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의 편지

60년 전, 이란의 한국 운전기사들

  • 글 : 배진영 월간조선 편집장  ironhe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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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60년 전인 1966년 12월 이동원(李東元) 당시 외무부 장관이 중동(中東) 순방길에 올랐습니다. 각료들조차 중동이라는 말에 ‘배꼽춤’부터 연상하며 실실 웃음을 흘리던 시절이었습니다.
 
  존재감이 없기는 한국이 더했습니다. 한국이라고 하면 ‘한국전쟁’이나 기억하는 정도였으니까요. 중동에 우리 공관도 없었습니다. 이동원 장관은 중동 순방을 떠나기에 앞서, 한일회담을 하면서 알게 된 시이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郞) 일본 외무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이 장관이 레바논 베이루트 공항에 도착하자 이수영 주 프랑스 대사와 함께 이란 주재 일본 대사가 영접을 나왔다고 합니다.
 
  이때 이동원 장관이 방문한 나라 중에는 팔레비 국왕이 다스리고 있던 이란도 있었습니다. 이 장관은 후일 자신의 회고록 《행동하는 자에게 불가능한 꿈은 없다》에서 팔레비 국왕을 만났던 이야기를 자세히 적었습니다.
 
 
  이란의 한국인 운전기사들
 
  〈이란으로 날아가 팔레비 국왕을 면담했을 때에는 깜짝 놀랐다. 서양 사람들 코가 크긴 하지만 팔레비의 코는 얼마나 큰지 만나는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들 정도였다. 게다가 그는 전형적인 영국 영어를 구사하는 등 국왕으로서의 권위가 몸에서부터 풍겨 나오고 있었다.
 
  “이란이 현대화를 추진 중인데 어떻습니까?”
 
  그는 나를 보자마자 질문으로 인사를 대신한 뒤 수행원을 물리치고 서재로 나를 안내했다. 팔레비는 한국 외무장관을 배려하는 데에도 품위가 있었다.
 
  당시 이란에는 한국 운전기사들이 취업차 나와 있었는데 팔레비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가족들과 떨어져 있는데도 매우 근면하고 성실하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폐하! 우리나라 국민성은 본래 그렇습니다. 다른 나라와는 달리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가족을 지키겠다는 책임감이 투철합니다. 가족을 위해서라면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참고 견디며 성실히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팔레비도 이 대목에서는 상당히 감동을 받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급하게 말을 이었다.
 
  “이번 기회에 한국 인력을 이란에 더 보내려고 하니 수용해 주시면 저희가 성심성의로 이란의 근대화에 보탬이 되고자 합니다.”
 
  “이 장관, 한국 근로자들 성실성이야 누가 따라올 수 있겠소. 일단 근로자들을 보내 주면 내 긍정적으로 검토하리다.”
 
  팔레비 왕은 한국에 대해 매우 호의적인 입장이었다.〉

 

  이동원 전 장관의 회고처럼 당시 이란에 한국인 운전기사들이 많이 나가 있었다는 게 흥미롭습니다. 파스퇴르유업과 민족사관고등학교 창립자인 고(故) 최명재 회장도 이란에서 운송업으로 부(富)를 일구었다고 하죠.
 
 
  前 이란 왕세자의 탄식
 
  당시는 아시아·아프리카·중남미 등 개발도상국들 사이에 ‘근대화 열풍’이 불던 시기였습니다. 이집트·파키스탄에서는 군부(軍部) 엘리트들이 중심이 되어 1950년대부터 ‘근대화 혁명’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5·16혁명도 그 영향을 받은 것이지요. 그리고 이런 ‘군부 중심 근대화 혁명’의 원조(元祖)는 튀르키예(터키)의 케말 아타튀르크였습니다.
 
  팔레비 국왕 치하의 이란도 근대화 혁명의 대열에 동참했습니다. 1963년 팔레비 국왕은 ‘백색혁명’을 선언하고, 농지개혁·제조업 육성 등 일련의 경제 개발 및 사회 개혁 프로젝트를 의욕적으로 추진했습니다. 1970년대 들어서 오일머니가 쏟아져 들어오면서 ‘백색혁명’은 더욱 탄력을 받았습니다.
 
  팔레비 국왕이 내세웠던 ‘백색혁명’은 이슬람 성직자 집단은 ‘흑색 반동(反動)’으로, 서구 문명을 ‘빛’으로 여기는 사고(思考)의 소산이었습니다. 그리고 1979년 이슬람 혁명은 ‘백색혁명’에 대한 ‘흑색 반동’의 반격이었습니다. 팔레비 왕정의 독재와 부패, 겉치레뿐인 근대화, 외세 의존이 그 빌미를 제공했습니다. 이슬람 성직자들뿐 아니라 ‘백색혁명’이라는 근대화 과정에서 소외된 도시 바자르(시장) 상인들, 독재정치에 신물을 내고 있던 자유주의자들과 좌파 세력들이 연대해서 왕정 타도 투쟁에 나섰습니다. 그들의 공세에 뿌리가 약했던 팔레비 왕정은, 그리고 이란의 근대화 혁명은 맥없이 좌초해 버렸습니다.
 
  ‘테헤란의 봄’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혁명의 과실(果實)은 그들 가운데 가장 세력화되어 있고, 권력의지가 강했으며, 무엇보다도 ‘전통’에 뿌리박고 있던 이슬람 성직자들이 독차지해 버렸습니다. 그 결과가 소위 이란 이슬람공화국이지요.
 
  중동·이슬람 연구의 세계적 석학인 버나드 루이스 전 프린스턴대 교수는 《중동의 역사》에서 “이슬람 혁명의 목적은 외세의 지배와 영향을 받던 시기에 이슬람 영토와 국민들에게 강요되었던 모든 이질적이고 이교도적인 불순물들을 쓸어 버리고, 신(神)이 만들어 주신 진정한 이슬람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슬람 혁명의 본질은 ‘전근대(前近代)로의 회귀’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그 후과(後果)는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그대로입니다.
 
  1979년 혁명으로 축출된 팔레비 국왕의 아들(왕세자)인 레자 팔레비는 1월 16일 미국 워싱턴 DC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란은 충분히 ‘다음의 한국’이 될 수 있었던 곳으로 그때(1979년 이란 혁명 시기)만 해도 이란의 국내총생산(GDP)은 한국의 다섯 배였다”면서 “오늘날의 이란은 북한이 되어 버렸다”고 탄식했습니다.
 
  ‘북한이 되어 버렸다’는 표현이 참 의미심장합니다. 그 표현에는 왕정 시절보다 훨씬 더 혹독한 정치적 압제와 국제적 고립에 처해 있는 이란의 처지가 응축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이란의 국민소득은 한국의 5분의 1, 1인당 국민소득은 한국의 9분의 1 수준입니다. 이동원 전 장관이 팔레비 국왕에게 한국 인력들을 더 받아 달라고 통사정하던 시절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대역전극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의 윗세대는 이동원 전 장관의 말처럼 ‘가족을 위해서라면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참고 견디며 성실히 땀 흘려’ 일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세계 4위 수준의 석유 매장량을 자랑하는 이란은 ‘이슬람 혁명’이라는 미몽(迷夢)에 빠져 국가의 자원과 인력과 시간을 허비했습니다.
 
 
  다시 못난 조상이 될 것인가
 
  하지만 지금 대한민국은 이러한 역전극에 마냥 기뻐하고만 있을 상황은 아닙니다. ‘이슬람 혁명’ 못지않은 미몽에 빠진 자들에게 나라가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 이전에, ‘가족을 위해서라면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참고 견디며 성실히 땀 흘려’ 일하는 정신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오히려 자식 세대가 먹고살 것을 미리 당겨서라도 제 배부터 불리고 보자는 사고방식이 팽배한 지 오래입니다. 기업이나 정부 모두 하나의 성취를 이룩하기가 무섭게 그 이후를 준비하기 위해 팔을 걷어붙이던 진취적 기풍도 사라졌습니다. 정치는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한사코 눈을 감고, 안보는 나 몰라라 하면서 권력 다툼에만 몰두하던 조선조 말 상황으로 후퇴했습니다. 한국도 이란이 그랬던 것처럼 ‘전근대로의 회귀’, 아니 ‘전근대로의 반동’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길한 생각이 듭니다.
 

  1970년대에 박정희 대통령은 기회 있을 때마다 근대화에 실패해 결국 나라가 망했던 구한말을 상기시키면서 “다시는 못난 조상이 되지 말자!”고 외쳤습니다. 그 외침에 국민들은 마음에서부터 호응했습니다. 그 덕분에 대한민국은 산업화에 성공했고, 이를 바탕으로 민주화까지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선진국 반열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지금 대한민국은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우리 세대는 현대사 이래 처음으로 자기가 물려받은 것보다 못한 나라를 자식들에게 물려주는 첫 번째 세대가 될 판입니다. 지금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한 세대 후에 우리 자손들은 남의 나라를 떠돌면서 “한국은 충분히 선진국이 될 수 있었던 곳”이라면서 잃어버린 기회를 한탄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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