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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세계캠핑대회 유치한 장경우 총재

긴박했던 1992년 大選을 떠올리는 ‘캠핑 代父’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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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캠핑캐라바닝연맹 총재로 2024년 세계캠핑대회 유치… 국내 캠핑 동호인 400만명
⊙ 反YS를 표방한 TK와 정치노선 같이해… 민자당 탈당하고 가시밭길 걸어
⊙ 박태준이 청와대에서 盧泰愚 대통령 독대 후 대선 출마 뜻 접은 까닭은?
⊙ “김우중이 정말 대우를 헌신적으로 정리하고 대선판에 뛰어들었다면…”

張慶宇
1942년생, 고려대 경영학과 졸업, 서울대 행정대학원 수료 / 대우그룹 상무이사,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동서증권 대표, 제11·13·14대 국회의원, 국회 통신과학기술위원장, 민주당 부총재, 한나라당 당무 운영위원 역임. 現 한국캠핑캐라바닝연맹 총재, 헌정회 부회장
사진=조선일보DB
  코로나19로 ‘차박’ 캠핑이 대세다. 캠핑 인기 덕에 캠핑카도 부쩍 자주 눈에 띄고 차박용 텐트와 관련한 특허 출원도 증가하고 있단다.
 
  승용차에 달아매어 끌고 다니는 이동식 주택(일종의 ‘캠핑 트레일러’)을 카라반(Caravan)이라 하고 이 카라반과 함께하는 여행을 카라바닝(Caravanning)이라 부른다. 카라반은 역사적 맥락이 있는데 포장마차를 탄 유럽의 집시, 낙타를 탄 중동 대상(隊商)에서 유래한다. 말이나 낙타를 타고 초원이나 비단길을 가로지르는 여행은 상상만 해도 즐겁다.
 
  최근 한국캠핑캐라바닝연맹(이하 한국연맹)이 2024년 제94회 ‘세계캠핑캐라바닝대회’를 유치했다. 강원도 삼척, 경북 경주, 충남 부여에서 개최지 논의가 진행 중이다. 앞서 2002년 강원도 동해, 2008년 경기도 가평, 2015년 전북 완주에서 세계대회가 열렸었다. 그때는 국민 관심이 적었다면 지금은 다르다.
 
 
  2024년 제94회 세계캠핑대회 유치
 
2008년 경기도 가평에서 열린 세계캠핑대회 모습이다.
  한국연맹 장경우(張慶宇·79) 총재를 지난 10월 1일, 10월 27일 서울 여의도에서 만났다. 2009년 재·보궐(안산 상록구을) 선거를 끝으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으나 그는 여전히 현역이다. 연맹 설립(1994년) 이래 27년째 총재로 캠핑족(族)들을 호령하고 있다.
 
  그는 민정당 전국구로 11대 국회에서 정치를 시작했다. 12대 총선에서 공천을 받지 못했으나 13대 경기 안산·옹진 지역구에서 재기에 성공했다. 3당 합당으로 당적이 민자당으로 바뀐 뒤 1992년 14대 총선에서 다시 당선됐다.
 
  “현역 국회의원 시절, 일본에서 열린 세계캠핑대회에 우연히 참석했어요. 동료 유준상 의원의 권유로 갔는데 일본 천황이 6개 성(省) 장관을 거느리고 올 만큼 관심이 높더라고요. 캐빈하우스를 빌려 7박 8일 동안 머물렀어요. 캠핑, 카라반, 카라바닝의 묘미랄까, 신세계를 경험했죠.”
 
  귀국 후 한동안 잊고 지내다가 1993년 대전 엑스포를 앞두고 인연이 이어졌다. 유학파 출신의 몇몇 청년이 자비로 터를 닦아 엑스포 국제 전시구역에다 캠핑촌을 만들었다. ‘노마드’ 같은 캠핑족들이 세계에서 몰려들었다. 엑스포가 끝나고 캠핑촌을 철거하라는 강제 명령이 떨어지자 국회에 민원이 제기되었다. 당시 국회 청원심사소위원장이 장경우 의원이었다.
 

  민원을 처리하면서 얼결에 캠핑 세상에 발을 들여놨다. 1994년 직접 한국연맹을 설립했고 3년 뒤 정부 승인까지 받았다.
 
  “우리나라는 소위 놀이문화라는 게 없잖아요. 기껏 화투나 윷놀이, 그네 타고 널뛰는 정도입니다. 캠핑이 서양서 건너온 것이지만 캠핑문화, 여가문화를 만들자고 생각했어요. 학자들을 불러 세미나를 열고 심포지엄도 하면서 한국연맹의 터전을 닦았죠.”
 
  장 총재는 학창 시절 경기고 기계체조 선수로 전국체전에 출전할 만큼 공부도 운동도 잘했다. 그런 경험과 안목이 캠핑에 눈을 뜨게 만들었다고 한다.
 
  “한일월드컵이 열렸던 2002년 세계캠핑대회를 국내에 유치해 당시 김진선 강원도지사를 찾아갔습니다. 장소를 추천해달라고 부탁하니 동해 망상을 권하더군요. 내심 설악산 인근에 캠핑촌을 조성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었거든요. 알고 봤더니 김 지사의 고향이 동해 망상이었어요. 그곳에 오토캠핑장이 세워지면서 동해가 국내 최초의 카라반 사이트가 됐죠.”
 
 
  동해가 국내 최초의 카라반 사이트가 된 이유
 
장경우 총재가 세계캠핑캐라바닝 연맹으로부터 받은 감사패와 트로피들을 보여주고 있다.
  오토캠핑은 오토모빌(Automobile·자동차)과 캠핑(Camping)의 합성어. 자동차에 텐트와 취사도구를 싣고 자연 속에서 하는 캠핑을 말한다.
 
  동해 망상 오토캠핑장은 지난 2019년 속초 산불로 큰 피해를 입었다. 다행히 행안부 교부금(380억원)을 지원받아 대대적인 보수 작업이 진행 중이다. 장 총재가 당시 진영 장관(재임 2019년 4월~2020년 12월)을 찾아가 설득했다고 한다. 올해 말 완전 개장을 앞두고 있다.
 
  “전국에 캠핑장이 2612개(2021년 5월 현재)나 돼요. 국내 캠핑 동호인 수는 400만명, 해마다 30%씩 성장하는 캠핑 산업 시장은 2조6000억원 규모입니다. 우리 연맹 회원은 1만명인데 앞으로 회원 배가 운동을 하려 합니다.
 
  국제대회를 열 만큼의 규모를 갖춘 캠핑장은 50~60개 정도? 대개 지자체가 운영하는 곳이죠. 산이나 계곡의 사설 캠핑장은 영세해서 사고 위험이 있어요. 그런 곳에 연맹이 파견하는 ‘안전지도사’를 두거나 캠핑장 4~5곳을 ‘안전지도사’가 순회하는 방안을 정부 측과 협의하고 있어요.”
 
  ― 2024년 세계캠핑대회 후보지로 강원도 삼척, 경북 경주, 충남 부여가 거론되고 있어요.
 
  “연맹에서 경쟁 입찰을 부치려 해요. 현재로선 아름다운 해안선과 해수욕장을 두루 갖춘 삼척이 적극적이지만 ‘경주엑스포대공원’이라는 입지 매력을 갖춘 경주, 천혜의 백마강·낙화암·부소산성이 있는 부여도 캠핑 장소로 손색이 없죠. 내년 5월까지 확정하려 합니다.”
 
  해마다 전 세계를 돌며 ‘캠핑계의 올림픽’을 여는 ‘세계캠핑캐라바닝연맹(FICC)’은 회원국이 40개국이며 회원 수가 600만명이다. 각국의 서로 다른 자연을 체험하며 국경과 언어, 인종을 초월한 풍습과 문화를 즐기는데 아시아에서는 한국을 포함해 중국, 일본, 타이완 등 4개국이 가입돼 있다.
 
  기자가 찾아간 한국연맹 사무실은 서울 여의도 극동VIP 빌딩 3층에 위치하고 있다. 이 빌딩 8층에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당시 이재명 후보가 경선 캠프를 차렸었다. 지난 4·7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는 오세훈 서울시장의 캠프가 있었다.
 
 
  극동VIP 빌딩, 민국당, 虛舟, 이회창
 
  ― 이회창(李會昌)씨에게 팽(烹)당한 허주(虛舟) 김윤환(金潤煥·1932~2003년)이 16대 국회를 앞두고 창당한 민국당이 이 빌딩에 입주했었죠.
 
  “그를 대선 후보로 만든 게 허주 아닙니까? 제가 내막을 아는데 허주가 한(恨)이 맺혔어요. 몸져눕게 됐을 때 제가 이회창씨 측에다 ‘생전에 찾아가면 좋겠다’고 전한 일이 있어요.
 
  들은 얘기로 허주 병문안을 이회창씨가 갔대요. 누워 있던 허주가 병석에서 벌떡 일어나더랍니다. 그를 보더니 ‘왜 왔냐. 사과하러 왔냐’고 물었답니다. 그러곤 ‘사과한 거지?’라며 혼잣말을 하듯 묻고 누웠는데 이후 눈을 못 떴대요. 그 일이 있고 얼마 후에 눈을 감았어요.
 
  저는 해마다 경북 선산의 허주 묘를 찾아갑니다. 워낙 친했으니까요. 그 양반, 민자당 원내총무 할 때 제가 수석부총무를 했어요.”
 
  ― 허주와 인연이 깊군요.
 
  “풍운아 같은 분인데 제가 부총무 시절, (총무인) 허주가 섭섭지 않을 정도로 돈을 줬어요. 야당 부총무들에게 술대접하라는 거예요. 이 양반은 돈에 대해… 뭐랄까, 쩨쩨한 게 없어. 그냥 듬뿍듬뿍 줘. 그걸로 통일민주당, 평민당, 공화당의 수석부총무들과 자주 어울렸어요. 4당 체제, 소위 말하는 13대 국회(1988~1992년), 여소야대 시절 말이죠.”
 
 
  5공 청산과 3당 합당
 
정치인 장경우 시절의 선거 포스터.
  노태우 정부가 들어선 1988년 13대 4·26총선에서 집권당인 민정당은 전체 299석 중 125석(41.8%)으로 과반에 훨씬 못 미쳤다. 초유의 여소야대를 한국 정치가 처음 겪다 보니 국회 개원과 함께 폭풍이 몰아쳤다. 광주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 삼청교육대, 언론통폐합, 일해재단 자금 조성, 비자금 의혹 등 5공 비리 의혹이 야당 공세와 함께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장 총재의 말이다.
 
  “그때 허주가 그러더라고요. ‘어쩔 수 없다. 야당의 5·18 청문회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다’고요. 지금도 기억나는 게 특위(特委) 명칭을 두고 여야가 옥신각신 기(氣)싸움이 대단했어요.
 
  야당은 ‘5공 비리 조사특위’라는 명칭을 고집했는데 당시 청와대나 민정당은 ‘왜 5공화국 전체가 다 비리냐?’고 맞섰습니다. 극적으로 합의한 게 ‘제5공화국에 있어서의 정치권력형 비리조사 특위’입니다. 워낙 기니까 ‘5공 비리 특위’로 줄여 불렀지만 어쨌든 공식 명칭에 ‘있어서의’가 포함됐어요.”
 
  청문회 정국은 1988년 말부터 1989년 말까지 1년간 계속 이어졌다. 정확한 사실을 입증하기보다는 소문만 듣고 근거 없이 고발하거나 무고(誣告)하는 사례가 속출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 내외를 구속하라”는 시위도 여전했다. 여권 내부에서 여소야대로는 정국을 이끌어가기 어렵다는 현실론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 3당 합당이 당시 불가피했나요.
 
  “사실 정계 개편 논의는 총선 직후, 그러니까 여소야대 국회가 막 출범했을 당시 여기저기서 한창 거론되던 문제였어요. 어쩌면 정계 개편의 전제 조건이 ‘5공 청산’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5공 청문회가 1989년 12월 31일 전두환 전 대통령의 국회 증언으로 일단락되기 무섭게 곧장 ‘3당 합당’을 선언했잖아요.”
 
  ― 3당 합당 당시 알려지지 않은 비화가 있을까요.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TK(대구·경북) 주류 쪽에서 ‘우리가 너무 오래 정권을 잡았으니 한 번쯤은 PK(부산·경남 중심의 YS 계보)에게 주자. PK 정치인들을 겪어보니 별 볼 일 없더라. 다음 정권 때 다시 권력을 TK가 가져오자’고 결론 내린 겁니다.
 
  그런 내부 결론에 주도적 역할을 한 이가 허주, 법무장관을 지낸 정해창씨 등이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골수TK’였죠.”
 
 
  박태준의 대선 출마 포기
 
  3당 합당으로 창당한 민자당의 대선 후보로 김영삼(이하 YS)이 선출된 1992년은 장경우 의원에게 날벼락 같은 정치 여정을 안겼다. 민정계의 중진인 그는 YS를 택하기보다 반(反)YS를 표방한 TK 측과 정치노선을 같이했다.
 
  “어느 날, 당시 민자당 최고위원이던 박태준(이하 TJ)씨에게서 만나자는 전갈이 왔어요. 그때가 대선 후보를 선출하는 5·19 전당대회를 한 달여 앞둔 시점이었습니다.
 
  “북아현동의 TJ 자댁에 가니 김현욱·심명보·이종찬·이한동 의원 등이 먼저 와 있더군요. TJ가 민정계를 대표해 대선 후보로 나서겠다는 겁니다. 공식적으로 출마 의사를 밝힌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죠.
 
  다만 출마 허락을 받으려고 노태우 대통령에게 면담을 요청해도 청와대에서 면담시간을 안 준다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말했어요. ‘직접 돌파하는 수밖에 없다. 곧 한일의원연맹의 일본 측 회장인 다케시타 노보루가 방한한다. TJ가 한국 측 의원연맹 회장이니 청와대 접견이 예정돼 있다. 그 자리에서 담판을 지으라’고 권했어요.”
 

  TJ는 그의 조언을 따랐고 노 대통령과 독대할 수 있었다고 한다.
 
  “TJ가 노 대통령에게 ‘민정계 대선 후보로 나서겠다. 윤허해달라’고 하니 대통령은 아무 말 없이 당시 이상연 안기부장을 들어오게 하더랍니다. 짐작건대 이런 상황을 짐작했던 것이죠. 안기부장이 TJ에 대한 존안자료를 가지고 오더랍니다. 이후 TJ는 빈손으로 청와대를 나왔고 출마도 접고 말았습니다.”
 
  대선 후보를 선출하는 전당대회는 그해 5월 19일로 잡혔다. 공화계를 이끌던 김종필(이하 JP)은 대선 불출마 의사를 밝힌 상태였다. 당시 민정계는 TJ의 주관하에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매일 구수회의를 열었다고 한다. 이종찬·이한동·박철언·박준병·양창식·심명보 등 민정계 중진이라 할 의원들은 다 모이는 회의였다. 화두는 누구를 민정계 경선 주자로 내세우느냐였다.
 
 
  이종찬의 大權 도전
 
  “TJ는 ‘YS로는 김대중(DJ)을 이길 수 없다. (민정계) 후보를 추천하면 돕겠다’는 의견을 피력했어요. 그분은 YS가 대통령이 되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철저했던 것 같아요. 참석자들은 눈치를 보더니 슬금슬금 피하더군요.
 
  그때 이종찬씨가 ‘출마하겠다’고 밝힌 것입니다. 그래서 민정계 뿌리가 그에게 옮겨가게 됐고 한때 그 세력이 커졌습니다.”
 
  ‘이종찬 경선 대책위’가 꾸려졌는데 선대위원장에 채문식(전 국회의장), 명예위원장에 TJ, 선대본부장에 심명보 의원이 임명됐다. 장경우 의원은 경선 실무를 총괄하는 선대부본부장을 맡았다.
 
  “5·19 전당대회를 앞두고 민정계 의원들을 접촉하니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꺼려 하는 겁니다. 쉽지 않겠구나 생각했죠.
 
  한번은 부산에 대의원들을 만나러 내려갔어요. 설명회장에 낯모르는 사람밖에 없어요. 제가 단상에 올라가 ‘대의원 아닌 사람은 설명회장에 들어올 수 없으니, 양해해준다면 신분 확인을 하겠다’고 말하자마자 우르르 자리를 뜨는 겁니다.”
 
  민자당 지도부가 ‘대의원 자체를 못 만나게 막는다’는 민정계의 반발에 겨우 짜낸 묘안이 ‘가짜 대의원’ 동원이었던 셈이다.
 
  “우리는 화가 나서 ‘이런 식이라면 중대 결심을 하겠다’는 성명서를 냈어요.”
 
  ‘이종찬 경선 대책위’는 곧장 서울로 올라와 공정경선을 보장해달라며 5월 19일 전당대회 전야제 개최, 경선 당일 정견발표 보장, (정견발표 관련) 보충질의 토론답변 보장 등 3가지를 요구했다.
 
  “마침 노 대통령에게서 이종찬씨를 만나고 싶다는 전갈이 왔어요. 이때다 싶었죠. 대통령과 담판을 짓되 뜻을 관철시키지 못하면 경선 포기도 불사한다는 뜻을 강하게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경선 포기와 脫黨
 
1999년 3월 28일 시흥 보선에 출마한 한나라당 장경우 후보를 지원하기 위해 이회창 총재와 박근혜 부총재가 지원유세를 가졌다. 사진=조선일보DB
  그때가 전대를 열흘 앞둔 시점이었다. ‘이종찬 경선 대책위’는 그야말로 좌불안석이었다. 그날 밤 11시가 가까운 시각이었다. 청와대에서 나온 이종찬의 표정은 좋은 것도 아니요, 나쁜 것도 아닌, 그 특유의 표정이었다고 한다.
 
  노 대통령의 입장은 “이춘구 사무총장이 당 선거관리 책임자이니 이 총장에게 건의해보겠다”는 것이었다. 정작 이춘구 총장은 “경선 당일 정견발표는 후보자끼리 합의가 우선인데 YS 측이 반대하니 어쩔 수 없다”고 난색을 표했다.
 
  “아무것도 안 된 거지. 그래서 일주일 남겨두고 경선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후보도 없는 그 경선에서 이종찬씨 표가 34.3%가 나왔어요. 차라리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갔더라면 40%는 나왔지 않았을까 하는 의견도 있습니다. YS에 이어 당내 2인자 자리를 굳힐 수 있으리란 전망도 하더군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후일 박철언씨가 감옥에 가고, 정주영씨와 현대가 수많은 제재를 받았거든요. YS의 성격으로 유추해볼 때 무책임한 전망일 뿐입니다.”
 
  경선을 포기한 이종찬은 결국 당으로 복귀할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YS가 이종찬의 선거캠프를 예고 없이 찾아왔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진 후 썰물 빠지듯 돌아갔다고 한다.
 
  “그때 캠프가 지금의 광화문 동화면세점 자리에 있었어요. 그곳에 느닷없이 YS가 나타난 거야. 기자들 왕창 데리고. 그 자리에 저도 있었고 김현욱·오유방 의원이 있었어요. YS는 ‘같이 당에 들어가서 정권을 창출하자’ 식의 화해 모습을 보인 거지. 쇼맨십이야. 기자들은 ‘이종찬이 경선 결과에 승복했다’고 써버렸어. 이종찬은 그걸 인내하지 못해서 탈당한 거야.”
 
  그해 8월 이종찬은 민자당을 탈당했다.
 
 
  YS의 만류와 새한국당 창당
 
1992년 10월 14일 민자당을 탈당, 신당 참여를 선언한 5명의 의원들. 왼쪽부터 장경우·김용환·이자헌·유수호·박철언 의원이다. 사진=조선일보DB
  9월 초가 되었다. TJ의 성북동 별장에 반YS 민정계 의원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결론은 두 가지였다. ‘YS는 안 된다’ ‘탈당밖에 없다’였다. 원내 교섭단체 의석인 20석은 물론 35석 안팎의 국회의원이 참여하는 신당 창당 뜻도 세웠다.
 
  “한번은 YS가 저보고 만나자고 그래요. 서울 남산 하이얏트 호텔에서 단둘이 만났어요. ‘장 의원, 당신은 장점도 많은데 주류에서 정치를 해야지, 비주류는 안 된다’고 충고를 하는 겁니다. ‘앞으로 장관도 할 수 있고 얼마든지 클 수 있다. 자유당 때 똑똑한 사람들도 비주류 쪽에서 정치하다가 다 도태되지 않았느냐’는 것이었죠. 그때 (제가) 당 사무 부총장이고 조직을 다 관할하고 있었으니 YS로선 데려가고 싶었던 거야.”
 
  그해 10월 14일 장경우와 박철언·이자헌·김용환·유수호 의원이 탈당을 선언했다. 이틀 후 채문식·윤길중·오유방·이영일·김현욱 의원도 당을 떠났다. 원외를 포함해 탈당 수는 30여 명 정도였다.
 
  “당시 탈당은 주류가 아니면 발붙일 수 없는 당내 분위기, 당 운영의 비민주성, 1인 보스 정치와 지역할거 정치의 한계, 양김(兩金) 정치의 한계 등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었죠. 저에게는 곧 가시밭길이었어요.”
 
  당시 민정계 탈당 인사들이 만든 정당이 ‘새한국당’이었다. 당 대표 최고위원은 채문식, 고문은 윤길중이 추대됐다. 최고위원은 이종찬·박철언·김용환·이동진·이자헌, 당 사무총장은 장경우였다.
 
  당시 대선(1992년 12월 18일)이 임박했지만, 새한국당은 대선 후보로 고려대 총장을 역임한 김준엽과 전 국무총리 강영훈을 저울질했다. 김준엽은 초반에 고사했고, 강영훈은 할 듯한 스탠스를 풍겼다고 한다.
 
  “강영훈씨는 군 출신이고 강직하며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한 분인데 처음에는 후보로 나설 뜻을 비쳤다가 청와대에 다녀온 뒤 소식이 끊겼어요.”
 
 
  만약 김우중 회장이 출마했다면…
 
  그 뒤 김용환 의원이 ‘진짜 괜찮은 후보가 있다’며 뜻밖에도 대우 김우중 회장을 추천했다.
 
  “깜짝 놀랐죠. ‘강영훈처럼 중도에 포기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하니 ‘걱정하지 말라’는 겁니다. 저는 이렇게 제안했어요.
 
  ‘김우중이 가진 모든 주식을 처분하고 대우는 전문경영인에게 넘겨라. 대신 그 돈으로 ‘마쓰시타 정경숙(政經塾)’ 같은 정치학교를 만들자고 제안했어요.”
 
  의외로 김 회장의 반응이 적극적이었고 어느 정도 내락을 받았다고 한다.
 
  “우리는 극비리에 선거캠프를 만들었고 김 회장과 수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만약 성사됐다면 새한국당 대선 후보는 이종찬이 아닌 김우중이었죠.
 
  얼마 못 가 소문이 다 났어요. 아니나 다를까 경기고 동문인 대우의 유기범 사장에게 전화가 왔어요. ‘우리 회장 어떻게 되느냐’고 말이죠. 회사 자금줄이 다 끊긴다고 난리가 났어요. 결국 김우중 회장이 광주 기아차 공장에 갔다가 출마 포기를 선언하고 말았어요. ‘김우중 대권’이 사라진 거지.
 
  만약 그때 우리의 포부대로 대우를 헌신적으로 정리하고 대선판에 뛰어들었더라면 한국 정치는 어떻게 됐을까요?”
 
  지금도 장경우 총재는 그 긴박했던 1992년을 가끔 뒤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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