혁신을 계속하도록 해야 돼. 금년 말까지의 계획하고 내년에 해야 할 일 계획도 다시 체크해봐.”
 
  삼성의료원 의사들에 대한 처우도 직접 언급했다. 후발주자인 삼성의료원이 1위가 되기 위해서는 임직원 처우 개선과 서비스 개선, 혁신 등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내 주치의가 여비서 한 명 부탁했다는데 한 달 반이 걸렸대. 비서 한 명 똑똑한 사람 보내주면 의사들은 하루 두세 시간을 더 진료나 연구에 쓸 수 있다고. 의사 몸값이 얼마야. 어렵게 데려와서 너무한다는 말이 안 나오겠어? 의사들은 직장인하고 달라서 불만이 있어도 말을 안 하거던. 말 안 한다고 불만이 없는 걸로 착각하면 안 돼. 의사란 미리 알아서 대우해주면 신바람이 나서 일할 수 있는데 뭔가를 해달라고 해서 해주는 건 이미 늦은 거야. 의사가 화를 내면 인연 끊을 때가 된 거야. 이런 걸 과연 알고들 있나.
 
  삼성의료원은 지금 돈은 돈대로 쓰고 욕은 욕대로 먹는 거야. 생색은 전혀 안 나고. 의사들이 원하는 건 학회 나가고 논문 쓰고 그런 걸 지원받는 건데 그것도 제대로 안 되고. 지금부터라도 의사들 어떻게 지원해줄지 조사해서 진행해봐. 신바람 나서 일하게 해줘야 한다고. 또 삼성의료원은 의사가 촌지를 안 받게 돼 있잖아. 다른 병원하고 비교하면 불만이 생길 수 있어. 학회나 세미나 지원 같은 걸 충분히 받고 있는지 검토해봐. ”
 
 
  Part 3 단호한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들
 
이건희 회장은 반도체가 한국 경제의 미래를 이끌 것을 예견했다. 사진은 2004년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방문한 이 회장.
  이건희 회장은 위기관리에는 단호한 모습을 보인다. 1996년 5월 삼성건설이 참여한 춘천 통신선로 매설 현장에서 발생한 가스파이프 폭발 사고 당시의 발언이다. 당시 땅을 파던 인부가 가스파이프 주변 1m는 파선 안 된다는 원칙을 지키지 않고 작업하다 파이프를 건드려 가스가 유출된 사건이다.
 
  이 회장은 이 보고를 받고 격분한다. “또 사고가 났네. 그런 수준이면 건축을 하지 말아야 되는 거야. 최종 도장 찍은 사람이 누구야? 어디서 온 사람이야?” 비서실장이 “해당 본부장은 삼성그룹 공채 출신이며 원래 우리가 지하굴토공사는 하지 않지만 인근 지하상가 공사가 연결돼 있기 때문에 (우리 하청업체가) 하는 김에 하다 사고가 난 것”이라고 설명하자 이 회장은 “그래서 내가 하청업체 잘 쓰라고 몇 번을 얘기해, 뭐 하는 사람이야?”라고 힐난했다.
 
  이어 비서실장에게 이렇게 지시한다.
 
  “그룹 사장, 대표이사 다 모아놓고 설명해. 이런 식으로 계속한다면 사업 끝낸다고. 오늘 사장단 회의 했다고? 내일 또 한 번 해. 자필(自筆)로 나한테 이렇게 하겠다고 쓰라는 거야. 이렇게밖에 못 하겠다 하면 내가 오늘부로 나간다고. 내가 여러분들한테 내 신임을 묻겠다는 거야. 이게 몇 개월 안에 안 고쳐지면 나는 정말 관두고 명예회장으로 남든지 할 거야. 이런 사고가 이미지를 얼마나 나쁘게 해. 회장이 사고 수습하고 있어야 돼? 회장은 기업 장래를 생각하고 전 임직원 복지를 생각해야지 장사만 하려고 있는 게 아니라고.”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거기 도장 찍은 사람하고, 도장 안 찍어도 알고 있었던 사람은 다 인사 조치해, 책임자는 싹 대기발령을 내놔. 뒷다리는 잡지 말아야 할 거 아냐.”
 
 
  “이런 식이면 회장이 왜 필요해?”
 
1995년 3월 9일 삼성전자 구미 사업장에서 이건희 회장의 지시로 직원들이 불량 휴대폰·팩스·전화기 등을 태우는 이른바 ‘애니콜 화형식’을 진행했다.
  이 회장이 격분한 사례는 또 한 번 있다. 경남 창원의 삼성중공업 직원들이 경쟁사인 한국중공업 사업장에 들어가 무단으로 사진을 찍는 사건이 발생했다. 한국중공업은 기업비밀을 침해했다며 삼성 측 직원들을 고발했다. 당시 공단의 각사 직원들은 타 사업장에 들어가거나 사진 찍는 것을 심각한 잘못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 사건을 보고받은 이 회장은 “물건 안 나와도 좋으니까 싹 정리를 해버려”라며 화를 낸다.
 
  “이러면 비서실이 있으나 마나 한 거 아냐? 회장 말 안 듣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뭐냐고. 이런 식이면 회장이 왜 필요해? 언론에 나오고 안 나오고의 문제가 아냐. 내가 물러나든, 니들이 물러나든, 회사 해체하든가 셋 중의 하나로 하자고. 사진을 왜 찍어? 선진국 가서 제휴해서 당당하게 기술 가져올 수 있잖아? 각 라인 이사, 전무 다 뭐 하는 거야. 어떻게 과장이 침투를 해? 전부 다 비장한 각오를 안 하고는 안 된다고. 말로 해도 안 되고 설득해도 안 되고 교육해도 안 되고 난들 어떡하라는 얘기야?”
 
  이어 이 회장은 평소와 달리 한탄을 한다.
 
  “(직원들에게) 내가 화났다 하지 말고 내 부덕이니 내가 물러나야 되겠다고 해. 아 정말. 그런 정신 가지고는 안 돼. 이런데 집에서 자식이 말은 듣겠어? 이래갖고 자동차 한다고 나서는 내가 참….”
 
  이 회장은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해당 공장(삼성중공업 1공장) 폐쇄를 검토한다.
 
  “우리 임직원에게도 경종을 울리는 거야. 삼성은 이런 짓 하려면 사업 안 하는 게 낫다는 걸 이야기하려는 거지. 우리 임직원을 보호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남의 임직원을 다치게 하는 업종은 문을 닫는다는 걸 보여줄 거라고. 빨리 회의해서 결정하고 신문광고부터 해. 삼성의 21세기 목표는 임직원과 주주 모두가 함께 행복하자는 거거든. 사람을 다치게 하고 사회 혼란을 가져오는 업종은 포기할 거야. 법조팀이랑 다 모아서 검토하고 광고문구 만들어서 빨리 발표해버려.”
 
  한번은 삼성의료원을 이용했던 환자 가족이 병원 측의 대처에 컴플레인하는 편지를 이 회장에게 보낸 일이 있다. 내용은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지만 의사의 진료 태도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편지 온 거 말이지. 잘 조사해서 그게 사실이면 끝까지 책임져야 돼. 선의의 피해자면 부장급이 과일값을 가져가서 사과를 하고 입원비를 돌려줘. 삼성의료원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면 삼성 비서실에서 사과하고 입원비를 물어준다는 걸 보여줘야지. 관리자들이 창피해하도록 해야 돼. 삼성은 이런 일도 간단히 넘어가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자고.”
 
  이런저런 사고를 겪으면서 이 회장은 “원래 나는 사업가 체질이 아니다”라며 부담감을 토로하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춘천 가스파이프 사고를 보고받은 직후의 얘기다.
 
  “늘 얘기하지만 나는 사업가 스타일이 아냐. 위에 두 형제가 사정이 그렇다 보니 내가 할 수 없이 맡은 거야. 원래 내가 맡은 건 동방생명, 중앙개발, TBC 라디오 정도였다고. 난 그 외에는 92년까지는 관심도 없었어. 지금 반도체 잘되고 이익이 몇조원이 나고 하니까 다들 내가 기분 좋아하고 들떠 있는 걸로 생각하고 있겠지. 하지만 나는 더 불안해. 맨날 사고 수습이나 하고 있으니 더 그런 걸까.”
 
삼성 신경영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는 말로 대표되는 삼성 신경영(1993~)은 국내 기업의 패러다임을 바꿨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건희 회장은 1987년 회장직에 오른 후 1988년 3월 삼성 창립 50주년 기념식에서 제2의 창업을 선언했다. 당시 이 회장은 1990년대에는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 기업으로 발전시키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제2의 창업 선언 이후 5년이 되도록 삼성의 변화는 이 회장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이 회장은 ‘전부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심으로 신경영을 계획했다. 특히 1990년대 초 해외 가전 매장에서 삼성 제품이 먼지를 쓴 채 처박혀 있는 것을 보고 이 회장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신경영의 두 가지 핵심은 ‘다 바꿔라’와 ‘양보다 질(質)’이었다. 혁신과 품질경영을 중시했던 이 회장의 신경영은 1995년의 ‘애니콜 화형식’으로 정점에 달하며 국민들에게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게 된다. 이 회장은 그해 설날 휴대폰(삼성 애니콜) 2000대를 임직원들에게 선물로 돌렸는데, 통화가 잘 안 되고 통화품질이 좋지 않다는 등 좋지 않은 반응이 나오자 “시중에 나간 제품을 모두 거두어 공장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태워버려라”고 지시했다. 1995년 3월 9일 당시 15만 대, 150억원어치의 휴대폰이 ‘화형(火刑)’을 당했다. 이 장면이 보도되면서 삼성 임직원은 물론 국민들도 이 회장의 강력한 의지를 생생하게 느끼게 됐다. 이 사건이 현재 애플과 세계 휴대폰 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삼성전자 ‘갤럭시 신화’의 기초가 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특히 이건희 회장은 현재보다 미래를 내다보고 기업을 경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장의 매출보다는 수출 확대, 기업가치 확대에 더 총력을 기울였다. 글로벌화에도 앞장서 1994년과 1995년 일본, 미국, 유럽, 중국 본사를 설립해 글로벌기업의 틀을 마련했다.
 
  경영진뿐만 아니라 직원들의 생활도 바뀌었다. 삼성은 1993년 7월 전 계열사 조기출퇴근제(7~16시)를 실시하고, 1995년에는 여사원 근무복장을 자율화했으며, 공채 필기시험을 전면 폐지했다. 고졸 사원 채용 및 승진제도를 처음 개선한 기업도 삼성이다. 이 회장은 “대학 졸업장과 관계없이 입사할 수 있는 기회를 동일하게 주고 입사 후 승진, 승격에도 차별이 없도록 해야 한다”며 “삼성의 입사 기준은 학력이 아니고 실력”이라고 강조했다. 삼성의 신경영은 다른 기업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Part 4 미래를 예측한 이건희
 
이건희 회장은 국제화에 대비해 삼성이 세계 일류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은 2012년 삼성전자 베트남 사업장을 방문한 이 회장.
  이 회장은 항상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갖고 향후 수십 년간의 계획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자동차산업 외에도 특히 제약업, 의과대학에 관심이 컸다.
 
  “철강, 반도체, 자동차, 전자 같은 투자집약적인 대형 산업하고 도로 같은 인프라를 지금 다 해놓지 않으면 후대에서 원망을 들을 수도 있어. 지금 제1, 제2 이동통신 나오는데 앞으로 제4, 제5 이동통신 시대로 갈 거야. 일본, 미국도 그렇게 가고 있고. 20세기 초반에 해야 할 인프라가 지금 제대로 안 돼 있다면 지금 빨리 해야지 21세기로 넘길 순 없잖아. 그렇게 되면 돈은 돈대로 모자라고 사람은 사람대로 모자란다고.”
 
  이 회장은 제약산업이 미래산업이라고 판단하고 병원을 기반으로 제약산업에 진출하고 싶어 했다. 해외 유수의 제약회사 인수 등의 방법으로 1등 제약회사를 만드는 게 목표였다. 외국 제약회사 인수, 국내 제약회사 인재 스카우트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의료산업은 21세기에 꽃이 필 거야. 지금은 의료산업이 적자라 하지만 소득이 올라가면 의료비가 국방비같이 자꾸 올라가게 되거던. 생산으로 돈을 버는 건 메모리(반도체)가 마지막일 거야. 미래를 보지 않고는 크게 돈 벌 수 있는 게 없어. 특히 길게 보고 준비해야 할 건 제약산업이야. 우리 병원(삼성의료원)이 있으니 제약도 최고급으로 해서 진출해야지. 일단 해외 특허부터 확보하고. 지금 외국 제약회사들 매물로 나와 있지 않나? 독일, 이태리, 스위스 이런 나라의 세계적 제약회사 하나 사는 것도 생각해봐.”
 
 
  “존스홉킨스와 합작해 한국에 의대 만들자”
 
이건희 회장은 임직원들에게 “의식주와 건강, 자식교육을 삼성의 영역으로 갖고 오겠다”며 가족을 중시하는 발언을 자주 했다. 2010년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가전전시회(CES 2010)를 가족과 함께 찾은 이건희 회장.
  “우리 병원이 있으니 제약연구소하고 의료기기연구소를 만들자고. 그룹 총동원해서 신약을 사 오든 특허를 사 오든 최고 수준으로 해야 돼. 1년에 1000억원 집어넣을 각오하고 제약회사를 사든가. 서울대 약학과 출신들이 오고 싶어 하는 연구소를 만들어야 돼. 제약연구소, 의료기기연구소, 병리학연구소를 같이 만드는 거지. 보통 병원에 병리학연구소는 있는데 제약연구소나 의료기기연구소는 없잖아. 이걸 우리가 제일 먼저 만들어보자고. 우리가 4000만 우리 국민의 건강을 위해서 해야 되는 거야.”
 
  회장 취임 후 제일병원과 고려병원(現 강북삼성병원)을 인수한 그는 의과대학 신설도 추진하려 했다.
 
  “의과대학을 단독으로 만들자고 내가 그랬지. 포항공대식으로 키우자는 거야. 장학금 다 주고 생활비 다 주고 천재들을 모아오는 거지. 서울의대 갈 전국 1등은 안 온다 해도 2~5등은 우리에게 올 만한 그런 의과대학이 생겨야 돼.”
 
  그러나 자동차산업 진출에 기존 업체들의 견제가 심했던 상황에서 의대 신설에도 기존 의대들의 반발이 거셀 것을 우려했다.
 
  “의과대도 이권으로 보나? 외국으로 가는 것도 생각해보자고. 일본이나 미국 유명 의대와 국내에 공동 의과대학을 만드는 건 어떤가? 미국 존스홉킨스(Johns Hopkins University) 의대를 한국에 들여오면 어때? 안 된다면 학원 형식으로 들여와서 3+3으로 여기서 3년 영어로 수업하고 미국에서 학위 받는 걸로 하면 서울대보다 낫지 않나 싶은데. 존스홉킨스가 어찌 나올지 분위기를 살펴봐. 이름 없는 신설 학교 만드느니 존스홉킨스랑 합작해서, 디자인학교(SADI: 삼성이 1995년 설립한 삼성디자인학교)처럼 교육계에 혁명을 한번 일으켜보자는 거야. MIT(매사추세츠 공대)하고 합작해서 공대를 만들든가. 중국도 한번 살펴봐. 중국은 한방의학도 강하고 기초물리학, 생물학, 생태학 그런 게 강하니까 참고할 게 있을 거야.”
 
  의과대학이 현실적으로 어려울 경우에 대비해 간호대학을 운영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간호대학은 우리가 인수할 수 있지 않나? 적십자간호대학은 어떤가?”
 
  “간호대학을 인수해 4년제로 만들고 우리 병원 검진센터하고 연계해보자. 땅은 있잖아.”
 
  삼성은 실제로 적십자간호대학 인수를 추진하기도 했지만 여러 이유로 성공하지 못했다. 적십자간호대학은 2011년 중앙대와 통합돼 중앙대 간호학과가 됐다.
 
이건희 회장은 의료 및 제약 산업이 크게 성장할 것으로 보고 병원과 의과대학, 제약회사에 높은 관심을 보였다. 서울 강남구의 삼성서울병원.
  이 회장의 부인 홍라희 전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도 병원 운영에 아이디어를 냈다. 홍 전 관장은 비서실장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우리나라 여성들이 종합검사를 받는 비율이 낮아요. 자궁암이나 유방암 검사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상류층 여성들이야 다 하겠지만 중산층 이하 여성은 아직 많이 접하지 못하거든요. 미리 발견하면 다 고칠 수 있는데 사망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네요. (삼성의료원에) 여성클리닉을 만들면 어떨까 합니다. 암 조기발견센터, 갱년기센터 이런 걸 만들고 여성클리닉을 특성화시키면 여성들이 가족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크니까 좋지 않을까요? 지금 제일병원이 그런 걸 잘하고는 있는데 그 규모로는 전국을 커버하기는 어려울 거 같아요. 삼성생명 전국 조직을 통해서 조기발견이 얼마나 중요한지 교육도 하고, 지방을 순회하면서 암검사에 대해 알리는 캠페인도 하고요. 어머니 건강을 위한 센터라는 슬로건을 만들면 호응이 있을 것 같아요.”
 
  이 회장의 미래에 대한 예측은 물부족 현상, 언론의 미래, 가족 등 분야를 가리지 않았다.
 
  “요즘 물 모자란다는 얘기 들리는데. 예전에 내가 크게 (물 관련 사업) 한번 하자고 했었잖아. 지금 이 타이밍에 구체적으로 연구해야지. 지하우물 이런 데 1000억, 2000억 쓰라고 내가 얘기했었지? 21세기를 대비하는 입장에서 물이 얼마나 중요한데. 국제화가 되면서 농촌도 변화가 생길 거고 에너지와 물은 엄청나게 더 중요해질 거야. 이런 거 배우는 해외 시찰에도 돈 좀 쓰라고.”
 
  언론에 대한 우려도 얘기한다.
 
  “96년 지나면 사회 전반이 국제화될 건데 언론이 국제화의 질을 높이지 않으면 독자들이 안 보게 돼. 여기에 대비하고 힘을 넣어야 한다고. 3~4년 후면 완전히 국제화가 될 텐데 우리 언론들이 여기에 대한 대비가 없어.”
 
  당시 삼성 계열사였던 《중앙일보》에는 이렇게 당부하기도 했다.
 
  “(기사를) 잘 쓰는 것도 잘 쓰는 거지만 남을 해코지하고 기분 나쁘게 쓰는 건 잘 쓰는 게 아니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안 지켜지는 건 지적해도 돼. 그런데 그런 건 제대로 못 쓰면서 별거 아닌 걸 공격하는 건 안 되는 거야.”
 
  이 회장은 임직원들의 복지에도 각별히 신경을 썼다.
 
  “회사는 임직원 의식주, 건강, 자식교육 이런 걸 회사의 영역으로 갖고 와야 돼. 지금 월급 많이 받고 물리적으로 잘살아봤자 몇 년 가겠어. 희망이 있어야 되고 자식이 잘 자라줘야 되고 부모가 편안해야 되지. 노인과 아이들을 중요시하지 않는 나라는 망하게 돼 있어. 젊은 사람들이 전부 도망가버린다고. 내가 사업이나 공장을 할 때마다 노인정, 탁아소 만들라는 게 그 얘기야.”
 
 
  “정부는 왜 자꾸 기업을 압박하는 거지?”
 
  한편 김영삼 정부가 기업과 경제에 대한 개념이 부족하다며 한탄하기도 했다.
 
  “내가 더 걱정하는 건 다음 세대야. 자동차만 아니라 반도체, 철강, 중화학공업을 탄탄하게 해놓지 않으면 경제회복이 절대 안 되게 돼 있어. 지금 경기가 괜찮게 느껴지는 건 5공, 6공에서 워낙 좋지 않았고 지금 엔고(高) 현상 때문에 반짝하는 것뿐이지. 97~98년 되면 기본 경쟁력이 안 돼서 진짜 불경기가 오게 돼. 대통령 탓 할 수도 있다고. 이런 걸 걱정하는 건데 말이야. 국내 산업이 공동화되면 어쩔 건지. 미국은 10~20년 전에 공동화돼서 경제가 펑크 났잖아. 2000년을 바라보는 시대에 그러면 어떡할 거냐고.”
 
  “대한민국에 몇 사람 빼놓고 나라 걱정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어? 다 자기 잘살 생각뿐이지. 언제부터 이리됐는지 모르겠어. 정치를 아무리 잘해봐야 경제가 안 되면 안 되는 거잖아. 관리고 정치인이고 문제야. 경제인과 정치인의 차이점이 그거지. 결국 정치인들은 애국논리고 경제논리고 상관없이 정치논리에만 움직이는 거지.”
 
  삼성은 자동차산업에 대한 정부 허가를 받지 못하면서 청와대와 긴장관계가 계속됐고, 문제의 ‘베이징 발언’, 즉 이 회장이 “정치는 4류, 관료는 3류, 기업은 2류”라고 기자들 앞에서 말하는 사건이 터지면서 삼성은 청와대와 갈등관계에 빠졌다. 이 회장은 자주 비서실장에게 이와 관련한 괴로움을 토로했다.
 
  한번은 삼성이 서울 강남구 도곡동의 땅을 매입한 사실에 대해 청와대에서 “외부에서 좋지 않게 보고 있다”는 경고가 들어오자 이 회장이 분노하기도 했다.
 
  “우리가 수원하고 기흥에 사업장이 있으니까 강남에 제조업 센터를 만들고 복합화하려고 하는 거지 무슨 삼성이 부동산 투기라도 하나? 정부가 요구하는 업종 전문화를 계속할 뿐이잖아. (한숨) 우리 투자를 해외에 집중하는 건 어떤가. 정부는 국내 산업공동화는 생각 안 하나? 농사짓는 땅도 농민이 3년 농사를 안 지으면 그다음엔 농사를 못 지어. 기업이 경기를 계속 가져가려면 일을 계속하고 투자를 계속해야 되는 건데 왜 자꾸 기업을 압박하는 거지? 기술자들 다 흩어놓으면 다시는 기업 못 한다고.”
 
  또 “이미 청와대는 권위주의에 물들어 있다”며 “나는 그거(권위주의) 안 되려고 몸부림치고 있는데, 그게 4년 후 관둘 사람과 기업주의 차이 아니겠느냐”라고 했다. “자동차사업 하겠다는 게 나쁜 짓 하는 게 아닌데 왜 못 하게 하는 거지?”
 
 
  Part 5 삼성은 왜 자동차사업에 뛰어들었나
 
  1990년대 중반 ‘일류 삼성’을 추구한 이 회장이 가장 공을 들인 신(新)사업은 자동차였다. 삼성의 자동차사업은 삼성의 흔치 않은 실패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
 
  1990년대 중반 삼성은 자동차사업을 시작한다고 선언한 후 기존 자동차업계와 김영삼 정부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고, 이 때문에 김영삼 정부와 길고 긴 밀당(밀고 당기기)을 하다 불편한 관계에 놓였다. 일각에서는 ‘삼성이 국내 모든 산업을 독식하려 했다’ ‘이 회장이 개인적으로 자동차를 좋아해서 되지 않을 일에 무리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 회장은 자동차사업을 왜 하려 했는지,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책임감과 고뇌를 비서실장에게 여러 차례 털어놓았다.
 
  이건희 회장은 삼성이 자동차산업에 진출해 국내 자동차회사의 경쟁력을 높이고 해외로 진출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삼성의 자동차산업 진출은 기업이나 개인의 욕심이 아닌, 한국의 산업 발전을 위한 것임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국내에서 더 많은 수의 자동차회사가 경쟁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는 논리였다.
 
  “삼성이 자동차산업 하겠다는 건 이권이 아니야. 솔직히 어느 정도는 내가 좋아서 하는 거긴 해. 자동차에 취미가 있으니까. 아주 젊을 때부터 운전을 했고. 근데 70%는 우리나라 자동차산업을 위해서 하겠다는 거라고. 또 자동차산업은 전자업하고 달리 부품과 소재의 파급효과가 크잖아.
 
  인구가 5000만 넘는 나라 중에 자동차공업이 성하지 않은 나라가 어디 있어. 미국, 일본, 프랑스, 독일, 이태리 다 하는데. G7(선진국 7개국)은 자동차 다 하잖아. 그 나라들 조선(造船)은 안 하고 전자도 절반은 다 내다 버렸거든. 일본 빼면 전자가 없잖아. 근데 자동차를 왜 안 내버리겠어. 인구가 5000만 넘는 나라는 반도체와 자동차가 생명줄 중의 하나야. 미국이고 일본, 독일, 프랑스 다 자동차는 양보 안 한다고. 스위스나 홍콩처럼 인구는 적고 소득이 몇만 달러 넘어가면 자동차산업은 필요 없겠지만.
 
  우리나라는 자동차, 철강, 기계공업 이게 꼭 필요해. 근데, 우리나라 자동차가 다른 나라에서 얼마나 팔리냔 말이야. 미국만 봐도 우리 전자는 시장점유율이 높은데 자동차는 훨씬 못 미치지. 우리 자동차회사들이 다 국내에서만 장사하고 해외 적자를 국내에서 메꾸는 거잖아. 우리나라에서 수출 흑자 내는 건 반도체랑 철강밖에 더 있나? 이래서야 나라가 어떻게 산업이 발전하겠냐고. 대통령은 경제를 생각해야 되고 장관은 산업을 생각해야 되는 거야.”
 
 
  “자동차산업 진출은 기업가로서의 양심”
 
삼성자동차 부산공장의 근로자들. 이 회장은 “삼성이 자동차사업을 하지 않는 것은 기업인의 양심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는 우리나라의 자동차산업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동차회사가 더 생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국에 한 가지 사업에 기업이 꼭 한두 개만 있어야 할 필요가 뭐야. 한국에 다 모여서 경쟁하면 되지. 한국에 조선사가 다섯 개 아냐. 구라파(유럽)하고 미국은 하나도 없잖아. 다 이리(우리나라) 오고 있고.”
 
  이 회장은 또 자동차사업을 하는 것이 ‘기업가의 양심’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우리가 (자동차를) 하고 싶어서가 아냐. 실제로 하고 싶지 않다고. 나는 체면 때문에, 오기 때문에 하는 거야. 그 체면도 외국 회사와 계약한 것도 있고 등등 국제적인 체면이지, 국내 체면 때문도 아니야.
 
  그리고 기업가의 양심으로 봐봐, 재벌이 자동차, 전자, 중화학공업, 조선, 기계, 로봇 이런 걸 해야 다 파급효과가 생기는 거 아냐. 그걸 알면서 우리가 (자동차를) 안 한다는 건 기업가로서의 양심, 나아가 인간으로서의 양심이 없는 거야. 나중에 내가 나 자신을 역적이라고 탓할 거라고. 그게 싫어서 내가 이러는 거야.
 
  지금 우리 산업 구조가 전부 일본식이고 지금도 일본을 99% 따라가고 있단 말이야. 이걸 내가 알고 모른 척할 수가 없잖아. 그래서 자동차를 하려 하는 거지.”
 
  부산에 자동차공장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일본 자동차공장이 큰 게 40, 50만 평이라는데 우리는 만들자마자 배에 실어 수출해버리면 재고 쌓아놓을 50만 평이 필요 없잖아. 주문받고 바로 만들어서 바로 배에 싣고 수출하면 돼. 우리도 좋고 부산도 좋은 일 아니냐고.”
 
신경영을 함께했던 현명관 전 비서실장
 
   이건희 회장은 신경영의 2인자이자 파트너가 될 그룹 비서실장으로 그룹 내 비주류 계열사 출신인 현명관(사진) 당시 삼성건설 사장을 선택했다. 현 전 실장은 이건희 회장이 경영 전면에 나서 신경영을 지휘한 1993년부터 1996년까지 3년간 삼성그룹 비서실장으로 재직하며 이 회장의 신경영을 사실상 24시간 함께했다.
 
  이건희 회장은 회장에 취임한 1987년부터 급성심근경색으로 쓰러진 2014년까지 총 7명의 비서실장과 함께했다. 조직명은 비서실에서 구조조정본부, 전략기획실, 미래전략실로 이름은 계속 바뀌었지만 비서실은 그룹의 핵심이었다. 소병해·이수완·이수빈·현명관·이학수·김순택·최지성 7명의 비서실장 중 이건희 회장과 웃는 낯으로 떠난 사람은 현 전 실장이 유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명관 전 실장은 삼성그룹 공채 출신이 아니며 삼성전자 등 주력 계열사 근무경력도 없다. 그런 그를 이건희 회장이 2인자로 발탁한 것은 완전한 혁신, 즉 과거와의 단절을 뜻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이건희 회장은 신경영 선언 2년여 전부터 현 전 실장을 눈여겨봤다. 그처럼 사장단회의에서 입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서울법대, 행정고시 출신으로 감사원 근무 경력이 있는 그에게 관심을 갖고 있었다.
 
  1978년 전주제지에 입사해 1989년 호텔신라 대표이사직에 오르기까지 승승장구하던 그를 이 회장은 1991년 돌연 삼성시계 대표이사에 임명한다. 그룹 내에서 오지와 같았던 삼성시계에 그를 보낸 것은 이 회장의 ‘시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이 회장은 현 전 실장을 1993년 5월 삼성건설 대표이사로 이동시킨 후 11월에는 비서실장으로 임명한다. 당시 현 전 실장은 이 회장으로부터 비서실장 제안을 받고 “저는 공채 출신도 아니고 외곽 계열사에만 근무했고 인맥도 없다”며 사양했는데, 이건희 회장은 “바로 그래서 당신에게 비서실장을 하라는 거다”라고 했다.
 
  그는 이건희 회장의 최대 장점으로 선견지명과 결단력을 꼽았다.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은 물론, 그걸 행동으로 실천할 수 있는 이 회장의 결단력이 1등 삼성의 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선견지명에 대해서는 이 회장을 아는 사람이라면 다들 감탄할 수밖에 없는 게, 30년 전부터 ‘배터리 사업을 빨리 해야 한다’ ‘소프트웨어 인력을 대거 데려와야 한다’고 사장단을 닦달했습니다. 그때 저나 사장단은 그게 무슨 소린지 이해가 잘 가지 않던 때였어요. 1991년 소련이 해체될 때는 소련의 첨단연구소 인력을 빨리 스카우트해오라고도 했지요. 그런 선견지명과 결단력이 글로벌 일류기업을 만든 이건희 리더십의 근원입니다.”
 
  현 전 실장은 이건희 회장 사후에도 삼성에 큰 변화는 없을 것으로 내다봤다.
 
  “이미 이건희 회장이 경영 일선을 떠나 이재용 부회장이 사실상 회장직을 수행한 지 오래됐기 때문에 큰 변화는 없을 겁니다. 이건희 회장이 일류 글로벌 기업의 틀을 만들어 놓았고 지금은 이재용 체제도 완성돼 있으니까요. 하지만 앞으로 이건희 같은 선견지명과 결단력을 가진 사람이 한둘은 더 나와야 할 텐데라는 아쉬움은 늘 있습니다.”
 
  현 전 실장은 1996년 12월까지 삼성그룹 비서실장으로 일하다 1997년 초 삼성물산 총괄대표이사 부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삼성물산 회장, 삼성라이온즈 구단주, 전국경제인연합(전경련) 상근부회장 등을 거친 그는 삼성에서 나온 후 2006년 지방선거에서 제주도지사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한국마사회 제34대 회장을 지냈다.
 
 
  Part 6 가업을 되찾다
 
지난 10월 25일 별세한 이 회장의 운구차가 10월 28일 발인식을 마치고 병원을 빠져나와 장지로 향하고 있다.
  이 회장은 기존 삼성그룹의 제당, 제지, 유통 등의 사업부를 CJ, 한솔, 신세계로 계열 분리하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기도 했지만, 과거 삼성가의 가업을 되찾아오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한국비료(현 롯데정밀화학)다.
 
  한국비료는 이병철 회장이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비료 자급을 위해 만든 회사였지만, 1964년 사카린 밀수 사건이 터지면서 삼성은 이를 국가에 반강제로 헌납했다. 그러다 1994년 7월 한국비료 공개 입찰이 시작되자 이 회장은 27년 만에 이를 반드시 찾아오기로 결심한다. 삼성이 써낸 금액은 2300억원으로 경쟁자 고려화학이 써낸 가격보다 300억원이나 높은 금액이었다. 지나치게 비싸게 샀다는 지적이 나왔다. 비서실장이 이를 보고하며 “차점자보다 몇백억 더 쓴 감은 있습니다”라고 하자 이 회장은 단호하게 “1000억원 더 써도 상관없어”라고 했다. ‘선친의 가업을 찾아오는 데 돈이 문제가 아니다’라는 뜻이었다.
 
  이 회장은 범삼성가(家)가 설립했던 제일병원과 고려병원도 회장 취임 후 다시 인수했다. 고려병원은 1968년 이병철 회장이 설립했고, 1991년 병원 재단이 삼성그룹에서 분리됐다. 이 회장은 이를 1994년 다시 인수해 ‘강북삼성병원’으로 명칭을 바꿨다. 제일병원은 1963년 이병철 회장의 형인 이병각 삼강유지 사장의 아들 이동희 박사가 설립한 병원이다. 이건희 회장은 제일병원을 1996년 인수해 ‘제일삼성병원’으로 탈바꿈시켰다. 제일병원은 2006년 삼성에서 다시 분리됐다. 이 회장은 두 병원을 인수하면서 병원 관련 인사(人事)도 꼼꼼히 챙겼다.
 
  “재단이사장은 인맥을 고려해 임명하고 실제 병원 운영은 원장한테 맡기는 방법이 있고, 실권을 가진 이사장을 임명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지. 근데 연대 출신 의사들이 많은데 서울대 출신 이사장이 오면 운영이 잘 될까? 이런 걸 다 고려해서 제일 빠른 시점에 빨리 발표를 하라고. 인사 갖고 말이 길어지면 좋을 게 없어.”
 
  이 회장은 비서실장에게 사적인 이야기도 많이 했다. 당시 가장 자주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1968년에 (삼성에) 들어왔어. 1966년에 동양방송에 사원으로 일 년 반 있다가 1968년에 중앙일보 이사로 들어왔지. 그땐 내가 진짜 무식했거던. 경험은 많이 했지만 공부는 아무것도 안 한 상황이었으니까. 그때부터 양쪽 아버님에게 무지하게 많이 배웠지. 우리 아버지(이병철 삼성 창업주)에겐 본능적인 사업 감각을 배웠고. 나머지 교양이나 학식, 이론은 모두 장인어른(홍진기 전 중앙일보 회장)에게 다 배웠어. 홍 회장은 딸 맡겨놨으니 내가 뭘 해도 싫은 소리 안 하시고 내가 하자는 대로 거의 다 해주셨어. 그래서 내가 인간이 됐다고 생각해.”
 
  범삼성가 계열 분리 및 M&A 과정에서는 형제들에 대한 섭섭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녹음테이프에는 이건희 회장과 현명관 비서실장이 신경영 3년간 혁신과 세계 일류기업 달성을 위해 자신을 ‘갈아넣은’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25년 전 세계 초일류 기업의 초석을 마련한 50대 초반 기업인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이건희 회장의 일생

 
  1942년 1월 9일    경남 의령서 이병철(父)과 박두을(母)의 8남매 중 여섯째 3남으로 출생
  1947년(5세)        서울로 상경해 혜화초등학교 입학
  1953년(12세)      초등학교 5학년 때 일본으로 건너감
  1961년(19세)      서울사대부고 졸업. 연세대학교 입학했지만 부친의 권유로 일본으로 유학 감
  1965년(23세)      일본 와세다대학 상학부 졸업
  1966년(24세)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경영대학원 수료. 귀국해 10월 동양방송 입사
  1967년(25세)      홍진기 중앙일보 전 회장 딸 홍라희씨와 결혼
  1968년(26세)      중앙일보·동양방송 이사. 미디어 경영 수업 시작
  1974년(32세)      사재 털어 한국반도체 인수, 이병철 회장으로부터 경영 능력 인정받게 됨
  1975년(33세)      삼성공제회 이사장에 취임
  1978년(36세)      삼성물산 부회장 및 삼성그룹 부회장에 취임
  1982년(40세)      한국청소년연맹 이사, 프로야구 삼성라이온즈 구단장, 대한아마추어레슬링협회 회장,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상임위원에 취임
  1983년(41세)      반도체 사업 진출 공식화
  1987년(45세)      부친 이병철 회장 타계, 11월에 삼성그룹 회장에 취임
  1988년(46세)      삼성 제2 창업 선언
  1993년(51세)      6월 ‘프랑크푸르트 선언’으로 신경영 선언
  1994년(52세)      삼성, 한국 기업 최초로 영업이익 1조원 돌파. 휴대전화 애니콜 첫 제품 ‘SH-770’ 출시
  1996년(54세)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으로 선정
  1997년(55세)      에세이집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 출간
  2000년(58세)      서울대학교에서 명예 경영학 박사 학위 받음
  2003년(61세)      삼성 브랜드 가치 100억 달러(약 10조원) 돌파
  2004년(62세)      세계 최초로 1기가바이트(Gb) ‘원낸드 퓨전 메모리’ 개발, 수출 5000억 달러(약 511조원)
                              달성,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종 도뇌르 훈장 받음
  2005년(63세)      고려대학교에서 명예 철학박사 학위 받음. 미국 《타임》誌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선정됨
  2008년(66세)      삼성 특검 이후 경영 쇄신 위해 회장직에서 물러남. 조세포탈 혐의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벌금 1100억원형 선고받음
  2010년(68세)      삼성전자 회장으로 경영 복귀, 삼성 최초 갤럭시 시리즈 ‘갤럭시S’ 선보임.
                              와세다대학 명예 법학박사 학위 받음
  2011년(69세)      미국 《포천》誌 ‘가장 영향력 있는 아시아 기업인 25인’에 선정됨
  2014년(72세)      급성심근경색증으로 서울 이태원동 자택에서 쓰러짐
  2020년(78세)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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