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조갑제의 시각

열흘간은 나훈아가 대통령이었다!

글 : 조갑제  조갑제닷컴/조갑제TV 대표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노래가 역사를 만날 때
-한반도에서 노래는 이념이고 가장 큰 정치다!
  지난 추석 연휴 전후(前後)한 열흘간은 나훈아가 정신적 대통령이었다. 9월 30일의 KBS 비대면(非對面) 나훈아 쇼와 10월 3일의 재방송 합계 시청률이 약 50%, 어딜 가나 화제는 나훈아였다. 노래만큼 툭툭 던진 몇 마디가 해양수산부 공무원 참살(慘殺)로 찌든 국민들 마음을 어루만졌다. 가수, 작곡가, 작사가, 음유시인(吟遊詩人), 철학자의 면모를 보인 그를 “대통령으로 추천한다”는 말까지 나왔다.
 
  체제와 개인의 운명을 건 사상(思想)투쟁이 아직도 끝나지 않은 한반도에서 노래는 가장 고도의 정치 행위이다. 이 속성을 누구보다 정확히 간파한 이가 나훈아였다. 나훈아의 폭발적 인기의 비밀에 대하여 어느 언론도 지적하지 않은 점, 그래서 더욱 정치적인 것은, 그가 김정은이 부르고 좌파(左派) 정권이 강권(强勸)해도 평양공연을 거부한 배짱의 소유자란 사실이다. 나훈아가 150분간의 쇼에 중간 광고를 넣지 못하게 한 것(그리하여 수십억원의 광고비를 포기한 것), 자신의 말을 편집하지 못하게 한 것은 툭툭 던지듯 치밀하게 준비한 몇 마디 말을 지키기 위한 고집이었을 것이다. 김종인류(金鍾仁類)의 정치인은 탈이념(脫理念)을 숭상하지만, 한반도에서 이념은 노래의 세계에서도 결정적이란 점을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나훈아가 다른 가수들처럼 김정일·김정은 앞에 서서 노래를 불렀다면 그런 열광이 있었을까?
 

 
  “‘테스형’ 같은 노래 일본인들은 못 만든다”
 
  추석 연휴가 끝난 직후 일본 연예계에 정통한 재일동포 한 분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와 “나훈아 덕분에 재일동포가 신이 나 있다”고 했다.
 
  “한국 정부의 반일(反日)정책으로 교포들이 얼마나 어렵게 지내는지 본국에선 관심도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나훈아의 ‘테스형’ 듣고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아니, 예수가 태어나기 500년 전의 소크라테스를 형님으로 모시는 나훈아 아닙니까? 일본에선 절대로 그런 통쾌한 가사 못 만듭니다. 일본에서도 크게 히트할 겁니다.”
 
  ‘테스형’은 음원(音源)시장에서 2030세대의 열광적 인기를 모아 BTS와 경쟁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국경을 넘은 것이다. 이 노래는 나훈아 노래의 인기 비결이 가창력보다 가사의 문학성이 아닌가 생각하게 한다(도입부는 러시아 민요 ‘백만 송이의 장미’와 비슷하다).
 
  “그저 와준 오늘이 고맙기는 하여도 / 죽어도 오고 마는 또 내일이 두렵다 / 아!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 아! 테스형 소크라테스형 사랑은 또 왜 이래 / 너 자신을 알라며 툭 내뱉고 간 말을 / 내가 어찌 알겠소 모르겠소 테스형 / 먼저 가본 저세상 어떤가요 테스형 / 가보니까 천국은 있던가요 테스형!”
 
  돈 매클레인이 작사, 작곡, 노래한 ‘빈센트’가 고흐의 일생을 애잔하게 요약한 것과 달리 ‘테스형’은 나훈아가 4대 성인(聖人) 중 한 사람과 호형(呼兄)하는 관계가 되었으니 재일동포의 말처럼 일본인이 따라잡을 수 없는 스케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나훈아 붐을 계기로 《월간조선》 2002년 1월호 ‘오효진(吳效鎭)의 인간탐험’ 나훈아 인터뷰가 언론에 많이 인용되었다. 이 잡지의 편집장으로서 내가 읽은 수많은 인터뷰 기사 중 가장 흥미진진한 이야기였다. 인간 나훈아의 진면목을 드러낸 풍성한 글이었는데, 그의 ‘뽕짝’에 대한 확신이 작금의 트로트 붐을 예언한 듯하다.
 
  “뽕짝은 김치 같아요. 우린 김치 안 먹고 못 살아요. 뽕짝 없이도 못 살지요. 제가 일본 가선 이렇게 말합니다. ‘한국 뽕짝은 김치다’ ‘일본 뽕짝은 다꾸앙(단무지)이다’. 그럼 사람들이 와 웃습니다. 대중가요가 우리 서민의 마음을 노래하는 것이기 때문에 간단하게 표현하기는 어렵습니다만, 노래라는 것은 기후, 인간성, 지역적 조건, 음식, 이런 것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런데 우리 뽕짝과 일본 뽕짝은 서로 닮아서 구별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우리 노래 속엔 일본과 다른 꼭 하나가 있습니다. 대륙 기질이 있습니다. 일본 노래엔 그게 없어요. 우리는 ‘녹슬은 기이찻길아아아…’ 하고 내뻗는데 일본 노래엔 이런 게 없어요. 그냥 두리뭉실 넘어가지요. 일본 가수들은 한국에 와서 절대 히트 못 칩니다. 간지러워요. 그 사람들의 음악의 흐름은 바다의 파도와 같습니다.”
 
  나훈아는 부산 출생이다. 나훈아 쇼 1차 방송의 전국 평균 시청률이 29%인데 부산은 38%였다. 부산 경남에서 유명한 가수, 작곡가, 작사가가 많이 배출되는 이유는 바다와 강을 끼고 있는 풍광, 그리고 이곳 사람들의 개방적이고 활달한 대중성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대중가요는 부산에서 먼저 히트해야 유행을 한다는 말이 있다.
 
 
  “나훈아를 대통령으로 추천한다”
 
  나훈아 공연 며칠 전 부산에 사는 한 원로 언론인이 ‘문무대왕’이란 필명으로 조갑제닷컴에 ‘나훈아를 대통령 후보로 추천한다’는 제목의 글을 보냈다.
 
  새벽 산책을 하는 바닷가 둘레길에서 어느 여인 세 명이 이런 얘기를 주고받으며 지나갔는데 그럴듯하다는 생각이 들어 소개한다고 했다.
 
  〈여인A: 이봐라, 동생아. 오는 9월 30일 공연되는 ‘나훈아 쇼’가 엄청 재미있어 보이제? 니(너)는 어째(어떻게) 생각하노? 온라인 공연인가, 뭔가 해서 난리 아이더나? 1000명 제한의 예약을 위해 접속서버가 불통이 되고, 난리 법구통이 됐다 아이가. 대단하제? 나훈아는 역시 인기가 있어 그제?
 
  여인B: 언니야, 니도 그래(그렇게) 생각하나? 나도 언니 생각하고 똑같다 아이가. 나훈아는 노래 잘하제, 인물 좋고 건강하제, 무대 매너 좋제, 관객과 호흡이 척척 잘 맞제, 나무랄 데가 없는 기라. 그래(그러니까) 청중이 손뼉 치고 미쳐 나자빠지는 기라. 흥분하고 열광하는 기라. 언니야, 내 말 맞제?
 
  여인C: 나훈아가 그래(그렇게) 좋으면 대통령 한번 나와보라 하지. 대통령 별수 없더라 아이가. 국민에게 하는 말은 모두 거짓말이고, 자식새끼 챙기는 연놈들만 보듬아주고 말이제. 북한놈들이 바다에 떠 있는 우리 공무원을 총 쏴 죽이고 불태워 버렸는데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뭐라고 야단도 치지 않았다 안카나 말이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잠만 자고 말이다. 참 분통 터질 일이제? 참, 이상하제? 대통령은 도대체 숨어서 뭘 하고 있노 이 말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나훈아보고 대통령 한번 해보라카면 시원시원하게 잘할 거 아이가?
 
  여인 A·B·C: 맞다 맞아, 나훈아보고 대통령 한번 나와보라 하자. 알겠제?〉
 
  “이렇게 이어지는 강한 사투리의 이바구(이야기)는 산책거리 간격이 멀어지며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었다”면서 나훈아 대통령론을 폈다.
 
  〈세계적으로 볼 때 연예인들이 대통령이 된 사례도 많다. 배우 출신 로널드 레이건이 미국 대통령이 되어 소련의 고르바초프와 함께 냉전시대를 종식시켰다. 코미디언 출신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는 우크라이나 현직 대통령이다. 소신과 결단과 여민동락(與民同樂)의 뛰어난 예인(藝人) 나훈아가 공연무대가 아닌 정치무대에서 멋진 공연을 펼치는 것은 어려운 일일까? 나훈아의 선택이 관건(關鍵)이다.〉
 
  어느 기자가 레이건 대통령에게 묻는다.
 
  “어떻게 배우가 대통령이 될 수 있습니까?”
 
  1초도 주저하지 않고 레이건이 즉답하는 장면은 유튜브로도 검색이 가능하다.
 
  “아니, 어떻게 대통령이 배우가 안 될 수 있습니까?”
 
  작고한 신성일은 생전에 나에게 “배우 배우 하지만 가장 부러운 사람은 가수다”라고 고백했다. “배우는 수십만, 수만명의 환호를 직접 받아보는 환희를 느낄 수가 없다”는 아쉬움이 묻어나왔다. 나훈아도 “아니, 어떻게 대통령이 가수가 안 될 수 있습니까”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문재인씨는 국민을 크게 하나로 만들라는 의미의 대통령(大統領) 직권을 국민 분열에 남용하고 있다. 나훈아는 노래로 국민을 하나로 만들었으니 내가 정신적 대통령이라 하는 것이다.
 

 
  “이래라저래라 하는 데는 안 갑니다”
 
  나훈아도 평양에 간 적이 있다. 1985년,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 즈음하여 한국 측 공연단의 일원으로서였다. 노무현(盧武鉉) 정부 시절이던 2003년엔 가지 않고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공연했다. 여기서 북한에 가지 않은 이유를 직접 밝혔다. 이게 유일한 설명일 것이다.
 
  〈여러분, 원래 이 공연이 평양에서 하기로 되어 있었던 공연입니다. 그런데 이 공연을 오늘 서울 평화의 문 앞에서 하고 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다 할 수는 없습니다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공연이 누구의 제재를 받고 누가 이래라저래라 하는 간섭을 받고는 이런 공연은 절대 하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저는 간섭을 받기보다는 서울에서 공연을 하는 걸로 결정을 했습니다.
 
  (관객 환호 함성)
 
  여러분, 얼마 전에 남쪽 북쪽 이산가족이 만나는 거 뉴스를 보고 아마 마음 아프시고 속상하시고 하신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우리 이산가족이 1000만이 넘는답니다. 억지로, 좀 봐주는 듯이 해서 한 몇백 명 만나게 해주는데… 일 년에 1000명이라고 봅시다. 1000만 명이 만나려면 만 년을 기다려야 됩니다.
 
  (관객 환호 함성)
 
  남쪽 북쪽 할 거 없이 정신 차려야 합니다.
 
  (코러스: ‘우리의 소원은 통일’ 합창)
 
  시끄럽다. 저는 이 노래를 제일 싫어합니다. 4분의 3박자, 느려터져가지고 한두 소절만 들으면 눈물이 나려고 그러고. 이 노래 부를 때 여러분 보셨습니까? 손잡고 그저 울고 앉았어.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언제 통일합니까? 통일의 노래는 힘이 있어야 되고 빠른 템포에 힘이 있어야 합니다.
 
  갑니다. 여러분 도와주십시오.
 
  (코러스/관객: ‘통일 쾌지나 칭칭 나네’ 합창)
 
  이렇게 “쾌지나 칭칭 나네” 해가지고는 북쪽이 안 들리니까, 북쪽이 들리게 크게, 왜냐면 같이 정신 차려야 되니까. 다시 한 번 갑니다! 쾌지나 칭칭 나네 (중략)
 
  언제 해도 해야 되는 통일입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고요. 우리 마음을 모아서 빨리 통일합시다.〉
 
  여기서도 나훈아는 “남쪽 북쪽 할 거 없이 정신 차려야 합니다”라고 ‘동물원식 상봉 쇼’를 비판했다. 그 1년 전 《월간조선》과 인터뷰한 나훈아는 “내가 가야 할 자리를 골라서 결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누가 말해도 설 자리가 아니면 절대 안 섭니다”라고 했었다. “그러면 너무 비싸게 군다고 안 할까요?”라고 물으니 이렇게 답했다.
 
  “욕을 먹어야지요. 미국서 제가 신문을 보니까, 일반 대중 가운데 30%는 싫어하는 사람이 있어야 슈퍼스타가 된답니다. 너나 나나 다 좋아하는 사람은 슈퍼스타가 아니라 그냥 스타라는 겁니다. 싫어하는 사람 30%가 있어야 좋아하는 사람들이 미칠 정도로 좋아한다는 겁니다. 저는 욕을 많이 먹습니다. 방송사에 제일 많이 욕먹는 사람이 바로 접니다. 출연 교섭 한번 할래도 ‘더러워서 죽겠다’고 그래요.”
 
 
  안 간다던 조용필은 갔다
 
조용필은 2018년 4월 27일 판문점에서 김정은과 인사를 나눌 때 너무 허리를 많이 굽혀 구설에 올랐다. 사진=공동취재단
  흥미로운 것은 조용필도 2003년 무렵엔 평양공연에 대하여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2003년 《월간조선》 10월호 인터뷰에서 “북한에서 공연 제의가 들어오면 할 의향이 있나요”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동안 네 번 정도 제의가 왔었어요. 스케줄이 안 맞아서 못 했어요. 1년간 스케줄이 꽉 차 있어요. 몇 개월 후에 할 수 있냐고 제의가 오면 안 되죠. 1년 반 전에 이야기하면 모를까. 매년 하는 것이 정해져 있어서 중간에 움직일 수가 없어요.”
 
  〈— 북한 공연에 특별한 의미를 두고는 있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북한 주민들이 내 노래를 듣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모르고, 또 거기서 몇 명 모아놓고 공연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우리처럼 TV로 나가는 것도 아니고. 월드컵 때 그쪽(북한)에서 제 노래 CD를 요청하더라고요. 50여 장 요청했는데 사가라고 했어요.”
 
  — 남한의 대스타가 북한 주민을 위해 노래를 부른다면 좋아할 텐데요.
 
  “대구 유니버시아드 대회에 온 북한 여자 응원단원이 현수막 뜯어가는 것을 보고…. 아휴.”
 
  — 그 장면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참, 통일되어도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던 그가 2005년 노무현 정권 때 평양공연을 했다. 2008년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한 설명은 이렇다.
 
  〈“저의 심적인 변화보다는 저쪽에서 제의를 바꿨어요. 그전부터 우리 가수들이 북한에 많이 갔잖아요. 한 사람이 단독으로 가기보다는 여러 팀이 가서 한 프로그램 만들고 내려옵니다. 그쪽에서 시키는 대로 해야 해요. 그러면 거기서 뭘 남겨놓을 수 있겠어요. 그렇게 하라면 난 안 간다고 했죠.”
 
  — 북측에서 어떻게 제안을 바꿨습니까.
 
  “팩스가 왔어요. 단독으로 공연하고, 장비까지 다 들고 와도 된다고. 그래서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모든 걸 직접 기획하고 연출했어요.”〉
 
  2018년 4월 27일, 조용필이 판문점에서 김정은과 인사를 나눌 때 허리를 ‘너무 많이’ 굽혀 화제가 되었다. 조용필 측 관계자는 언론에 “기사가 나온 뒤 인사 논란에 대해 인지했다”면서 “하지만 조용필은 평소에도 그렇게 인사를 한다. 특정인을 의식했다거나 특별한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밝혔다. 그는 판문점 만찬장에서 ‘그 겨울의 찻집’을 불렀다. 김정일이 좋아한 노래라고 한다.
 
  조용필과 인연이 깊은 한 작곡가는 판문점 회담 직전, 평양에 가자는 정권 측의 요청을 거절한 나훈아와 비교하면서 못마땅해 하였다. 김정은은 나훈아가 왜 평양에 오지 않았느냐고 문화부 장관에게 물었다고 한다. 바빠서 못 왔다고 하니 ‘국가가 부르면 와야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대한민국은 국민 5000만명이 모두 나훈아처럼 ‘최고 존엄’의 권리를 누리고 있음을 알 리가 없다.
 
 
  反人道 범죄자를 즐겁게 하기 위해 노래 부르는 건 범죄 행위
 
  나훈아가 “나는 이래라저래라 하는 곳에는 안 갑니다”라고 거절하였던 평양공연 같은 건 앞으로 안 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 평양공연엔 자유가 없다. 곡을 마음대로 고를 수도 없고, 아무나 공연을 볼 수도 없다.
 
  2. 평양공연은 북한 주민들에게는 비공개이고, 김정은과 노동당 간부들만 본다. 독재자의 즐거움을 위하여 북한 주민들을 외면하니 이게 반(反)민주·반민족적이다. 또한 한국에선 공개되어 순진한 국민들에 대한 선동에 이용되고 있다. 다수 한국인은 북한 사람들도 우리와 같이 보고 공감한다고 착각한다.
 
  3. 가수들이 출연료를 받기는커녕 북한에 갈 때 선물을 들고 간 경우도 있다고 한다. 상호주의에 위반된다.
 
  4. 자유 진영의 예술인이 스탈린·히틀러 같은 독재자만을 위한 공연이나 연주를 하면 이는 독재에 동조하는 행위로 간주된다. 바그너 곡(曲)을 이스라엘에서 공개적으로 연주할 수 없는 이유는 바그너가 반유대주의자였기 때문이다. 민족반역자이고 반인도 범죄자인 김정은 일당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돈을 써가면서까지 서비스하는 것은 기생도 해선 안 될 일이다.
 
  5. 정부는 앞으로 이런 정치적·패륜적 공연을 주선하지 않아야 하고 무엇보다도 가수들에게 압력을 행사해선 안 되며 가수들 스스로 결단을 해야 한다. 나훈아처럼. 나라가 정상화되면 친북(親北)가수 명단에 올라갈지 모른다.
 
  6. 유대인 가수가 히틀러 앞에서 재롱을 부렸다면? 평양공연은, 아우슈비츠 같은 데서 독일군이 수용된 유대인들로 악단을 조직, 베토벤을 연주하게 하고 즐기는 것과 같은 반인도 범죄이다.
 
  7. 이런 평양공연은 ‘우리민족끼리’가 아니라 ‘민족반역자끼리’나 할 짓이다. 한편으론 우리민족끼리를 외치지만 그들은 표류해온 한국인을 구조하지 않고 사살, 시신(屍身)을 불태웠다. 감상적 공연으로 분단현실을 가릴 순 없다.
 
 
  정풍송의 묵직한 인사말
 
최근 조갑제TV에 출연한 작곡가 정풍송씨(오른쪽). 사진=조갑제TV 캡처
  10월 1일 TV조선에서 ‘트롯100년 어워즈’ 행사가 열렸다. ‘트롯 100년 작가상’을 받은 작곡가 정풍송 선생의 수상 소감은 묵직했다. 올해 79세인 정풍송 선생은 ‘석별’ ‘옛 생각’ ‘허공’ ‘미워미워미워’ ‘갈색추억’ ‘웨딩드레스’ 등 2000곡이 넘는 노래를 작곡, 작사한 분이다. 패티김·이미자·최희준·조영남·조용필·인순이·최진희·김연자·설운도·주현미 등 당대 인기가수들이 그의 노래를 불렀다.
 
  그는 “감사합니다. 너무나 험난했던 우리나라였습니다. 일제(日帝) 탄압의 고통 속에서나 불법 남침의 6·25전쟁에서 버틸 수 있었던 데는 대중가요 역할이 컸던 것 같습니다”라고 하더니 이렇게 당부하였다.
 
  “그만큼 앞으로 역할도 큽니다. TV조선에서 대중가요를 다시 조명해주고 길을 여는 데 큰일 해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대중가요가 앞으로 더욱 발전해서 우리 대한민국이 완전한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자리 잡는 데 같이 이바지할 수 있도록 앞으로도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고달픈 인생의 응원가였던 트로트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암시였다. 작년 그는 조국(曺國) 사태를 비꼰 ‘빗자루’를 발표, 문재인(文在寅) 정권의 위선(僞善)을 풍자하였다. 경남 밀양 출신인 그는 작사가(필명 정욱)로도 유명한데, 히트곡이 가장 많은 박시춘 선생과 동향(同鄕)이며, 우리나라 최고의 가곡 작곡가 김동진(金東振) 선생의 제자이기도 하다. 2000년, 김동진 선생은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후배 중 최고의 작곡가는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에 정풍송 이름을 댔다.
 
  “후배라기보다 내 제자 중에 이수인이라고 있는데 아주 유망했지. 그리고 대중음악 쪽이지만 정풍송이도 노래가 품위 있고 좋아.”
 
  나는 근년에 정풍송 선생을 몇 번 만나 오랜 대화를 가졌다. 그와 한 인터뷰가 조갑제TV에도 올라 있다. 건장한 체격에 정의감이 대단하다. 노래도 잘 부르는데 ‘옛 생각’의 해석은 특히 격조가 높다. 1980년대 초반에 나온 희대의 히트곡 조용필의 ‘허공’도 민주화를 갈망하는 가사였는데 검열을 피하기 위하여 한 단어를 바꿨다고 한다.
 
  〈꿈이었다고 생각하기엔/너무나도 아쉬움 남아/가슴 태우며 기다리기엔/너무나도 멀어진 그대〉
 
  ‘민주’를 ‘그대’로 바꿨기에 불멸의 명곡으로 남을 수 있었으리라. 조국 사태를 지켜보다가 화가 나서 만든 ‘빗자루’는 직설적이다.
 
  〈거짓말 없는 정직한 세상
  우리 모두 꿈꾸던 세상
  자유와 평등 공정과 정의
  온 천하에 약속했었지
 
  피땀 흘려 목숨 바쳐
  지켜왔던 우리의 조국
  영원토록 지켜가야 할
  자유민주주의 조국
 
  사랑하는 우리 후손들
  길이길이 살아갈 이 땅
  건강하게 물려줘야지
  오염투성이들은 못해
 
  하나뿐인 우리의 조국
  오직 오직 영광일 뿐
  표리부동 위선자들
  쓰레기더미 궤변가들
  빗자루로 모두 모두 싹싹싹〉
 
  정풍송 선생은 가수로는 패티김을 가장 높게 평가한다. 무슨 노래든지 그가 부르면 명곡이 된다면서 국력이 강한 시절이었으면 밀바나 나나 무스쿠리를 능가하는 세계적 가수가 되었을 것이라며 아쉬워하였다.
 
 
  노무현이 부른 ‘상록수’와 ‘새마을 노래’
 
2007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식에서 광복절 노래를 부르는 노무현 당시 대통령. 사진=조선DB
  질풍노도의 역사를 써가는 한반도에서 대중가요는 역사를 담고 역사를 만들기도 한다. ‘이별의 부산정거장’ ‘전우여 잘 자라’ ‘그때 그 사람’ ‘아침이슬’ ‘상록수’ ‘맹호들은 간다’ ‘새마을 노래’ ‘그리운 금강산’은 노래의 탄생과 유행에 역사의 숨결이 묻어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2년 대통령 선거 때 기타를 치면서 양희은의 ‘상록수’를 부르는 광고를 내보냈다. “국민이 대통령입니다”는 자막(字幕)과 함께. 그는 현직일 때 알제리 대통령 면전에서 박정희의 ‘새마을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조선일보》 최보식(崔普植) 기자가 노무현 자살 두 달 뒤에 쓴 칼럼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그날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국빈 방문한 알제리의 부테플리카 대통령과 막 정상회담을 끝냈다. 만찬을 앞두고 대기실에 있는데 알제리 대통령이 먼저 “북한에 가보니 김일성(金日成) 지도자는…” 하고 말문을 열었다고 한다.
 
  “북한 주민을 위해 정말 열성적으로 일했다. 그 아들 김정일(金正日)도 못지않게 헌신적이고….”
 
  개인적으로 김일성 부자와 오랜 친분이 있는지 칭찬을 한참 이어나갔다. 통역사는 난감했다. 통역을 안 할 수도, 자의적으로 그 내용을 줄일 수도 없는 것이었다. 결국 알제리 대통령의 말을 그대로 통역했다. 순간 노 대통령의 표정이 굳어졌다. 통역사는 분위기를 읽고 조마조마했다고 한다. 노 대통령은 “하나도 빼지 말고 통역해주세요” 하며 그를 쳐다봤다.
 
  “김일성·김정일을 말하지만 북한 주민 상당수가 굶고 있습니다. 우리 남쪽에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라는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그분이 그때까지 못살던 농촌과 지방을 바꾸어서 잘살게 만들었습니다. 새마을운동이라는 걸 했습니다. 우리가 북한보다 잘살게 된 것이 바로 박 대통령 때부터입니다. 그분이 지은 ‘새마을 노래’라는 게 있습니다.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그러면서 노 대통령은 힘차게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우리 모두 일어나…” 노래를 불렀다. 꽉 쥔 주먹을 흔들며 박자를 맞췄다. 노 대통령 임기 첫해인 2003년 12월 9일 저녁이었다.
 
  최 기자는 〈통역사가 이 일화(逸話)를 내게 들려준 것은, 노 전 대통령의 자살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감상적인 기분이 들었던 탓이다〉면서 〈그는 “정치적으로 오해받을까 봐 어디서도 얘기할 수 없었다”고 했다〉고 한다. ‘상록수’와 ‘새마을 노래’의 공존, 여기에 인간 노무현의 참모습이 숨어 있을지 모르겠다. 노래는 때때로 인간과 역사의 본질을 드러낸다.
 
 
  박정희와 노태우의 공통점은?
 
  역대 대통령 가운데서 노래를 작사, 작곡한 이는 두 사람, 박정희(朴正熙)와 노태우(盧泰愚)이다. 박정희 작사·작곡은 ‘새마을 노래’ ‘나의 조국’이고 작사는 ‘금오산아 잘 있거라’이다. 박정희가 5·16 거사를 앞두고 쓴 글에다가 박시춘이 곡을 붙였다. 노래는 박재홍. 1960년대에 음반까지 나왔지만 청와대에서 대통령의 권위 손상을 이유로 판매금지를 시켰다.
 
  〈황파에 시달리는 삼천만 우리 동포
  언제나 구름 개이고 태양이 빛나리
  천추에 한이 되는 조국질서 못 잡으면
  선혈 바쳐 넋이 되어 통곡하리라
 
  영남에 솟은 영봉 금오산아 잘 있거라
  세 번째 못 이룬 성공 이룰 날 있으리
  대장부 일편단심 흥국일념 소원성취
  못하오면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노태우 전 대통령은 공수 9여단가를 작곡했고 ‘베사메 무초’ 등을 불러 녹음한 CD를 퇴임 선물로 나눠준 사람이다.
 
 
  전두환과 노태우의 합창
 
  전두환 전 대통령은 노래를 아주 격조 높게 부른다고 한다. 전두환·노태우 두 사람이 합창하는 모습은 영상이 아니라 기록에 남아 있다. 당시 대통령 홍보 비서관으로서 사료(史料) 담당이었던 김성익(金聲翊)씨의 현장 묘사이다.
 
  화염병과 최루탄이 날아다니던 1987년 6월 17일 전(全) 대통령은 저녁 7시20분부터 9시30분까지 청와대 안가(安家)에서 노태우(盧泰愚) 민정당 대표위원 등과 만찬을 함께했다. 이 모임에는 안무혁(安武赫) 안기부장, 이춘구(李春九) 민정당 사무총장, 이치호(李致浩)·현경대(玄敬大) 의원, 박영수(朴英秀) 비서실장, 안현태(安賢泰) 경호실장, 김윤환(金潤煥) 정무1, 이종율(李鍾律) 공보 수석비서관 등이 자리를 함께했다.
 
  전두환·노태우 두 사람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통치 사료에 이렇게 적혀 있다.
 
  〈죽장에 삿갓 쓰고 떠나가는 전(全)삿갓(두 번 노 대표와 합창)/ 열두 대문 문간방에 걸식을 하며/ 술 한 잔에 시 한 수로/ 떠나가는 전 삿갓 전 삿갓/ 전 삿갓은 떠나고 노 삿갓이 들어오는 거다.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마는/ 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 밤/ 고요히 창문 열고 별빛을 보니/ 그 누가 불러주나 휘파람 소리(박수)
 
  대통령: 노 후보가 퉁소 잘 불고 휘파람 잘 불고 다재다능한 분이야. 운동을 못 하나, 음악을 못 하나. 내가 운이 좋아 먼저 대통령을 했고 이 양반이 후보가 됐지만 이 사람이 나보다 몇십 번 앞선 사람이다. 이 사람을 무조건 존경하고 잘 모셔야 해. 목숨 걸고 나한테보다 백 배 더 잘 모시라는 거야.
 
  노래: 사나이 가는 길 앞에 웃음만이 있을소냐/ 결심하고 가는 길 가로막는/ 폭풍이 어이 없으랴/ 푸르른 희망을 가슴에 움켜 안고/ 떠나온 정든 고향을 내 다시 돌아갈 때엔/ 열굽이 도는 길마다 꽃잎을 날려보리라.
 
  내 십팔번이야. 노 후보 휘파람 한 번 불어주시오.
 
  노 대표: 순풍에 돛달고/ 몇십 리를 돌려서/ 외로이 걸어가니/ 외로이 이 밤 처량해(노래).
 
  안기부장: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한 곡 부르겠습니다.
 
  대통령: 돌아가셨는가.
 
  안기부장: 모르겠습니다. (이북에서) 어떻게 되셨는지. 어머님 묘소가 없습니다.(‘불러봐도 못 오실 어머님…’을 노래).
 
  대통령: 그래 미안해. 이게 우리 비극이야.
 
  이치호 의원: 일송정 푸른 솔
 
  대통령: (함께 부르고 나서) 제목은 ‘선구자’라는 거지.(누군가 홈 스위트 홈을 부르고 대통령도 따라 불렀다.)〉
 
 
  인간 전두환의 모습이 드러나다
 
1987년 6·10 민정당 전당대회는 대통령 후보로 노태우 대표를 선출했다. 사진=조선DB
  기록자 김성익 비서관은 이런 해설을 붙였다.
 
  〈대통령이 전국적인 시위 사태가 수그러들지 않은 가운데 일주일 전 민정당의 전당대회에서 선출된 대통령 후보 노 대표와 함께 축하주를 하는 자리였다. 적지 않은 대통령의 저녁 모임에 참석했지만 이때만큼 대통령이 자신의 감정과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본 적은 없었다. 전 대통령은 이 모임의 서두에서 노 대표를 중심으로 한 시국의 정치적 수습 방향을 마련할 것을 지시하고 술잔을 권한 다음부터 술기운이 돌기 시작해서 차츰 주취(酒醉)에 빠져들어갔다. 대통령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본 것도 이 모임에서 처음이었다. 대통령의 노래는 굵은 목소리와 기교를 부리지 않는 스타일이 인상적이었다. ‘사나이 결심’은 그의 애창곡으로 나중에 청와대에서 있었던 이임(離任)행사 때 유명 가수가 불러 공개된 일이 있었다.
 
  “노 대표는 나보다 훌륭한 분”이라고 얘기하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깊은 감회에 젖는 듯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느꼈다. 전 대통령이 이 자리에서 대체적으로는 기복이 없는 담담한 목소리로 얘기했지만 때때로 감정에 북받치는 자세를 보였다. 술기운 때문이라고는 해도 어떤 자리에서든 항상 힘 있고 소신에 찬 자세를 보이던 것과는 다른 면모였다. 이 시점은 6·10사태에서 나타난 민의(民意)를 며칠 후에 발표되는 6·29선언을 통해 직선제 수용으로 풀어나가기로, 전 대통령과 노 대표 사이에서 깊은 논의를 통해 그 방향을 잡아가던 결단의 전야(前夜)이기도 했다.
 
  당시 민의의 표출에 대한 집권층의 결론으로서 6·29라는 우리 정치사의 새로운 방향과 내용이 준비되고 있었던 순간이고 이 자리의 두 주인공은, 얼마 안 가 한 사람은 전직 대통령으로, 또 한 사람은 새로운 공화정을 책임지는 대통령으로 각기 운명이 바뀌는 갈림길 앞에 서 있는 순간이었다.〉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내 십팔번’이라 했던 ‘사나이 결심’은 원제(原題)가 ‘해 같은 내 마음’(김초향 작사/이봉룡 작곡/남인수 노래)으로 1949년에 나왔다. 비장한 분위기의 노래이다. 인터넷 세상에선 김재규의 애창곡이었다는 확인되지 않은 주장이 나돈다. 해방 직후엔 좌익들이 즐겨 불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이 만찬에서 전 대통령이 ‘선구자’를 부를 때 바깥에선 시위대도 ‘선구자’를 불렀다. 요사이는 작곡가 조두남을 친일파로 모는 자들이 있다. 이래저래 한국의 노래는 정치이다.
 
 
  10·26 銃聲의 반주가 된 ‘사랑해’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40분경, 궁정동에서 울려 퍼진 총성은 한국 현대사 30년을 결정했다. 박정희 13년을 마감하고 전두환·노태우 12년의 문을 연 김재규의 총구와 총성의 반주는 ‘사랑해’였다. 노래를 좋아하여 작사·작곡까지 한 ‘부끄럼타는 초인(超人)’ 박정희의 장례식 때 국립교향악단이 연주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는 또 얼마나 상징적인가? 음악과 역사의 만남에서 그 어떤 주술성(呪術性)까지 느끼게 한다. 박정희 최후의 목격자는 마지막까지 그를 지킨 신재순씨(당시 대학생)다. 그녀의 군검찰 진술을 소개한다.
 
  〈대통령 각하께서 김재규 부장에게 통금해제 등, 부산 이야기를 하시고, 사진을 크게 만들어달라는 이야기를 하셨고 김 부장이 술을 잘하니 많이 권하라고 말씀하셨고, 김재규 부장이 시계를 자주 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각하께서 노래나 한번 듣자고 하여 심수봉이 대기실에 가서 기타를 가져와, 노래를 부른 사람이 지명한 사람이 다시 노래를 부르기로 하였으며, 심수봉이 ‘그때 그 사람’을 부르고 다시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부른 후 차지철 실장을 지명하였습니다.
 
  그러자 차지철 실장이 ‘도라지’를 부르고 흘러간 노래를 한 곡 불렀는데, 두 번째 노래를 부를 때 남효주가 들어와서 어깨를 치면서 김재규 부장에게 무슨 말을 귓속말로 하자, 김재규가 다시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러자 차 실장의 노래가 끝나고 본인을 지명하기에 본인이 ‘사랑해’를 하겠다고 심수봉에게 전주곡을 부탁하자 대통령께서 콧노래로 하므로 차지철 실장이 “각하께서 그 노래도 아시는군요” 하자 대통령께서 “우리 애들이 불러서 안다”고 하여 본인이 노래를 부를 쯤 김재규가 들어와 앉았고, 당시 남자와 같이 노래를 불렀기에 톤이 안 맞아 다시 노래를 부를 때 옆자리에서 ‘빵’ 하는 총소리가 나자 본인이 놀라서 옆으로 보니 (차지철이) “피” “피” “왜 이래” 하고 일어서면서 “경호원” “경호원” 부르면서 실내 화장실로 뛰어가버렸고 “피 피” 하기 전에 “버러지 같은 놈” 하는 소리를 들었으며 그 후 차지철을 쳐다볼 때 ‘빵’ 하는 총소리가 나서 멍멍한 순간 옆으로 보니 대통령 각하께서 머리를 상에 기대고 있어 본인은 당시 대통령께서는 총에 맞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는데 김재규가 다시 대통령에게 총을 쏘는 것 같더니 소리도 안 나고 김재규가 밖으로 나갔는데 그 무렵 전기가 나갔으며, 비록 전기는 나갔지만 대통령을 식별할 수 있어 본인은 대통령 각하의 뒷등을 만졌는데 그때 본인은 심수봉 앉은 자리 부근에 갔기 때문에 오른쪽 손으로 만졌는데 피가 말도 못 하게 많이 났으며, 그때 김재규가 다시 들어와 대통령 각하의 머리에 총을 겨눌 때 화장실에 있던 차지철이 문 쪽으로 뛰어갈 때 본인은 정신이 없어 화장실로 뛰어갔습니다.〉
 
  박정희는 ‘사랑해’를 따라 부르다가 총을 맞은 것 같다. 오경운 작사, 변혁 작곡, 라나에로스포가 불렀던 노래이다.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 당신이 내 곁을 떠나간 뒤에/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오.”
 
 
  꽃피면 더욱 슬픈 ‘38선의 봄’
 
1960년대에 박춘석씨 반주에 맞춰 가수 패티김이 노래를 연습하는 모습. 두 사람은 콤비가 되어 많은 작품을 만들어냈다. 사진=PK프로덕션 제공
  박시춘과 쌍벽을 이루는 작곡가 박춘석(작고)이 KBS 〈가요무대〉에 출연했을 때이다. 김동건 아나운서가 “돌아가신 뒤 노래 기념비를 세운다면 어느 곡을 추천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 박춘석은 서슴없이 ‘38선의 봄’을 들었다. 휴전선 부근에 세워달라고 했다.
 
  ‘삼팔선의 봄’에서 찡한 대목은, “꽃피면 더욱 슬퍼 삼팔선의 봄/ 죽음에 시달리는 북녘 내 고향/ 그 동포 웃는 얼굴 보고 싶구나”이다. 꽃이 피면 즐거워야 하는데 38선이 죽음과 삶을 갈라놓은 현실을 생각하면, 또 죽음에 시달리는 북녘 동포들을 생각하면, 꽃이 필수록 더욱 슬퍼지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대중가요 작곡·작사가들까지 오늘의 정치인들보다 더 나라를 생각하고 더 통일을 염원하고 북녘 동포들을 더 걱정하던 시대가 있었던 것이다. 월남 파병 시절의 유명한 군가(軍歌) ‘맹호들은 간다’(유호 작사, 이희목 작곡)에 나오는 “자유통일 위해서 길러온 힘이기에 조국의 이름으로 어딘들 못 가리까”라는 구절은 이렇게 우리를 채찍질한다.
 
  〈자유통일을 위하여 50대 1의 국력(國力)을 길러놓았는데 무슨 이유로 머뭇거리는가? 국민과 국군이 결심하면 북한 동포들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어딘들, 무엇이든 못 하겠는가.〉
 
  한국에서 히트한 대중가요는 거의 그 시대의 역사적 상황과 닿아 있다. 유행가는 ‘인생의 응원가’였고 민심의 온도계이고 역사적 감수성의 표현이었다.
 
 
  그리운 금강산
 
‘그리운 금강산’의 작곡자 최영섭.
  박정희 주도의 군사혁명이 일어난 1961년, KBS는 조국강산을 주제로 한 노래의 제작을 기획했다. 6·25 11주년을 맞아 중국·러시아·북한 등지에 살고 있는 동포들에게도 감동을 줄 수 있는, 뜻 있는 곡이어야 했다. 작사는 시인 한상억(韓相億), 작곡은 최영섭(崔永燮)씨에게 맡겼다. 한상억 시인은 ‘아름다운 내 강산’이란 제목 아래 11편의 작사를 했고, 최영섭은 칸타타 형식[17~18세기 바로크 시대에 발전한 성악곡의 한 형식으로 독창·중창·합창과 기악 반주로 이루어지는 교성곡(交聲曲)]으로 곡을 붙였다. 1961년 9월 7일 KBS 교향악단의 연주로 녹음되고 곧바로 해외로 나가는 전파를 탔다. 공식적인 초연(初演)은 1962년 10월 20일 국립극장에서 있었다. 11편의 곡 중에서 열광적인 박수를 받은 게 네 번째 곡인 ‘그리운 금강산’이었다. 그 뒤 수십 년간 한국인의 정서를 지배하게 될, 카리스마의 가곡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최영섭씨에 따르면, ‘그리운 금강산’은 구상 한 시간을 포함, 하루 만에 멜로디와 피아노 반주까지 완성했다고 한다.
 
  “시(詩)를 받아든 순간 구절구절 흘러나오는 시대의 아픔이 가슴으로 느껴졌고, 그 노랫말이 주는 영감이 악상(樂想)으로 환원되었습니다. 노랫말이 좋으니까 곡을 붙이는 것이 저절로 되더군요.”
 
  1972년의 7·4공동성명 이후, ‘그리운 금강산’은 남북 화해 분위기 조성을 위한 곡으로 채택돼 방송되는 바람에 더 유명해졌다. 1985년 9월에는 분단 이후 최초로 개최된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 예술단 교환 공연’의 곡으로 선정되었다. 소프라노 이규도(李揆道)씨가 평양에서 불렀다. 반공가곡으로 탄생하여 남북 화해의 짐을 지게 되니 가사를 고쳤다.
 
  ‘더럽힌 지 몇 해’가 ‘못 가본 지 몇 해’ ‘우리 다 맺힌 원한’이 ‘우리 다 맺힌 슬픔’으로, ‘더럽힌 자리’가 ‘예대로인가’로 바뀐 것이다. 성악가들은 공연 때 박수가 보장되는 이 노래를 서로 부르려 한다고 한다. 다 만족시키기 위하여 합창곡으로 넣는 경우도 있다.
 
 
  애국운동가로 부활한 ‘전우여 잘 자라’
 
‘전우야 잘 자라’를 작사한 유호.
  2003년 초 노무현 정부 출범에 즈음하여 지금은 고인(故人)이 된 김상철(金尙哲) 전 서울시장을 중심으로 3·1절 국민대회를 기획할 때 행사에 부를 노래를 논의하는 자리에 나도 참석했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노래방에선 별 인기가 없었던 김동진의 ‘조국찬가’ ‘전우여 잘 자라’를 ‘강추’했다. 서울시청 광장을 메운 대군중의 합창은 근사하였다. 두 노래는 이를 계기로 애국운동권의 주제가로 부활하였다. 그 직후 인터뷰에서 작사가 유호(兪湖) 선생은 신나 있었다.
 
  공산 치하의 서울에서 숨어 지내면서 인간이 봐선 안 될 참상을 일상적으로 목도하였던 《경향신문》 기자 유호씨는 1950년 9월 서울이 수복되자 오랜만에 시내를 거닐며 자유로운 공기를 실컷 들이켰다.
 
  “선발대로 청파동에 들어온 해병대가 철로길을 삭삭 스쳐 지나갈 때, 기분이 최고였어요. 그날 소공동에 있는 《경향신문》에 나갔더니 문화부 평기자는 특별히 할 일이 없어선지 당분간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고 방(榜)을 붙여놓았어. 명동(明洞)에 가서 막걸리나 한잔하자고 생각하고 길을 건너다가 밀짚 벙거지를 쓴 작곡가 박시춘(朴是春)씨를 만났어요. 시골에 피란 갔다가 돌아온 박씨는 명동이 그리워 가족은 필동 집으로 보내고 나오던 길이었대요. 우리는 술집에서 통음(痛飮)을 했죠. 밤 12시가 가까워지자 필동에 있는 박씨의 적산가옥으로 옮겼습니다. 박시춘씨가 먼저 ‘우린 살았다. 북진통일이 임박했으니까 군인들의 사기를 돋울 노래를 만들자’고 제안했습니다.”
 
  유호씨가 한 절의 노랫말을 지어 박씨에게 내놓으면 그는 기타를 튕겨가며 멜로디를 오선지(五線紙)에 그려나갔다. 두 사람은 아침까지 한숨도 자지 않고 곡을 마무리한 후, 해장국을 먹으러 나갔다고 한다. 유호는 4절까지 가사를 힘들이지 않고 단숨에 지어냈다고 한다.
 
  “3개월 동안 몇 차례나 죽을 고비를 넘기니까 화가 치밀어 올랐어요. 술기운도 있고 기분도 좋겠다. 오랜 피란살이에 통일이 된다니까 마음이 날아갈 것 같았어요.”
 
  “가사가 짧으니까 자연히 4절이 됐어요. 노랫말을 구성하는데, 군인들이 낙동강까지 쫓겨갔다가 올라온 것이니까 1절을 낙동강, 2절은 추풍령, 3절은 한강수, 4절은 삼팔선으로 잡았어요.”
 
  “박시춘씨가 잘 아는 정훈(政訓)장교가 악보를 가져가서 정훈국에서 발표를 했어요. 아무튼 북진하는 국군이 부를 만한 군가가 없었던 참에 잘된 거지요. 이 노래는 혼자 부르면 심심하고, 여럿이 부르면 힘이 막 나지요.”
 
  “‘담배를 나누어 먹던’이라고 돼 있는데, 제가 작사할 때는 ‘담배를 나누어 피던’으로 했을 겁니다. 상식적으로 담배를 피운다고 하지, 먹는다고는 안 하거든요.”
 
  북진 장병의 주제곡이 되었던 이 노래는 중공군의 침입으로 1·4후퇴를 할 무렵에는 금지곡이 된다. 육군에서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란 대목이 불길하다고 문제를 제기한 것이었다. 휴전 이후에 복권(復權)되었다.
 
 
  고향 밀양에서 핍박받는 박시춘
 
젊은 시절의 작곡가 박시춘.
  10년 전 경남 밀양 시청에서 강연을 한 일이 있었다. KTX를 타고 가는 길에 나는 밀양시민들에게 작곡가 박시춘 선생 이야기를 맨 먼저 꺼내야겠다고 별렀다. 이 위대한 작곡가를 친일파로 모는 고향 사람들이 있어 살던 집을 기념관으로 복원하고도 문을 열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살던 집은 강을 내려다보는 언덕 위, 영남루 옆에 있었다. 작은 초가집 한 채였다. 가수나 작곡가는 강가나 바닷가 사람들이 많다는 말이 있다. 그런 곳에서 자라야 감수성이 풍부해져 좋은 노래를 부르거나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박 선생은 이 초가에서 10대 초반까지 살았다고 한다. 그 몇 달 전까지 이 생가 앞엔 관람 중단 이유를 밝히는 이런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우리 고장 출신이며 한국가요계의 거목인 박시춘 선생의 업적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2001년에 박시춘 옛집을 복원하여 문을 열어왔으나 2005. 9. 25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에서 발표한 친일인사 명단에 박시춘 선생도 포함되어 2005. 10. 16부터 관람을 중단한 적이 있습니다. 박시춘 선생은 ‘신라의 달밤’ ‘애수의 소야곡’ ‘이별의 부산정거장’ ‘럭키서울’ 등 대중의 사랑을 받은 가요 3000여 곡을 작곡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들의 혈서’ ‘목단강 편지’ ‘결사대의 안해’ ‘혈서지원’ 등 네 곡의 친일 작품을 남겨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앞으로 시민의 뜻을 모아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밀양의 전통을 잇는 올바른 방향을 찾아 해결하도록 하겠습니다. 2006. 11 밀양시장〉
 
  그런데 그날 가보니 안내문이 바뀌고 관람도 허용되고 있었다. 그 이유를 알아보니 조갑제닷컴에 김영(金榮·전 부산MBC 사장)씨가 써 올린 글이 밀양 민심을 흔들고 행정을 움직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김영씨는 이렇게 개탄했었다.
 
  〈그들의 기준대로라면 손기정 선수도 친일인사여야 하는가?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손기정이 아닌 ‘손기떼이’라는 이름으로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것은 일본의 국위를 세계만방에 과시한 것이므로 친일 중의 친일임이 분명하지 않은가? 손 선수가 친일로 몰리지 않은 것은 다행한 일이다. 친일 행각을 단죄한다면 왕족의 신분을 유지하면서 일본 황족들과 혼인한 조선왕조의 왕족들을 빼놓을 수 없지 않은가?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기고 조선 백성을 일본의 2등 국민으로 전락 귀속시킨 자들이 누구인가? 영친왕은 일본 육군 중장의 계급장을 어깨에 달고 연합군에 맞서 싸우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비슷한 조건에 처했던 사람들 가운데 유독 대한민국을 위해 크게 기여한 인물들만을 찾아내 친일로 몰아세우는 것은 그 저의(底意)가 무엇인지 의심받고 있다.〉
 
  그날 나는 밀양시민들을 상대로 한 강연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얼마나 많은 한국인이 박시춘 선생 덕분에 마음을 달랠 수 있었습니까? 일제의 탄압, 전쟁의 상처, 근대화 과정의 희비극을 거치면서 삭막해진 한국인들이 ‘애수의 소야곡’ ‘신라의 달밤’ ‘전우여 잘 자라’ ‘이별의 부산정거장’ 같은 노래를 부르면서 많은 위안을 받았습니다. 어느 국회의원, 어느 국무총리가 박시춘 선생 같은 일을 하였습니까? 이런 분이 작곡한 노래가 3000곡인데, 그 가운데 네 곡이 친일적이라고 해서 그를 친일파라고 모는 것은 인간에 대한 모독입니다. 김연아 선수가 엉덩방아 찧는 장면만 틀면서 욕하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다행히 밀양시민들과 밀양시청이 현명한 판단을 내려주신 데 대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敵軍과 我軍이 같이 부른 노래
 
  5년 전 가을에 나는 제대 45년 만에 경상북도의 산꼭대기에 있는 공군 부대를 찾아갔다. 내가 3년 동안 졸병으로 근무하였던 곳이다. 1219m의 산정(山頂)에 있는 부대 모습에서 거의 반세기 전의 추억을 되살리니 정훈희의 ‘안개’부터 떠올랐다. 이 노래를 1000번 이상 들었다. 점심시간, 안개와 구름이 산허리를 휘감고 도는 가운데서 지겹게 울려 퍼지던 청아한 목소리! 우리 부대엔 그 무렵(1967~1970년) 정훈희의 노래를 수록한 레코드판 하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안개 속에서 수도 없이 들은 ‘안개’는 그러나 부르기는 너무 어렵다. 1985년에 이미자씨를 인터뷰하였더니 정훈희를 높게 평가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안개’처럼 군인들, 그것도 적군과 아군을 동시에 사로잡은 노래가 있다.
 
  ‘릴리 마를렌(Lili Marleen)’이란 제목의 독일 노래는 사연이 많다. 이 노래의 가사는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5년에 한스 라이프가 지었다. 독일 함부르크 출신의 교사였는데, 군(軍)에 징집된 후에 시를 썼다. 시(詩)의 원명(原名)은 ‘등불 아래 소녀’였으나 ‘릴리 마를렌’으로 더 유명해졌다. 자신의 여자친구 두 사람 이름을 합성한 제목이다.
 
  1939년 이 노래는 랄레 안델젠이란 여자 가수에 의하여 레코드로 취입되었다. 작곡가는 노르베르트 슐체. 1941년 나치 독일군은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여 베오그라드에 군(軍) 방송국을 개설했다. 이 방송국에 근무하는 한 장교가 빈으로 휴가를 나오게 되었는데 레코드판을 사 오라는 부탁을 받았다. 장교는 중고 레코드 가게에서 ‘릴리 마를렌’을 사 가지고 왔다. 이때까지 겨우 700장이 팔렸을 뿐이었다.
 
  베오그라드의 독일군 방송국은 내가 근무하였던 공군 부대처럼 레코드판이 많지 않아 ‘릴리 마를렌’을 자주 틀었다. 괴벨스가 이끌던 나치 독일의 선전부는 이 노래가 염전(厭戰) 분위기를 퍼트릴 수 있다고 판단, 방송 금지시켰다.
 
  그랬더니 독일·이탈리아 등 주축국(主軸國)의 병사들이 방송국에 항의하기 시작했다. 지중해 주변에 배치된 부대의 병사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싸우던 독일의 롬멜 군단(軍團) 병사들도 “릴리 마를렌을 듣고 싶다”고 방송국에 호소했다. 롬멜도 이 노래를 좋아하여 베오그라드 방송국에 “매일 듣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디트리히-여자 나훈아?
 
‘릴리 마를렌’으로 유명한 마를레네 디트리히.
  이렇게 되니 괴벨스도 내키지는 않았지만 생각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베오그라드 방송은 아예 밤 9시55분 프로의 로고송으로 박아버렸다. 연합군 병사들도 독일방송을 듣다가 이 노래를 좋아하게 되었다. 이탈리아에서 작전 중이던 연합군은 가사를 바꿔 불렀다.
 
  독일 출신으로 미국에서 활약 중이던 마를레네 디트리히도 이 노래를 불렀다. 이 여배우의 이름이 곡목과 비슷하여 디트리히가 처음 부른 것으로 오해하는 이들이 많다. 여러 가수가 불렀지만 디트리히가 부른 ‘릴리 마를렌’이 가장 유명하다. 〈뉴렌베르크 재판〉이란 1960년대 영화엔 디트리히가 독일인으로 출연하고 맥줏집에서 독일 사람들이 ‘릴리 마를렌’을 합창하는 장면이 있다.
 
  미국의 음반회사 RCA는 1944년에 페리 코모를 시켜 이 노래를 취입했다. 캐나다의 경보병 특수여단은 ‘릴리 마를렌’을 느린 행진곡으로 사용하고 있다. ‘릴리 마를렌’을 부른 최초 가수인 안델젠은 전쟁 중엔 공개장소에서 이 노래를 부르지 못했다. 전후(戰後) 그녀는 사라졌다가 1959년 〈네버 온 선데이〉라는 영화의 주제곡(원곡은 멜리나 메르쿠리가 불렀다)을 독일어로 부르면서 인기를 얻었다. 안델젠은 1972년 67세에 빈에서 죽었다. ‘릴리 마를렌’은 경쾌하면서도 애조(哀調)를 띠고 있는 노래이다.
 
  디트리히는 1992년에 미국에서 91세로 죽었다. 가수와 여배우를 겸한 전천후(全天候) 예능인이었다. 할리우드에서 성공한 최초의 독일 배우로 평가받는다. 디트리히는 민주주의가 만개(滿開)하였던 바이마르공화국 시대를 체험한 예술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히틀러의 반(反)유대주의를 증오하였다. 나치가 그녀를 이용하려 하자 1939년에 미국 시민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 위문공연을 많이 다녔다. 위험한 전선(戰線)에 왜 그렇게 자주 가느냐는 질문에 디트리히는 “그것이 고귀한 행동이므로…”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미국 대통령이 주는 ‘자유의 메달’을 받았는데 그녀는 이를 가장 큰 영광으로 생각했다. 여자 나훈아라고 할까?
 
 
  윤이상 작곡 교가를 부르던 시절
 
  내가 다닌 부산고등학교 교가(校歌)는 윤이상(尹伊桑) 작곡, 유치환(柳致環) 작사이다. 윤이상이 동백림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갔을 때도, 김일성에게 영혼을 팔았을 때도 이 노래는 금지되지 않고 이어졌다. 이은상(李殷相)과 윤이상이 합작한 노래도 있다. 전쟁 중 만들어진 〈낙동강〉이란 영화에 삽입된 ‘낙동강’이다. 낙동강 전선을 지켜낸 경상도 사람들의 자부심을 담은 웅장한 노래이다.
 
  〈보아라 가야신라 빛나는 역사
  흐른 듯 잠겨 있는 기나긴 강물
  잊지 마라 예서 자란 사나이들아
  이 강물 네 혈관에 피가 된 줄을
  오! 낙동강 낙동강
  끊임없이 흐르는 전통의 낙동강〉
 
  경남 지역의 학교 중엔 윤이상 작곡 교가를 쓰는 곳이 많다. 그가 유럽에 가서 친북화(親北化)되기 이전의 노래들이다. 예술은 국경이 없지만 예술인은 국경이 있다고 한다. 천하의 피카소도 공산당과 친하다고 하여 미국으로부터 입국 금지를 당했다. 그가 그린 반나치 명화(名畵) 〈게르니카〉가 미국으로 피란 가 있을 때도 그는 미국에 가지 못하였다.
 
  나는 한 40년 전에 부산에서 진해(鎭海)로 취재차 가는 시외버스 속에서 이미자(李美子)를 만났다.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운전기사가 가요 메들리 테이프를 틀어놓았던 것이다. 의자를 뒤로 젖혀놓고 반쯤 누워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늦가을 경치를 감상하면서 듣는 이미자의 흘러간 옛 노래들은 감미롭기도, 처연하기도, 아련하기도, 그리고 신나기도 하였다. 한 시간 만에 진해에 도착했는데 테이프는 끝나지 않았다. 내리기가 싫었다.
 
 
  ‘아씨’-한 여인의 인생을 두 줄로 집약한 문학
 
  그 뒤 5년이 흘렀다. 나는 《월간조선》 1985년 8월호에 ‘40대 기수론(旗手論)’을 쓰면서 이미자씨를 인터뷰했다. 이야기를 해보니 그는 노래 부르는 것을 수줍어하는 듯했다. 무대가 아닌 사석(私席)에선 절대로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고 했다. 이 무렵 인명(人名)사전을 찾아보았더니 이미자란 이름은 없었다.
 
  17년 전 11월에 《월간조선》 직원 20여 명은 관광버스를 한 대 빌려 충남 홍성으로 야유회를 떠났다. 운전기사가 테이프를 하나 트는데 천박한 노래였다. 뒷자리의 젊은 직원들이 당장 그만두라고 불평을 했다. 버스가 서해대교 밑에 있는 오션 파크 휴게소에 도착하여 쉴 때 나는 ‘이미자 공연 실황’ 테이프를 한 장 샀다.
 
  ‘노래는 나의 인생’ ‘황혼의 블루스’ ‘삼백리 한려수도’ ‘눈물이 진주라면’ ‘흑산도 아가씨’ ‘황포돛대’ ‘울어라 열풍아’ ‘칠갑산’ ‘여로’ 순서로 노래가 흘러나오니 버스 안이 조용해졌다. 저마다의 감수성과 상상력으로써 이미자의 노래를 받아들이고 있었고, 저마다의 기분을 내고 있었다.
 
  “노래한다는 것은 뼈에다가 살을 붙이는 것과 같은데, 너무 힘을 주면 살이 곱게 붙지 않고 군더더기같이 붙는답니다.”(이미자)
 
  홍성에서 돌아올 때도 틀었다. 밤 버스를 타고 서해대교를 지나갔다. 푸른 조명과 빛기둥으로 채색된 기나긴 다리가 차창 바깥으로 지나가는 가운데 ‘아씨’가 흘러나왔다.
 
  〈1. 옛날에 이 길은/ 꽃가마 타고/ 말 탄 님 따라서/ 시집가던 길/ 여기든가 저기든가/ 복사꽃 곱게/ 피어 있던 길/ 한 세상 다하여/ 돌아가는 길/ 저무는 하늘가에/ 노을이 섧구나
 
  2. 옛날에 이 길은/ 새색시 적에/ 서방님 따라서/ 나들이 가던 길/ 어디선가 저만치서/ 뻐꾹새 구슬피/ 울어대던 길/ 한 세상 다하여/ 돌아가는 길/ 저무는 하늘가에 노을이 섧구나〉
 
  한국적 삶을 산 한 여인의 인생을 노래 하나로 녹인 문학이다. ‘아씨’의 가사는 동명(同名)의 방송극 작가 임희재씨의 작품이다. 그 순간 ‘나는 역시 한국인이구나. 그래서 행복하고, 이미자씨로 해서 더 행복하구나’라고 생각했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202012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프리미엄결제
2020년4월부록
정기구독 이벤트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 월간조선 2018년 4월호 부록
신협중앙회 여성조선 공동 주최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