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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의 시각

다시 듣는 1963년 대선 당시 朴正熙의 光州 유세 녹음 테이프

세월의 무게를 이겨낸 박정희 최고 연설

글 :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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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한 예언가’ 박정희의 61년 전 선거 연설은 어떻게 역사를 움직였나?

⊙ 선거를 ‘신진세력 vs 舊정치인’ 대결로 규정… ‘세대교체’ 넘어 ‘시대의 교체’ 제시
⊙ 유권자들에게 아부하지 않고 ‘후손을 위해 당대는 희생해야 한다’고 호소
⊙ “민족주의 바탕을 둔 진짜 민주주의와 사대주의 바탕을 둔 가짜 민주주의의 대결”
⊙ “일본 부인을 또 하나 가지고 있다면 혹 있을 수 있는 모략… 지금 같이 살고 있는 제 아내를 일본 사람이라 하면 대단히 억울한 소리”
⊙ “일본 사람만을 원망할 것이 아니라 왜 침략을 당했는지 반성해볼 시기가 왔다”
⊙ “가난 퇴치 없이는 나라의 독립도 개인의 자유도 없다”
⊙ “‘나를 대통령을 시켜주면 내일부터 당장 부자를 만들어주겠다’는 건 거짓말”
⊙ “장시간 지루한 얘기를 조용히 들어주신 데 감사합니다”
1963년 10월 14일 투표 전날 밤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
  
《조선일보》1963년 10월 4일 자 1면에 실린 전날의 박정희 후보 광주 유세 사진이다. 2만여 명의 청중이 현장을 찾았다. 당시 광주 유세가 박 후보의 지방 첫 유세였다.
대선(大選)이나 총선(總選) 때 후보들이 연설한 내용을 녹음해두었다가 선거가 끝난 뒤 상당한 세월이 흘러 그 진실성을 검증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대부분은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래서 61년 전 박정희(朴正熙) 공화당 후보(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가 선거 때 한 연설을 채점해보고 싶었다. 그는 세월의 무게를 견디어 냈을까?
 
  이런 생각을 한 것은 최근 입수한 광주(光州) 유세 녹음 테이프(40여 분) 때문이다. 대통령 취임 이전의 박정희 연설은 제대로 녹음, 녹화된 경우가 많지 않고 상태도 나쁘다. 15만6000표 차이로 한국의 진로(進路)를 결정했던 1963년 대통령 선거 기간 박정희 후보 비판에 가장 앞장섰던 《동아일보》는 그해 10월 3일 광주에서 있었던 민주공화당 후보의 유세를 이렇게 보도했다.
 
 
  요즘 언론보다 균형 잡힌 보도
 
1963년 10월 3일 광주서중 교정에서 열린 박정희 후보의 연설 영상을 캡처했다.
  〈민주공화당 대통령 후보 박정희씨는 3일 광주에서 첫 지방 유세 강연을 벌였다. “역사는 역행시킬 수 없다”는 연제로 정견을 밝힌 박 후보는 야당 후보들이 집중 공세를 벌이고 있는 이른바 사상 논쟁을 “낡은 ‘매카시즘’의 찌꺼기”라고 힐난하면서 새 국정은 그와 같은 폭로나 비난보다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의 지도체계 아래 정국(政局)이 우선 안정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그는 정국 안정을 위해서는 강력하고 양심적인 ‘리더십’이 확립돼야 하며 자립경제체제도 굳건히 세워져야 한다고 말했다. 박 후보는 “이번 선거가 한국 역사의 분수령이 될 것”이라고 전제, “우리의 당면 과제는 국민들의 단결·협동·근면·내핍 등으로 피땀을 흘려 우리 힘으로 스스로의 역사를 창조해야 한다”고 말하고 “이번 선거가 구악(舊惡) 집단과 민중 세력의 대결이다”라고 단정했다.
 
  박 후보는 또한 “과거의 선거는 여당이 야당을 구박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반대 현상이 일어나고 있으며 무책임하게 폭로 전술과 허위 사실로 인신공격을 하는 것이 법에 저촉되지만 잡아 가두면 선거 방해라고 하려는 심사(心思)를 알기 때문에 선거 기간 동안은 처벌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면 범법자는 반드시 법에 의해 엄단할 방침이다”고 말했다.〉
 
  이 기사문 자체가 요사이 언론 보도문보다 정확하고 균형 잡혀 있다. 광주서중(西中) 교정(校庭)에서 열린 이날 박 후보의 정견 발표장에는 사복 차림으로는 처음인 박씨를 보기 위해 약 2만 명의 청중이 모여들었다고 했다. 오전 11시10분부터 열린 이 유세에는 때마침 공휴일이어서 공무원과 회사원 차림의 청중이 두드러지게 눈에 띄었고 연설 도중 박수는 별로 없었으나 도중에 자리를 뜨는 이도 많지 않았다고 전했다.
 
  당시 46세의 박정희 후보 연설은 온몸에서 우러나오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매우 공격적인 내용이다. 여당 후보는 수세적이기 마련인데 그는 그 어떤 콤플렉스나 주저함도 없이 스무 살이 많은 민정당 윤보선(尹潽善) 후보를 수구(守舊) 세력으로 몰아붙인다. 박정희의 연설엔 ‘만들다’를 ‘맹글다’로 표현하는 대목이 많다. 국가 건설을 기치로 내건 군사정부의 투박한 말투이다. 박정희 연설은 언어 구사가 직설적이고 쉽다. 살이 없는 뼈대만 보이는 건축물이라고 할까.
 
 
  “이 자리는 모략중상하는 장소 아니다”
 
  〈친애하는 광주 시민 그리고 전라남도 도민 여러분, 어제는 8월 한가위 우리나라에 있어서 1년 중에 가장 즐거운 명절이었습니다. 작년 가을과 금년 봄 금년 여름에는 하늘이 우리에게 고된 시련을 많이 주었습니다만 다행히도 금년 가을에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으로써 우리 모든 국민들의 피땀 어린 노력의 결과로써 오곡백과가 풍년을 구가(謳歌)하는 흐뭇한 가을이 왔고 여러분들 어제 추석도 이러한 흐뭇한 기분에서 명절을 맞이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동안 여러 정당의 유세 기관들이 이곳을 방문해서 여러 가지 얘기를 여러분들에게 얘기하고 갔으리라고 전 알고 있습니다. 달콤한 소리, 남을 헐뜯는 소리, 남을 욕하는 소리, 모략중상 별의별 소리를 다 하고 지나간 것을 본인은 알고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시민 여러분들이 여전히 어느 정당이 와서 이런 소리를 했으니까 오늘 박정희 의장이 오면 거기 대해서 무슨 소리를 하는가 하는 상당히 호기심과 흥미를 느끼고 나왔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오늘 이 자리는 우리가 남을 서로 헐뜯고, 욕을 하고 모략중상을 하는 그런 장소는 절대 아닙니다.
 

  오늘 이 시점에 있어서 우리 모든 국민들은 다 같이 옷깃을 가다듬고 진실로 정직하게 민족적인 양심에 되돌아가서 어떻게 하면 앞으로 이 나라를 살기 좋은 나라로 재건할 수 있는가 하는 이런 문제를 우리 온 국민들이 다 같이 진지한 마음과 태도로써 모색을 하고 토론을 해야 될 그런 장소입니다.
 
  이번에 실시되는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는 그야말로 우리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대한 행사가 되겠습니다. 이번 선거야말로 우리 민족과 국가의 흥망 진퇴를 판가름하는 역사적인 고비가 될 것이고, 우리 한국 근대사에 있어서 결정적인 전환점이 될 것이고, 분수령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가난하게 살아왔습니다’
 
1963년 3월 28일 정국 현안을 논의하기 위해 모인 야당 지도자들. 좌로부터 김병로·윤보선·이인·이범석·김도연·박순천·김법린·정일형·전진한. 박정희는 이들을 ‘구정치인’으로 규정지었다. 사진=조선DB
  이 선거가 한국의 흥망과 진퇴를 판가름하는 전환점이 될 것이란 예언은 적중했다. 만약 구(舊)정치인 대표 윤보선 후보가 당선되었더라면 적어도 수출입국 전략에 기반한 고도 경제 성장 정책은 추진되기 어려웠을 것이고 역사는 다른 궤적을 그렸을 것이다. 박정희는 이 연설에서 윤보선이란 이름을 한 번도 쓰지 않는다. 윤보선으로 대표되는 ‘가식적(假飾的) 민주주의자들’을 ‘구정치인’이라 묶어 공격함으로써 선거의 의미를, ‘세대교체’를 넘어 ‘시대의 교체’로 삼으려 한다.
 
  이날 박정희 연설의 주제는 가난 극복이다. 그는 당시 한국인의 굴욕적 삶의 근원을 가난으로 본다.
 
  〈우리는 지난날 너무나 가난하게 살아왔습니다. 빈곤과 굴욕과 후진이란 것은 먼 옛날부터 우리의 조상들이 대대로 우리에게 물려준 악(惡)의 유산입니다. 그 빈곤이라는 굴레를 우리는 오늘 현재도 벗지 못하고 신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과거에 남과 같이 떳떳하게 자립형 국민으로서 잘살지 못했는가? 먼 옛날은 그만두고라도 지난 19세기 후반기부터 20세기 초입에 들었을 때 온 세계 선진 국가들이 과거의 그 나라가 지니고 있는 봉건성을 탈피를 하고 새로운 근대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 모든 국민들이 몸부림을 치고 있을 때 우리 한국 국민들은 무엇을 했는가. 그 당시의 위정자들이 무엇을 했는가.
 
  20세기 초입에 들어서 불행히도 일제(日帝) 식민지화는 우리의 근대화를 가로막았습니다. 이 역시 우리가 우리를 침략한 일본 사람만을 원망할 것이 아니라 왜 우리 국민들이 일제에 침략을 당하고 정복을 당하고 식민지가 되었는가 하는 것을 우리 다 같이 가슴에 손을 대고 과거 우리 민족이 걸어온 지난 행적을 우리가 반성해볼 시기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해방 이후 지난 18년 동안 2차 대전 후에 모든 후진국가들이 새로운 건설을 위해서 그들의 조국 근대화를 위해서 피땀을 흘리고 일을 하고 노력할 때 우리 대한민국은 무엇을 해왔는가? 허송세월을 해왔습니다.〉
 
 
  이승만도 ‘무능한 구정치 세력’으로 인식
 
  박정희는 상당히 비판적 역사관을 피력한 셈이다. 이승만(李承晩)의 건국, 호국, 한미동맹, 농지개혁, 교육개혁 등의 건설적 기여도 무시하고 지난 100년의 역사가 다 건설에 실패했다고 본다. 박정희는 이승만 정권의 무능과 부패에 분노하면서 쿠데타를 계획하다가 4·19를 맞았다. 이승만의 위대성을 인식하게 되는 것은 뒤의 일이고 1963년 현재로선 윤보선이나 이승만이나 다 같이 무능한 구정치 세력이란 생각을 갖고 있었다.
 
  1961년 박정희 소장이 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고 경제 개발에 착수하였을 때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93달러였다. 당시 경제 통계 대상이었던 103개국 중 87위로 최하위권이었다. 1위는 2926달러의 미국, 한국과 같은 해에 유엔과 미국의 도움으로 건국했던 이스라엘은 1587달러로 6위였다. 일본은 26위(559달러), 스페인은 29위(456달러), 싱가포르는 31위(453달러)였다. 아프리카 가봉이 40위(326달러), 수리남은 42위(303달러), 말레이시아 또한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보다 세 배가 많아 44위(281달러)였다. 아프리카 짐바브웨(당시에는 로디지아)도 당시엔 1인당 국민소득이 274달러로서 한국의 약 3배나 잘살았고 46위였다. 필리핀은 당시 한국인에겐 선망의 대상이었다. 한국보다 약 3배나 많은 268달러로서 49위였다. 남미의 과테말라도 250달러로 53위, 잠비아(60위, 191달러), 콩고(61위, 187달러), 파라과이(68위, 166달러)도 한국보다 훨씬 잘살았다.
 
  〈오늘날 세계는 달 로켓이 발사되고 달 세계의 개척에 대한 문제가 논의가 되고 우주를 개척해야겠다는 우주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은 지금도 저 시골에 들어가면 지금부터 수천 년 전 태고(太古) 원시 시절의 그 생활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새까만 어두운 밤에 호롱불, 등불 하나로 아직까지 원시적인 생활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과거에 못살았는가. 왜 우리는 현실에서도 이렇게 못사는가. 여기에는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5·16 직후 비서실에서 일하던 노태우(盧泰愚) 대위로부터 가난 실태를 보고받은 적이 있다. 강원도 경북 산간 지방의 화전민(火田民)들 중에는 겨울에 동물처럼 겨울잠을 자는 풍습이 있다는 것이었다. 최소한의 음식만 섭취하고 계속 잠만 자면서 체력 소모를 방지하던 사실상의 신석기(新石器) 시대의 삶이었다.
 
 
  국민을 공개 비판한 후보
 
  박정희는 이날도 국민들의 수준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표를 달라는 연설이 아니라 국민 훈계이다.
 
  〈국민 여러분, 우리가 과거에 걸어온 생활의 태도와 우리가 국민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자세가 올바르지 못했다는 것을 확실히 저는 이 자리에서 지적을 합니다. 남을 서로 헐뜯고 모략을 하고 중상(中傷)을 하고 권모술수를 능사로 알고 파벌과 분쟁을 일삼는 그러한 생활 태도, 그러한 국민의 자세 이것이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빈곤이라는 유산을 물려주었고 우리에게 굴욕이라는 유산을 물려준 것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우리가 새로운 근대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우리의 기본 방향은 무엇이겠는가. 이것은 파벌이나 분규나 서로 헐뜯고 모략하는 그러한 과거의 태도가 아니라 모든 국민들이 좀 더 굳게 단결하고 협동을 하고 근면하고 내핍(耐乏)을 하고 피땀을 흘려서 우리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건설할 수 있는 길이요, 이것만이 우리가 잘살 수 있는 길이라고 저는 확신을 합니다.〉
 
  이승만은 농담으로도 ‘한국인은 안 돼’라고 말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는 기독교적 인간관에 입각하여 한국인, 특히 양반이 아닌 보통사람들의 엄청난 잠재력을 발견하고 긍정한 사람이다. 이들에게 자유만 주면 활력을 갖게 되고 부국강병(富國强兵)으로 돌진한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독립정신》).
 
  언론인 출신 이승만이 힘을 북돋우는 교사였다면 진짜 교사 출신인 박정희는 따뜻한 인간관을 바탕으로 하되 국민을 질책하고 단련시키는 사람이었다. 위악적(僞惡的)이라고 할까. 두 사람의 교육 방법은 달랐지만 지향점은 같았다. 박정희는 역대 대통령 중 지금까지도 깨어지지 않는 두 개의 기록을 갖고 있는데 하나는 ‘민주주의는 신(神)이 아니다’면서 민주 우상 숭배를 거부한 점, 다른 하나는 국민들에 대한 공개 비판이다.
 
 
  ‘우리는 새로운 역사를 개척하는 新進 세력이다’
 
  1963년 대통령 선거 유세에서 박정희가 당당하고 공세적인 이유는 그의 역사관에서 나온다. 윤보선 세력을 민주주의로 포장된 역사적 퇴보(退步) 세력으로 규정하고 자신들을 역사의 진보 편에 선 신진(新進) 세력으로 확신한 것이다.
 
  더구나 당시 권력을 잡은 장교 집단은 남미형 정치 장교들이 아니고 20세기의 3대 전쟁 중 하나인 한국전에서 공산군과 싸워 살아남은 전투 집단이었다. 오늘의 이스라엘 지도부와 같은 패기와 자부심이 있었기에 ‘먹물 집단’에 눌릴 이유가 없었다. 당시 국군장교단의 약 10%는 미국 유학 경험자였다. 외교관들보다 더 많았다. 능력 면에서도 최강의 무장 집단이었다. 그런 조직을 대표하는 박정희의 자신감이 이날 연설을 관통한다.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에는 여러 개의 정당이 있습니다. 이러한 정당을 우리들이 대별(大別)해서 볼 때에는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5·16 혁명을 근본적으로 부정을 하고 모든 사태를 5·16 전의 무질서로 다시 환원(還元)을 하기 원하는 소위 구악에 젖은 구정치인들의 복고주의적인 정당, 또 하나는 5·16 혁명의 이념을 계승하고 이 과업을 계속 강력히 추진해서 이 혁명을 국민혁명으로 발전시켜서 이 나라를 하루속히 재건하고 건설하겠다는 의욕적인 정당, 이 두 가지 정당이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이번 선거는 단적으로 말씀드리면 구악에 젖은 집단과 이 나라의 새로운 역사와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겠다는 개척정신에 불타는 신진 세력, 이 두 세력의 대결이라고 저는 규정합니다.
 
  역사는 언제든지 앞으로 전진하는 법이지, 역사가 뒤로 역행(逆行)하는 법은 없습니다. 구정치인 집단은 전진하는 역사를 역행시키려고 발버둥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진시키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느 사회,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낡고 케케묵은 구질서가 허물어지고 구세대가 물러간 후에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고, 새로운 질서가 수립되려고 할 때에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사회적인 진통이 있는 법입니다.〉
 
 
  ‘4·19와 5·16은 형식상 다 불법’
 
  박정희는 구정치인들을 반(反)역사적 수구 세력으로 규정하는데 그 논리의 근거는 그들이 말하는 민주주의는 가짜라는 확신이었다. 일부 학자들이 박정희는 자신의 쿠데타가 가진 반민주성을 인식하고 이를 만회하기 위하여 경제 발전에 몰입했다는 상상력을 논문에 반영하기도 한다. 이 연설은 그런 해석이 사실과 동떨어짐을 알려준다. 박정희는 5·16과 4·19는 본질적으로 같다고 주장한다.
 
  〈구정치인들의 집단, 소위 말하는 복고주의적인 정당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지금에 와서 5·16 혁명이라는 것을 의식적으로 부정을 하고 불법이라고 규정하려 하고 있습니다. 5·16 직후에는 이것은 구국(救國)혁명이요, 구국 반공(反共)혁명이요, 이 혁명이야말로 공산화 직전에 조국을 구한 유일한 구국혁명이라고 극구 예찬하던 그들이 지금에 와서는 5·16 혁명은 불법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4·19 혁명은 의거라 하고 불법이라 하지 않습니다.
 
  4·19 혁명 역시 그들이 주장하는 형식만을 따를 것 같으면, 그때 자유당 정부 역시 대한민국의 당시 합헌적(合憲的)인 정부였습니다. 이것을 학생들이 뒤집어엎었습니다. 5·16 혁명 이전 민주당 정부 역시 국민들이 선출한 합헌적인 정부였지만 대한민국 국군들이 이것을 뒤집어엎었습니다.
 
  그렇게 볼 때는 그들이 5·16 혁명이나 4·19 혁명이나 다 같이 불법이라고 규정해야 할 텐데 왜 하필 5·16 혁명은 불법이고 4·19 혁명은 합법이냐 말입니다. 4·19 혁명은 순수한 학생들이 부정과 불의에 항거해서 자유당 정권을 뒤집어엎고 난 다음에 그 정권을 구정치인들에게 내어주었습니다. 그 이후 학생들의 피로써 쟁취한 그 정권을 민주당 정부가 과연 어떻게 관리를 하고 어떻게 다스려왔는지 여러분들이 잘 알고 계실 줄 압니다.
 
  5·16 혁명은 군인들이 혁명을 한 다음에 구정치인들에게 정권을 넘겨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4·19 혁명 때 학생들이 구정치인들에게 정권을 넘겨주니까 그 꼴을 만들어놓은 것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사람들에게 정권을 넘겨주면 또다시 옛날과 같은 혼란과 구악이 재발돼서 이 나라에 혁명이 다시 일어날 것을 염려해서 2년간이라는 제한된 시간 내에 우리 군인들이 이 나라의 기초적인 개혁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정권을 주지 않았습니다. 요는 5·16 혁명을 불법이라고 떠드는 그 친구들은 (군인들이) 정권을 내놓지 않았기 때문에 불평할 뿐입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혁명가의 헌법관’
 
박정희는 1963년 10월 3일 광주 연설에서 민주당의 무능을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5·16의 정당성을 역설했다. 사진=조선DB
  5·16의 불법성과 혁명성을 다 인정하는 박정희는 혁명가의 헌법관을 보여준다. 법리로 보면 5·16이나 4·19는 다 불법이지만 헌법 제정 권력자인 국민과 국군의 역사적 결단이므로 정당하다는 것이다. 1963년에 박정희가 쓴 《국가와 혁명과 나》엔 〈4·19 학생혁명은 표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타도하였지만 5·16 혁명은 민주당 정권이란 가면을 쓰고 망동하려는 내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뒤엎은 것이다〉는 대목이 있다. 이 책에서 박정희는 5·16을, 〈인내나 방관이란 허명(虛名)을 내세워 부패한 정권과 공모하는 것을 거부하고 내적(內敵)의 소탕을 위하여 출동한 작전상 이동에 불과하다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고 했다.
 
  그는 혁명을 불가피하게 만든 장면(張勉) 정부하의 혼란상을 폭로한다.
 
  〈그들은 말합니다. 혁명정부가 민주당 정권을 탈권(奪權)했다고, 정권을 뺏어갔다고… 5월 16일 새벽에 민주당 정부가 정신없이 자고 있다가 정권을 빼앗긴 건 사실입니다. 모든 국민들이 정성 어린 표 한 표 한 표를 모아서 그들을 선출해서 이 나라의 모든 운명까지 맡겨서 대권을 맡긴 그 정권을 왜 민주당 정부는 그 따위로 똑똑하게 못 했기 때문에 하룻밤새 정권을 빼앗겼습니까.
 
  아마 오늘 이 자리에도 민주당 출신, 현재에도 민주당에 적(籍)을 가진 분들이 계실지 모릅니다. 제가 이런 소리를 하면 불만을 갖고 계실지 모르지만 전 확실히 말씀드립니다.
 
  여러분들, 그 당시에 우리나라 사회상이 어땠습니까? 용공 세력이 활개치고 사회의 각계각층에 용공 세력이 뿌리를 박고 들어가고 깡패가 거리에서 제 세상처럼 날뛰고 있었고 데모는 밤낮없이 일어났습니다. 4·19 혁명이 일어난 뒤 민주당 정부가 넘어질 때까지 우리나라에 데모가 얼마나 일어났는지 여러분들 아십니까? 제가 알고 있는 통계로는 자그마치 1800여 회의 데모가 일어났습니다. 그 절반은 민주당 정부 때 일어났습니다.
 
  아까도 박준규(朴浚圭)씨가 말씀하셨지만 신성한 국회의사당이 점령을 당하고 언론기관이 점령을 당하고 그것뿐이겠습니까? 당시 돈 있는 사람들은 이래선 안 되겠다 잘못하다가는 공산당에게 그대로 먹히겠다 해서 재산을 슬금슬금 해외에 도피시켰습니다. 어떤 사람은 외국 선박과 계약을 해서 여차 하면 우리는 도망갈 것이다, 미리 돈을 낼 터이니 우리가 요구할 때 배를 어느 장소에 대기시켜달라는 계약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거짓말입니까? 여러분들이 거짓말이라고 하면 저는 증거를 대겠습니다.
 
  예전에 어떤 정당의 대통령 후보가 5월 16일 평화스러운 서울 거리에 왜 군인들이 들어와 혁명을 해서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었느냐는 소리를 했습니다. 그 당시에 배부르게 떳떳하게 먹고 편하게 지낸 그 사람들은 평화로운 서울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뜻있는 온 국민들은 이 국가가 공산화 직전에 있었던, 위기일발에 있었다는 위기의식을 누구나 다 인정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다행히도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탈권을 행한 사람들이, 대한민국 국군 장병들이었기 때문에 천만다행이었지, 만약 그 사람들 정신없이 잠자다가 이북 김일성이가 내려와 탈권을 했다면 오늘날 우리 신세가 어떻게 됐겠습니까? 우리의 운명이 어떻게 됐겠어요?〉
 
  정권의 무능(無能)을 동정해선 안 된다는 이야기이다. 고(故) 김성한(金聲翰) 선생이 소설 《7년 전쟁》 첫 장에 써놓았던 말이다. “무능한 통치자는 만참(萬斬)으로도 부족한 역사의 범죄자다.”
 
  박정희의 상대 윤보선은 당시 대통령으로서 미국 측의 한국군을 동원한 쿠데타 진압 제안을 거부, 쿠데타 성공을 도왔던 이였다.
 
 
  ‘나를 빨갱이라고 합니다’
 
  1963년 선거는 ‘박정희는 빨갱이인가’라는 이른바 사상논쟁으로 시끄러웠다. 5·16 혁명 공약의 첫 문장이 ‘반공을 국시(國是)로 하고’로 시작되고, 자신의 사상에 대한 미국의 의구심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수천 명의 좌경(左傾) 인사들을 잡아넣었으며, 집행을 미뤄왔던 소위 사상범들을 처형하도록 한 박정희였다. 《국제신보》 주필로서 그와 술친구였던 작가 이병주(李炳注)도 5·16 뒤 감옥에 갇혀 좌익 사형수들이 형장(刑場)으로 끌려가는 것을 지켜보는 신세가 되었고 이때의 감정이 그의 말년 소설에 반영되었다.
 
  〈못할 소리가 없습니다. 요즘 와서는 박 의장이 뺄갱이라고 합니다. 공산주의자라고 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정보에는 야당 당원들이 전국 방방곡곡 농촌을 돌아다니면서 이런 실정을 잘 모르는 무지한 농민들에게 ‘박 의장이 빨갱이래’ ‘그 사람 옛날 공산당이래’ 이런 식으로 유포를 하고 돌아다닙니다. 오늘 아침에 신문을 보니까 목포 어디는 지금 붙어 있는 대통령 후보 포스터의 박 의장 얼굴에 빨간 잉크를 전부 칠했습니다. 뺄갱이라 이겁니다.
 
  이것이 소위 민주주의는 자기들만이 알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자기들밖에 모른다고 주장하는 언필칭(言必稱) 민주주의의 신봉자라는 그자들이 하는 신사다운 행동입니까? 이거야말로 우리나라 속담에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놓으면 보따리 내놓으라고 달려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다 죽어가는 사람 건져주니 지금 와서는 적반하장(賊反荷杖) 격으로 우리를 빨갱이다…
 
  그들은 구태의연(舊態依然)합니다. 그들이 하는 방법을 지난 2년 동안 더군다나 금년 정월 정치 활동이 허용되고 난 뒤에 본인은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구정치인들의 모든 행동을 감시했습니다. 감시했다는 것은 어폐(語弊)가 있을지 모르지만 바라보고 왔습니다.
 
  그 사고방식에 있어서 그 생리에 있어서 하는 수법에 있어서 조금도 틀린 것이 없습니다. 구태의연합니다. 본인을 대단히 위험한 사상을 가진 불순분자라고 몰아가면서 규정을 합니다. 제가 알기에는 그분들이 정말 위험천만한 사람들입니다.
 
  왜? 여러분들, 박정희란 사람이 아무리 못나고 아무리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오늘 형식에 있어서 대한민국 혁명정부의 최고 책임자로 있고 내가 모든 실권을 쥐고 있는 나를 갖다가 아무 근거도 없이 터무니없이 저 사람이 빨갱이라고 생사람을 잡는 이런 수법을 쓰는 사람들이 만약에 이 다음에 그들이 정권을 잡았을 때 힘이 없고 말 못하는 백성들이 자기 비위에 거슬리고 미울 때는 전부 빨갱이라고 두드려 몰 것 아닙니까?〉
 
 
  ‘박정희 동정론’
 
  박정희 의장은 오히려 자신이 근거 없는 용공 조작의 희생자라고 주장한다. 박정희 소령이 남로당에 포섭되었다가 여순 14연대 반란 사건 이후 전개된 숙군(肅軍) 수사에 걸려 구속되었고, 수사에 협조한 덕분에 수사 책임자 백선엽(白善燁) 정보국장의 배려로 사형 구형, 무기징역 선고 후 형 집행정지를 받고 군복을 벗은 것은 사실인데 박정희는 자신이 피해자인 것처럼 역공(逆攻)했다.
 
  그럼에도 당시 민심은 박정희 편이었다. 그때 고교 2년생이던 기자는 농민과 서민층에 빨갱이로 몰려 고생한 이들이 너무 많아 윤보선 측의 이념 공세가 먹혀들지 않고 박정희 동정론으로 기우는 공기를 실감했다. 박정희도 이런 분위기를 감지, 윤보선 측이 이 문제를 공론화(公論化)하고 언론이 크게 보도하는 것이 불리하지 않다는 판단을 했다. 유세 때마다 박정희는 이 쟁점을 거론, 용공 조작으로 몰아갔다. 이른바 사상 논쟁은 그가 15만6000표 차로 이기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은 ‘특히 경상도에 빨갱이가 많다’는 민정당 한 당원의 투표일 직전 발언이었다.
 
  박정희는 윤보선 세력을 용공 조작 세력으로 몬 뒤 본격적으로 민주주의 논쟁을 시작한다. 그의 무기는 놀랍게도 양심의 자유, 언론의 자유였다.
 
 
  “‘박 의장 부인이 일본 여자’라는 얘기도…”
 
1963년 12월 17일 제3공화국 출범 경축 파티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부부. 대선 기간 중 야당은 ‘박정희의 부인은 일본 여자’라는 소문까지 퍼뜨렸다. 사진=조선DB
  〈또 그분들은 말하기를 대한민국에 있어서 민주주의는 우리만 알고 우리만이 민주주의를 충실히 신봉해왔고, 이행해왔고 지금 혁명정부나 군사정부는 전부 군사 독재고 파쇼고 무엇이고 박 의장은 군복을 벗고 나와도 그는 군인이고, 박 의장이 군복을 벗고 나와 집권을 하면 그것은 군정(軍政) 연장이다. 이렇게 궤변을 쓰고 돌아갑니다.
 
  여러분, 본인이 과문(寡聞)한 탓인지는 모르지만 본인이 배운 범위에 있어서, 민주주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생각이 다르고 견해가 다른 그런 사이에 있어서도 이것은 어디까지든지 이해를 시키고 설득을 시키고 서로 타협을 할 줄 알고 서로 참을 줄 알고 남을 관용할 줄 아는 이런 아량을 가진 것이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국민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태도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하는 행동은 무엇입니까? 자기 비위에 거슬리면 전부 빨갱이고, 공산당이고 저놈 일본 사람에게 돈을 얼마 받아먹고… 심지어 무슨 소리가 나옵니까? 박 의장 부인이 일본 여자다 이런 얘기도….
 
  이것도 한두 번 하는 게 아니라 계획적으로 돌아다니면서 유포하는 것을 경기도 어디 경찰이 잡아넣은 것을 검찰총장을 불러서 그따위 가둘 필요 없으니 석방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박 의장이 일본에 어떤 일본 부인을 또 하나 가지고 있다, 이렇게 모략을 쓴다면 이건 혹 있을 수 있는 모략이 되겠는데 지금 같이 살고 있는 제 아내를 일본 사람이라 하면 대단히 억울한 소리입니다.
 
  그래 이런 모략, 저런 모략, 서로 같이 정당 동지 간에 당을 만들다가 수틀리면 주먹이 날아가고 폭력이 날아가고 예전에 국민의당인가 무슨 당인가 할 때 서울에서 백주대로상에서 서부 활극을 연출하는 그런 방식이 그것이 그 사람들이 말하는 민주주의입니까? 민주주의가 주먹과 폭력을 가지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면 혁명정부는 지금까지의 모든 실력을 가지고 하루아침에 민주주의를 다 만들어놓을 수도 있겠습니다.〉
 
  박정희의 연설은 이어진다.
 
  〈그분들은 또한 이번 선거는 이건 부정선거다, 선거법이 잘못됐다, 이건 뭐 말도 못 하도록 입을 막는 벙어리 선거다. 이렇게 지금 선전하고 돌아다닙니다.
 
  여러분, 일국의 대통령 권한대행이요 최고회의 의장이란 사람을, 멀쩡한 사람을 갖다가 뺄갱이다, 공산당이다, 그 사람 부인이 어느 나라 사람이다, 어디서 돈을 받아먹었다. 별의별 소리 다 들어도 우리 혁명정부에서 그 사람 한 사람을 구속을 했습니까? 이러한 못 할 소리 다 하고도 여기 자유가 없고 입도 못 벌린 벙어리 선거다 그럽니다. 그 사람들은 그럼 입을 벌리라 하면 무슨 소릴 할 작정입니까?〉
 
 
  민족적 민주주의 vs 가식적 민주주의
 
  이어지는 박정희 연설은 한국 민주주의의 진로에 대하여 거대한 화두(話頭)를 던진다.
 
  〈최근에 신문에 여러 가지 논쟁이 된 문제 중에 그분들이 본인을 지칭을 해서 대단히 위험한 민족주의자요, 또 이질적인 민주주의자라고 이렇게 지금 욕을 하고 돌아다닙니다. 물론 민주주의의 본질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을지 모르지만 본인이 생각하고 있는 민주주의와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민주주의는 확실히 차이가 있다고 본인 자신도 느끼고 있습니다.
 
  본인이 말하는 민족주의라는 것은 17~18세기에 유행되던 소위 계파적이요, 고립적이요, 심지어 극단적으로 나아가서 국수주의 사상과 직결되는 이러한 위험한 민족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주변에는 이조(李朝) 500년 동안 뿌리 깊게 내려오던 사대주의 근성이 아직도 얼마든지 남아 있어요. 일제 40년 동안 뿌리 깊게 내려온 식민지주의 근성이 우리 생활 주변에는 아직도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근대적, 봉건적인 잔재(殘滓)를 완전히 일소를 하고 우리도 독립국가의 자주민으로서 떳떳이 자주의식과 민족의 주체의식을 똑바로 가지자 하는 것이 본인이 주장하는 민족주의입니다.(박수)
 
  본인이 주장하는 민주주의라는 것은 이와 같은 확고한 민족적 이념에 바탕한 그걸 갖다 놓고 민주주의를 키워 나가자 하는 것이고 구정치인들이 말하는 민주주의라는 것은 사대주의 근성을 바탕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본인은 그들이 주장하는 민주주의라는 것은 허수아비 껍데기 민주주의라고 합니다. 이것을 총칭해서 가식적인 민주주의라고 얘기했습니다. 왜 가식적이고 껍데기냐, 외국에서 수입한 민주주의라는 간판만, 껍데기만 앞에 갖다 놓고 그 뒷전에 앉아서 협잡하고 부정하고 권모술수 쓰고 모략중상하는 그것이 껍데기 가짜 민주주의 아니고 뭡니까?(박수)〉
 
 
  ‘가짜 민주주의’에 맞선 고독한 투사
 
  이는 박정희 연설의 가장 핵심적인 대목이고 1963년 선거의 역사적 의미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말이다. 자신의 민주주의를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것이라 규정하고 윤보선식 민주주의를 사대주의에 뿌리를 둔 가짜라고 몰아간다.
 
  이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와 윤보선 후보는 서구식 민주주의를 그대로 따를 것이냐, 한국적 현실에 맞게 주체적으로 수정할 것이냐를 두고 격론을 벌였는데 박정희 후보가 근소한 차이로 승리함으로써 이 논쟁은 박정희 통치 기간 내내 이어졌고 그 여진(餘震)은 지금도 한국 정치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박정희는 조선조, 식민지, 자유당, 민주당 정권을 다 사대주의로 묶고(이승만 또한 포함되었다.) 여기에 뿌리내린 민주주의를 가짜라고 하면서, 5·16 세력이야말로 공산주의뿐 아니라 미국과도 맞서가면서 민족적 관점에서 모든 굴욕의 근원인 가난을 물리치는 역사적 사명에 골몰하는 진짜 민주주의 세력이라고 해석했다.
 
  이 순간 박정희는 지나간 500년 동안 쌓여온 명분론적 사대주의에 도전하는 영웅적, 그래서 고독한 투사의 모습이다. 500년의 사대주의적 적폐를 2년간의 주체적 역량으로 어떻게 청산한단 말인가?
 
 
  ‘밀감도 탱자 된다’
 
  〈예전에 어떤 식물학자를 만났는데 그분이 이런 소리를 했습니다. 몇십 년 전에 일본에서 밀감나무를 가져와서 한국에 이식(移植)을 했다. 몇 년 후에 밀감이 열렸는데 이것이 밀감인가 하고 보니 밀감이 아니고 탱자가 열렸더라. 같은 종자를 일본이란 땅에서 한국 땅에 갖다가 이식할 것 같으면 여기는 기후적인 조건이 다르고 토질이 다르고 여러 가지 환경 여건이 다르기 때문에 밀감이 되지 않고 때에 따라서는 탱자가 될 수 있다, 이겁니다. 민주주의도 마찬가집니다. 외국에서 들어온 모든 주의나 사상이나 정치제도도 마찬가지라고 난 생각합니다.
 
  덮어놓고 외국에서 온 것은 다 좋은 것이고 우리 것은 다 나쁜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버리자 이겁니다. 외국의 좋은 제도는 우리에게 가져와서 우리의 역사적인 배경과 민족적 전통과 우리의 문화와 이러한 근본을 버리지 않는, 그러한 어떤 바탕 위에다 세워서 점차로 이것을 개선해나가 우리의 체질에 알맞게 해서 소화가 잘 되도록 하고, 그것이 나가서는 우리의 살이 되고 뼈가 되도록 하는 것이 본인이 주장하는 민주주의입니다. (박수)
 
  만약 그분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남을 모략중상하는 것을 능사로 알고 권모술수를 능사로 알고 수틀리면 주먹이 나가고 폭력이 난무하는 그런 민주주의가 진짜 그들이 생각하는 민주주의 또는 그들이 말하는 서구식 민주주의라면 우리나라에서 서구식 민주주의라는 것은 다시 한 번 재고(再考)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것이 진짜 서구식 민주주의라면 우리는 그러한 민주주의를 우리나라에 수입할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서구라파에 수출하자 이겁니다(박수). 아마 우리나라 것이 훨씬 품질이 좋을 거예요.〉
 
  이처럼 당당한 확신으로, 서구식 민주주의의 문제점과 그것을 사대주의적으로 추종할 때 생기는 부작용을 비판한 사람은 박정희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이게 그의 위대성이고 이게 그의 절대고독인 셈이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金載圭)는 부하들에게 박정희 시해 작전을 지시하고 만찬장으로 돌아가면서 ‘민주주의를 위하여’라고 중얼거렸다. 그가 말한 민주주의는 박정희의 유신체제를 이끈 ‘한국적 민주주의’가 아니라 박정희가 비판한 ‘사대적 민주주의’였다. 박정희는 그의 최측근을 설득하는 데도 실패한 것이다. 박정희의 마지막 날 그는 미국, 한국 내의 민주화 세력, 그리고 북한 정권에 의하여 3면이 포위된 상태였다.
 

  다시 박정희의 연설로 돌아가 보자.
 
  〈결론적으로 말씀해서 이러한 민주주의니 뭐니 뭐니 하는 것을, 실속 있게, 알맹이가 있는, 우리에게 알맞은 것을 우리가 선택을 해서 우리가 잘 키워나가자 하는 이러한 사고방식, 이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 이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따라서 본인은 구정치인들 그자들이 떠드는 소위 억지 궤변에 대해서는 무슨 소리를 하든지 저는 전적으로 불신을 합니다. 구정치인들이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난 믿지 않으려 합니다.
 
  왜, 그자들이 지금까지 해온 모든 그 행동, 지금까지 걸어온 그 행적, 오늘 현재 하고 있는 그 행보. 앞으로 새로이 수립되는 제3공화국에 있어서 이러한 구악에 젖은 구악(舊惡)의 보균자(保菌者)들이 또다시 정권을 잡았을 때 이 나라가 과연 우리가 원하는 새로운 근대적인 그런 국가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인가 없을 것인가 하는 것은, 여기에 대한 선택의 자유는 국가의 주인공이신 국민 여러분들에게 달려 있지만 제가 부탁하고 싶은 것은 이번만은 절대 여러분들이 과거와 같이 구정치인들에게 속아서는 안 된다 이것입니다.(박수)〉
 
 
  “경제 재건 없는 자유민주주의는 공염불”
 
  문제는 ‘구악의 보균자들’을 쓸어버릴 수 없는 헌법적 제약 속에서 국가 건설을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러면 앞으로 제3공화국에 있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되겠는가? 첫째는 정국의 안정을 이룩해야겠습니다. 둘째는 강력한 지도체제를 확립해야 되겠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의 자립경제를 기필코 달성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거창한 민족적인 과업을 제3공화국에 있어서 우리가 시행하기 위해서는 여기에는 꼭 필요한 조건이 있습니다. 이러한 민족적인 과업을 수행할 수 있는 훌륭한 일꾼을 국민 여러분들이 뽑아주셔야 되겠다 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제3공화국에 있어서 경제 재건이라는 것은 하나의 역사적인 문제요, 동시에 우리 국가 목표 중에 있어서도 가장 제1위적인 지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총력을 여기다 경주(傾注)해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추진하고 있는 제1차 5개년 계획은 이다음에 어느 정당이 정권을 잡든 이것은 기필코 완성을 해야 되겠고 또한 1차 5개년 계획이 완료하면 제2차, 제3차 5개년 계획을 계속 추진을 해서 이 나라의 자립경제 바탕을 기필코 우리 모든 민족의 집결된 역량으로 꼭 달성해야 되겠다는 것을 저는 제3공화국에 있어서 부탁을 하는 바입니다.
 
  만약 이와 같은 경제 재건 없이는 우리가 항시 부르짖는 민족의 자주요, 자립이요, 국가의 독립이요, 개인의 자유요, 자유민주주의요 하는 것은 전부 다 공염불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사회에 있어서 모든 비극이라든지 불행이라는 것은 그 대부분이 전부 우리가 못살고 가난한 여기에서 전부 기인한다는 것을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허리띠 졸라매야”
 
  그는 만악(萬惡)의 근원을 가난으로 파악한 다음에 자립경제를 건설,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간단명료하게 말한다. ‘나라의 독립과 개인의 자유도 경제적 자립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말은 위대한 각성이다. 이런 원리가 힘없는 지식인이 아니라 ‘무장한 예언가’의 입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경이롭다. 동양적 실용정치의 원조 관중(管仲)이 2600년 전 중국 전국(戰國)시대에 한 말 ‘창고가 차면 예절을 알고, 의식(衣食)이 족하면 영욕(榮辱)을 안다’는 뜻과 통한다. 그는 사실과 현실을 딛고 꿈을 이루려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으로 죽을 때까지 ‘4자(自)전략’을 밀고 나갔다. 자조(自助)정신-자립(自立)경제-자주(自主)국방-자유(自由)통일. 박정희의 대전략은 간결했고 일관성이 있었다.
 
  〈예전에 어떤 분이 와가지고 혁명정부 경제 정책이 잘못돼서 무슨 집단 자살이 있고 무엇이 있고 그런 소리를 했다고 그러는데 이게 다 가난해서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이 가난을 빨리 우리의 노력으로써 이것을 극복을 하자, 그러나 이 조상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이 가난이라는 것은 우리가 가만히 앉아서 해결할 수는 없는 문제입니다.
 
  여기에는 처음에도 제가 말씀드린 바와 마찬가지로 우리 모든 국민들이 앞으로 몇 년 후에 우리의 경제를 자립을 시키고 보다 잘살 수 있는 번영된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오늘은 우리가 먹을 것도 덜 먹고 입을 것도 덜 입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우리가 좀 더 땀을 흘리고 노력을 하고 근면해야 내일의 행복이 올 수 있고 우리의 자립경제를 가져올 수 있다 이겁니다.
 
  요즘에 일부 정당의 후보자들이 지방에 돌아다니면서 ‘여러분들 나를 대통령을 시켜주면 내일부터 당장 여러분들을 배부르고 부자를 만들어주겠다’ 이건 거짓말입니다. 지금 우리의 모든 주어진 여건이 하늘에서 별을 따오는 그런 재주가 없는 한 하루 이틀에 당장 우리를 잘 먹이고 부자를 만들 그런 방법은 없는 것입니다. 만약 진짜 그런 분이 있다면 본인은 오늘 이 자리에서 당장 대통령 후보라는 것을 사퇴하고 그분을, 전적으로 밥을 싸 들고 따라다니면서 지지를 하겠습니다.(박수)〉
 
 
  “‘당선만 되면 된다’는 생각은 국가 위신 망각한 것”
 
  요사이 선거 유세에서 박정희처럼 후손들을 위하여 당대(當代)는 희생하자고 했더라면 정치적 자살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61년 전 한국인들은 이 말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가 김재규의 총탄을 가슴에 맞고 등에서 피가 샘물처럼 콸콸 터져 나오고 있을 때 곁에 있던 두 여인에게 한 마지막 말 ‘난 괜찮아’는 박정희 세대의 입버릇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들께 한마디 부탁을 하고 내려갈까 합니다. 지금도 말씀드린 바와 마찬가지로 이번 우리의 선거에 대해서는 우리 국민뿐만 아니라 모든 자유 우방국가 국민들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이번에 대한민국 선거가 어떻게 진행이 되는가 하는 것을 모두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국내에도 현재 외국의 언론, 언론인, 신문기자, 외교관, 여러 사람들이 와서 이 선거를 전부 주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 국민의 정치적인 수준, 교양의 정도, 과연 민주주의를 할 수 있는 그런 민도(民度)에 도달한 국민인가 하는 것을 외국 사람들은 전부 보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무슨 소리를 하든지 나는 당선만 되면 된다, 정권만 잡으면 된다 하는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이건 국가의 위신이라든지 체면이라는 것은 전혀 망각한 그러한 행동이라고 규정짓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선거가 지금 종반전에 들어서 열을 띠고 흥분의 도가니에 싸여 있다 하더라도 이 나라의 주인공이신 국민 여러분들만은 절대 흥분에 휩쓸려 들어가서는 안 될 것이고 냉정을 잃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어제 추석이라 오늘은 모두 여러분들 성묘나 고향이나 모두 가야 될 시간인데 우리 당의 강연을 들어주시기 위해서 이렇게 많이 모여서 장시간 동안 지루한 얘기를 조용히 들어주신 데 대해서 심심한 감사의 뜻을 표하는 바입니다. 감사합니다.(박수)〉
 
 
  “정치와 경제를 한국화하겠다”
 
피터 현
  5대 대통령 선거를 취재하러 한국에 온 재미(在美)동포 언론인 피터 현은 그때 《뉴욕 헤럴드 트리뷴》 특파원이었다. 그는 윤보선 후보를 먼저 인터뷰했다. 피터 현의 집안과 윤보선 집안은 아는 사이였다. 피터 현은 장면 정부 시절 프랑스 주재 한국 대사관의 문정관(文政官)으로 일하다가 5·16 쿠데타가 터지자 ‘장면 정부 임명자’로 찍혀 면직되었다. 그는 박정희에 대한 악감정을 품고 왔다.
 
  피터 현은 윤보선을 만나 인터뷰하면서 대단히 실망했다. 국가 운영에 대한 비전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국가적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란 질문에 윤보선은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모든 게 잘될 것이다” “그런 것은 대통령에 당선된 뒤 생각해볼 문제이다”는 식으로 대답하여 기사로 쓸 내용이 별로 없었다. 그가 1963년 10월 6일 자 《뉴욕 헤럴드 트리뷴》에 쓴 선거 관련 기사에도 윤보선의 말은 한마디만 소개되어 있다.
 
  “나는 군사정부에 가장 강력하게 대항한 사람이고, 박정희 일파가 몰고 온 해악을 치유할 능력이 있으므로 출마했다.”
 
  피터 현은 박정희 후보가 대구에서 유세할 때 따라 내려가서 그와 인터뷰했다. 박 의장의 집권으로 피해를 보았던 피터 현은 국가 건설에 대하여 설명하는 진지성과 열정에 감복하여 선입견이 바뀌었다. 피터 현은 인터뷰를 정리하여 박정희의 기고문 형식으로 10월 13일 자 신문에 실었다. 이 기고문에서 박정희는 윤보선 후보 측이 매카시적 수법으로 자신을 공산주의자로 몰고 있다고 비판했다. 박정희는 ‘내가 당선되면 국가적인 양심과 자존심을 회복하겠다’면서 평생 그가 추구했던 핵심적인 주제를 언급한다.
 
  “나는 우리의 정치, 경제구조를 한국화(Koreanize)하겠다. 우리의 민주주의 제도는 국민들의 요구와 필요에 기초해야 한다. 우리가 필요한 소비재는 우리가 만들어낼 것이다.”
 
  박정희는 이어서 미국의 대한(對韓) 원조 정책과 막대한 원조를 탕진한 전 정권을 비판했다. 그는 이 대선의 의미를 구정치인과 공화당에 의해 대표되는 ‘새로운 피(New Blood)’의 대결이라고 했다.
 
  피터 현은 인터뷰를 하던 박정희가 종합제철소, 고속도로, 정유공장 등 중공업 건설에 대한 포부를 밝힐 때는 속으로 비웃었다고 한다. 아직 전란(戰亂)의 상처도 치유하지 못하는 나라에서 황당한 꿈을 꾸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피터 현은 그 11년 뒤 한국에 와서 다시 박정희를 인터뷰하게 되는데 이때 산업 시찰을 하면서 그 황당해 보이던 박정희의 꿈들이 현실로 나타난 것을 확인한다.
 
 
  CIA, “박정희, 反美 선동”
 
  투표일을 나흘 앞둔 10월 11일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남한 선거의 배경에 대한 특별보고서’를 작성해 워싱턴의 고위 관계자들에게 배포했다. 이 보고서의 도입부는 아마도 한국 상황에 정통한 전문가가 쓴 듯 아주 적확(的確)하게 본질을 요약했다.
 
  〈오늘날 한국 정치를 지배하는 분위기는 외세에 의한 지배에 대해 한국인들이 벌여온 끈질긴 저항과 유교적 가치관에 대한 오랜 집착에서 연유한 것이다. 유교적 가치관은 개인적·가족적 유대(紐帶)관계를 너무나 중시함으로써 국가 이익에 손상을 끼치는 성향을 갖고 있다. 이런 전통에 기인한 격렬한 민족적 자존심과 파당성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동양의 아일랜드인’으로 불리게끔 만들었다.
 
  1948년 이후 대부분의 정치적 쟁점은 본질적으로 권력을 잡은 세력과 권력을 갖지 못한 세력의 싸움이었고 정치적인 충성은 정당과 정책이 아니라 정치 지도자 개인에게 바쳐졌다. 10월 15일 대통령 선거와 11월 26일의 총선거도 이런 한국 정치의 법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 CIA 보고서는 대통령 후보들을 분석했다. 보고서는 “박정희는 민족주의자이다. 그는 이번 선거에서 반미(反美)감정을 충동질하고 있는데 이것은 중립(中立)노선을 함축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것은 미국 CIA가 그를 위험인물로 판단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CIA가 박정희의 이념성향을 표현할 때 동원한 ‘민족주의자’ ‘반미감정’ ‘중립노선’이란 단어는 당시 월남(남베트남) 대통령 고딘디엠에게도 똑같이 갖다 붙인 낙인(烙印)이기도 했다.
 
 
  월남과 한국의 엇갈린 운명
 
박정희의 대통령 당선을 알린 《조선일보》 1963년 10월 18일 자 1면이다. 사진=조선DB
  바로 이 무렵 미국 정부는 사이공에서 CIA를 동원하여 월남 군부(軍部) 내의 반(反)고딘디엠 장군들과 내통, 쿠데타 계획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 이 보고서가 작성된 20일 뒤(11월 1일) 월남에서 일어난 쿠데타로 민족주의자 고딘디엠과 그의 동생 고딘누는 살해된다. 고딘누는 정보기관장이었다. 쿠데타 이후 월남은 쿠데타의 악순환(惡循環)에 빠져들고 미국은 월남의 정치적 구심점을 상실하여 월남전을 대신 떠맡게 된다.
 
  고딘디엠 정권의 파수꾼이었던 고딘누는 월남 군부 안에 인맥을 구축하지 못하고 주류 세력과 충돌해 쿠데타를 당하고 말았지만, 김종필(金鍾泌)은 육사 8기 중심으로 군부를 통제하고 최고회의를 장악하여 박정희 권력을 수호·안정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차이점이 있다. 미국은 김종필을 박정희로부터 멀리 떼어놓으면 박정희의 권력 기반이 약화·순화되리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래서 김종필이 조기에 귀국하여 박정희의 대선(大選) 캠프에 합류하는 것을 기를 쓰고 막았다.
 
  그해 10월 17일 자 《조선일보》의 선거 결과 분석 기사 제목들은 이 선거의 의미를 잘 요약했다.
 
  〈‘앞으론 “강력정치” 어려울 듯’ ‘여야의 번지수를 완전히 뒤집은 셈’ ‘남과 북의 숨 막히던 표차’ ‘자랑해도 좋은 민주역량(民主力量)’ ‘다소 잡음 있었지만 처음 맛본 공명(公明)’〉
 
 
  ‘무장한 예언가’의 따뜻한 배려심
 
  운명적인 1963년 가을, 박정희는 미국의 압력을 배제하고, 15만6000표 차이라도 이겨 ‘조국 근대화’의 기수(旗手)로서 언론과 야당의 견제 속에서 새 역사를 열었고, 월남 정권은 미국이 기획한 쿠데타로 무너져 그 12년 뒤 패망(敗亡)하는 길을 걷게 된다. 고딘디엠 형제의 피살 소식에 화를 냈던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20일 뒤 댈러스에서 총을 맞고 죽었다. 동갑인 박정희는 16년을 더 살다가 한미 갈등이 최악으로 치닫는 가운데 부하 손에 죽었다.
 
  이런 맥락 속에서 61년 전 박정희의 육성을 들으니 셰익스피어 연극에 자주 등장하는 운명과 마주한 인간의 격정과 숨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박정희는 연설을 마치면서 청중에게 ‘장시간 동안 지루한 얘기를 조용히 들어주신 데 대해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남긴다. 이런 따뜻한 배려심이 18년 동안 한 사람도 죽이지 않고(정치적 암살이 없었다는 뜻) 천지개벽의 변화를 이룬 지도력의 핵심일 것이다. 그는 인류역사상 최악의 조건에서 최단기간에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의 업적을 남긴 지도자일 터인데 그의 몸과 마음과 정책과 비전에 깃든 아름다운 균형의 미학(美學)에 감탄한다. 이 모든 것을 담은 61년 전 연설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역사 드라마이고 무장한 예언가의 독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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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달기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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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kh5449@naver.com    (2024-04-01) 찬성 : 0   반대 : 0
조 선생께서는 박대통령 이야기 할 때만은 정신이 또렷해 보입니다. 이걸 그대로 한동훈한테 보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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